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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는 카페 ADAGIO 앞에 차를 세웠다. 진혁의 집에 올 때면 어김없이 들르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이곳을 언제 마지막으로 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어머, 오랜만에 오셨네요!”


카페 사장은 커피 머신기 위에서 바쁘게 손을 움직이며 서희를 반겼다.


“잘 지내셨어요? 제가 그간 일이 좀 바빠서 못 왔어요.”

“많이 바쁘셨나 보다. 못 봬서 섭섭할 참이었어요. 요즘은 남자친구분도 통 안 오시더라고요.”

“남자 친구도 같이 바쁘네요.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서로 이렇게 바쁜지 모르겠어요.”

“다 잘되고 좋은 일 있으려고 그러죠.”


서희는 웃으며 그 말이 꼭 사실이었으면 좋겠다 했다.


“케냐 AA 두 잔 드리면 되죠? 한 잔은 더블 샷이고요?"

“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서희는 커피 주문을 마치고 다시 휴대폰을 확인했다. 설마, 아직 자나. 새 메시지 함에는 카드사에서 보낸 결제 내역뿐이었다.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치면서 휴대폰 화면을 보는 동안, 카페 안쪽에서 모자를 푹 눌러쓴 한 남자가 울리는 진동벨을 들고 계산대 쪽으로 걸어 나왔다. 남자는 커피 컵을 잡으려다 말고 계산대 앞에서 휴대폰을 만지는 서희를 유심히 보았다.


“어? 김서희!”


깜짝 놀라며 옆을 돌아본 서희는 이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승유 선배! 우리 어떻게 여기서 봐! 어머, 어머, 선배, 여기서 보니까 너무 반갑다.”

“후배님, 그건 제가 할 소리입니다.”


한때는 약속하지 않아도 만나지는 날이 많았는데, 지금은 밥 한번 먹자고 약속을 해놓고도 만나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선배 혼자 온 거야? 규승 선배랑 해록 선배는?”

“김서희, 우리 백 만년 만에 보는 거야. 네 눈앞에 있는 나에게만 집중해 줘, 제발.”

“어머, 미안, 미안, 내가 반가운 마음에 말이 앞섰어.”


서희는 승유 앞에서 손뼉을 쳤다가 손사래를 쳤다.


“김서희, 진짜 반갑다. 그동안 어찌 지냈어?”

“나야 뭐... 학원, 집, 학원, 집 했지. 시험 기간에는 학원, 학원이었고.”

“너 바쁘다는 이야기는 진혁이 통해 들었어. 진혁이가 그 이야기하면서 너 얼굴 보기 힘들어서 자기가 더 힘들다고 하던데, 뭐 전국의 돈은 김서희가 다 쓸어 모으는 거야?”


서희는 고개와 검지를 같이 흔들었다.


“선배, 바쁘다고 해서 돈을 쓸어 모으는 게 아니라는 걸 내가 보여줄게.”

“안 보여 줘도 돼. 그건 이미 내가 하고 있거든.”


두 사람은 동시에 소리내어 웃었다. 그간 뜸했던 시간이 어색함을 주지 못해 겸연쩍어하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레 한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진혁이는?”

“2주간 부산 출장 갔다가 오늘 왔어. 그래서 커피나 사서 가려고 여길 들른 건데, 세상에나, 여기서 우리 선배님을 딱 만났습니다.”


서희가 한쪽 눈을 깜빡이며 쌩긋 웃었다.


“그러니까 네 말인즉 진혁이의 커피가 아니었음 우린 못 만났을 사이란 것이냐.”

“무슨 그런 말씀을요. 커피 사러 오길 정말 잘했다, 이런 뜻이지요.”


승유는 테이블에 몸을 기대고서 어깨를 들썩였다.


“나도 이상하게 오늘 여기 오고 싶더라니. 아지트가 같으니 이런 점이 좋다!”


시간을 공유한 자들은 공간 또한 공유한다. 그래서 오늘 같은 우연한 만남이 때론 필연이 되기도 했다. 그러한 이유로 시간을 공유하는 일은 미구에 올 행운이면서 불운이었다.


“아, 맞다. 서희야, 네 생일에 선물로 랍스터 보낸 거 미안해. 너 갑각류 알레르기 있는 걸 내가 깜빡했어. 진짜 미안!”


