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정집의 시작. 마녀의 화원.

 

윤기 어린 잎사귀, 해사한 꽃잎. 화려한 색채, 매혹적인 향기.

누군가가 정성 들여 가꾼 듯 작은 화원을 가득 채운 화초들의 자태는 싱그럽고 화사했다. 지나는 이들의 걸음을 한 번쯤은 멈추게 만들고, 또 한 번쯤은 아름답다 감탄하게 만들 만큼.

물론 아름답다는 이유로 무턱대고 만지면 큰 낭패를 볼 테지만.

아이에른 제국의 대공, 레이녹스 시더 오닉스는 무심한 눈으로 보이는 화초의 이름은 입안으로 되뇌었다.

천남성. 투구꽃. 협죽도. 디기탈리스. 벨라돈나.

아는 것만 이 정도였다. 이외 본 사람이 드물어 오래된 책에 그림으로만 남아 있는 화초의 이름들은 되뇌고 싶지도 않았다.

올 때마다 생각하는 바이나, 정말 흉악한 화원이었다.

대공은 때를 잊고 만개한 꽃에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제 앞에 앉은 이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절제된 몸짓으로 찻잔에 차를 따르는 손이 눈에 들어왔다. 길게 쭉 뻗은 손가락, 손톱을 짧게 다듬은 연한 분홍색 손끝. 하지만 그 손끝에는 거친 흠집이 제법 남아 있었다. 깨끗하게 씻기고 닦여 있지만 찬물과 흙을 만지는 손이라는 사실을 숨길 수 없듯이.

독살스러울 만큼 진한 꽃향기에 묵직한 흙냄새가 뒤섞여 코끝에 닿았다. 이어 산뜻하게 피어오른 차의 향기가 그 모든 향을 뒤덮었다.

“드시죠.”

경쾌하게 차를 권한 손은 아무렇지 않게 테이블 아래로 사라졌다. 그리고 연한 녹색이 감도는 금빛 눈동자가 둥글게 휘어진 눈매 아래로 살짝 가라앉았다.

어때, 마실 수 있겠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미소였다.

대공은 가만히 그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바라보기만 했다. 똑딱거리는 시계가 있다면 초침이 족히 다섯 번을 빙글빙글 돌았을 시간 내내, 아무 말 없이.

그러자 그린 듯 웃고 있던 눈매가 살짝 굳더니 이내 찌글찌글해졌다.

“크흠.”

싫으면 마시지, 눈에 왜 힘은 주시는지. 제법 어여쁜 선을 그리는 입술이 소리도 없이 꿍얼거렸다.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대공 전하.”

약간 발음이 즈언하로 들리는 것 같은데 착각일까, 아닐까. 이 역시 늘 궁금했지만 따져 물을 바는 아니었다.

“그린 포레스트.”

“예이.”

묘하게 끝이 늘어지는 목소리는 어딘지 장난스러웠다. 동시에 수도 외곽에 자리한 작은 화원의 주인일 뿐인 평민이 제국의 대공이자 북부 하이르네의 주인을 눈앞에 두고 보이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시건방지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공은 단도직입으로 용건을 꺼내었다.

“이틀 전 테하란 백작저에서 일어난 사건, 들었나?”

“백작저에서 벌어진 일을 일개 꽃집 주인인 제가 어찌 알까요.”

갸우뚱 머리를 기울이는 몸짓은 의아하다는 뜻으로 읽혔다. 하지만 눈꼬리에 장난기가 맺힌 것을 보면 아예 모르는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어디서 발뺌이더냐며 책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시간 낭비일 뿐. 대공은 미리 준비한 작은 주머니 하나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턱. 헐겁게 묶인 주머니의 주둥이가 벌어지며 차르륵, 금화가 흘러내렸다.

반짝이는 금화와 똑같은 색을 발하는 금빛 눈동자가 휘황하게 번뜩였다.

“사랑합니다, 고객님.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고백은 금화에 대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진지한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 와서 따지기에는 너무 늦었다.

