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형의 얼굴은 아직 창백했다. 안그래도 하얀 형의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려있었다. 평소였다면 많은 양의 출혈을 수혈로 채웠을텐데. 당장 수혈을 받을 방법은 없었다. 집 안에 그런 의료시설이 있을리가 없으니까. 윤기형의 말에 나는 태형이의 손을 놔버렸다. 형은 그제야 살짝 웃음을 보였다. 이런 상황인데도 질투가 하고 싶냐. 망할 인간. 휴. 나는 태형이를 바라보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잠깐의 수다 뒤로 다시 쿵- 하는 마찰음이 들려왔다. 윤기형이 무슨 일이냐는 표정이었다. 나는 최대한 간략하게 지금의 상황을 설명했다.


"좀비가 집 안에 들어올 수도 있어. 차고 문에 문고리가 빠져있어서 만약 저 좀비가 머리를 좀 쓴다면 바로 들어올거야."

"……."

"형. 일단 좀 눕는게 좋을 것 같은데요."

"괜찮아. 걱정 안해도 돼. 지금 걱정은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까겠지."

"……. 물건으로 어떻게든 막아보면 어때?"


아예 차고 문을 막을 방법. 끔찍하게 생긴 네발 좀비는 꽤나 머리를 쓰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켜본 바로는 아마 좀비들은 지능이 퇴화되어 눈 앞에 보이는 것만 인식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좀비는 멀리서부터 상황을 지켜보고는 살아있는 인간을 향해 달려들었다. 차 위에 올라서서 안에 살아있는 인간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듯이 계속해서 부딪히고 있다. 차고의 오버헤드도어가 금방 부서질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 말은 즉, 저 좀비는 좀 더 진화된 좀비일 수 있다 라는 이야기였다. 좀비사태 후 겨우 며칠이다. 며칠만에 좀비들은… 빠른 속도로 진화하는 건가. 대체 정체가 뭐지. 내가 머리 속으로 한참을 생각하는 동안 윤기형과 태형이는 이미 행동을 개시했다. 오버헤드도어가 망가지기 전에 물건을 쌓아서 집 안으로 통하는 문을 막아야만 했다. 무겁고 커야한다. 

윤기형은 서재로 가서는 몇개의 가방에 온갖 책을 쑤셔넣기 시작했다. 두꺼운 전공서적부터 형이 좋아하던 소설책까지. 태형이는 몸이 멀쩡하니 부엌에 있는 의자 두개를 들어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부엌에 있는 의자는 꽤나 무거운 의자였다. 나는 양손으로 들어야 겨우 하나를 옮기는 의자였다. 조금이나마 무게를 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윤기형을 도와 가방에 책을 넣었다. 최대한 많이 넣어 무겁게 만들었다. 어떻게든 문을 열 수 없게만 하면 된다. 밀어야 하는 문이니까 밀리지 않게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윤기형은 그나마 힘을 줄 수 있는 오른손으로 가방을 들었다. 계속해서 쿵쿵 하며 차고에 침입하려고 하는 좀비 또는 좀비들을 자극해서는 안됐다. 우린 조용히 움직였다. 문 앞에 의자를 놓고 가방도 빈틈없이 쌓았다. 그래도 아직 문의 절반밖에 가리지 못했다. 문고리가 빠진 구멍은 어떻게든 가렸지만 이정도로는 저 엄청난 힘을 가진 좀비는 금방이라도 뚫고 들어올 것 같았다.


"……."


윤기형이 손가락을 들어 다시 올라가자는 제스쳐를 취했다. 나와 태형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발소리가 나지않게 조심조심 올라갔다. 계속해서 들려오는 쿵쿵 소리. 엄청난 공포감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심장이 쿵쿵 뛰어댔다. 우리가 뭔가 무거운 것을 찾는 그 시간이 너무나도 느린 것 같았다. 더 빨리. 빨리. 찾아내야 해. 제발.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순 없잖아.

