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꽃봉오리가 맺혔다.

2년 전처럼 샛노란 꽃잎을 품은 봉오리는 5월의 푸른 담쟁이덩굴 담벼락을 배경삼아 저 홀로 빛날 준비에 한창이다.

"수업은 아까 끝난 거 아냐? 왜 이제 나왔어?"

나는 꽃봉오리를 들여다보느라 굽혔던 허리를 급히 세웠다.

너는 그랬다.

입학 당시부터 눈에 띄던 녀석이었다. 모두가 너를 사랑했고 너도 모두를 사랑했다.  

복학한 뒤에도 너는 여전히 사람들과 북적대었고, 나는 여전히 혼자였다.

"넌 왜 맨날 혼자 다니냐?"

저 멀리서 너를 부르는 동기 녀석들이 보인다.

나는 아무 말도 듣지 못한 것처럼 그 자리를 떠난다.

 

다음 날, 1교시부터 전공 수업이다.

일찌감치 강의실에 도착해 창가 맨 뒷자리에 앉았다. 아직 강의실은 한산하다.

유리창을 투과한 햇빛이 반들거리는 책상면에 반사되어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다. 

어릴 땐 눈이 멀어버리는 게 아닐까 두려워 하면서도 해를 바라보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곧 저절로 눈이 감겨버리기 때문에 태양을 똑바로 응시했을 때 밀려오는 나른한 쾌감은 오래가지 못한다. 

햇살에 굴복하여 결국 눈을 내리깔 수밖에 없는 미약한 내 존재가, 그럼에도 좋았다.

창문을 약간 열자 아침부터 벤치에 앉아 재잘대는 새내기들의 말소리가 바람결에 섞여 들어온다.

턱을 괴고 간지러운 바람을 뺨으로 맞고 있으려니 그렇지 않아도 햇빛 때문에 반쯤 감은 눈이 스르르 감긴다. 강의실이 사람들의 목소리로 점점 채워질 때쯤.

그때 네가 툭 던진 말.

"자냐?"

너의 얼굴이 햇빛 속에 있어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다.

내 앞자리에 앉아서 몸을 돌려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는 너는, 나처럼 턱을 괴었다.

네 앞머리가 부드럽게 흩날리고 네 얼굴이 너무 가까워, 나는 허리를 뒤로 빼어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기댔다.

너는 여전히 턱을 괸 채로 나를 바라본다.

멍하니 너를 바라보다 벌어진 입술을 퍼뜩 앙다물었다. 가방을 들고 벌떡 일어섰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마도 너를 피해 다른 자리로 가려 했을 것이다.

너는 내 가방끈을 움켜잡는다.

"이제 곧 수업 시작인데 어딜 가?"

때마침 교수님이 들어오시는 것을 보고 나는 도로 앉는다. 너는 다시 나를 돌아보며 작게 말한다.

"오늘도 도망가면 쫓아간다."


수업에 열중하다가도 내 앞에 앉은 너의 등이 신경 쓰인다. 필기하느라 움찔거리는 네 팔뚝에 자꾸만 시선이 흐트러진다.  

네가 고개를 휙 돌려 나를 보더니 씩 웃는다.

'잘 있군.'

소리 없이 입술로만 벙긋거리곤 다시 앞을 바라본다. 

잠시 당황했던 내 눈동자는 이내 안정을 찾고 너를 응시한다.

 

네가 할 얘기란 건 역시나 학과 행사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 진행 중인 단과대 체육대회의 농구 예선전이 다음주 금요일에 있다면서 혹시 관심 있냐는 네 말에, 나는 지금까지 매번 그랬던 것처럼 생각 없다고 했고 너는 그럴 줄 알았다고 하면서 다시 말한다.

"그럼 나 경기 뛰는 거라도 보러 올래?"

너의 그 말이 내 가슴을 턱 하고 떼밀어 나도 모르게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내가 너의 제안을 받아들여 주었다며 너는 기뻐한다.

