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witter.com/BBBBBisu/status/1240549505713364992?s=20  해당 썰의 백업본입니다.

※ 후회공 중혁 x 시한부 독자



“중혁아, 내일 저녁에 시간있어?”

“…약속이, 있을 것 같은데.”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있을 것 같다고 한다. 내일이 금요일이라는 걸 넌 알고있을까. 아직 확정되지도 않은 누군가와의 만남 뒤편으로 밀려버린 처지에 김독자가 자그맣게 웃으며 어깨를 툭 쳤다. 괜히 자신의 주먹만 아팠다.

내일은 네 생일이니까. 오랜만에 함께 있고 싶다는 말은 결국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여름의 끝자락, 연애를 시작한 후 다섯 번째로 맞이한 유중혁의 생일은 작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올해의 마지막 기념일도 각자의 일상을 보내며 허무하게 지나갔다. 김독자와 유중혁의 지루한 연애가 시작된 지 햇수로 벌써 5년이었다.

 

같은 대학교 동기로 시작했던 두 사람의 사랑이 처음부터 이렇게 미적지근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불같이 사랑했다는 말이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동갑내기에 동성인데도 불구하고 숨김없이 연애를 즐겼던 평범하지 않은 캠퍼스 커플이었다.

연예인 저리 가라 하는 외모의 e스포츠학과 4학년 유중혁과 경영학과 2학년 수석 김독자. 그것이 서로에 대해 알고 있던 전부였다. 마주칠 일조차 드문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건 어쩌다 겹친 동아리 뒤풀이였다. 한수영이 주도하는 회식 자리에서 유중혁은 그녀의 같은 학번 동기로, 김독자는 그녀의 같은 과 후배로 참석하게 되었다. 명성만 자자하던 주인공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라서 그런지 평소보다 식당은 더욱 붐볐다.

‘…저 허여멀건 오징어 같은 놈이 수석이라고?’

‘뭐야…. 선배면 다인가. 왜 자꾸 노려봐?’

서로의 첫인상은 영 좋지못했다. 살기를 뿜어대며 술잔을 기울이는 유중혁의 기세에 2, 3학년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냅다 달려 온 한수영이 그의 뒤통수를 후려친 뒤에야 김독자를 향하던 무시무시한 시선이 거둬졌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때쯤 두 사람은 동갑이며 김독자의 군 입대로 학년만 늦어진 것을 알게 되었지만 팽팽하게 당겨진 경계의 끈은 풀어질 생각을 하질 않았다. 순탄치 못한 첫만남이었다.

물론 이후에도 두 사람이 캠퍼스 내에서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교양도 전공도 겹치는 것 하나 없었다. 수강하는 과목이 전혀 다르니 같은 건물에 발 디딜 일이 전혀 없었다. 교내 식당에서 한 번쯤 마주치지 않을까 했지만 유중혁은 학식을 먹지않았고, 김독자 또한 끼니를 잘 챙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심지어 다른 동기들과 모임이 잦은 유중혁과 다르게 김독자는 남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서로에게 남아있던 미세한 감정마저 흐릿해져 갈 무렵의 어느 날, 빗방울이 세차게 쏟아져 내리던 늦은 봄의 끝자락이었다. 동아리 방에 혼자 남아 종이 뭉치를 뒤적대던 김독자가 지끈대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두통으로 미간이 찌푸려 진 채 새카만 글씨들을 훑는 눈동자가 쉴새 없이 도르륵 굴렀다. 일주일이 넘도록 하루에 두 시간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인지 눈앞이 어지럽고 두개골이 깨질 듯 징징 울렸다.

조금이라도 푹 수면을 취해야 어지러움이 덜하다는 걸 김독자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집으로 향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단지 눈앞에 닥쳐온 기말고사를 걱정해서는 아니었다.

과수석? 으스러져 가는 집구석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 있기 위해 학교 독서실, 동아리방, 과실을 전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책으로 손이 갔을 뿐이었다.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눈에 넣기 시작했던 글자들이 수석이라는 명예로, 재력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을 보며 본인도 조금씩 그 자리에 집착하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처절할 정도로 가난했던 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부모도, 온기도, 사랑도. 그래서 죽어라 매달려 장학금을 지원받고, 학교를 다니며 억지로 만들어 낸 거짓 웃음을 이용해 자신의 위치를 지켜온 것이 전부였다. 가면을 쓰고 있는 김독자는 가난하지 않았고 불행하지 않았다. 남들과 별 다를 것 없는, 오히려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런 사람이니까.

“몸살인가…. 진짜 죽겠네.”

지독하게 몰려오는 두통이 무거운 눈꺼풀 위를 꾹 짓눌렀다. 조금이라도 자고 일어나면 괜찮지 않을까. 그대로 책상 위에 엎드린 김독자가 까무룩 잠이 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동아리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훤칠한 키에 다부진 몸매, 뚜렷한 이목구비까지. 익숙한 외형의 사내가 무심히 걸어 들어오려다 우뚝 멈춰섰다. 유중혁이었다.

“……?”

김독자를 발견하고 유중혁이 걸음을 멈추자 꽉 막힌 공간 안에는 색색대는 숨소리만 들려왔다. 널브러진 족보 위로 엎드린 김독자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머뭇거리는 것도 잠시, 성큼성큼 다가간 유중혁이 잠든 이의 이마에 손등을 가져다 댔다. 미열이 있긴 했지만 심하지는 않았다. 단순한 감기인 듯 한데 정작 당사자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할딱대며 꾸역꾸역 잠에 빠져있었다.

작게 혀를 찬 유중혁은 가방에 구겨 넣었던 가디건을 꺼내 자그마한 어깨에 둘러주고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돌아온 그의 손에는 까만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다. 책상 근처로 다가와 의자를 끌어 앉은 그가 봉지 안에서 꺼낸 것은 생수 한 병과 감기약, 해열제, 인스턴트 죽이었다. 재빨리 약봉지 하나를 뜯어 손바닥 위에 털어놓은 유중혁이 힘겹게 잠을 청하던 김독자를 살살 흔들어 깨웠다.

“김…독자.”

“…으응….”

“일어나라.”

자신의 입에서 나올거라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을 발음하는 것이 꽤나 어색했다. 열이 슬슬 오르는 것을 보니 두통도 이는지 부스스 눈을 뜨는 김독자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제 앞에 있는 유중혁의 얼굴을 마주한 검은 눈동자에 경계심이 일렁였다. 식은땀이 흘러 앞머리가 이마에 갈래갈래 흐트러져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유난히 김독자의 낯빛이 창백해 보였다. 눈앞에 들이 밀어지는 약과 물병을 보며 메마른 입술이 몇 번 달싹이다가 이내 꾹 다물렸다. 죽음 같은 침묵을 먼저 깨고 입을 연 것은 유중혁이었다.

“선배가 사온 성의를 봐서 라도 얌전히 먹지그러나.”

“…선배 같은 소리하네. 동갑이라며.”

눈초리를 가늘게 흘기고 입을 연 김독자가 순순히 약을 넘겨받았다. 꿀꺽, 울대가 크게 꿈틀거리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자그마한 갈색병에 담긴 액상해열제까지 모두 마시는 것을 보고 나서야 유중혁이 굳어있던 표정을 풀었다. 그리곤 손에 들려있던 검은 봉지를 김독자의 손에 쥐어주었다. 봉지 안에는 뜯지 않은 물병과 감기약, 인스턴트 죽이 담겨 있었다.

“…이걸 왜 나한테 줘.”

“그렇게 비쩍 말랐으니 골골대는 거다. 굶을 생각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챙겨먹어라.”

