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피톨이 죽음의 제비를 뽑는 날이 올해도 다가왔다. 게일은 그의 엄마 헤이즐이 동생들을 챙기는 동안, 달갑지 않은 표정을 하고 가장 좋은 옷을 차려 입었다. 마음 같아서는 땀에 전 꼬질꼬질한 옷을 입고 서 있고 싶었지만(어차피 내리쬐는 태양에 똑같은 꼴이 될 것이다), 그의 엄마는 절대로 그런 짓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었다. 헤이즐은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아이들을 키울 능력이 없다고 비춰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사람들이 그렇게 판단하는 즉시, 헤이즐의 아이들은 보육원으로 끌려갈 테니까. 게일은 그게 이제 빛바랜 걱정이라고 느꼈다. 내년이면 나는 성인이 되는데?



 그들은 1시에 집을 나섰다. 헤이즐은 갓난아기 포시를 등에 업고 있었다. 죽기 일보 직전인 사람이 아니면 반드시 추첨에 참석해야 하니, 포시가 뜨거운 햇볕 때문에 징징거려도 별수가 없었다. 게일이 호손 가족을 대표해 서명을 했다. 아직 그의 동생들은 너무 어렸고, 헤이즐은 포시를 달래느라 두 손이 묶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눈물범벅인 포시의 통통한 뺨을 한번 쓸어주고 로프 안으로 들어갔다. 캐피톨이 그들의 가축 중에서 제물 두 마리를 선별할 곳이었다.



 게일은 또래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했다. 게일의 모습을 보고 여자아이들 세네 명이 눈을 크게 치켜 뜨고는, 그와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려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래 봤자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사이를 분리하고 있는 로프에 막혀 조금도 가까이 오지 못했지만.



 사람들이 다 도착하자, 평화유지군이 로프를 닫고 무대 앞으로 이동했다. 게일은 그를 조용히 지켜보다가 또래 여자아이들과 같이 서 있는 금발의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그녀, 다프네 로젠데일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멍하니 쪽지가 들어있는 추첨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뒤에서 벌어지는 뒷담화에는 신경 쓰지 않은 채 말이다. 에리카 그린빌과 어울리지 않는 노란 드레스를 입은 여자아이가 다프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게일은 다프네의 이런 성격이 좋았다. 남들의 악평에 초연하게 대응하는 성격. 그러나 이건 어릴 때부터 비슷한 상황을 많이 겪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를테면 고작 몇 년 전에 벌어진 일 말이다. 다프네 로젠데일의 부모는 12번 구역 안에서 나쁜 의미로 주목을 받았다. 소문에 따르면, 그들은 캐피톨의 첩자였다. 탄광 사고는 그들 부부의 합작품이었고, 목적을 달성한 율리아 로젠데일은 사라졌다고 사람들은 떠들었다. 치가 떨리게 싫은 탄광 견학에서, 아이들은 마찬가지로 견학에 집중하지 않고 율리아 로젠데일이 어디 사람인지에 대해 떠들었다.


 “부모가 누군지 모른다며? 그럼 우리 구역 사람이 아닐 수도 있잖아.”


 이윽고 아이들은 그녀와 롤프가 캐피톨로 돌아갔을 거라고 떠들어 댔다. 게일이 롤프 로젠데일은 탄광 사고에서 죽었지 않았냐고 지적하자, 한 무더기의 반발이 쏟아졌다. 그중에서 가장 크게 소리친 사람은 두꺼운 안경을 낀 밥이었다.


 “시체가 산산조각이 났는데 그걸 어떻게 구분해? DNA 검사는 개뿔이야! 만약에 그게 정확하다고 해도 손가락 하나만 남기고 가면 끝이잖아, 안 그래?”


 아이들은 밥의 터무니없는 가설에 빠르게 동조했다. 마치 밥이 엄청난 진실을 밝힌 것처럼. 캐피톨은 그런 식으로 DNA 검사를 이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죽음을 위해 그것을 썼지, 죽은 자의 명예를 위해서 쓰지는 않았다. 시끄러운 목소리들이 탄광 깊숙한 곳을 울렸다.


 “다프네 로젠데일도...”


