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12:46

벌써 보름이 지났다니? 거기다 일 년의 반이 훌쩍 가버렸다니? 믿을 수가 없다.

나의 다정함이 발휘될 수 있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리는 모양이다. 지금은 아무것도 발휘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상태다. 머리가 멍하고 뇌리는 안개처럼 뿌연 느낌이다. 약을 먹었다.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엄마에게 그런 얘기를 했다. 내가 늘 얘기하는 말처럼, 용서는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해'주는' 것이라고. 그래서 난 나를 평생 힘들게 한 사람을 용서해'주지'않을 거라고. 그게 내가 그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벌이라고. 또한, 나는 아마 어쩌면 일생토록 신앙이란 건 가질 수 없을 거라고.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교회를 다니면서 했던 찬양과 기도와 예배드림은 모두 가식이었다고. 난 항상 그를 원망해왔다고. 태어나길 원치 않은 삶을 겨우 살아가고 있는데, 날 태어나게 한 존재가 어찌 원망스럽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그래서 나는 예수님이니 하나님이니, 그런 존재를 사랑할 수 없다고. 내가 나 자신과 나의 삶을 진정으로 긍정하고 사랑할 수 있기 전까지는, 어머니 당신이 원하는 신앙 같은 건 가질 수도 없을 뿐더러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한다고.

아버지와 교회(신앙), 이 두 가지가 지금까지의 내 삶에서 가장 큰 고통이었다고. 이제는 고통 없이 살아나가고 싶다고. 부디 '잘' 살아보고 싶다고.

혼자 있고 싶어서, 대충 씻고 방에 들어와 일기를 쓴다. 읽던 책이나 마저 펼치고 자야겠다. 아, 술 좀 마셨다고 가슴이 또 덧났다. 귀찮지만 계속 따끔거리고 가려운 게 싫어서 약을 발랐다. 이놈의 가슴은 평생 이렇게 날 괴롭히려나.

자고 일어나면 꼭, 글을 써야지.


새벽 1:00

때로는 내 우울이 좋다. 우울함이 없는 나, 완벽히 사라진 나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빛과 그림자가 늘 함께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내 기민한 우울함, 가끔은 그것이 그리도 어여쁘지 않을 수 없다. 오랫동안 버겁게 느껴왔지만 그럼에도 내 온몸과 영혼에 굳은살을 새겨준, 비정하고도 고마운 족쇄 같다.

한 번도 조금도 우울하지 않은 나를 본 적이 없다. 나는 그런 '나'를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두렵기도 하다. 이미 나는 오랫동안 이런 나에 익숙해져있다. 변화는 좋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좋은 것만은 아닌 법이다. 익숙치 않은 나를, 달라진 나를 '나'로서 받아들이고 긍정할 수 있을까. 우울한 나에 익숙해진 내가 우울하지 않은 '나'를 납득할 수 있을까. 나는 계속 글을 써나갈 수 있을까. 예민함과 우울과 깊은 몽상이 없는 내가, 과연? 그런 생각도 든다.


오후 2:57

우울한 '나'를 버리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나는 어떤 '나'이든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고 믿어야만 한다.


오후 3:58

지난번 썼던 글의 후반부를 고쳐쓰는 작업을 했다. 더 풍성한 표현과 정확한 묘사를 위해 집중했다.


오후 4:24

책을 읽는다. 나는 평가받는 것이 싫다. 두렵다. 일이든 인간관계든 무엇이든. 그렇다면 내가 평가'하는' 것은? 내가 평가하고 목소리 내어 항의하는 것으로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고 있으면서. 그런 딜레마, 나의 아이러니가 나를 더 괴롭게 느끼도록 한다.


오후 5:40

책을 읽다가 어느 한 부분에서, 시몬 베유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에서 나의 잘못이 생각났다. 지난 토요일, 언니에게 카톡으로 화풀이를 했던 게 후회된다. 그리고 엄마에게 나의 고통과 부정적 감정들을 모조리 쏟아낸 것도 후회한다. 고통의 악순환. 나의 고통을 알아달라고 같은 피해자였던 사람에게 그래서는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가해자를 두고 서로 갉아먹기를 그만두어야만 한다. 그리고 나는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오후 6:22

여기에 무슨 글을 올려야하나 고민이다. 일단 예약은 해둠... 아 쓰던 거 많은데 또 딴 거 쓰고 싶음 미치겠다 ㅋㅋㅋㅋ


오후 8:17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를 다 읽었다. 밥을 먹어야겠다.


오후 11:11

또 하루가 간다. 오늘은 모든 게 지리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날이었다. 지속하기엔 위험하지만, 편안한 권태 속에 온몸을 푸욱 담그고만 있었다.



잠잠할 날 없는 在들에 평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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