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술 마시고 토하다가 판단력과 양심을 같이 토한 게 분명했다. 아니 근데 진짜 그건 송은석의 탓이 아니었다. 하필이면 그날의 안주가 스무 살 이후 99번의 연애에서 101번 차인 송은석의 위대한 업적인 게 문제였지. 거기다 대고 송은석이 이번에 썸타는 사람과는 느낌부터가 다르다고 항변해야 씨알도 안 먹혔다. 시발.
100번째 남자친구
성찬 은석
다들 송은석의 말을 같이 씹어 넘긴 이유. 그래봤자 테이블에서 송은석의 지난 연애를 물고 씹고 맛보는 게 존잼이었기 때문이다. 대단한 연애 전문가들 납셨다. 하기야 원래 불구경, 사랑 구경, 싸움 구경이 제일 재밌으니까. 송은석은 슬슬 사람들이 두 개로 보이기 시작할 때쯤 그냥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정성찬이 거기 있는 거 빼고.
애초에 걔가 테이블 중앙에서 제일 신나게 입터는 게 말이 안 됐다. 송은석이 알기로는 정성찬이나 지나 연애에 관하면 전력이 비슷했다. 물론 정성찬은 99번 사귀면 101번 찼다는 게 좀 다르긴 한데. 아무튼 송은석의 판단에 그건 안 중요했다. 헤어졌다는 사실만 남는 거지. 다른 게 뭐가 중요해. 너 F야?
은석아 구질구질하게 굴지 좀 마.
야 이게 팩트야.
무슨 소리야. 팩트는 너는 계속 차였고, 나는 계속 찼다는 거야. 클라쓰가 다르지.
헤어졌으면 다 똑같지 지랄. 아무튼 난 이번엔 다르거든?
긓래ㅎ 잘ㅎ 해 봐ㅎㅎㅎㅎ 근데 이번에도 안 되면 그냥 포기하고 가까운데서 찾아라.
잘해보라는 말을 진심 어린 격려로 받아들이기엔 웃음소리가 너무 많이 섞이지 않았나? 은석은 욱했다.
아 진짜, 내가 이번 썸 제대로 안 되면 정성찬 애인…… 우우욱.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동시에 욱해서 문제였지. 기어이 신나게 송은석 놀리던 정성찬이 다급하게 입 틀어막은 송은석 뒷못 잡아다가 화장실에 던져 넣었다. 어휴, 니는, 술도, 못 마시는 게, 잘하는, 짓이다. 박자마다 한 마디씩 예사롭지 않게 잔소리 쪼개 넣으면서 송은석 등도 퍽퍽 내리친다.
눈 뜨니까 익숙한 정성찬 자취방이었다. 목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팔다리도 결리는 은석이 천장 보면서 눈 몇 번 깜빡이면서 현실감이나 불러오려고 애썼다.
해장해야 하는데 이 새끼 어디 갔지. 마른세수를 하면서 몸을 일으킨 은석이 대충 행거에 걸린 롱패딩이나 아무거나 주워 입었다. 일어나보니 옆에 없는 정성찬이 뭐 하는지는 안 궁금한데, 그래서 오늘의 해장 메뉴는 뭐로 생각하고 있는지는 좀 궁금했다.
담배나 한 대 피우려고 했는데.
그게 정성찬 롱패딩에 들어있는 정성찬이 산 담배란 건 중요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송은석 롱패딩 주워 입고 나간 정성찬도 주머니에 있는 송은석 물건을 자기 것처럼 쓰고 있을 테니까.
공유가 가능한 건 그런 것들. 자취방 비번, 까만 롱패딩, 담배, 라이터, 소주잔, 친구.
암묵적 흡연구역인 빌라 옆 골목 구석에서 마주친 썸녀 말고. 어제 일찍 주무시겠다던 카톡 창 속 은지 누나가 왜 아침부터 포장해 온 뼈해장국을 정성찬에게 내밀고 있지?
아니 차라리 100번 사귀고 100번 차인 거면 인정. 근데 얘는 사귄 것보다 차인 게 더 많잖아? 그게 뭔지 알아? 고백하기도 전에 차인 거지. 진짜 개웃겨. 은석아 넌 왜 이렇게 얼굴값 못하고 사냐.
머릿속에서 신나는 비웃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아직 술이 덜 깼나.
시발. 방금 99번 사귀고 102번 차인 사람 된 것 같은데. 몹시 담배가 말린다. 은석은 대충 정성찬 주머니에서 뺀 담뱃갑이나 뒤적이면서 휘적휘적 골목 안쪽으로 걸어갔다. 정성찬과 은지 누나가 고개 돌려서 골목 입구 막으면서 들어오는 정성찬을 쳐다보거나 말거나.
“은석이도 여기 살아? 근데 너 원래 담배 피니?”
담배 싫어한다고 해서 일부러 은지 누나 만날 때마다 섬유탈취제 범벅하고 나갔던 은석이 대충 고개나 끄덕였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아. 성찬아. 얘가 누구냐면은, 나 아는 동생인데. 여기 사는지 몰랐네.”
