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David brown - Starman

 



1. 파란머리 외계인



 

  대면등교 확정, 거리두기 해제, 실외 마스크 해제.


  어쩐지 나와 상관없는 말처럼 느껴지는 단어와 단어 사이의 연결. 뉴스에선 세상이 전과 같이 돌아온 것처럼 떠들어 댔다. 서울 재즈 페스티벌 예매창은 1분도 안 되어 접속자 만 명을 돌파했고, 5월 5일 어린이날 롯데월드는 개장 90분 만에 입장을 중단했단다. 여수에선 2년 만에 여수 밤바다 버스킹을 재개했고, 부산 사직구장에선 롯데 팬들의 '부산갈매기' 응원가 떼창 소리에 구장 전체가 들썩였다고.

 

  창고에서 선풍기를 끄집어낸다. 겨우내 먼지 쌓이지 말라고 잘 덮어 감아둔 신문지를 천천히 벗겨내곤 콘센트를 연결한다.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을 얼굴 가까이 맞으며 입안으로 남은 얼음을 털어냈다. 볼 안으로 굴러다니는 얼음을 와작 깨물며 휴대폰 스크롤을 내린다. 2년 전 채광이 좋다는 이유로 지체 없이 계약한 월세방은 여름이 가까워 올쯤이면 집 전체가 들들 끓었다. 마치 보일러를 38도로 틀어둔 것처럼 푹푹 쪘다.

 

   "어우 공짜 싸우나. 난 이런 따뜻함을 원한 게 아니었는데."

 

   선풍기를 발 쪽에 맞춰둔 채 소파 위로 벌러덩 누웠다. 얇은 잠옷이 나풀거리며 배 위를 덮는다.

 

   휴대폰을 보며 혼잣말을 내뱉는다. 다들 즐겁게 사네, 즐겁게 살어. GS25가 은색으로 크게 적혀진 비닐봉투를 손으로 뒤적여 스트링 치즈를 꺼낸다. 이로 끄트머리를 물어 포장을 벗겨내고 말캉말캉한 치즈를 손으로 잡아 얇게 한 줄씩 뜯는다. 발열이 심해 30분만 틀어놔도 제멋대로 꺼지는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올드팝. 나는 그 음악에 맞춰 발목을 까딱거리며 입안에 돌아다니는 것을 잘근잘근 씹어삼켰다.

 

  "좋은데 싫어. 뭔지 알지."

 

  창틀에서 한껏 볕을 받고 있는 스파트필름에게 물었다. (스파트 필름은 지난 식목일에 시장에서 데려온 초보가 키우기 가장 쉬운 식물이다.) 더운 바람을 타고 식물 위에 쌓인 먼지가 공중에 퍼지며 부유한다. 마치 저는 아니라며 침을 뱉듯.

 

사실 나는 사람들과 생각이 조금 달랐다.

아니 어쩌면 많이...


그냥 거리두기가 계속됐으면‥

사람들이 아홉시만 되면 앞다투어 집에 갔으면‥

서로 눈만 봐도 좋으니 얼굴을 가려주었으면‥

 

  원체 사람 만나기 귀찮아하는 성정을 타고나 마음대로 숨을 수 있던 2년의 시간이 좋았다. 어딘가 소속되어 있지만서도 나만의 세상에 갇혀있던 시간들. 나오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고, 쳐박혀 있으면 칭찬받던 나날들. 그렇게 몇십 권의 책과 몇백 개의 영화를 보다 보니 내 앞에 자연스럽게 찾아온 취업이란 관문. 일년 동안의 생활을 축약하고 조합해서 낸 자기소개서가 운 좋게 먹힌 탓에 오티티 스타트업 회사에선 데스크탑 두 대 달린 자리를 내어주었다. 


  그러나 내 자리가 생긴 기쁨도 잠시 회사는 전면 재택 전환을 선고했다. 다시 숨을 곳이 생긴 나는 열심히 처박혀서 일하고 자고 영화 보고 책 읽고를 반복하며 칩거 생활을 있는 힘껏 즐겼다. 여름이면 찌는듯 덥고 겨울이면 얼린듯 추운 나만의 세계에서. 


  상황이 좋아지면서는 다시 회사로 복귀해야 했지만 원체 개인주의적인 회사는 딱 내몸에 알맞게 삭막했고, 나는 마스크 속에 숨어 품위를 지키는 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다. 되도록 상냥하고 되도록 단절된 일상을 적당하게 누려가며.

 

 그런데 거리두기 전면 해제라니. 가까운 땅 중국에선 코로나 때문에 항저우 아시안 게임도 취소시키는 마당에 누구 좋으라고 실외 마스크 해제라는 건지. 사사건건 시비걸고 싶은 조정안들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부정적인 결의 생각을 여러 층 쌓아가다 문득 얼마 전 어린이 날에 만났던 아이의 얼굴이 난데없이 뇌리를 스친다. 볕이 뜨겁던 오후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을 손등 위로 질질 흘리며 마스크 없이 동네를 종횡무진 행단하던 아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티없이 맑은 미소에 덩달아 웃음을 뱉던 순간, 나도 이젠 좀 세상에 섞여볼 필요가 있는 것 같기도...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아 그러니까 지금...

 

  나갈까, 말까. 나갈까, 말까. 

  이미 푸지게 자고 일어난 터라 오후 네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밥을 먹긴 먹어야 되는데, 나가서 대단한 걸 사 먹긴 귀찮기도 하고. 서울 사는 자취생에게 번듯한 식사는 사치에 가깝다. 월급날까지는 아직 삼 일이나 더 남은 시점이었다.

 

  글쎄 오늘 블루문이 뜬다고 했었나. 문득 얼마 전에 본 기사의 제목이 떠오른다. ‘오늘밤 가장 크고 둥근 슈퍼 블루문 뜬다... 놓치면 14년 기다려야...’ 기상 상황이 좋다면 밤늦은 시간 어두운 곳으로 가면 푸른 달을 가까이서 볼 수 있을 거라던 앵커의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이듯 들려온다. 나는 벗어둔 뿔테안경을 고쳐쓰고 쇼파 밑에 굴러다니는 가방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냉장고를 열어 맥주를 쓸어 담았다. 좋은 구경 하면서 알콜이 빠질 수 없지. 지난달 생일에 친구들이 선물해 준 모자도 집어 들었다.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채 고이 간직해둔 새 모자의 크기를 머리통에 알맞게 조절한다. 언제 마지막으로 펴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미니 텐트도 챙겨 든다. 뒷산 가는 건데 너무 들떴나 싶어 민망해지는 건 오랜만의 외출에 당연한 수순이다. 거울을 보니 얼굴이 답지 않게 불그죽죽하다.

 

 

 


/



 

 

  사람은 모두 인생의 변곡점을 지난다. 난 그 지점이 조금 이른 시기에 찾아왔는데, 이렇게도 배신을 당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살이 아릴 만큼 추운 겨울날, 고교시절부터 도합 4년을 만나온 남자친구는 제 생일을 한 주 앞둔 때 편지 한 통을 달랑 남기고 돌연 사라졌다. 사람이 제 앞날을 계획하기란 정말 부질없다는 것을 나는 그때 깨달았다. 당장 하루 뒤에 일어날 일도 우리는 예측할 수 없으니까. 아직 못 다 큰 나이에 겪어야 했던 상실의 무게는 겨울철 싸구려 코트를 다섯 겹 겹쳐입은 만큼 무거웠다.

 

  이렇게 멀리 갈 거였다면 언질이라도 주지. SNS라면 담을 쌓고 지내던 성격 탓에 어느 곳에서도 그 애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낯간지럽다고 사진 찍는 것도 싫어해 내 휴대폰에 남은 건 열아홉 그 애의 대입 수시 합격 날, 케이크를 들고 찍은 사진 단 한 장 뿐이었다. 바보처럼 다정하기만 했던 그 애에게 이 세상에 나만큼 중요한 건 없는 줄 알았는데, 도대체 어떤 대단한 사정이라도 있었길래.

 

  사실 진짜 바보 같은 건 내 쪽이다. 나는 아직도 가끔 그애 꿈을 꾸니까.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우편함에서 그애 이름이 적힌 흰색 편지지를 꺼내다 놓쳐 편지가 하늘 위로 멀리 날아가버리는 꿈. 편지는 넘실넘실 바람을 타올라 점이 될 때까지 높이 올라가다 일순 반짝하고 사라져버리고 만다. 무지개를 쫒는 아이처럼 뛰고 넘어지기를 반복하며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이미 사라져버린 편지를 쫓다 늪에 빠져 서서히 죽어가다 보면 숨통이 끊이기 직전 땀에 젖은 채 잠에서 깬다. 꿈에서 깨고 나면 한참동안이나 그애를 떠올린다. 이젠 만났던 시간보다 헤어진 시간이 더 일지만. 웃는 얼굴이 여전히 눈에 선명하다. 웃을 때마다 말려 올라가던 동그란 광대와 그 밑으로 난 점까지도 전부.

