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을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찬희는 여태 들어와 본 적 없는 강녕전 안 깊숙한 곳에 홀로 앉은 광훤을 찾아왔다. 그 누구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공간에.

 

단둘밖에 없는 자리에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은 날이 선 광훤의 모습에 결국, 안희를 떠올린 찬희는 아려오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전하께옵서, 미천한 소신에게 하명하실 윤지가 있으시온지요.”

 

어딘가 비꼬는 말투와 끝끝내 허리를 펴지 않고, 저를 마주 보려 하지 않은 찬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광훤은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나 찬희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군데군데 까맣게 검버섯이 피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자신을 손을 내밀어 뽀얗고 곱게 모인 두 손을 붙잡았다.

 

예를 갖추면서도 보고 싶지 않은 임금, 자신을 반대하는 조부의 면을 피하려 고개를 숙였던 찬희는 제 시야로 들어온 광훤의 손에, 자신의 손에 닿는 따스한 온기에 혼란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미안하오. 아니, 미안하구나, 아가.”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린 찬희를 향해 광훤의 사죄가 흘러나왔다. 임금이 신하에게 먼저 사죄를 한다는 것이, 아니. 군왕이 잘잘못을 가르기도 전에 사죄의 말을 먼저 한다는 것은 혼란에 빠져있는 찬희를 더욱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끝에 붙은 말은 찬희의 머리에 찬물을 퍼부은 듯, 지금 이 자리에 자신을 서게 만든 것이 그저 신하로서 부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과인, 아니지. 내가, 내가 너희를 허락하였음에도 그 말을 물리게 하였구나.”

 

힘이 빠지고, 지쳐버린 노쇠함이 느껴지는 목소리. 대전을 호령하던 임금의 모습이 아닌, 슬픔에 가득 찬 노인의 모습이 찬희의 가슴에 얹어진 무게에 돌을 얹었다.

 

“수많은 필부가 누릴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을 보기에도 짧은 삶일진대.”

 

회한과 슬픔이 가득 잠긴 목소리가 뱉는 독백은, 찬희의 가슴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 삶 속에서. 나는 벌써 몇 번이나 가족을 떠나보내야 했는지 모르겠구나.”

 

 

찬희의 가슴에 스며드는 슬픔이 느껴지는 목소리. 군왕의 앞이기에, 무례를 알면서도 찬희는 허리를 펴고서 광훤을 마주 봤다.

 

지금 광훤은 임금이 신하에게 하는 말이 아닌, 자신의 가족에게만 털어놓을 수 있는 슬픈 가족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것이 비록 제 착각이라 할지 몰라도 자신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엮인 울타리 안으로 넣어준 것처럼 느껴져서.

 

그리고 그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광훤은 감싸 잡은 찬희의 손을 쓸어내리고, 토닥이며 걸걸한 목소리에 울음을 담았다.

 

“내 이리 질기디질긴 목숨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터. 허니 이 목숨을 그 아이를 위해 남김없이 태울 것이니라. 하나, 그것이 그 아이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길이 되지 않을 것이 자명할지니.”

 

잘게 떨리는 광훤의 음성에, 찬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아이에게는 지금껏 겪지 못한 고난의 길을 여는 것과 진배없겠지.”

 

찬희는 제 손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는 광훤의 손을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들어 얼굴을 마주했다.

 

마주 보지는 않고 있지만, 일그러진 것만 보아도 느껴지는 지독한 아픔과 슬픔.

 

“내 욕심으로 너희를 위한 길이라며 떼어놓았어야만 하나. 이것만은 약조하마.”

 

고개를 들어 찬희를 마주 본 광훤의 눈은 촉촉하다는 말이 부족할 만큼 젖어있었다. 어쩌면, 곧 눈물이 흘러내릴지도 모를 정도로.

 

“내 너만큼은. 아가, 너만큼은 꼭 지켜주마. 앞으로 모진 일을 겪을 이 조정에서, 내 온 힘을 다해 너 하나만큼은 꼭.”

 

노쇠한 음성이 울먹이는 소리에, 찬희의 가슴에 채 가시지 않았던 원망의 한 톨이 사그라들었다.

 

“전하, 소신은 전하의 신하이옵니다. 어찌 신하가 임금의 비호 아래만 살 수 있겠사옵니까?”