“아. 진짜요.”
정작 정성찬은 별 감정 없는 것 같이 안광 뒤진 눈으로 대답하는데 은지 누나만 열심이었다. 아씨. 머리 아파. 또 고백도 전에 차인 느낌이고 뭐고, 당장 머리 아파 뒤지겠던 은석이 죽어라 정성찬 롱패딩만 뒤졌다. 근데 이 새끼는 라이터를 대체 어디다 둔거야.
아니 나느은, 성찬이 니가 연락이 안 되잖아. 술은 많이 마신 것 같구. 그래서 그냥 무난한 해장국 포장해 왔는데…….
아, 진짜요. 고마워요. 누나.
우리 사이에 뭐가 고마워. 당연하지. 어떻게, 지금 먹을래? 내가 이것만 차려주고 가도 돼구.
시발, 라이터 진짜 없네. 신나게 정성찬 롱패딩 주머니 털어대던 은석의 분주한 손이 멈췄다. 입으로는 은지 누나한테 꼬박꼬박 대답해주면서 송은석 눈치 보던 정성찬이 다시 길 비켜주려고 몸을 틀어주려고 했다.
“자기야. 혹시 내 라이터 쌔볐니?”
지난 세기말 유행하던 삼류 로맨스 코미디의 한 장면처럼 두 사람의 시선이 송은석에게 집중됐다. 은석이 은지 누나 눈길 피하며 뒤에서 정성찬 끌어안고 롱패딩 주머니에 두 손 쳐박았다.
툭. 길바닥으로 낙하한 해장국 봉지에서 깍두기 봉지가 눈치도 없이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이 새끼는 집에서 뭐 먹고 사는 거지. 냉장실은 기대도 안 했다 치고, 냉동실에도 뭐가 없다. 찬장까지 열어보고 고민하고 있으려면 뒤에서 정성찬이 오지게 깐죽거렸다.
“자기야, 요리하게?”
“닥쳐라.”
“왜. 자기야 성찬이도 자기가 해준 밥 먹을래.”
“미친놈인가 진짜.”
3인칭 실화? 아직 해장도 못해서 지난 밤 먹은 술이 또 올라올 뻔했다. 존나 빨리 뭐라도 때려넣고 속 좀 가라앉혀야 할 판국에 아침에 은지 누나가 사다 준 해장국은 정작 싱크대 위에서 벗어나지도 못했다. 나름의 알 수 없는 자존심으로 해장국을 거부한 은석이 하릴없이 정성찬 부엌이나 뒤졌기 때문이다. 원래 정성찬 꼬셔서 대충 감자탕이나 시켜 먹으려고 했는데, 남이 정성찬에게 사다 바친 뼈해장국 보니까 감자탕 먹고 싶던 마음이 싹 사라지더라.
근데 정성찬은 걍 남이 사다 바친 해장국 처먹으면 되잖아? 왜 괜히 옆에서 사람 빡치게 하지? 정성찬을 향한 모든 말을 올라오는 숙취와 함께 꾹꾹 삼켜낸 은석이 겨우 발견한 참치캔 하나 들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라도 먹어야겠지.
살다 살다 이렇게 쪽팔릴 수가. 아니 솔직히, 양다리나 어장관리……에서 차이는 쪽이 된 건 처음이 아니긴했다. 거기까진 오케이.
예를 들면 그 음악하는 형이랑, 그림 그리던 누나, 국비 지원으로 코딩 배우던 걔. 그리고 또 뭐라더라 무슨 자기는 폴라포? 롤리폴리? 폴리아모르인지 뭔지를 추구한다면서 다자연애가 세상을 구원한다던 형도 있었다. 진짜 그 형은 대박이었는데. 막 자기의 다른 애인들도 소개 시켜 주겠다고 경기도 어디 펜션으로 부르는 거 안 갔더니 송은석더러 너무 보수적이라고 차더라. 미친놈.
아무튼 이꼴저꼴 다 봐서 어지간한 건 놀랍지도 않았다. 그런데 저울 반대편에 자기랑 같이 올라가 있던 게, 정성찬이다? 얘기가 또 다르지. 7년 지기 친구랑 비교해서 송은석이 떨어졌단 건데. 진짜 가오 다 죽는 거였다.
“은석아. 까불지 말고 그냥 해장국 같이 먹어.”
“나 해장국 알레르기 있잖아.”
“지랄 좀 그만하고. 니가 우리집에서 맨날 해장한다고 뼈해장국 시켜서 이제 서비스에 체크 안 해도 서비스가 오는데.”
너무 오래 아는 사이가 이래서 문제였다. 정성찬 너는 나를 너무 잘 알아. 사라져줘야겠다. 은석이 괜히 자존심 부리는 사이 오늘의 집에서 산 액자 겸용 접이식 테이블 펼친 성찬이 해장국 뚜껑까지 연 다음에야 은석을 불렀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괜히 고집부리느라 참치캔 챙겨서 앞에 앉으면 성찬이 혀를 차며 하나뿐인 밥을 은석의 쪽으로 밀어줬다.