초지일관으로 돈주머니 들고 찾아오는 고객을 사랑하겠다는데 할 말이 있을 리가.

“그래서, 테하란 백작저에서 일어난 일은?”

“밑도 끝도 없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어떻게 답을,”

턱. 차르륵.

“드리는 것이 인지상정!”

금화에 혼을 판 자의 흔한 태세 전환이었다.

“테하란 백작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모르지만, 위버론 후작 영애와 사일란 후작 영애가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같은 말이지 않나.”

질문 자체가 지금 거론된 두 영애가 테하란 백작저에서 벌인 일에 대하여 묻는 바였다.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엄연히 다르죠. 전자는 후자로 인해 발생한 결과이니.”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인과율을 따랐다. 그러니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원인부터 알아야 하는 법.

“제일 먼저, 석 달 전 제가 소론 공동묘지로 잠든 여인의 옷자락이라는 풀을 채집하러 갔을 때의 일부터 말씀드려야 할 것 같군요.”

어디로 뭐를 하러 가? 이해하고 싶지 않은 문장이었지만, 사위를 가득 메운 싱그러운 화초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따지자면 그러려니 할 수밖에.

불현듯 긴 이파리를 펼치고 자잘하고 수많은 하얀 꽃을 긴 꽃대에 달고 있는 화초 한 포기가 눈에 들어왔다.

저것인가. 바람도 불지 않는 온실 화원에서 하늘하늘하게 춤을 추듯 긴 꽃대가 살랑이는 게 마치……. 대공은 책으로 읽어서 아는 저 꽃의 근원과 쓰임새를 떠올리고는 생각을 털어내었다.

아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게 좋은 일이 종종 존재한다는 말의 의미가 여실히 느껴지는 중이었다.

“화원에 빈자리가 나서 새로이 심을 화초를 구할 겸 전부터 눈여겨보았던 잠든 여인의 옷자락을 캐러 갔는데, 하필 그 화초를 밟고 선 혼령이 있더군요. 흐느껴 우는 여인이었습니다.”

우는 혼령이 선 자리에 피어난 잠든 여인의 옷자락이라니. 저도 처음 보았답니다. 감탄하는 목소리와 더불어 쏟아지는 금화를 보는 것 못지않게 빛나는 눈을 보고 있자니 그게 얼마나 귀한, 아니, 흉한 것인지는 묻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뿌리 한 올도 다치지 않게 캐고 싶어서 일단 정중하게 자리를 비켜달라 청했더니, 그 여인이 그러더군요. 약혼자가 데리러 오기로 해서 기다리는 중이라고.”

이미 죽은 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부족하여 대화까지 한다는, 언뜻 기괴하고 질 나쁜 농담으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세상에서는 이상할 것 없는 이야기였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전하. 절대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혼령의 부류가-.”

“기억한다.”

소리 높여 웃고 있는 것과 춤추는 것. 웃으면서 춤을 추는 것이 있으면 님이 검신이건 뭐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으니 뒤도 돌아보지 말고 튈 것. 대공은 거의 세뇌 수준으로 들었던 말을 반사적으로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설명에 필요한 질문인가?”

“아뇨. 혹여 또 잊고 덤비실까 해서?”

“…….”

“크흠. 제가 원하는 것과 혼령이 원하는 게 일치하지 않겠습니까.”

한 자리에 박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발걸음을 옮기는 것.

“그래서 데리러 온다고 해놓고 오지 않는 약혼자를 찾았습니다.”

흐린 새벽 빛살 아래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믿고 기다리고 있는 혼령의 이름을 알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또한 데리러 온다는 약혼자가 누구인지, 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인지 연유를 알아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상대가 죽은 자라면 산 자보다 더 쉽게 알아낼 방법이 어디 한둘이던가.

“이미 죽어 가족 묘지에 묻혔다기에 쉽게 해결할 일이다 했는데, 웬걸요.”

