딕은 새하얀 연미복을 입고 있었다. 브루스가 이르고 팀이 득달같이 검수하고 고르고 골라 딱 맞춘 것이었다. 처음 맞춘 하얀 정장을 바라보며 딕이 느꼈던 느낌은, 그냥 한마디로 ‘낯설다’는 것이었다. 새삼스럽지만 딕은 자신이 흰색에 익숙하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열 몇 살과 스물 중반 가까이 몸담고 있던 세상의 빛깔들이 흰색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울릴까?’ 팀의 고집으로 고른 색상이 하얀색이란 것을 알고 나서 마침내 완성된 옷을 직접 받을 때 까지도 들었던 생각이었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을 하든 딕은 어색함을 애써 감추고 이날을 위해 준비된 최고급 원단의 연미복을 몸에 갖춰 입고 거울 앞에 섰다.

분주하고 어수선하다. 적어도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는 본인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그랬다. 딕은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게 커다란 전신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그가 거울 앞에 설 때마다 주위를 분주하게 움직이던 인물들은 일순간 짜 맞춘 것처럼 멈추어 서서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딕이 바라보는 것과 같은 한 방향을. 그럴 때마다 딕은 답지 않게 머쓱한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주목을 받는 것에 꽤나 익숙했고, 본인 스스로도 즐긴다고 생각했건만, 이런 상황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딕은 괜스레 목 위를 단단히 여며둔 넥타이를 조금 풀어보려다 앉은 채로 자신을 노려보는 바바라의 시선에 얼른 손을 뺄 수밖에 없었다. 벌써 두 시간 째인데……. 참다못한 딕은 결국 자신의 주변을 비디오카메라를 든 채 스무 바퀴 정도는 돌지 않았을까 싶은 팀의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팀. 이제 괜찮지 않을까?”

“아직. 편집하면 영상도 별로 나오지 않을 거야,”


팀의 단호하면서도 전혀 다른 방향의 대답에 딕은 순간 벙벙한 표정으로 입을 뻐끔거렸다. 비디오를 도대체 얼마만큼 남길 생각인데? 그리고 비디오 이야기를 한 게 아냐! 하소연 한들 단호한 대답만 돌아오겠거니. 그래서 딕은 다른 이에게로 도움을 요청했다.


“바바라…….”

“이제 됐어, 딕. 그러니 물 맞은 고양이 같은 표정 집어치우고 저리 가서 앉아.”


역시 바바라! 딕이 이를 히죽 드러내고 웃을 때 바바라 또한 안경너머의 눈매를 예쁘게 접어 웃으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머리 만져야지.”

“아흐으으으…….”


순식간에 어깨를 늘어뜨리며 낙담하는 딕의 모습에 주변인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해를 한다는 듯하면서도, 사실 반 정도는 그의 그런 곤욕스런 모습들을 즐기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정말 보기 좋은 눈요깃거리일 터였다. 평소에 입고 다니던 옷들이 어떠했던 간에 그가 여러 의미로 눈에 띄었었단 것을 인정하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대낮에 경찰복을 입고 업무를 보며 뛰어다녔을 때에도, 평상복을 입고 외출을 했을 때에도, 파티장에 수트를 입고 등장했을 때에도. 한 밤중 얼굴의 반은 가린 마스크도 모두 감출 수 없었던 그의 매력이란 것이. 이런 자리에서 또 공들여 닦아낼 때엔 또 다른 것이었다. 그의 주변 친구들과 가족들로서야 하루가 멀다 하고 봤을 얼굴이었으니 이제와 새삼 무엇이 요깃거리가 되겠느냐 싶었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일생에 한 번 기념 삼을 수 있는 특별한 날에 특별한 치장을 하는 딕을 구경하는 맛은 쏠쏠했다. 딕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 끊임없이 참견을 하며 이것저것을 챙겨주려는 이들이 진심을 담아 축하하고 있다는 것과 더불어서 자신을 보며 어느 정도는 즐기고 있다는 것을. 딕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들이 약간의 짓궂음을 섞어 제 옆에 있어주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새하얀 연미복은 웨인 저택에 몸담은 뒤로 수없이도 많이 치룬 그 어떤 행사보다도 기쁘고 즐거운 파티를 위해 그들이 손수 골라준 선물 중 하나였다. 좋은 날이고, 좋은 일이며,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날이었다.

