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귀를 한 게 아니라 포산산인에 의해 미래를 알게 된 어린 위무선의 이야기.

- 예전에 썰체로 연재했던 글을 소장본으로 만들기 위해 글체로 수정한 버전입니다. 

- 소장본 제작을 위한 퇴고 과정에서 몇몇 표현이 추가되거나 삭제되었을 뿐 크게 변경된 부분은 없습니다.









23.

위무선은 운심부지처에서 나름대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비록 아침마다 강염리가 깨우러 오기 전에 일어나는 게 버릇이 되어 다친 것을 잊고 벌떡 일어났다가 구르는 일이 몇 번 있기는 했지만, 강징이 다리 부러트린 거로도 모자라서 이젠 머리까지 깰 셈이냐고 화를 내며 이불을 더 얻어와 그 밑에 잔뜩 깔아주긴 했지만, 세 살짜리 어린아이도 그렇게까진 하고 자지 않을 모습을 본 남망기가 묘한 눈을 하는 게 창피해 죽을 뻔하긴 했지만,


그것들은 전부 평화로운 일 아니겠는가.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다시 엎어져서 자고 있으면 시간을 맞춰 데리러 온 남망기가 위무선이 졸음을 쫓으며 허둥지둥 나갈 준비를 하는 것을 조용히 기다렸다. 처음엔 바로 장서각으로 가서 종일 틀어박혀 죽어라 책만 읽었지만 인간은 본래 적응의 동물이라고, 남망기의 서늘한 시선 아래에서도 제법 자유를 느끼게 된 위무선은 가끔 그에게 토끼를 보러 가자고 조르곤 했다.


그럼 남망기는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드문 맑은 눈으로 위무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장서각은? 하고 물어보고, 위무선이 대답 없이 계속 웃고만 있으면 작게 한숨을 쉬면서도 토끼들이 잠들어 있는 풀밭으로 데려가 주었다. 그게 몇 번 반복된 후엔 아예 장서각은? 하는 질문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남망기 역시 위무선에게 적응하기엔 넉넉했던 시간들이라.


위무선이 제 품 안으로 파고드는 토끼 두 마리를 꼭 끌어안고 있으면 경계라도 보는 양 멀찍이 떨어져서 단정히 서 있던 남망기는 태양이 움직이는 것에 피할 도리 없이 늘어나고 줄어드는 그림자처럼 날마다 조금씩 가까이 다가왔다. 사실, 다가갈 수밖에 없었더랬다. 고통에 둔한 건지, 아니면 인내심이 강한 건지, 제 다리가 부러졌단 걸 도무지 인지하지 못하는 위무선이 허튼짓을 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위무선은 이제 토끼들이 당근보다는 배추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남망기가 생각외로 이 작은 짐승들을 더 아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긴, 이렇게 보드랍고 따스한 털 뭉치들을 누군들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따금 나란히 풀밭 위에 앉아 하얀 토끼를 한 마리씩 다리 위에 올려 쓰다듬고 있으면 위무선은 제 속 어딘가가 둥글게 부풀어 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대책 없이 풀려나가는 마음을 다잡아야 하는 것 잘 알면서도 이 순간만큼은 긴장을 조금 놓아도 되지 않을까, 그리 자기 위안 해가며.


‘위무선’에게 있어 남망기는 대체 어떤 존재였을까. 포산산인이 보여주었던 미래 속에서 위무선이 느낄 수 있었던 건 자신의 감정뿐이라 상대의 진심을 알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중에도 단 하나 확실한 것은, 남망기는 언제고, 어느 때라도, 설령 자신의 반대편에 서서 앞길을 막아서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함께일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그 종점이 ‘위무선’의 죽음을 향한 길목이라 하더라도.


그러니, 서투르게 짐작하기론 아마 떠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자꾸만 마음이 놓이는 게 아닐까 했다. 내 마지막을 외롭지 않게 장식해줄 사람으로 이보다 호화로운 인물이 있겠는가. 그게 적잖이 위안이 되어.


남망기에겐 위무선이 그림자에 감추인 제 속 쥐어 잡고 흔드는 태양이었다면 위무선 또한 남망기가 열기 띤 빛이라도 되는 양 그 앞에서 녹아내리기 바쁘니 아무리 남에게 관심 두지 않으려 애쓰는 남망기라 하더라도 그 낌새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어쩌자고 이러나. 분명 핀잔이자 한탄이어야 할 말의 끝자락이 어렴풋이 녹녹히 젖은 것을 느끼면 그 스스로도 할 말이 없어져 남망기는 굳이 짚어내어 화두로 올리지 않고 늘 침묵했다.


위무선에게 있어 더 가까울 것은 아마도 강만음일 텐데, 정작 위무선은 강만음의 앞에선 도통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예사로 가면을 덮어쓰는 반면 제 앞에선 이렇게 하는 것이 이치이자 순리라 피력하듯 시간을 더할수록 종종 잡소리에 진심 섞이는 날이 늘었다. 남과 다르다는 것은 그게 특이特異에서 기인한 것이든, 특별特別에 근본을 두고 있든 언제나 설레는 일이기에 남망기는 강징과 대화하는 위무선의 얼굴을 지켜보는 게 미처 인지하지 못한 습관이 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나 네게 사죄 대신 감사하는 게 낫단 말은 했어도 억지로 웃지 말란 말은 아직 못했던가.