승유가 합장한 손을 흔들자 서희는 마시려던 커피를 도로 내려놓았다.


“에이, 무슨 그런 말을... 잊지 않고 챙겨 준 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웠는데.”


승유는 허공에 손을 휘휘 저었다.


“서희야, 말도 마라. 나 그날 진혁이한테 무지하게 욕먹었어. 애 죽이려고 작정했냐고 욕 한 바가지 쏟더라고.”

"아이고 미안... 내가 대신 사과할게. 갑각류에 알레르기 있는 내가 나빴어.”


서희는 가볍게 자기 어깨를 때리는 척했다.


“선배, 다시 한번 정말 고마워. 선배 덕분에 그날 우리 잔치했잖아. 윤이랑 지훈 오빠는 한 점 먹을 때마다 선배 이름 부르면서 만세 삼창했어.”

“이런! 내가 고것들만 좋은 일 시켰네.”


그들은 어떻게 지내느냐, 여전히 아웅다웅하느냐고 승유가 묻자, 서희는 상록수가 따로 없다 하면서 오늘은 교무실에서 한 사람은 멱살을, 한 사람은 머리카락을 잡고 놓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둘도 참 특이해. 난 새삼 지훈이가 대단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승유는 중학교 시절부터 한 몸처럼 붙어 다닌 윤과 지훈이 지금까지 남녀관계로 이어지지 않는 점이 신기하다고 했고, 서희는 그 둘이 남녀관계로 이어지는 게 더 신기한 일이라고 했다.


“너 지금 윤이랑 같이 산다며? 지훈이도 네 집 근처로 이사했고.”

“응, 정신 차리고 보니 그리되어있더라고. 같이 지낸 지 삼 년 다 되어가.”

“삼 년 된 그 소식을, 난 얼마 전에 알았다. 해록이의 깃털처럼 가벼운 입 아니었으면 평생 모를 뻔했어.”


승유는 그만큼 서로가 격조했다며 아쉬워했다.


“일곱 명이 한 데 모인 게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해록이 조리사 자격증 땄을 때였나? 아니다. 규승이 일일드라마 조연으로 캐스팅되었을 때 축하한다고 보고, 진혁이가 너한테 청혼했을 때 본 게 마지막이었으니까... 그게 딱 삼 년 전이네.”


서희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규승 선배랑 해록 선배는 어떻게 지내?”


서희는 얼마 전에 규승이 음료 CF에 나오는 걸 보았다며 신기해했다.


“규승이는 요즘 캐스팅 요청이 꽤 있나 봐. 미대 다니다가 연기한다고 했을 때만 해도 드디어 얘가 미쳤구나 했는데, 지금 하는 걸 보면 연기 쪽이 규승이 적성이었던 거 같아. 얼굴이 점점 좋아져. 어쩔 땐 정말 연예인 같다니까. 그리고 우리 해록이는...”


승유는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록이 자식은 요리 빼곤 다 헛똑똑이야. 사고 안 치면 다행이지. 암튼 거기도 못지않은 상록수야. 특히 윤을 향한 일편단심은 가실 줄이 있으랴!”

“해록 선배 순애보도 참 대단합니다.”

“대단하지. 그것이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인 게 문제지.”


승유는 해록과 윤 사이에 일어났던 그간의 ‘사랑과 전쟁’ 일화를 풀어놓으며 껄껄 웃었다. 서희는 중간중간 승유의 이야기에 살을 덧붙이기도 순서를 정정해 주기도 했다.


“단연 최고의 장면은 김해록이 정경대 앞에서 무릎 꿇고 고백한 사건이지.”

“무릎 꿇은 해록 선배 앞을 무심하게 지나가면서 ‘일어나. 밥 먹으러 가게.’ 했던 윤도 대단했고.”

“스프링 튕기듯 일어나서 ‘그래!’하고 뒤를 따르던 김해록이 더 대박이었지. 모든 민망함은 우리 몫이었고.”


익히 아는 이야기였는데도, 말을 할수록 웃음이 늘었다.


“김해록은 유치원 때부터 고백하는 게 취미였던 애라서, 난 걔가 윤한테 고백한다고 할 때 또 시작이다 그러고 말았어. 그런데 지금까지도 한결같이 윤에게 고백하니까... 좀 놀랍다고 해야 하나. 솔직히 해록이가 이렇게 끈기 있는 놈인지 처음 알았어.”


