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없이 결혼한 아내의 서재에서 스폰해주는 아이의 앨범을 본 기분을 간단히 서술하자면 말그대로 좆같았다. 시대가 조금 지난 유행어처럼 너가 거기서 왜 나와? 이런 심정이었는데, 이 여자는 놀란 얼굴도 아니고 이미 다 알고 있는 표정이라 사실 더욱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몰랐어? 나 우진오빠 때문에 니랑 결혼한건데."

"호칭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안드냐?"

"안드는데요."

"박우진은 너보다 두살 어리고, 나는 너보다 두살이 많은데."

"그래서 어쩌라고요."


진짜 내가 이래서 김다정이랑 결혼 안하려고 했는데, 워낙 집안에서 저쪽 집 가진 돈을 탐을 내 하니 어쩔 수 없이 한 것 뿐이다. 뭐 애인도 있고, 피차 평생 신경 안쓰고 살기로 한 것도 마음이 잘 맞는 부분도 있어 결혼하자고 하긴 했지만 저 성질머리만큼은 짜증이 났다.


"너 여자 좋아하잖아."

"어, 우진오빠는 그냥 좋아하는 건데? 귀엽잖아."

"오빠 소리좀 하지마, 토나온다."

"싫은데요, 오빠 만나고 오는 길이야?"

"시끄러워."

"야, 피임은 해라. 상속문제 터지면 우리아빠가 니 등에 칼 꽂는다."

"넌 씨발, 말을 해도."


진짜, 저 집구석 존나게 살벌하다. 아무리 형식적이긴 하지만 웅은 왼쪽 눈에 칼선이 길게 나있는  장인즈음 되는 사람을 떠올리며 잘게 몸을 떨었다. 


"근데 가지고 놀다가 아무렇게나 우리 오빠 버리면 넌 나한테 죽는거야"

"야, 나 걔 그냥 만나는거야."

"오메가라? 솔직히 걔보다 예쁜 애 널렸잖아."


그러게. 김다정 말이 틀린거 하나 없는데 왜 이렇게 짜증이 나지. 지가 무슨 상관이야. 내가 내 돈 주고 박우진 만난다는데. 


"어, 알아."

"박우진 스폰 끊을 거면 나한테 미리 말해."

"니가 하게?"

"어. 어쩌다 우리 우진이가 너같은 새끼 눈에 들었나 몰라."

"나가서는 제발 그렇게 말 하지 말아라, 어?"


진짜, 나 쟤 너무 싫어. 애초에 여자도 취향은 아니라 굳이 저 집안이랑 결혼할 거면 김다정 남동생이랑 할 생각이었는데, 알파는 커녕 오메가도 못되는 베타라서 어쩔수 없이 김다정이랑 결혼이란 걸 했지만 알파들끼리 살고 있자니 부딪치는 일이 잦았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박우진을 알고부터는 단 한번도 들어본적 없는 기계음에 웅의 하얀 얼굴이 더욱 창백하게 질렸다.  씨발, 미쳤나. 요즘 잘해주니까 기어오르지. 저도 모르게 손톱을 까득 씹어낸 그가 다시 통화버튼을 눌러보지만 통화음만 울린 후, 앞선 기계음만 반복적으로 들릴 뿐이었다. 결국 손에 들린 휴대폰을 신경질적으로 던져 낸 웅이 사무실 문을 박차고는 차에 올라탄다. 


"야, 김다정!!!"

"어머, 여보. 무슨 일이세요?"


여보? 같잖은 다정한 목소리에 웅이 그제야 몰아쉰 숨을 천천히 내쉬고는 주위를 살펴본다. 놀란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다정의 사무실 직원들의 시선에 그제야 웅은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흝어내었다. 


"...후, 할 말 있어."

"자기도 참, 내가 보고 싶으면 말을 하지. 기다려."


진짜 저거 죽일까. 웅은 잘 칠해진 검은 손톱으로 팔짱을 끼며 저를 데리고 나가는 손길에 치밀어오르는 화를 꾹 눌러보려 애를 쓴다. 


"이야, 우리 우진이가 사랑많이 받나보다, 너한테?"

"박우진 만나서 뭐라고 했냐?"

"만난 건 어떻게 알았어?"

"야, 씨발, 넌 내가-"

"어, 등신같은데. 나 건들지 말랬잖아."