 

  추억을 안주 삼아 꺼내어놓다 보니 어느덧 내 앞으로 여러 개의 빈 캔이 쌓여간다. 타들어갈 듯 붉은 노을은 하늘을 전부 수놓았다. 걸려있을 땐 더위로 온종일 나를 괴롭히던 게 질 때 되니 이토록 낭만적이라니. 무릇 사랑할만한 것들에도 뒷면은 존재한다는 사실은 만유인력의 법칙만큼이나 강력하다. 그러니까 불변의 진리. 인간의 죽음처럼 당연한 것. 


  덮어놓고 사랑하다 타는 줄도 몰랐던 내게 또한 그랬다. 말하자면 이카루스의 몰락. 나는 너를 사랑해서 태양을 만지는 기분이었거든. 날개가 다 녹아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그러니까 민형아, 나는 너를 그렇게 사랑했다. 바보처럼 전부 덮어놓고 사랑했다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마시는 술이 좋은 이유는 누구에게라도 내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겠지. 그러니까 지금처럼 이렇게 텐트 한쪽이 한참 내려앉는데도 모른 척하고 누워서 병나발 불 수도 있는 거고. 한 장 남은 전남친 사진 보고 미친 사람처럼 주먹 울음 지을 수도 있는 거다. 쓰고 슬프고 졸리다. 대체 슈퍼 블루문인지 하는 그 시퍼런 달님은 언제 뜬다는 건지. 검은 하늘 끝으로 거의 다 떠밀려간 태양이 마지막 빛을 깜빡거리다 잠긴다. 사방에 서늘한 어둠이 깔리고 나는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랜턴의 전원을 올린다. 그리고 아주 서서히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참아야 하는데. 곧 있으면 달이 뜰 시간이라고 했는데. 저걸 보고 잠들어야 하는데.


  그러나 인생의 대단한 순간들은 가끔 깨닫지도 못할 속도로 우리를 스쳐가곤 한다.

 



[BGM] 자우림 - Starman





  "저기요,"

  "……"

  "일어나 보세요."

 

    여기서 자면 큰일 나는데. 인간들은 체온이 떨어지면 몸에 많이 해롭댔는뎅. 어딜 만져봐야 하지. 이마? 머리가 가려져 있어서 안될 거 같은데. 오웅... 그럼 발?

 

  부스럭부스럭 조잘조잘. 인기척에 잠에서 깼다. 술을 잔뜩 먹어 부른 배를 부여잡고 한쪽 눈만 살며시 뜨니 눈앞에 푸른빛이 감돈다. 달인가, 달이 이렇게 가까이 내려올 수도 있나. 이런 건 또 처음이네. 기대 없이 손을 뻗었는데 어라, 손에 잡힌다. 달이 손에 잡힐 수가 있나? 어쩜 달은 부드럽고 곱슬곱슬한 느낌이구나. 좋다, 내가 살면서 달도 만져보고...

 

  "어...?"

  "헉 깼다! 너무 안 일어나서 죽은 줄 알았어용... 넘 다행이다아."

  "……악!!!!!!!!!!!!!!"

 

  나는 불쑥 다가올 정체모를 것의 어깨를 밀치며 뒤로 멀어졌다.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양옆으로 세차게 흔들었다. 그리고 푸르게 발광하는 인간의 형태.. 그러니까 어쩐지 인간같은데 인간 아닌 인간같은 것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파란머리를 한 정체불명의 남자는 자못 놀란 모양인지 큰 눈을 더욱 크게 뜨며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그리곤 반원모양으로 둥글게 휘어져있던 눈썹이 일순 팔자로 축 쳐진다. 내 불안한 표정을 읽은 눈치였다. 해치치 않아용... 그가 얇고 작은 입수을 웅얼웅얼거리며 두손을 모은다.

 

  내가 꿈을 꾸고 있나. 눈도 동글 코도 동글 벌어진 입술 밑으로 살짝 벌어진 흰 치아도 동글. 내 예감이 맞다면 저건... 내 꿈속에 들어온 이민형이 맞다. 내가 루시드 드림을 꿀 수 있었나. 꿈을 조작하고 보고싶은 사람을 데려오고 막 그런 거.

 

  "너... 너 뭐야?"

  "네?"

  "너... 이민형이야...?"

  "오웅 민형이 누구.."

 

  잠이 덜 깬 탓에 사리분별이 안된다. 내 앞에 이민형이 있을 리 없는데. 오래 전에 나를 버리고 떠난 그 애가 내 눈앞에 파란머리를 한 채로 짠하고 나타났을 리가 없는데. 그건 정말이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말도 안되는 싱크로율. 

  머리와 눈동자 색깔만 빼면 이민형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건,

  ......꿈이다!


  나는 이민형으로 의심되는 파란머리 남자의 어깨를 부여잡으며 질문했다. 지금 이거 내 꿈 맞지? 나 지금 하고 싶었던 말 다 해도 되는 거지? (오우 진정하세요...) 초면이라면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태였지만 나는 정말 꿈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게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에 질문을 이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너 머리는 왜 그모양이야? 전엔 그렇게 범생이처럼 굴더니 캐나다 가서 외국물 좀 먹었다고 양아치짓 하고 다니는 거야? (제 머리는 원래 파란색으로 자라는데용...이것 보세요 머리 끝까지 파란색...) 나쁜새끼. 표정은 또 왜 그래? (저 지금 웃고 있어요 이렇게...)영어 쓰는 나라 가서 꼬박 몇 년 살았다고 한국 말 못알아듣는 척 하는 거야? 재수없긴. 영어로 해줘? I hate you다 이 자식아!

 

  "나 참 재수가 없으려니까 뭐 이딴 꿈을.."

  "... 잠깐, 꿈? 이거 꿈 아닌데용?"

  "뭐?"

  "미안하지만 이건 꿈이 아니에용.. 진짠데.."

  "이상한 컨셉질 그만 해. 어차피 내가 꿈에서 깨면 넌 끝이야."

  "하… 증말 지구인들이란."

 

  파란머리가 내 앞을 빗겨나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다. 

 

  "보여요 저기?"

  "어? 블루문이다!"


  나는 푸른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는 달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달! 저기 달좀 봐!!"


  남자가 푹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내 앞을 다시 가로막으며 나를 똑바로 쳐다본다. 커다란 눈이 우주를 담아놓은듯 반짝거린다.


  "아이 참. 저건 블루문이 아니라, 제가 사는 행성이에요."


  지구인들은 달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 같지만. 비슷하게 생겼으니 그럴 만도 하죠. 암튼. 이제부터 진짜 솔직히 말할게요. 제가 사는 곳에선 일 년에 한두 번 통행권을 끊으면 다른 행성을 여행할 수 있어요. 요즘은 지구여행이 유행이라 대부분 여름철에 한 번 겨울철에 한 번 이렇게 두 번 놀러 오거든요. 근데 저는 이번에 좀 길게 왔어요. 워킹홀리데이? 여기 말로는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뭐 그런 거 비슷하게 현지인처럼 살면서 지구 화폐도 모으고 여기저기 여행도 좀 해보려고요. 사실 여긴 벌써 다섯 번째 여행지인데, 여기 오기 전에 뉴질랜드랑 영국이랑 홍콩이랑 이집트에도 다녀왔어요. 사진 보여줄까요?

 

  말문이 막혀 턱이 크게 벌어졌다. 자기가 달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미친 파란머리 남자가 브이를 하고 찍은 우스꽝스러운 여행 사진 몇 장을 내 앞으로 내밀며 깜찍하게 웃는다. 브이는 홍콩 여행을 하다 알게 된 한국인에게 배웠단다. 누가 망치로 친 것처럼 머리통이 울린다.

 

  "암튼. 전 이민형도 아니고, 지구인도 아니에요. 선량한 여행자니까 친절하게 대해주세용. 이래 보여도 상처 잘 받아요. 맘이 여려서."

  "아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진짜. 아 머리야..."

  "헉 어디 아파요?"

  "아아 괜찮아요. 가까이 오지 마요."