“넌 밥 안 먹냐.”
“응. 나는 우리 자기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지.”
“밥상에 토하는 꼴 보고 싶으면 계속해라.”
“왜? 아까는 니가 먼저 그랬잖아. 막 뒤에서 껴안으면서. 자기야. 혹시 내 라이터 쌔볐니?”
“그만하라고 했다.”
썸 제대로 안 되면 정성찬 애인한다고 했던 말이 하필이면 술자리의 마지막 기억인 게 문제였다.
아니 사실 진짜 솔직하게는 그것보단 썸녀인 줄 알았던, 썸 같았던 사람한테 자존심 부리고 싶었던 것 같기도. 은지 누나 누나만 잰 거 아니야. 나도 잴 수 있어. 아니 나는…….
은석이 두 숟가락 만에 들었던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앞에서 계속 싱글싱글 웃으면서 놀리던 정성찬이 그제야 은석의 눈치를 본다. 야, 그만할게. 밥 먹어라.
“됐어. 너나 먹어.”
진짜 입맛 떨어져. 오늘로 99번 사귀고 102번 차인 남자가 된 송은석, 막 입맛을 잃다. 은석이 밀어준 숟가락과 한 귀퉁이 조금 사라진 밥을 끌어오며 성찬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럼 접이식 테이블에 구겨 앉아 해장국 먹고 있는 집주인에게 묻지도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침대를 무단 점거한 은석이 다시 이불 끌어안고 옆으로 누워서 폰이나 들여다봤다.
“야 정성찬. 근데 너 혹시 그 누나랑 잘해보려고 했냐.”
호오오오오오오옥시
마아아아아아안약에
잘 해보고 싶었던 거면 좀 미안할 것 같기도 하고. 일을 벌이긴 했는데 막상 지나고 나니 슬그머니 아주 작은 양심이 고개를 든다. 은석이 슬쩍 입을 열었다. 남은 깍두기 꼭꼭 씹어 삼킨 성찬이 뼈에서 고기를 발라내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다.
“아니? 난 오히려 잘해보고 싶은 사람 따로 있음.”
고기가 잘 안 떨어지네. 성찬이 기어이 양손에 젓가락 하나씩 든 채 고기 분리에 들어갔다. 잘되려고 하는 걸 망친 게 아니라니 그거 다행이네.
- 가 아니라.
“너 쓰레기야?”
배가 불러가지고. 누군 썸 잘해보겠다고 섬유탈취제 한 달에 한 통 쓰기 챌린지 할 동안 너는 지금 어장쳤단거야 뭐야? 난데없는 은석의 극딜에 성찬의 손에서 젓가락이 떨어졌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떨어진 지 3초 안에 주워야 한다는 3초룰도 까먹은 성찬이 가뜩이나 큰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은석을 쳐다봤다.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왜 자꾸 지랄인데.”
“너는 사람 마음이 그렇게 우스워?”
“와, 나 진짜 어이가 없다. 왜 갑자기 급발진인데!”
왜겠냐? 누군 102번째 차이는데, 누군 102번째 사람을 차니까 그렇지.
연애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조건.
외모. 외모지상주의가 아니라 진짜로 사람마다 취향의 최저선이 존재하니까. 그리고 성격. 이것도 딱히 어떤 성격이 유리하다는 건 아니고, 취향의 영역이긴 하다. 존중해 취향아. 그리고 재력, 명예, 기타 등등.
정성찬 가로시되, 은석아 솔직히 얘기해 봐. 나 믿지?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너는 외모나 성격이나 뭐 다른 건 다 괜찮거든? 솔직히 나라면 절대 너 못 참. 그러니까 오해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줘도 돼. 손으로는 은석의 뺨을 주무르면서. 은석이 양 볼을 내준 채 우물거렸다. 흐즈므르.
참고로 오해하지 말란 말 뒤에 진짜 오해할 수 없는 말이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성찬이 금쪽이 상담하는 오은영 선생님처럼 친절하고 인자한 미소를 지은 채 은석을 쳐다봤다.
“너 혹시 안 서?”
“뒤질래?”
“그럼 엄청 못 하는 건가. 아니면 뭐, 특이한 취향 있어?”
“진짜 죽이고 싶다.”
애초에 이런 얘기를 시작하는 게 아니었다. 은석이 옆에 있던 베개를 던지며 씩씩거렸다.
사실? 남자? 가오가 있지? 절대로 친구에게 이런 연애 상담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저는 잘생기고 빠지는 것도 딱히 없는 것 같은데 사귈 때마다 차입니다. 저는 할 만큼 하는데 뭐가 문제인가요? 블라인드 어플에나 올릴 법한 질문을 애초에 친구한테 할 이유가?
있었다. 그럴 이유가 충분했다. 안타깝게도 아직 송은석은 대딩 따리였고, 그렇다고 에타에 올려보면 얼굴 인증하라는 댓만 달릴 것이었으며(이미 올려봤다는 얘기는 굳이 하지 않겠다), 은석의 주위에서 은석만큼 연애를 자주 많이 하는 사람은 정성찬 뿐이었기 때문에.
