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OSS Ep.1을 읽고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들의 과거와 현재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엄청난 스크롤 압박 주의.





내게는 네가 전부야

Nothing without you.






시끄러운 소리가 멈췄다. 귀가 얼얼할 정도로 울리던 소음이 멈추고 거짓말처럼 침묵이 찾아왔을 때, 바그작. 바그작. 깨진 유리 조각 위를 꾹꾹 누르며 다가오는 구두 굽 소리가 나즈막히 복도에 울렸다. 가까이, 점점 가까이. 천천히 다가오던 발자국 소리는 이윽고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로 앞에서 멈추었고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끼익- 귓바퀴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고철 문 소리가 요란히 방 안을 채웠다.


묵직한 발자국 소리를 들었을 때만 해도 머릿속에 상상했던 모습이 있었다. 키가 크고 덩치가 꽤 있을 것이며, 이런 적진 한가운데 혼자 온 것을 보아 두 눈에는 범인의 살기가 흐르고 있을 것이다. 과연 열린 문 너머 서 있는 남자는 상상대로였다. 키가 컸고 말랐지만 체격이 다부졌으며 눈에 살기가 넘쳤다. 다만 상상했던 것보다 한참 어렸다. 기껏해야 이십 대 초반일까. 아니, 십 대 후반일지도 모른다. 새하얀 뺨 여기저기에 시뻘건 피를 묻히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에게서 어리고 맹렬한 치기가 보였으니까.


마주한 상대의 모습에 당황하기는 남자도 마찬가지였는지, 방 한가운데 앉아 있는 꼬마를 한 번, 빈 방 구석구석을 둘러보더니 다시 꼬마를 한 번,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상처 하나 나지 않은 꼬마의 몸을 위아래로 훑고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그런 남자를 보던 꼬마도 이내 작은 머리통을 기울이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자신의 포즈를 거울 마냥 따라하는 꼬마를 보며 남자는 여전히 냉랭한 시선을 보냈다.


"배진영?"


남자는 꼬마의 이름을 재차 확인했다. 그나마 교복을 입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흡사 초등학생이라고 해도 믿었을 앳된 외모였다. 배회장으로부터 아들을 빼내와달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들었던 정보로는 중학교 2학년이라고 했으니 정황상 눈 앞에 있는 꼬마는 배진영이 분명했는데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자신을 구하러 와준 사람을 보는 눈빛이 구원받은 감격이나 감사가 아니라 꼭 재미없는 놀이라도 하듯 일체 감정의 동요가 없는 저 건조한 눈빛 때문이었다.


"처음 보는 형이네요. 새로 오셨나."


진영은 그렇다는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며 말했다. 그대로 지나쳐 방을 나가려는 진영의 팔목을 다니엘이 잡아 세웠다. 올려다본 다니엘은 잔뜩 인상을 구기고 냉랭한 눈에 서슬퍼런 살기를 담고 있었다.


"대답 안 해? 배진영이냐고 묻잖아."


다니엘이 이를 바드득 갈며 물었다. 혼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을 상대했는지 그의 매끈한 이마 위로 땀이 흥건했고 그중 몇 줄기는 뾰족한 턱선 아래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그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렸다. 내가 너 때문에 여기까지 오느라 이 꼴이거든? 예의 좀 차리지? 다니엘의 이글거리는 눈이 제 앞에 놓인 진영을 향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진영의 팔목을 잡은 손힘이 어찌나 센지 잡힌 부분이 하얗게 질렸다. 그 힘에 딸려 맥없이 하늘거리는 자신의 팔을 내려다본 진영이 다시 눈을 들었을 때 다니엘의 숨이 코에 닿을 만큼 가까이 와 있었다.


"말해. 배진영이 아니면 지금 여기서 죽여버릴 테니까."


그의 눈에 일렁이는 것은 무분별한 대상을 향한 치기 어린 분노. 어린 진영은 그런 눈을 많이 보아왔다. 이 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해, 약해 보이지 않기 위해 먼저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는 사람들.


"맞는데, 자기 보스 아들한테 이런 식으로 말해도 그쪽 괜찮아요?"


중학생에게서 나올 만한 말은 아니었고 가질 만한 눈빛이 아니었다. 다니엘은 잡은 팔을 놓고 여전히 구긴 얼굴로 휙 등을 돌려 방을 나섰다. 바그작. 바그작. 신경질적으로 유리 조각을 밟아대는 소리가 아까보다 더 크게 복도를 울렸다. 복도에 쓰러져 있는 장정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뒤따르던 진영이 중얼거렸다.


"싸움 취향 한 번 지독하네."


집요하게 한 상처만 깊게 파고 든 폭력의 흔적. 앞서 가던 다니엘이 진영의 중얼거림에 별안간 멈추더니 뒤를 돌았다. 끼이끼이 소리를 내며 흔들거리는 복도 천장등이 다니엘의 하얀 얼굴에 기울어진 그림자를 만들었다. 날카롭게 찢어진 눈에 여전히 가득한 살기.


"구해줬으면 닥치고 따라와."


그리고 다시 뒤돌아 앞서가는 다니엘의 너른 등을 보며 진영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알만도 했다. 아빠가 저 사람을 이곳에 혼자 보낸 이유를.




적진에 홀로 들어가 진영을 무사히 데려온 이후, 배도훈 회장은 대놓고 다니엘을 아꼈다. 그는 꽤 섬세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는데 자신이 가는 곳마다 그를 데리고 다니며 이런저런 것들을 눈에 담게 했다. 사실 다니엘은 P조직의 조직원도 아니었고 그저 진영을 빼오기 위해 고용한 비밀용병이었다. 하지만 그 일 이후 배회장은 다니엘의 영입을 위해 부던히도 애를 썼다. 다니엘이 배도훈 회장의 오른팔처럼 지내게 된 지 반 년쯤 되었을 때 그가 말했다.


