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빛깔이었다. 곧 어마무시하게 쏟아지겠구만. 올려다 본 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 꼭 어느 재난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석진은 매일 아침 일기예보를 확인하는 섬세한 타입이 아니었다. 언제 내릴지 모르는 빗줄기에 대비해 우산을 챙겨 다니는 타입은 더더욱 아니었고. 하지만 그건 석진의 사정이다. 이미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는지 창문에 어리는 빗줄기의 흔적이 선명했다. 


오늘은 평소와 다름없는 언럭키 데이. 미팅이 끝날 때 쯤이면 말도 안 되는 교통체증이 온 뉴욕 거리를 마비시킬 것이었다. 그 난장판 속에서 비 몇 방울 안 맞아보겠다고 택시를 잡느니 걸어서 호텔까지 가는 게, 석진에게는 훨씬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법은 잘 안 지켜도 휴일은 징그럽게도 잘 지키는 미국놈들이 비오는 일요일 오후에 우산을 팔고 있을 리 없었다. 신문지라도 뒤집어 쓰고 걸으면 대머리 신세는 면할 수 있겠지. 괜히 자기 자신에게 그 따위 조크라도 걸어봐야 할만큼 짜증이 났다. 


이 컨디션에 비까지 맞으면... 그건 산재처리 되는 거냐고. 앓아 누울 정도로 아픈 건 아니었지만 신경에 거슬릴만큼 골골대는 건 맞았다. 아침에 뻗대지 말고 두통약을 먹고 나올 걸. 생각해보니 아침까지 되돌아간다면 두통약도 먹고 우산도 들고 나왔을 것이었다. 것 보라지. 후회는 언제나 아무런 실효가 없다. 






비너스 어게인

박지민x김석진






"그럼 이번 기획기사는 대충 여기까지 합의한 플로우대로 끌고 가는 걸로 합시다."

"네. 변동사항이 생기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세 시간 가량 내리 입씨름을 하고 난 뒤에 얻은 것은 적당히 생산적이고 적당히 제자리걸음인 결론이었다. 이럴 거면 그냥 화상회의를 했어도 됐을 텐데, 참 한국이나 미국이나 꼰대들이 문제다. 석진은 마시던 커피를 마저 해치우고 회의록을 백업한다. 저도 모르게 손이 느릿해 지는 것은, 굳이 창밖을 내다보지 않아도 비 내리는 소리가 선연한 탓이었다. 


형은 평소에도 체온이 낮잖아. 왜 매번 무식하게 그 비를 다 맞고 앓아 누워. 


이명처럼 점점 멀어지는 빗소리에, 환청처럼 앳된 목소리가 섞여든다. 저도 모르게 지난 날의 지민을 떠올렸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마음이 형언할 수 없이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다. 제발 나 좀 불러요, 이럴 때 써먹으라고 남친이 있는 거잖아. 고장난 카세트 테이프처럼 아무리 정지버튼을 눌러도 새어나오는 기억의 소리를 막을 수가 없다. 사귀는 기간 내내 징그럽게도 벗겨먹고 써먹었는데도 박지민은 늘 저를 더 사용하라 성화였다. 너 바쁘잖아. 내가 아무리 바빠도 형이 부르면 가지. 빈말이라도 그 때는 그게 좋았다. 김석진의 가벼운 몸살이 꼭 세상 가장 큰 일이라도 되는 것마냥 호들갑을 떨던 박지민은, 아마 지금은 더 바빠졌겠지. 


잠시 연애 비스무리한 놀음이나 해 보자는 태평한 심정으로 그와 만나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게 죄라면 죄였다. 자꾸만 잊고 있던 예전 기억들이 생각나잖아. 생각을 끊어내기 위해 다급히 짐을 챙겨 계단을 내려간다. 로비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면서, 이런 기분으로 혼자 청승을 떨며 앓아 눕는 것보다는 요금 폭탄을 맞더라도 택시를 잡는 게 낫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이제 나이도 있는데 자기 몸은 자기가 챙겨야지. 석진은 그 말의 이면에 포함된, 더 이상 챙겨줄 사람이 곁에 없다는 명제를 애써 무시한 채 종종 이용하던 택시 회사에 콜을 넣으려 휴대폰을 꺼낸다. 


["바로 받네요?"]