“그런데 은석아.”
자기 어깨 치고 튕겨 나간 베개를 주워다가 침대에 올리면서 성찬이 자기 무릎도 쓱 침대 위로 올렸다. 침대 구석에서 헤드에 기대앉아 있던 은석 쪽으로 훅 몸을 기울이는 바람에 얼결에 성찬의 얼굴을 정면에서 마주한 은석이 귀가 빨개진 채로 애써 무표정을 유지했다. 은석의 허벅지 옆쪽을 짚은 성찬이 생글생글 웃었다.
“나는 이거 말곤 너 차이는 이유를 모르겠는데. 나라면 절대 너 못 찬다니까?”
“미친. 그 문제 아니라고.”
“진짜?”
지금 이 자세를 하고 너는 그게 중요하니. 지나치게 가까운 자리에서 한참 동안 눈이 마주쳤다. 꿀꺽. 은석이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게 열이라도 나는 것 같이 느껴지는 바람에 정신줄 단단하게 잡았다.
잡았는데, 와. 정성찬이 어떻게 사람들 후리고 다녔는지 대충 알겠다. 위를 점령하고 든 얼굴에 은석이 눈을 질끈 감았다. 가까이서 정성찬 웃음소리가 울렸다. 문득 침대가 출렁거리고 훅 끼쳐오는 무게가.
그러게. 그 문제는 아니네. 성찬의 무릎이 꾹 은석의 아래를 눌렀다. 아닌 게 아니라 그 문제는 없다니까. 오히려 지금은 낮게 깔면서 귀 가까이에서 웃음 섞어 흘리는 정성찬 목소리에 꼴린 게 문제라면 모를까. 혹시 연애를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사실 이거였나? 근데 그렇다고 내가 지금까지 못했던 건 아닌데. 은석이 잠깐 다른 생각으로 도피했다. 진짜로 존나게 꼴렸는데 지금 자기가 꼴린 상대가 정성찬이란걸 바로 인정하기엔 자존심 상해서 그랬다.
그러다가 아야. 송은석 목 빨던 정성찬이 갑자기 이 세워서 송은석 목에다가 잇자국 내며 깨물었다. 당황한 은석이 어느새 눕혀진 몸을 위로 빼며 성찬을 쳐다봤다. 그래봐야 침대 헤드였는데도. 은석을 쫓아간 성찬이 씨익웃었다. 입술만. 눈은 절대 안 웃고.
은석아, 이럴 때 다른 생각하는 거 개매너야.
괄호 열고 그래서 차였나 본데 괄호 닫고. 정작 성찬은 아무 말 안 했는데 순간 행간을 읽어버린 은석이 잠깐 대답할 말을 잃었다. 근데 좀 자존심 상하는 것 같기도? 누가 말하기를 섹스는 게임이라던데. 그러면 거기서 지적받는 건 자존심이 상하지. 순간 불붙은 은석이 그대로 팔 뻗어서 정성찬 끌어당겼다. 자연스럽게 은석의 가슴팍에 얼굴 박은 성찬의 손이 불쑥 은석의 옷 속을 파고들었다. 정성찬이 작게 웃는 소리.
“씨발 너는, 이럴 때 웃는 건 매너냐.”
“아 알았어. 안 웃을게. 이럴 때 웃는 거 별로구나, 은석이는.”
둘이 잤니? 잤어?
네.
둘이 사귀어?
아니오.
때때로 둘은 잤다. 아니 가끔씩, 아니 종종, 아니 자주.
어느 날. 송은석 자취방에서.
“내 생일 지나면 나한테 형이라고나 불러라.”
“그런 취향 있어?”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한 말인데 놓치지 않은 성찬이 가까이에서 예쁜 표정 지으면서 그랬다. 팔을 뻗어서 대충 정성찬 머리 쓱쓱 쓰다듬어 준 은석이 곰곰이 생각한다. 형 소리 듣는 취향? 딱히. 생각해보면 형 소리를 한 적이 더 많긴 했지. 아무래도 연상을 만난 적이 많았으니까? 근데 정성찬이 형이라고 부른다?
“은석이 형.”
“…….”
“진짜 취향 있나 보네.”
빨개진 귀는 뭐 숨길 방법도 딱히 없다. 성찬이 은석의 귀를 신기한 듯 만지작거리면서 중얼거렸다. 형 소리가 왜 좋지?
그게 왜 좋냐면,
“형.”
“……어?”
“형이라고 부르니까 좋아요?”
지도 좋아하면서. 마지막 말은 못 했다. 정성찬이 진짜 좋아했기 때문이다. 계속 해 봐. 송은석 또 불러봐. 그래놓고는 바로 송은석 입술 빨면서. 열렬한 반응에 대한 송은석의 속마음. 말을 하게는 해주고 요구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다음, 그냥 술 먹다 가까운 모텔에서.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술기운이 오르면서 머리에도 열이 올랐다. 덩달아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송은석은 베개 끌어안고 흔들리는 대로 몸을 맡겼다가 자기도 모르게 눈물 딱 한 방울 흘렸다. 그리고 진짜 골로 갈 뻔했다.