"돈 좀 많이 벌었나?"


갑작스런 질문에 다니엘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회장은 여전히 눈앞에 내려다보이는 LA의 화려한 야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꼬리를 늘려 웃을 뿐이었다.


"우리쪽 정보 돈 좀 될 텐데."


그제야 다니엘은 제 정체를 들킨 걸 알았다. 사실 그가 P조직의 용병으로 지원한 건 정보를 빼오는 대가로 LA 최대조직인 Bad Duck으로부터 돈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 바닥에서 P조직의 위상이 점점 높아질수록 주변 조직들의 견제가 심했는데 그중 최고는 역시 Bad Duck이었다. 그들은 LA내 최고 조직이라는 타이틀을 놓치지 않기 위해 언제든 P조직을 무너뜨리려 했고 마침 다니엘의 싸움 실력을 진작에 알았던 Bad Duck의 간부 하나가 이 비밀스러운 스파이 노릇을 제안한 것이다. 언제부터 들켰을까. 다니엘은 입술을 잘근 씹었다.


"벌 만큼 벌었으면 이제 진짜 지켜줄 텐가?"
"..."
"우리 진영이 말이야."


그 말을 하며 회장은 고개를 돌려 다니엘의 눈을 응시했다. 스파이 노릇을 끝내고 P조직원이 되어 달라는 직접적인 요청이었다. 깊게 패인 주름 사이로 여전히 용맹한 눈이 어둠 가운데서 빛났다. 그렇게 묵직한 시선을 던지다가 이내 장난치는 아이처럼 눈을 접고 웃는 게 그 특유의 리더십이었다. 곤란한 제안을 하면서도 상대가 부담을 느끼지 않게 이내 사람 좋은 웃음으로 유하게 분위기를 전환하는.


"시험입니까?"
"시험은 진작에 통과했는데 몰랐나?"
"...저를 믿으십니까?"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었고 다니엘은 그렇게 살아왔다. 배회장의 철학처럼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가능하다고 믿기에는 자신이 너무 더럽혀졌고 손에 많은 피를 묻혔다고, 그래서 지금처럼 계속 더럽고 피를 묻히는 인생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다니엘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듯 회장은 또 한 번 허허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낭만적인 말이네. 믿는다니."
"..."
"그래, 믿는 건 내 몫이니 자네는 자유롭게 선택하게. 설사 배반한다 해도 그 댓가를 감당하는 건 나와 내 아이 몫이야."


내 아이. 다니엘은 진영의 무미건조한 얼굴을 떠올렸다. 그 나이에 짓는 표정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감정을 벗어난 얼굴을. 고요한 눈동자 너머에 서려 있는 수많은 서사를 다니엘은 이 조직에 있는 동안 여기저기 귓동냥으로 듣곤 했었다. 갓난아기였을 적부터 이곳저곳 볼모로 잡혀다닌 탓에 P조직원들에게 진영의 존재는 늘 바람 앞에 놓인 미약한 촛불 마냥 위태롭고 유약했다. 그럼에도 그가 단단한 눈을 하고 있는 건 역시 천성적으로 배회장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 아닐까 다니엘은 짐작했다.




"치, 왜 또 형이에요."


다니엘이 진영의 밀착 보호 겸 감시를 도맡게 된 첫날 진영이 다니엘에게 내뱉은 첫마디였다. 팔짱을 끼고 위아래로 훑으며 퉁명스런 목소리로. 다니엘이 대꾸하지 않고 목석처럼 서 있자 흥, 하고 몸을 돌려 저만치 가버린다. 점점 작아지는 동그란 뒷통수를 보며 다니엘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Bad Duck의 정보통 노릇을 해온 걸 알면서도 덜컥 진영의 보호를 맡긴 배회장의 속뜻을 다니엘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진영은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한가 의문이 들 만큼 싸움 실력이 남달랐다. 진영을 곁에서 지켜본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을 즈음, 그제서야 그를 구하러 갔던 날, 몸에 상처 하나 없던 것이 이해가 됐다. 체격이 작고 마른 진영은 상대방의 급소를 찔러 단번에 제압하는 데 능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 그의 장점이었다. 아무래도 타 조직의 견제를 매일 받다보니 스스로 지킬 힘을 일찍부터 터득한 듯 싶었다.





"형, 일로 와봐요."


어느 날 진영이 그를 불렀다. 말이 보호지 그저 일거수 일투족 곁에 서서 아무 말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일상이었던 다니엘은 방금 들려온 목소리에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진영이 이곳에서 '형'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널리고 널렸다. 다니엘은 그중 자신을 불렀을 확률을 계산해봤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0'이었다. 그럼 침묵.


"아씨, 형이요, 형. 벙어리 형, 그쪽."


아, 이건 날 부르는 게 맞다. 다니엘은 꿈쩍 안 하던 시선을 냉큼 내려 제 가슴께 오는 진영을 쳐다봤다. 아빠는 그 많은 형들 중에 하필 말도 안 하는 벙어리 형을 보냈다며 하루에도 몇 번씩 투덜대던 진영이었다. 재잘재잘 혼자 잘도 중얼거리는 진영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찌나 시끄러웠는지 들어도 모른 척 하는 게 퍽 힘이 들었다) 알고보니 제 말에 하나하나 반응해주기를 기다린다는 걸 다니엘은 몰랐다. 그저 또 혼자 얘기하나보다, 심드렁하게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더니 결국 '벙어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지금도 자신에게 시선만 돌렸을 뿐 입은 열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한 다니엘이었다. 진영은 하여간 답답한 사람이야 중얼거리며 무작정 팔을 잡고 끌었다. 방금 샤워하고 나왔는지 젖은 머리에서 뚝뚝 물이 떨어져 바닥을 적시는데도, 대충 올려 잠근 검은색 후드 집업이 자꾸만 흘러내려 선명한 쇄골이 드러났는데도 진영은 연신 다니엘을 제쪽으로 잡아 끄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할 겸, 밍기적거리지 말고 퍼뜩 따라오라고 채근할 겸 가끔 고개를 돌려 다니엘과 눈을 맞췄다.