어이가 없는지 김독자의 입에서 한숨 섞인 웃음이 새어나왔다. 유중혁을 잠시 올려다보기만 하더니, 이내 봉지를 받아들었다. 제 할 일이 끝났다는 듯 무심하게 몸을 일으키는 유중혁에게 시선을 뗀 김독자가 책상에 널브러진 종이들을 바라보았다. 입구 쪽으로 향하던 유중혁은 뒤에서 아무런 기척도 들려오지 않자 고개를 돌렸다. 김독자는 그다지 중요한 것도 아닌 듯한 서류 뭉치를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시간도 많이 늦었건만 슬슬 집으로 돌아가려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만하고 가라. 벌써 해도 져가는데.”

“너 먼저가.”

꿈틀. 조각 같은 이목구비에 그린듯한 눈썹 한쪽이 산처럼 휘었다. 입구까지 걸어갔던 유중혁이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와 털썩 주저앉았다. 김독자가 뭐하냐는 눈빛으로 그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꿈쩍도 하지 않고 팔짱까지 꼈다.

“…뭐하세요. 선배놈님.”

“네 놈이 길거리에 혼자 쓰러져서 골골대는 것보다 내가 조금 귀찮은 게 낫지 않겠나.”

“뭐라는거야…. 내가 애도 아니고.”

정말로 바래다 주기라도 할 셈인지 유중혁은 다리까지 꼬고 앉아 김독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칠흑 같은 눈망울을 부릅 뜨고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에 결국 김독자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욕지기도 아니고 한탄도 아닌 말들을 웅얼거리며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니 그제야 멀대 같은 덩치가 꾸물꾸물 엉덩이를 뗐다.

조용히 짐을 챙겨 동아리실을 나서는 김독자의 뒤를 유중혁이 따라 나섰다. 바깥에는 여전히 봄비가 부슬부슬 떨어지고 있었다. 아직 이른 저녁인데도 날이 흐려서 그런지 사위가 어둑했다. 건물 입구까지 걸어나온 김독자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그도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겠지 싶어 잠시 유중혁이 제 짐을 뒤적이는 사이 김독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비를 맞으며 젖은 땅위를 걸어갔다. 그것이 당연한 일인 것처럼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 꼴을 본 유중혁이 잽싸게 달려와 자신의 우산을 펼치며 김독자의 머리 위로 기울였다.

“네놈은 미친건가?”

“…뭐가 또 불만이야…. 너 제발 그냥 가면 안되겠냐.”

“수석이라더니 알맹이는 영 글러먹었군. 아무리 보슬비라고 해도 그대로 걸어가면 다 젖을 거라는 생각은 안드나?”

“우산살 돈이 없어서 그런다. 나 거지새끼인거 너네 동기들 사이에서도 유명한데 못들었냐.”

“…뭐?”

김독자의 낯빛이 불쾌한 듯 일그러졌다. 유중혁을 바라보는 시선이 감정 없이 굳어 있었다. 방금 제 고막을 두드린 문장을 천천히 곱씹다가 이내 의미를 알아챘는지 유중혁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어갔다.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듯 뻐끔거리던 입술이 꽃봉오리마냥 가만히 다물렸다. 그런 그의 모습을 비웃듯 김독자는 비소를 날리며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

“아니면 이미 알고 있어서 일부러 이러는거야? 웃긴다. 갑자기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 내가 왜 남아서 죽어라 책만 들여다 보는지는 아냐?”

유중혁이 알리 없었다. 그가 아는 김독자는 그저 무성한 소문들로 접한 허울이 전부였다. 열에 취해 이성이 무뎌져서인지 감정으로 격양된 김독자의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서 튀어올랐다. 아까보다 갈라진 목소리 끝에 잔기침이 묻어났다. 손가락 사이에 쥐어진 검은 봉지가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쓸데없는 친절이 괜히 억눌린 감정을 들쑤셨다.

“거창한거 없었어. 수석? 집에 불이 안 들어와서, 어두컴컴한 곳에 들어가기 무서우니까. 학교에서 최대한 버티다보니 할게 공부밖에 없더라. ”

“…….”

본인의 입에서 들으리라 생각지도 못한 말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늘 날이 서있는 듯 차가운 인상을 띄고 있던 김독자였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표정에는 수가지 감정이 얽히고 섥혀있었다. 고해하듯 터트린 속마음들이 아무렇지 않게 빗물에 휩쓸리고 떠내려가고 있었다.

“…넌 이런데 관심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우리 동기들은 내 옷 낡았다고 매일같이 뒤에서 수근거려. 그럴만도 하지. 몇 년째 같은 옷 몇 벌만 돌려 입고 다니니까.”

…넌 그럴 걱정 없어서 좋겠다. 우산도 맘껏 쓰고다니고.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해사한 웃음에 가려진 날카로운 문장들이 유중혁의 가슴을 후벼팠다. 제게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 뒤편으로 김독자 스스로의 무력함을 깎아내리는 말들이 단전을 아프게 찔러대는 듯했다.

그런 모진 말들을 뱉어내는 주제에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려는 것마저 너무도 애처롭게 보였다. 슬픔이라곤 조금도 티내지 않으려는 말간 낯빛 앞에서 유중혁은 굳게 다물린 입 안쪽 살을 꾹 짓씹었다. 툭치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그 미소가, 처절한 아름다움이란 생각이 드는 제 자신이 우스웠다.

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김독자의 뒤에 떨어져서 우산을 기울인 채 걷는 유중혁의 옷은 이미 절반 이상 흠뻑 젖어있었다. 자신을 따라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음에도 김독자 또한 더 이상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걸음마다 피로감이 진득히 묻어났다. 낯선 친절함이 동정때문이던 우월감으로 인한 것이던 상관없었다. 지친 몸뚱이에 밀려오는 지독한 우울이 괴로웠다.

김독자는 한참을 걷고 걸어 작고 가파른 계단을 올랐다. 학교에서 그리 먼 곳이 아님에도 속칭 달동네, 혹은 빈민가로 유명한 곳인지라 근방에도 와본 적 없는 곳이었다. 흉흉하게 쓰러져가는 주택들이 즐비한 곳에 두 사람이 나란히 들어섰다. 익숙한 듯 코너를 돌고 돌아 한참을 들어가던 김독자가 어느 까만 대문 앞에 멈춰섰다. 녹이 슨 열쇠를 잘 맞지 않는 구멍에 욱여넣고 비틀자 철문이 요란스럽게 벌어졌다.

이미 동네 어귀에서 말문이 막혔던 유중혁은 홀린 듯 집안으로 들어서고 나서 더욱 할 말을 잃었다.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나? 좁고 눅눅한데 지붕까지 가라앉아있는 집을 보며 처음 든 생각이었다. 사람은 고사하고 짐승마저 오래 머물지 못할만큼 열악한 환경이었다. 한 칸짜리 방 한가운데 놓인 빛바랜 나무 책상 하나와 헤진 이불 한 장이 아니었더라면 버려진 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김독자가 있었다. 어둠이 익숙한 듯 라이터를 찾아 촛불을 켜는 움직임에 머뭇거림은 없었다. 아까부터 쫓아오더니 이제는 멋대로 집까지 따라 들어와 자신이 하는 양을 빤히 바라보는 유중혁의 표정에 놀란 기색이 잔뜩이었다. 그 꼴이 우스워서 피식 웃음을 흘리는 김독자의 얼굴은 백합이 편 듯 새하얬다. 비웃음일 것이 뻔하지만 그 웃음마저 참 여리고 어여뻤다.

“…요즘은 성냥이 더 귀해서.”

“…성냥?”

“어. 라이터는 애들한테 부탁하면 그냥 가지라고 막 주던데.”

묻지도 않은 것을 저 혼자 변명하듯 중얼대던 김독자가 여전히 입구에 우두커니 서있는 유중혁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때까지도 굳은 인상이 펴질 생각을 않던 유중혁의 입술이 힘겹게 달싹였다.

“…김독자.”

낯설지만 안온한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그의 이름을 담았다. 어쩐지 유중혁의 음성에 다정함이 어려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우리집으로 가겠나.”