위무선이 말을 거느라 고개를 숙이면 가끔 높이 묶은 검은 머리카락이 제 어깨 위로 소록히 정도로 쏟아질 가까운 거리에 앉아있음에도 진정으로 둘 사이의 거리가 얼마만큼 되었는진 가늠하기 어려워 남망기가 가만히 생각에 빠진 사이, 팔 아래를 빠져나간 토끼를 따라가 배춧잎으로 살살 꾀던 위무선은 녹빛 풀밭 위에 작은 태양처럼 둥글게 꽃대가 오른 민들레를 발견하곤 손을 뻗어 꺾었다.


그리곤 망설임 없이 입에 넣었다.


남망기는 잠시 하오下午의 햇살 아래 보다 고운 빛으로 반짝거리던 금빛 눈을 서너 차례 감았다 떴고, 위무선의 입술이 무언가를 씹는 듯 오물거리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다리 위에 앉아있던 토끼가 흰 옷자락을 타고 데구르르 굴러떨어지는 것에 신경 써줄 틈도 없었다.



“위무선!!”



그렇게 부르는 목소리가 언제나보다 훨씬 컸다. 나른하게 늘어졌던 눈을 땡그랗게 뜬 위무선은 남망기가 제게로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하자 늦게나마 대답하기 위해 급하게 입 밖에 걸친 민들레 줄기를 마저 쑤셔 넣었다. 남망기가 당장에 손을 뻗어 아래턱을 꽉 붙들자 턱이 부서질 것 같은 악력에 절로 끙, 앓는 소리가 샜다.



“뭐 하는 거야. 뱉어, 어서 뱉어!”

“아니, 읍, 그…!”



단단하게 힘을 준 손아귀가 닫힌 입을 억지로 벌려내고 고개를 숙여 반쯤 씹은 노란 꽃을 바닥에 토하게 만들었다. 턱관절이 빠질 듯 아프고 짓눌린 볼도 얼얼한 통증에 생리적인 눈물이 핑글 고이는데도 그러거나 말거나 벌린 입안을 들여다보며 남은 꽃잎마저 뱉으라 종용한 남망기는 위무선이 손등을 두드리며 기침을 하기 시작하자 겨우 손을 떼어냈다. 핏기없이 하얗던 피부 위에 발간 손자국이 떠올랐다. 남망기는 그제야 제가 방금 무슨 짓을 했나 흠칫 놀랐다.



“왜, 왜 그래? 나 뭐 잘못했어?”

“…꽃을, 갑자기… 왜…….”



언제나 침착하고 차분하던 남망기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버벅거리자 아직도 감각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볼을 문질러 달래던 위무선은 엉망이 된 민들레와 그와 엇비슷할 정도로 흐트러진 남망기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 참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정적을 깨는 웃음소리가 몹시 낭랑하고 시원했다.



“아, 이거? 괜찮아. 먹을 수 있는 꽃이야.”

“…꽃을?”

“응. 독도 없고 오히려 몸에 좋아. 어릴 때 먹을 게 없으면 산이나 들판에서 많이 뜯어 먹었어.”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당연한 일상을 읊듯 명랑한데, 그 삶의 형태는 누군가에겐 진정으로 평범이었을지언정 이렇듯 비참을 잊고 즐겁게 떠벌릴만한 일은 전혀 아니었다. 남망기는 위무선을 두고 하인의 자식이라 부르는 말을 이미 여러 번 들었고 그때마다 한결같이 무시했지만 오늘은 유달리 그 사실이 가깝게 다가왔다. 강풍면이 연화오로 위무선을 데려간 게 아홉 살 때의 일이라 했었던가. 그렇다면 그 이전의 위무선은. 그보다 앞서 부모를 잃고 거리를 떠돌며 살던 아이의 삶은.


과연 그것이 삶이었을지, 단순한 연명延命에 지나지 않았을지.


겪어보지 못한 고통을 감히 안다 말하는 것만큼 오만한 일이 없는 것을 잘 알기에 아무런 말도 더 얹어줄 수 없게 된 남망기는 일상으로 체현된 비극 앞에 다만 정적으로 묵도默禱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머뭇거리며 물었다.



“배가 고파?”

“어… 글쎄?”



배가 고픈가? 아닌가? 아침으로 뭘 먹었더라. 그냥 눈앞에 보여서 먹은 것 같기도 하고……. 덩달아 횡설수설하는 위무선의 종알거림을 가만히 들어주던 남망기는 위무선이 급기야 잘 모르겠다며 토끼 밥으로 가져온 배춧잎을 하나 입에 무는 걸 보곤 기다려, 딱딱한 목소리로 당부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잠? 어디 가?”

“기다리라고 했어.”

“응, 네가 기다리라고 한다면 기다릴 거지만…….”



위무선은 남망기의 걸음이 평소보다 빠른 것 같아 고개를 갸우뚱했다. 달달한 맛이 나는 배추 줄기를 우물거리고 있으니 안아줄 남망기가 사라져 방황하던 토끼가 품속으로 팔짝 뛰어들더니 그 끄트머리를 덥썩 물어 당겼다. 뭐야, 내가 먼저 먹고 있었잖아! 부루퉁한 목소릴 내던 위무선은 순간 아차 싶었다.