살아 맺은 약속을 죽어 잊고 엉뚱한 곳을 헤매고 있다면 올가미 하나 엮어서 끌고 오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생각과 다른 상황이었다.

“혼이 생뚱맞은 남의 정원에 다른 혼령들과 묶여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지 뭡니까.”

맵시 좋은 입술이 긴 호선을 자아내었다.

“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말이죠.”

꺾인 목과 뒤틀린 팔다리로, 창백한 얼굴로 길게 흘러내린 혀를 물고. 그것도 혼자 그러는 것도 아니라 다른 망가진 혼령들과 한데 뭉쳐서 군무 아닌 군무를 추고 있었다.

“다른 것들처럼 웃고 있었으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텐데.”

세상 모든 약속은 깨어지라고 있는 거라고, 흐느껴 우는 여인에게 입바른 소리 적당히 늘어놓고 노잣돈 대신 어여쁜 꽃대 하나 꺾어 쥐어주며 이만 떠나라 했을 텐데.

“하필 울고 있어서.”

가야 한다고 약속했다고, 본인 이름은 잊은 주제에 약혼녀 이름만은 정확히 부르는 목소리를 들어서.

“길을 터주었더니 다행히 바로 약혼녀에게 가더군요.”

엉망으로 망가진 약혼자라도 돌아왔으니 되었다며 흐느끼던 여인은 눈물을 거두었고, 약속을 지키는 것 외에 여념이 없었던 약혼자는 기꺼이 기다려주는 여인의 품에 안겨 제 모습을 찾았다. 그리고 사이좋게 혼인 반지를 대신할 꽃송이 하나씩을 들고 손을 마주 잡으며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떠났다.

금화 두 주머니를 걸고 내던진 질문에 대한 답이 엉뚱한 서론을 길게 풀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대공은 잠자코 몇 가지를 따진 후 되물었다.

“혼령이 묶였다는 곳이 테하란 백작저인가.”

“영명하십니다, 즈언하.”

이번에는 착각이 아니었다. 대공은 길게 늘어지는 말꼬리와 요상한 말투에 어린 장난기를 읽고는 한쪽 눈썹을 미미하게 휘어 올렸다. 그리고 빙글빙글 웃고 있는 얼굴을 마주하고는 이내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이 흉악한 화원에서 오가는 대화는 대체로 다 이러한 맥락으로 이루어졌다. 언뜻 논점에서 다 빗겨나간 듯 실없고 시시덕거리는 농담이 주를 이룬다 하더라도 그 안에는 항상 뼈가 있었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존재하는 법이라 했다. 테하란 백작저에서 일어난 일은 위버론 후작 영애와 사일란 후작 영애가 저지른 일로 인해 발생한 결과라고 했으니.

“그 상황의 원인이 두 후작 가의 여식이라는 거겠지.”

“예.”

이유……. 어차피 들어봤자 이해할 수 없을 것이 뻔했다. 이 흉악한 화원에서 듣는 모든 죽음의 연유가 다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렇기에 대공은 이유를 묻지 않고 넘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청개구리 심보의 소유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시작은 못된 장난이었을 겁니다.”

“장난?”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팔락거리며 날아가는 나비 한 쌍을 보고 예쁘다고 생각하기 전에 돌을 내던져 날개를 찢어놓는. 아무리 자라도 뭔가 모자란 애새…… 아니고! 애 같은 종자들 말이죠.”

더 빈정거릴 수 있는데 예전에 경을 친 적이 있어서 한 번은 참은 모양이었다. 제대로 마음먹고 내뱉으면 무어라 했을 것인가. 모자란 애새끼?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데. 순간 대공은 궁금해하는 저를 깨닫고 입을 꾹 다물었다.

무겁게 이어지는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그들이 저지른 짓에 대한 다급한 설명이 이어졌다.