앞서 걷는 뒤통수에서 떨어지는 긴 목선이 걸을 때마다 좌우로 어지러이 흔들렸다. 고개를 돌리면 작고 동그란 눈이, 다시 고개를 돌리면 또 긴 목선이. 자꾸만 흔들거리며 산만하게 시선을 끄는 통에 다니엘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 앉아요."


부산을 떨며 데려간 곳은 진영의 방이었다. '고작' 진영의 방이었나 싶었지만 이내 이것이 진영에게 어떤 의미인지 눈치챈 다니엘은 진영의 뒷통수를 의아한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진영은 지금껏 자신의 방 안에 다른 사람을 들인 적이 없었다. 적어도 다니엘이 알기로는 그랬다. 이곳에 있는 진영의 수많은 '형'들도 방 안까지 들어온 적은 없었다고 했다. 그 이유는 아무도 몰랐지만. 그런데 왜 나를?


"여기 이렇게 앉아 있어요, 가만히."


다니엘이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진영은 그의 어깨를 잡고 눌러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혔다. 갑자기 훅 맞춰진 눈높이. 의자 곁에 놓인 은은한 오렌지색 조명에 진영의 까만 눈동자가 여실히 드러났다. 찰나였지만 그 안에 담긴 미세한 흔들림.


들킬 새라 휙, 몸을 돌리고 침대에 올라가는 진영이었다. 하지만 그 불안정한 얼굴을 이미 봐버린 다니엘은 잠시 멍- 얼이 빠졌다. 이제껏 진영이 이런 식으로 어리고 약해보인 적은 없었다.


진영은 이불을 코 얹저리까지 끌어올리고 옆으로 누워 눈만 빼꼼 내민 채로 다니엘을 쳐다봤다. 조명에서 멀어졌지만 여전히 불안한 눈.


"뭘 그렇게 빤히 봐요. 민망하게."


그러고보니 드러난 이마가 좀 붉었다. 새우처럼 둥글게 이불을 말고 누워서 눈만 내민 꼴이 귀엽기도 했다.


"아무 말이라도 좋으니까 좀 해 봐요."
"..."
"빨리-"
"어디 아파?"


물론 몸이 안 좋은 거냐고 다정하게 걱정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러냐. 속이 빤히 보이는 다니엘의 질문에 진영이 기가 찬 얼굴로 이불을 걷어 차 올리며 "아, 진짜!" 빽 소리를 질렀다. 그 바람에 젖은 머리가 작은 얼굴에 엉겨붙은 것도 모르고 "나 멀쩡하거든요?" 씩씩거리던 진영은 다니엘이 손짓으로 머리를 가리키자 그제야 흥흥 콧방귀를 뀌며 대충 손으로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냈다. 그리고는 다시 이불을 코 위까지 끌어올리고 씩씩. 진짜 어디 아픈가. 다니엘은 평소 답지 않은 진영의 모습에 당황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


"진짜 재미없어요 형은."


그리고 뭐라뭐라 더 투덜거리더니 이내 잘 것처럼 눈을 꼭 감고 한 동안 말이 없었다. 이어진 침묵. 간간이 두 사람의 숨소리가 긴장된 공기를 타고 흘러 방 안에 울렸다.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몇 번 엉덩이를 들썩거리던 다니엘은 결국 한숨을 쉬고 다시 앉았다. 진영이 자기를 끌어 굳이 침대 곁 의자에 앉혀놓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나 싶어서였다. 그때 자는 줄 알았던 진영이 천천히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이틀만요. 원래는 매년 아빠가 있어줬는데 올해는 출장 때문에 없어서 그래요. 오늘 내일만 이렇게 좀 해줘요."


그러고보니 오전에 배회장에게 전화가 왔었다. 길게 출장을 가게 됐으니 진영을 잘 부탁한다고. 새삼스럽게 왜 그러나 싶었었는데 굳이 '재미없는' 자신에게 곁에 있어달라고 부탁하는 진영의 모습을 보니 다니엘은 이유 모를 책임감과 의무감이 들었다. 뭔가 사연이 분명 있긴 한데 이유는 묻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힘들면 침대 와서 자고요. 같이 자도 난 괜찮으니까. 어디 가지만 말고. 응?"


어린애처럼 재차 확인한 진영은 다니엘이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서야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너무 밝으려나. 의자 곁 테이블에 놓인 조명을 끄려고 손을 뻗던 다니엘은 잠시 멈추어 진영의 얼굴을 살폈다. 처음이었다, 이렇게 가까이 오랫동안 보는 건. 이제 내년이면 자기도 고등학생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던 진영은 어느새 정말 많이 자랐다. 통통했던 젖살이 조금씩 빠져갔고 동그란 눈매도 제법 살아났다.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는 여전히 색-색- 아기같은 얕은 숨이 나왔지만.


딸깍. 다니엘은 조명을 끄고 눈을 감았다. 찾아온 어둠이 반가웠다.




