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롬의 드러난 긴 목의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제롬은 온몸이 얼어 붙어 극심한 추위를 느꼈다.


우스운 것은 막상 죽게될 상황에 이르자, 제롬의 머릿속에 떠오른 얼굴은 안느도 군터도 아니었다.


그것은 율리우스의 얼굴이었다.


정말 이상하게도 최후의 순간이 막상 닥치니, 오직 율리우스가 저에게 만들어준 행복한 시간만이 주마등처럼 머리속에 스쳐갔다.


'왜 이럴까? 나는.

언제나 그를 밀어내왔는데.이제와서.

추하군. 내 스스로가.'



제롬은 갑자기 스스로가 우스워 피식 웃었다.



하지만 이내 눈가에서 얼굴로 흘러내려 가는 뜨거운 액체가 제롬의 코와 입가에 닿았다.


눈물의 짠 맛이 곧 입술과 혀로 느껴졌다.


줄리앙이 앞으로 뛰어 나와 거의 울부짖듯 외쳤다.


"탈리야! 황제여! 우리가 패배했다.

인정한다! 제발 에드워드5세의 목숨만은 살려다오!"


줄리앙의 얼굴도 어느새 뜨거운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줄리앙은 바로 눈앞의 소중한 연인의 최후를 막고 싶었다.


제롬이 죽는다면 평생 그는 가슴을 치고 통탄할 것이다.


줄리앙의 오늘이 있기까지 줄리앙의 존재의 의미는 오직 제롬에게 있었다.


군터는 탈리야의 눈을 조용히 응시했다.


그는 탈리야를 실제 보는 순간, 이미 그가 자신이 아는 어느 사내라는 알아챘다.


줄리앙의 간청에도 탈리야는 검을 거두지 않았다.



"우리 어린 국왕 폐하는 진실을 인정하지 않고 제 스스로가 명예로운 죽음을 택했다.

나는 지금 그에게 최고의 은혜를 베풀고 있는 것이다.

가짜 브리태니아 국왕에게 진짜로 죽게될 영광을!"


보기만 해도  서슬시퍼런 탈리야의 시미타 검날이 제롬의 가늘고 흰 목에 닿았다.


제롬의 목에 곧 가로로 실금이 생겼다.


실금에서는 천천히 새빨간 피가 조금씩 새어 나왔다.


탈리야가 또다시 검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그는 단칼에 제롬의 목을 쳐내려 하고 있었다.


실로 위태로운 장면이었다.


제롬의 작은 머리는 금방이라도 저 갸날픈 목이 잘려 더러운 땅바닥에 나동그라질 것처럼 보였다.




"안돼! 제발!"


줄리앙은 태어나 처음으로 남에게 '간청'이라는 것을 하며 눈물을 보였다.


고귀한 아리곤 황실의 핏줄이 남에게 매달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줄리앙에겐 황실의 체면이고, 최상위 소드 마스터의 자존심이고, 뭐고 아무것도 상관없었다.


제롬만 살려서 돌려 받을 수 있다면 더한 것도 할 수 있었다.


탈리양의 검이 제롬의 머리위에서 내려 치려던 찰나, 군터가 외쳤다.



"이제 그만하면 됐소! 쥬드 아이스너!"


탈리야의 검이 아래로 내려쳐 내려가는 순간, 공중에서 멈칫했다.


15년만에 들어보는 자신의 이름이 너무도 생소하게 느껴졌다.



"나의 오래전 옛주인이여!

당신의 농노중 하나가 이제는 귀족이 되어 이렇게 다시 당신앞에 섰소!"


흐느끼고 있던 줄리앙과 목에 칼이 떨어지기만을 땅바닥에 꿇어 앉아 기다리던 제롬이 동시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쥬드경?"

"뭐? 그 브리태니아의 천재 기사란 놈?"



탈리야의 철가면속 두 눈은 허무한 빛을 띄우고 자신 가문의  농노이자 기사, 옛 주군밑의 같은 동료였던 군터의 두 눈을 마주 보았다.