다음 날 아침. 프론트에서 온 전화소리에 깨자마자 송은석이 정성찬 머리 쥐어뜯었다. 너 미쳤냐. 그러거나 말거나 머리 잡힌 채로도 정성찬은 실실 웃고. 야, 이건 내 취향인 듯. 너 전에는 하다가 운 적 없냐? 우는 표정 봤으면 너 못 찼을 텐데. 송은석은 거기다 대고 대답해줬다. 미안한데 눈물 흘린 결과가 이런 거면 혀 깨물고 눈물 참아. 어디 가서 그거하다 죽었다고 소문날 일 있냐. 진짜 어제 너 미친놈인 줄 알았어.
그리고 다시 정성찬 자취방. 다음, 술 먹다 화장실에서. 끝까진 안 갔다. 다음, 또, 다음, 또,
그런데도 여전히,
둘이 잤니? 잤어? 네.
둘이 사귀어? 아니오.
정성찬과 송은석은 딱히 여지충 지망생은 아니었다. 당연했다. 그들이 그런 식으로 관계 정의에 미적지근했더라면 각자 99번의 연애라는 대기록을 세우지는 못했을 테니까. 송은석은 그제야 깨달았다. 인터넷에 ‘실수로 친구랑 잤어요ㅠㅠ’ 올리는 사람들도 다들 각자의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물론 그 사정이 그 사정과 관련된 게 문제긴 한데.
별로 특별한 일은 없었다. 알바 끝난 송은석이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정성찬 자취방으로 퇴근했고, 둘이 같이 OTT로 영화 보다가 정신 차리니까 송은석이 정성찬 목에 팔 휘감고 고개 젖히고 있었다. 성찬이 대충 근처를 더듬었다.
푸쉬시. 언제 다 썼는지 나오라는 젤은 안 나오고 바람 소리만 들린다. 힘으로 해결해보겠다고 몇 번 젤 통 쥐어짜던 성찬이 빈 통 내던지고 다시 주위를 더듬거렸다. 그러는 동안 송은석은 입 안에 고인 침이나 삼키면서, 으응- 너 오늘 좀 급한 듯. 평가나 하고 있었고.
결국 다른 건 못 찾고 핸드크림이나 찾았다. 카톡 선물하기 단골 그거. 하는 수 없이 성찬이 손에 핸드크림 짜내고 있으면, 으응 소리 내던 은석이 표정을 찌푸렸다.
“야, 나 그 냄새 싫어해.”
“나도 별로 좋아하진 않거든. 안 급하냐?”
“아니, 나 스무 살 때 아무것도 없어서 한 번 쓰고 다음부턴 죽어도 그건 안 쓴다고.”
당연하지. 좋은 기억일 리가 없다. 처음을 준비도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했다? 좋았겠냐고. 가까스로 끝내고도 진짜 온몸이 아팠다. 거기다 대고 그 형은 ‘은석아 너는 얼굴은 발랑 까져서 의외로 이쪽은 잘못하네.’ 같은 말이나 했고. 그리고 일주일도 안 지나서 헤어졌다. 개새끼.
손에 핸드크림 문질거리던 성찬이 문득 손을 멈춘다. 야, 송은석 너는. 어쩐지 참는 것 같은 목소리.
“여기서 다른 사람이랑 한 얘기를 꺼내냐?”
“뭐. 할 수도 있지.”
“아니 지금은 나랑, …하잖아.”
뭐를 한다는 건지 거기 들어갈 수 있는 단어는 무수히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송은석은 거기서,
“뭐를. 너랑 나랑 사귀는 것도 아닌데.”
최악의 똥차구남친 같은 발언을 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생전 처음 보는 정성찬의 얼굴을 마주한다. 싸하게 굳은 표정. 아직도 손등에 미처 못 펴 바른 핸드크림이 남아 있는데, 정성찬이 열받은 표정으로 몸 일으켜서 아무런 대답 없이 화장실로 들어갔다. 갑자기 요란하게 물 쏟아지는 소리. 남겨진 송은석은 그대로 당황해서 누워 있다가 그제야 뭔가 잘못된 걸 깨달았다.
일주일째다. 정성찬이 송은석 쌩까고 든 게. 이 정도면 송은석은 좀 억울했다. 정성찬이 뭔가 삔또 상한 건 알겠는데 뭔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기야 그걸 한 번에 눈치챌 수 있었더라면 송은석의 지난 연애 중 몇 번 정도는 성공사례가 있었겠지. 그나마 당장 정성찬에게 따지고 들지 않는 것만 해도 발전한 거였다. 물론 정성찬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도 모르겠지만. 정작 송은석도 모르고 그냥 비슷한 이유로 송은석을 찬 사람들만 알고 있겠지만…….
“형 성찬이 형이랑 싸움?”
“아니.”
“에이. 싸웠으면서.”
“아닌데.”
원빈이 코웃음 쳤다.
“안 싸웠는데 형들이 이렇게 따로 다닌다고?”
“우리 원래 이랬는데.”