 

시합이 있던 날, 전공 수업은 휴강이었다.

경기 출전 멤버들은 일찍이 농구대가 있는 소운동장으로 가 있었고, 남아있던 동기와 후배들은 응원하러 갈 준비를 하고 있다.

나는 교정의 벤치에 앉아 그들이 모두 운동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일어나 그쪽을 향해 느릿느릿 걸어갔다.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것이 내키지 않아 가지 말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보고 싶었다. 네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떻게 소리치는지.

소운동장까지는 걸어서 금방이었지만 나는 최대한 길을 돌아 천천히 가려 애썼다. 포장되지 않은 길가의 우거진 풀을 꾹꾹 눌러밟으며 운동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시합은 시작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경기와 응원에 집중하느라 내가 뒤쪽에 서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다.

동기들이 자리잡은 응원석 뒤쪽의 스탠드 가장 높은 곳에 서서 나의 눈은 단번에 너를 찾았다.

너는 갓 잡아올린 물고기처럼 팔딱인다. 너의 땀방울은 그 고기의 비늘처럼 알알이 번뜩인다.

젖은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반듯한 이마는 강물에 닳아 보드라워진 조약돌마냥 하얗게 빛나고, 가쁜 숨을 내쉬느라 벌린 입술은 산소를 갈구한다. 왜인지 나도 물 밖의 고기가 된 듯 덩달아 숨이 벅차다.

 

너는 사람벽을 뚫고 슛을 성공시킨다.

응원석이 일제히 일어나 소리를 지른다.

너는 이쪽을 바라본다. 누군가를 찾는 듯 잠깐 헤매던 눈동자는 나를 바라보고 웃는다. 손을 번쩍 들어 휘휘 젓는다. 응원석의 소리가 더욱 높아진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건 분명 나를 향한 미소다.

하지만 나는 차마 내 팔을 들지 못한다. 

왜 네 손짓 하나에, 웃는 눈빛 한 번에, 이렇게, 나는. 

시합은 순조롭게 이길 것 같았고, 나는 사람들과 섞이기 전에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주말 내내 앓았다. 혼란스러웠고 가슴이 아팠다. 아픈데 생각나는 건 너라서 더 혼란스러웠다.

월요일이 오는 것이 두려워 작은 방 속에서 외로이 웅크려 잠만 잤다.


월요일, 너를 볼 자신이 없어 전공 수업에 모두 빠졌다. 

늦은 오후, 네가 없는 교양 수업 하나가 있다.

학과 사무실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배회하다 수업 직전 강의실로 뛰어들었다.

해가 들지 않는 건물 구석 1층의 강의실은 서늘하고 어스름하다. 너는 없지만 그날 햇빛 속의 네 얼굴을 보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다. 네가 보고 싶었다.


수업이 시작되고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교수님의 목소리가 끊겼고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작게 터져나왔다.

강의실 밖 복도에서 노래 혹은 주문과도 같이 리듬감을 가진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안 나오면, 꽃봉오리, 먹어버린다."

네 목소리다.

가슴 속에서 간지러운 웃음이 피어난다.

며칠간 나를 괴롭히던 거센 혼란은 너의 목소리만 들어도 가라앉는다. 이건 너를 봐야만 나아질 증상인가 보다.


너는 내가 안 보여 걱정이 됐다고 했다. 안 그러던 애가 왜 그러느냐며 툭 친다. 연락처도 몰라 연락을 할 수 없었다며 번호를 묻는다. 나에게 직접 듣고 싶었다는 말에 나는 멈칫한다. 휴대폰에 내 번호를 저장하고는 너는 일어섰다. 농구 연습 마친 후배들과 술 약속이 있다고, 나에겐 이제 강의실로 돌아가 보라고 한다. 나는 무척이나 다급했나 보다. 

"나랑 마실래?"

툭 내뱉은 입술이 바짝 말라버렸다.

너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다 웃는다. 

"그러자." 

