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꽤나 웃긴 이야기들을 많이 했다. 가령 방금 내게 말한 생이 한 번뿐일 수도 있지 않냐는 물음 같은 것들. 말 그대로 웃겼다. 나만 그의 과거 생들을 기억하고 추억하며 죄책감에 사로잡혀 그를 갈망한다는 사실이 더 없이 비참하고 씁쓸했다. 그 많은 것들을 공유해왔는데 왜 너만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아니, 이건 세상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러하니 내가 이해해야겠지. 그래, 결국엔 내가 이해해야할 문제인 거야. 나도 이제 겁난다. 정말로 내가 미친 게 아닐지. 내가 그간 찾아온 진리가 정말로 진리일지. 이젠 내가 가져온 과거의 기억들조차 진짜인지 모르겠어. 애초에 이 세상에 진짜라는 게 있는 걸까? 왜 우리가 늘상 이야기해온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관찰자 효과처럼 결국엔 세상이 나의 망막에 인식되어 뇌로 들어와 재해석 하는 것이라면 내 밖의 너는 진짜로 존재하는 게 맞을까? 왜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하기에 존재한다는 허무한 말을 했을까? 왜 시간은 상대적인 것일까. 왜 세상은 그러한 것들을 모르는 채로 살아가는 걸까. 왜 우리는 무지를 택하며 매일매일을 쳇바퀴 돌듯이 의심 한번 하지 않으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살아가는 걸까. 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걸까.

 이러한 생각들에 사로잡힐 때면 나는 밤잠을 못 이루는 스스로의 나약함에 치를 떨며 모두가 잠든 새벽에 홀로 동네를 뛰었다. 그래 하늘아. 너는 기억 못 하겠지. 네 이전 생의 이름도 하늘이었고 너를 처음 만난 곳도 이곳 공원 벤치라는 걸. 너는 언제쯤 기억하게 될까. 나는 언제쯤 이 외로움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제쯤 서로에게 닿게 될까. 그것이 정말 불가능한 일이라면 나는 이제 그만 너를 놓아주고 진리에 대한 집착도 그만 두어야 하는 걸까. 나도 더 이상은 이 지긋지긋한 고독 속에서 헤엄칠 만한 정신력이 더는 남아있질 않아. 너는 나를 사랑했지. 나도 너를 사랑했고. 그 속에서 서로에게 준 상처와 위로들은 결국 모든 걸 기억하는 나에게로만 짐 지어졌어. 나는 이제 지쳤어. 너를 찾아내는 것도 네 기억이 돌아오길 기도하는 것도 네가 나를 사랑하길 기다리는 것도.

 차가운 밤공기. 그 속에서 기다리는 전생의 나. 갑자기 사라진 너. 내가 내린 결론은 또 기다림. 얌전히 이곳 공원 벤치에 앉아 너를 기다리면 네가 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지. 아니야, 아니. 그게 믿음이었는지도 잘 모르겠어. 그저 그 당시에 너를 처음 만난 이곳에서 네가 그런 처참한 몰골을 하고 그 생에서의 내 형과 비슷한 몰골로 죽어가는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올랐지. 어쩌면 이곳이 네 유일한 숨구멍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몰라. 흔히들 알듯이 자해는 살기 위해 하는 짓이었으니까. 숨막혀하는 숨통을 조금이라도 트이게 하기 위해 몸에 구멍을 내는 짓이나 다름 없었으니까. 처음부터 잘못된 거였을까. 내가 진리를 깨닫기 직전인 너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나마 내 상태가 좀 괜찮았을까? 나는 지금 전생의 네가 하던 짓을 반복하려고 해. 그 수많은 환생의 굴레에서 너를 만난 이후에 시작한 자살이었지만 그건 언제나 너를 뒤따라가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었으니까. 버릇이 들었는지도 몰라. 이젠 죽음이 두렵지 않고 기억을 잊고 살아가게 만들어달라는 내 기도에 응답할 신도 없을 거라는 걸 알아. 결국엔 내 스스로가 해결해야할 문제인거야. 믿음이 현실화가 되는 이 세계에서 나는 나에 관한 가장 나약한 믿음을 믿어버렸고 이 모든 생각들도 결국엔 나의 뿌리깊은 고정관념이니까. 나는 이제 너에게서 도망치려고 해. 제발 다음 생에선 너에 대한 기억이 사라진 채였으면 좋겠어. 또 너를 갈망하기 시작하면 넌 또 나에게 끌려올테니까. 더 이상은 싫어.

 차가운 느낌이 살갗에 닿아 온전히 느껴지기도 전에 뜨거운 불길이 치솟듯 팔의 감각을 앗아간다. 이 상황에서 나는 그 당시의 너를 떠올린다. 홀로 죽어가는 너와, 너와 많이 닮았던 전생의 핏줄과 그 모든 너를 사랑했던 나의 역겨움을. 그래, 어쩌면 나는 네가 기억하길 원치 않는 걸수도 있어. 몇 생애동안 너에게 집착한 나를 보며 네가 얼마나 나를 역겨워할지.

 첫번째 생에서 보았던 너의 총명한 말들을 떠올린다.

 ‘결국엔 네 믿음 때문에 발생한 고통이야.’

 ‘그리고 고통은 언제나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지.’

 ‘네가 만약 어둠이라면 그건 빛을 깨닫기 위한 네 선택이었을 거야.’

 ‘그래, 어쩌면 너를 만난 건 진리를 깨닫기 위한 내 욕망에 반응한 신의 선택이었을지도 몰라.’

 ‘너는 오해하고 있어. 신은 너의 외부에 있는 존재가 아니야. 우리의 내부에 있는 의식 그 자체거든.’

 ‘네가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다면 너의 그 갈망도 이루어질 거야.’

 ‘괜찮아. 우린 기억해내고 있어.’


*


불안했다. 별안간 불안함에 눈이 떠졌다. 밖은 여전히 어두웠고 내 옆에 있어야할 지훈이는 보이지 않았다. 가끔 잠을 못 이룰 때면 그는 늘 바람을 쐬러 갔기에 이렇게까지 불안할 일도 없어야 하지만 오늘따라 심하게 불안했다. 불안함에 못 이긴 나는 결국 현관문을 열어 그가 있을 법한 곳으로 달려갔다.

 차가운 밤공기. 내 폐부를 헤집는 존재성. 그 속에서 들려온 비명과 안에서부터 터져나오는 불안감에 심장이 요동쳤다.

 “어?”

 붉게 적셔진 지면과 얌전히 눈을 감은 김지훈의 얼굴과 그 모든 장면과 충격들 사이로 이질적으로 익숙한 감각이 스쳐간다. 이 장면 지나치게 익숙하다.

 초여름의 밤공기. 그 속에서 흐려지던 의식. 정신을 놓기 직전에 맡은 방금 감은 듯한 샴푸향. 그와 함께 스쳐지나가는 여러 상들. 그와 함께 떠오른 선명한 인물과 지금의 김지훈에게서 느껴지는 친밀감. 설마…

 “…시온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글을 읽으면 새로운 세상을 직접 경험하는 것이 좋아서 경험하고 싶은 세상을 글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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