다음날 진영은 평소처럼 학교 갈 채비를 했다. 봄 날씨가 완연해진 탓에 샛노란 사립학교 교복 조끼를 꺼내 입었는데 새까만 머리에 눈이 부실 정도로 노란색 조끼가 묘하게 어울렸다. 다니엘은 여전히 말 없이 방 문 곁에 서서 기다렸고 진영도 여느 때와 같이 다니엘을 지나쳐 집을 나섰다. 학교까지 차를 타고 가는 길에 진영은 휴대폰을 하는 대신 창문을 열고 바람을 맞았다. 얇은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팔랑이면서 달달한 향을 풍겼다. 다니엘은 제 쪽의 창문을 내렸다.


"형 싸움 잘한다면서요."


다니엘은 사이드 미러로 뒤를 살피며 조수석에 앉은 진영을 힐끗 쳐다봤다. 마주오는 바람에 한쪽 눈을 게슴츠레 감고 다니엘을 보고 있는 진영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와 같은 장난끼 어린 말투였는데 분위기가 좀 달랐다.


"그럼 누구를 위해서 싸워요?"


고전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질문에 다니엘이 피식 웃었다. 어제부터 사춘기 감성인가. 처음 보는 어린애같은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커브 길에 핸들을 유유히 돌리며 다니엘은 대답했다.


"나"
"아, 역시"
"넌?"


가벼운 대답이었고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다. 애초에 진영이 이 질문을 바라고 물은 것만 같아서. 진영은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팔랑이는 머리카락이 부산했다.


"지키고 싶은 사람은 있는데 죽었어요. 그땐 저가 너무 어려서 지킬 기회도 없었지만요."


누군가의 죽음은 늘 곤란한 주제다. 다니엘은 어서 진영이 뒷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그 시간이 초조했다. 이대로 말을 이을 순서가 자신에게 돌아올까 봐 핸들을 꼭 쥐고 침을 삼켰다. 다행히 진영이 먼저 입을 뗐다.


"그래서 지금은 누구를 지켜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느새 차가 학교에 도착했고 진영은 지체하지 않고 내렸다. 발끝까지 긴장되던 시간이 겨우 지났다. 휴우- 한숨을 내뱉은 다니엘은 핸들에서 손을 놓지 않은 채로, 진영이 차에서 내려 빙 돌아 운전석 앞에 서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진영이 입은 노란 조끼가 유난히 눈이 부셨고 아까 났던 달달한 향은 한층 더 진해졌다. 다니엘은 진영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등 뒤에 쏟아지는 햇빛이 눈을 간지럽힌 탓이었다.


"그러니까 형도 후회하지 말고 잘해요. 지키는 것도 타이밍이에요."
"..."
"자기 지키는 건 기본이고 이왕이면 남도 지키면서 싸워요."


그게 나면 더 좋구요. 진영의 마지막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정말 그 말을 했는지 아니면 다니엘이 상상해서 들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진영은 맑게 웃었고 어제는 고마웠다며 어울리지 않게 손까지 흔들고 촐랑촐랑 교문을 들어섰다. 다니엘은 그 뒷모습이 사라져 없어질 때까지 멍하게 쳐다봤다. 한참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다만 곁에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뭔가에 푹 빠져 있었다. 


퍽-


눈 앞이 깜깜해지고 정신을 잃은 건 순식간이었다.






지하의 습하고 찐득한 공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쩍쩍 달라붙는 불쾌감에 눈을 뜬 다니엘은 본능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큰 덩치의 서양인 세 명이 아직 그가 깬 것을 모른 채 등을 보이고 대화 중이었다. P조직이 요새 LA 물을 흐려놨다며 잔뜩 열을 내다가 주제는 이내 Bad Duck의 찬양으로 이어졌다.


그러고보니 다니엘이 Bad Duck으로 정보를 흘리지 않은 지도 꽤 됐다. 아마 그쪽에서는 다니엘을 변절자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어느 조직에도 몸을 담지 않은 다니엘에게 '변절'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지만 말이다.


"걔 아까 끌려온 거 봤어?"
"별 거 아니더만, 그렇게 기를 쓰고 반항하다가 총알 하나에 픽 쓰러지는 게-"


조용히 대화를 들으며 상황을 파악하던 다니엘은 그들이 말하는 '걔'가 진영을 가리킨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LA에서는 P조직을 제외한 모든 조직이 총을 사용했다. 총기 소유가 합법화된 곳이니 어디서든 총 맞을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고 특히나 모든 조직의 적이 된 P조직이야 그런 위험에 수도 없이 노출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다만, P조직 보스의 아들은 인질로서의 가치가 있으니 누구도 섵불리 몸에 손을 대지 않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총에 맞았다고? 다니엘은 자신에게 진영을 부탁하던 배회장의 얼굴을 떠올렸고 생각의 타래는 자연스레 진영으로 이어졌다. 아, 이건 떠올리다가 왠일인지 가슴이 먹먹해지고 저려서 그만뒀다. 그저 오랜만에 끓어오르는 분노와 폭력의 욕구만이 제 안에 가득 남도록 집중했다. 금세 눈빛이 나른하게 바뀌었다. 몸 안의 모든 세포가 살아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잔인함은 다니엘에게 생명력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다니엘이 폭력에 미쳐 날뛴다고 사람들이 표현할 때는 오히려 반대로 그가 가장 고요한 때다. 몇 명이고 최대한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제 발 앞에 쓰러뜨리면서도 그의 눈에는 차분한 살기가 일렁였다. 저 멀리서 실루엣이 느릿느릿 걸어오고 이윽고 조명 아래 섰을 때 붉은 피가 번진 새하얀 얼굴이 드러나면 그의 짐승같은 움직임도 고고한 예술처럼 아름다워보였다. 마음껏 잔인해져도 되는 상황을 마주했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가장 빛이 났다. 분노와 쾌락의 사이 그 어딘가에서 다니엘은 미쳤다고 해도 좋을 만큼 잔잔했다.