  

  가까이 오지 말라는 말에 표정이 일순 굳어진다. 하 징짜 방금 마음 여리다구 했는데두... 작은 입술이 부루퉁하게 튀어나오더니 이내 쏙 들어간다. 남자는  눈썹과 어깨를 동시에 올렸다 내리더니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제가 한국말을 잘하는 건 여기 귀 뒤에 칩. 여기서 자동으로 이중번역이 되거든요. 저희 행성에서도 타 행성의 언어를 배우는 게 꽤 인기 있긴 한데, 지구에 언어가 워낙 많아야 말이죠. 영어 스페인어는 칩 없이도 쪼금 해요. 혀를 유연하게 사용하는 게 저희 행성에서 쓰는 언어랑 비슷하더라고요.

 

  부리같은 입으로 종알종알 말을 할 때마다 푸른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을 냈다. 기분 좋은 듯 웃을 때면 머리칼에서도 은은하게 빛이 발하는 것 같았는데. 그 모습이 꼭 신화에 나오는 요정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그렇지만 이건 정말 말도 안되는 일. 하필이면 오랜만에 외출한 날, 그리고 하필이면 오늘같이 푸른 달이 뜨는 날에. 이토록 터무니없는 꿈을 이렇게나 길게 꾸다니. 이렇게까지 생생한 꿈을, 정말 하필이면.

 

  "뭔…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들어주기라도 하지. 비켜요, 텐트 접게."

 

  부러 심드렁한 척 남자를 비켜섰다. 지금 이게 꿈이 아니고, 남자가 인간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게 되어버리면 어쩐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게 아닐까 싶었기 때문인데, 그렇게 생각하니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본인을 지구로 여행 온 외계인이라고 소개했으나 그가 정말 외계인인지, 지구로 단순히 여행을 온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을뿐더러 나는 여지껏 타인과 이렇게 캄캄한 밤에, 야산에서 마주치거나 얘기해 본 적도 없었다. 혹시나 납치라도 당하는 건 아닐까 싶어  텐트 기둥 하나를 빼 손에 쥐었다. 될 수 있는 한 술에서 깨든 잠에서 깨든, 나를 둘러싼 이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현실이라고 믿기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갈 거예요?"

 

  남자가 내 앞을 가로막으며 묻는다. 나는 그를 쏘아보며 대꾸했다.

 

  "네.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그럼 저는요...?"

  "그쪽이 뭐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좀만 더 같이 있으면 안될까요? 얘기도 하구.."

  "그쪽 말마따나 우리 처음 봤는데요, 오늘."

  "그니까! 처음 봤으니까요."

  "저는... 보다시피 술도 취했고. 시간도 늦었고요. 이렇게 세상이 흉흉한데 모르는 사람이랑 야산에서 수다떨기엔 제가 겁이 좀 많기도 하고요."

  "저 정말 이상한 외계인 아니에요. 해치지 않아요. 정말루.."

 

  하기야 무서워하기엔 앳된 얼굴이다. 누굴 닮아 귀여운 눈코입.. 서운해 할 때 왼쪽으로 살짝 떨어지는 고개까지. 정말이지 그애를 빼다박은 얼굴. 쉽게 지나치기 힘들다.

 

  "근데... 이거 진짜 꿈이 아니에요?"

  "네! 하 진짜 몇 번이나 말했는데 자꾸 무시하고!"

  "미안해요.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되니까..."

  "그럴만도 하죠. 그래도 받아들이면 편해요. 봐요, 이 드넓은 우주에 설마 지구에만 생물이 살고 있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죠?"

  "그건 그렇죠."

  "히히. 암튼 진짜 반가워요 진짜루! 아 진짜 신난당!"


  남자가 히히. 하고 웃으며 내 앞으로 손을 내민다. 


  "이렇게 인사하는 거라던데, 악수라고 하던가. 맞아용?"

  "네 맞아요. 참 꼭 보고싶은 얼굴을 하고 귀여운 말만 하네요. 근데 그쪽 외계인이면 관심법도 쓰고 그러나?”

  “관심법? 그런 건 몰라요. 근데 보고싶은 얼굴이요?"

  "생긴 게 누구랑 좀 많이 닮았거든요. 웬만하면 한국 빨리 뜨고 캐나다로 가보세요. 거기 그쪽이랑 똑같이 생긴 지구인 한 명 있으니까."

  "오우... 아까 민형씨? 꽤 미남이겠네용."

  "뭐요?"

  "농담이에요 농담. 학학학학"

 

   농담 아닌 거 같은데. 파란머리 남자... 아니 외계인이 배를 잡으며 웃다 말고 내가 텐트치는 일을 거든다. 도와달란 말도 안 했는데 어느새 곁에 바짝 붙어서 있다. 이거 여기에 끼우는 거예용? 이건 동그랗게 말면 돼요? 우와 완전 신기하다앙. 이런 걸 매번 직접 가지고 다녀요? 되게 귀엽다아... 근데 원래 주황색을 좋아해용? 텐트도 주황색, 손전등도 주황색. 완전 오렌지걸이다아. 무슨 외계인이 이렇게 말이 많은지, 마블영화 보면 외계인들 되게 과묵하고 똑똑하고 힘도 세던데. 얘는 실속없이 말만 많다.

 

  "암튼 전 가요. 여행 잘 하시고. 아, 웬만하면 그쪽 외계인인거 비밀로 하고 다녀요. 방금처럼 하고싶은 말 다 하지 말고. 한국사람들은 생각보다 마음이 넓지 않아서 눈뜨면 어디 연구소에 잡혀있거나 자는 사이에 밀매 당할 수도 있어요."

  "음 아닌뎅. 착한 거 같은데…"

  "네?"

  "처음 본 외계인 잡혀갈 거 걱정도 해주고. 앞으로 만날 지구인들도 딱 주황씨 만큼만 상냥했으면 좋겠네요."

  "허… 근데 제가 왜 주황씨예요?"

  "그거야 주황색을 좋아하니까 주황씨."

  "뭐야 그럼 그쪽은 머리 파란색이니까 파랑씨예요? 저도 이름이라는 게 있거든요."

  "그럼 내 이름 알려줄까요?"

  "싫어요."

  "왜요?"

  "이름 알면 기억해야 되잖아요. 저는 사라질 사람한테 마음 주기 싫어요."

  "음 마음까진 달라고 한 적 없는데에."  


  남자가 씩 웃으며 한발 더 가까이 다가온다. 반짝이는 파란 머리와 마찬가지로 빛나는 진한 눈동자. 빨려들어갈 정도로 강력한 오라에 혼이 나가는 느낌이 들어 머리를 양옆으로 세차게 흔들었다.


  "제 이름은 마크예요. 기억해주세요."

  "……"

  "주황씨는 이름이 뭐예요? 나만 알려주는 건 쫌 억울하다."

 

  파란머리 외계인, 마크가 손을 뻗어 내게 악수를 청한다. 싱긋 웃으니 눈이 크게 한 번 반짝 빛난다. 

 

 "그쪽이 알아 내봐요. 내 이름."

 "네?"


 정말 외계인이 맞다면 내 이름 정도는 초능력 비슷한 걸로 알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


 "외계인이라면서. 이런 건 말 안 해줘도 알아낼 수 있지 않아요? 마법사가 아니라서 못하려나. 아니면 내가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나를 설득해보거나."

 

  마크가 또 배를 잡고 크게 웃는다. 아하학학학. 솔직히 말하면 제 친구 중에 그걸 할 줄 아는 애가 있긴 있거든용. 근데 저는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어서. 흠, 며칠 쫌 연습 하고 다시 올까요? 아니면...

 

  "아니면요,"

  "네."

  "내일 또 만날까요? 여기서."

  "내일이요?"

  "네. 내일까지 제가 연습해볼게용."

  "아니 뭘 그렇게까지…"

 

  희한한 외계인이다. 이름 맞추는 능력을 써본 적이 없어서 연습하고 오겠다니. 수련은 지네 행성 가서 하지 그걸 왜 나한테 검사를 받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터져나오는 웃음을 숨길 수 없다. 나를 다년간 힘들게 하고도 여전히 그리움에 애태우는 얼굴을 닮아 깜찍하게 미소짓는 이 반짝거리는 생명체가 어쩐지 반가워서.