덜 자라다 못해 잘못 자란 것들이 우연처럼 마주쳐 비상하게도 서로를 알아차렸다. 삶이 심심하다는 이유로 장난처럼 돌을 내던지다가 돌 맞은 사람들이 우는 게 재미있었고, 하다 보니 눈물만으로는 심심해져 피를 보는 쪽으로 가게 되었다는- 예상했던 것처럼 딱히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대공은 미미하게 미간에 금을 그으며 되물었다.

“그러면 이틀 전 있었던 일은 묶였던 혼령들이 풀려나 원한이라도 갚은 건가?”

“그랬다면 시원스러운 복수극이 되었을 텐데, 애석하게도 아닙니다.”

시원스레 이어지는 답을 들은 대공은 잠시 제 앞에 앉은 이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웃는 얼굴이 묘하게 눈에 걸렸다.

“그대가 개입했나?”

“아니, 그게 무슨 말씀,”

턱, 차르-. 금화가 주머니 밖으로 흘러나오기도 전에 칼 같은 답이 돌아왔다.

“-하신 것처럼 제가 약간 손을 썼습죠!”

“약간?”

“예, 약간. 아주 약간. 진짜 조금.”

금화 세 주머니. 흥분으로 인해 발갛게 물든 엄지와 검지가 가느다란 틈을 만들어내었다. 대공은 그 손끝과 그 틈에 시선을 주고는 불신을 굳혔다.

“조금 손을 쓴 것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

그런 일. 테하란 백작저에서 벌어진 일을 표현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단순하고 뭉뚱그린 단어였다.

“제가 근래 새로 들여온 화초 돌보느라 바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점은, 다 자업자득이라는 사실입니다.”

다른 말로는 업보라고 하는데 이 세상에서는 아직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려나. 날 잡아서 주입식 교육을 또 해야겠네. 긴 눈매가 둥글게 휘어지며 잔혹한 장난기를 가득 드리운 금빛 눈동자를 감추어주었다.

“제가 한 일은 정말 별것 없습니다.”

딱히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달래어줄 이유와 명분은 없었지만 뭐 어떠랴. 원혼이 직접 원한을 갚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죽은 자가 산 자의 세상에 개입하는 것에는 많은 제약이 따르니.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을 바라본다는 했으나 이런 일에 굳이 십 년을 쓸 필요가 있을 것인가.

죽은 이들은 울다 사라져도 산 자들은 시시덕거리며 웃고 있을 터인데.

“다른 사람을 망가뜨리고 죽이는 것을 희열로 느끼는 한 쌍이니 세상에 그토록 딱 맞는 연분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애먼 이들 앞날 조…… 크흠, 망치지 말고 둘이서 평생 쿵짝거리며 잘먹고 잘살라는 의미로 사랑의 묘약을 딱 한 방울씩 먹여주었죠.”

사랑의 묘약. 언뜻 듣기에 사기꾼이 순진한 사람들을 등쳐 먹으려고 만든 수상한 약 같았다.

하지만 지금 대공의 눈앞에 있는 이는, 누구든 입에만 대는 것으로 눈앞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영혼을 빼앗기는 것을 사랑의 묘약이라 한다면 그러한 효과를 가진 약을 정말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정확하게는 약이라고 이름 붙인 저주라 해야 옳을 터.

그러니 정말이냐고 되물을 생각은 없었다. 다만. 대공은 잠시 생각했다. 어떻게 먹였을까. 그게 궁금했다.

후작 가의 두 여식은 까다롭고 예민한 성질머리로 모든 음식과 음료를 제 시녀에게 먼저 먹였다. 모든 음식을 최소 세 명이 같이 먹었으나 잘못된 사람은 후작 가의 여식들뿐. 시신에도 아무런 흔적이 없다고 네 명의 의사가 증언했는데.

왜 그러냐는 듯 빙글 웃는 금빛 눈동자를 보니 의문은 금세 스러졌다. 하긴, 뭔들 못하겠나. 이 화원의 주인은 흉악한 것들을 다루는 솜씨만큼이나 수완이 괜찮았다. 하고자 한다면 황성에 스며들어 황족의 머리맡에 꽃 한 송이 놓고 나오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다고 답할 만큼.

