고요한 방에 진동 소리가 울렸다. 어제 늦게 잠든 하해가 깨기라도 할까, 도환이 하해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빠져나와 방 밖으로 나갔다.

 

“실장님? 무슨 일이세요? 한길이는요?”

“응, 어머님이 편찮으시다고 짧게 휴가 냈어. 금방 돌아온다는데 모르지.”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괜찮아 보였는데.”

“그러니까 말이다. 걔도 속이 말이 아닌가 봐.”

“그래요? 그러면 실장님이 바쁘시겠네요.”

“내 정신 좀 봐. 새 드라마 대본 들어왔거든. 이게 꽤 괜찮더라고. 가져다주려고 연락했지.”

 

박 실장에게 걸려 온 전화였다. 담당 매니저인 한길은 뭐하고 박 실장에게 연락이 오나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으니 박 실장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더 이상 한길의 가정사를 알고 싶지 않기도 하고, 뒤에서 남 이야기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 말을 돌리니 박 실장도 아차 싶었는지 눈치껏 본론으로 돌아갔다.

 

“그래요? 제가 가지러 갈게요.”

“오늘 스케줄 없는데 쉬지 왜.”

“어차피 나가야 돼요. 가는 길에 들를게요.”

“그래, 그러면 회사에서 보자. 조심해서 와.”

“네, 끊을게요.”

 

전화를 끊은 도환이 고민하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이 대표만큼 가깝게 지낸 사이는 아니었지만, 한길만큼 도환을 잘 따르고 잘 맞춰주는 매니저는 찾기 힘들었다.

 

“직접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가 있겠지.”

 

괜찮냐는 문자라도 보내볼까, 고민하던 도환이 휴대폰을 내려놓고 욕실로 향했다.

 

“오늘 쉰다며. 어디 가?”

“일어났어? 잠깐 회사에 받을 게 있어서.”

 

씻고 나오자 언제 일어났는지 하해가 비몽사몽한 모습으로 도환을 맞이했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했을 상황이 너무나도 감격스러워 도환이 하해에게 다가가 입을 맞췄다.

 

“뭐야, 갑자기?”

“너무 좋아서.”

“미, 민망하지도 않나. 낯부끄럽게.”

“금방 다녀올게. 뭐 필요한 거 없어?”

“음, 딱히?”

“그래도 생각나면 문자 해. 다녀올게.”

 

하해와 대화를 나누며 나갈 채비를 마친 도환이 현관 앞에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하해에게 마지막으로 입을 맞추고 문밖으로 나섰다. 하해에게 배웅받는 출근길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욱 설렜고, 기분 좋아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도환이 왔구나!”

 

오랜만에 방문한 회사에는 처음 보는 얼굴이 많았다. 도환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며 인사하는 사람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네자, 뒤에서 박 실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박 실장님 잘 지내셨어요?”

“나야 항상 똑같지. 자, 여기는 한길이 대신 고생해 줄 송 매니저. 인사해.”

“안녕하세요! 도환 씨 팬이에요! 잘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권도환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도환이 사람 좋게 웃으며 악수를 청하자, 매니저가 감격스러워하며 조심스럽게 도환의 손을 맞잡았다.

 

“그래서, 대본은 어디에 있어요?”

“여기 있습니다.”

 

회의실로 들어가 송 매니저에게서 대본을 건네받은 도환이 빠르게 대본을 훑기 시작했다. 바다에서 실종되는 주인공의 애인 역할이었고 나중에 다시 만나는 장면이 있었지만, 드라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역할은 아니었다.

 

“선원 역할이네요. 나쁘지 않은데요?”

“그래, 나쁘지 않아. 그런데, 고증에 신경 쓰는 감독이랑 작가가 만났잖아. 그게 문제야.”

“상관없, 아.”

 

도환이 바다를 싫어한다는 걸 아는 박 실장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제 도환에게 바다는 이제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좋다고 인터뷰까지 했으니까. 문제는 하해였다.

촬영에 들어가면 외박하는 일이 잦을 텐데 그동안 하해를 집에 혼자 두는 게 걱정이었다. 집에 혼자 있으면 외롭고, 하해가 자신이 없을 때 뭘 할지 모르니까. 그렇다고 촬영장에 데려가자니 그것도 문제였다. 배경상 바다에 갈 게 뻔했으니까.

 

“생각해 볼게요.”

“그래, 바로 결정 안 해도 되니까. 천천히 생각해 봐. 그래도 긍정적으로 알지?”

“이제 가도 되죠?”

“DVD 나왔어. 이거 가져가.”

“감사합니다.”

 

드라마를 거절하는 방법도 있을 테지만 하해와 지내는 동안 계속 드라마나 영화 촬영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머리가 지끈거려 자리를 뜨려 하자, 박 실장이 팬미팅 DVD를 도환에게 건넸다.