15년의 세월의 무상함에도 두 사내는 서로를 바로 알아 보았다.


군터의 가슴은 다른 의미로 찢어져 내려갔다 


일개 영지의 노예에 불과했던 그를 발굴하여 무예를 가르치고, 농노에서 해방시켜 국왕의 명예로운 기사로까지 키워줬던 그 한없이 은혜롭고 선량한 주인이었다.


국왕의 애인이기 전에 에드워드4세의 충직한 기사였고, 검의 천재라는 수식어에도 그는 항상 겸손했다.


사실 군터는 한번도 그를 주인이라 생각해본적 없고, 가장 진실한 친구이자 동료로 생각했다.


옛주인의 끔찍한 최후를 최전방 전쟁터 한가운데서 들어야 했던 군터는 평생 죄의식에 사로 잡혔었다.


국왕의 첫번째 검,검은 늑대 군터 아르헨 공작은 사실 아이스너 백작가의 막내 아들, 천재 소드 마스터 쥬드 아이스너가 있기에 오늘날 존재할 수 있었다.


당시에도 짐승과 다름없던 노예신분인 군터를 해방시켜  한명의 기사로 키워주는 것은, 이제리아 귀족 신분사회에서  그 예가 없는 파격적인 귀족의 행보였다.


출신에 상관없이 재능이 있는 자면 다 받아들이고 아껴주었던 에드워드4세에게 군터를 천거해준 것도 다름아닌 쥬드 아이스너였다.


하늘에 감사할 은혜를 베풀어 준 과거 주인에게,그것을 갚기엔 평생이 걸려도 부족했으나, 현재 군터의 첫번째 소중한 사람은 그의 연인 제롬이었다.


군터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아무도 그를 말리지 않았고,탈리야와 부하들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제롬과 탈리야의 바로 한 걸음 앞까지 다가갔을 때, 군터가 다시 말했다.


"쥬드. 나의 옛 주인.

당신의 은혜는 평생 갚아도 부족할 것입니다.

하지만 한번만 더! 한번만 더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오.

당신은 지금 당신의 죽은 연인 에드워드4세의 하나뿐인 아들을 죽이려 하고 있소!"



탈리야는 검을 거두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곧 자신의 철가면을 벗어 제꼈다.


얼굴 반쪽이 심하게 베이고 데인 일그러진 흉칙한 30대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의 얼굴은 흡싸 지옥에서온 악귀같았다.


그 얼굴을 본순간, 륜족과 수많은 이제리아 군대의 기사들은 경멸과 역겨움에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제롬과 군터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슬픔과 충격에 눈가에 안타까움의 눈물 방울이 맺혔다.


'아아.쥬드 아이스너.

나의 어린 시절 우상!'


멋진 기사가 되는 게 꿈이던 6살 어린 왕자의 우상은 이렇게 망가져 다시 제롬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는 제롬의 어린 시절 아름다웠던 추억의 소중한 일부였다.


에드워드4세가 그토록 사랑했던 은발의 미소년은 사라지고,흉칙한 몰골의 30대 중반의 사내가 한명 서 있었다.


"보았는가? 내 옛친구여.

이 얼굴이 이 가짜 극왕의 어미가 한 짓이다.

그들은 16년전 내 두 팔목과 발목의 힘줄을 잘라 소드마스터로서의 재능을 앗아갔고, 나를 브리태니아 귀족들에게 돌려가며 집단으로 욕보였다 .

그것도 부족했는지 나중에는 나를 남창으로 팔아, 나는 무려 3년간이나 전 이제리아 대륙에 돌려져 온갖 능욕을 당해야 했지.

 수년간 내 온몸에는 이제리아 대륙의 수많은 제후들의 좆이 박혔지. 죽고 싶어도 죽지 못했다.

그들은 내가 죽지 못하게 혀안으로 방울이 달린 가죽끈으로 항상 내입을 결박했다.

내 두눈을 뽑지는 않더군.

그들은 수없이 나를 능욕하면 내몸에 박히는 수많은 사내들의 좆과 더러운 씨물로 더러워지는 것을 내눈으로 직접 보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을 즐겼다.