“아, 미안… 이거 원래 네 밥이지.”



위무선은 머쓱함에 뒷머리를 긁적이다 배추 줄기를 반으로 쪼개 두 마리에게 나란히 물려주었다. 평소에도 입이 심심하면 습관처럼 훔쳐 먹던 토끼 밥을 생각하니 더욱 미안해져서 부지런히 등과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다정하고 안온한 손길에 취하기라도 한 듯 토끼들이 잠들 때가 되어서야 남망기가 돌아왔다. 흰색의 작은 주머니와 함께.


저를 향해 내밀어주기에 일단 받은 위무선은 남망기가 다시 옆자리에 앉아 아까 굴러떨어진 토끼에게 나지막하게 사과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끈을 풀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주머니의 안에는 말린 과일이나 볶은 콩 같은 자잘한 간식이 가득 차 있었다.


설명을, 듣고 싶었는데. 갑작스레 뺨이 화끈 달아오르는 게 남 앞에 자랑할 것 못 되는 제 불우한 과거 때문인지, 혹은 예고 없는 친절 탓인지 알 수 없어 위무선은 그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사방을 뛰어다니기에 바쁘던 토끼들은 꼭 이럴 때만 얌전하게 자는 척이었다.


상대에겐 별 의미 없었을 사소한 배려에도 이렇게 들떠버리니, 호의를 맞아들이는 마음의 문턱이 참 낮기도 하지. 내 심장 소리가 이렇게 컸던가. 위무선은 얼떨떨한 심정에 고개를 돌리느라 눈을 아래로 고정한 채 평소보다 손의 움직임이 느린 남망기의 귀가 발갛게 달아오른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남망기 역시 제가 왜 그랬나 반은 후회하고 반은 부끄러워 입을 다문 것 또한.

 





 

24.

둘이서 그렇게 자주 토끼를 보러 가니 나름대로 비밀이었던 토끼 키우기는 얼마 못 가 남계인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러나 운심부지처로서는 위무선에게 빚을 하나 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이제 와서 토끼들을 밖에 내다 버릴 순 없었다. 게다가 위무선의 독단이었다면 몰라도 남희신에게 허락을 받아낸 남망기까지 거기에 동참하고 있으니 벌할 명분이 부족해도 한참은 부족했다.


그럼에도 눈 가리고 아웅은 해야 하니 운심부지처에서 토끼가 사는 건 여전히 비밀이었다. 남망기가 매일마다 부엌에 들러 남는 채소들을 얻어가도, 위무선이 복도를 걷다 남망기를 만나면 ‘오늘 토끼 밥 줬어?’ 하고 물어도, 남희신이 위무선에게 토끼들은 잘 크고 있냐고 물어도, 그건 비밀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니 토끼들을 보러 가는 일엔 강징도 섭회상도 끼어들 수 없었다. 애초에 위무선이 토끼를 보러 가는 건 장서각에 가기 전이었으니 다른 수학생들은 남계인의 강석에 참여할 시간이라 그럴 틈이 없기도 했거니와.


남망기는 이따금 위무선의 곁에 서서 강징의 투덜거림을 들을 때 제 속에 은근하게 피어나는 낯선 감정이 의아했다. 운심부지처의 삼천 가규 중 자만하지 말라가 있었으니 남망기가 그게 미약한 우월감이라는 걸 깨닫는 건 머나먼 미래의 일이 될 테였다.


위무선의 방치 아래 차도가 없었던 다리의 부상은 남망기가 약과 붕대를 장서각에 비치해 둔 이후로 빠르게 좋아졌다. 마침내 완치 판정을 받은 후에도 위무선은 슬쩍 남계인의 수업을 피하려 들었는데, 그간 위무선이 보인 행실이 몹시 아정했기에 남희신은 물론이고 남계인도 별다른 의심 없이 선뜻 불참을 허락해주었다. 가해자는 이미 고소에서 쫓겨난 지 오래였지만 다른 학생들과 어울리는 게 아직은 꺼려지는가보다 여기며 잠시 안타까움에 혀를 찼을 뿐.


막상 그 걱정을 받는 위무선은 암만 그래도 차기 종주인 강징과 제가 같은 대접을 받는 건 피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속셈이었지만. 실제로 아직도 몇몇 학생들은 강징이 위무선에게 대단히 친근하게 대하는 것을 보곤 둘의 사이가 도저히 도련님과 하인 사이 같지 않아 보인다고 의아스럽게 생각하기 일쑤였다.

아마 유일하게 위무선의 본심을 희끗하게 들여다보았을 남망기는 묵묵히 입을 닫았다. 이번만큼은 묘한 투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일찍이 강징이 그러했듯이, 위무선이 이것으로 조금 더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쁜 선택은 아니란 생각에서였다.





 



고소의 기온이 운몽보다는 낮다 해도 때는 신록新綠의 여름이라. 사방에 달린 창이 죄다 열린 장서각으론 종일 바람이 쉬지 않고 드나들었다. 서안 위에 놓인 종이가 날려가지 않게 책이며 문진으로 살뜰하게 눌러둔 위무선은 다 읽은 책을 한 켠에 곱게 쌓아두다 옆자리에 앉은 남망기가 고서를 필사하는 것을 보고 저도 붓을 쥐었다.