딕은 바바라가 가리킨 자리에 얌전히 앉으며 머리를 손보기 위해 다가온 젊은 여성에게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눈을 마주친 미용사의 얼굴이 순간 붉어진 것이 보였기에 도리어 민망해졌다. 손 안에 무언가를 바르며 머리를 손질하는 것에 잠시간 몸을 맡기고 있던 딕이, 문득 생각난 듯 여자를 향해 물었다.


“혹시 그― 다른 쪽은 다 끝났나요?”

“아, 남편 되실 분이요?”


음. 남편이라. 딕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큼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 움직이지 마세요. 여자의 말에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주변인들이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래 이런 건 신부 쪽이 훨~씬 더 오래 걸리는 법이거든요. 남자건 상관없어요.”


뭐 그래, 결혼이라는 게 신부와 남편이 쌍으로 이루어지는 게 당연한 법이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단 한방에 이 쪽을 일방적인 포지션으로 밀어버린다는 건……. 그렇게 티가 났었나. 딕은 민망함에 그저 또 다시 웃어보였고, 마침내 딕에게서 떨어진 여자가 허리를 펴며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좋아 보이네요, 그레이슨씨. 밖에서도 그렇게 웃으시면 될 거예요.”


여자는 정말로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마치 오늘 하루의 역작을 이루어낸 사람처럼 손을 털며 기쁜 웃음을 보이며 딕의 눈앞에 거울을 들이댔다.


“매일 보던 얼굴인데.”

“스스로의 칭찬을 그런 식으로 하는구나?”


옆에서 팀이 작은 불평을 흘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하건 딕은 그저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만을 굴리고 있었다. 사실, 뭘 어떻게 꾸미던 간에 리처드 존 그레이슨이 리처드 존 그레이슨인 것은 변함이 없었다. 별로 중요하진 않았다. 그는 그저 어느 순간부터 다른 것만을 생각했다. 그러니까…….


“제이슨은?”


딕의 물음에 팀은 그저 다시 비디오카메라를 눈높이에 들었을 뿐이었고, 바바라는 안경을 바로 잡으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대답이 없는 둘을 대신해서 곁에 있는 미용사가 말했다.


“기대하셔도 좋을 거예요.”




***




맑은 날이었다. 전날 우려하던 것과는 다르게 맑고 투명한 햇살이 살랑거리는 따뜻한 봄바람을 타고 웨인 저택의 드넓은 저택에 부드럽게 내려앉고 있었다. 천천히 걸어 나오던 딕은 마침내 새하얗게 빛나는 길의 끝자락에 서 있는 브루스를 보았다. 그의 표정은 언제나와 같이 똑같았지만, 어쩐지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딕이 잠시간 아무 말도 못하고 그를 보았을 때 브루스가 손을 내밀었다. 둘 사이에 대화는 없었지만 많은 것이 오갔다. 축하와, 인사와, 그리고……. 브루스는 잠시간 딕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하고, 그의 손을 붙잡은 채로 새하얀 버진로드 끝을 바라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그가 서 있었다. 천천히 함께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그의 얼굴이 점점 더 다가왔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힌 채로 햇살 아래 눈부신 시야를 찡그리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곧 풀어졌다. 딕이 다가오는 동안 그의 얼굴이 일순간 딱딱하게 굳었던 것도 알았다. 동시에 붉어졌다. 하지만 결코 화난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꾹 다문 입술 아래로 단단한 턱이 파르르 흔들린 것도 놓치지 않았다. 그것이 무언가를 차분히 참기 위한 그의 행동이란 것도 알고 있다.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 딕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느 순간 그가 성큼성큼, 그렇지만 성급하지는 않게 그에게로 다가왔다. 곁에 있던 브루스가 부드럽게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검은 연미복을 입은 그가 금방이라도 한숨을 토해낼 것 같은 얼굴로 딕의 앞에 섰다. 제이슨. 입 밖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진 않았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대답 대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손을 내밀었고, 마주 잡았다. 부드럽게 녹아드는 손안의 온기를 움켜잡았을 때 마침내 제이슨이 웃었다. 턱이 떨리도록 힘껏 참고 있던 것이 바로 그 웃음이라는 것을, 사실 딕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하얀 연미복도 어울려? 딕이 작게 소곤거리는 목소리에 제이슨이 피식 웃었다. 마주잡은 손을 가까이 끌어당기는 그가 딱 둘 사이에서만 들릴 목소리로 속삭였다.


“결혼식엔 원래 신부가 하얀 법이야.”


아까보다도 더 크고 환한 웃음이 퍼졌다.

잡식성 독거 오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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