 

 

어두운 집안에서 홀로 지낸다는 것이 퍽 싫기는 했던 모양인지, 김독자는 생각보다 순순히 유중혁을 따라나섰다. 그가 검은 세단을 끌고 왔을 땐 조금 놀란 듯 토끼눈을 뜨기는 했으나 이내 별다른 내색 없이 차에 올랐다. 가도 위를 내달리는 차 안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첫만남이었던 뒤풀이 날을 제외하고 제대로 말을 나눈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음에도 둘은 크게 어색함 없이 적막을 지켰다.

십여 분이 지났을까, 높게 뻗은 빌딩가 사이에 차가 멈춰서고 나서야 김독자가 고개를 들었다. 먼저 운전석에서 내린 유중혁이 앞범퍼를 빙 돌아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잠시 그를 올려다보던 김독자도 천천히 차에서 내려섰다. 별다른 소개도 인사도 없이 나란히 들어선 유중혁의 집은 생각보다 넓고 깔끔했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고급진 실내를 둘러보며 김독자는 멍하게 입을 벌렸다. 이렇게 넓은 집에 단출하게 갖춰져 있는 살림을 보며 검은 머리통이 살며시 기울어졌다.

“부모님은?”

“여동생과 해외에 나가계신다.”

“…너 혼자살아?”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고 가장 안쪽 방으로 걸어가더니 이내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곤 나타났다. 한 손에는 수건 몇 장과 여벌 옷이 들려있었다. 자신의 앞에 가지런히 놓이는 옷가지를 멀뚱하게 쳐다만 보고 있는 김독자를 보며 한숨을 쉬더니 그제야 다물린 잇새가 벌어졌다.

“…혼자산다.”

소파에 놓인 옷들은 모두 유중혁의 것인 양 사이즈가 커 보였다. 길어지는 침묵 속에서 이번에는 김독자의 미간이 찌푸려 졌다.

“네 옷을 왜 주는데?”

“어차피 자고 가려고 따라온 거 아닌가?”

어이가 없어서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유중혁은 곧 몸을 돌려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흉흉하고 으스러진 집안에서 홀로 밤을 지새는 것보단 이곳이 훨씬 나았다. 뜨거워진 머리로는 더 이상 생각을 이어나가는 것도 버거웠다. 김독자는 제 앞에 놓인 옷을 집어 들고 욕실로 향했다.

하아.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는 게 얼마만인지. 무심코 탄성을 내뱉었던 김독자가 멋쩍은 듯 얼굴 위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를 훑었다. 지끈하게 덮쳐오던 몸의 피로가 점점 녹아내리고 있었다. 들어오자마자 불평을 쏟아낸 주제에 꽤 상쾌한 얼굴로 거실로 나온 김독자가 뺨을 긁적였다.

아까부터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던 유중혁에게 다가가자 식탁 위로 펼쳐진 9첩밥상이 눈에 들어왔다. 가정집에서 평범하게 차려낸 한 끼 식사라는 생각은 들지 않을 정도로 호화로운 음식들이 죽 늘어져 있었다. 김독자의 입이 무심코 헤 벌어졌다. 쌀밥 대신 흰죽이 놓인 테이블 앞에서 주춤거리고 있자 유중혁이 고개를 까딱였다. 쭈뼛대던 김독자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반대쪽 식탁 의자가 드르륵 소리를 내며 밀려났다. 바로 맞은편에 자리한 유중혁이 턱을 괸 채 무심한 얼굴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이게 다 뭐야….”

“다먹으면 약도 먹어라. 잊어버리지 말고.”

“이걸 어떻게 다먹어…. 그보다 거기서 보고있게?”

“불만있나?”

“당연하지…. 남이 밥먹는 걸 왜 보고만 있어.”

다른 짓을 하던가, 차라리 같이 먹던가…. 들릴락 말락한 김독자의 웅얼거림이 식탁 위로 흘러나왔다. 한쪽 입꼬리만 틀어 올리고 있는 유중혁의 표정은 마냥 신기한 것을 보는 듯 해보였다. 김독자의 투정어린 웅얼거림에 유중혁은 순순히 몸을 틀고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불만 섞인 낯빛으로 고개를 푹 숙인 김독자가 수저를 들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된장국을 한술 떠먹었다.

“…와.”

본인도 모르게 내뱉은 감탄사에 유중혁이 작게 웃었다. 민망해할 새도 없이 김독자는 허겁지겁 먹는 것에 집중했다. 제대로 된 끼니를 챙기는 건 오랜만이었다. 이틀을 내리 굶다시피 했던 터라 텅 비었던 위장으로 부드럽게 음식들이 넘어갔다.

“천천히 먹어라.”

어느새 다시 김독자에게로 고개를 돌린 유중혁은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를 지켜보았다. 죽 한 그릇을 모조리 비우고 국까지 접시 채로 마셔버리는 것이 안쓰럽기까지 보였다. 한참이나 접시에 코를 박고 먹기만 하던 김독자가 감탄을 쏟아내며 수저를 쪽쪽 빨았다. 손재주가 좋다고 캠퍼스에서도 자자하더니 유중혁은 소문만큼 요리 실력도 대단했다. 그리도 허물어지지 않던 경계심이 혀끝을 녹여버릴 듯한 음식 몇 가지에 사르르 무너져 내렸다.

배가 차기 시작하니 눈치를 보던 김독자가 설거지를 자처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손사래를 치며 뒷정리까지 홀로 끝내버린 유중혁이 머그잔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그가 곁에 자리를 잡자, 컵 안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따라 새콤한 허브향이 온 집안에 퍼졌다. 감기약을 뜯어 손바닥에 털어 건네는 유중혁을 가만히 보고 있던 김독자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내가 생각한 거랑 성격이 좀 다르네.”

“또 무슨 헛소리냐.”

주는 대로 약을 받아 먹은 김독자가 소파 위에 늘어진 채 웅얼거렸다. 약기운 때문인지 계속되는 미열 때문인지 반쯤 감긴 눈이 잠에 취한 듯 느리게 깜박였다. 어느덧 중앙불을 끄고 협탁 위의 은은한 스탠드 하나만 켠 채 책을 펼쳤던 유중혁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답했다.

“너…싸가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파서 정신을 놨나? 네놈은 오징어인 줄 알았다.”

“왜 오징어야?”

“흐느적대는 꼴이 오징어랑 똑같지않나.”

제 욕을 하는 것을 들으면서도 김독자는 푸흐흐, 웃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맑은 웃음을 터트리는 김독자의 낯빛이 유난히 뽀얗고 고왔다. 유중혁은 스스로가 떠올린 생각에 급히 고개를 내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비를 맞았더니 자신의 머리도 김독자처럼 멍청해 진 것 같았다.

잠시 후 유중혁은 읽던 책을 덮고 소파 위로 올라갔다. 물론 침실도 있었지만 아픈 이를 집에 들여놓고 혼자 내버려두는 것은 껄끄럽다고 스스로에게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성인 둘이 눕고도 자리가 남을 만큼 널찍한 베드소파 위에서 두 사람은 등을 마주한 채 누웠다. 서먹한 모양새였지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지는 않았다.

“…있지. 다른 놈들은 무엇이 나에게 상처를 주는지, 무엇이 나에게 도움이 되지는 몰라. 그러면서 내 얼굴을 똑바로 보면서 이야기해. 불쌍하구나, 안타깝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고.”

“…….”

“내가 거기에 대고 할 수 있는 건 억지로 웃는 것밖에 없어. 정말로 도와달라 손을 내밀었다간 금세 돌아설 게 뻔하니까.”

“…시끄럽군. 밤이 늦었다.”

차렵 이불이 부스럭대는 소리만 조용히 거실에 요란히 울렸다. 반대쪽 등받이에 반사되어 오던 김독자의 목소리가 이제는 바로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미세하게 뒷덜미로 와닿는 숨결이 데일 듯이 뜨거웠다.