회상 따위가 아닌 진짜 박지민 목소리가 들린 건, 하필 그 때 기다렸다는 듯 전화가 걸려 온 탓이었다. 전화벨이 울린지 1초만에 통화버튼을 눌러버린 것도 충분히 쪽팔린 일이었다. 여기서 바로 꺼버리면 사람만 우스워지겠지... 씨발, 되는 일이 없냐. 석진은 정적이 길어지기 전에 대답하는 쪽을 택했다. 


"왜. 용건 말해."

["지금 비오는데."]


그래서 뭐. 말이 퉁명스럽게 나가는 건 저도 모르게 박지민을 추억하고 그리워한 것에 대한 방어기제였다. 이미 끝난, 그리고 곧 끝날 인연에 기대봤자 비참해지는 건 당사자들이다. 


["형 오늘 미팅한다던 건물 밖에 차 세워놨어요. 나와."]

"뭐?"

["내가 가면 형 싫어할까봐 사람 시켰는데."]

"야. 네가 뭔데. 네가 아직도 내 애인인 줄 알아?"

["목소리 들으니까 직접 갈 걸 그랬네. 호텔 가 있어요, 얼굴 봐야겠다."]


무슨 일 있지? 얼굴 보고 말해요. 동문서답 주제에 다정하기도 했다. 기분도 꽝이고 컨디션도 꽝인 걸 통화 목소리만 듣고 어떻게 아는 거냐고. 하지만 그건 또 동문서답으로 넘어가지 않을 것 같은 예감에 석진은 말을 삼킨다. 정말이지, 후회는 아무런 힘이 없다. 




-




형이 그랬잖아요. 몸이 아프면 마음도 같이 약해지는 거라고. 기억해요? 뭐야, 나만 기억하나보네. 그 왜, 우리 사귄지 얼마 안 돼서... 나 아버지한테 한 번 크게 대들고 형 집에 잠깐 얹혀있겠다고 했을 때. 응, 열 엄청 났을 때요. 형 하던 알바도 다 빼고 내 옆에 붙어서 간호만 했잖아요. 난 아플 때 누가 내 옆에서 그렇게 간호해 준 건 처음이어서 되게 이상했어. 좋은 것보다도 그냥 이상했어. 근데 형이 그러는 거야, 몸이 아프면 마음도 같이 약해지니까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을 외로움이 백 배, 천 배가 돼서 찾아오는 거라고. 그 말 듣고 생각해보니까, 진짜 그랬던 거 같아서 나도 앞으로 형 아플 때 절대 혼자 안 놔둬야겠다고 다짐했지. 


그랬어?


응, 그랬어. 별로 잘 지켜진 다짐은 아니었던 거 같지만. 형이 아파도 별로 아픈 티를 안 내는 사람이라는 걸 몰랐을 때도 그랬고, 그걸 알았을 때도 그랬고. 입술이 왜 삐죽삐죽해. 맞잖아요, 죽어도 아프단 소린 잘 안 했으면서. 형도 가만 보면 좀 청승맞은 구석이 있어. 헤어지고 나서 그게 제일 마음에 걸리더라고. 그렇게 버티다 약 먹고 버티다 잠들면 더 좋아? 


... ... 몰라. 


대답하지 말고 계속 자요. 형 아플 때 내가 옆에서 쫑알쫑알 말 걸면 좋아했잖아. 그래서 이러고 있는 거니까 대답 그만해. 푹 잠들어도 계속 있을 거니까. 옳지, 착하다. 


... ...


형 아픈 건 마음 아픈데, 아플 때만 솔직해지는 거 보면 좀 웃기기도 해요. 



나도 내가 웃겨. 이미 약기운에 취해 멀어지는 정신을 반쯤 붙잡은 상태였으면서도, 석진은 마음 속으로 착실히 토를 달았다. 멀쩡했어봐. 대번에 가라고 등 떠밀었을 거면서. 눈 뜨면 또 왜 아직 여기 있냐고 화낼 거지? 그래도 화 낼 일은 없을 거예요. 이거 꿈이거든. 요즘 꿈은 4D로 나와서 오감을 만족시켜 주는 거야? 속살거리는 말이 달콤하고 따뜻했다. 서늘한 체온도 미열이 있는 몸에 알맞게 포근했다. 