 

너는 내가 학과에서 겉도는 게 안쓰러워 보인다고 했다. 과대의 입장에서 나를 무리에 합류시켜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 

나는 무리에 소속되는 건 관심 없었다. 내 수업이나 생활을 스스로 겪어낼 수 있으면 그걸로 그만이었다. 남들처럼 함께 밥을 먹고 시간표를 짜고 술을 마시고,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굳이 네가 나를 무리에 섞으려는 것도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난 잠자코 너의 말에 끄덕였다. 그런 이유로 네가 나를 한 번 더 생각해 줄 수 있다면 그걸로 좋았다.


이후 너의 배려로 제법 사람들 사이에서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어울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나 아닌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즐겁게 떠드는 너를 보면, 함께 있어도 외딴 섬처럼 한없이 작아졌다. 이상한 것은 너 역시 섬처럼 나에게 한없이 따뜻했다가 또 한없이 차가웠다. 나는 너의 그런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고 아팠다. 그래도 네 곁에 있고 싶어서 파도에 씻어내듯 그 생채기를 매일 쓸어보냈다.


제법 후덥지근한 초여름에도 서늘하던 그 1층 강의실에서의 교양과목 시험이 내 1학기 마지막 수업이었다. 너는 이미 종강해서 수업이 없음에도 학교에 와서 내가 나오길 기다렸다. 네가 들고 있는 봉지 안엔 소주 두 병과 종이컵, 사이다 캔 두 개. 우리는 고요한 교정 벤치에 앉아 종강 축하주를 마셨다.

술을 마시면서도 우리는 말이 없었다. 

한 병이 바닥나자 너는 새 병을 따 혼자 연거푸 세 잔을 들이키고는 말했다. 

"니가 신경 쓰인다. 자꾸."

심장이 땅으로 내려앉았다.

"신경이 쓰이는데 이게 뭔지 잘 모르겠다."

"……."

"너무 신경이 쓰여서…… 마음속에서 내치려고 했는데도 자꾸 니가 내 속에 있어."

사고가 정지하여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입은 제멋대로 움직인다.

"나도."

그 후에도 우리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술이 다 떨어져 갈 때쯤 너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오늘 집에 가기 싫다."

그날 너는, 나 이외에는 누구도 들어온 적 없었던 내 작은 방으로 들어왔다.




내 집에 가겠냐는 물음에 네가 고개를 끄덕인 뒤로, 내 작은 방까지 걸어오는 동안 우리는 또다시 아무런 말도 없다. 네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현관 비밀번호를 눌러야 하는데 손이 떨렸다. 갑자기 번호가 기억나지 않는다. 네가 내 떨리는 손을 잡아주어 겨우 번호를 되새겨 천천히 누른다.


안주도 없이 마신 술기운이 올라 몸은 뜨거운데 등줄기에는 소름이 돋는다. 네 얼굴을 바라보니 너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상기된 두 뺨, 젖은 채 흔들리는 눈.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와락 끌어안고 서로의 목덜미에 뜨거운 숨을 내뱉는다. 네 머리카락이 내 귓가를 간지럽힌다. 알코올과 탄산수에 힘입은 네 숨결이 달콤한 취기를 내뿜고 나는 그 숨을 마음껏 빨아들인다. 

잔뜩 열뜬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우리는 뜨거웠지만 수줍었고 또 그만큼 서툴렀다. 벗지도 않은 옷 위로 껴안은 서로의 손길이나 입술, 또는 다른 무언가가 스치기만 해도 거침없이 신음이 터져나왔다. 어느새 내 아래에 누운 네 몸에 나도 모르게 하체를 강하게 밀착시켰다. 너는 젖은 소리를 삼키며 두 다리로 나를 속박한다. 우리는 욕망의 실체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을 허물 생각도 못하고 얽힌 채 괴로움에 몸부림치다 그대로 사정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2013년 12월 17일에 쓰고 2018년 8월 14일에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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