그래서 다니엘이 방 안에 들어와 진영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 잠깐의 사이에 그의 시선이 피가 낭자한 진영의 어깨에 머물고 이후 순식간에 돌변하는 그의 눈동자를 읽었을 때, 진영은 똑같은 전율을 온몸으로 느꼈다. 잔잔하고 서슬퍼렇던 다니엘의 눈이 한순간 엉망으로 일그러지는 건 아침에 했던 진영의 질문에 대한 대답과 같았다. 너를 위해서 싸워줄게.


둘의 시선이 부딪히는 잠깐의 공백을 놓치지 않고 Bad Duck의 보스 닉은 허리춤에 있던 총을 뽑아 들었다. 곁에 있던 진영이 재빨리 총을 든 닉의 손목을 내려쳤지만 그 와중에 발사된 총알은 다니엘의 허벅지를 스치고 지나갔다. 손목에 힘을 잃고 놓쳐버린 총을 허공에서 낚아챈 진영은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닉의 허벅지를 빗겨 쐈다. 정말 순간이었다. 다니엘과 닉은 거의 동시에 서로의 다리를 감싸안고 제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뒤늦게 방에 들어오려던 Bad Duck 조직원들은 몸의 일부가 문 너머로 보이는 족족 진영이 쏘는 총알에 맞았고 낙엽처럼 문 앞에 쓰러졌다.


문 너머가 잠잠해지자 진영은 아직도 연기가 나는 총구를 닉의 관자놀이에 대고 나즈막히 중얼거렸다.


"누구는 총질 못 해서 안 갖고 다니는 줄 알아? 쪽팔린 줄 알아야지."


피식, 다니엘은 웃었고 한국 말을 이해하지 못한 닉은 어리둥절 눈알을 굴려 댔다.


"꼬우면 니가 한국말 배워. 난 지금까지 영어로 해줬잖아."


진영은 총구로 틱틱, 닉의 관자놀이를 치며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은 형이 할 거예요?"


진영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떨어지자마자 틈을 노리고 일어나 제압하려던 닉은 이번에는 어깨에 총알이 박혔다. 보지도 않고 방아쇠를 당긴 진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닥에 쓰러져 고통에 뒹굴대는 닉을 무표정하게 내려봤다.


"니가 아까 나한테 이렇게 쐈었는데. 이제 공평하지?"


다니엘은 몸을 일으켜 영어로 온갖 욕을 해대는 닉에게 다가갔다. 천천히 무릎을 굽혀 그와 시선을 맞춘 다니엘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가 알아들을 수 있게 영어로 또박또박.


"일어나. 이제부터가 진짜인데. 너랑 나. 둘이."




어깨에 총상을 입고 돌아온 진영을 보며 P조직원들은 저마다 탄식을 내뱉었다. 아아, 왜 하필 오늘. 진영은 괜찮다며 웃어 보였고 다니엘은 그 뒤에 멀찍히 서서 그들을 지켜봤다. 응급 처치를 위해 진영을 먼저 들여보내고 깊게 숨을 내뱉으며 마른 세수를 하던 다니엘 곁으로 두 세명이 모여 하는 얘기가 들렸다. 오늘이 그날이잖아. 사모님이랑 같이 납치되셨던 날. 그러네, 진영이 방에서 같이 자다가였지 아마? 아, 오늘이 사모님 기일이구나. 저런, 세상에 하필 오늘 또 그런 일이 있으셨네. 다니엘은 지워지지 않는 피얼룩을 괜히 벅벅 손으로 문질렀다.




잠이 안 올 때는 따뜻한 우유가 좋다던데. 다니엘은 쟁반에 잔을 받쳐들고 어색한 걸음을 옮겼다. 똑똑- 방문 앞에 서서 어울리지 않는 노크도 하고 여간 뻘쭘한 게 아니었다. "네." 안에서 들어오는 낭랑한 목소리에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진영은 어느새 침대 위에서 팡팡- 이불을 정리하며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풉- 그거 뭐예요? 설마 나 먹으라고?"


다니엘의 손에 어색하게 들린 우유 잔을 보더니 진영이 까르르 웃으며 바짝 다가왔다. 상대와 눈을 마주치는 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처럼 시선을 피한 다니엘은 앙상한 진영의 어깨 위 두툼하게 감겨진 붕대에 눈을 고정했다. 노골적인 시선에 진영이 괜히 느슨해진 가운을 여몄다. 붕대를 감은 탓에 입을 수 있는 옷이 가운 형태로 된 잠옷 뿐이었다. 상처가 창피한 건지 아니면 다니엘의 시선이 창피한 건지 진영은 뒤를 돌아 침대 가로 가더니 다시 팡팡- 소리 내어 이불을 정리했다.


"내가 앤가. 그런 거 먹어야 잠이 오게."


나도 내년이면 고등학생이거든요? 이제 다 컸는데 세상에, 우유라뇨. 재잘재잘 진영이 떠드는 사이 다니엘은 우유를 창가 곁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데우느라 고생 좀 했는데. 그런 속도 모르고 진영은 모터라도 단 것처럼 입을 움직였다.


"그냥 옆에 있어만 주면 된다니까요. 진짜 촌스럽게 우유는-"
"우유는 됐고 그러면-"


입술을 잔뜩 내밀고 재잘재잘 떠들던 진영이 어느새 자신의 등 뒤에 바짝 다가온 다니엘의 음성에 "아 깜짝이야!" 하고 몸을 급히 돌리다가 풀썩 침대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당황해서 귀까지 붉어진 진영과 달리 다니엘은 평소와 같은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침대를 가리키며 물었다.