응, 이건 꿈이잖아. 그게 웃겨. 그렇게 심하게 아픈 것도 아니면서 이런 꿈이나 꾸고 또 꿈에 기대 어리광이나 부리고 있는 꼴을 봐라, 안 웃길 수가 있나. 하지만 석진은 웃음기 하나 없이 꿈 속 어딘가에서 박지민을 향해 평생 부릴 어리광 몰아서 부렸다. 왜냐면 그는 이제부터, 함께 했던 4년의 기억 위로 덧그려지는 2주 남짓의 기억을 가지고 또 앞으로 남겨질 긴 이별의 시간을 버텨내야 했으므로. 





-





한국으로의 귀환을 이틀 남겨둔 날의 오후였다. 그간 뻔질나게 석진의 호텔에 드나들던 박지민은, 뺄 수 없는 일정이 있다며 약속된 만남을 3일 뒤로 미루자고 했다. 석진 역시 뉴욕에 놀고 먹으러 온 게 아니라 일을 하러 온 것이었기 때문에 미리 정해둔 약속 외에 따로 시간을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니 결국, 그를 만나 따로 작별 인사를 하려던 석진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사실 언제까지고 미룰 수 있다면 미루고 싶은 작별이었으나 더 이상 끌다가는 지민은 물론이고 석진 자신의 마음이 다칠 것이었다. 상처주지 않기 위해 상처주는 것을 선택하는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석진은 아무리 그에게 상처를 주기로 작정을 했더라도, 또 한 번 그의 곁에서 아무 말 없이 사라지기는 싫었다. 다 나은 상처에 다시 소금 뿌리는 짓도 유분수지. 게다가 박지민과 김석진 인생의 차이는 그와 헤어져 있던 5년 간 더욱 더 견고해져, 이제는 X-남친이니 FWB이니 하는 그럴듯한 핑계로도 그의 곁에 붙어 있기 곤란한 상황이었다. 


일탈은 일탈에서 끝내야지. 하지만 그간의 박지민 태도에 비추어 볼 때 쉽사리 절 포기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지난 이별과 같은 방식을 써야겠다고 석진은 생각했다. 


너와 헤어진 뒤 예전의 그 사람과 정식으로 사귀기 시작해서, 그 가벼운 엉덩이 주체를 못하고 이번엔 또 너랑 역바람이 났던 것뿐이라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다시 그 사람과 알콩달콩 잘 살테니 너도 이제 나 같은 건 잊고 잘 살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생채기가 나는 것 같은 변명거리였으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이보다 확실한 이별방법은 없다는 걸. 


그런 뻔한 이별을 염두에 두고 내일 쯤 그에게 전화라도 걸어 봐야 하나 고민하던 중,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벨소리가 울렸다. 혹시 박지민일까. 그에게 전화번호를 받았으나 석진은 그를 뭐라고 저장해야 할 지 몰랐다. 그래서 박지민은 여전히 김석진의 휴대폰 속에서는 11자리 숫자로 존재했다. 벨소리가 끊기기 전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발신인은 11자리 숫자가 아닌, 저장된 이름이었다. 


"네, 부장님. 어쩐 일로..."

"석진씨, 지금 전화 받기 괜찮아?"

"네. 말씀하세요."

"지금 좀 급해서 본론부터 말할게. 석진씨가 미국에 3개월만 더 있어줘야겠는데... 괜찮은가 해서." 

"네? 그게 무슨..."


위에서 까라면 까야 하는 직장인이었지만 너무도 갑작스런 통보에 말문이 막혔다. 다음 타자로 출장 일정이 잡혀있던 동료의 개인 사정으로 출장 일정이 꼬였고 어쩌고저쩌고. 요약하자면 부서 내의 미혼 직원 (다시 말해 3개월을 더 타국에 있어도 배우자나 자식을 보지 못할 문제가 없어 괜찮은 직원)이 나밖에 없으니, 3개월을 더 뉴욕에 머물면서 기본 업무와 그 외 온갖 잡다한 일을 처리해달라는 것이었다. 


"석진씨 돌아오면 진짜 내가 업고 다닐게. 휴가도 아주 한번에 몰아서 쓰게 해줄게. 나 좀 살려주라."


석진은 차마 사정하는 부장을 매정하게 떨쳐내지 못하고 출장 연장에 동의했다. 여행 비자로 온 것도 아니었으니 문제될 건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떨떠름한 마음은 떨칠 수 없었다. 