“세상에 부작용 없는 약은 없고 필요하면 부작용도 치료 방편으로 쓴다고 했다.”

“스치듯 한 말을 기억하시다니. 총명하십니다, 즈언하.”

“정확하게 뭘 한 건가?”

집요하게 묻는 게 영 수상했지만, 이내 알 바냐 싶어졌다. 금화 세 주머니. 있던 의문마저도 불쏘시개로 써서 다 불사르고도 남았다.

“음, 저는 일단 연인 간의 사랑을 애욕으로 놓고 봅니다.”

“그대의 연애관을 물은 적 없다.”

“저도 제 연애관 말하는 거 아닙니다.”

첨예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내가 참는다 라는 눈빛을 만연하게 드리운 이가 말을 이었다.

“애욕은 불씨 같은 것이라. 어떤 감정에 붙느냐에 따라 그 사랑의 성질이 정해지기 마련이죠.”

묘약의 기제는 그와 같았다. 어떠한 감정에 불씨를 붙일 것인지 강제하는 것.

“두 후작 영애 사이에는 분명 같은 취미를 공유한다는 유대감이 제법 단단하게 존재하더군요.”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짓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은 하는 모양이었다. 그 유대감은 서로를 배신하지 못한다는 믿음을 한 축으로 삼고 있었다.

“그 배라먹…… 크흠흠, 유대감을 애정이라고 살짝 뒤틀고 그에 연인이라면 으레 가져야 할 애욕 대신 성욕과 갈망을 살짝 얹었습니다. 이게 쉽지 않은 일인데 서로를 얼마나 믿고 생각하는지 예쁘게 잘 쌓이더군요.”

금빛 눈동자가 가늘고 둥글게 휘어지는 눈매 아래로 찬찬히 가라앉았다.

“마지막으로 식욕을 섞었습니다. 색욕과 식욕은 대체로 결이 잘 맞아서 효과가 좋거든요.”

마치 신선한 재료로 맛있는 요리를 했다고 말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대공은 그린 것 같은 미소로 일관하고 있는 이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한 짓이로군.”

아름다운 색채와 매혹적인 향기를 자랑하지만 그 쓰임새는 흉악하기 짝이 없는 이 화원의 꽃들처럼.

“그럼요. 그렇게 되라고 품을 얼마나 들였는데요.”

독과 같은 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기분이었다.

“짐승처럼 보는 눈을 신경 쓰지 않고 정사를 일삼다가, 어느 순간 깨달았을 겁니다. 부족하다고. 색욕에서 비롯된 갈망에 식욕이 뒤섞였으니 가열 찬 허기가 결국 이성을 갈가리 찢고 고통마저도 태워버렸을 텐데.”

금빛 눈동자가 즐겁게 웃었다.

“제일 먼저 서로 혀를 뜯어먹지 않았을까요.”

고고한 후작 가의 두 영애가 가신의 저택 정원에서 옷가지도 제대로 걸치지 않고 정사를 나누며 서로의 몸을 뜯어먹다 발견된 사건이었다. 두 후작 가에서 여러모로 노력했으나 신체 부위 여러 곳이 크게 손실된 데다가 피를 많이 흘려 결국 살리지 못했다.

기괴하고 난잡하며 추악한 끝이었다.

대공은 끔찍하기가 이루 말할 것 없는 사건을 가볍고도 유쾌하게 논하는 목소리를 흘려들었다. 딱히 잘했다 잘못했다를 지적하고 싶지 않았다. 그 말 그대로 본인들이 지은 죄를 고스란히 이고 불명예스럽게 죽은 것이니.

다만 자식을 잃은 슬픔보다 말도 안 되는 죽음과 겹친 추문으로 인해 가문의 명예가 실추되었다는 점에서 두 후작이 노발대발하며 범인을 잡아달라 매일같이 황제에게 읍소했다. 황제는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언제나 그랬듯 일의 전모를 알아 올 것이라며 믿고 있다고 닦달을 해댔다.