"여기서 자면 돼?"
"누, 누가요?"


진영의 어벙벙한 질문에 다니엘은 잠시 눈썹을 찡그리고 생각을 하더니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이번에는 진영이 눈썹을 찡그리고 한동안 생각을 했고 역시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어디 아파요?"


그러면서 몸을 일으켜 저보다 두뼘은 더 큰 다니엘의 이마에 조그만 손바닥을 올렸다. 발꿈치를 들고 서느라 몸이 기우뚱 할 때마다 다니엘의 턱 밑에 아슬아슬하게 진영의 동그란 이마가 닿았다 떨어졌다. 뜨끈한 숨이 진영의 앞머리를 간질였다.


"갑자기 왜 이래요? 총알을 허벅지가 아니라 머리로 맞았어요? 왜 갑자기 착한 형 코스프레예요 징그럽게-"
"닥치고 그냥 누워."


그대로 두면 새벽까지 종알거릴지도 모를 일이다. 다니엘은 먼저 침대로 들어가더니 침대 헤드에 등을 대고 앉아 옆에 놓인 베게를 두드렸다.


"맨날 닥치래. 그 말밖에 못해요?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한결같-"
"그 입 꼬매버리기 전에 와. 당장."
"시발...착하게 대해줬더니 기어오르네."
"착하게 대해? 누가, 니가?"


무릎으로 침대에 오르면서도 부리를 잔뜩 내밀고 조잘거리는 진영에게 대수롭지 않게 맞받아치며 다니엘은 한쪽 팔을 턱 하니 진영의 베게 위에 올렸다. 양 볼에 바람을 잔뜩 넣고 흘기면서도 그 팔 위에 머리통을 뉘이는 진영이다. 다니엘은 팔끝을 굽혀 진영을 제 쪽으로 당겨 안았다.


"뭐하냐고 지금 이거? 존나 어색하게"
"좋으면 닥치고 자라 꼬맹아."
"시발 누가 좋대? 놔 봐! 안 놔?"


이후로도 중얼중얼 욕을 섞어가며 바둥거리던 진영은 가만히 등을 토닥이는 다니엘의 손길에 어느새 입술을 붕어처럼 뻐끔대며 잠에 빠져들었다. 제 품에 안겨 고단한 하루의 끝을 마감하는 진영을 내려다보던 다니엘도 눈을 감았다. 소독약 냄새 사이로 달달한 향이 진영의 약한 맥박을 타고 은은하게 방 안을 가득 채웠다.




#3년 후 현재#




다니엘이 이끄는 P조직이 이상두의 L조직을 접수했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퍼졌다. 그야말로 비밀에 휩싸였던 '뒷골목 브레이커'의 요란한 신고식이었다. L조직을 단 하루 만에 장악한 다니엘에 대한 후일담은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살이 눈덩이처럼 불어 괴상한 소문을 만들어냈다.


가령 다니엘이 이상두를 단번에 쓰러뜨릴 만큼 어마어마한 체격의 뚱땡이더라는 둥, 또는 납치되었던 그의 여자친구가 양귀비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절세미녀인 탓에 금사빠 이상두가 홀딱 반했고 그에 빡친 다니엘이 정신을 잃고 덤비며 지독한 치정싸움이 되었더라는 둥.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괴상한 소문들이 돌기 시작했다. 사실 이러한 소문들은 진위여부를 따지기보다 그저 P조직 보스 강다니엘의 존재감을 더욱 굳히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물론 그 존재감을 반가워하지 않는 이가 대부분이었지만.


"그러니까 제발 경호 좀 거부하지 말라고, 보스. 어?"
"어"


- 까톡!


"이상두랑 마약 거래했던 A조직도 당장 밥줄이 끊겨서 이를 갈고 있어. 이대로면 길 지나다니다가 언제 칼침 맞을지-"


- 까, 까톡!


"..."
"큭크"
"내 말 안 듣니 형님아?"
"어, 큭"


- 까톡!


우진은 결국 태블릿 화면을 끄고 옆구리에 낀 채 제 앞에서 휴대폰을 잡고 끅끅 대는 보스 다니엘을 노려봤다. 


'까톡!' 하며 청명한 알림음이 방 안에 울릴 때마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무릎을 치며 웃다가 볼을 풍선처럼 부풀리며 삐진 척 했다가 눈을 질끈 감으며 윙크를 했다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뽀뽀하는 척을 했다가, 저 혼자 온갖 다양한 표정을 시전하는 다니엘은 분명 우진의 존재를 잊은 듯했다.


아무리 궁예를 해봐도 저 까톡을 보낸 사람은 진영이 분명했고 진영이 보낸 까톡이라면 어떤 내용을 보냈을지 뻔한데 대체 왜 다니엘의 반응은 저렇게 다양한 건가 싶었던 우진은 저벅저벅 걸어가 대뜸 다니엘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고 두 보스끼리 주고받은 대화 창을 휘리릭 스캔했다.


K: (머리 위로 하트 날리는 프로도)
꼬맹이: 꺼져
K: (한쪽 다리 들고 사랑의 총알 날리는 네오)
꼬맹이: 미친
K: (하트 눈을 하고 뽀뽀 날리는 어피치)
꼬맹이: 왜 이래
꼬맹이: 죽고 싶냐 진짜


대체 어떤 포인트에서 웃은 거냐. 죽고 싶냐는데? 우진이 환멸 어린 표정을 보내든 말든 다니엘은 제 휴대폰을 다시 가져가 화면을 보고 또 웃어댔다.