“…망설임없이 손 내밀어 준 건…네가 처음이라서…그래서….”

점점 작아지던 목소리가 조금씩 사그라들더니 이내 완전한 침묵이 찾아왔다. 김독자의 목소리가 한참이나 이어지지 않자 유중혁은 그를 향해 몸을 돌려 누웠다. 눈가가 새빨개 진 뽀얀 낯빛이 입술을 꽉 깨문 채 베개에 파묻혀있었다. 칠흑 같은 눈동자가 깜박거릴 때마다 조그마한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굴러떨어졌다. 그러면서도 김독자는 웃으려 얼굴을 찡그렸다. 외로움에 감겨 슬퍼하면서도 끝까지 어여쁜 얼굴로 세상을 마주하고 있었다.

“…오늘 외운 거 다 까먹겠네.”

“…김독자.”

“징그럽게 부르기는…. 빨리 자자. 쪽팔려.”

“진심으로 걱정했다.”

억지로 감으려 하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풍성한 아미가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도 또렷한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속눈썹 끝이 젖어 엉겨 붙은 것처럼 베갯잇도 이미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왜 별 감정 없던 이에게 이렇게까지 친절을 베풀었을까. 고독과 쓸쓸함을 묵묵히 참아내는 것이 안타까워서? 사회에서 방치된 채 홀로 삶을 견뎌나가야 하는 것이 불쌍해서? 숨겨뒀던 속마음을 자신에게만 내비치는 것이 기꺼워서?

아니다. 그런 것으로 덮어버릴 사소한 동정심 따위가 아니었다. 연민이라는 작은 틀로 옥죄일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속눈썹을 타고 처연히 흘러내린 눈물 방울은 하얗고 오똑한 콧대 위를 구슬처럼 굴러갔다.

모든 이들의 앞에서 가면을 쓰고 꾸며낸 모습만 보여주던 사내가 서투르게 털어놓은 속내가 가슴을 움직이고 있었다. 유중혁의 심장이 벌새의 날갯짓처럼 거세게 박동했다.

“네가….”

심장 소리가 제 고막을 뚫고 등 뒤에 있는 이에게도 닿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황하던 오만가지 사념들 사이에서 오로지 한가지 감정만 남아 선명하게 단전을 자극했다.

“…걱정됐다.”

왜, 라는 물음은 목구멍 너머에서 맴돌 뿐이었다. 단 한 겹의 이불을 사이에 두고 한순간에 뒤바뀐 서로의 감정이 명치를 간질였다. 김독자의 심장도 유중혁 못지않게 빠르게 뛰고 있었다. 혹여 흔들리는 제 마음이 밖으로 새어나가기라도 할까 자꾸만 이불을 끌어올려 머리끝까지 밀어넣었다.

“네가 상처입을까봐.”

“…….”

“걱정했다.”

“…….”

“…자라. 불끈다.”

희미하게 시야를 비춰주던 스탠드까지 꺼버리자 완연한 어둠이었다. 불이 꺼짐과 동시에 말하는 법을 잊은 듯 두 사람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나지막이 들려오는 잔잔한 숨소리가 조금씩 느려질 때까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불 한번 뒤채지 않고 상대의 온기를 느끼며 고요한 반야에 젖어드는 밤이었다. 여전히 빗줄기는 유리창을 두들기며 새벽 내내 퍼부었다.

 

 

유독 짧게 느껴진 하룻밤이 지나갔다. 들끓던 열은 씻은 듯이 내리고 김독자는 가끔 잔기침만 해대는 것이 전부였다. 감긴 눈꺼풀 위로 열을 재려는 듯 뜨거운 손길이 내려앉았다. 잠결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너무나 다정하게 느껴져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부비적거렸다.

처음이 어려울 뿐, 두 번째부터는 쉽다고들 이야기한다. 그날 이후로 김독자는 유중혁의 집에서 머물고 가는 일이 늘었다. 하루, 이틀 반복되던 것은 한두 달이 지나자 일상처럼 자리잡았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작은 소파에서 등을 마주한 채 잠들지 않았다. 너른 침대 가운데에 서로 마주 보고 잠이 들거나, 한 사람이 다른 이의 등에 폭 달라붙어 잠이 들곤 했다.

그 사이 김독자가 살았던 동네는 재개발이 들어갔고, 미미한 보조금만 손에 쥔 채 쫓기듯 김독자는 거리로 나왔다. 연민이라는 껍질에 숨어 이미지에 이점을 만들기 위해 다가오는 이들은 질릴 만큼 봐왔다. 자선 사업을 하듯 저를 대하는 모습들에 비참함과 환멸이 차올랐다. 그런 상황 때문인지 굳이 권유하지 않아도 유중혁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집에 김독자를 들였고, 김독자 또한 순순히 그와의 동거를 시작했다.

그렇게 몇 주가 더 지난 어느 날. 나란히 밥을 먹고, 익숙하게 옷을 나눠입고, 당연스레 함께 씻고 나오는 어느 날. 두 사람이 한 침대 위에 누워 어색하지 않은 고요함에 눈을 감던 초여름의 어느 밤.

“…김독자.”

“으응…?”

졸음이 덕지덕지 묻어 잠긴 목소리가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대답했다. 김독자의 등 뒤에서 허리를 껴안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언제부터인가 유중혁은 바디필로우마냥 김독자를 껴안고 잠에 들었다. 날도 더운데 자꾸 달라 붙는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밀린다고 밀릴 덩치가 아니였다.

불평을 털어놓으면서도 허리에 팔이 감겨오면 익숙하게 손을 마주 잡아 주는 제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유중혁의 단단한 손등 위로 가느다란 손가락이 겹쳐졌다. 아이를 재우듯 부드럽게 토닥이는 손바닥이 살갗을 느리게 스쳤다 떨어지길 반복했다.

“…나와…만나보겠나.”

“…응?”

손등을 도닥이던 움직임이 멎어 들고 서로의 손이 겹쳐진 채 굳어졌다. 벽 쪽을 바라보고 있던 김독자가 꼼지락대며 몸을 틀었다. 유중혁을 올려다보는 새카만 눈빛에 졸음은 완전히 달아나고 호기심만이 가득했다.

“…진심이야?”

“…이런걸로 장난칠 만큼 성격 나쁘게 행동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김독자가 허탈함을 안고 작은 소리로 웃었다. 이제와 서로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하는 소리를 믿을 리 없었다. 어느샌가 두 사람의 세상은 서로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애매하게 가까워진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상대가 먼저 다가오기만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보이지 않는 감정의 벽을 먼저 허문 것은 유중혁이었다.

“잠이 확 달아나네….”

“…말 돌리지마라.”

잔뜩 쳐진 표정으로 유중혁이 중얼거렸다. 그 얼굴을 보며 김독자가 다시 한번 웃었다. 몇 달동안, 은연중 흐르던 둘 사이의 묘한 기류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단지 형태를 갖추어 표현하기엔 용기가 부족해서,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널 좋아하기엔 내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

혼자였다면 참고 삭였을 사람들의 비난이 혹여라도 유중혁에게 향할까 두려웠다. 자신으로 인해 손가락질 받는 것이 그가 되기라도 할까,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이 무섭고 두려워 선뜻 마음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벌어지지 않은 일들로 겁먹은 채 떨고만 있기에는, 수줍게 내뱉은 고백 한마디가 너무도 달콤하게 단전을 자극했다. 지금까지의 고민들 마저 죄다 기화되어 버릴 정도로.

“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사랑할 필요도 없어. 내 곁을 지켜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연습이라도 했냐. 징그럽게….”

“헛소리하지 말고.”