 게일은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지나가는 여자아이 무리가 그 금발 여자아이를 거칠게 밀치고 가는 광경이 떠올랐다. 다프네는 크게 휘청거리다가 뒤에 선 여자아이의 신발을 밟고 말았다. 바로 사과를 했지만, 다프네의 옷과 신발은 엉망진창이 되었던 기억이 났다.



 담임선생님인 데이비스에게 숨이 막힌다고 하고 탄광 출구로 향했다. 게일의 아버지가 탄광에서 죽었다는 것을 아는 담임은 그를 막지 않았다. 정오의 밝은 햇볕이 음울한 탄광을 비췄다. 게일은 석탄 찌꺼기 더미에 앉아, 어쩌다가 자기가 이런 곳에서 태어났을까 고민했다. 그의 가족을 생각하면 그런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 게 좋았지만, 게일은 가끔씩 자신이 가축이 된 기분이 들었다.



 작업장 저편에서 석탄 찌꺼기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게일은 눈을 감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서, 소리가 어디서 들리는지 생각했다. 게일은 소리로 사냥감이 어디 있는지, 어떤 상태인지를 얼마든지 알 수 있었다. 게일은 그 정보를 바탕으로 사냥감이 덫에 걸리도록 충분히 유도할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래서 게일이 타고난 사냥꾼이라고 칭찬했다. 이제는 아버지 없이 사냥을 혼자 해야 했지만 그의 가족의 영양 상태를 고려했을 때, 게일은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무너지는 소리가 잦아들고, 누군가가 숨을 헐떡이며 무너뜨린 것을 바로 세웠다. 그 누군가는 자기 입을 막았고, 1분도 지나지 않은 때 고함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탄광의 문이라고는 문을 전부 열어보면서 뭐라 뭐라 소리치고 있었다.



 무리 중의 한 명이 게일에게로 다가왔다. 탄광 동쪽 편에 사는 에리카 그린빌이었다.


 “야, 호손. 너 다프네 로젠데일 봤냐? 분명 여기 숨었을 텐데.”


 “몰라.”


 게일은 가까운 곳에 숨은 누군가가 다프네 로젠데일인지는 몰랐지만,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발뺌했다. 그 누군가가 로젠데일이든 아니든, 저 패거리에게 걸리면 좋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었다. 에리카는 눈을 가늘게 뜨고 게일을 노려보았지만, 예전부터 게일에게 마음이 있던 터라 함부로 굴지 못했다.


 “그래, 그럼 로젠데일이 어디 있는지 알면 말하고....”


 커다란 남자가 그의 머리를 때리는 바람에 에리카는 말을 잇지 못했다. 9학년 담임, 리스번이었다.


 “잠깐 대기하고 있으라고 했더니 여기서 얼쩡거리고 있네? 답 없는 새끼들. 빨리 들어가!”


 리스번은 이미 그린빌의 패거리들을 다 붙잡은 채였다. 그린빌을 뺀 패거리들은 전부 리스번의 폭력에 눈물을 글썽였다. 에리카는 투덜거리며 리스번의 뒤에 섰다.


 “너는 왜 여기 나와 있냐?”


 리스번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게일은 그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어지러워서 잠깐 나왔어요. 데이비스 선생님이 그래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리스번이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빠져나가려는 그린빌 패거리들을 보고 거칠게 돌아섰다. 아이들은 전부 달아나려는 자세로 뻣뻣이 굳었다. 리스번이 게일에게 고개를 까딱이고 아이들을 탄광 밑으로 데려갔다. 그들이 막 떠나자, 누군가가 다시 석탄 찌꺼기를 무너뜨렸다. 그 누군가는 막혔던 숨을 터뜨렸다. 게일은 느긋하게 소리가 들린 석탄 찌꺼기 더미로 향했다. 그린빌이 말했던 대로 다프네 로젠데일이 가까운 곳에 숨어 있었다.


 “대프.”


 석탄가루에 잔뜩 더러워진 다프네는 그를 보고 화들짝 놀라 석탄 찌꺼기 더미에 주저앉았다. 석탄 찌꺼기가 완전히 바닥에 넓게 퍼졌다. 다시 쌓으려면 반나절은 걸릴 것이었다. 다프네가 망연자실했다.