그럼 그 기간 동안에도 계속 박지민을 만날 수 있나? 자기가 생각하고 자기가 놀라 냉큼 벽에 머리를 박았다. 3개월이라니. 순간의 일탈이라 치부하기엔 말도 안 되게 긴 시간이었다. 마음이 동해 잠자리까지 허락했는데, 박지민 꾐에 못 이긴척 또 뭘 더 허락할지 모르는 일이다. 


역시 다음 번 만남에서 하려던 작별 인사를 확실히 해야겠어... 석진은 스물스물 피어오르려는 제 이기적인 욕심을 애써 누르고 다시 한 번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그랬는데.





또 뭐야. 더 전달할 사항이 남았는지 연달아 문자 메시지가 도착한다. 그래, 지금처럼 마음이 복잡할 땐 차라리 일에 집중하는 게 나을 수도 있지.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석진을 반기는 건 익숙한 11개의 숫자였다. 



[일이 생각보다 빨리 끝났어요.]

[형 호텔로 가는중.]


미친다 정말. 사실 박지민과 안녕하기 위해서 그를 이 곳에 두고 떠날 사유나, 변명거리 따위를 생각하는 것보다 거처를 바꾸는 게 먼저였다. 어쩌다 호텔방 카드키까지 줘버렸으니 남은 3개월을 같은 곳에서 머무는 건 위험한 일이다. 결심한 김에 당장 실행해야겠어. 미리 깔끔하게 싸둔 캐리어를 바라보며, 석진은 그대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웬일로 전화를 다 했어요? 내 목소리 듣고 싶었구나."]

"헛소리 말고 오늘은 호텔 말고 우리 그때 마주쳤던 펍 있지, 거기서 보자."

["형 아직 피곤하다며. 괜찮겠어요?"]


피곤한데 호텔에서 만나면 또 섹스할 거 아니야, 이 새끼야. 대충 오늘은 좀 취해야겠다는 두루뭉술한 말로 박지민 참견을 넘겨버리고 나갈 준비를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석진은 연기를 해야 했다. 구남친과의 재회에 질려버린 척 하고, 흉터가 남은 박지민 가슴에 다시 한 번 펀치를 날려야 한다. 어쩌면 그는 자신과 달리 그를 잊고 살았을지 모르고, 그렇다면 걱정하는 것처럼 타격이 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예정대로 이틀 뒤에 한국에 간다고 해야지. 여차하면 박지민을 속일 수 있는, 이틀 뒤 출발 예정으로 인쇄된 비행기 티켓도 있었다. 


"... ..."


지금껏 잘 해왔던 것처럼만 태연하게 연기하면 된다. 오늘은 더 철저히. 새삼 헤어짐을 통보받는 슬픔 못지않게, 억지로 헤어질 상황을 만드는 슬픔도 제정신으론 못 할 짓이구나 싶다. 




조금 이르다 싶게 도착한 펍에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아무리 평일이라지만 이 정도로 한산할 수가 있나? 분명 박지민을 마주쳤던 그 날엔 바로 옆 사람 말소리도 주의해서 듣지 않으면 놓칠 수 있을 정도로 시끌벅적했던 것 같은데. 대충 둘러봐도 손님은 저 하나뿐인 것 같았다. 


석진은 구석 자리에 뻘쭘히 앉아 맥주 한 잔을 시키고 외워 온 대사를 다시 읊조렸다. 나 이틀 뒤에 한국으로 돌아가. 돌아가선 연락 안 할 거야. 우리 이미 끝난 사이고, 나 아직 그 때 그 사람이랑 잘 만나고 있거든. 너도 나 잊어줬으면 좋겠다. 잠깐 시뮬레이션을 하는 건데도 가슴이 쿵쿵 요동을 쳤다. 어렸을 때 잠깐 다녔던 웅변학원은 인생살이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것이었던가. 한 번 더 우린 이미 끝난 사이고, 를 읊조릴 때 박지민이 나타났다. 


"일찍 왔네요."

"어쩌다 보니."

"나 일찍 보고 싶어서?"


박지민은 정말로 일이 끝나고 바로 온 건지 멀끔한 모습이었다. 몸에 딱 붙는 세미수트 입고 저렇게 말하는데, 원래라면 저기다 대고 질색하는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었어야 했던 걸 잊게 되는 거다. 하마터면 진짜 일찍 보고 싶어서 일찍 와버렸다고 고개를 끄덕일 뻔했을 정도로... 