속내를 털어놓고 함께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수줍게 끌어안은 팔 위로 다시금 힘주어 감싸안는 온기가 자잘한 불안까지 가시게 해주었다. 난생처음 삶의 무게를 같이 지탱해 줄 이가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혼자가 아닌, 함께라는 믿음을 안겨주는 서로에게 품은 애정은 순식간에 부피를 키워갔다. 영원히 가시밭길일 것 같았던 삶위로 보드라운 비단실이 파고들었다.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랑의 단어가 부족할 만큼 두 사람의 애정은 깊고 두터웠다.

학기 초부터 소문이 자자했던 두 사람이었기에 공개적으로 연애를 시작했을 때 파장도 만만치 않았다. 동성임을 넘어서, 학년의 차이를 넘어서. 캠퍼스를 거닐다 보면 심심찮게 마주할 수 있는 둘의 애정 행각에 동기들마저 삐그덕거렸다.

그만큼 열렬히 사랑을 했다. 타오르는 불꽃의 절정같았다.

해가 지나고 유중혁의 졸업과 동시에 취업이 결정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김독자의 울적한 모습이 눈에 띄기도 했으나 그것도 찰나였다. 강의가 끝마칠 시간이 되면 칼같이 그를 마중오는 유중혁을 보곤 한수영마저도 욕을 짓씹었다. 하나가 학교를 떠나면 염장질이 좀 줄어들겠지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며 한동안 시샘과 부러움 가득한 눈빛들이 두 사람을 쫓아다녔다.

유중혁은 학교를 졸업하고 조금 늦은 나이에 유명 프로게임팀에 발탁되었다. 믿기지 않을 정도의 실력으로 매번 상대팀을 굴복시키는 타고난 재능 덕분에 국내 순위권에서만 맴돌던 팀은 국제 대회까지 진출하는 발전을 이뤘다.

“…한달?”

“더 빨리 끝날 수도 있다.”

“되게 기네….”

눈에 띄게 침울해진 김독자를 유중혁이 다독였다. 어느덧 유명세를 타 티비광고까지 진출한 유중혁은 밖을 돌아다닐 때마다 사람들이 알아보고 다가올 만큼 인지도가 늘었다. 그러다보니 해외 일정도 늘었고, 경기나 행사로 집을 비우는 횟수도 조금씩 잦아졌다. 그렇지만 한달이라니, 이렇게나 길게 떨어져 있던 적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바빠도 나흘을 넘기지 않았던 출장이 유례없이 길어진 탓일까, 평소와 달리 김독자는 쉽게 그를 보내 주질 못하고 현관에서 서성거렸다.

“아니면 같이 가겠나?”

“뭐래…. 나 졸업반이거든요, 선배님.”

김독자가 일부러 짓궂게 놀리듯 말했다. 그 개구진 모습에 유중혁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뺨에 입을 맞춰 주었다. 고작 한달이다. 김독자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한달이나, 가 아니고 겨우 한 달일 뿐이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타일렀다.

어쩌면 그때, 한 달이라는 시간을 그리 가벼이 여긴 것부터 잘못이었을지도 모른다. 유중혁이 출국하고 김독자도 꽤나 바쁜 일상들을 보냈다. 일부러 바쁘게 지내려고 하지 않아도 졸업 준비를 위해 해야 할 것이 많았다. 지원서 중 하나는 유중혁이 소속된 팀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하고 있는 거대 게임 회사로 넣었다.

다른 선택지 따위는 생각도 하지않았다. 제 연인밖에 생각하지 않는 취직대로에 동기들마저 혀를 내두르고 잔소리를 퍼부었다. 모두의 걱정과는 달리 서류 전형부터 최종 면접까지 일사천리로 합격한 김독자는 비록 계약직부터 시작하게 되었더라도 기쁨에 취해 발을 동동굴렀다.

그리고 유중혁이 출국한지, 두 달이 지나갔다.

여전히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다정하고 상냥하기 그지없었지만 희미하게 가슴 한 켠을 두들기는 불안감이 김독자의 기분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내리게 만들었다.

 

 

김독자에게 유중혁은 첫사랑이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이것이 마지막 사랑이기를 바랬다. 동화 같은 사랑을 꿈꾸고 바래왔다.

하지만 유중혁은 그와 달랐다. 남들보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 누구에게나 관심과 이목을 받으며 살아왔기에 가벼이 사랑을 했고, 이별을 했다. 좋아하는 상대에겐 남부럽지 않은 애정을 퍼부었지만 질리면 금세 관심이 사그라들곤 했었다.

더불어 세계권을 넘나드는 프로게이머란 직업은 또래보다 조금 더 바빴고, 늘 여유가 부족했다. 가뜩이나 스트레스에 영향을 많이 받는 유중혁이었다. 경기를 망치는 날에는 김독자의 연락마저 하루종일 닿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경기를 성공적으로 승리하고 나면 다시 애정 어린 말들이 돌아오고는 했다. 어느 순간부터 한쪽이 일방적으로 휩쓸리는 연애가 꾸역꾸역 이어지고 있었다.

일 년 중 절반 정도는 경기장이나 해외로 출장을 떠나있던 유중혁 덕에 두 사람의 2주년과 3주년은 멀리 떨어진 채 안부를 묻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흔한 손편지 한 장 주고받지 못한 채 의미없는 나날들이 지나갔다.

“오늘은 어땠어?”

-특별한 건 없었다. 좀 피곤해서 그렇지.

“그렇구나…. 다른 일은 없고?”

-글세….

“응…. 피곤하겠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무미건조한 안부인사였다. 오늘은 그들의 4주년 기념일이었다. 기념일이라는 핑계가 없었더라면 목소리도 듣지 못하고 넘겨버렸을 하루였다. 너무 과분한 것을 바랬을까. 그저 함께 있고 싶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듣고 싶었고, 사랑한다 속삭이는 다정함이 그리웠을 뿐이었는데. 감정이 메마른 목소리가 고막을 사납게 두들기는 것이 그리도 아팠다.

-…피곤한데. 먼저 잔다.

“응…. 고생많았어.”

-너도 빨리 자라.

-…중혁아, 잘자고….

“그래.”

…4주년 축하해. 달칵대는 소리가 차갑게 고막을 두드렸다. 목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오기도 전, 일말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 전화는 끊어졌다. 김독자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기계음을 한참이나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핸드폰 액정 위로 자그맣게 떠오른 시계가 보였다. 한국은 오전 6시가 막 넘어가고 있었다.

유중혁이 경기중인 이탈리아와 한국은 8시간의 시차가 있었다. 로마를 기준으로 오후9시가 넘어야 일정이 끝나는 연인을 위해 김독자는 이르게 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부터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한 시간이 넘도록 연락을 받지 않는 유중혁을 기다리며 졸린 눈을 비비고 집안을 느리게 거니는 것마저 설레었다. 그렇게 긴 기다림 끝에 듣게 된 연인의 목소리에서 귀찮음과 피로가 진득하게 묻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핸드폰을 붙잡고 유중혁을 기다리며 서성이던 순간이 오히려 들뜨고 즐거웠다. 한 걸음씩 발을 뗄 때마다 두 사람의 추억이 묻어나는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나간 데이트에서 뽑아온 색만 다른 인형, 4년이 넘도록 모아온 손편지와 사진앨범, 서로를 놀려주겠다고 사왔던 우스꽝스러운 캡모자 한쌍, 1주년때 스튜디오까지 빌려 둘이 함께 찍은 프로필사진….

전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내려놓고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것을 얼른 소매로 꾹 눌렀다. 지금 울음이 터지면, 정말로 스스로가 비참하게 느껴질 것 같아서 억지로 눈물을 훔쳤다.

“…중혁아.”

넌 오늘이 무슨 날인지 기억은 하고 있을까. 언제나 홀로 기념하고 추억해온 이 날짜가 너의 기억 속에 남아있기는 할까. 고작 3분간의 짧은 대화를 위해 오늘을 손꼽아 기다리며 새벽을 지새운 시간들이 너무도 비참했다. 그럼에도 손에서 놓아버리기엔, 사랑이란 감정이 뼛속 깊숙이 새겨진 후였다.