나는 부엌으로 갔다. 거기엔 쌀포대가 하나 있었다. 시부모님이 보내주신 쌀이었다. 나는 태형이에게 쌀포대를 가리켰고 태형이는 대답없이 성큼 다가와 어깨에 이었다. 태형이가 다시 계단을 내려가고 나는 여기저기 살펴보기 시작했다. 무거운 것. 생각보다 집 안에 무거운게 없었다. 진짜로 무거운 것들은 모두 가구인데…. 당장 들고 계단을 내려갈 수는 없었다. 3층으로 올라가서 버텨야하나? 그래도 생존하는데 필요한 물이나 이런건 전부 2층에 있는걸. 2층을 포기할 수 없지. 그때 형아들이 열심히 그리고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봤는지 윤재가 다가와 내 옷자락을 잡았다.


"아…. 윤재야. 괜찮으니까…. 여기 가만히 있어."

"네……."

"미안. 윤재야. 그래도…. 지금은 형아들이 열심히 힘을 써서 막을 수 밖에 없어. 그러니까 윤재는 기다려주면 돼. 할 수 있지?"


윤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 나도 잘 알지. 사실 윤재가 해줄 수 있는 건 기다려주는 것 뿐이다. 윤재의 존재 자체가 우리가 힘을 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될테니까. 태형이가 의자 위에 쌀포대를 올려놓고 왔다고 말했다. 이정도면 충분할지…. 전혀 알 방법이 없었다. 윤기형은 지쳐보였다. 조금 어지럽다며 소파에 앉아있다가 다시 일어나 내 어깨를 톡톡 쳤다.


"1층. 작업실에 있잖아. 뭐 많지 않았나."

"아…. 그렇지? 가보자."

"응."


1층 작업실 문을 열었다. 나는 워낙 취미생활을 하고 싶은게 많은 사람이었다. 이렇게 많은 잡동사니가 있을 줄이야. 구석구석 살펴보니 이젤도 있고 재봉틀도 있었다. 둘다 무게가 좀 나가니 들고 나가서 차고 문 앞에 잘 세워두었다. 운동용 덤벨 kg별로 있었다. 무게가 될 만한 것들을 챙겨 큰 에코백에 넣었다. 장바구니로도 썼던 에코백인데 이럴때 쓰일 줄이야. 무너지지 않게 최상단 쯤에 놓으니 문 전체적으로 가려지면서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았다. 혹시 몰라 태형이와 함께 작업테이블을 들어 앞에 가져다놓기까지 했다. 이제 쉽게 안밀리겠지. 문을 연다고 해도 앞에 쌓인게 많아 절대 들어올 틈이 없었다.

우리가 테이블까지 앞에 가져다 놨을 때 절대 듣고 싶지 않았던 우지끈 하는 소리가 들렸다.





엘레닌(C/202n X1)

MELA




 차고 오버헤드도어가 어떤 식으로 뚫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막아둔 차고 문 너머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 으갹 거리는 이상한 소리같은 것들로 추측이 가능할 뿐이었다. 정말 그 네발 좀비가 지능이 높은 좀비라면 생긴 것으로 문의 위치를 알겠지. 무서웠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 모두가 죽는다. 우리가 어떻게든 버티려고 해왔던 모든 노력들이 물거품이 된다. 나는 태형이를 이 사지로 끌고 온 것에 죄책감이 느껴졌다. 태형이를 바라보며 미안… 하고 작게 말했다. 태형이는 고개를 저었다. 윤기형은 점점 의식이 없어지는 것 같았다. 충분히 쉬어야 하는 환자인데도 무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됐을까.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나는 미안했다. 문이 열릴 조짐이 보이면 내 손으로 문을 막아야 했다. 윤기형은 아마 돕지 못할테니 이건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찰박거리는 발소리는 차고 안을 맴돌았다. 짐승이 기어다니는 듯한 소리 뒤로 어딘가 벽에 일부러 부딪히는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때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 좀비는 갑자기 사라진 인간이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하듯 벽 여기저기에 몸을 부딪혔다. 그 소리가 문 바로 옆에서 났을 때는 간담이 서늘했다. 네발 좀비는 정말로 지능이 일반 좀비들보단 높은게 분명했다. 숨조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들이 떠나기만을 기다렸다. 꽤 긴 시간이었던 것 같았다.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어 바닥에 주저앉지도 못했다. 그 사이에 점점 해가 지는 것 같았다. 안을 열심히 돌던 좀비는 밤이 되는 것을 알아챘는지 조용히 서있다가 밖으로 향했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고 우리는 안심했다.


