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햇살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선뜻한 공기가 활개 치는 5월의 초순이다. 덥기도 하고 춥기도 하고. 목 뒤에 땀이 배는데 아랫배는 차게 식고. 길을 걸으면서도 지금이 봄인지 여름인지 도통 모르겠다. 온도에 민감한 것은 순전히 하루에 만보를 넘게 걷는 유산소를 매일 실천하고 있는 덕분이다. 진초록의 나무들의 머리숱이 늘어난 것에 감탄하고, 그늘 아래 숨어 잠깐의 달콤함을 맛보다가도 아, 나 걷고 있지 깨달으며 부지런히 발을 놀려 목적지에 도착해야 하는 것이 걷기의 숙명이다. 얼굴과 목 뒤에 선크림을 잔뜩 바르고 캡모자를 푹 눌러쓰면 땡볕 정도는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물에 젖은 솜처럼 질질 땀을 흘린 채 말문이 막히는 쪽은 항상 나이지만 말이다.


덥고 짜증 나는 건 한 순간이요, 운동 후 느낄 수 있는 개운함은 꽤 오랫동안 기분 좋게 전신을 감돈다. 유산소의 특장점인 활발한 혈액순환이 신체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은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적용된다. 혈류의 흐름이 원활할 의무를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사람으로서, 외부에서 짜고 들큼한 공기를 맡으며 걷는 것과 헬스장에서 1회에 5분이 소요되는 러닝을 4세트 하는 것은 인생을 바르게 살아가고 있다는 위안의 지표다. 체지방을 감량할 필요도 있어 일석이조는 운동의 효과를 두고 하는 말이 틀림없다.


흰 종이에 운동이라는 두 글자를 적고 60포인트의 궁서체로 굵게 표시했다. 숨도 쉬지 않고 그다음 적어야 할 네 글자는 식단관리다. 이건 밑줄까지 쳐야 한다. 금기인 음식과 섭취해야 할 음식이 명확하기 때문에, 형광펜으로 강조할 가치가 있다. 물론 삼을 넣은 육수를 베이스로 한 메밀국수를 그 날 점심의 선택권에서 배제하는 것 또는 전복 진액과 토마토 2박스를 매일 섭취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제품의 성분표를 확인하고 카트에 넣어도 되는 것과 넣으면 안되는 것을 구별하는 건 일상에서 크게 힘들이지 않고 실천할 수 있다. 혈류가 막히지 않는 건강한 음식을 섭취하는 것도 마냥 막막한 숙제는 아니다.


전생에 이스트였을까? 봄의 설렘을 가득 안고 자란 미국의 드넓은 밀밭의 한 포기였을까. 빵을 너무나 사랑한다. 구워진 밀가루의 푹신함과 버터의 향긋함, 혀가 아릴 정도의 끈적한 초콜릿이나 손가락으로 푹 떠먹고 싶은 생크림 따위로 가미된 바삭한 당분 덩어리의 유혹에는 속수무책으로 넘어가기 일쑤다. 

기분전환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올리는 것은 간편하면서 보장된 행복이다. 당장 반년 뒤에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한 나의 미래와는 달리 케이크는 보험보다 더 든든하게 나의 손실을 채워준다. 자조감이 가슴을 치고 세상이 흙빛으로 보일 때 먹는 생크림이 3단으로 샌드되어 있는 과일케이크 한 입은 내 눈물을 닦고 위로해준다. 힘든 현실을 굳이 마주할 필요 없다는 달콤한 속삭임이 귓가에 맴돈다. 부서지는 햇살이 인도와 도로를 구분 짓는 플라타너스 나뭇잎에 부딪혀 반짝 빛나는 날, 사랑하는 사람과 먹는 레드벨벳 케이크 한 조각은 살아있음에 감사함을 느끼게 한다.


만충한 오감의 향연에 영원히 몸을 맡기고 싶지만, 전대상피질이 이제 나무를 볼 시간은 지났다고, 숲을 보아야 한다고 꿈틀댄다. 인생에서 빵을 삭제하는 건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행복을 포기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으므로, 빈도를 줄이는 것에 애써 의미를 부여해본다. 밀가루와 설탕의 눅진한 당분을 마음껏 즐기기에는 아직은 건강하게 살고 싶은 욕망이 더 크다. 일상 속의 마시멜로 이야기처럼 당장의 섭취를 억제한 뒤 일정 기간 후 먹었을 때 빛처럼 다가오는 쾌락도 당분 못지않게 중독적이고 말이다.


글을 쓰는 건, 특히 내가 사랑해 머지않은 달콤하고 짭짤하고 기름진 밀가루빵에 대해 서술하는 건 눈앞에 대왕 마시멜로를 두고 침을 뚝뚝 흘리는 것과 같다.

이틀 전 준이 퇴근길에 사 온 초코칩이 잔뜩 박힌 초코파운드 케이크가 냉동실 세 번째 칸 구석에 얌전히 얼어가고 있다. 보상을 받을 때가 온 것 같으니, 이제 글을 줄이고 기꺼이 의자에서 일어나 쾌락을 누려야겠다.




얼렁뚱땅 김제로의 진지하고 코믹한 이야기

김제로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