 “쟤들 눈을 피해서 아직도 숨고 있어?”


 게일이 말했다. 다프네는 그를 보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같이 사냥을 다니는 사이였다.


 “그냥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린빌을 쓰러뜨려. 걔가 주동자잖아. 소문을 퍼뜨리고 다른 애들이 너를 때리게 만들고...”


 “글쎄, 그린빌이 내 주먹을 얌전히 맞고 있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너도 걔 남자친구가 어떤지 알잖아. 그린빌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나에게 주먹을 휘두를걸.”


 에리카 그린빌과 던컨 선덜랜드는 그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12번 구역에서 유명했다. 선생님들에게는 어느 학년에나 있는 문제아들이었지만, 아이들에게는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다프네는 그들을 딱히 상관하지 않고 조용히 다니는 축이었으나, 그린빌에게 어느 순간 찍혀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좋아, 선덜랜드는 내가 맡을게. 그러면 네가 그린빌을 쓰러뜨릴 수 있겠지.”


 “안 돼.”


 다프네는 갑자기 석탄 찌꺼기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그것들을 다시 쌓기 시작했다.


 “그러면 피어니의 약초상이 엉망이 되고 말 거야. 경계에서 다시는 장사를 못하게 해주겠다고 그랬어.”


 다프네는 석탄 찌꺼기 하나를 거칠게 쌓았다. 그나마 발목 높이였던 더미가 다시 무너졌다.


 “미치겠네.”


 다프네가 이를 악물었다. 게일은 석탄 덩어리 하나를 집어들었다.


 “너도 나를 도울 필요 없어, 게일. 그냥... 내버려 둬.”


 “내가 다칠까 봐 이러는 거야?”


 진짜로? 게일은 한쪽 눈썹을 올렸다. 그는 그린빌이 절대 건드리지 않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린빌이 그를 좋아한다는 불편한 사실은 빼고서라도, 게일은 선덜랜드를 주먹으로 이긴 적이 있었다.


 “그들이 로리를 노리면....”


 게일의 동생 로리는 작년에 입학했다.


 “그러는 순간 나를 건드리게 되지. 그건 내가 알아서 할 문제야.”


 “넌 그들이 너를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잖아.”


 “뭐라고 부르는데?”


 게일은 계속해서 물었지만 다프네는 대답하지 않았다. 석탄 찌꺼기를 그나마 정리한 후, 다프네는 게일을 무시한 채 탄광 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그는 다프네가 괴롭힘을 애써 견디는 이유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학교 선생님들은 확실히 도움이 안 되는 건 맞았고, 피어니는 남편의 죽음이 준 충격에서 회복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나선다면 다프네는 적어도 맞지 않을 수 있었다. 투명 인간처럼 지내게 되겠지만. 그건 다프네가 지내던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뜻했다.



 경계의 이방인. 캐피톨 사람의 자식. 12번 구역에서 다프네의 위치는 그랬다. 상인들처럼 금발을 갖고 있었지만, 그 혈통은 상인 구역에서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백안시당했다. 더구나 롤프 로젠데일이 쌓은, 헤이미치를 넘어서는 망나니로서의 평판은 사람들이 다프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였다. 다프네가 매년 달리기 대회에 학년 대표로 나가거나, 사냥감을 호브에 가져가 파는 것을 보면서도 그랬다.



 게일은 다프네가 이쯤이면 12번 구역의 일원으로서 할 일을 충분히 다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프네는 12번 구역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캐피톨에서 온 건 맞지만 그때부터 죽 12번 구역에서 살다가 죽었다. 다프네는 12번 구역에서 나고 자라 이곳의 관습과 언어를 익혔다. 혈통의 근원지를 따져야 한다고? 그렇게 치면 우리는 모두 어딘가에서 흘러온 사람들인데.



 좀 더 큰일을 해야 하나? 언젠가 다프네가 물었다. 헝거 게임에 나가 우승하는 것과 같은 일 말이야.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다프네가 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무슨 일을 하든, 여전히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에리카 그린빌은 그녀가 우승자가 되어도 여전히 헛소문을 퍼뜨리겠지.