 

“아니다, 아니다 아가. 너는 내 신하가 아니야.”

 

광훤은 애써 마음을 다잡은 찬희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내 비록, 생전에 너를 정식으로 맞이할 수는 없을 것이나, 너는 이미 내가 허락한 안희의 배필이고, 내 손주 며느리이니라. 해서, 너 또한 내가 마음으로 품어야 할 귀한 아이인 것을.”

 

광훤의 말에 찬희의 붉어진 눈시울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그럼에도 찬희의 머리 한편에 자리 잡은 의문은 떠나지 않았다.

 

정식으로 혼례를 치르지 못한 나까지 마음으로 품어야 할 귀한 아이라 하시면서, 왜 저리 아픈 선택을 하신 걸까?

 

“내 안희에게 종용한 이 길은. 무척이나 힘들고, 어쩌면 그 목숨조차 구명하기 힘든 천 길 낭떠러지보다 더 한 길이 될 테지. 한데,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그 아이를 내 후계로, 이 나라의 임금으로 만들어야 한다.”

 

무례하다며 어쩌면 답을 해주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찬희는 광훤이 자신에게는 그 답을 해주리라 믿었다.

 

“전하, 감히 여쭙겠나이다. 어찌하여 그리 힘들고 고된 길이라는 것을 아시면서, 이리 성심에 깊은 시름을 앓으시면서도 공주를 후계로 삼으려 하시는 것이옵니까?”

 

찬희의 물음은 광훤의 가슴을 찔렀다. 이미 주아에게 얼추 들어서 알고 있는 일이지만, 광훤에게 확답을 듣고 싶었다. 그 대답을 들을 자격은 이미 광훤이 제게 주었다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광훤은 곧 깊은 한숨을 쉬고서 입을 열었다.

 

“그것을 이야기하자면. 꽤나 긴 이야기가 되겠구나. 오늘은 허락된 시간이 길지 않으니, 시간이 좀 흐른 후에 해도 괜찮겠느냐?”

 

언제나 조정에서, 그리고 중신들을 향해 날카롭고 매섭게 치켜뜨던 눈은 찬희를 향하자 온정과 애정이 깃들어 따스하기만 했다.

 

어쩌면 기약이 없을지도 모르는 대답이었지만, 자신을 향한 따스함을 믿으며 찬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광훤은 찬희가 예상하지 못했던, 자신이 할 수 있는 감사와 사죄를 담아 허리를 숙였고, 찬희가 당황하며 그것을 말리려 했지만 광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네가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을 내 잘 안다. 허니, 이 못나고 몹쓸 늙은이를 용서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으려 한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말씀을 거두어주시옵소서.”

 

광훤은 허리를 펴지 않고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어찌 그럴 수 있겠느냐. 어찌 너희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겠어. 나도 내가 못난 할아비라는 것을 잘 안다. 너한테도, 안희한테도.”

 

광훤은 천천히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찬희를 바라봤다.

 

“이 늙은이가 네게 더 몹쓸 사람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리 부탁하마. 이 못난 할아비 때문에 앞으로도 고된 길을 걸어가야 하는 그 아이의 곁을 네가 포기하지 말아다오.”

 

“전하.”

 

“네가 그 아이의 곁을 포기하지 않고, 그 아이를 기다려주기를. 너를 볼 낯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늙은이가 염치없이 부탁하고 싶구나.”

 

이제 아끼면서도 아껴서는 안 되는 저를 대신해서, 내려보면 천 길 낭떠러지와 다름없는 이 험한 길을 걸어야 하는 그 아이를, 멀리서나마 따스하게 봐주기를. 그 아이가 자욱한 안개만이 가득한 길에서도 제대로 방향을 찾아 나갈 수 있는 불빛이 되어주기를.

 

조정을 호령하며 군림하던 위엄이 넘치던 임금의 모습은 찬희의 머릿속에서 무뎌졌다. 적어도 지금, 제 앞에서 손녀의 옆을 포기하지 말아달라 간절히 바라는 연인의 조부는 작고 나약한 목소리로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고 있으니까.

GL러버💕 읽는 것에 환장하고 쓰는 것을 좋아해요🦊💕 onlyonedayS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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