아 진짜 이거 미친년아니야. 아니나다를까 결혼한지 얼마 되었다고 하루가 멀다하게 웅은 그녀와 싸우기 바빴는데 솔직히 하루는 저가 생각해도 좀 정도를 넘었다. 아니, 그래서 미안하다고 바로 사과도 하고 그동안 가지고 싶다 노래를 하던 백도 구해다 주지 않았는가. 심지어 제 애인 거랑 해서 두개나. 사채업자 주제에 제이홀딩스 집안 사람이 아니면 구하지도 못할 걸 구해다 주었더니 돌아오는게 뭐? 박우진한테 예전 애인이 사는 데를 알려줘? 


"너 박우진 그냥 만나는 거라며?"

"야."

"너같은 새끼랑 우진이 있느니, 예전 애인이랑 다시 붙어먹으라고 알려줬는데?"

"걔가 그동안 나한테 받아 처먹어서 누린 생활이 있는데 되겠냐?"

"니가 우진이 버리면 내가 챙겨주려고. 예전 애인 잘생겼더라. 키도 크고."

"진짜, 김다정."



악마야, 뭐야. 웅은 아닌 척 하지만 약간의 콤플렉스기도 한 키까지 들먹이며 저를 건드리는 김다정에 이제는 그냥 한숨만 나올 뿐이다. 


"내가 어떻게 우진이 애인 알게 됐는지, 안궁금해?"

"어."

"너 박우진 뺏길 수도 있어. 아니, 그럴거야."

"뭘 뺏겨, 그냥 내가 걔 가지고 노는 애라고."

"아아, 그래요? 그러면 우진이 그렇게 그리워하는 예전에 만난 그 형이랑 행복하게 살면 되겠다. 우리 우진이 앞길은 내가 지켜주고."

"...너 진짜 나한테 왜 그러냐?"


이래서 깡패냄새나는 집안이랑 엮여서는 안되었다. 이놈의 집구석은 그깟 돈 때문에 저를 팔아먹었는데, 따지고 보면 재벌가 자제들 중 결혼을 사업수단으로 생각하지 않는 이가 하나 없었는데도 자꾸 억울하게만 느껴지는 거다. 


결국 김다정이 탐내하던 차까지 계약해주고 나서 웅은 박우진, 이 여우같은 새끼가 갔을 거라는 주소를 받아냈는지 보자마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는 거다. 인어군이라면 대한민국 좁아터진 땅덩어리 중에서도 저어기 끄트머리에 있는 곳 아닌가. 지명이 특이해 들어본 적 있는 동네긴 했지만 이런식으로 저가 그 곳에 가게 될 줄은 몰랐다. 도착지점까지 남은 시간 4시간 30분. 미쳐버리겠네, 씨발.

서울에서 나고 자란, 전국 여러곳 보다는 해외를 더 많이 다닌 전웅에게는 인어군이라는 곳이 정말이지 인어같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동네긴 했다. 요철이라고는 하나 없이 잘 닦여진 강남 대로변만 다니다가 구불구불, 비싼 외제차의 승차감을 다 무시하고 개나 줘버린 이 악마의 도로는 뭔데. 이딴 곳까지 저가 박우진을 찾으러 온 것 자체도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박우진이 여기서 나고 자랐다는 것이 조금 신기하긴 했다. 사투리도 거의 안쓰는데다 좀처럼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까. 아닌가. 박우진이 어디서 타고 자랐는지, 그 죽고 못산다는 애인은 어떤 사람인지 김다정이 알고 있는 걸 보면 마냥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어떻게 알았냐는 제 물음에 박우진한테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다 알 수 있는 거라고 했으니까. 그냥 단순히 저가 박우진에게 단 한번도 묻지 않았던 거다. 박우진, 너가 어떤 사람인지. 

그렇지만 정말 굳이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었다. 삶이 무료할 즈음에 전웅은 그냥 적당히 막 굴려도 좋을 것 같은 오메가인 박우진을 만났을 뿐이고, 저가 이끄는대로 잘 따라오면서 정상의 자리까지 잘 와준 박우진이 저와 잘 맞을 뿐이기에 지금껏 그를 놓지 않은 거다. 이런저런 요구 사항도 없었고 제가 해준 집이며 차를 받고나서도 바꿔달라는 말 하나없이 잘 지내고 있다. 도리어 시간이 지나 바꿔주면 돈 아깝게 뭐하러 벌써 바꾸냐는 말만 했을 뿐이다. 하긴, 이런 구질구질한 촌구석에 살았으니, 그런 생활이 적응되지 않을 법도 했다. 