쿵!


지금까지 중에 가장 큰 소리였다. 나는 하마터면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내가 소리지를 뻔 한걸 윤기형이 재빨리 입을 틀어막아 막을 수 있었다. 그 좀비는 차고 안쪽 벽 어딘가에 가장 세게 부딪히고 나서 떠났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몇분. 그제야 우리는 제대로 숨을 쉬었다.


"……. 태형아. 너 못나가겠는데…."

"그러게…. 뭐 괜찮아. 여기 내가 버틸 몫도 있는거겠지?"

"안돼. 돌아가 김태형."

"형! 너무하잖아요. 내가 형 살렸어요."

"알아. 인마. 올라가자."


티격태격하던 두사람이 먼저 계단을 올랐다. 이윽고 내가 계단을 오르려 하다가 혹시 몰라서 차고쪽 복도에 나있는 불투명창에도 커튼을 쳤다. 누군가 1층으로 내려왔다가 불이 켜지는게 밖으로 새어나가기라도 하면 큰일일테니. 꼼꼼하게 암막커튼을 치고 계단을 올라갔다. 2층에서는 한결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잊고있었던 핏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나 아무렇지도 않아졌구나…. 신기했다. 역시 극한의 상황에선 이런게 극복이 되는건가. 일단 진이 빠져서 핏자국을 닦을 생각은 못했다.

터덜터덜 걸어가 거실의 커튼을 살짝 걷어보니 노을이 지고 있었다. 우리가 밑에서 버틴게 거의 2시간 이상이었다니. 오랫동안 긴장하고 있었던 탓에 몸이 뻐근했다. 이제 생각이 많았다. 우리는 물을 많이 가지고는 있지만 생각보다 식량이 많지는 않았다. 성인 세명과 아이 하나. 하루 한끼 정도 먹는 식으로 버텨야할 것 같았다. 씻는것도 최소한으로 해야 했다. 당장 화장실도 걱정이었다. 단독주택이라 내부 물탱크가 있어 화장실을 쓰는 것 자체는 괜찮을 것 같았지만…. 그마저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대체 이 상황을 얼마나… 견뎌야 하는 것인지 불분명했다. 내가 장식장 가득 넣어두었던 비상식량들을 꺼냈다. 간단한 에너지바부터 적은 물로도 먹을 수 있는 특수 식량까지 있었다. 


"갑자기 신세를 지게 됐네. 미안."

"아냐! 네가 왜 미안해. 와줘서 고마워. 손님 대접을 잘 해야하는데…. 상황이 이래서 내가 미안하지."


윤기형은 주어진 에너지바를 먹고는 침실로 올라가버렸다. 지민이 건들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태형이는 피식 웃었다. 형은 지금 수혈이 어려우니 잘먹고 잘 자는 것 밖에는 없었다. 윤재도 에너지바를 먹고는 조용히 거실 소파에 앉아있었다. 나는 부엌에서 더 먹을 것이 있는지 찾기 시작했다. 냉장고는 이제 절대 열면 안되는 미지의 공간이 되어버렸고 시원하게 무언가를 보관 할 방법은 없었다. 곧 여름이었으니까. 집안에 햇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무언가를 키워 먹을 수도 없었다. 식물을 키운다는 건 물도 많이 써야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먹을게…. 정말 없다. 인간은 불과 물을 사용하여 식사를 하는데 너무 오랜 세월 익숙해져 있었다. 가장 큰 자원인 태양빛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식량으로 충분할 채소를 키우는 일조차도 어려웠다. 그 때 사둔 라면과 비상식량, 초코바 이정도가 전부인건가. 절망적이었다. 이걸로는 길어봐야 한달인데. 한달 안에 이 사태가 모두 해결될지도 모르겠고.


"하아……."