 




[BGM] 롤러코스터 – 숨길 수 없어요



2. 연주황



 

  나는 대체로 지구 곳곳에서 은밀하게 벌어지고 있는 범죄, 기후의 미세한 변화, 미래학자들의 최신 연구동향, 잘 알려지지 않은 예언가들의 한마디를 관심있게 보는 편이다. 사실 관심있게 보는 편을 넘어 미스터리하고 기묘한 이야기들에 마음이 많이 쏠리는 편이지. 따라서 운이 좋으면 살면서 한번쯤은 영물을 실재를 목격한다든가, 외계인이 지구에 불시착을 포착할 수도 있겠단 생각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아왔다. 답답한 지구살이에 판타지적 경험은 별볼일 없는 인생을 지속하기에 꼭 필요한 소스정도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겐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왔다. 기회가 준비된 자에게 오는 거라면 난 지척에 왔을 때야 깜짝 놀라 잡을 사람이 아니라 10km 앞에서부터 오고 있어도 알아보고 두팔 벌려 잡아챌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만나게 될 영물 또는 외계인은 나와는 분명 다르게 생겼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다른 언어를 할 거라고 생각했다. 설사 드라마에 종종 등장하는 인간과 같은 외형의 외계인이 있다고 한들 몸에서 나는 향기, 먹는 음식, 숨을 쉬는 공기 정도는 아예 다를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내 앞에 앉아 열심히 짜파게티를 흡입하는 마크를 보고있자면,


  "... 뭐 며칠 굶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믿어지지가 않는 거다.

 

  "저 쫌 너무 잘 먹나요? 원래 가리는 게 없는 스타일이긴 한뎅."

  "아뇨. 잘먹어서 보기 좋네요. 많이 드세요, 많이."

  "주황씨는 다 먹은 거예요?"

  "네네 저는 입이 좀 짧은 편이라."

  "아 그렇구낭..."

 

   어젯밤 마크는 내일 만나자는 말만 하고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지더니 (솔직히 난 마크가 매너있는 외계인이라면 적어도 이 늦은 시간 혼자 산길을 내려가는 내가 안쓰러워서라도 집앞까진 배웅해줄 줄 알았다), 오늘은 별안간 점심을 같이 먹자고 우리집 문을 두드렸다.


  진짜 외계인을 만났다는 생각에 신기해 밤잠을 설친 탓인가, 평소보다 한두시간은 늦게 일어난 참이었다. 그제 시킨 택배가 도착한 줄 알고 하품 쩍쩍 뱉으며 현관문을 열어본 나는 비명을 지르며 곧장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어어, 왜 문을 닫아용! 전데! 저예요!"


  마크가 주먹을 쥐고 문을 통통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대문을 등으로 누른채 심장께에 손을 올렸다. 평화로운 낮시간 우주 불청객의 등장인데 정말 여러모로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아 진짜 깜짝이야! 저가 누군데!!!

  "마크!! 마크용!!"

  "아 몰라서 물어보는 거 아니거든요!!"


  대체 어떻게 알고 우리집 앞엘. 왜 하필 이런 타이밍에. 나는 급하게 머리를 하나로 모아묶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마주한 밝게 빛나는 푸른 눈. 마크는 아주 젠틀한 미소를 지으며 내 앞으로 꽃을 내밀었다. 영국에서 만난 이탈리아 아저씨가 지구인 여자들에겐 꽃을 주며 약속을 신청해야 한다고 해가지구. 여자들은 아름다운 걸 보면 마음이 누그러진다고 하던데요? 주황씨도 그런가용?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는 들고온 주황색 리시안셔스보다 턱시도를 입은 파란색 외계인의 아름다운 자태에 마음이 크게 울렁인게 사실이었지만.


  헐레벌떡 널브러진 옷들을 빨래통에 던져넣고 여기저기 나와있는 컵가지들을 싱크대위로 내팽겨치듯 옮겼지만 더러웠던 집이 30초만에 깨끗해질 순 없는 노릇이다. 정리되지 않은 집안을 기웃거리던 마크는 의자에 걸린 수건을 곱게 개어 소파 위에 놔두고 자리를 만들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에 앉으면 될까용?"

  "네네. 거기 앉아요 일단."

  "그... 집이 아늑하네요."

  "괜히 그런 말 안해도 돼요."

  "앗, 넹."


  물이라도 내주려고 보니 씻어놓은 컵이 하나도 없다. 쌓인 설거지거리 위로 대충 뜨거운 물을 뿌리고 설거지를 시작한다. 마크는 그런 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한번씩 입매를 씰룩거리며 웃었다. 아무튼 신경쓰이는 스타일이다.


  "되게 바빠보이네요."

  "(아 예 누구덕분에..) 아 제가 원래 이렇게 안 치우고 살진 않는데 어제 늦게 자는 바람에 집 청소를 못해서."

  "그럴 수 있죠. 저도 청소 엄청 싫어해요."


  그런데 외계인도 꼬르륵소리가 나나. 대화하는 내내 균일한 간격으로 마크에게서 꼬르륵소리가 들려왔다. 그걸 의식한 모양인지 마크가 셔츠 아래로 마른 뱃가죽을 비비며 히히 하고 웃는다. 딱 보니 배가 많이 고픈 모양이었다. 궁금한 게 많았지만 당장 묻지 않고 설거지 마치자마자 냄비에 물부터 받아 두개 남은 짜파게티 끓여준 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선의였다. 마크가 뭘 좋아하는지, 뭘 못 먹는지 알지도 못했지만 모름지기 장기 여행자라면 음식을 가릴 수 없는 법이다. 

 

  "주황씨는 오늘 뭐 하고 싶은 거 있어요?"

  "저요? 딱히 없는데."

  "헉 어떡하지? 나는 좀 많아요."

  "그거야 당연하죠, 나는 여기 사는 사람이고 그쪽은 여행잔데. 뭘 하고 싶은데요?"

  "경복궁도 가보고 싶고, 남산타워도 가보고 싶고. 음... 또 한강도 가보고 싶구요."

  "진짜 여행자 풀코스네. 거기도 인스타가 있나? 유니버스 네트워크 서비스 뭐 그런 걸로 알아봤어요?"

  "비슷한게 있긴 있어요. 근데 같이 가줄 거예요? 재밌을 거 같애."

  "내가 그렇게 재밌는 사람은 아닌데."

  "나랑 같이 다니면 재밌을 걸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주황씨 나랑 눈마주치면 웃잖아요. 지금도 이렇게 눈은 무섭게 뜨고 있는데 입이 웃고있어요. 재밌어서 그런 거 아니었어요?"


  뭔가 들킨 기분이라 더 큰소리로 웃었다. 어이 없다는 제스쳐와 함께 고개를 가로 저었다. 완전 자뻑 외계인.

 

  "그건 그쪽이 내가 아는 사람이랑 닮아서 나도 모르게 그만."

  "아하. 민형씨?'

  "이름 부르지 마요. 듣기 좋은 이름은 아니거든요."

  "앗 넹."

  "큼, 암튼. 근데 아무리 나랑 놀고 싶었어도 그렇지 이렇게 말도 없이 갑자기 집으로 찾아오면 내가 당황하잖아요. 다음부턴 미리 시간을 정해요."

  "헉 텔레파시 못 받았어요?"

  "텔... 뭐요?"

  "오우 전 당연히 받은 줄 알았어요! 열두시에 집앞에서 보자구 어제 자기 전에 오분 간격으로 보냈는뎅... 안 통했나보다."

  "뭔. 우리 집은 어떻게 알았는데요?"

  "그건 그냥 느낌?"

 

  텔레파시니 느낌이니 영 신빙성 없는 말을 해대니 이거야 원 말이 통하질 않는다. 그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라는게 있는데 어쩌구, 그 스파이더맨에 나오는 스파이더 팅글처럼 우리같은 외계인들도 대충 느낌으로 알겠는 그런 감정이 있는데 저쩌구. 나는 긴긴 문장들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면서 마크를 위아래로 훑어보곤 무엇을 입을지 생각했다. 집에 괜찮은 옷이 뭐가 있더라. 작년 겨울에 세탁소에 맡기고 아직도 못찾으러 간 원피스가 퍼뜩 생각난다. 그걸 좀 미리 찾아왔어야 하는 건데. 아무리 같이 다니는 이가 사람이 아니고 외계인이더라도 수트를 빼입고 왔으니 이 차림으로 같이 나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하 뭐입지? 잠깐사이 짜증이 난 나는 양 팔을 넓게 벌리며 어깨를 으쓱하는 마크를 쏘아보며 말했다.

 

  "됐고 그냥 스토커 외계인이네. 이 드넓은 서울바닥에 내가 어디 사는지 느낌으로 알았다는 걸 내가 어떻게 믿어요?"