완전히 산등성이를 벗어난 태양이 창문을 뚫고 찬란하게 집안을 비췄다. 여전히 세상은 해가 뜨고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는데 오로지 자신만 한자리에 멈춰서 있는 것 같았다.

사랑 앞에서 애정만 남기고 멈춰버린 나 자신을 탓해야 하는 것일까. 세상의 흐름에 맞춰 사랑도 점차 변해버린 너를 탓해야 하는 것일까. 어느 쪽에도 정답이라 답할 수 없는 물음이었다.

 

 

몇 달간 길게 반복되던 출장에도 끝이 보였다. 한 시즌을 전부 출전하지 않기로 정한 탓에 유중혁은 오래간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무거운 짐을 끌고 집에 들어와 신발을 벗으니 한국에 돌아온 것이 제대로 실감이 났다. 목을 죄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냉장고 문을 열고 나서야 유중혁이 멈칫했다.

현관문 소리가 분명 들렸을 텐데, 김독자가 마중 나오질않았다. 평소였다면 신발도 벗기 전에 먼저 달려 나와 이것저것 물어댔을 녀석이 조용하니 신경이 쓰였다. 도어락이 요란하게 울리고 짐을 푸는 소리가 거실을 가득 메웠음에도 인기척이 없었다. 자신이 돌아오는 날인 걸 잊고 외출을 한 걸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힐끗 돌아본 신발장에는 가지런히 놓인 김독자의 신발이 있었다. 무엇에 또 기분이 상했나, 벌써 한숨이 나왔다. 화가 났을 이유는 워낙 많았던지라 괜히 쭈뼛대며 발을 뗐다.

유독 굳게 닫혀진 침실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덜걱거리는 마찰음과 함께 문이 열리고 거실과는 달리 후끈한 공기가 폐부로 훅 밀려 들어왔다. 커다란 침대 위에 이불로 둘러싸인 인영이 보였다. 아직까지 잠들어 있는 건 아닐텐데, 생각하면서도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김독자.”

이름을 불러도 작게 움찔거리기만 할 뿐 평소처럼 제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달려드는 이가 없었다. 유중혁이 걸음을 옮겨 침대 가장자리로 걸터앉았다. 커다란 손이 천천히 이불 위를 쓸었다. 침실안의 공기는 후덥지근했으나 시트 위로 느껴지는 한기가 손바닥을 아리게 만들었다. 조금 눅진한 것도 같았다.

“다녀왔다.”

힘주어 발음하는 제 목소리에 반응하듯 꿈틀대던 덩어리가 그제서야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너.”

“…ㅈ…혁….”

코끝까지 비죽 내민 김독자의 얼굴은 온통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유중혁이 다급하게 이불을 걷고 손으로 목덜미를 짚었다. 바깥 바람에 물든 서늘한 손길이 살갗 위로 닿자 뜨거운 몸이 바르르 떨렸다. 하지만 쳐낼 힘도 없는지 가만히 고개를 비비적 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손바닥 아래로 닿는 몸뚱이는 역시나 불덩이였다. 몸살인걸까, 얼마나 이러고 있었던 걸까. 이불이 눅눅한 것이 죄다 땀에 절어있다가 식은 탓이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온몸에서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추위를 느끼는 듯 김독자의 몸이 이불 속으로 자꾸만 파고들었다. 유중혁은 서둘러 119에 전화를 걸었다. 자신의 손이 구원줄이라도 되는 양 붙잡은 새하얀 두 손을 덩달아 힘주어 부여잡은 채였다.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쓸어 넘길 때마다 힘겹게 새어 나오는 숨소리가 죽죽 갈라졌다.

저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고 집안으로 구급대원들이 뛰어 들어오는 순간에도 유중혁의 단단한 손을 붙잡은 손마디가 안쓰럽게 떨리고 있었다.

 

 

“결핵입니다. 한두 달은 꾸준히 약물치료를 받으셔야 호전되실 겁니다.”

단순한 몸살인 줄 알았던 것이 생각보다 큰 병이었다. 그나마 초기에 일찍 발견한 지라 몸에 큰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 완치가 가능하다고 했다. 마른 팔뚝에 링거를 주렁주렁 매달고도 김독자는 오랜만에 얼굴 마주하니 좋다며 헤실거렸다. 그 웃음에 유중혁의 미간은 반사적으로 구겨졌다.

전화로는 잘 챙겨먹고 있다고 하더니 고작 몇 개월 사이에 7키로나 살이 빠져버렸다. 새하얀 살갗 위로 꽂힌 바늘들이 유난히 굵어 보이는 것은 아마 착각이 아닐터였다.

“중혁아, 진짜 계속 한국에 있을거야?”

“그렇다고 하지않았나.”

“너무 좋아서 그래. 진짜…좋아서.”

손가락을 마주 잡고 수줍게 웃는 연인을 내려다보는 유중혁의 시선은 영 딱딱하게 굳어있기만 했다. 왜 고작 제 몸뚱이 하나 챙기질 못해서 이 사단을 내는 것인지 그로써는 이해할 수 없었다. 발그레한 뺨을 문지르는 김독자를 등진 채 유중혁은 의자에 몸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그런 그가 피로해 보여 김독자는 더 이상 말을 걸지않았다. 피곤하지는 않았으나 푹신한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으니 잠이 쏟아졌다. 굳이 수마를 피하지 않고 유중혁은 그대로 몸을 웅크리며 잠에 빠졌다.

잠에 들고 얼마나 지났을까. 앉은 자세로 잠들어 뻐근한 몸을 비틀다가, 문득 시간이 많이 지난듯한 기분에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아직 창밖에서 햇살이 새어 들어오는 것을 보니 다행히 하루가 지나간 것은 아닌 듯 했다.

한껏 기지개를 펴고 가만히 어깨를 주무르고 있는 와중에 조용한 병실 안에서 희미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소음이라도 들려오면 묻혀버릴 정도로 아주 작은 소리가. 유중혁은 본능적으로 몸을 세워 침대로 향했다. 침상에 누워있는 이는 언뜻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끊임없이 바르작 대는 상체와 오그라지는 발끝은 절대로 잠든 이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김독자?”

재빨리 호출벨을 누르고 김독자의 얼굴을 조심히 들어올렸다. 언제부터 앓고 있었을까. 이미 땀에 흠뻑 젖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하얀 낯빛이 보였다. 뒤늦게 달려온 간호사들이 약을 주사하는 동안 유중혁은 얼떨결에 침상에서 떨어졌다. 멀어진 김독자의 얼굴은 그 순간에도 제 연인이 있는 곳을 향해 있었다.

“…늘 이런식이지.”

김독자는 남에게 의지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혼자 참고 인내하다가 끝내 막다른 길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일의 반복이었다. 홀로 고통을 인내하려는 우직함이 답답하게만 보일 뿐인데도.

타인에게는 기대지 않아도 좋다. 그렇지만 하나뿐인 연인에게 한 번쯤 손을 내밀어 보는 것은 괜찮지 않은가. 분노인지 걱정인지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단전에서 들끓었다. 유중혁은 조금씩 고른 숨을 내쉬기 시작한 김독자를 지켜보다가 말없이 병실을 나섰다.

 

 

2월. 겨울의 종국에 불어오는 바람은 꽤나 매서웠다. 두꺼운 외투를 세 겹이나 둘둘 싸맨 김독자를 태우고 유중혁은 조용히 차를 몰았다. 가도 위로 고정한 시선이 싸늘한 탓에 김독자도 무어라 말을 붙이지 못하고 얌전히 창밖의 풍경을 세어보며 어색함을 견뎠다.