전웅이 네비에 찍힌 곳에 도착한 시간은 밤 열시가 다 되어갈 즈음이었는데 어둑한 바다 근처 식당 앞에 서 있자니 어쩐지 저가 뭐하나 싶은 기분이 드는거다. 불은 다 꺼져있고 저어 멀리 등대만 보이는데, 박우진에게서는 여전히 전화 한통이 없다. 진짜 박우진이 여기 온건 맞아? 김다정은 이 주소를 알려주긴만 했지, 그가 이곳에 왔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당연히 박우진이 그 주소를 받고 이곳으로 올 거라 생각했는데, 다시 차분히 생각해보니 안 왔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고개를 드는거다. 

이런 허름한 식당을 하는 애인이라니, 아무리 키가 크고 잘생겼다한들 이미 저가 주는 편안함에 길들여진 박우진이 돌아갈 수 있을까? 과연. 

근처 나름 봐줄만한 호텔로 핸들을 돌린 웅의 표정은 여전히 착잡하다. 박우진이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걸 떠나 눈이 돌아 여기까지 온 스스로에게 참 던지고 싶은 질문들이 많았다. 도대체 여기는 왜 온건데? 박우진을 찾아서 뭐하게? 가지 말아달라고? 내가 왜? 아쉬운 건 박우진 쪽이다. 아무리 김다정이 그를 밀어준다고 해도 저만큼이나 잘 해줄 수 없을 텐데. 왜 저가 이렇게 몸이 달아 이런 식으로 나오는지 상식적으로 이해를 하기 어려웠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뜨거운 물에 샤워를 마치고 대충 가운을 걸쳐입은 웅이 침대에 그대로 누워 깨끗한 천장을 바라본다. 미치겠네. 


"그래, 잘 맞춰왔는데 도망가면 내가 새로 하나 또 상대를 구해야하고, 그럼 귀찮잖아."


오늘 종일 고민해서 나온 결론이 저 따위라니. 한숨이 밀려나왔으나 저 결론 말고는 딱히 인정하고 싶은 생각이 그 무엇도 없었다. 그러니까 박우진은 그냥 저가 잘 길들여놓은 애완견 같은거다. 귀엽고 저를 잘 따르던 녀석이 갑자기 줄을 끊고 도망가 다른 사람에게 살랑댄다고 생각한다면 그 누구라고 기분 나쁠거다. 그래, 박우진에게 별 다른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지. 그냥, 다시 새로운 상대를 구하기가 귀찮은거다. 


"근데 이 새끼는 진짜 연락 한번을 안하네." 


건방져가지고. 처음에 제 앞에 왔을 때는 덜덜 떨고 한마디도 못하더니 이제는 걸핏하면 제 손가락에 걸린 결혼 반지를 빼려드는거다. 아니, 근데 왜 그러지? 그 때마다 결혼반지를 빼지 않는 건 그냥 박우진이 까부니까 오기로 그러지 않은 것 뿐인데 다시 떠올려보니 박우진은 왜 자꾸 결혼반지를 빼고 싶어하는지 궁금한거다. 


"나 좋아하는 거 아니야?"


근데, 그럴리가. 저가 얼마나 개좆같이 굴었는데. 저가 생각해도 참 싸가지라고는 없어서 애한테 상처주는 말도 하고 멋대로 군 경우가 많은데 좋아한다는 게 조금 말이 안된다. 

2년동안 박우진을 만나면서 그에 대해 이렇게까지 깊게 생각한적이 있었나. 웅은 조금 취기가 오른 얼굴을 하고는 다시 휴대폰을 들어 박우진의 이름을 눌러본다. 이 새끼, 지금도 안받으면 스폰 다 끊어버려야지. 


여보세요? 조심스럽게 잔뜩 겁을 먹은 목소리에   웅의 몸을 감싸던 술기운이 싹 달아난다. 입안에 침이 고이며 저도 모르게 목울대를 일렁인다.  어디야, 제 물음에 수화기 너머의 박우진은 아무런 말이 없다. 이 새끼 또 어디서 술처먹고 아무데나 드러누워있는거 아니냐고. 


"어디냐고."

- 왜 오늘 나한테 전화 많이 했어요?

"전화 왜 안받는데?"

- 제가 보고 싶었어요? 


취기가 오른듯한 어눌한 발음에 웅은 입술을 꾹 다물며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킨다. 도대체 무어라 해야할까. 나는 너를 보고 싶었을까, 그냥 목줄을 쥐고 싶었던 걸까. 머리가 혼란해진다. 빈웃음이 실없이 새어나왔다.  





참른

나잇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