위무선의 서체는 남망기처럼 올곧은 정자正字는 아니었지만 조금 흘리는 듯한 선이 오히려 더욱 유려하고 깊은 여운을 남기는 필체였다. 생각나는 게 아정집밖에 없어 기억 속의 위무선은 개발새발 악필로 휘갈겼던 가규를 차근하게 옮겨 적던 위무선은 한참 적다 더 적을 게 없어 잠시 붓을 멈추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남망기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차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위무선은 새로운 종이를 꺼내 가장 위에 운몽, 연화오를 적었다. 그리고 아랫줄에 강풍면의 이름 석 자를 천천히, 아까보다 신경 써서 적었다. 그렇게 강씨 가족들의 이름을 다 적고, 남망기도 적고, 남잠도 적고, 그 뒤에 위무선과 위영까지 적었을 때, 문득 남망기가 위영, 하고 이름을 불러왔다. 위무선은 글씨를 바르게 적는 것에 정신이 팔려 돌아보지도 않고 말로만 응? 하고 가볍게 대꾸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별일이네.”



그렇게 웃는 얼굴은 명창明窓에 스민 햇살에도 지지 않을 정도로 거리낌 없이 해말갛게 밝았다. 남망기는 옮겨 적고 있던 글자가 하나 틀린 것을 발견하곤 붓을 내려 치우고 온통 여백만이 가득한 순지純紙를 새로이 서안 위에 펼쳤다.


…위영.


소리 없이 다시 한번 중얼거려보면, 입속 어디에도 부딪히지 않은 이름은 다만 혀끝에서만 부드럽게 구르다 알알이 흩어졌다. 흡사 들이마신 숨결에 스미듯. 상대가 집중한 틈을 파고들어 의뭉스레 넘어가 버린 비겁한 청이었지만 뒤이은 책망 없는 침묵을 멋대로 허락이라 규정짓는 치기는 열대여섯 아이에겐 쉬이 용서받을 수 있는 방종이라.

 

남망기는 종이 위에 적어 남길 수는 없는 두 글자의 이름을 조심스레 가슴속에 새겨 간직했다. 밤이 내리면 고이 삼킨 이름자가 획수대로 빛을 발할까 두려운 날이었다.

 

 





25.

달포가 더 흘렀을 무렵, 위무선은 처음으로 운심부지처의 금서실禁書室에 발을 들일 일이 생겼다. 사실 처음엔 그곳이 금서실인 줄도 몰랐더랬다. 오늘은 달리 할 일이 있다며 서고 어디론가 걸어간 남망기가 그곳에 있는지도 몰랐던 바닥문을 들추고 내려가는 게 신기해서 뒤따라갔을 뿐이었기에.


남망기는 위무선이 제 뒤를 쫓는 것을 알면서도 막지 않았고 그저 암문 아래의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넘어지지 않게 주의만 몇 번 주었다. 눈앞에 드러난 건조하고 넓은 지하 석실이 신기해 먼지가 뽀얗게 앉은 서가 몇 개 사이를 돌아다니다 ‘여긴 어디야?’ 하고 천진한 목소리로 물어본 위무선은 담담하게 운심부지처의 금서실이라 알려주는 남망기의 답에 화들짝 놀라 무작정 계단을 향해 달렸다.



“그럼 내가 있으면 안 되잖아!”

“위영. 넘어져.”

“남잠, 지금 내가 넘어지는 게 문제야? 네 가문 금서실에 내가 들어왔다니까!”

“뼈는 완전히 붙었지만 인대를 자꾸 다치면 습관성이 되기 쉬워. 뛰지 마.”



그 순간 위무선은 일전에 강징이 뒷목을 붙잡으며 ‘지금 중요한 게 그거야!?’ 하고 화를 냈던 심정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지금 중요한 게 그거야? 하지만 그렇게 되묻기엔 계단참에서 흐릿하게 넘치는 햇빛에 간신히 보이는 남망기의 얼굴이 미미하게 찌푸려진 것 같아 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그림자에 가린 위무선의 발치를 살피던 남망기는 마지막으로 ‘내가 막지 않은 것이니 상관없어.’ 못 박고는 다시 서가 사이로 몸을 감추었다.


얼마간을 더 계단 앞에서 머뭇거리던 위무선은 결국 석실 벽에 반사되어 울리는 남망기의 발걸음 소리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첫째로는 어둠이 무서웠고, 둘째로는 호기심이었으며, 셋째로는 해야 할 일이, 해야만 했던 일이 떠오른 탓이었다.


귀한 서적이 모셔진 곳임을 증명하듯 금서실엔 불을 밝힐 수 있는 촛대나 등이 없고 대신 연푸른색으로 신묘한 빛을 내는 야명주 몇 개가 드문드문 놓여있었다. 그중 하나를 들고 책 여러 권을 꺼냈다 집어넣던 남망기는 찾던 것을 발견한 것인지 탁자로 와서 책을 펼치고 세필에 먹을 묻혔다. 


왼손으로 계속해서 야명주를 들고 있는 게 불편해 보여 그 손가락에 닿지 않도록 조심히 구를 넘겨받은 위무선이 대신 불을 밝혔다. 살은 스치지 않았지만 남망기의 체온을 머금은 구는 위무선의 손바닥 안에서도 미지근한 온기를 나누어 주었다. 어쩐지 뺨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 무의식적으로 빈손으로 얼굴을 쓸자 악보를 옮기는 것에 집중하던 남망기의 시선이 흘긋 위무선을 향했다.