어색함이라. 문득 궁금증이 떠올랐다. 이 침묵 속에서 유중혁은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연애 초기에는 느낄 새도 없었던 적막함이 언제부터 이렇게 무겁게 느껴졌던 것일까. 할 이야기가 없으면 없는 대로 그저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마냥 좋았던 날들이 있었다. 어색이라는 단어가 두 사람 사이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매 순간이 즐거웠고 서로의 존재가 자연스러웠기에 그렇게 생각했었다.

분명 그랬었지만…지금의 갑갑한 분위기가 마냥 낯설었다. 단 한마디도 오가지 않는 이 관계에 단두대 아래로 목을 끼워 넣은 것처럼 숨이 막히고 뇌가 저렸다. 유중혁이라고 다를 것이 있을까. 언제부터 서로의 감정에 눈치를 보기 시작한 것일까.

김독자에 비해 경험이 다분한 유중혁 또한 이렇게나 오래 이어진 관계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깊은 관계와 감정을 품은 것 또한 처음 느껴본 것일 터였다. 스물셋, 학생이었던 그들은 이제 스물여덟의 어엿한 사회인으로 자랐다. 작은 캠퍼스를 거닐던 앳된 연인은 이제 한지붕 아래에서 몸을 섞고 사랑과 미래를 속삭였다.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길어지는 연애만큼 서로를 향한 감정의 가치마저 조금씩 무뎌져 가고 있었다.

회식 자리가 길어지면 걸려오는 김독자의 전화가 좋았다. 자신이 곁에 없으면 찾아 주는 이가 있다는 것이 기꺼웠다. 집으로 돌아오면 다정하게 저를 반겨주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기뻤다. 그와 함께하는 매 순간이 영원할 것만 같았다. 김독자를 사랑했기에 그 믿음은 명제처럼 유중혁의 가슴 깊이 박혀있었다.

사람들은 종종 익숙함에 현혹되어 소중한 것을 잃는다. 유중혁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사랑하는 김독자의 감정이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함부로 정의를 내려버렸다. 연인에게 자신이 늘 최우선일 것이라는 믿음을 멋대로 품고 있었기에 유중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것에 물들고 익숙해져갔다. 뇌 속 깊이 자리잡은 그 어리석은 판단이 두 사람 사이에 벽을 세워 가는 줄도 모르고.

애정을 핑계 삼아 그의 연락을 몇 번인가 넘겼고, 일상을 재잘대는 김독자의 앞에서 조용히 귀를 닫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도 괜찮을 것이라 여겼다. 김독자는 제자리에서 영원히 자신을 사랑할 것이고 자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영원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때는 몰랐던 스스로의 미련한 오만이었다.

유중혁의 행동에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김독자 또한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힘겹게 버티고 있던 감정들을 하나씩 끊어냈다. 미련, 집착, 연민, 애증…. 썩은 동아줄로 버티고 있는 지독한 연애의 끝에 다다르고 나서야 마음 뿐 아니라 몸뚱이까지 문드러져 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조금만 더 스스로를 돌아볼걸.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곁을 지켜주던 연인이 제게서 시선을 돌렸을 때 붙잡지 말고 놓아줄걸. 그렇게나 비참하게 보낸 시간들을 조금만 더 스스로에게 쏟아부을걸. 유중혁이라는 한 사람을 위해 빛나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져 갔다. 흑빛의 홍채에 서서히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져 탁해져 가고 있었는데도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몰랐다.

 

 

비뚤어진 연애에도 여름은 찾아왔다. 여전히 대화가 줄어들어 고요해진 일상에도 어느정도 적응되어 갈때쯤, 해마다 이시기에 실시하는 정기 건강검진 안내장이 이제 막 정직원으로 진급한 김독자에게도 날아왔다. 적당히 한가한 어느 날을 골라 반차를 낸 김독자는 병원에 들러 첫 검진을 받았다. 그리고 며칠 후 검진 결과가 적힌 우편물 대신 걸려온 한통의 전화를 받고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는 김독자에게 단순히 기관지가 좋지 않다는 이유를 들며 2차검진을 권유했다. 별다른 생각 없이 그것에 동의한 김독자는 이틀 만에 도착한 검진서 위에 적힌 글자들을 멍하니 읽어내렸다. 길고 장황하게 늘어놓은 온갖 의학용어들을 종합해 정리하니 아래와 같은 진단이 나왔다.

‘결핵 감염의 후유증으로 인한 폐 내 원발성 종양’

잠도 이루지 못하고 이튿 날 바로 찾아간 병원에서 종양 조직검사를 받았다. 일부러 유중혁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떨리는 마음을 숨기고 아무일 없이 행동하던 김독자가 일주일 후 통보받은 결과는 예상대로 암담했다.

“…악성입니다. 사실 이 병 자체가 조기에 발견하기 어려운 일인지라….”

“그래서…이제 어떻게 되는 건데요?”

유난히 기침이 잦았었다. 그저 꽃가루에 민감한 몸뚱이가 눈치 없이 봄을 타는 것이며 신경쓰지 않았다. 가슴을 바늘로 쑤시듯 아프기도 했었다. 그 또한 몇 년 전부터 계속 겪었던 증상이라 참거나 진통제로 버티곤 했다. 그 모든 행동이 병을 키우고 증식시키고 있던 줄도 모르고.

자신의 상태가 어느 정도이며 치료 과정은 어떻게 될 것인지 설명하는 의사의 말이 귀에 들어 오질 않았다. 그럼에도 한가지 사실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완치는 많이 어렵다는 거죠.”

한 글자씩 꾹꾹 억눌러 뱉은 목소리가 잔뜩 갈라졌다. 겨우 내뱉은 질문 하나에 어두운 침묵이 흘렀다.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의사가 조심스럽게 그의 말에 답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 환자들을 상대하는 그일지라도 누군가에게 죽음을 고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너무 많이 진행됐습니다. 진행을 조금이나마 늦출 방법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축복이라고 봐야합니다.”

김독자는 조용히 시선을 떨궜다.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가던 의사도 잠시 그를 위해 입을 다물었다. 암담한 분위기 사이로 김독자는 돌아오지 않을 긴 숨을 내뱉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지독하게 아름다운 햇살이 흐드러지는 어느 여름날, 김독자는 덤덤하게 자신의 종장을 받아들였다.

 

 

최근 들어 가장 경기가 적었던 상반기였다. 슬슬 팀원의 수가 안정적으로 채워지자 유중혁 또한 몸도 마음도 편히 쉬는 날이 늘었다. 눈동자만 살짝 굴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었다. 분명 점심시간 전까지는 돌아오겠다 말하고 나간 김독자에게선 문자 한통도 없었다. 소파에 늘어진 몸을 일으켜 세우고 주방으로 향하며 유중혁은 핸드폰 액정 위로 익숙한 번호를 두드렸다.

그와 동시에 도어락이 삐빅대며 새된 기계음을 뱉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유중혁이 바람 빠지는 한숨을 내쉬며 느릿느릿 현관문으로 향했다. 이어 활짝 열리는 현관문 앞에 선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 뭐야. 안놀랐어?”

“…무슨….”

답지 않게 유중혁이 말을 더듬었다. 김독자는 양손을 가득 채운 커다란 꽃다발을 건네며 싱긋 웃었다. 햇살에 물든 것처럼 발그레해진 두 뺨이 입꼬리를 따라 위로 올라갔다. 얼굴을 모조리 덮는 붉은 장미 꽃다발이 손에 쥐어지자 짙은 향이 물씬 풍겨왔다. 잘게 주름이 패인 유중혁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살살 쓸어내린 김독자가 그의 볼에 짧게 입을 맞췄다.

“다녀왔어. 중혁아.”

“…늦었군.”

“응. 길이 하도 막히길래. 밥같이 먹을까?”

하얀 얼굴 위로 흐릿한 미소가 번진 채 재잘거리는 김독자를 보며 유중혁의 한쪽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무슨 일 있었나?”

“별일 없었는데. 왜?”

“기분이…좋아보이는데.”