해록은 요즘도 윤과 연락할 때마다 밥 먹었느냐 묻듯 ‘사귈래?’ 했고, 윤은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응, 싫어, 싫어, 너무 싫어.’했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서로의 용건을 말했다.


“해록이랑은 그렇다 치고 윤은 왜 연애 안 해?”

“나도 몰라. 소개팅은 부지런히 하는데 뭐 그렇다 할 성과는 없는 모양이야.”

“주변에 고백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가.”

“후훗, 그럴지도.”


서희는 살짝 고개 숙이고 웃다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러고 보니 너랑 진혁이도 정말 오래 만났다. 몇 년이지? 대학교 때부터니까 한 십 년 됐나?”

“오 년 차부턴 횟수를 세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쯤 되었을 겁니다.”


승유는 ‘와!’소리를 내며 감탄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대들은 아직도 열렬히 사랑하는 거냐 묻고 또 물었다.


“선배님. 우리는 의리가 된 지 오래니... 열렬, 사랑 이런 건 문장에서 좀 빼주시죠.”

“그게 사랑이다! 요 후배님아.”


서희가 손사래 치며 낯간지러워 하자, 승유는 익살스럽게 한 쪽 눈썹을 씰룩였다.


“사실 먼저 쫓아다닌 건 김서희였는데. 것도 학교 내 소문 자자할 정도로. 그런데 갑자기 전세 역전이 되어버렸어. 생각할수록 신기한 일이란 말이지. 내가 아는 이진혁은 남의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데, 이상하게 네 일에만 눈빛을 바꿨거든.”


승유는 잠시 숨을 돌리고 하던 말을 이었다.


“진혁이는 유치원 때도 주목받는 짓을 일절 안 했던 애야. 심지어 아파도 아프다는 소리를 안 해서 병을 키운 적도 있다니까. 그런데 그 누구지? 대학 때 그 꼰대 선배, 너한테 함부로 했다고 그 자식들한테 확 그냥 막 그냥 덤볐잖아.”


서희는 맞네, 그런 일이 있었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희야, 너 그거 알아? 그 선배들이랑 붙은 후로 몇 번이나 진혁이 차 테러 당했던 거.”

“응...? 정말?”

“자동차 여기저기 교묘하게 긁혀있기도 했고, 담뱃불로 흉측하게 그을린 곳도 있었어. 것 때문에 경찰서도 두어 번 갔어.”


십 년이 지난 일인데 이야기를 듣는 서희의 눈동자가 커지길 반복했다.


“난 처음 듣는 이야기야.”

“그래? 하긴... 진혁이 성격에 시시콜콜하게 말 안 했겠다. 솔직히 알아서 좋을 것도 없고. 뭐, 그 정도로 그대를 사랑했다는 방증이지.”


서희가 아는 진혁은 상대가 들어서 속상한 일은 으레 말하지 않았다. 아니, 서로 그랬다. 그때도 지금도 그게 배려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정말, 두 사람이 만났던 2004년 그해 가을은 여름보다도 뜨거웠다.”


승유의 말에 서희는 그저 웃기만 했다. 타인이 기억해 주는 우리의 이야기가 새삼 낯설게 느껴지면서도 돌아가지 못하는 그 순간에 대한 향수가 일어났다. 십 년 전 우리, 아련하기만 했다.


웃으며 말하던 승유의 눈길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삼 년 전에 진혁이가 너한테 청혼했을 때, 그때 바로 결혼했으면 좋았을 건데. 이후에 네 할머니께서 편찮으시고 또 그 이후엔 진혁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다음엔 이래저래 각자 일들이 많아지고...”


서희는 말없이 커피를 입에 댔다.


“서희 너한테도 말 안 하지? 그때 왜 그랬는지.”

“... 응.”

“우리는 그렇다 치지만, 너까지 아버지 장례식에 못 오게 한 건...”


승유는 다음 말을 생략하고 커피잔을 들었다. 괜한 말을 꺼낸 건 아닐까, 승유의 눈에 미안함이 담겼다. 서희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방긋 웃었다.


“다 지난 일입니다.”


지난 일.

해결되지 않은.

그래서 묻어 둔.


평범한 습작생. 더디고 어설픕니다. 빠른 전개를 원하는 분께는 권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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