“뭔 개솔. 진짜.”
형들 거의 한 몸 같이 붙어 다녔잖아. 맨날 형 뒤에 성찬이 형이 딱 달라붙어가지고. 그랬나? 은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원빈이 덧붙였다. 둘이 서로 연애 중일 때도 틈만 나면 같이 다니고, 나는 형들이 어떻게 연애를 그렇게 끊임없이 하나 궁금했잖아. 나라면 나보다 친구랑 더 붙어 다니는 애인 못 만났을 듯? 물론 그래서 형이 101번 차였겠지. 근데 성찬이 형은 101번 자기가 찼잖아?
딱히 알려진 건 아닌 것 같길래 101번이 은지 누나 포함해 102번으로 올랐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은석이 다시 고개를 기울인다. 목에서 두둑 소리 날 때까지. 아. 꺾인 목에 무미건조한 신음 한 번 내준 은석이 천천히 고개를 바로 했다.
야 나 한 대만. 송은석이 목 꺾어가며 고민한 결론. 모르겠고, 담배나 말렸다. 은석이 한쪽에 벗어뒀던 롱패딩을 챙겨들면 여전히 할 말 많은 표정으로 원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날씨가 갑자기 풀리면서 얼음이 녹았는지 근처 골목 바닥이 질척질척했다. 찝찝하네. 혹시 밤에 추울 수도 있다고 입고 온 건 하필이면 또 롱패딩. 은석이 주머니에서 익숙하게 담배랑 라이터를 꺼냈다. 그러다 문득 아, 정성찬이랑 담배 바뀌었네.
걔는 대체 왜 그랬을까. 한 모금. 뭐가 마음에 안 들었지. 한 모금. 그날 끝까지 안 가서 그런가. 한 모금. 그래도 정성찬이 섹스 가지고 뭐라고 할 애는 아닌데. 한 모금. 애초에 자기 전에도 우린 계속 친구 아니었나. 후우우우우.
“송은석?”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진다 싶더니, 흡연구역에 들어온 남자가 아는 척을 했다. 은석이 마저 연기 뱉어내며 남자를 쳐다본다.
“오랜만이다.”
송은석의 지난 연애의 대부분은 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었다. 그리고 송은석은 방학 중인데도 알바를 이유로 자취방에 눌러앉아 있었고. 그러니까, 몇 번째로 은석을 찼던 형이더라? 은석은 대충 속으로 남자의 순서를 셈했다. 아마 두자리 수까지는 안 넘어가겠지. 오랜만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가까이 다가온 남자가 은석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은석이 이제 담배 되게 익숙하게 핀다? 많이 컸네. 다른 건 어때? 많이 늘었나?
담배 피우면 섹시할 것 같다고 담배도 가르쳐. 술 취해서 얼굴 빨개진 게 예쁘다고 술도 자꾸 먹여. 지나고 보니 다방면으로 별로인 형이었는데, 그때는 그런 게 다 멋있어 보였었다. 그래봐야 송은석도 스무 살 된 지 몇 달 안 됐을 때라서. 사귄 경험도 뭐, 신환회에서 만난 동기랑 한 달. 술자리에서 챙겨주던 누나랑 100일 정도. 그리고 바로 그 형이었다. 웃는 얼굴이 개 착해서, 근데 그런 얼굴로 담배나 술 같은 스무 살이 넘어서야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너무 능숙하게 해서.
“오랜만에 만났는데 쉬면서 얘기 좀 할까?”
그 얘기가 그 얘기가 아닐 것 같은데. 은석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면서 여전한 남자의 낯짝을 쳐다봤다. 문득 묻고 싶었다. 형 아직도 카톡 선물 받기로 받은 핸드크림 써요? 그거 냄새 개구린데. 대학가 술집 골목 한쪽에선 모텔 네온사인이 반짝반짝.
결국 은석이 폰을 꺼내 들었다.
박원빈 나 먼저 감. 쏘리.
바로 롱패딩 주머니에 폰 처박아서 답장은 못 봤다.
뭔 소리야. 성찬이 형 지금 온다는데. 이참에 화해나 해.
하나가 빻은 사람이 하나만 빻았을 리 없다. 알맹이는 여전히 송은석이지만 그런 송은석도 성장이라는 걸 했다. 비록 101번, 아니 102번, 어쩌면 그 이상 차였다고 해서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좋은 사람이 없었던 건 아니다.
적어도 지금 눈앞의 남자보다는 모두가 나았다.
“얘기만 한다매요.”
“은석아. 너는 발전이 없어? 누가 모텔까지 와서 얘기만 해.”
기어이 송은석 뺨에 손 올린 남자가 짜증을 냈다. 말은 맞는 말이지. 사실 은석도 남자가 정말 얘기만 하자고 불렀을 거란 생각은 안 했다. 그런데도 모텔까지 온 건 확인하고 싶어서. 이런저런 모든 것들을.