"빨리 할 말 해버리고 쉬고 싶어서 그랬다."

"무슨 할 말이요. 짐작 가는 건 하나밖에 없는데."

"뭘 짐작했는진 모르겠는데, 그거 아니야."

"왜요. 형 아직 나 사랑하잖아."


그건 무슨 자신감이야. 설령 박지민의 어이없는 확신이 사실이라 해도, 이미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관계였다. 김석진이 박지민을 아직 사랑한다는 것이나, 박지민이 작정하고 그런 김석진을 꼬드기고자 한다는 것조차 전부. 그런 것들은 우리를 둘러싼 현실 앞에서는 한 톨만큼도 위력을 발휘하지 못할 시시콜콜한 감정일 것이었다. 


그러니 더 이상 말려드는 건 위험했다. 석진은 또 한번 제 손으로 비수를 꽂아넣기 전 근사하게 웃는 박지민 얼굴이나 마지막으로 찬찬히 새겨 넣었다. 


"박지민. 나 이틀 뒤에 한국으로 돌아가. 돌아가선 연락 안 할 거야. 우리 이미 끝난 사이고, 나 아직 그 때 그 사람이랑 잘 만나고 있거든. 그러니까 너도 나 잊어줬으면 좋겠다."


목소리가 떨렸던 것만 제외하면 거의 완벽했다. 석진은 차마 지민이 어떤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지 확인할 용기가 없었다. 쫓기는 사람처럼 고개를 숙인 채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석진은 이제 다시 볼 일 없을 그가 보란듯이 행복해지길 기원했다. 잔인하지만 이렇게 확실히 해 두는 게, 박지민의 행복을 위한 일이었다. 석진은 제 곁에서 지금껏 이뤄온 것들을 모두 잃고, 언젠간 김석진을 원망하게 될 박지민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뭐야, 나 할 말 끝났어. 놔."


하지만 김석진이 자리를 뜨는 것보다 박지민이 김석진을 잡아채는 속도가 더 빨랐다. 하릴없이 마주한 박지민 눈은 언뜻 평온한 것 같기도, 지쳐있는 것 같기도 했다. 


"형. 석진아."

"..."

"정말 나보다 그 사람을 사랑해?"

"너랑 잔 건 그냥... 일탈 같은 거였어. 나 원래 그런 애였잖아. 너랑도 그렇게 깨졌고."


제 입으로 하는 말이 제 가슴에 그대로 날아와 꽂힌다. 아팠지만 견뎌내야 할 몫이었다. 


"박지민보다 서재현 그 사람을 더 사랑한다 그 말이지?"


석진은 문득 한없이 아득해진다. 또다시 지민의 입에서 그 남자의 이름이 나오게 하다니. 차마 울지도 못하고 저와 제 바람상대를 멍하니 응시하던, 5년 전 지민의 참혹스러운 얼굴이 오버랩된다. 


"그렇다니까. 왜 자꾸 물어봐."

"형 이대로 한국 가면, 그 사람이 형 받아줄까?"

"당연하지. 재현씨랑 나는 이런 걸로 쉽게 헤어질 사이 아니야."


지민은 석진의 대답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얘가 너무 충격을 받아 잠시 미쳐버린 걸까. 이 상황에 웃기는 왜 웃어. 


"형."

"뭐."

"좋아하는 사람 이름도 틀려? 서재현 아니고 서재훈이었잖아."

"........잠깐, 잠깐 말이 잘못나온 거야. 네가 하도 닦달을 하니까."


5년 전 몇 번 보고 말았던 남자 이름을 지금껏 제대로 기억하고 있을 리 없었다. 급히 변명했지만 박지민의 여유로운 태도는 여전했다. 


"진짜 모르나보네. 서재현 맞아."

"... ...뭐?"


젠장. 변명거리를 생각하느라 분주하던 뇌가 뒤죽박죽으로 조립되는 것 같았다. 빼도 박도 못하게, 박지민이 파놓은 덫에 걸려 버렸다. 


"그리고 서재현 그 사람 지금 프랑스에 있어. 한국 가도 못 볼걸."

"... ..."