 게일은 다프네가 이런 마을에서 애써 버틸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네가 이곳 따윈 버리고 네 자유를 찾아 울타리 밖으로 나갔으면 좋겠어. 그러나 게일이 이곳을 떠나라고 할 때마다, 다프네가 그를 응시하는 눈빛은 뚜렷했다. 그 눈빛은 ‘난 여기서 버틸 이유가 있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러면 나는 네가 버틸 이유를 지킬게. 그게 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교장이 아이들을 한꺼번에 세워놓고 탄광의 중요성에 대해 이런저런 연설을 한다. 나는 맨 뒤에서 그들이 눈치챌 수 없게 슬금슬금 움직인다. 에리카 그린빌은 연설 따위는 귓등으로 흘리면서 선덜랜드와 함께 손장난을 하고 있다. 그 애가 나를 눈치채기 전에 집으로 달아나야 했다. 그녀에게 들켰다가는... 글쎄, 그건 상상하고 싶지 않다.



 나는 교장의 해산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탄광으로 다시 들어가 광부들의 캐비닛 안으로 몸을 숨겼다. 작업복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와 석탄 가루가 내 코를 온통 채웠다. 그린빌은 요즘 내가 그런 냄새를 풍긴다며 좀 씻고 다니라고 말하곤 한다. 그 애와 나의 관계는 탄광 사고 이전까지는 이렇게 나쁘지 않았다. 그린빌이 나를 무시하고 나는 그린빌을 무시했다는 거다. 롤프의 행동을 조롱하거나 엄마의 겁먹은 목소리를 따라하며 나를 쳐다보곤 했지만, 나는 그들이 원하는 반응을 던져주지 않았다. 그러면 그녀는 다른 주제로 옮겨갔다.



 상황이 나빠진 건 탄광 사고 후부터였다.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내 가족에 대한 소문은 12번 구역 전체에 퍼졌고, 그린빌은 그 소문을 재밌어하며 거기에 ‘흥미로운 양념’을 쳐대곤 했다. 누가 나에게 호의적이면 사냥감을 뇌물로 바쳐서 그렇다는 둥, 내가 은밀한 거래를 제안해서 그렇다는 둥 그런 소문들을. 엄마의 실종도 그린빌은 도주로 탈바꿈시켰다.



 내가 캣니스와 게일과 함께 사냥을 한다는 것과 게일이 나와 스스럼없이 지낸다는 게 알려지자, 그린빌은 기회를 잡고 마음껏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게일을 짝사랑하는 여자아이들과 괴롭힐 거리를 찾고 있던 남자아이들은 나를 표적으로 삼았다.



 그들은 의외로 캣니스를 건드리지 않았는데, 그건 그녀의 아버지가 워낙 좋은 분이셨고, 캣니스는 활 솜씨가 뛰어나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캣니스는 겉보기에 멀리서 지켜보며 그들을 망설임 없이 쏠 수 있었다. 피어니의 약재상에서 도움을 받은 아이들이 많다는 점도 그들이 주저하는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나를 표적으로 삼을 이유는 내가 수상한 위치에 있고, 잘 다루는 무기가 없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번 칼을 들고 와서 휘둘러 볼까 생각했지만 소중한 무기를 빼앗기는 것은 물론 평화유지군이 ‘불법 사냥’, ‘무기 밀거래’ 등등의 죄목 아래 나를 체포할 것 같아서 그만뒀다.



 그린빌의 패거리들을 고발할 생각도 해봤다. 그러나 학교 선생님들은 자기 보신과 실적(더 많은 새끼 광부들을 키우는 게 그들의 임무였다)에만 관심이 있었고, 평화유지군들은 누가 죽어 나가지 않으면 개입하지 않았다. 사령관인 크레이는 귀찮은 일보다 여자들에게 더 관심이 많았다. 뭐, 그린빌이 그의 문간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몇 번 봤으니 크레이가 누구 편인지는 자명했다.