천천히 은석이 돌아갔던 고개를 바로 했다. 빨갛게 부어오르기 시작한 뺨을 하고. 눈 똑바로 뜨고 남자를 노려보면 여전히 씩씩거리던 남자가 은석의 롱패딩에 손을 뻗는다. 이번엔 은석이 손이 남자의 손목을 잡았다. 성인 남자 간의 힘 싸움이면 사실 아주 특출난 몇을 빼고는 비등비등하다. 한쪽이 일부러 져주는 게 아닌 이상.
“형. 저는 제가 형한테 차였다고 생각했거든요.”
확인하고 싶었던 것들.
“근데 차인 쪽에 잘못이 있는 것 같잖아요.”
“송은석 안 할 거면 꺼져. 진짜, 돈만 버렸네.”
송은석은 정말 연애를 잘못하는 사람인가?
“근데 지금 보니까, 그냥 내가 운이 나빴을 수도 있겠다 싶어.”
정말 송은석에게 문제가 있어서 차였었나? 그 모든 지나간 사람들이 송은석에게서 같은 문제를 발견해서 송은석을 찼나?
“야. 너 안 할거면 꺼지라고.”
시발. 힘 싸움으로도 제대로 하면 지는 게. 은석은 잡고 있던 남자의 손을 내던지는 것처럼 놓았다. 남자가 씩씩거린다. 송은석, 이거 완전 미친놈 다됐네? 그 와중에도 그 형은 송은석한테 그런 말이나 하면서 바닥에 침이나 뱉었다.
바닥에 침. 진짜 이쯤이면 못 배운 것도 정도를 넘었다. 그런데 이런 새끼를 어렸을 때 만나서, 그래서, 저 새끼가 하는 방식도 연애라고 생각해서.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 마음이 전혀 없어도 꼴릴까?
“형. 내가 미친놈이면 형은 씨발새끼고.”
깨달음은 불시에 엄습해온다. 모텔 방문 박차고 나와 뒤에서 뭐라고 욕하는 남자의 고함을 들으며 은석은 문득 알것 같아졌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야릇한 신음들. 아, 좋아, 진짜, 하아, 좋아, 아니이, 거기 말고, 흐으…….
엘리베이터가 다시 로비에 멈춰 섰다.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통로에서부터 은석은 모텔을 뒤로 한 채 달리기 시작한다.
은석아. 네가 하는 연애는, 내가 하고 싶은 연애랑 조금, 어. 다른 것 같다. 물론 내가 하고 싶은 게 맞는 건 아니야. 그렇긴 한데. 너는 어 그냥 나한테만 맞춰주려고 하니까…….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미안해.
송은석 너는 날 좋아하긴 하니?
은석이 형. 형은 진짜 가끔 사람 비참하게 해요. 이럴 거면 왜 사귄다고 했어요?
은석아, 송은석.
헤어짐을 고하던 수많은 목소리. 그렇게 은석은 한숨을 쉬거나, 잔뜩 지친 얼굴로 말하거나, 화를 내거나, 그러다가 이내 송은석은 완전히 포기해버린 것처럼 말하던 목소리들 사이를 달리고.
솔직히 나라면 절대 너 못 참. 야, 이건 내 취향인 듯. 너 전에는 하다가 운 적 없냐? 우는 표정 봤으면 너 못 찼을 텐데.
아니 지금은 나랑, …하잖아.
마침내 도착했다. 정성찬. 걔네 집에.
그냥 비밀번호 안다고 밀고 들어가기엔 집에 정성찬이 없었으니까. 차마 들어갈 생각도 못 하고 빈집 앞 복도에서 기다렸던 참이었다. 연락할 정신도 없었다. 은석은 그대로 앉아서 끊임없이 정성찬이랑 나눴던 대화만 하나하나 복기했다. 어쩌면, 아마도, 그러니까 그날 정성찬의 말줄임표에 송은석이 답하면 좋았을 수많은 단어는 따로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야, 비밀번호도 알면서 여기서 왜, 잠깐만. 송은석 너 얼굴 뭐야?”
“성찬아.”
“술 마셨으면 얌전히 있던가, 왜 돌아다니다가 맞고 다니는데. 봐봐. 누가 때렸어?”
그러느라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정성찬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무작정 기다린 거다. 그러면 짠하고 나타난 정성찬은 오자마자 송은석이 사과할 시간도 안 주고 송은석 얼굴부터 살피고 봤다. 복도 등이 켜져 봐야 엄청 밝지도 않은데 송은석 얼굴부터 어루만지고.
커다랗고 따뜻한 손. 아직 겨울이라 은석의 볼을 조심스럽게 감싼 성찬의 손이 약간 거칠거칠했다. 핸드크림이라도 바르고 다니지. 은석은 잠깐 성찬을 걱정하다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 하나에,
“정성찬 너 핸드크림 버렸어?”
“송은석. 누구한테 맞았냐고. 뭔 일 있었어.”
“내가 싫다고 해서?”
은석이 자신의 뺨을 감싼 성찬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주르륵. 울려던 건 아닌데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당황한 성찬이 자기 손 축축해지는 건 상관 안 하고 급하게 은석을 껴안았다. 왜 울어, 너 왜 우는데. 그럼 송은석은 그냥 그대로 정성찬 어깨에 얼굴 박고 그대로 엉엉 울기나 했다. 해야 할 말이 많은데 그냥 그렇게도 눈물이 났다.
