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혈, 폭력, 죽음 등, 트리거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감상에 참고 부탁드립니다.*



너를 묻고 달아나던 그날 밤은 비가 내렸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난 분명 너를 사랑했고, 너뿐이었고, 여전히 너밖에 없을 터인데.


“이번 일이 실패하면 나를 죽이는 건 언니가 되어야 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도록 머리에 총을 겨누고. 아무도 없는 바다에. 시맨트를 채워 너를 묻고, 가라앉히라고. 아무도 모를 정도로 먼바다에 버리라고.


“그런 소리 하지 마.”


나는 그런거 못해.

아니. 해야 해.

싫어.

그럼 내가 다른 사람 손에 죽기를 바라?

다른 사람이 네 목을 조르고,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고, 온몸을 분리해 서로 다른 산속에 묻기를 바라냐면서. 네가 소리쳤다. 그건 싫어. 어린애처럼 울면서 내뱉은 내 대답에 너는 웃었다. 나도 언니밖에 없어.


“만약이잖아. 아주 만약.”

“...”

“죽을 일 없어. 안 죽을거야.”

“그러면 만약에.”

“응.”


만약에. 네가 그리워지면 나는 무엇을 껴안고 울어야 할까.


울음을 그치고 너와 함께 옥상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태웠다. 별을 올려다볼 기력도 없어서 차마 꺼지지 않은 골목 가로등 불빛만 바라봤었다.


“많지. 비와 바다를 껴안고 울어줘.”


네가 담담히 말했었다.

그도 그럴게. 너는 비 오는 날과 바다를 좋아했으니까.

사채업자. 사기꾼. 밀수업자 주제에. 그런 시적인 소리 하지 말라 욕하니 너는 웃음을 터뜨렸다. 곧바로 담배를 땅바닥에 던지곤 내게 입 맞춘 네 혓바닥에서는 쓴 모래 맛이 났다.


일이 실패하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엔 없었다. 하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오랫동안 발 담근 조직폭력배. 그리고 그 조직을 이끄는 큰언니. 어리고 갈 곳 없는 우리를 거둬 준 고마운 분. 여차하면 엄마라 불러도 좋다 하셨던 그분.

너는 그분을 죽인다 했다.


“큰언니가 그랬어. 언니랑 나를 버릴 거래.”


대체 왜, 라고 물으니 너는 대답했다.


“뭐. 이 바닥에서 토사구팽이야 흔하지? 그냥. 거둬들인 애들이 너무 많아져서 돈이 부족하다 하더라. 언니랑 나는 그나마 젊고, 인물도 좋으니까. 팔아넘길 거래.”

“정말이야?”


너는 대답 대신 몰래 훔쳐 온 서류 2장을 내밀었다. 너와 내 사진이 붙은 위조 신분증이었다. 우습게도, 사람 팔아본 적이 있어서 이 신분증이 인신매매할 때 쓰인다는 것쯤은 바로 알 수 있었다.


“큰언니를 죽이고 같이 도망갈 거야.”

“안 돼.”

“다른 방법 있어?”


그냥 도망치는 방법도 있지 않냐고 물었다. 하지만 내가 말 해 놓고 기가 막혀서 웃었다. 그 여자 눈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정말 네가 말 한 방법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죽이고 먼저 도망쳐 있을게. 뒤따라 와. 그 바닷가 알지? 배도 한 척 구해 놓을게. 해가 지면 떠나자.”


언젠가 너와 함께 갔던 바닷가가 있었다. 조용하고. 한적하고. 밤이 찾아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 그때는 그저 운치 좋다며 넘겼던 장소가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다.


“내가 어떻게 그래.”


차라리 내가 큰언니를 죽이겠다 했다. 내가 죽일 테니, 죽이고 같이 달아나자고. 하지만 너는 그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저었다.

그게 마지막일 줄 알았다면 나는 네가 건네주는 술 따위 마시지 않았을 거다.

끝맛이 좀 쓰다는 걸 눈치챘을 땐 이미 내 몸 곳곳에 퍼진 수면제가 폭죽 터지듯 터진 뒤였다.

너는 나를 너무 잘 알아서.

이 대화가 끝나지 않을 논쟁으로 이어질 걸 알고 있었구나.

흐려지는 시야 너머로 네가 달아났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이미 큰언니는 죽은 뒤였다. 사무실에서 목에 칼을 찔렸다 했다. 그의 시신을 내려다보는 것보다 더 괴로웠던 건, 네가 차마 건물 밖으로 발도 디뎌보지 못한 채 잡혔다는 소식을 듣는 거였다.

도망친다더니. 바닷가에서 기다리겠다더니. 다른 조직원들에게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된 너는 짐짝처럼 지하실로 끌려갔다.