석진은 크게 당황했다. 언제 그 사람 뒷조사까지 한 거야. 애초에 왜 그걸 다 알고 있는 거야? 순식간에 모든 게 혼란스러워졌다. 박지민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언제부터 알고 있던 거지? 태연한 척 하기에는 알고 있는 정보가 너무 적었다. 언제부터, 아니 어디까지... 이제 여기서 어떻게 해야... 


"우리 오늘 할 말이 정말 많겠다. 그렇죠?"


지민은 그 자리에 가만히 굳은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석진을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5년 만에 드디어 다시 손에 넣은, 박지민의 우주였다. 



-



박지민은 운명을 믿지 않았다. 그의 삶은 대부분 노력한만큼 원하는 것을 손에 쥘 수 있는 방향으로 흘러 왔고, 그 속에서 지민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 따위에 패배하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어떤 수를 써서든 가져야지. 이런 삶의 방식은 어린 시절부터 지민이 원하는 것이라면 조그만 장난감 하나라도 한 번에 사 주는 일이 없던 그의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수완 좋고 서글서글하게 타고난 성격 덕에 누군가의 호감을 얻는 일은 쉬웠다. 처음 김석진을 보고, 그의 마음을 얻어내고 싶다고 생각했던 순간부터 기어이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을 해 오던 그를 품에 안았던 순간까지. 결코 쉽게 얻어냈다 할 수 없는 소중한 마음이었고, 몇 년에 걸쳐 견고하게 쌓아 왔던 관계였다. 지민에게 있어 유일한 안식이었던 사람. 석진은 그랬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공을 들여 키워 놓은 파릇한 마음이, 뭘 계기로 한 순간에 시들어 버릴 수 있었을까.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자신의 외도 사실을 고백하던 김석진이, 처음에는 밉지도 않았다. 저 없는 새 김석진을 벗겨먹은 놈에 대한 분노는 있었어도 제 연인이 저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시간을 잘 극복하고 다시 행복하게 사랑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 마음으로 한 달을 버텼다. 차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처럼 저에게 모진 말을 하고, 잘못한 주제에 더 뻔뻔한 태도를 가장하고, 심지어는 제가 보는 앞에서 다른 놈과 주둥이를 부비던 김석진에 백기를 들었지만. 


헤어지고 꼬박 세 달을 슬퍼하기만 했다. 꼭 고장이 나 버린 것 같았다. 뭘 잘못했던 건지,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그를 되찾을 수 있을지,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후회했고 했던 일들에 대해 절망했다. 그렇게 미친듯이 과거를 되짚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나서부터, 그 이별은 뭔가 이상했다는 걸 눈치챘다. 


뭔가에 쫓기던 사람처럼 저와 헤어지자마자 번호도 바꾸고 아직 7개월이나 계약기간이 남아 있는 자취방에서 짐을 빼고, 심지어 본가마저 이사를 해 증발하듯 사라진 김석진. 저 먹고 쓸 돈도 없어 자는 시간을 쪼개 알바나 하던 사람이 무슨 돈이 있어서? 게다가 고작 일 주일을 못 참고 둘의 추억이 가득한 공간에 외간 남자를 끌어들여 육체적 욕구를 해소했다고 하기엔 제가 뉴욕으로 떠나기 전 유난히 애틋하고 간절하게 안기던 그의 태도가 걸렸다. 


제대로 된 변명도 해명도 없이 한순간에 제 품에서 도망치듯 사라져버린 김석진. 갑작스런 그의 행보를 고작 피할 수 없는 운명 정도로 받아들이기엔, 그를 구성하는 모든 세포가 날카롭게 곤두서 진실을 향하고 있었다. 김석진은 물론이고, 김석진과 하룻밤을 함께 했다던 남자마저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세상에서 마침내 박지민은 의심을 확신으로 바꿨다. 



좆같았다. 


뭐가 가장 좆같았냐고 묻는다면 딱 하나만 고를 수 없었다. 우선적으로는 당장 김석진을 찾아올 수 없는 제 상황이 좆같았다. 아버지 선에서 철저하게 처리했을 일을 고작 저 따위가 건드릴 수 있을 리 없었다. 두번째로는 그런 수모를 겪고도 한마디 상의도 없이 제 곁을 떠나기 위해 고작 그 따위 대본을 군말없이 받아들인 석진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허탈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그렇게 되기까지, 그렇게 되고 나서도 얼마간 그런 결정을 내렸을 김석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저 슬퍼하고만 있었던 스스로에 대한 분노.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쥐고 있는 패가 무엇이든지간에, 그 판에서 박지민에겐 승산이 없었다. 