성찬아, 정성찬, 성찬아아. 하려던 말은 하나도 못 하고 그냥 이름만 부르면서 엉엉 우는 은석의 등을 정성찬은 가만히 토닥였다. 성찬아, 어, 내가 왜, 흐윽, 맨날, 어헝, 차였는지 알게써어. 흐읍, 나는, 근데, 어흑.
그게 맞는 줄 알았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그건 너무 비겁했으니까. 그 정도면 눈치가 없는 것도 죄였다. 좋아하면 조금 더 표현해도 좋았을 텐데.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조금 더 상대에게 말해줬어도 좋았을 텐데. 매번 참기만 하지 말고 가끔씩 싸워도 금방 풀렸을 텐데. 문득 찾아온 오답노트는 말하기에 너무 길다. 그리고 이제는 지난 연애 얘기를 지금의 사람 앞에서 하는 건 실례인 것도 안다. 은석이 울음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성찬은 은석의 등을 토닥토닥.
간신히 울음을 멈춘 은석이 이제는 눈가까지 퉁퉁 부은 얼굴로 성찬을 쳐다봤다. 은석이 손바닥으로 거칠게 눈물을 닦으면 성찬이 살살 은석의 손을 치우고 제 옷 소매를 당겨서 눈물자국을 닦아냈다.
“나 너랑 사귈래.”
또 차여도 상관없다고 각오했다. 간신히 숨 고른 은석이 천천히 얘기했다. 눈물 닦아주다 말고 성찬이 은석과 눈을 마주쳤다.
“사귀어 주라.”
“송은석.”
“응? 자기야, 나 차지 마……. 차도 또 고백할게.”
어쩌면 진작부터 정성찬은 송은석의 100번째 남자친구. 둘이 하던 건 진작부터 연애. 은석이 퉁퉁 부은 눈으로 볼품없이 고백했다. 눈이 마주친다. 그리고, 아, 성찬이 웃었다.
“내가 말 안 했어?”
“…….”
“나라면 너 절대 못 찬다니까.”
100번째 남자친구가 은석을 껴안았다.
그리고 송은석이 어쩌면 영영 몰랐고, 모르고, 모를 얘기.
호프집 문에 달린 벨이 딸랑 소리를 냈다. 오래 둘러보지도 않고 찾던 테이블을 발견한 성찬이 바로 테이블 옆으로 다가가 선다. 어째 보여야 할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송은석은?”
“몰라. 담배 한 대만 핀다더니 갑자기 먼저 간대.”
“좀 잡아 놓지. 술 취한 애를 혼자 보내냐.”
“형. 그 형도 다 큰 성인 남자야. 심지어 키도 커.”
외투도 안 벗고 송은석부터 찾는 정성찬을 보는 박원빈의 시선이 싸늘했다. 저렇게 걱정할거면서 애초에 왜 생까고 지랄. 눈에서 할 말이 읽힌다. 원빈아, 표정으로 말하지 마라. 성찬이 한 마디 했다.
“내가 뭘? 근데 이건 진심인데 형 빨리 화해해. 은석이 형 진짜 개 심란해 보이던데.”
“은석이가?”
“어. 송은석이.”
“송은석이는 반말이고.”
그 와중에도 살뜰하게 호칭부터 챙긴다. 원빈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근데 형. 갑자기 왜 웃냐.”
“나?”
“형 때문에 은석이 형 심란해한다니까 좋냐?”
말하면서도 원빈은 제발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오길 빌었다.
“아니 뭐. 그래도 걔가 내 생각 한다니까.”
그리고 바로 배반 당했다.
“와, 형 진짜 그건 좀 변태 같다. 은석이 형한테는 티 내지 마.”
“티 내도 모를걸?”
“그 형이 좀 둔하긴 하지. 형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모르는 것만 봐도 진짜 신기할 지경.”
“근데 그게 좀 귀엽잖아.”
무슨 장면을 떠올렸는지 성찬이 웃다 말고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야. 너도 혹시 송은석 귀엽다고 생각해? 그럼 갑자기 시비 털린 원빈이 쓰게 웃으며 조용히 계산서 찾아다가 정성찬 손에 쥐어 줬다. 응 됐고, 온 김에 계산이나 해. 송은석 그 형이 계산도 안 하고 튀었어.
“제발 토 나오는 형들 연애에 날 끼워 넣지 마.”
“끼어든다는 표현을 쓰네?”
“진짜 염병이다.”
“근데 진짜. 좀 귀엽잖아. 솔직히 걔가 눈치 없어서 철벽으로 찬 사람 세면 걔 찬 사람보다 훨씬 많을걸?”
“……형 쫌. 입은 무겁고, 지갑은 가볍게 해주면 안 될까?”
진작부터 송은석은 정성찬의 눈치 더럽게 없는 100번째 남자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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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었던 것: 갑자기 성찬이한테 "자기야" 부르는 은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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