“추워?”

“아, 아니. 그냥 뭐가 묻은 것 같아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



위무선은 한숨처럼 웃었다. 저 단정한 입술 새로 글자 하나 얻어내기 어려웠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제는 굳이 애쓰지 않아도 꼬박꼬박 답해주는 친절이 못내 간지러웠다. 말랑해진 속이 소란으로 휘저어지고 뒷골이 경고처럼 따끔거렸다. 애당초 남망기와 가까워지려고 했던 이유가 뭐였는데. 어떻게 그걸 잊고, 목전의 평화에 물들어 한량처럼 아까운 세월 흘리기만 했는지.


나 이래서 네 곁에서조차 마음 놓아선 안 되는 것이었는데.


시종일관 명랑하던 웃음의 끝이 어떤 쓰라림의 한 종류에 무뎌지는 것을 일렁이는 불빛 사이로도 놓치지 않은 남망기는 잠시 멈추었던 손을 다시 움직이며 시선마저 돌려버렸다. 물어도 제대로 된 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이제는 잘 알기에. 차라리 반대로 제게 물어주었으면 했던 때도 손가락 여러 개 꼽을 횟수였으나, 위무선은 항상 자각 없이 그 기대를 배신했다. 토로할 수 없는 갑갑함은 울분을 낳으니 아예 품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필사를 마치고 숙부께 잠시 다녀오겠다며 장서각을 나서던 남망기는 내려가던 계단을 도로 올라 창가에 멍하게 걸터앉은 위무선에게 다른 사람은 오지 않을 것이니 편히 있어도 좋다 덧붙였다. 그게 우자연에게 자신이 장서각에 있을 땐 항상 곁을 지키겠다 말한 것에서 비롯된 배려임을 눈치챈 위무선은 시들어가던 꽃이 햇볕을 받아 도로 고개를 드는 것처럼 싱그럽게 웃었다.



“기다릴게.”



난실에서 예까지 왕복하는 일에 시간이 걸리면 얼마나 걸린다고. 남들 보았다면 퍽 애틋하다 했을 인사를 주고받아 놓고도 위무선은 아까보다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것에만 신경 쓰며 기지개를 쭉 켰다. 열린 창가 너머로 차분하게 걸어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다 이내 침잠한 눈길은 제 손에 들린 책을 향했다.


운심부지처 장서각에 보관된 서책들은 전부 정성껏 관리되어 어느 하나 해진 것도, 낡은 것도 없었다. 세월을 비키지 못하는 것은 순리이니 오래된 것은 이따금 손끝에 걸리는 팔랑임이 불안하긴 했어도 작은 낙서 하나, 얼룩 하나 지지 않았다. 그러니 이 모든 것들이, 이 공간이, 고소 남씨들에겐 얼마나 소중했겠느냔 말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서책과 악보란 선조 때부터 쌓아 올린 성과의 집합체였고 그들의 삶을, 일대를 증거하는 가시화된 자부심이었을 텐데.


그게 불타올라 잿더미가 된 순간은, 

과연 얼마만 한 참담이었을지.


그래. 나 그 일을 막기 위해 너와 가까워지고자 했다. 오로지 그것만을 바라서 너와의 재회를 기대했고 네 눈에 들기 위해 애썼었다. 어떻게 하면 너와 친해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일에 대해 이상치 않을 정도로 이야기 나눌 사이 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번민했던 게 불과 몇 달 전인데, 어느새 이만큼 방만에 젖어서 본래의 목적을 잊고 있었는지.


그저 네 눈길 내게 오래 머물고 답하는 목소리에서 냉기가 가신 게 지극히 기뻐 들뜨기에 바빠 자칫하면 천운의 기회를 공으로 날릴 뻔했으니. 내 지은 죄 내게도, 네게도 참으로 깊다.


그런 자책 속에서 세상 만물에게 죄지은 양 살지 않아도 좋다며 면죄부를 내려주는 목소리를 떨쳐내기 위해 위무선은 거세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다 그만 현기증이 핑 돌아앉은 난간 너머로 휘청 쏠리는 몸은 급하게 벽을 짚어 멈췄다. 혼자라 망정이지 남망기가 있었다면 또 낮게 가라앉은 시선을 한참 받아낼 일이 고단했을 테다.


심력을 소모한 몸이 더 늘어지기 전에 난간에서 내려와 서안 앞에 반듯하게 앉은 위무선은 장서각 계단을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다급한 것에 귀를 기울이며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분명, 남잠이 다른 사람은 오지 않을 거라고 했었는데? 지금이라도 어딘가에 숨어야 하나 방석 위에서 반쯤 몸을 일으켰을 무렵, 입구 쪽에서 발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잠?”



왜 그래. 숙부께서 뭐라고 하셨어? 평소와 다른 서두르는 듯한 태도에 좀전의 족적음足跡音이 남망기의 것이라곤 예상치 못한 위무선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도 문가에서 침묵하던 남망기는 불과 촌각 전까지 위무선이 앉아있었던 난간을 향해 짧게 시선을 줄 뿐이었다.