 내가 두 번째로 생각한 방법은 게일의 말처럼 그린빌을 때려눕히는 것이었다. 칼을 쓰면 크레이가 개입하니 주먹으로만 상대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격투기에는 그렇게 재능이 없었다. 그린빌의 턱을 쳐 쓰러뜨리기는 했지만, 그녀가 울부짖는 즉시 선덜랜드가 개입했고... 3살 더 많은 남자아이와의 싸움은 당연하게도 선덜랜드의 승리로 끝났다. 그 후로 내 위치가 곤두박질친 건 당연했다.



 여자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내가 숨어 있는 건물 옆을 지나간다. 탄광 저 너머에 집이 있는 아이들일 것이다. 원래는 경계로 넘어가 반 바퀴를 빙 돌아야 하겠지만 탄광 사람들은 아이들이 탄광 지역을 가로질러 가는 걸 상관하지 않는다. 어차피 아이들도 상인이나 물려받을 사업이 없는 이상 탄광에서 일해야 할 테니까.



 그들이 지나가자, 나는 캐비닛 문을 열어 밖을 살핀다. 뭔가 이상하다. 내가 들어온 후 닫은 문이 열려 있다. 나는 캐비닛 문을 서둘러 닫으려고 하지만 누군가 캐비닛 문을 잡는다.


 “나야, 대프.”


 게일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저번에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는 선덜랜드에게 발각되었는데, 그때의 “쥐새끼가 여기 있네?”와 입에서 풍기던 술 냄새는 잊을 수가 없다.


 “아직도 숨어 있어?”


 “다른 애들이 집에 다 가면 갈 거야. 그린빌이 나를 찾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있을걸.”


 “그러다가는 다 어두워져서 집에 가겠네.”


 게일이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본다.


 “이러지 말고, 그 애들에게 겁을 주자.”


 “그렇게 하면 신고당할 것 같은데.”


 내가 비관적으로 말하자, 게일이 툴툴거리며 말한다.


 “12번 구역 안에서는 그렇겠지. 그 애들이 신고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덫에 빠지게 하자고.”


 “어떻게?”


 “들어 봐.”


 게일의 계획은 간단하다. 일단 울타리를 넘게 한다. 그러면 자기가 숲에 갔다는 사실 때문에 누군가에게 말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린빌 패거리를 숲으로 유도한 후 덫에 걸리게 한 다음, 내가 그들을 구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좋겠지만 너무... 희망찬 계획 아닌가? 내가 구해준다고 해서 그 애들이 나에게 고마움을 느낄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고마움? 그건 느끼지도 못할걸.”


 내 생각을 말하자, 게일이 당연하다는 듯 말한다. 그는 사람의 발이 줄을 밟으면 그 줄에 발목이 걸려 거꾸로 매달리는 덫 여러 개를 준비하고 있다.


 “그 상황에 대한 치욕스러움을 느끼게 해야지. 너에 대한 두려움도 말이야.”


 “그런다고 나한테 두려움을 느낄까?”


 내가 말한다.


 “충분히 그럴 것 같은데. 객관적으로 말해보면, 네가 사냥할 때 모습을 그 애들이 본다면 너를 괴롭히지도 못할 거야.”


 게일이 퉁명스럽게 말한다. 그가 묶고 있던 매듭이 엉켰다. 나는 그가 매듭을 풀 수 있게 도와준다.


 “솔직히 네가 왜 네 무기 솜씨를 뽐내고 다니지 않는지 모르겠어. 네가 잡은 것도 다 캣니스가 잡은 거라고 하면서.”


 매듭이 완성된다. 게일은 완성된 덫을 들어보인다.


 “어차피 솜씨를 뽐내도 호브에서 뽐내는 거잖아. 네 문제는, 너무 걱정이 많다는 거야. 가끔은 나서야 할 때도 있어. 지금처럼.”


 게일은 미소를 지으며 완성된 덫을 내 손에 떨어뜨린다.


 “다치지는 말고.”


 게일이 과장되게 걱정하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알았어.”


 나는 그의 덫을 받아 든다.