이래도 내가 이 아이를 죽일 이유가 안되겠는가?"


군터는 이에 굴하지 않고 반박했다.


"아이스너경! 그는 당신의 소중했던 연인 에드워드4세의 하나뿐인 친아들이오! 우리 둘다 에드워드4세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한 것을 잊었소? 그는 사생아가 아닌 친아들이요."


쥬드 아이스너의 얼굴이 묘하게 한쪽으로 일그러졌다.


"소문은 듣고 있었어.군터.

네가 에드워드5세의 정부이자 이제는 브리태니아의 군대를 지배한다고.

아무리 애인의 목숨을 구하고 싶어도 거짓말을 해선 안되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에드워드4세의 측근인 너는 잘 알텐데.

국왕의 침대를 차지했던 것은 그 창녀왕비가 아니라 나 쥬드 아이스너였다는 것을.

'그 여자'의 두 아이 모두 에드워드4세의 친아이가 아니야!"



군터가 어느 새 한걸음 더 앞으로 다가왔다.


군터는 단호했다.


" 아니! 쥬드! 

국왕은 항상 왕비의 가임기에만 왕비의 침대에 들렸어.

그가 늘 말했듯 그는 후계자를 열렬히 원하고 있었어.

당신도 알쟎소! 

당신이 아무리 그를 사랑했어도 '그 문제'만큼은 당신이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을."


그 말은 쥬드 아이스너의 아픈 곳을 찔렀다.



탈리야는 거칠게 제롬의 배를 찼다.


퍽 소리를 내며 제롬의 작은 몸은 크게 흔들렸다.


"끄아악!! 아흑..."


제론은 고통으로 몸을 비틀었다.


탈리야는 제롬의 머리채를 쥐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 자! 보아라.

이 아이의 어느 구석이 에드워드4세를 닮았나?

그 창녀가 틀림없이 수많은 남창과 몸을 섞어 낳은 아이다.

아마도 너무나 많은 사내와 교접해서 아비가 누군지도 모르겠지."


제롬은 모후까지 창녀 취급당하자 대노했다.


"야! 이 새끼야! 네가 뭔데 내 모후를 욕보여!

나를 욕하는 것은 상관없지만,내 누이와 모후를 욕보이다니.

내 죽어서도 원귀가 되어 너를 괴롭힐 것이다!"




"우리 아기 괴롭히지 마라!

이 야만족 괴수야!"


줄리앙의 두 눈에서 붉은 불꽃이 솟았다.


군터의 얼굴도 심하게 일그러졌다.


"아이스너경. 어쩌다 이리 되었소?

질투가 그대의 두눈을 가려 진실을 외면하려 하고 있소.

그는 내 연인이기 전에 내 옛주군 에드워드4세의 유일한 적장자요."



탈리야의 한쪽 입가가 씰룩거렸다.


"그래?

 그럼 증명해 보던가!"


"!!!"


탈리야의 검이 눈앞에서 번쩍했다.


제롬과 군터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탈리야의 시미타 검은 제롬의 목이 아닌 두팔목을 묶은 가죽꾼을 갈랐다.


제롬의 결박당한 두 손은 금새 자유로와 졌다.


"그리도 명예롭게 '에드워드5세'로 죽고 싶다면 내 마지막 기회를 주지."


쨍그랑.


탈리야는 부하에게서 롱소드 한자루를 건네 받아 제롬의 눈앞에 던졌다.


"자. 에드워드5세.

네가 정말 에드워드4세의 친아들이고 브리태니아의 국왕이라면 여기 이 자리에서 증명해라.

설마 천하의 영웅 에드워드4세의 아들이 일개 야만족 수장의 검도 꺾을 수 없다면 말이 안되겠지?"




"안돼!!"   "그만 하시오! 쥬드."



줄리앙과 군터가 동시에 외쳤다 


줄리앙이 어느새 코앞까지 한달음에 달려와 소리질렀다.


"이봐.륜족 황제.

우리 아기공주 대신 기사인 내가 싸우마!

그는 연약해서 검을 쥘 힘도 없어!"