“……창가에, 앉지 마.”



남망기가 저렇게 뜻 모를 말을 할 땐 대개 남에게 말하기 싫은 이유가 있기 마련이라 위무선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채 감추지 못하면서도 순순히 창가 쪽 자리에서 읽던 책들을 챙겨 일어섰다. 미묘하게 제가 원했던 것과 다른 반응에 남망기는 무어라 첨언할 말을 찾듯 입술을 살짝 벌렸지만 이성으로 그를 억누르고 마찬가지로 자리를 옮겨 위무선의 왼편에 앉았다.


바람은 평시와 같이 시원하고 세상은 여전히 푸른데 그 속에 홀로 이 땅을 집어삼킬 화마火魔를 떠올리는 위무선은 자연히 말이 없었고 남망기는 애초부터 과묵한 인사여서. 자연스레 그간은 드물었던 어색한 정적이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알고 있는 전부를 말하기엔 너무나 황당한 이야기였고 그 가운데 혹시라도 이 일로 인해 남망기와 사이가 멀어지는 것도 싫은 위무선은 제 이기심에 새삼스레 치를 떨며 고개를 서안 위로 푹 처박았다. 쿵, 하는 소리가 나는 것에 흠칫 놀란 남망기는 주저하다 작은 목소리로 안부를 물었다. 위영, 자?



“아냐. 나 안 자. 안 자는데……”

“그럼?”

“……조금. 피곤할지도.”



운심부지처에 온 이후 몇 번이고 아팠던 위무선을 잘 아는 남망기는 저도 모르게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가 그 손을 내려둘 이마가 보이지 않는 것에 다시 주먹을 쥐어 감췄다. 파묻은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목덜미나 손이라도 잡으면 될 일이었을 테지만 남망기에겐 그것이 참으로 과한 용기 필요한 일이라. 결국 이번에도 위무선이 고개를 돌려 남망기를 마주하는 것이 빨랐다.


아무런 방비 없이 탁자에 부딪힌 이마엔 흐릿하게 붉은 자욱이 떠올라 있었다. 그 위로 색 옅은, 그러나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가볍지 않은 시선이 느리게 스치곤 반듯한 미간을 따라 아래로 흘러 청보랏빛 맑은 눈동자와 맞닿았다. 섬세하고 고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보고 있자니 왠지 손끝이 간질간질해 엄지손톱으로 애꿎은 손가락 끄트머리만 꾹꾹 눌러 괴롭힌 위무선은 팔을 뻗어 아직 제대로 된 표지를 만들지 않은 종이 뭉치를 제 쪽으로 끌어왔다.


백지 한 장을 넘기면 그 뒤론 온통 남망기의 깔끔하고 단정한 필체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마저도 죄 불타버릴 것이라 생각하니 안타까운 심정을 도무지 참기 어려워 시기적절할 때를 노리겠단 마음도 아무렇게나 내려둔 채 위무선은 오롯한 충동으로 불쑥 말을 꺼냈다.



“사본을 만들 생각은 없어?”



남망기는 잔잔한 눈에 물결 같은 의아함을 띄우다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미 만들었어.”



당장 위무선이 보고 있는 책만 하더라도 남망기가 어제 필사를 마친 사본이 아니던가. 위무선은 제 뜻이 단번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게 당연한 것 알면서도 다소 심통스런, 하지만 몹시 애타는 낯으로 몸을 일으켜 남망기와 바르게 얼굴을 맞댔다.



“그럼 그 사본들을, 장서각이 아닌 다른 곳에 보관할 생각은 없어? 전부가 아니라도 좋아. 일부만이라도 괜찮아. 하지만 절대 잃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것이 있다면, 어딘가에 감추어 두고 싶지 않아?”

“…무얼 위해서.”



남망기는 제 의문이 합당하다 생각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위무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절대 잃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것이라면, 어딘가에 감추어 두고 싶다. 그건 어찌 보면 남망기가 여태껏 자제하고 인내하는 것이 지당하다 배워왔던 욕망의 어딘가를 날카롭게 찌르는 말이었다. 또다시 평정을 잃은 속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원흉은 위무선이었다. 허나 남망기는 더이상 위무선을 외면해 도망치고 싶지 않았으니 난감한 노릇이었다.


남망기의 내면이 어떻게 아우성치고 있든 간에 위무선은 자신 나름대로의 고민에 생각이 제멋대로 산란했다. 목울대가 몇 번이고 울컥이고 입안이 바짝 말라 버석한 것을 이겨내고, 간신히 떨리는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제 딴엔, 가라앉혔다고 생각했다.


만일, 여기가. 이 장서각이. 정말로 여혹의 일이지만.



“……불타버리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간 제 마음속의 무저갱에 묻어두었던 불안 중 하나가, 마침내 언어로 구현되어 세상에 태어났다. 그에서 비롯된 불길함에 위무선은 돌연 한기를 느끼곤 몸을 움츠렸다. 습관처럼 두 다리를 세워 끌어안고 웅크리자 자연스럽게 남망기와의 거리가 벌려졌다. 예법대로 곧게 앉아있던 남망기는 숙인 어깨너머로 검은 머리카락을 따라 함께 흘러내린 붉은 머리끈을 한참 바라보다 위무선을 향해 몸의 방향을 틀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누가 감히, 라는 분노였지만 위무선을 책망하거나 불신한다는 느낌을 주고 싶진 않아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이토록 강한 불안이라면 분명 어딘가에 원인이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 위무선이 여러 차례 뜬구름 잡는 헛소리를 늘어놓긴 했지만 남망기는 자그맣게 젖어 떨리는 목소리에서 어쩐지 일말의 확신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필연必然을 알고 있는 자의 고통 같아서.