그때 당시. 내 조직에는 큰언니의 뒤를 따르던 오른팔이 한 명 있었다. 욕심 많고 잔인한 그 여자. 시마라고 불리는 그 여자는 큰언니와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친구를 잃은 분노와 슬픔인 건지. 아니면 단순히 괴롭힐 대상이 필요했던 건지. 그는 결코 너를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매일같이 찾아와 네 살을 찢고 불로 지졌다. 누구와 함께 저지른 짓인지 자백을 받아낼 작정인 거다.

내가 나서서 다 이야기할까. 차라리 둘이 함께 죽을까. 지하실 입구에 주저앉아 귀를 틀어막아도 선명히 들리는 네 비명에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날 밤은. 그 비명에 견디다 못한 내가 남몰래 너를 빼내기 위해 지하실로 찾아온 밤이었다. 손이 뒤로 묶인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너를 껴안아 앉혀주었는데도 너는 금세 다시 고꾸라졌다. 너덜너덜한 네 몸을 볼 용기도 없어서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안 돼. 일어나. 빨리.”


휘제.


손목을 깊게 파고 들어간 밧줄을 자르는데 네가 색색거리는 숨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가만히 귀를 대고 듣자 더욱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죽여줘.


고개를 저었다. 일말의 희망이라도 잡고 싶었다. 숨을 쉬면 그다음은 어떻게든 될 테니까.


“살 수 있어. 살 거야. 나랑 같이 나가서. 같이 나가서 병원부터 가자. 치료받고. 같이 가면 돼.”


나...


가만히 듣던 너는 손을 뻗더니 그대로 네 목을 졸랐다. 제대로 힘도 주지 못한 채 억지로 목을 움켜쥐었다. 높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너무 아파.


어쩌다가 여기까지 와 버렸을까.

세상의 끝이 가까워진다.

나의 세상이 끝나간다.


미안해.


옷깃으로 네 얼굴을 감싸고 품에 안았다.

희미하게나마 느껴지던 네 숨결조차 멎어갔다.

시원하고 부드러워서 좋아한다 했던.

시트러스 향이 아예 사그라든다.


너를 차가운 바닥에 눕히고 지하실을 나섰다. 나가기 전, 겉옷을 벗어 네 얼굴과 상체를 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 묻는 조직원들에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아 내려가 보니 네가 죽어있었다고 말해주었다.

 

이 바닥에서 사람 한 명의 흔적을 지우는 건 어렵지 않다.

너를 묻으려 바다로 떠나는 길.

그 길에는 비가 내렸었다.


“무슨 안개가 이러냐.”


배를 몰던 시마가 잇새에 담배를 물고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 바다에는 끝도 없이 안개가 깔려있었다. 바다에 끼는 안개는 뭐라 부르더라. 잘 모르겠다. 분명 부르는 이름이 있을 텐데.


“눈에 안 띄고 좋네. 거기 좀 들어봐라.”


시마가 명령했다. 하지만 나는 굳어서 움직이지 못하고 멍하니 비만 맞았다. 보다 못한 시마가 혀를 차더니 네 몸뚱이를 바다에 던져넣었다. 그 모든 과정이 미쳐버릴 만큼 괴로워서 구역질이 치밀었다.


“배신자 한 명 처리했으니 조직도 더 깨끗해지겠지.”


그가 갑판 위에 서서 담배를 마저 태웠다. 나는 품속에 손을 찔러넣고 그의 뒤에 섰다.


“휘제야. 잘했다.”


건조하고도 먹먹한 칭찬. 그는 끝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왕 내가 대가리 먹은 거, 바로 밑은 네가...”


뒷말은 더 듣기도 싫어서 그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었다. 망설임 따위는 네가 죽던 그날, 그 지하실에 버리고 왔다.


아무도 없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 바다 위에서 나는 두 사람을 죽였다.


비가 갑판 위에 흩어진 피를 씻겨주었다.

그 비를 맞으며 생각했다.


이렇게 조급할 수밖에 없었나? 시간이 없긴 했지. 너와 내가 팔려가려면 남은 시간이 고작 이틀밖에 없긴 했어. 아니. 이틀이나 있었어. 정말 이게 최선이야?

정말 이게 최선이었어?


이게 뭐야.

남은 건 결국 내 목숨 하나밖에 없잖아.


고개를 젖히고 울었다.

바다 한가운데서 맞는 비에서는 짠맛이 났다.


정신을 차린 뒤에는 탄피를 주워 주머니에 넣고 시체를 그물로 감았다. 바다에 빠뜨린 뒤, 배에 시동을 걸었다. 프로펠러가 돌아가며 그물과 시체를 한 번에 삼켰다. 그 끔찍한 소리에 귀를 막고 뭍으로 돌아왔다. 핏자국이 마치 내가 돌아온 길을 표시하듯 수면 위로 길게 늘어졌다.


