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편의 영화를 보고 자유롭게 씁니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연출한 셀린 시아마 감독의 첫 장편작 <워터 릴리스>를 관람했다. 감독의 전작까지 뒤늦게 개봉하는 것을 보니 꽤 두터운 팬층이 만들어졌나보다. 여성 관객들이 유독 사랑하는 듯 한데 오늘 영화를 보며 그 이유가 뭔지 알 것 같았다. 아마 어떤 남성도 그녀처럼 연출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영화는 주인공 마리가 친구의 싱크로나이즈드 경기를 보러 갔다가 매력적인 선수 플로리안에게 첫눈에 빠져버린 후 일어나는 일들을 보여준다. 

마리는 플로리안에게 반한 후 일관적으로 그녀에게 호감과 사랑을 느낀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운 건 그녀가 동성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짝사랑이란 걸 잘 알기 때문일 거다. 그러면 플로리안 또한 마리를 사랑했나? 하는 의문이 집에 돌아오는 내내 떠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광범위한 의미의 '사랑'말고, 입을 맞추고 살을 섞고 영혼의 조각을 나누고 싶은 유일한 관계로서의 사랑을, 플로리안은 마리에게 느꼈나? (아니 이미 그 모든 걸 둘이 했잖아?) 영화의 러닝타임이 길지 않고 마리의 시점에서 내용이 전개되기 때문에 플로리안의 감정을 확실히 알아채기가 조금 어려웠다. 왠지 누군가는 "당연히 사랑 아니야?" 라고 할 것 같고 누군가는 당연히 아니라고 말할 것 같기도 하다. 근데 그 눈빛이 사랑이 아니라고? 만약 누군가 나를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는데 사랑이 아니었다고 하면 당장 가서 따질지도 모른다. "왜 사람을 그렇게 봐?" 손가락도 건드렸잖아, 그랬잖아! 

그들의 나이가 열다섯이라는 사실과 둘의 성별이 같다는 점을 감안해야 하는 걸까. 영화 <마티아스와 막심>이 떠오르기도 했다. "너희 예전에 키스한 적 있잖아." 라는 대사에서 드러났던 마티아스와 막심의 과거처럼 지금 플로리안과 마리도 그 엇비슷한 순간을 지나고 있는 걸까. 정말 사랑보다 먼, 우정보다는 가까운. 뭐 이런 사이인 걸까. 오랜 역사를 쌓고 쌓는 동안 계속해서 혼란과 사랑을 경험하는 그런 관계로 남게 될까?

 플로리안은 마리 앞에서 자꾸만 가면을 썼다 벗었다 한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장면에서 둘이 키스를 한 뒤 내뱉는 그녀의 대사는 무엇이 진심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거 봐, 별 거 아니지?" 마리에겐 너무 별 거다. 그 별 거를 하고 싶어서 그녀가 먹다 버린 (그것도 쓰레기 봉지에서 찾아낸) 사과를 베어물기도 하고, 유리창에 남겨진 입술 자국 위에 입을 대보기도 했다. 여성의 몸을 비출 때나 성적 행위가 이루어지는 장면에서는 불필요한 대상화를 하지 않으면서, 이처럼 인물의 감정을 그려내는 장면에서는 '아니 이렇게까지 보여준다고?' 싶을 정도로 집요하게 연출한 곳곳이 인상적이다.

'내일 워터 릴리스를 보러 가야지' 하고 잠이 들어서인지는 몰라도 꿈에서 수영을 했다. 꿈인데도 '너무 시원하고 재밌다!' 생각하는데 가르쳐주는 분이 "수영하는 거 어때요?" 하고 묻길래 "오랜만에 했더니 예전처럼 물 속에서 눈 뜨는 게 잘 안 돼요." 라고 답했다. 숨을 참고 잠수하는 것보다 물 속에서 눈을 뜨는 것이 더 어색하고 이상했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왔다 갔다 하며 평영도 하고 자유영도 했다. 다 끝나고 나서야 배영도 해볼 걸, 후회를 조금 했다. 제일 쉽고 재밌는 영법인데. 선수처럼 몸을 휙 돌려 벽을 박차서 턴하는 것도 해보고 싶었는데 그건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과거나 지금이나 여전히 못 했다. 꿈에서 깬 후에도 기분이 좋을만큼 즐거웠다. 

물 속에서 시각과 청각과 촉각은 매우 다르게 작용한다. 마치 꿈처럼 소리가 희미해지고 빛줄기가 선명해지며 손가락 하나만 뻗으면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는 공간인데도 마치 다른 세계로 떨어진 것처럼 아득한 기분이 든다. "물 속에서 보면 더 잘 보여"라는 플로리안의 말에 마리가 싱크로나이즈드 연습을 잠수해 지켜보는 동안 카메라가 그 공간에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을 실감나게 담아내는데 그것이 정말 좋았다. 

그 나이에 겪을 수 있는 여자들의 성장통이 모조리 들어있는 영화라고 하면 조금 꼰대 같은 표현이려나. 변화하는 친구와의 관계, 누군가를 동경하는 마음, 육체적으로 닿고 싶은 기분, 질투와 혼란, 그런 제 자신을 인정하고 이해해가는 과정. 둘이 나란히 누워 천장을 바라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보는 건 천장일 거야." 라는 마리의 말에 "그러니까 천장이 다르게 보인다." 하는 플로리안의 말이 이어진다. 

내가 바라보는 것의 속성은 변하지 않았는데 누군가로 인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는 것, 나에게 새로운 정의와 세계가 생겨나는 것, 무엇을 보느냐보다 누구와 보느냐가 중요해지는 것.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물 속에 완전히 잠기지는 않은 채로 안나와 함께 천장을 바라보던 마리에게 묻고 싶다. 그날의 천장은 너에게 어떻게 보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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