  "헉 스토커라뇨! 저 그렇게 이상한 부류는 아니에요. 그치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흠... 그럼 그 뭐야 텔레파시 쏠 수 있다고 했죠?"

  "네! 그럼요."

  "그럼 역으로 내가 쏘는 것도 받을 수 있어요?"

  "쏠 줄 알아요?"

  "당연히 모르죠. 처음 해봐요 나도."

  "저도 지구인하고는 처음 해보는데. 솔직히 약간 쫌 떨리네용."

 

  마크가 손을 가슴팍에 엑스자로 갖다 대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뭐 저렇게 이모티콘처럼 생겼담. 


  "방법이 따로 있는 건가?"

  "방법? 글쎄요 우리는 그냥 머리로 생각하면 바로 받거든요."

  "흠."


  나는 가만히 서서 마크를 째려보며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쪽팔려 죽겠으니까 준비할 때까지 밖에 나가 있어라. 잠깐 급한일 생겼다고 알아서 구라치고 나갔다가 한시간 뒤에 들어와라. 그렇게 생각하며 마크의 두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니 동공이 더욱 진해진다. 군청색이 감도는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두 주먹을 꼭 쥔 마크가 어떻게든 기를 쓰고 있다는 게 느껴졌지만..


  "아무래도 안통하나봐요."


  역시 텔레파시 따위가 통할 리 없다. 시무룩해하는 마크의 머리통에서 김이 나는 것만 같은 착시가 인다. 그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고개를 양쪽으로 젓는다. 될 줄 알았는데. 주황씨랑은 뭔가 쫌 통하는 게 있는 거 같단 말이죠.

 

  "아쉽네. 안되면 어쩔 수 없죠 뭐."

  "그럼 제가 한 번 해볼까요?"

  "그쪽이 저한테요?"

  "네. 어제 밤엔 안통했다구 했으니깐. 지금 한 번 해볼까용? 이거 되면 내가 계속 텔레파시 쏠 수 있잖아요, 주황씨한테."

  "음 그건 좀 귀찮을 거 같긴 한데, 한 번 해봐요. 궁금하니까."

  "아 잠깐만요. 근데 사람 앞에 두고 실제로 해본 적은 없긴 하거든요? 그래두 다른 나라에 있었을 땐 통하긴 했으니까... 한국인은 첨이라 어떨 지 모르겠네."

  "아 말 되게많네. 그냥 한번 해봐요 그러니까."

  "아이 쫌 떨린당."

 

  마크가 파란색 뒷머리칼을 벅벅 긁으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바닥에 닿아있던 발을 의자 위로 끌어올려 가부좌를 틀더니 심호흡을 한다.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잠시간 나를 쳐다보더니, 그러니까 이게... 아무래도 방법이라는게 이런 거 같단 말이죠. 가끔 되게 멀리있는 사람한테 쏠 때 하는 건데. 양쪽 검지랑 중지를 붙이고 관자놀이에 붙인 다음에 이렇게 숨을 참아야 돼요, 흡. 마크가 숨을 참으며 눈을 감더니 미간을 찡그린다. 정말 몰입했는지 감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온다.

 

  이거 뭐 나도 같이 집중해야 되나? 나는 가만히 서서 마크를 쳐다보다가 검지와 중지를 차례로 살피며 마크가 하는 것처럼 관자놀이 옆으로 가져다 댔다. 음 뭐 나도... 숨을 참아야 하나? 크게 숨을 들이마신 후 입을 헙, 막아본다. 눈은 감기 싫은데. 솔직히 내가 눈 감은 사이에 저 자식이 무슨 짓을 할 지 내가 어떻게 알아. 나는 최후의 보루로 한 쪽눈을 남겨둔 채 남은 한쪽 눈만 찡긋 감고 마크를 주시했다. 숨을 꽤 오래 참고 있는데도 미동이 없다. 외계인은 지구인보다 호흡이 긴가? 폐가 막 네 개고 이런가. 아무래도 우주를 마음대로 여행하려면 숨쉬는 일에 인간보다 훨씬 자유로울 지도 몰랐다. 


  그에 반해 나는 그 몇 초 숨을 참았다고 얼굴이 울그락붉으락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대체 몇 초나 참아야 되는 거야? 텔레파시 보내고 있는 게 맞아? 분명 똑같은 포즈로 텔레파신지 뭔지를 받아 보려 기를 써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냥 지금 당장 숨 참고 있는 게 버겁고 눈 앞의 초연한 마크가 신기할 뿐.


  딱 10초만 더 참아보고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동시에 마크의 뜬 눈과 눈을 마주쳤다. 한쪽 눈으로 쳐다보던 나는 놀라 숨을 푸 하고 내쉬었고 마크는 입을 벌리고 멍하니 바라보다 와학학 웃으며 뒤로 넘어갔다.


  "뭐, 뭐야 왜 웃어요?" 

  "지금 저 따라한 거예요?"

  "따라 해야 되는 거 아니었어요? 그래야 통하는 거 아닌가?"

  "글쎄요 보통은 잘 안 따라하던데에."

  "아 몰라요. 아무생각도 안 들고 텔레파시 통하는 거 같지도 않고. 영 기분만 별로네."

  "기분이 별로였어요?"

  "난 그쪽이랑 다르게 숨이 짧으니까요. 외계인이라 그런가 숨을 되게 잘 참네. 폐가 대체 몇개에요?"

 

  마크가 또 몸을 젖혀가며 웃는다. 동그랗고 하얀 치아와  군청색 눈동자가 빛을 비춘듯 밝게 빛난다.

 

  "주황씨 그거 알아요?"

  "뭘요?"

  "은근히 좀 귀여운 구석이 있어요."

  "누가요?"

  "주황씨요. 뾰족한데 약간 노란색 뾰족뾰족이야."

  "나 참. 알아듣게 얘기를 해줘봐요. 외계어도 아니고."

  "사람이 날 서있는 거에 비해 귀여운 편이라구요. 말은 따가운데 마음은 따뜻해요."

  "......"

  "아까 텔레파시 포즈 따라는 거 진짜 좀 엄청 큐트. 되게 순수했어요 방금."

  "... 아 왜 갑자기 칭찬이야 민망하게. 그건 그렇고 텔레파시는 뭐라고 보냈어요?"

  "오 기분 별로라면서 궁금하긴 한가봐요?"

  "당연하죠. 내가 그거 들으려고 숨을 몇 초나 참았는데."

 

  마크가 싱긋 웃으며 앉아있던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턱턱턱 발을 세번 움직여 내 앞에 선다. 악수하자는 듯 손을 길게 뻗어 내민다.

 

  "점심 맛있게 잘 먹었다구요."

  "아하. 맛있게 잘 먹어서 다행이에요."

  "손 잡아주셔야죠. 지구인 인사."

 

  나는 눈앞의 손을 잠깐 바라보다 티셔츠 위로 손을 쓱쓱 닦곤 마크의 손을 마주잡았다. 처음 잡아본 외계인의 손은 인간 손의 촉감과 다르지 않았다. 건조하고 따뜻한 손이 이내 손등 위로 겹쳐졌다. 그리고 손을 당겨 나를 일으켜 세운다. 시선을 마주하니 어쩐지 심장께가 간지럽다.

 

  "연주황. 예쁜 이름이에요."

  "......"

  "내가 맞췄죠?"


  마크가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웃는다. 길게 늘어진 입매와 톡 튀어나온 광대가 자못 귀여워보인다. 진짜 맞출준 몰랐는데. 정말 인간은 모르는 능력이라도 있는 걸까.

 

  "...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아냈어요? 어제 가서 친구한테 방법이라도 물어봤나?"

  "아뇨. 음 이것도 그냥 느낌?"

  "참나... 또 느낌이래."

  "근데 왜 처음엔 아니라고 했어요?"

  "쓸데없이 귀여운게 나랑은 안어울리는 이름 같아서요."

  "귀여워서 잘 어울리는 이름인데요?"

  "귀엽다는 말 막 하고 그러는 거 아니거든요."

  "왜요, 쫌 막 부끄럽고 그래요?"

  "누가 부끄럽대요?"

  "또 웃고 있길래."

  "아 짜증나."

 

  어이없다는 듯 잡고있는 손을 풀어 눈 위로 가져다 댔다.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올려다본 곳엔 눈썹을 까딱 올리며 깜찍하게 웃는 파란머리 외계인이 있다. 얘 막 내 생각 읽고 이런 능력은 없겠지. 왜 자꾸 페이스에 말리는 느낌일까. 분명 다 받아주는 쪽은 마크인 거 같은데. 나는 똑같이 눈썹을 까딱거리며 엄지와 검지를 턱에 괴고 말했다.