살아남는다고 해서 진짜 사는 것이 아니었다. 휴대폰도 TV도 먹통이었고, 취미생활을 할 만한 것은 책읽기가 전부였다. 물론 작업실에서 몇개를 가져오면 더 할게 있겠지만 우울감에 미쳐버릴 것 같은 절망적인 세상에서 무언가 고상한 취미를 한다는 것이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무기라도 만들면 좋으려나. 야구배트라던가, 골프채라던가. 그 좀비들을 향해 내가 휘두를수나 있을까. 나는 정신을 차리고 벌레가 꼬여들기 전에 핏자국을 닦기 시작했다. 태형이의 말로는 피 만으로도 벌레가 꼬여든다고 했다. 그 벌레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재빨리 닦을만한 것들을 꺼내들었다. 대리석 바닥이라 나무보단 나았지만 이미 말라붙기 시작한 피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닦아도 닦아도 그 흔적이 보였다. 붉은색은 빠졌지만 주황색에 가까운 노란 자국이 빠지지 않았다. 손이 빨개질 정도로 박박 문질러보았지만 되지 않았다. 나는 그냥 주저앉았다.


왜 이런 짓을 내가 하고 있어야 하는거지.

왜……. 왜 혜성이 나타나고, 좀비가 나타난거지.

왜 지금?


내가 허무하게 앉아있었는지 태형이가 다가왔다. 태형이는 말없이 내 어깨를 토닥였다. 내 요청 하나로 안전할 본가에서 나와 여기까지 와준 태형이였다. 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슬프기도 했고, 좌절스럽기도 했다. 여기서 버티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태형이에 대한 미안한 감정도 컸다. 윤기형이 제대로 회복할 수는 있는지. 윤재는 부모님과 떨어져 대체 얼마나… 살아야하는 것인지. 복잡하고 어려웠다. 그저 한 인간인 내가 감당하기엔 벅찬 일이었다.


"괜찮아."

"……."

"괜찮을거야. 지민아. 너 혼자라면 어려웠겠지만. 지금 우리가 다같이 있잖아."

"…응."


'괜찮아.' 이 말이 듣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입술을 꽉 물었다. 눈물이 새어나왔고 어깨가 참을 수 없이 떨려왔다. 윤재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나는 조용히 울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태형이는 날 감싸듯 안았다. 그의 큰 손이 내 등을 쓸어내렸다. 어릴때나 이렇게…. 엄마에게 안겨보았던 것 같은데. 


띠링-


나는 놀라 고개를 팍 들었다. 소리는 계속해서 울렸다. 내 휴대폰이었다.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휴대폰. 전기를 아끼기 위해 충전을 거의 안하고 있어서 꺼진줄로만 알았는데. 재빨리 다가가 화면을 보니 카톡이 와있었다. 보낸 사람은 엄마였다.


[우리 이제 미국으로 간다 지민아. 이번엔 안전하게 비행기 문 닫았으니 괜찮을거야]      

[도착하면 또 연락해볼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걱정은 말아]        오후 06:46


엄마가 진짜로 카톡을 보낸 시간이 지금인지는 모르겠다. 전송이 되지 않다가 지금 온 것인지. 그래도 엄마의 연락은 소중했다. 정말 미국으로 가셨구나. 역시 두분은 미국에서 꼭 불러야 하는 중요한 사람들이었던거야. 문득 아버지가 처음으로 내뱉은 진심이 다시 떠올라 코가 찡해졌다. 두분이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시는데 나도 버텨야만 해.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엄마에게 답장을 보냈다.