김독자의 입꼬리가 활짝 말려 올라가며 다시 한번 고운 미소가 지어졌다. 차마 유중혁이 거절할 수 없는, 오랜만에 보는 그가 사랑하는 이의 해맑은 웃음이었다. 참으로 예뻤다. 사랑스러웠다. 이전에도 저 어여쁜 낯빛에 사로잡혀 심장이 두근거렸다는 것이 떠올랐다.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데 일단은 자신에게 기껍게 입을 맞춰오는 김독자가 오랜만인지라 유중혁도 모르는 척 웃음지었다.

몇 달 만에 함께하는 점심식사는 즐거웠다. 두 사람은 집안임에도 모두 그럴듯하게 외출복을 차려입고 있었고, 유중혁이 만든 음식들은 어지간한 식당들 못지않게 맛이 좋았다. 그리고 식탁 위를 간간히 메우는 서로의 목소리는 딱 듣기 좋을 정도로 부드럽게 귓가를 자극했다. 둘만의 세상에서 즐기는 고요한 데이트 같았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벌써 정오가 지난 시간 이었지만 할 일을 모두 끝낸 김독자는 목욕을 하고 거실 소파 위로 늘어졌다. 유중혁은 슬슬 오후에 있을 미팅을 위해 머리를 매만졌다. 가만히 엎드린 채로 그것을 지켜보던 김독자가 몸을 일으켜 그의 앞에 섰다. 평소였다면 무심하게 몸을 틀어버렸을 유중혁이었지만 오늘은 얌전히 제 연인의 얼굴을 마주했다.

“…김독자?”

“잠깐만, 여기….”

김독자의 손이 가운데에 비죽 튀어 나와있던 앞머리를 왁스로 톡톡 두드려 단정하게 눌러주었다. 정돈된 애교머리를 조금 더 다듬어주자 금방이라도 화보에 나올법한 차림새가 되었다. 비단 머리스타일 때문이 아니라 유중혁의 잘난 얼굴 때문이기는 했지만. 만족스러운지 턱 끝을 쳐들고 싱긋 웃는 김독자를을 바라보던 유중혁은 이내 입술 위로 가볍게 입을 맞췄다. 몇 주만의 스킨십이 영 어색했다.

자신의 뺨에는 그렇게 당당하게 입술을 비비면서 정작 김독자는 본인이 스킨십을 당하면 몸을 배배 꼬며 부끄러워 했다. 잘 여문 과실처럼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당장에라도 넘어 트리고 입을 맞추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유중혁은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웬일로 앙칼진 여우마냥 꼬리를 흔드는 김독자의 태도가 기꺼웠다. 다시금 연애 초반처럼 불 같은 사랑이라도 시작한 듯한 몽글거림이 가슴속에 번졌다. 조심히 다녀오라며 꼼지락대는 것이 반가웠다. 무료하게 느껴지던 일상에 터져나온 애정어린 행동들이 심장을 간지럽혔다.

그래. 조금 무뎌지긴 했으나 두 사람은 여태껏 이런 사랑을 해왔고, 앞으로도 이렇게 함께할 것이다. 유중혁은 그렇게 생각하고 웃었다. 자만심과 사랑에 눈이 멀어 그 뒷면을 열어볼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그저 멍청하게 웃는 것이 전부였다.

“다녀오지.”

유중혁이 나가고 현관문이 요란하게 닫혔다. 희미하게 발걸음이 멀어져 가는 소리를 듣자마자 김독자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한번 터진 기침이 끊어질 줄 모르고 계속 새어나왔다. 단전부터 쥐어짜낸 고통으로 심장이 미칠 듯이 쿵쾅거렸다. 그럼에도 멈출 줄 모르고 터져나오는 기침에 헛구역질까지 해댔다. 무언가를 토해낼 것 같아 급하게 욕실로 달려가 변기통을 붙잡았다.

“…흐읍….”

붉은 것도 아니었다. 질척하고 검붉은 덩어리가 타액에 섞여 물 위를 둥둥 떠다녔다. 재빨리 물을 내리고 변기뚜껑을 덮었다. 손발이 주체없이 떨리고 오한이 일었다. 벌써부터 이러면 안되는데. 아직 준비해야 할게 많았다. 고통에 겨워 힘들어 할 시간마저 아까웠다. 겨우 세면대를 붙잡고 일어선 김독자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얀 셔츠에 뚝뚝 떨군 핏자국과 입 주변에 그득히 흘러내린 핏물까지 어디 영화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흡혈귀처럼 보였다. 가뜩이나 밝은 피부결에 핏기까지 없으니 백지장처럼 창백해 보였다. 미지근한 물로 세수를 하고 양치를 마치기 무섭게 화장실을 모조리 청소했다.

괜히 예민한 제 연인이 조금이라도 핏방울을 발견할까 두려워서였다. 이 와중에도 죽음이 알려질까 두려워하는 스스로에게 비웃음이 나왔다. 비참함으로 물드는 감정을 떨쳐내고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려 김독자는 웃음지었다. 그것을 과연 미소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삶의 끝을 향하는 마지막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최근 더 살이 내린 얼굴과 반대로 표정만은 밝아진 김독자를 보며 유중혁은 기분좋게 집으로 귀가했다. 그러고 보니 올해 제 생일날은 기어코 파티를 열어주겠다는 팀원들의 성화에 못 이겨 김독자와 보내지 못했었지. 김독자 또한 별다른 말이 없어 그냥 조용히 넘어가나 보다 생각했다.

제 애인과 중요한 날을 챙기지 못했어도 유중혁은 그다지 서운하지 않았다. 어차피 평생 몇 번이고 함께 보낼 생일쯤이야 올해 한번 떨어져 지낸다고 해도 상관없겠지 생각했다. 거기까지 떠오르고 나서야 자신의 생일 두 달 전쯤이 두 사람의 기념일이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매해 유난스럽게 데이트 코스를 짜오던 김독자가 이번에는 어쩐 일로 조용히 지나갔나 싶었다. 올해가 5주년이었던가. 김독자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니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조금 미안해졌다. 이번에는 김독자도 깜박한 것일까. 그 사실에 안도가 되는 듯하면서 어쩐지 섭섭했다. 스스로 되짚어봐도 이기적인 발상이었다.

집을 나서기 전 갑작스럽게 꽃다발을 사들고 돌아온 김독자가 떠올랐다. 문득 자신처럼 5주년을 떠올리곤 미안함에 사온 것이 아닐까 헛된 망상을 했다. 온종일 그 생각에 매달려 있었더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하루를 보내버렸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귀가한 유중혁의 손에는 작은 쇼핑백이 들려있었다.

현관에 가지런히 김독자의 신발이 놓여있는데도 집안이 조용했다. 슬리퍼도 그대로 놓인 것을 보니 나간 것은 아닌듯한데 거실 조명도 모두 꺼져있었다. 유중혁은 기묘한 기시감에 조용히 신발을 벗고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침대 한쪽에 웅크리고 있는 이불 뭉치의 곁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 반동으로 매트리스 한쪽이 흔들렸지만 깊게 잠들어있는지 김독자는 다행히 눈을 뜨지 않았다. 어제도 이른 시간부터 나갔다 오더니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싶었다. 요즘 밥을 잘 챙겨먹지 않아서 인지 아니면 일을 무리하게 하는 것인지 유난히 낯빛이 핼쑥해 보이는 것이 새삼 걱정되었다.

한참을 더 그렇게 이불 위를 토닥이던 유중혁은 소리를 죽이고 침실을 나왔다. 그가 조금만 더 관심 있게 보았더라면 협탁 위에 놓여있던 가방 안에서 작게 삐져나온 약 봉투를 발견했을 터였다. 하지만 어린 날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설레임에 푹 빠져있던 유중혁에게 김독자의 말간 얼굴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랑이 그를 무뎌지게 만들었고, 사랑이 그를 멍청하게 만들었다. 

성인 판소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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