 

  "이상하네."

  "네?"

  "짜증나는데 호감이란 말이지. 외계인은 다 이래요?"

  "다 그런 건 아닐걸요? 제가 원래 쫌 호감형이에요."

 

  마크가 나와 같은 포즈를 취하곤 광대를 올려 웃으며 어깨를 으쓱한다. 그러는동안 중천에 뜬 해가 집안을 가득 주황빛으로 물들였다.

 

 





[BGM] Redbone - Come and get your love 




3. 별을 따다 줄 순 없지만





  "헐 여기가 경복궁?"

  "응. 어때요, 멋지죠?"

  "네 완전. 진짜 진짜 멋있다.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장엄하다?"

  "오, 그런 말도 아네요. 어려운 건데 그거."

  "이 정도는 뭐."


  마크가 어깨를 으쓱하며 기세등등한 표정을 짓는다. 


  "한국 오기 전에 국어사전 한번 읽어봤었거든요."

  "국어사전을 읽었다고요?"

  "네. 어우 진짜 거짓말 안 하고 세 달은 본 것 같아요."

  "...... 진짜 요령없는 외계인이네."

  "요령? 오 저 그거 알아요. 방금 그 맥락에선 적당히 해 넘기는 잔꾀? 그거 맞죠?"

  

  한국 온다고 국어사전을 읽어 볼 생각을 하다니. 귀 뒤에 번역 칩도 들어있다면서 사전을 정독할 건 뭐람. 경복궁까지 오는 길에 물어본 결과 마크는 여러모로 아날로그적인 외계인이었다. 비행 원칙만 잘 지키면 통상적으로 야간비행이 가능하다는데도 어제 그 야산에 제발로 걸어온 거 하며, 손목 칩만 쓰면 자유자재로 의상전환이 가능한데도 굳이 양복점에서 옷을 사맞춰 입었다는 거 하며. 흙과 물과 씨앗만 있으면 손으로도 꽃을 틔울 수 있으면서 꽃집에 들려 주황색 리시안셔스를 골라올 만큼 낭만있는 외계인이기도 했다. 굳이 수고와 비용을 자처하면서까지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 그저 좋아서란다. 


  나는 마크를 데리고 경복궁의 이곳 저곳을 탐방했다. 근처에 볼일 있을 때나 한 번씩 지나치던 고궁을 이런식으로 속속들이 들여다본 건 오랜만이었다. 어린 아이가 새로운 물건을 만질 때마다 이게 뭐냐고 묻는 것처럼 마크는 끊임없이 질문했다. 내가 잘 모르겠다고 하니 지나가던 어르신을 붙잡고 물어보기도 주저하지 않았다. 머리색이 예쁘다는 칭찬을 받곤 이내 기분이 좋아져 여러번 점프하기도 했는데 높이가 너무 높아 날아가버리진 않을까 약간 걱정이 됐다. 헬륨풍선을 손에 꽉 쥐고 있는 기분이었다.


  경회루를 지나면서는 사진을 찍어달라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아이폰 14프로를 쓰는 외계인이라니. 깜찍하게 얼굴 옆으로 쌍브이를 올려보기도 엄지손가락을 척 올려보기도 하며 포즈를 잡는 마크와는 다르게, 나는 커다란 휴대폰을 들고 어색해하기 바빴다. 사진을 잘 찍는 편이 아니라 이리저리 열심히 찍어는 보는데 썩 맘에 안들어 멋쩍게 휴대폰을 돌려주니 마크는 아무렴 만족스럽다면서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그리고 같이 찍자며 내게 어깨동무를 했다. 그 자세가 또 낯설어 웃는둥 마는둥 하고 화면을 쳐다보고 있었더니 마크가 와르르 쏟아지듯 웃으며 내 앞머리를 헤집어놨다.


  "사진 찍는거 안 좋아해요?"

  "그냥... 자주 찍진 않아요."

  "뭔가 귀엽당. 주황씨도 가서 서볼래요? 찍어줄까요?"

  "아니 나는 됐어요. 언젠가 또 오겠지."

  "나랑 이렇게 온 것도 10년 만이라면서요. 얼른 가서 서봐요."

  "아 좀 부끄러운데.."

  "잠깐 잠깐. 머리 좀."


  자기가 망가뜨려놓은 앞머리를 다시 정리해주더니 가서 서보라고 손짓한다. 어색한 손길과 어색한 다정. 어색한 포즈와 어색한 표정. 목석처럼 일자로 서있으니 브이를 해보라는 둥 손하트를 해보라는 둥 자기가 더 난리다. 저 코리안 손하트는 도대체 어디서 보고 배운 건지. 아무튼 습득도 빠르다니까.


  점심으로는 만두와 칼국수를 먹었다. 서툰 젓가락질로 어렵게 어렵게 칼국수를 먹더니 영 불편했는지 만두는 다섯손가락을 다 사용해 집어먹었다. 분명 우리 집에서 짜파게티 두개를 혼자 다 해치우고 나왔는데도 중간중간 눈을 감아가며 열심히 맛있게도 먹었다. 먹짱 외계인이 따로 없다. 그냥 동네의 아무 식당에 들어간 거였는데도 마크는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이라고 식당을 나오자마자 박수를 치며 나를 치켜세웠다. 이런 곳에 데려와줘서 너무 고마워요 주황씨. 저는 진짜 너무 행복해용. 귀여운 얼굴로 웃으면서.


  마크는 말했던대로 여행자 풀코스를 즐기시려는 계획인지 그냥 경복궁 근처 카페나 들어가자니까 앉아있을 시간에 하나라도 더 보고 싶다며 나를 재촉했다. 그리고 명동역 4번출구로 나가면 만나는 남산 케이블카. 옛날 드라마나 예능에서만 보던 유치한 케이블카를 요새 누가 탄다고.. 나는 진짜 서울 여행자가 된 기분으로 한껏 들뜬 마크를 바라본다. 마크는 투명한 케이블카 벽면에 붙어 서울 시내를 신기하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감탄사 한번 내뱉을 때마다 제 푸른빛깔 머리가 얼마나 찬란한 빛을 내는지는 알지도 못한 채, 제 눈이 얼마나 푸르게 빛나는지는 깨닫지도 못한 채.


  연신 '우와'를 남발하며 즐거워하는 마크를 바라보며 투박하게 팔짱을 낀다. 실은 한 번도 타본 적 없으면서도 이런 시시한 것쯤은 눈감고도 탄다는 거짓말을 서슴없이 내뱉으며.


  "주황씨 우리 진짜 높이 올라와있어요!"

  "그러게요. 생각보다 되게 높네."

  "저 이런거 타고 높이 올라와본적은 처음이에요. 맨날 공중에 떠보기만 했지!"

  "그게 더 신기한데요..?"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외계인이 고작 케이블카 타면서 이렇게 신나할 일인가. 아무튼 여행에 최적화된 캐릭터인 건 분명하다. 아무하고나 말도 잘 붙이고, 아무거나 주는대로 잘 먹고, 어디서 뭘 봐도 즐거워하고. 


  남산하면 모두가 떠올리는 자물쇠. 애인이랑도 사본 적 없는 자물쇠를 손에 쥐고 마크에게로 건네주니 히히, 웃으며 네임펜 뚜껑을 딴다. 


  "한글 쓸 줄은 알아요?"

  "솔직히 writing에 약한 편이긴 해요."

  "웃겨 진짜. 펜 줘 봐요. 뭐라고 쓸까요? 


  마크가 큰 눈을 굴리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음.. 그냥 우리도 마크 하트 주황?"

  "네?"

  "이거 아닌가? 저기 저 사람들은 이름들 사이에 하트를 집어넣던뎅."

  "에이 그건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적는 거죠."

  "그게 왜요? 난 주황씨 좋은데!"

  "난 별로..."

  "치."


  빛나던 눈동자가 일순 식는다. 웃음기 사라진 얼굴을 하고 고개를 젓는다. 아무튼 분위기 깨는데 뭐가 있다니깐. 내가 그렇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쉽게 상처받는다고 했는데두. 


  "아니 그니까 내 말은, 사귀는 사이끼리 쓰는 거라구요 그건."

  "그래서요."


  미묘하게 튀어나온 부리같은 입술. 얇게 접힌 눈. 나 삐졌어요, 완전히 티내고 있다.


  "뭐, 그쪽은 애인 없어요? 생긴거 보니 있겠구만. 나랑 이러면 외계인 여친이 질투해요."