그렇다면 뺏긴 걸 되찾을 방법은 하나였다. 타인이 짜 놓은 판에서 놀아나는 걸 관두고, 제가 움직일 수 있도록 판을 키워야 했다.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긴 싸움의 시작이었다.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완전한 제 소유인 자본이 필요했다. 그 때부터 욕심낸 적 없던 모친쪽 기업의 승계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어차피 아버지가 두려워하는 건 아들이 게이새끼라는 소문에 표심을 잃게 되는 것일 테니 알아서 한국을 벗어나 주는 게 서로에게 좋은 방안이기도 했다. 


김석진이 곁에 없는 한국이나 김석진 없는 미국이나, 박지민에겐 거기서 거기였다. 어디든 부친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이면 됐다. 갑자기 나타난 동양인 낙하산으로서 좆빠지게 굴러 기반을 다지고 난 뒤에야 멀리서나마 한국에 있는 석진의 소식을 알아낼 수 있었다. 원하던대로 메이저 언론에 취직했고, 따로 만나는 사람이 없다는 걸 제일 먼저 전해들었다. 파파라치가 찍어 보낸 것 같은 구도의 사진 속 석진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만들기까지 꼬박 5년이 걸렸다. 길었던 5년, 박지민에게는 매 순간이 그를 되찾는 시간이었다. 





"... ... 그니까... 너는 처음부터 내가 뉴욕에 있던 것도 다 알았고, 아니, 그보다 내가 거짓말을 했었다는 것도... 난, 나는..."

"쉬이. 좀 진정 되면 천천히 말해도 괜찮아요. 나도 형도, 시간이 많잖아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뉴욕 한복판에 위치한 박지민 소유의 고급 멘션에서, 석진은 지민이 타 준 따뜻한 코코아를 손에 들고 말끝을 흐렸다. 무슨 정신으로 따라왔는지 모를 일이었으나 정신을 차려보니 박지민이 운전하는 차에 타고 있는 채였다. 모든 게 계획된 일이었던 것처럼 스무스하게 흘러갔다. 정신을 반쯤 놓고 있는 석진만을 제외하고.


여러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끝내는 그저 허탈했다. 부러 더 바쁘게 살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죄책감과 그리움으로 점철된 5년이었다. 지민 역시 다르지 않았을 것이었다. 석진은 제 손으로 지민에게 상처를 주고 관계를 끊어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 왔고, 지민은 그런 석진을 전부 알고 있으면서도 그에게 연락하지 못하고 그저 기다리기만 하는 괴로움을 겪어야 했던 시간이었다. 


지민은, 석진이 또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갈까 두려워 처음 만난 그 날 전부 말하지 못했다고 했다. 반박할 수 없어 그저 쓴웃음을 지었다. 또 석진이 걱정하는 부분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지민은 제법 믿음직한 어른의 얼굴을 보일 수 있는 남자로 자랐다. 그럼 김석진은, 김석진은 어떤가. 여전히 박지민을 지키기엔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다. 어쩌면 저 한 몸 챙기기도 버거운 사람일지 모른다. 헤어짐의 진짜 이유를 알았다고 해서 그간의 고통이 없던 일이 되는 게 아닌 것처럼, 박지민에게 진심을 들켰다고 해서 없던 힘이 생기는 건 아니다.


"나 형 없는 5년 동안, 그냥 가만히 손놓고 있던 거 아니에요. 이제 형 지켜줄 수 있을 만큼 컸고, 아버지 말에 거역해도 손해 없을 만큼 쥔 것도 많아."


형은 그냥, 날 믿어주기만 하면 돼. 날 사랑해주기만 하면 돼. 모르는 척 홀딱 넘어가버리고 싶은 달콤한 제안. 하지만 그 이전에 현실적으로 생각할 게 산더미였다. 


"지민아, 나는... 그냥 무서워. 너 없이 쌓아온 것들도, 나한테는 소중하고. 무엇보다 네가 나 때문에 다 잃을까봐."

"형 내 말 못믿는구나. 형이 하고 많은 출장지 중에서 하필이면 뉴욕으로 배정된 게 우연인 것 같아?"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석진은 왠지 엄청난 걸 듣게 될 것 같은 예감에 본능적으로 마음의 준비를 했다. 박지민이 원래 철저한 성격이란 걸 알면서, 왜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을까.  