 그린빌 패거리를 어떻게 유도하느냐. 나는 내 달리기 실력을 이용하기로 한다. 혼자 사냥 가는 척 채비를 하고 경계를 돌아다니며 시선을 모으는 게 첫 번째 단계다. 이때, 게일은 호브에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로 한다. 캣니스는 어차피 탄광 견학 날에 항상 아팠으니 상관없다. 그래도 게일이 전해주길, 캣니스는 나 혼자서도 그린빌 패거리를 충분히 곤경에 빠뜨릴 수 있다며, 나를 믿는다고 했다.



 나는 깨끗한 모습으로 사냥감 자루와 물병을 챙겨 경계를 이곳저곳 돌아다닌다. 염소를 구경하다가 염소 아저씨에게 쫓겨나기도 하지만, 패거리 중 하나가 나를 발견하는 수확을 올린다. 나는 점점 숲으로 통하는 개구멍 쪽으로 움직인다.



 패거리 중 다른 아이가 개구멍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것을 본다. 나는 그 애를 못 본 척하고 개구멍을 통과해 초원을 지나 숲으로 들어간다. 일부러 발자국을 남겨 그 애들을 유도한다. 선명하게 보이라고 물을 좀 뿌리고 흙을 밟는다. 개구멍 쪽에서 싸우는 목소리가 들린다. 들어가냐 마느냐로 말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덫이 설치된 길목까지 발자국을 남긴 후, 다시 발자국을 밟으며 뒷걸음질 쳐서 빠져나온다. 그러고 나서는 안전한 덤불 밑에 웅크린다.



 내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 서둘러 달려오는 발소리들이 들린다. 다들 숲에 익숙하지 않은지 나뭇가지를 마구잡이로 꺾고,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진다. 그러다가...


 “으악!!”


 발자국을 따라가다가 한 사람이 덫에 걸려 거꾸로 매달린다. 목소리를 들어 보니 선덜랜드다. 다른 아이들이 그를 구하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니지만, 그 아이들도 매달리게 된다. 마지막 아이가 뒷걸음질 치다가 매달리는 것을 보고 나서, 나는 그들을 언제 풀어줄지 고민한다. 숲을 한바퀴 돌고 올까? 아니야. 머리에 피가 몰린 채 그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송장 여러 구를 치우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사형 확정이고, 난 죽기는...



 아니, 그만하자. 이렇게 걱정하는 건 게일의 말대로 도움이 안 된다. 나는 10분 정도 농땡이를 피우기로 한다. 무섭게 등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단검을 들고 등장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비명소리가 잦아들고 누군가 훌쩍거릴 무렵, 나는 칼을 들고 덤불 밖으로 나선다. 사냥꾼의 걸음걸이로 걷는 것도 빼먹지 않는다. 내가 소리 없이 나타나자, 나를 본 양갈래 머리를 한 여자아이가 깜짝 놀라 기절한다.


 “어떻게 된 거야?”


 나는 심드렁하게 묻는다.


 “뭐긴 뭐야! 네가 한 짓 맞지! 네가 이곳에 함정을 설치해 둔 거잖아!”


 그린빌이 아직 힘이 남았는지 나를 노려본다. 잠재의식 속에서 두려움이 몰려오지만, 나는 지루한 표정을 유지한다.


 “이건 게일이 토끼 잡으려고 설치해 둔 건데?”


 호브에서 자주 보던 아이인 트레버가 겁에 질린다. 우리가 들고 왔던 죽은 토끼의 모양새를 떠올린 탓이다.


 “그러니까 풀어줘, 제발. 우리는... 어...”


 트레버는 고민한다. 그린빌이 말을 받는다. 선덜랜드는 얼굴이 자줏빛으로 변해서 변명을 생각하기조차 힘든 것 같다.


 “환각 버섯을 찾으러 왔어. 너도 알지? 토벤 던디가 파는 것 말이야.”


 “그래! 그 새끼가 가격을 올렸다고.”


 트레버가 숨을 헐떡이며 말한다. 나는 고민하는 시늉을 한다.


 “너 이 캐피톨 첩자 새끼야! 당장 이거 안 풀어?”


 “쟤 때문에 풀기 싫어졌어.”


 나는 칼을 빙빙 돌리며 비꼬듯이 말한다. 그린빌의 기절할 것 같은 표정으로 내 손을 바라본다. 그 표정에 마음 깊은 곳에서 용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닥쳐, 멍청아! 누가 칼을 쥐고 있는지 잊은 거야? 제발 풀어줘. 우릴 풀어주면...”