그렇게 시마는 죽었다.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조폭이라 부검도, 제대로 된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그저 그런 사고로 막을 내렸다. 시체를 매장하려다가 그물에 발이 걸려 빨려 들어갔다고. 감히 누가 말할 수 있었겠어. 모두가 입을 다문 채 조용히 지나가길 바랐다.

우두머리에 2인자까지 죽고 나자 조직은 혼란에 빠졌다. 나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동안 모아온 자금과 세력을 바탕으로 손쉽게 1인자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나를 제외하면 그 자리를 차지할 인재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한때는 그 여자의 것이었던 가죽 의자에 앉아 모두의 인사를 받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이 바닥은 뭐랄까. 잘못된 걸 알면서도 벗어날 수가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바로 이쪽 세계로 뛰어들었지만 난 단 한번도 내가 하는 일에 보람을 느낀 적이 없다. 오히려 가슴 한쪽에 죄책감이 서린다. 젊은 놈들이야 몸에 문신을 새기고 담배에 마약에, 온갖 것에 손대며 허세를 부린다. 나도 한때는 그랬었다. 그런데 이 나이 먹고 나니 그마저도 우스웠다. 잘못된 것을 삼킨 듯, 명치와 목구멍 사이 어딘가가 꽉 막힌 채 죽을 날만 기다릴 뿐이다.


시간은.

네 말마따나 마치 끊임없이 변하는 바다 같아서.

눈 한 번 깜빡하는 사이에도 그 모습을 바꿔 버린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변했다.


나이에 맞게 머리를 다듬었고, 옷차림도 달리했다. 이전엔 문신을 드러내고 싶어서 안달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눈에 튈까 봐 가리고 다닌다. 이쪽 일하면서 인상과 개성이 너무 강한 것도 위험하다. 자칫 걸리면 눈에 띄기 쉬우니까. 너와 함께 새긴 목덜미 파도 문신도 이젠 목폴라 티셔츠로 가렸다.

 

사람은 그렇게 무뎌진다.

명치와 목구멍 사이 그 꽉 막힌 통증은 더욱 심해졌지만 이젠 연륜이라는 게 생겨 아픔을 참는 법도 익혔다.


사람은 그렇게 무뎌진다.

무엇을 들어도 놀라지 않을 정도로.


“여기 사장님이 사람을 그렇게 잘 찾는다며.”


그러니까. 인상 더러운 여자가 사람 찾아 죽여달라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 정도야.

이젠 평범하게 느껴질 정도다.


“내 돈 들고 튄 앤데.”


여자는 이쪽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그런 조폭이었다. 설이라고 불리는 이 여자는 어디 재벌가 뒤를 봐 주고 있다 했다. 돈도 많은 양반이 몰래 이런 흥신소까지 찾아올 정도면 어지간히 급했나 보다. 아니면 너무 사적인 일이라 쪽팔린 건지.

그가 양복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건넸다. 이번엔 또 어떤 가여운 여자가 목숨줄 끊길 위험에 처했을까. 어김없이 사기꾼에, 상대방 등쳐먹고 돈 빼먹는 여자겠지. 동정하는 마음 반, 별 대수롭지 않은 마음 반으로 사진을 확인했다.

사진을 본 나는 얼어붙었다.

무뎌졌던 감정에 금이 갔다.

몰래 찍었을 게 분명한 사진. 20대로 보이는 여자가 바 한쪽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제법 선명한 사진 속 그 여자는 너와 닮아 있었다. 왼쪽 볼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흉터가 있었던 너와 달리, 그 여자의 얼굴은 깨끗하다는 점만 빼면 차이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쇄골까지 오는 갈색 머리카락. 은근한 속쌍꺼풀. 이목구비 위치까지. 한동안 말도 못하고 사진만 들여다보니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는 여자입니까?”

“아닙니다. 젊어 보여서요.”

“네. 올해 26살. 이름은 김유진이라 했는데 본명이 맞는지도 모르겠어. 술집에서 만났는데. 나한테 들이대길래 나도 받아줬죠. 근데 이게 술에 약 타더니 내 돈을 아주 다 털어서...”


그의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 젊은 시절의 너와 너무 닮았다. 26살. 네 피가 조금이라도 섞인 사람일까? 그게 아니면 말이 안 되는데.


“저기요. 듣고 있습니까?”

“아. 죄송합니다. 방금 뭐라고...”

“내 돈만 찾으면 저 여자는 죽여도 상관없다고요.”

“네?”