[꼭 살아있어야 해요. 엄마도 아버지도. 뭔가 정보를 찾으면 알려줘요. 사랑해요 두분 다]   오후 06:48


카톡은 바로 갔다. 지금이 통신이 되는 시간인건가. 나는 어딘가 연락하는 태형이를 뒤로하고 3층으로 올라갔다. 아직 곤히 자고 있는 윤기형을 툭툭 쳐 깨웠다. 형. 미안한데. 지금 인터넷 되는 것 같아. 윤기형은 눈을 뜨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힘이 없을만도 한데 몸을 살짝 일으키더니 아이패드로 이것저것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이 되는 시간은 늘 제멋대로 였다. 어느순간 카톡이 울린다거나 전화가 오면 되는거였다. 언제 끊길지 모르기 때문에 소중했다. 형이 열심히 검색을 해보았지만 딱히 수확은 없는 듯 했다. 나도 sns여기저기 검색을 해보았지만 생존자에 대한 정보만 있을 뿐. 그 외에 좀비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몇몇 정보에 따르면 이 좀비 역시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머리를 타격하면 죽는다는 것 같았다. 딱 이정도. 희망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형도 소득이 없는지 다시 패드의 커버를 덮어버렸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형이 다시 누워 눈을 감아버렸고 나는 형의 머리칼을 살살 쓸었다.


"형."

"응?"

"우리 부모님. 비행기 타셨대."

"다행이네."

"우리도 갈걸 그랬나?"

"이미 늦었지 그건."

"응…."

"내 결정에 후회 안해. 여기 온게 잘한 것 같아. 살아남을거라고 생각 안했으면 안왔어."

"응……. 고마워."

"사실 내가 후회하고 있었어. 너는 가만히 있는데…. 내가 괜히 오자고 했는지 해서."

"그런건 아냐. 모르겠어. 나는 미국에 간다고 해도 안전할지 전혀 모르겠어. 차라리 나한테 익숙한 이 집에서 버티며 지내는게 더 좋을거라 생각했거든. 아닌가?"


형은 손을 힘겹게 들어 내 등에 가져다댔다. 그리고는 힘을 주어 당겼다. 나는 그대로 형의 상체 위에 철푸덕 엎어져버렸다. 형한테 가만히 안긴 꼴로. 형이 등을 살살 토닥이다가 손을 아래로 내려 내 엉덩이를 콱 집었다.


"뭐하는거야!"


눈은 뜨지도 않으면서 환하게 웃어버리는 형 때문에 나까지 웃음이 터져버렸다. 이런 행복만 가득하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긴장의 연속으로 산지 며칠. 그렇게 지쳤던 회사 출근마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하는 것이 얼마나 내게 원동력을 주었던 것인지 알게되었다. 지치는 출퇴근길의 운전이라던가. 주말에 놀러나온 사람들과 다같이 돌아다니던 그런 사소한 모습들까지. 사람은 무언가를 잃어야 그것이 소중한 것임을 알아챈다던데. 내가 꼭 그랬다. 언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나는 윤기형이 다시 잠에든 것 같아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2층으로 향했다. 이미 완전히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태형이와 윤재는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마 윤재는 어른들보다 더 심심해할 것이 분명했다. 태형이도 그걸 알기에 피곤하면서도 윤재의 말동무가 되어주는거겠지. 나도 다가가 그들 사이에 끼어 앉았다.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아. 태형이 형아는 의사래요."

"오 맞아. 의사 멋있지."

"저도 나중에 크면 의사가 되고 싶어졌어요."

"정말? 윤재가 의사되면 진짜 멋있겠다. 그치 태형아."

"응응. 꼭 되면 좋겠다. 그런데 의사 되려면 공부도 엄청나게 열심히 해야돼. 윤재 공부 잘해?"


윤재는 말이 없었다. 태형이와 나는 웃음이 터졌다. 태형이는 윤재가 귀엽다는 듯이 윤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윤재는 얼굴이 조금 빨갰지만 앞으로 열심히 하면 된다고 다짐하며 말했다. 윤재는 참 귀엽다. 생각도 깊고 용기도 있고 어른들보다도 더 어른같을 때가 있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어떻게든 버티면서 금방 철이 들었을까. 마음이 아프면서도 기특해서 자꾸만 아끼는 마음이 커지고 있었다.

나도 윤기형과 아이를 가지고 싶긴 했다. 물론 게이 부부니까 입양을 해야했으니 그 과정이 순탄한 건 아니었다. 아이를 입양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다. 물론 재력도 대단하고 모자란게 없는 부부였지만 딱 하나 시간이 없었다. 둘다 생각보다 아이를 키울 만큼 시간이 많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물론 아이를 키우려면 희생을 해야하긴 했지만 우리가 너무 워커홀릭들이라…. 거기서 자꾸만 망설이게 됐다. 아이를 키우면 업무는 조금씩 포기해야한다. 물론 아이가 다 크면 그것도 없어지겠지만 각자의 욕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덕분에 이렇게 귀여운 윤재가 왔으니. 잠시동안의 행복이라 할지라도 내게는 기쁨이었다. 내 새로운 원동력이 되어줘서 고마운 마음 뿐.