 

“이제 가볼게요.”

“그래, 조심해서 가.”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네, 다음에 뵙겠습니다.”

 

회사에서 나와 차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하해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막상 바다에 데려가면 하해에게 버려질 것 같아 두려웠다.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향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과연 자신이 하해의 눈에 찰지, 하해를 가둬두고 죽이려 했던 과거의 일이 떠오르지 않을지 걱정이 앞섰다.

 

***

 

“왔어?”

“일어났네? 밥은?”

“아직. 너 오면 같이 먹으려고.”

“내가 먹고 왔으면 어쩌려고 안 먹고 있었어.”

“또 먹으면 되지.”

 

현관문을 열자 하해의 얼굴이 보였다. 아침과는 다르게 말끔한 모습이었다. 도환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꾸하는 하해에게 입을 맞추며 소파 위에 짐을 내려놓고 하해와 함께 부엌으로 향했다.

 

“저건 뭐야?”

“내 팬미팅 영상. 밥 다 먹고 같이 볼래?”

“팬미팅이 뭔데?”

“음, 나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만나는 거?”

“먹으면서 보자!”

“다 먹고 보자.”

“빨리 와!”

 

설명을 듣는 하해의 눈이 빛났다. 말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저 때의 하해가 어땠는지.

하해를 강제로 데려와 집에 가둬두던 시기라 밥을 다 먹고 봤으면 했지만, 하해는 도환의 말을 무시하고 밀폐용기를 챙겨 소파로 향했다. 어쩔 수 없이 하해의 뒤를 따라간 도환이 착잡한 마음으로 DVD를 틀었다.

 

“이게, 그러니까.”

 

DVD에 대해서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 시기에 찍은 영상이라고 나도 깜빡하고 보자고 한 거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하해는 방해된다는 듯 도환의 입을 막아 버렸다. 하해는 영상을 보며 평화롭게 밥을 먹고 있었고, 도환은 그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하해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흠, 내가 집에서 휴대폰만 하는 동안 너는 저러고 다녔구나.”

“미안해, 깜빡했어. 기분 나빠지라고 가져온 거 아니야.”

“이미 지난 일에 기분 나쁜 건 아니고. 네 새로운 모습이 신기해서. 매일 이렇게 입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고, 웃는 것도 다르고. 저런 연기도 처음 봐.”

“칭찬이지?”

“칭찬이지. 저런 연기 또 안 들어와?”

“내가 작품 했으면 좋겠어?”

“당연하지! 나 계속 똑같은 것만 돌려 보는 거 알아? 대사 다 외우게 생겼어.”

 

하해의 말에 도환의 눈이 흔들렸다. 대본이 들어왔다는 걸 알고 있을 리는 없을 테고. 하해가 이렇게 새 작품을 원하는데 대본을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막막했다.

 

“사실, 제의가 들어오긴 했어.”

“정말?! 잘됐네. 그런데 왜 그렇게 울상이야?”

“드라마라는 게 하루 만에 뚝딱 찍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오래 나가 있기도 하고 외박도 할 텐데 네가 외로우면 어떡해.”

“내가 애야?”

“그래, 네가 애는 아니지. 사실... 내가 집을 비우고 돌아왔을 때 네가 없을까 봐 무서워.”

 

사실대로 말하긴 했지만 두려웠다. 하해가 화를 내고 자신을 거짓말쟁이라고 부를까 봐 두 눈을 꽉 감고 속마음을 털어내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내가 도망갈까 봐 무섭다는 거네? 그럼 묶어놓고 가.”

“다시는 너 묶어놓는 짓 하고 싶지 않아.”

“그러면 촬영장에 데려가던가. 데려가도 불안하려나?”

 

아직도 자신을 믿지 못하는 거냐는 짜증 섞인 소리를 들을 줄 알았는데 생각과는 다르게 하해는 침착했다.

 

“바닷가에서 촬영할 것 같거든.”

“아...”

 

순간, 바다라는 말을 들은 하해의 눈이 흔들렸다.

 

“바다는 네가 나를 떠나면 정말 끝이잖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나를 더 좋아할 거라는 자신이 없어.”

“그게 문제였던 거야? 나 너 좋아해. 고향 좋지. 하지만 잠깐 안가도 괜찮아.”

 

잠시 동요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는지 하해가 도환의 손을 잡고 말했다.

 

“왜 잠깐이야?”

“나는 영원을 살잖아. 인간의 수명은 나에게 한순간이니까. 그래서 인간에게 정을 안 주려고 했던 거고. 네가 죽으면 그때 고향으로 돌아가도 돼. 너한테는 잔인한 이야기지?”