어떤 말을 해도 추궁으로 들을 것 같아 한 명은 외면하고 한 명은 내려다보는 기묘한 구도로 얼마나 정적을 세었을까. 결국 어둡고 무거운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견디기 어려워하는 위무선이 패배를 시인하듯 팔로 둘러 감추었던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 남망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 얼굴은 명백한 물음으로 가득 차 있어 망설이던 위무선은 천천히 한 쪽 손을 들어 천장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그 천장 너머의 하늘을.

그것보다 더 정확히 따지자면, 하늘의 지배자인 태양을.


세기의 명필가가 일필휘지로 그은 듯 곧게 뻗은 남망기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달리 할 말이 있는 것 같아 그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위무선은 가슴 속을 스치는 섬뜩함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벌써 뭔가… 있었어?”



위무선이 위협을 느끼거나 곤란할 때 눈을 돌리는 버릇이 있다면 남망기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까는 습관이 있었다. 말해도 될지 고민이라도 하듯 제 무릎 위에 주먹 쥐어 놓인 손을 길게 바라보던 남망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 일에 위무선의 얼굴이 창백해지는지 모르겠다 생각하며.


바로 조금 전 미정형未定形의 불안을 세상에 탄생시켰던 위무선은, 그것이 기어이 현실의 일이라 깨닫고는 차게 식은 손끝으로 옷자락을 쥐어 비틀었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바뀌지 않는 미래에 대한 허탈인지, 혹은 그럼에도 제 알고 있는 예지가 틀림없는 것에서 나오는 미약한 안도인지도 분별할 수 없었다. 그저 한없이 불온하여 엇박으로 허둥대는 심음心音을 진정시키려 애쓰는 것 외엔.



“그렇, 구나. 하긴. 그럴 것 같기도 했어. 고소 남씨는 너무 올곧고 단단해서, 다른 누구를 찌를 생각이 없어도 그저 그사이를 지나가는 것만으로 이따금 부딪히게 되니.”



그리고 이어지는 긴 한숨의 끝자락을 눈으로 좇던 남망기는 설핏 미간을 좁혔다. 고소 남씨에 대한 위무선의 평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치게 하려 마음먹지 않아도 미필적으로 누군가를 상처 입힐지도 모르는 사람. 그렇다면 그런 내 곁에 있는 너는. 그리고 네 곁에 있는 나는. 너 역시 언제고 내게 상처받은 적 있었냐 묻기엔 제 평소 태도가 상냥과 다정이란 언사완 영 거리가 없는 것 잘 알기에 염치를 찾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위무선은 조언인지 혼자만의 넋두리인지 모를 말을 계속 종알거리고 있었다. 다른 세가들끼리 서로 연합해서 대응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냥 간단한 연락망을 열어두는 것만으로도 좋아. 대신 연락이 온다면 즉각 거기에 응해 증원을 보낼 수 있도록. 한 번 넘친 물을 주워 담는 것보단 넘치기 전에 막는 게 좋잖아.



“태양이 하늘로 솟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지만, 남중南中을 지난 태양은 반드시 땅으로 떨어지는 것 역시 마땅한 섭리니까.”



남망기는 그런 위무선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만일 위무선이 놀람을 삼켜 둥글게 부풀어오른 금안을 봤더라면 덩달아 화들짝 튀어 오르며 헛소리를 했다며 마구 자책했을 테지만 지금의 위무선은 자꾸만 새는 한숨을 막기에도 바빠 남망기의 얼굴까지 살필 여력이 없었다.


기산 온씨가 저지르는 여러 만행이 이미 극에 달했음은 남망기 역시 잘 아는 일이었지만, 그 권세와 위력이 워낙 드높다 보니 그 가운데 가문을 지키고 막아낼 생각만 했지 먼저 나서서 떨어트릴 생각은 여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이것은 남망기의 기개 없음의 문제가 아니라 비단 그 주위를 둘러싼 어른들부터가 감히 타도를 외치지 못한 탓이 컸다.


시시각각으로 좁혀 들어오는 손아귀가 몹시 간악하기 짝이 없으니 암만 고고하게 찰랑인 물일지라도 어쩔 도리 없이 넘치게 될 테고 뒤늦게 후회하며 그 흔적을 따르더라도 원래대로 복구하는 것은 실로 요원한 일이라. 그렇다면, 필연으로 예정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뒤가 아닌 앞을 향해 나아가 맞서 싸우는 것뿐.


남망기는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선문 가운데 기산 온씨에 불만을 품은 곳이 없는 건 아니란 말도, 그중 하나는 네 가문인 운몽 강씨라는 것도, 그러나 다들 백 년 세가의 자존심이 있다 보니 쉬이 다른 곳에 손을 벌리기 어려워 이 아까운 시간을 바보처럼 대비가 아닌 탁상공론으로 흘려보내고 있단 사실도 제 속에만 옹졸하게 가두었다.