그리고 등 떠밀려 찾아온 길에는 도저히 타인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해와 설득을 동반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딱 하나였다. 모르쇠. 앞서 말한 대로 세상에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좋은 일들이 종종 있었다.

“그런데 왜 이 일에 대해 알아보시는 겁니까?”

“질문이 너무 늦지 않나.”

“저야 뭐, 하문하시면 답해 드리는 게 본분이지 않겠습니까. 궁금해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해서요.”

그러면서 주섬주섬 금화 주머니를 제 앞으로 당기는 모습이 영 없어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공은 무심하게 답해주었다.

“황제 폐하께서 내게 혼처를 권하셨다.”

노인장, 진짜 망령이 들었나. 그간 그렇게 데 놓고 또 중매를 서?

“……그런 생각은 속으로만 해.”

“헙. 제가 소리 내어 말했습니까?”

아닐 것 같냐며 살벌한 시선을 받은 이가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금화 주머니를 챙기는 손만큼은 멈추지 않았다.

“황제 폐하께서 전하께 혼처를 권하는 것과 이 일이 무슨 상관…….”

달그락. 주머니에서 금화가 두어 개 굴러떨어졌다. 그리고 크게 뜨인 금빛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 서얼마, 전하와 혼담이 오간 상대가 후작 가 영애였습니까……?”

싸늘하다.

“어느 쪽이……?”

“둘 다.”

비수처럼 날카로운 목소리가 꽂혔다.

“그대가 내 혼담을 망쳐놓은 게 일곱 번째로군.”

이번에는 두 건이지만 특별히 한 건으로 쳐주겠다는 관대한 처분이 내려졌다. 지나치게 관대하여 오히려 더 무서운 바. 새하얗게 질린 손끝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호박, 아니, 금화 주머니 셋을 어렵사리 앞으로 밀어내었다.

“반납하겠습니다…….”

피눈물이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조상신이 보우하사 이상한 상대를 피한 것이라는 말도 세 번까지만 할 수 있었다.

사지 멀쩡하고 외모 뛰어나고 재력 권력 명예 다 가진 귀족이 벌써 공식적으로 여섯 번, 비공식적으로는 열두 번 혼담이 깨져 나갔다.

정상적인 상황이면 벌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뭔가 잘못되다 못해 저주받았다는 소문이 나고도 남았다. 단지 그 대상이 북부 하이른 방벽의 주인이기에 다들 쉬쉬하고 있을 뿐.

그러므로 저주받은 것처럼 보이는 상황을 조장하고 있는 장본인으로서 납작 엎드릴 수밖에.

하지만 대공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폐하의 강권 때문에 혼약을 진행했으면 비단 이 일을 제외하고도 여러모로 곤란해졌을 거다. 덕분이라 말할 일은 아니나 어쨌든 내 입장에서는 최악은 피하게 되었으니 수고비라고 치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전하.”

넙죽 고개를 숙이며 잽싸게 반납하려던 금화 주머니를 챙기는 손끝은 언제 희게 질렸냐는 듯 선연한 분홍색을 띠고 있었다.

대공은 희희낙락한 기색을 감추지 않는 이를 잠시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칼, 금빛 눈동자. 화려한 색조에 비해 용모는 어딘가 뛰어나지도 못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이렇듯 화색 만연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절로 시선이 갔다.

대체 금화를 얼마나 좋아하면 저런 얼굴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천년의 사랑을 마주했어도 저런 얼굴을 하지 못할 텐데. 저토록 귀한 것을 보는 애틋한 시선이 과연 독초 아닌 살아 있는 것에게 향하기나 할 것인가.

호기심과 뒤섞인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쓸데없게도.

안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어 시간을 확인한 대공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겠다.”

“예이, 살펴 가십시오. 배웅은 하지 않겠습니다.”