"꼬맹이 너무 귀엽지? 사랑스러워 죽겠지?"


걔는 그냥 형을 죽일 것 같은데. 속으로 중얼거리고 한숨을 내쉰 우진은 결국 다니엘이 귀를 기울일 만한 화제로 돌렸다.


"진영이 담임선생님한테 전화 왔는데"
"어? 진영이?"


역시나. 진ㅇ 까지만 말했는데 귀를 쫑긋하고 돌아보는 다니엘이다. 나 이 방 들어와서 처음 눈 마주치는 거다, 형님아. 우진은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씨익 웃으며 답했다.


"보스 전학시킬 때 보호자 연락처에 내 번호를 적었는데 종종 학교 일로 문자가 오더니 이번에는 아예 전화가 왔네."
"담임이? 왜?"
"몰라, 자세한 건 학교 와서 얘기해야 한대. 전화로 나눌 얘기가 아니라고."
"설마 학생들 패고 그런 건 아니겠지? 애가 그럴 애는 아닌데 그치?"
"그래서 내일 가볼까 하는데"
"누가? 네가?"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는 다니엘에게 우진 역시 황당한 눈으로 대응했다.


"안 돼?"


그러자 다니엘이 손사래를 치며 웃는다. 묘하게 붉어진 볼을 하고서. 이상한 그림이었다. 어깨는 태평양만해 가지고 소녀처럼 웃는 얼굴이라니.


"아휴 내가 가야지. 내가 안 가면 꼬맹이가 얼마나 실망하겠어."


형을 학교에 가게 하는 것만으로 진영이는 나한테 실망하다 못해 죽이려 들지 않을까. 우진은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하지만 막을 새도 없이  휘파람까지 부르며 우진의 바지춤에서 휴대폰을 꺼내 담임쌤의 연락처를 옮겨 저장하는 다니엘이었다.






처음에 진영은 못 본척 그냥 지나가려 했다. 교문 앞에 떡하니 외제차를 세워두고 기다리는 꼴이라니. 게다가 대체 저 위아래로 깔맞춘 새하얀 수트는 뭐란 말인가. 물론 다니엘의 독보적인 피지컬 탓에 그것 마저 모델같아 보이긴 했지만 말이다. 모르는 이들은 저마다 돌아보며 와-와- 감탄을 내뱉었다. 다니엘의 평소 모습을 아는 진영만이 얼굴이 화끈거려 그대로 뒤를 돌아 학교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진영아!"


다니엘이 저렇게 휘적휘적 손까지 흔들며 저를 부르지 않았다면 말이다. 주변에 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단번에 진영에게 집중됐다.


"...시발 존나 쪽팔려..."


들리지 않게 중얼거리며 진영은 코에 내려 앉은 안경을 고쳐 썼다. 다니엘은 실실 웃으며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몸을 차에 기댄 채 긴 다리를 척 꼬았다. 저 형 지금 일부러 저러는 거지? 나 쪽팔리라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마냥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억지로 옮기는데 갑자기 뒤에서 퍽- 하고 머리를 때리는 바람에 쓰고 있던 안경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눈치없는 애들아, 지금은 아니야. 진영이 숙여진 고개를 들지 못하고 그대로 눈만 치켜 들어 힐끗 다니엘의 표정을 살폈다. 역시나 다니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야, 배진영. 안 들리냐? 존나게 불렀잖아 뒤에서."
"니가 갈 데가 어딨다고 그렇게 꽁무니를 빼고 지랄이세요."


아그작. 한 녀석은 바닥에 떨어진 안경을 발로 밟고 또 다른 두 녀석은 진영의 양 옆에 붙어 툭툭 머리를 건들였다. 저거 어제 산 안경인데, 또 밟니? 내가 너희 때문에 천원짜리 안경 테만 사잖아....


다시 힐끗 눈치를 살피니 다니엘은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삐딱한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평소에 웬만해서는 잘 피지 않는 담배다. 눈이 마주치자 진영은 어색하게 헤- 하고 웃어 보였다.


"쳐 웃냐 지금?"
"미친놈. 얘 또 시작이네. 야, 잡고 있어 봐."


안경을 밟았던 그 녀석이 손을 들어 뺨을 치려하는 걸 슬로우모션으로 지켜 보면서 진영은 천천히 생각했다. 앞으로의 순탄한 학교 생활을 위해서는 여기서 잠자코 맞아줘야 하는데, 그렇다고 다니엘 저 미친 형 앞에서 맞는 꼴을 보이면 학생이고 뭐고 눈이 뒤집혀 얘네 반 죽일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역시 가장 좋은 선택지는 지금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다니엘을 기다리는 거다.


턱-


학생의 팔목이 너무나 쉽게 다니엘에게 잡혀 버렸다. 여전히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선 다니엘은 존재 자체로 충분히 위압적이었다. 진영을 제외한 세 명의 학생은 갑작스런 다니엘의 등장에 자동 반사적으로 욕이 튀어나왔지만 이내 다니엘의 눈빛을 보고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다물었다. 적당히, 적당히, 응? 진영이 눈으로 신호를 보내건 말건 다니엘은 잡은 학생의 팔목을 놓지 않고 슥- 세 명을 훑었다.


"진영이 친구?"


세 명은 서로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그중 한 녀석이 순한 양이 되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진영의 어깨에 두른 손을 안마해주듯 주물거리면서.


"언제 집에 한 번 놀러와. 삼촌이 맛있는 거 해줄게."


다니엘은 가운데 선 진영을 잡아 끌어 교문 쪽으로 먼저 밀고는 마지막으로 세 명을 주욱 훑었다. 이번에는 좀 더 냉랭한 시선으로.