“잔인하네. 한편으로는 기분 좋기도 하고. 내가 죽어도 나 잊으면 안 돼.”

“그래,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하해가 도환의 눈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짧게 지나가는 인연이라니 속상하긴 했지만, 오히려 그렇게 말해주니 마음이 편해져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됐다.

 

“해야겠네. 할게.”

“그래, 내 걱정은 그만하고. 집에 얌전히 있을 테니까.”

“집에 있지 마. 나랑 같이 가자.”

“뭐? 바다에? 너 괜찮아?”

 

뭔가를 생각하는 듯 허공을 응시하던 도환이 하해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자신을 바다에 데려간다니 헛소리를 하나 싶어 하해가 괜히 과장되게 도환의 이마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여기에 혼자 있으면 외롭잖아.”

“그래서 나를 바다에 데려가겠다고?”

“네가 말했잖아. 한순간이라고. 한순간만 나랑 참고 있어 줘.”

“참는 거 아니야. 말은 똑바로 해야지. 너랑 처음 만났을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내가 좋아서 있는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여기저기 도환의 얼굴이 안 보이는 곳이 없었고 DVD만 봐도 도환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 넘쳐났다. 그럼에도 자존감이 떨어지고 타인을 잘 믿지 못하는 도환이 안타까웠다. 자라온 환경이 도환을 이렇게 만든 거겠지. 그렇다면 자신을 믿어줄 때까지 도환을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수밖에.

 

“...”

“왜 그렇게 봐?”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좋아서. 내가 죽을 때까지 옆에 있어 준다는 거 아니야.”

“그래, 네가 죽을 때까지 옆에 있어 줄게. 그러니까 드라마 얘기 좀 해봐.”

“미리 알아도 되겠어? 재미없을 텐데.”

“음, 그건 그렇네. 그러면 그것만 알려줘. 주인공이야?”

“아니. 주인공은 아니야. 이제 밥 마저 먹어.”

 

죄지은 사람처럼 축 처져있던 아까와는 다르게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도환이 고민하듯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뭐해?”

“너를 어떻게 데려갈지 고민하는 중.”

“그냥 데려가면 되잖아.”

“아무래도 일하는 곳이라 막 데려가기 눈치 보이지. 매니저라고 하는 게 제일 좋을 텐데 아무리 봐도 매니저 같지는 않아. 일단 던져볼까.”

 

[드라마 할게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하해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도환이 고개를 저으며 박 실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뭐야 그 눈빛? 굉장히 불쾌한데.”

“매니저 하기에는 너무 튀어. 차라리 내 친구라고 말하고 데리고 다니는 게 낫지. 그것도 이상하긴 하지만.”

 

[조건? 무슨 조건인데?]

[아는 사람을 현장에 데려가고 싶어요. 촬영에 방해는 안 되게 할게요.]

[전화 되니?]

 

박 실장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네, 실장님.”

“그게 무슨 소리야. 누구를 데려오려고?”

“그냥 현장 견학이나 실습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아니, 도환아.”

“되면 하고, 안되면 못 해요. 어차피 주인공도 아니잖아요.”

 

웃음을 참고 박 실장에게 전화를 걸자, 상상했던 것보다 더욱 당황스러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일단 다시 연락할게.”

“네, 쉬세요.”

 

바로 끊어내지 않는 걸 보니 반은 넘어온 거나 다름없었다. 도환이 기분 좋게 웃으며 전화를 끊고 하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웃는 걸 보니까 잘 풀렸나 봐? 잘 안 풀려도 드라마는 했으면 좋겠는데.”

“잘 풀릴 것 같아서. 드라마 안 한다는 건 협박이야. 걱정하지 마. 네가 하라면 할게.”

 

[좋아, 데려와.]

 

밥을 다 먹고 하해와 같이 누워 영화를 보는 중에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박 실장의 문자였다. 그 드라마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여러모로 불안하긴 했지만, 하해에게 바다를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바다 같이 갈 수 있겠다.”

“허락받았어?”

 

하해가 상기된 얼굴로 도환을 내려다봤다. 평소답지 않게 떼를 쓴 보람이 있었다.

 

“나 잘했지? 이제 예뻐해 줘.”

 

예뻐해달라며 도환이 눈을 감았다. 잠시 고민하던 하해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는 얼굴을 붉히며 도환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읍!”

 

가볍게 맞닿은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도환이 하해의 목덜미를 감싸 끌어당기며 하해의 붉은 입술을 머금었다. 말캉한 혀가 도톰한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가 습한 입안을 부드럽게 희롱했다.

 말캉한 혀를 부드럽게 빨아들이면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질척이는 소리가 귓가를 가득 채웠고, 어느덧 하해의 옷은 반쯤 벗겨져 있었다.

1차 BL 작가 | 성인 📧 jaeyoonp04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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