굳이 환상 같은 불안을 현실의 것으로 덮어씌우고 싶지 않아서.


내가 네 평안을 바라는 것이 이상한 일이냐 물어볼 사람 하나 없는 게 숨을 옥죄듯 답답했지만 은연 중에 베풀어지는 배려는 대부분 그런 형태로 빛을 발하곤 했다.

 

 




26.

위무선이 말한 이치대로 하늘의 정점을 지난 태양은 서서히 서西를 향해 기울었고 창가로 황혼이 넘실대며 스미는 시간이 되자 남망기는 펼친 책을 정리하고 일어섰다. 위무선 역시 앉은 자리를 말끔히 치우고 그 뒤를 따랐다. 계단 앞에 이르러 남망기가 자신의 팔을 붙잡자 자연스럽게 그 팔에 의지해 층계를 내려가던 위무선은 장서각 앞에 깔린 새하얀 돌에 제 발이 닿자 불현듯 남망기의 손에서 벗어났다.



“위영?”

“나 이제 다리 다 나았어. 더는 이렇게 도와주지 않아도 돼.”



네 번거로운 일 하나 줄었네. 그렇게 웃는 얼굴이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 같아 남망기는 감히 부정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공연히 말을 늘렸다가 앞으론 혼자 오겠단 소리까지 들을까 가뜩이나 무거운 입술을 더 굳게 짓누르면, 그 마음 알 재간 없는 위무선은 남망기의 옆에서 꼭 한 발자국을 떨어져 걸었다. 이 정도 거리라면 할 말이 있다며 고개를 숙여도 찰랑이는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머리끈이 제 어깨에 닿을 일은 없다 싶었다. 그 은근한 거리감이 왜인지 위무선과의 독특했던 첫 만남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고 보면 위무선은 처음부터 제게 아주 깍듯하게 굴었다. 암만 남망기가 운심부지처에서 처벌을 주관한다 한들 그렇게까지 대접해줄 필요는 없었을 텐데. 애초에 둘은 동년배였기도 했고. 아니, 차라리 그런 이유였다면 답답하지 않았을 텐데 위무선은 남망기가 제게 행사할 수 있는 권한에 대해서는 약간의 사정도 관여하려 들지 않았으니 자꾸만 궁금증이 일었다. 대체 왜, 하는 생각이 멈추질 않았다.


제 앞에선 한없이 무르게 굴 것 같던 위무선이 이렇듯 드문드문 스스로의 서슬에 놀란 양 난데없이 거리를 벌릴 때마다 남망기는 영 속이 좋지 않았다. 위무선이 그렇게 구는 이유도 모르겠고 그 행동에 제 마음이 들쑤셔지는 이유도 몰라 지난 몇 달간 남망기는 알게 모르게 속이 곪아가고 있었다.


평소라면 눈이 시리도록 붉어야 할 노을이 오늘따라 유난히 곱고 다정한 빛이라 그런가, 아니면 뺨을 스치는 동남풍이 뭇사람 마음을 쉬이 흔들어 그런가. 남망기는 위무선의 방이 가까워져 오자 걸음을 조금 늦추었다. 그 속도에 함께 발을 맞추어주는 건 분명한 다정인데, 어쩐지 그 다정이 향하는 방향이 어긋난 것 같은 건 단순한 착각일까.


실수인 척 거리를 좁히면, 위무선은 남망기가 어깨라도 떠민 듯 다시 부드럽게 같은 간격으로 거리를 벌렸다. 결국 완전히 멈춰선 남망기는 작은 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은 후 힘겹게 위무선에게 물었다. 왜 그리, 제게 몹시 정중히 구느냐고. 다른 동문들과 장난칠 땐 이렇게까진 아니었을 텐데, 하는 뒷말을 간신히 삼킨 것으로도 그의 인내력은 칭찬받을 만했다.


위무선은 설마 남망기가 먼저 그 점을 지적할 줄은 꿈에도 몰랐단 듯 특유의 토끼처럼 놀란 눈을 동그맣게 떴다가 가슴 언저리를 묘하게 간질이는 부드럽고 고운 선으로 얇은 입술을 휘어 웃었다.



“나, 실은 너랑 친구가 되고 싶어. 남잠.”



남망기는, 그 말에 속이 풀리긴커녕 숫제 어혈이라도 맺힌마냥 짧게나마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밀어내고 벽을 치는 주제에 친구가 되고 싶다고. 그리고 이 자는 아무래도 그렇게 하는 걸 제가 좋아할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 같으니.


네게 내 이야기를 해 준 이가 대체 누굴까.


그게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그리고 이제는 아마 영영 오지 않을 미래의 자신이란 걸 알 길 없는 남망기는 오늘도 멍울진 듯 얼얼한 가슴팍의 동통만 애써 참았다. 웃는 낯으로 말을 뱉어놓고도 자꾸만 제 눈치를 살피는 사람을 상처 주기 싫었고, 그에게 저가 상처받았다 알리기는 더욱 싫었다.

 

친구. 

그깟 게 뭐라고. 


그게 뭐라고 네가 몇 달씩이나.


말을, 하지 않고.

진작 내게 말을 하질 않고…….









잔불의 기사 / 마도조사 (프로필 사진 - 배추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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