"이 넓은 뉴욕에서 내가 형 찾아낸 게 우연인 것 같냐구요." 

"... 너 진짜 뭐야."

"뭐긴 뭐야. 박의원이랑 협상 성공한 박지민이지."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딨어. 형은 진짜 우리 아버지가 날 그렇게 쉽게 포기할 사람으로 보였어요? 그 사람 말만 그딴 식으로 하지, 내 지분으로 지랄하면 같이 맞설 의지도 없어요. 이어지는 지민의 말이 퍽 다정했다. 표심이랑 민심 잃을까봐 안달인 양반이야. 여차하면 인권 문제로 이어질 수도 있는 사안이어서 각서 받는 것도 완전 쉬웠는데. 이거 봐, 형이랑 내가 언론에 입 열지 않는 조건으로 다시는 우리 사이 안 건드린다고, 지장도 받아왔다고 내가. 


"사실 처음부터 형이, 나한테 말해줬으면 더 빨리 이렇게 할 수 있었겠지만..."

"... ..."


석진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제 섣부른 판단으로 둘 모두를 힘들게 했다고 생각하니 애써 참고 있던 가슴 속 설움이 샘솟는 것 같았다. 


"... 미안해, 나는 그게 너랑 나 둘 모두를 살리는 길인 줄 알았어."


눈물을 눌러 참는 석진을, 지민이 말없이 안아 주었다. 지민은 석진을 품에 안고, 괜찮다는 말 대신 5년간 그토록 닿고 싶었던 그의 뺨에, 입술에, 목덜미에 몇 번씩이나 입을 맞춘다. 그런 지민의 마음은 여과없이 석진에게 전달된다. 


"내가 무서웠던 건, 하나밖에 없어요."


형 다시 만났을 때, 형이 더 이상 날 좋아하지 않을까봐. 형 눈에 비친 내가, 빛나는 박지민이 아닐까봐. 난 그것만 무서웠어요. 무서워서 처음에 일부러 더 아프게 형 안았어. 근데, 내가 그렇게 했는데도 형이 날 너무... 너무 따뜻한 눈으로 봐서... 


"내가 아는 김석진 그대로구나, 했지."


형은 강한 사람이야.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겪고서도 무너지지 않았잖아. 나는 형 되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겨우 버텼는데, 형은 그런 것도 없이 여기까지 왔어. 진짜 강한 사람은 형이야. 나는 처음부터 형이 강하고 멋있는 사람이라 좋아했던 거예요. 박지민은 그렇게 석진의 지난 시간을 어루만진다. 


네 눈에도 내가 그렇게 보였구나. 나는 네가 너무 빛나는 사람이라 내가 그걸 망가뜨릴까봐 무서웠는데. 참고 있던 눈물이 기어이 터져나왔다. 지금 이거 좋아서 우는 거 맞죠. 석진은 다 알면서 묻는 지민에게, 무엇보다 먼저 해 줘야 할 일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 ... 사랑해."


무력한 줄만 알았던 진심이었다. 


"나도. 사랑해요."


하지만 실은, 너무나 말하고 싶었고 듣던. 





-







+)

지민아. 내가 가만히 생각해봤는데. 운명인 것도 맞는 거 같애. 

왜요?

왜냐면, 내가 원래 진짜로 이틀 뒤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거든? 그랬으면 너랑 그렇게 연 끊어졌겠지. 근데 갑자기 부장님이 나보고 출장을 연장해달라고 사정사정을 하는 거야, 난 재수 옴붙었구나 했는데...

그랬구나. 

...왜 별로 놀라는 눈치가 아니야? 

음. 한 번 더 할까? 

왜 말을 돌리지?

그래서 한 번 더 하기 싫다고?

...해, 하는데, 너 좀 의심스럽... 아, 으응...!



박지민이 생각보다 더 치밀한 인간이라는 건 끝까지 몰랐으면 해. 나는 그냥 당신의 빛나는 비너스로 남을래요. 물기를 머금어 빛나는 새까만 눈동자에 키스하며 읊조린다. 내가 더 많이 사랑해요. 내 밤하늘. 








계략공 지민이 한 번 보고 싶어 시작한 것이... 




빛나는 것을 좋아해 그래서 너를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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