  "애인 없거든용."

  "거짓말. 거긴 그쪽같은 사람을 혼자 놔둬요?"

  "흥."

  "이렇게 잘생겼는데? 이렇게 귀여운데 혼자 놔둔다고요?"

  "치."


  서서히 풀리는 얼굴. 빵을 쥔 것 같은 주먹으로 내 어깨를 툭 친다.


  "그렇게 말하면 제가 좋아할 줄 알아요?"

  "좋아하라고 말한 거 아닌데? 사실을 말한 거예요 난."

  "몰라요 진짜, 짜증나."

  

  목을 뒤로 젖히며 눈을 질끈 감는다. 그리곤 내 손에서 펜을 가져가 몸을 구긴 채 손을 움직이더니 손바닥을 펼쳐 내 눈앞에 보인다. 빨간색 하트모양 자물쇠 위에 구불거리는 다섯글자. 연주황 미워.


  "해달라는거 다 해주는데 왜 밉대."

  "마음에 하트도 없고 낭만도 없구."

  "그쪽이 서울에서 오래 혼자 살아봐요. 그런게 남아 있나."


  마크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와 손을 뻗는다.


  "일어나요, 나 돈까스 먹을래요."

  "그렇게 먹고 또 배고파요?"

  "네. 사람들이 저기 들어가길래 궁금해서. 근데 돈까스가 정확히 뭐예요?"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켜 함께 걷는다. 아무튼 따뜻한 외계인. 서운해도 짜증나도 미워도 일어나라고 손 뻗어주는 다정한 외계인. 

  

  "돼지고기를 얇게 펴서 튀긴 거예요. 남산 돈까스 유명한데, 먹고 싶으면 같이 먹어요."

  

  얇게 접혀있던 눈이 비로소 동그란 모양으로 되돌아온다. 나는 푸른 곱슬머리를 한번 흐트러놓으며 웃었다. 


  "삐지니까 귀엽네요 근데."


  손사이를 지나던 머리칼이 일순 푸른빛을 내며 반짝이던 건 기분탓일까. 




  하나만 시키자는거 기어코 두개 시켜달라더니 다 먹어치운 마크는 일회용 젓가락 종이봉투로 입가를 닦으며 씩 웃었다. 이거 완전 에코프렌들리 외계인이다. 배가 부르니 다시 기분이 좋아졌나보다.


  "이제 뭐하지? 주황씨 정말 하고 싶은 거 없어요?"

  "글쎄요. 난 웬만한건 다 해봐서."

  "그럼 해본 것중에 좋았던 건요?"


  식당에서 나와 하늘을 살피니 태양은 먼 끄트머리에 걸려 마지막 빛을 발하고 있다. 이제 어두워지겠군, 생각하다 자연스럽게 우리가 만난 날의 푸른 달을 떠올렸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은,

  

  "음... 나 얼마 전부터 별 보고 싶긴 했는데."

  "별?"


  별을 보고 싶다는 거였다. 터무니없긴 했지만 이 드넓은 우주에 설마 지구에만 생물이 살고 있겠냐는 말. 그 말이 좋아서 마크가 가깝게 느껴졌던 것처럼. 광활한 우주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응. 진짜 쏟아질 것처럼 많이 보였음 좋겠다."

  "보러가면 되죠. 제가 보여줄게요."


  마크가 빙그레 웃으며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 보고 다시 나를 바라본다. 먼지 가득한 서울 하늘에서 별을 찾아 보여준다니 무슨수로? 별로 착각한 인공위성 한두 개쯤은 찾아볼 수는 있겠지만 그도 쉽지 않을 거였다. 


  "어떻게?"

  "나는 날 수 있잖아요."


  제 왼쪽 가슴을 팡팡 치더니 우쭐거린다. 이번엔 자뻑외계인이라고 놀리기엔 사안이 특별했다. 어느날 내 앞에 뚝 떨어지듯 나타나 저는 하늘을 날 수 있으니 별을 보여주겠다고 자랑할 수 있는 생물이 이 우주에 몇이나 될까. 


  "지금? 보여줘봐요!"

  "음 할 수는 있는데 지금은 밤이 아니라 투명모드로 비행해도 쫌 티날걸요?"

  "밤에는 할 수 있어요 그럼?"

  "나두 오랜만에 해보는 거긴 한데 할 수는 있죠?"

  "그게 나도 할 수 있는 거예요? 마크 혼자 하는 거 아니고 나도?"

  "근데 주황씨 무서워 할 수도 있어요."

  "무슨 소리. 나 티익스프레스 맨 뒷자리에서 손 올리고 타는데!"

  "티 익스프레스?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암튼. 그럼 오늘 밤엔 같이 날아볼까요?"

  

  국어사전은 다 읽어도 티 익스프레스는 모르는 외계인. 별을 보고 싶다고 했더니 같이 하늘을 날아보자는 파란머리 인외.


  "좋아요!"

  "주황씨 이렇게 신나게 웃는 거 진짜 첨봐요. 처음인게 많아서 좋다."

  "당연하지. 어제 처음 본 사인데 새삼스럽게."

  "내 말은, 나도 좋다구요."

  




/






    눈을 떴을 때만 해도 머리 꼭대기에 서있던 태양이 시간을 받아 기울고 또 기운다. 땅밑으로 빛을 가라앉히며 사라지는 태양을 바라보다 엄지발가락으로 선풍기의 전원버튼을 눌러 껐다. 


  "어어..."


  얼굴에 한창 바람을 맞던 마크가 힘없이 멈춰선 선풍기의 날개를 바라보며 표정을 구긴다. 


  "아 진짜 시원했는뎅... 하긴 한국은 전기세가 빡세다고 들었어요. 내가 너무 눈치없이 오래 틀구 있긴 했당."

  

  짐짓 아무렇지 않게 웃는 마크를 향해 고개를 가로로 저으며 대답했다. 


  "그게 아니고 이제 시간이 됐어요."

  "무슨 시간이요?"

  "별 보러 갈 시간."

  "헉 벌써?"

  "해 다 졌어요."


  창가에 딱 붙어 바깥을 바라보던 마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뒤돌아 손을 뻗는다. 


  "악수? 지금은 악수 할 타이밍 아닌데?"

  "으으응. 손 잡자구요."

  "손은 왜?"

  "손이라도 잡고 있는게 좋을걸요. 하늘 나는게 쉬운 일이 아니라니깐."


  하늘을 날게 해준다는데 그깟 손 하나 못 잡으랴. 나는 마크가 내민 손을 덥썩 잡았다. 


  "이 에너지 좋아요."

  "제가 이래보여도 근력은 꽤 쓸만해요."

  "평소에 운동 좀 해요?"

  "아니, 그 뜻은 아니고. 그래도 이거 봐봐요."


  팔을 굽혀 알통을 만들어 보여주니  마크가 큭큭거리며 웃는다. 그렇게 막 믿음직스럽진 않은데에. 하늘 나는 것도 코어가 좋아야 되거든용. 나한테 딱 붙어있어야 돼요. 싫다구 대충 붙어있고 그러면 떨어진다. 난 분명히 말했어요. 


  "그것도 완전 자신 있어요. 나 원래 예전에 별명이 거머리였거든요."

  "왜요?"

  "딱 붙어서 안떨어진다고. 전에 사귀던 애가 붙여준 별명인데 나한테 맨날 떨어지라고 무겁다고 난리 난리."

  "나는 떨어지라고 말 안하니까 꼭 붙어있어요. 진짜 약속."


  그렇게 말하는 얼굴 위로 염려가 서린다. 뭐 얼마나 높이 날아 별을 보여주려기에. 나는 검지와 중지, 약지를 접어 새끼손가락을 마크에게 보이며 말했다. 


  "새끼손가락끼리 거는 걸 한국에선 약속이라고 하거든요."


  마크가 내 새끼 손가락에 제 것을 건다. 약속을 해도 불안한건 여전한지 눈동자의 움직임이 요란한다.


  "다칠까봐 걱정돼요."

  "아 자꾸 걱정하니까 나도 무서워지는 거 같아. 혹시나 떨어지면 받아줄 수 있죠?"

  "떨어지지 마요. 진짜 1센치도 떨어지지 마요."


  신신당부하는 외계인에게 웃음으로 답을 대신한다. 조금은 안심한듯한 얼굴을 확인하고 먼저 현관문을 나섰다. 얼른 나와요 얼른. 손짓하며 이번엔 내가 먼저 손을 뻗었다. 손 잡고있는게 좋다면서요. 손을 맞잡은 마크가 몸을 굽히며 따라나온다. 직전보다 조금은 붉어진 볼을 하고.