"괴롭히는 나쁜 친구들은 빼고"


다니엘이 차에 타자마자 조수석에서 안전벨트를 매고 있던 진영이 기다렸다는 듯 쏘아붙였다.


"쟤네 학생이야. 학생 상대로 뭐해 유치하게."
"너도 학생이야. 쟤네가 너한테 하는 건 폭력이고."


오늘은 다니엘이 웬만해서는 그대로 넘어가지 않을 분위기다. 진영은 꾹 입을 다물었다. 집에 들어선 다니엘은 거칠게 수트 자켓을 벗고 냉장고를 열어 벌컥벌컥 물을 마셔댔다. 허리춤에 손을 얹고 물을 마시는 다니엘의 뒷모습을 보며 진영이 삐죽 입을 내민 채 거실 쇼파에 앉았다. 뒤돌아 혼자 화를 삭히던 다니엘은 도저히 안 되겠는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기며 진영의 앞에 와 섰다.


저를 올려다보는 까만 눈동자. 그 눈동자에 다니엘은 전부를 걸었다. 일종의 맹세였다. LA에서 어깨에 총을 맞고 피가 철철 흐르던 진영을 봤을 때, 진영이 없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것처럼 그렇게 전부를 그에게 걸었다.


"학교엔 왜 왔어?"
"담임이 부르더라. 너 학교에서 괴롭힘 당한다고."
"설마 그래서 날 걱정하는 거야? 그 까짓거 당해주는 거잖아-"
"시발, 그러니까 니가 왜."


평소에는 잘 쓰지 않던 욕이었다. 다니엘의 거친 말에 진영이 잠시 멈칫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피하지 않는 두 시선이 한참을 마주쳤다. 진영은 다니엘의 흥분이 잦아들기를 기다렸지만 여전히 그의 가슴팍은 격하게 오르락 내리락 거렸다.


"니가 왜 당해주는데."


진영이 쇼파에서 일어나 다니엘의 한쪽 뺨을 천천히 쓸었다. 마치 우는 아이를 어루고 달래듯. 어느새 자신의 턱밑까지 키가 자란 진영을 내려다보며 다니엘의 거칠던 숨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뭐가 문젠데- 왜 그래."


다니엘의 눈이 제 앞에 선 진영을 꿰뚫어버릴듯 혹은 반으로 쪼개어 버릴 듯 날카롭게 꽂혔다. 뭐로 달래야 돼, 이 형을. 형이 좋아할 만한 거... 뭐 있지? 골똘히 생각하던 진영이 눈을 반짝였다.


"키스해줄까?"


진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니엘이 뒷목을 끌어당겨 입술을 부딪혔다. 작은 입술이 다니엘의 입 속으로 쏙 들어와 혀를 엉겼다. 격정적으로 시작한 키스는 점점 속도를 늦춰 느릿하게 서로를 핥고 빨며 조용한 방에 야하고 질척한 소리만을 남겼다.


이상했다. 허구헌날 서로 잡아먹을 듯이 덤벼들어 하던 키스였는데 이건 온전히 혀의 감각과 입술의 감각만을 깨웠다. 다니엘은 아랫입술을 혀로 뭉근히 핥으며 눈을 떴다. 꼭 감은 진영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다니엘은 다시 눈을 감고 진영을 품으로 더욱 세게 당겼다. 말캉한 입술과 통통한 혀의 감각이 아찔할 정도로 좋았다.


"흐으...이상해...왜 그래 오늘"


품에 안긴채 입술을 뗀 진영이 감각을 음미하듯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려 제 앞에 놓인 다니엘의 얼굴을 살폈다. 눈이 마주치기 전에 쪽, 다니엘이 입술을 닿았다 떨어졌지만. 다니엘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


"오늘은 형한테 줄 마음이 들어?"
"줘? 뭘?"


순진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묻는 진영의 등을 제 쪽으로 당겨 꽉 끌어안은 다니엘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진영이 동.정."
"시발 미쳤나 진짜!!!!! 어쩐지 왠일로 진지하게 나가나 했다 내가!!!!"


귀며 목이며 손바닥이며 드러난 곳은 전부 시뻘겋게 달아올라서 빽 소리치는 진영의 머리를 가볍게 헝크러뜨리고 다니엘은 2층 방으로 올라갔다. 뒤에서 여전히 뭐라뭐라 진영이 욕하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탁- 


방 문이 닫히고 나서야 다니엘은 후우- 깊은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제 목을 더듬어 여전히 세차게 뛰고 있는 자신의 맥박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쿵-쿵-쿵-


요란한 소리였다. 어어, 지금 이거. 다니엘은 주르륵 문에 기대 미끄러지듯 앉아버렸다. 멍하게 천장을 올려다보던 다니엘의 귀가 순간 화르륵 붉어졌다.


어어, 그러니까 지금 이거.


바보같이 그 말만 반복하면서 다니엘이 눈을 깜빡였다. 3년만에 알아차린 자신의 감정이었다. 정말 완벽하게 배진영은, 다니엘의 전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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녤딥 전력 주제 'Nothing without you'로 참여했습니다.

@nielxdeep

아무도 기다리지 않으시겠지만 BOSS ep.1에서 말씀드렸듯이 ep.3, ep.4로 언제든 또 찾아올 수 있어요.

개인적으로 제가 좋아하는 배경 설정과 캐릭터 설정이라!

과거에 돈밖에 모르던 냉혈한 다녤이

지켜주고 싶은 사람 진영이를 만나 변화되는 과정을 그려보고 싶었어요.

보잘것없는 제 글을 끝까지 읽어주시고 마음 주시고 댓글 주신 분들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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