이런 곳까지 기어 온 사람이 하는 말이야 뻔한데 나는 뭘 기대했던 걸까. 습관처럼 손톱 거스러미를 뜯었다.


“알아보니까 상습 사기꾼이더만. 주변에서 당한 사람만 한둘이 아니야.”


젊은 여자 한 명 잡지 못해 안절부절 못하는 그가 한심해서 나도 모르게 조소가 나왔다.


“그렇게까지... 차라리 본인이 직접 하세요. 그럴 거면.”

“아니 뭐... 그건 좀 번거롭고...”


번거로운 게 아니라 민망한가 보다. 나 정도 되는 여자가, 고작 애새끼 하나한테 돈 수억 뜯겼는데 직접 발품 팔고 다녀야 한다고 말하기 쪽팔린 거겠지. 그 뻔한 속내와 염치없는 자존심에 혀를 내둘렀다.


“아무튼. 처리해주시는 거 맞죠?”


그가 화제를 돌렸다. 사진 한 장 보고 거절하기에도 우스우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죠.”


그는 웃으며 돌아갔다. 계약금의 일부로 놓고 간 현금 뭉치에서는 그 특유의 비린내가 났다. 구역질이 나서 손을 내젓고 직원들에게 알아서 입금해 놓으라 명했다.

원래 이런 자질구레한 일은 신입 조직원들이 맡아서 일한다. 난 그저 돈을 받고, 그 돈으로 사업이나 벌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가 두고 간 그 사진 한 장이 뭐라고 나는 밤을 꼬박 새워 가며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길에서 마주치면 착각할 정도로 닮은 외모. 네가 살아있다는 건 말이 안 되는데. 설령 어디 영화나 소설에서처럼 살아있다 해도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나마저도 나이 앞자리가 바뀌고 주름이 늘어갔는데 네가 늙지 않았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나.


“왜 하필...”


사진을 내려 놓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너무 아파.

색색거리던 그 목소리가 속삭임처럼 귓가에 맴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고 속에 든 모든 걸 게워냈다.

찬물로 세수와 양치를 한 뒤 거울을 바라봤다. 무엇을 해도 미쳐버릴 지경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 보는 게 낫겠지. 세면대 위로 주먹을 쥐었다. 숨결이 떨린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간 눈앞에 네가 아른거려서 광증에 걸릴 것만 같았다.

날이 밝자마자 나는 그 여자애에 대해 알아봤다. 혹시라도 네 피가 섞였을까 봐. 그 여자애도 제법 나이가 있으니 네 딸이라는 건 말도 안 되고, 설령 있었다 해도 내가 모를 리 없을 테니까. 적어도 동생이나 친인척이지 않을까. 하지만 그 여자애의 무엇을 뒤져도 네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이게 말이 되나? 저렇게 닮았는데 어떤 관련도 없다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평생 후회할 결론에 도달한 거다.

만나보자.

일단 직접 만나 봐야 알 것 같아.

그 여자애를 찾기로 되어 있던 조직원들에게 명했다. 이번 일은 내가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도망친 젊은 여자 한 명 잡아 오는 것 정도야 별일은 아니었기에 조직원들은 그저 어깨만 한 번 으쓱 하고 말았다. 뜻대로 하세요. 그 말이 떨어진 직후, 나는 10여 년 전 네가 사 준 군청색 머플러를 두르고 길을 나섰다.

그 여자애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람 흔적 찾는 것쯤은 도가 텄으니. 수소문 몇 번 하고, 뒷조사 몇 번 하자 그 여자애가 일하는 술집이 나왔다. 다 무너져가는 지하 와인바였다. 사장은 무신경한 탓에 가게는 내팽개치고 놀러 다니기 바쁘다 했다. 그나마 단골이 몇 명 있어 겨우 굴러가는 그런 술집이었다.


“어서 오세요.”


날이 추운데도 쓰레기 냄새가 진동하는 계단을 내려가 오래된 유리문을 여니 녹슨 풍경이 울렸다. 출입구 맞은편에 서서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그 젊은 여자애는, 돈 들고 튄 도망자치고는 제법 여유로워 보였다.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물고 그 여자애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머플러와 코트를 벗어두고 바에 앉으니 그 여자애는 닦던 잔을 내려놓고 살풋 눈웃음을 지었다.


“주문하시겠어요?”


그 눈웃음과 목소리마저도 너와 똑 닮아 있었다. 하마터면 그 여자애의 갈색 머리카락을 보고 눈물이 터질 뻔했다.


하필 내 앞에.

하필 너를 빼닮은 사람이 나타난 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못다 한 사랑이라도 미련 없이 하고 가라는 건지.

아니면 속죄라도 하라는 건지.


머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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