"흥.이것은 결투가 아냐! 줄리앙 대공.

주군대신 싸우는 기사는 필요없어.

더구나 너는 브리태니아 기사도 아닌 아라곤 대공이야.

자격도 없지."


과거 브리태니아 기사답게 기사도의 '결투' 원칙을 잘아는,  탈리야가 썩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군터가 정에 호소하듯 간곡히 빌었다.



"쥬드 경. 국왕 폐하께서는 선왕과 달리 무공이라곤 전혀 모르오.

그를 대신해 내가 당신과 겨룰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오."



"암.그러시겠지.

에드워드4세의 친아들이 아니니.

자네들! 들어 보았는가?"



쥬드 아이스너는 브리태니아 군과 자신의 륜 제국군을 쭉 둘러보며 큰 소리로 물었다.


"용은 용새끼를 낳고, 사자는 사자 새끼를 낳는다네.

용이 아기토끼를 낳는 것 본적 있는가?"


쥬드는 제롬의 앞까지 유유히 걸어가 땅바닥에 움켜쥔 제롬의 작은 손을 꾹 눌러 밟았다.


"흐윽..."


제롬은 손등이 아려 신음을 흘렸다.



탈리야가 비웃듯 크게 웃어 제꼈다.


"여기 귀여운 아기 토끼가 한마리 보이네?

스스로가 검의 용의 후예라 주장하는."




탈리야의 말에 룬제국군 진영에서 어머어마한 큰소리의 폭소가 터져 나왔다.


식인을 즐기고 특히 포로의 내장을 산채로 내어 먹는, 소위 용맹한 륜족의 눈에는 작고 하얀 몸의 아름다운 소년은 먹음직한, 한 마리의 사랑스러운 아기토끼였을 뿐이었다 


반면, 브리태니아 진영의 군사들은 얼굴이 시뻘개져서 울분을 참아 내고 있었고, 아라곤을 비롯한 이제리아 동맹군은 서슬시퍼런 줄리앙 대공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옛 주인에 대한 예우를 최대한 보이려던 군터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쥬드 아이스너. 

이런식으로 브리태니아 국왕과 조국을 비웃고 모욕하다니.

이것을 조국 브리태니아와 우리의 옛 주인 에드워드4세에 대한 배신의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소?"



"그만해.군터. 이제 됐어!"


그때 여린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제롬이 어느새 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 있었다.



"이제 그만큼 내곁에서 나를 보호해줬으면 됐어.

군터.하지만 이것은 나의 몫이야.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롱 소드를 꼭 쥔 작은 손과 제롬의 굳게 닫힌 입매를 보고 군터는 이제 제롬이 무엇을 하리라 알아 챘다.



"안됩니다! 폐하.

저자는 강합니다.제가 싸워도 이기리란 보장이 없습니다.

어찌 폐하가 몸소 대결하려 드십니까?

이것은 자살행위입니다."



제롬은 군터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쥬드 아이스너를 바라보며 말했다.


"쥬드경.아니 탈리야 황제.

나와 약속해주시오.

나는 국왕답게 내 스스로 그대와 검을 겨룰 것이오.

내가 이기던 지던 그대의 목적은 처음부터 나였으니, 내 목숨을 취해도 좋아.

대신 이 전쟁을 여기서  끝내고 그대나라로 돌아가겠다고 약속해줘!"


제롬의 청푸른 눈동자가 촉촉해지며 일렁였다.


"그대도 기억하지않는가?

선왕 에드워드4세가 얼마나 내 누이 안느를 사랑했는지.

그가 사랑한 딸이 지금 홀로 저 아젱쿠르성에서 아기를 낳고 있어.

부탁이야.그대가 정말 내 부왕을 사랑했다면, 그의 딸도 보호해줘.

어차피 당신의 증오는 나에게 향한 것이었지, 죄없는 내 누이는 아니쟎아.

내 목숨을 취하되, 아젱쿠르 성은 건드리지 말아줘.

내 마지막 부탁이야."







조아라 노블레스 작가. 회사원입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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