올 때 어서 오라 마중하지 않고 갈 때 잘 가라 배웅하지 않겠다고, 어차피 매번 다시 올 터인데 그런 번거로운 일을 할 필요가 있겠더냐고 처음부터 말했던 것처럼.

아직 신분 계급이 존재하는 제국의 수도에서, 북부의 주인으로 자리하고 있는 대공에게 화원을 운영하는 일개 평민이 이런 식으로 굴 수는 없는 법이었다. 굴종은 아니더라도 예의와 경의를 표해야 했다. 적어도 손님을 보내는 주인으로서 머리 숙여 안녕히 가시라는 말 정도는 해야 옳을 것이다.

하지만 대공은 무례를 지적하는 대신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더는 기억하는 사람도 없는, 전설 속에서나 존재하는 독초로 이루어진 이 화원에서 제국의 규율이 정해놓은 법도 같은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붉은 피나 푸른 피나, 스치면 죽는 독초 앞에서는 모두 평등할 터이니.

쌩하니 가버리는 대공의 뒷모습을 바라본 이가 결국 소리를 내어 웃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게 이 흉흉한 화원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보여 재미있기도 했지만.

“이럴 거면 눈에 힘은 왜 주는데?”

찻잔을 툭 건드리자 자기 특유의 맑은소리가 났다. 대공 앞으로 밀어두었던 찻잔은 깨끗하게 비워져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금화 주머니 챙기는 사이에 비운 모양이었다.

“허세가 겁대가리를 잡아먹었지. 쯧쯧.”

화원에 가득 들어찬 화초의 쓰임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 화초들을 심고 가꾸며 종종 산 것을 한 줌 핏물로 녹이는 약을 만드는 손이 이름도 모를 찻잎으로 차를 우려 가져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공은 늘 찻잔을 말끔하게 비웠다.

물론 차에 이상한 것을 섞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금화 주머니를 들고 온 손님에게 그 무슨 무례란 말인가.

다만 보기 드문 미인이 눈앞에 있으니 약간 놀려주고 싶었을 뿐. 냉랭한 표정을 지우고 곤란해 하는 얼굴을 하면 제법 눈요기가 될 것 같아서 늘 색다른 향과 색의 차를 만들어 가져왔는데, 별소용 없었다.

돌아서는 걸음 뒤에 남은 찻잔은 항상 비어 있었다.

틀렸어. 바랄 것을 바라야지. 대공은 찻잔에 핏물을 담아 내밀어도 기어이 마시고 갈 사람이었다.

첫 만남에서 직접 말했다. 객으로서 방문한 바이니 주인의 대접에 응하는 게 도리라고. 누가 봐도 독극물이라 명명할 법한 불투명한 보라색 차를 단번에 비우면서 하는 말이었다.

괜한 심술부린 사람 무색하도록.

“뭐, 그 후로는 건강에 좋은 약초만 써서 만들었으니까.”

적어도 한 달 정도는 소화 잘되고 잠도 잘 자고 과로해도 피로한 일 없이 일상을 보낼 것이다. 사랑의 묘약을 만들 때보다 더 공들여서 만든 약차이니 효과는 장담할 수 있었다. 금화 세 주머니 정도의 값어치를 할 만큼.

몸에 좋은 입에는 약이 쓰기에 화원을 나선 대공이 남모르게 입을 틀어막으며 이번에야말로 독이더냐고 헛구역질 두어 번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금화 세 주머니와 말끔하게 비워진 찻잔을 챙기는 연한 분홍색 손끝은 제법 경쾌했다.

 

아름다운 색채와 매혹적인 향기로 무장한 독초가 빼곡하게 피어난 화원 안.

오늘도 마녀의 혈족과 마녀의 비밀스러운 회담은 화기애매하게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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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로판(x) BL(x) 잡탕, 어디까지 할 수 있을 것인가.(o)

오랜만에 나타나서 왜 이런 글을 들고 왔느냐면... 그냥 제가 보고 싶어서...ㅠㅠ

장르가 왜 이러는지는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ㅎㅎ

즐겁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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