 “다시는 너를 아는 척도 안 할게!”


 트레버의 말을 그린빌이 끊는다.


 “좋아.”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나는 그린빌의 발목을 묶은 밧줄에 들고 있던 칼을 던져 줄을 끊는다. 그린빌의 비명소리가 시끄럽다. 그러고 나서, 나는 그린빌에게 다가간다. 내가 뭘 할지 겁에 질린 채 응시하는 그린빌의 눈초리가 떨리지만, 나는 그저 칼을 줍는다. 시간이 오래 걸리겠네. 칼을 한 개 더 가져올 걸 그랬나?



 나머지도 비슷하게 풀어준 후, 그린빌과 선덜랜드, 트레버는 기절한 여자아이를 들쳐 매고 숲을 빠져나간다. 내가 길을 안내해줄까 물어봤지만, 그린빌이 고개를 흔들어대서 그만 뒀다. 내가 너무 친절한가 싶지만 저 애들이 여기서 실종되면 내 이름이 나올 것이다. 그러면 무서운 일이... 아니 귀찮아지는 것뿐이다. 게일이라면 이렇게 생각하겠지. 나는 나무에 올라가 밧줄을 정리한다.


 “완벽했어.”


 때마침 게일이 등장한다. 그는 한쪽 어깨에는 활과 화살통을 매고, 다른 쪽 어깨에는 로리의 책가방을 매고 있다.


 “다 지켜본 거야?”


 “아니, 거의 끝부분만. 사실 너에게 온전히 다 맡길 생각이었는데 로리가 얼른 가보라고 하더라고.”


 게일이 책가방을 맨 쪽 어깨를 으쓱인다. 나는 칭찬에 부끄러운 마음에 손을 서투르게 쓰다가, 나무 둥치를 쳐서 떨어지는 나뭇잎을 죄다 맞는다. 게일이 그 모습을 보고 참을 수 없었는지 웃음을 터뜨린다. 내가 부루퉁한 표정으로 바닥에 내려선다.


 “이런 덫은 이제 네가 정리해.”


 게일이 내가 내미는 밧줄을 받아든다. 여전히 만면에 미소를 띤 채다. 나는 나뭇잎을 털어버리려고 하지만 게일이 말린다.


 “잠깐.”


 “왜?”


 나는 치켜든 팔을 내린다.


 “나뭇잎이 꼭 왕관 모양으로 떨어졌어. 엄청 예전에 우승한 운동선수에게 씌어주던 것처럼.”


 게일은 내 머리카락에 손을 대 나뭇잎을 이리저리 움직인다. 그의 손길이 부드럽다. 나는 저절로 몸을 긴장시킨다. 그는 이윽고 내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며 필요 없는 나뭇잎을 정리한다. 그의 굳은살 박인 손가락이 느껴진다. 내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는지도 모른다. 초까지 셀 수 있던 순간이 지나고 나서, 게일은 내 모습을 보고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예쁘다.”


 그는 장난스럽게 내 앞에 무릎 한쪽을 꿇고 내 오른손 손가락을 가볍게 잡아 올린다.


 “레이디 로럴(Lady Laurel),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얼굴이 완전히 빨개지기 전에, 나는 내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이 상황을 장난인 척하기로 한다. 예전에 학교에서 야만스러움을 교화시킨다는 목적으로 강제 시청한 연극을 따라하자. 그 연극은 중세 시대 기사와 귀족 여인의 사랑을 노래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 하나였던 것 같은데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학교의 의도와는 달리 배우들의 캐피톨 발음 때문에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다.


 “고마워요, 경(sir).”


 게일은 내 어설픈 캐피톨 발음 때문에 빵 터진다. 애써 진정한 게일이 묻는다.


 “그래서, 나는 무슨 경이야?”


 게일도 그 연극을 기억하고 있는 거다. 나는 그의 별명을 지금 말해주기로 결심한다.


 “콜 경(Sir Coal). 그들이 너를 부르는 이름이야.”