 [BGM] 설 - Cilla(English ver.)





  우리는 근처 빌딩의 옥상으로 올라와 페인트 색이 바란 초록 철문을 동시에 열었다. 동네 자체가 고지대인 탓에 굳이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에 무단침입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높은 위치였다. 침을 꿀꺽 삼키며 어둠이 깔린 하늘을 올려다봤다. 회색빛 구름 한점 없는 맑은 밤이었다. 


  마크는 옥상 이곳저곳을 걸어다니며 발을 구르기도, 점프를 하기도 했다. 마치 땅이 단단한지 확인하는 행동 같았는데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마크의 뒤를 졸졸 쫓아 비슷한 행동을 반복했다. 뭐라도 도와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뭐하는 거예요?"

  "마크 따라해요."


  마크가 샐샐 웃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뜬다. 밝게 빛나는 눈 안에 우주가 한가득이다. 무슨 할 말이 있어 그런가 했는데 아무 말도 못하고 내 얼굴을 차례차례 뜯어보기만 한다. 눈 코 그리고 귀 턱 입술까지.


  "응?"

  "......"

  "왜 그렇게 봐요?"

  "방금 나를 처음으로 마크라고 부른 거 알아요?"

  "내가 그랬나?" 

  "계속 그쪽이라고만 했어요. 정없게."

  "또 언제 그렇게까지..."

  "언젠 기억하기도 싫다더니 이젠 불러주기도 하네."

  "생각해보니 그냥 이름인데요 뭐."

  "난 내 이름 불러준 사람 절대 안 잊어요."

  "누가 잊으래요? 나 잊지 마요. 당신을 최초로 알아본 한국인. 절대 잊으면 안되지."

 

  그렇게 말하니 마크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인다. 감동이라도 받은 걸까. 원래도 맑은 눈이 더 크게 반짝인다. 


  "이제 날아아죠. 땅은 다 밟아봤어요? 근데 아까 그거 뭐였어요? 발 이렇게 하는 거."

  "긴장 푸는 거요."

  "외계인도 긴장을 하는 구나."

  "손 줘볼래요?"

  "자."

  "반대쪽도."


  내 양손을 맞잡더니 제 품으로 당겨온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에 놀라 숨을 참았다. 마크는 놀라지도 않았는지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로 다음 자세를 알려준다. 제 발 밟아볼래요? 양쪽 다. 그냥 내 발 위로 올라온다고 생각하고. 맞아요 그렇게. 그리고 팔 양쪽 다 제 목위에 올리고 손깍지 껴봐요. 


  하라는대로 하다보니 마크의 발을 밟고 올라서 목을 끌어안은 상태가 됐다. 긴 세월 누구와도 해본적 없는 자세인데다 너무 부끄러워 딸꾹질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얼굴을 쳐다보기 민망해 발끝만 바라보고 있는데 곧 마크의 손이 내 등 위로 올라온다. 


  "1센치도 떨어지지 말라는 말 기억하죠? 내가 더 꽉 끌어안을 테니까 내 어깨 위로 턱 올려봐요."

  "이렇게?"

  "응 그렇게. 잘했어요."


  잘했다며 뒷통수를 가만 쓸어내린다. 어제 처음 만난 외계인과 이게 뭐 하고 있는 것인지. 도대체 내 인생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그러나 이상하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내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느낌에 발밑을 살폈다. 바짝 붙어있던 몸을 떼니 마크가 다시 나를 제 품으로 강하게 끌어안는다. 


  "위험해요. 발 밑 보지 말고 하늘을 봐요."

  "알겠어요."

  "지나쳐온 거 말고, 위에서 반짝이는 것들에 집중해요."


  문학적인 문장을 되뇌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크가 가볍게 웃으며 말을 걸어온다. 분명 작은 목소리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딱 붙어 있어서 그런가, 마크가 말을 할 때마다 내 몸도 함께 울리는 듯했다.


  "아까 집에서 티익스프레스를 찾아봤는데요, 그건 안전장치가 있더라고요."

  "..."

  "근데 지금은 내가 주황씨 안전바니까, 나 믿고 그냥 세게 잡아도 돼요."


  고개를 들어 가만히 하늘을 바라본다. 어두운 밤하늘을 수놓은 작은 별들. 그리 높이 올라온 것 같지도 않은데 빛이 한가득이다. 서울 하늘에 이렇게 많은 별들이 숨어 있었나. 


  "진짜 멋있다..."

  "그쵸. 어때요, 좋아요?"

  "네.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날 중에 손에 꼽을 만큼 좋아요."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기분.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느낌에 마크의 목을 더  꼭 껴안았다. 내가 정말 살아 있나, 확인하고 싶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사람에게서 내 심장소리를 듣는 거랬다. 바짝 붙은 몸 위로 내 심장소리가 균일한 간격으로 쿵쿵 울린다. 연신 감탄을 내뱉는 나와 달리 마크는 아무 말이 없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그런데.. 혹시 일부러 천천히 날고 있는 건가?"

  "빠르게 날면 주황씨 기절할지도 몰라요. 조심조심 날아아죠."


  괜한 장난에도 지나치게 자상한 어투로 반응한다. 이상하게 그게 좋아 한번 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찔러본다.


  "흠... 좀 지루한데."

  "지루하다고요? 진짜?"

  "아 뭔가 엑셀이 성능이 좀 약한 거 같은데."

  "참나... 나 꽉 안아요."


  이번엔 장난이 제대로 먹혔나. 머릿결을 타고 나풀대던 바람에 속도가 붙는다. 덩달아 나를 끌어안는 마크의 손에도 무게가 실린다. 동그란 귀 옆으로 바짝 붙어 탄성을 내지른다. 


  "무섭진 않아요?"

  "너무 좋아!! 마크 진짜 최고다 외계인 중에 제일 좋아!"

  "외계인은 나 하나밖에 모르잖아요."

  "너만 알면 되지 더 알아야 되나?"


  마크가 나를 안은 손에 살풋 힘을 푼다. 동시에 줄어드는 비행속도. 하늘 한복판에 세로로 멈춰서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장난스럽게 마주보고 섰다.


  "불량 주황. 자꾸 은근슬쩍 반말하고."

  "번역기가 반말이라고도 알려줘?"

  "아니 ,이건 그냥 느낌이거든." 

  "너도 반말하네 뭘. 그리고 너 딱봐도 나보다 어려보이거든."

  "내가 몇살인줄 알고."

  "몇 살인데?"

  "한달 있으면 천 구백살이야."

 

  천.. 천 구백살? 그럼 지금 천 팔백 구십 구살? 기껏해야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얼굴로 천구백살이라는 천문학적인 숫자를 뱉어내다니. 믿어지지 않아 부러 큰 소리로 웃는다. 장난도 어느 정도가 쳐야 믿어주지. 


  "아 장난치지마. 말이 돼?"

  "진짠데. 오빠라고 불러."


  진짜라고 말하는 표정이 사뭇 진지해서 웃던 걸 멈추고 눈을 바라본다. 진심을 전할때면 늘 반짝거리던 눈. 그 눈이 왠지 이번에도 진실을 말하는 것 같아서.


  "야... 천 구백살이면 오빠로 안돼..."

  "내가 갑자기 되게 멀어보이지. 너 지금 나한테 엄청 실수한 것 같지 막."

  "응.."

  "괜찮아 거짓말이거든."


  그렇게 말하고 내 등을 꽉 끌어안으며 일순 속도를 올린다. 나는 놀라 마크의 목을 세게 당겨 끌어안았다. 


   "죽을래 진짜! 누가 장난을 이런식으로 쳐!!"

   "믿을 줄 몰랐지. 내가 말했지, 너 진짜 순수하다니까."


    우리는 위로 위로 그리고 더 위로 올라 수많은 별의 환호성을 눈으로 듣고는 밤이 더 깊어 돌아왔다. 마크가 열어준 찬란한 세상. 온 하늘이 나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던 근사한 시간을 가슴으로 외운다.




  

  















*11/24 수정


블루문 1,2편 합쳐서 3편 붙였고 전부 수정해서 상편으로 다시 게시합니다. 블루문은 상-중-하 또는 상-하로 이어붙이게 될 것 같습니다.


약속 지켰다

너무 오랜만의 글이라 .. 재밌게 봐주셨으면 ㅎㅎ

콘서트 가시는 분들 잘 놀다오세요 (부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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