**


나와 윤기형. 윤재와 태형이. 이렇게 네사람이 집에서 함께 지낸지 일주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끔찍한 네발 좀비는 더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우리 넷은 어느정도 생활에 익숙해졌다. 태형이와 윤재는 거실에서 함께 잠을 청했다. 2층에 있는 손님방을 쓰라고 해도 절대 쓰지 않는 것이 맘에 안들었지만…. 하루 한끼 정도 먹는 것도 익숙해졌다. 여기저기 찾다가 버너를 발견했고, 구석에서 부탄가스 두통을 발견했다. 덕분에 라면을 한끼 끓여먹었는데 그게 그렇게 맛있었다. 다들 만족한 식사였다. 그 외에는 식량을 아끼기 위해 노력했다. 물은 넉넉했다. 세수하거나 머리감기, 짧은 샤워정도는 무난히 가능했다. 화장실 사용도 아직까진 괜찮았다. 1층의 작업실에서 이것저것 가져와 취미생활도 했다. 퍼즐을 맞추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윤재에게도 그림 재료를 쥐어주니 제법 이것저것 그려냈다. 태형이는 윤기형의 상태를 봐주고 서재에서 책을 읽는 시간이 많았다. 윤기형의 상처도 많이 나아져서 움직이는데 불편함이 없었다.


밖에 나가지 못하고, 통신이 단절되어 있을 뿐. 우리는 평범한 일상을 나름 되찾았다.

평화로운 날이었다. 밖엔 날씨가 좋았다. 가끔 연결되는 인터넷을 보면 좀비들이 굶어죽는 모습이 몇건 올라오곤 했다. 생존자들은 어떻게든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해서 우리처럼 숨어버렸다. 밖도 안정화가 되고 있었다.

매일 전등을 켜보고 전기가 들어오는 것 같으면 바로 전자기기들을 충전했다. 생각보다 전기가 자주 들어오는 터라 살만했다. 도시가스만 들어오면 바랄게 없었다. 서재에서 태형이와 이야기를 나누던 윤기형이 갑자기 나를 불렀다.


"지민아!"

"왜?"

"와봐."

"응."


나는 윤재와 함께 서재로 들어갔다. 윤기형은 아이패드를 손에 들고 있었고 태형이도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패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데 그래? 윤기형은 태형이에게 다 읽었냐고 물어봤고 태형이 고개를 끄덕이자 내게 내밀었다.


화면 안에는 한 이메일이 보였다. 그 메일은 엄마가 보낸 메일이었다. 아마 카톡이 안되는 상황이라 메일로 보낸 것 같았다. 나는 메일을 잘 보지않으니 윤기형에게 보낸 건가. 메일 내용은 읽은 나는 잠시 벙쪄있었다. 이게 사실인가? 뭐 어느정도 추측한 내용도 들어가있긴 하지만 이건…. 

모두가 멍한 표정이었다. 대체 돌파구가 있기 한걸까. 뭔가 대비를 하고 싶어도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었다. 꼼짝없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윤재가 궁금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나는 윤재의 시선을 느끼고는 윤재를 바라봤다. 


"윤재야. 우리 여길 떠나야할지도 몰라. 어디로 가야…. 어디로 가야 살 수 있을까. 그…. 우리 집도 나름 한강이랑 가까운데…."

"지민아…. 윤재가 불안해하잖아."

"아…. 응. 미안. 윤재야. 그러니까…. 나는 하. 모르겠다 진짜. 이걸 뭐라고 말해야해?"                                                                                                                                            

가만히 듣고 있던 윤기형이 한마디를 툭 던졌다.



"서울에서 멀어져야지. 최대한. 미사일이 날아오기 전에."




짐른은 리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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