 “내가 그저 그런 석탄 광부가 될 거라서?”


 게일이 내 손을 잡고 일어난다.


 “아니, 너는 제일 눈에 띄는 석탄 광부가 될 거야.”


 내가 말한다.

 



 햇빛이 광장을 내리쬐고 있었다. 에피 트링켓의 가발이 눈이 아플 정도로 선명한 분홍색인 바람에 게일은 눈을 찌푸렸다. 시계가 두 시를 가리켰다. 그 뒤에 있을 종이 두 번 치며 시장이 연단으로 나가 지겨운 반역 협정문을 읊기 시작했다.



 또 구역들이 잘못했고, 어쩌고 하는 이야기겠지. 게일은 시장을 노려보다가, 연단을 올려다보고 있는 다프네를 응시했다.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게일은 문득 궁금해졌다. 그의 옆에 선 남자아이가 공으로 손장난을 치다가 그것을 떨어뜨렸다. 무대 화면이 급하게 돌려졌다. 게일은 그들을 비추던 카메라가 황급히 돌려진 것을 알았다. 게일은 이 상황이 완전한 촌극이라고 느꼈다. 지금 그의 옆에서 공을 눈에 안 띄게 주우려고 노력하는 남자아이나, 추첨식이 대단한 척하며 호들갑을 떠는 에피 트링켓이나, 캐피톨의 지시를 받으며 카메라를 움직이는 촬영팀 말고도, 헝거 게임이 공포의 주요 기제로 작용하는 이 상황 자체가 그랬다.



 에피 트링켓이 여자 조공인을 뽑기 위해 연단의 왼편에 있는 추첨공 쪽으로 갔다. 그녀가 공 안으로 손을 집어넣자 다프네가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다프네가 이런 것을 매년 겪는 게 싫었다. 잔뜩 긴장하면서 추첨식에 억지로 불려와 참여하고, 저녁에는 뽑히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하며 풍성한 저녁을 입안으로 밀어 넣는 것. 매년 5월 8일에 법원에 가서 죽을 확률을 높이는 것. 다프네는 12번 구역, 나아가 판엠 자체를 떠날 수 있었다. 그녀의 가족이란 사람들은 죽거나 사라졌으니까. 다프네에게 판엠과의 연고는 캣니스의 가족과 그의 가족, 호브 상인들과의 유대 관계밖에 없었다.



 그래서 게일은 다프네가 이 모든 것을 집어치우고 저 북쪽의 야생으로 떠나길 바랐다. 그래서 게일은 다프네를 억지로 떠밀어 울타리 밖으로 보낼 수 없었다. 그저 그 안팎을 오가며 그녀가 억압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 사냥할 뿐이었다. 게일은 다프네에게 주려고 가져온 반지를 꽉 움켜쥐었다. 지난번 생일 때 주지 못했던 반지였다. 오늘 추첨식을 무사히 넘기고 나면 선물할 것이다. 다프네가 그를 잊지 못하게 할 심산이었지만, 얼마든지 다른 식으로 생각해도 좋았다. 그녀는 아마 살아남은 기념으로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겠지.



 에피 트링켓이 종종거리며 연단으로 돌아와 꺼낸 종이를 확인하고 이름을 부른다.


 “다프네 로젠데일!”


 그는 그 즉시 굳어 버리고 말았다. 게일은 남자 조공인의 이름(“피타 멜라크!”)을 부르고 나서도 움직일 수 없었다. 다프네를 진작 떠나게 할걸. 그가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은 국가가 멈추고 조공인들이 안으로 들어갈 때였다. 조공인들은 떠나기 전에 작별 인사를 한다. 그가 다프네를 포옹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게일은 늦기 전에 반지를 움켜쥐고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달렸다.


 

Laurel: 월계수, 월계관

월계수는 주인공의 이름인 다프네와도 깊은 연관이 있죠.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아폴론과 다프네 설화에서, 아폴론을 피해 달아나던 다프네가 월계수로 변했으니까요. 그 잎으로 아폴론이 월계관을 만들었답니다.


100화 기념 외전을 드디어 완성해서 올렸습니다! 오늘 본편의 다음편(3부의 26화)도 올라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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