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읽는 책인 <아픔에 대하여>에 이런 구절이 있다. <먹고 사는 일이 완전히 부조리하다는 경험, 세상에서 살아가는 실존이 불안으로 얼룩져 있다는 경험, 이대로는 죽을 수 밖에 없겠다는 극단적인 위협에 노출되는 경험, 혹은 세상을 살며 중요하다고 여겨온 물질적 가치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확인으로 우리 인간은 자살을 시도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는 인간이 자살을 시도하는 것은 지루함, 궁극적 허무함 때문이며, 이런 허무함의 극복은 세속적 희망이 아닌 근원적 희망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나는 아직도 중환자실에서의 그 길고 긴 밤들을 잊지 못한다. 그 때 보았던 나를 집어 삼키는거 같았던 새까만 어둠은 치료 후에도 긴 시간 나를 괴롭혀왔다. 그것이 내 안에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아플 당시에만 나타난 것인지 혹은 아직도 있는것인지 그러한 문제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지만 누구에게도 쉽게 말할 수 없는 문제였다. 질병기록을 하면서, 나는 내 몸으로 축소된 나의 세계와 시간에 관해 많은 사유를 하고 있다. 내가 있는 곳, 그리고 내 몸이 처한 상황 즉 병자의 방에 있는 병자인 나는 한 없이 나약하고 쓸모없고 생산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병자의 방이라는 물리적 공간은 나의 사유와 외부와의 접촉을 지속해서 제한한다. 기실, 사람은 몸으로 존재하며 그 몸의 가용범위에 따라 세상에 부합하거나 불화한다. 여성, 비혼, 장애인, 근로능력없음의 몸을 가진 나는 매우 무겁고 느린몸을 가졌다. 그리하여 세상의 속도에 따라가지 못하고 아주 작은 반경안에서 움직인다. 아마 점도로 표현한다면 내 방 침대가 내 존재의 가장 진하고 크고 끈적끈적한 흔적을 담고 있을 것이다. 나는 타인들과 소통하기가 버거우며 타인또한 나에게 다가오려면 평소보다 몇 배의 품을 들여야한다. 어떨 때는 내가 세상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외벽 혹은 어둠에 속해있고 세상에는 몸의 반쪽이나 한 발 정도를 담그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든다.

고통을 통하여만 삶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아니지만, 온전히 다 잃어버렸을 때 볼 수 있는 무엇이 있다. 며칠을 내리 고통속에 신음하다가 겨우 책상앞에 앉아 꾹꾹 눌러 일기장에 몇자를 적고 있을 때 마침 창문으로 지는 오후의 햇살이 들어오는 순간 나는 그것을 자연이라기보단 일종의 신의 은총으로 느낀다. 이것은 내가 병자의 방에, 또 내 몸으로 완전히 축소되기 전 지식으로는 알 수 없었던 세계이고 새로운 앎이다. 그리하여 역설적이게도 온 힘을 다해 내 몸을 넘어서는 창조하기가 여기서 발생한다. 일레인 스케리는 그의 저서 <고통받는 몸>을 파괴하기와 창조하기로 나누어 설명했다. 고문받고 언어를 빼앗긴 몸들만이 할 수 있는 창조가 있다는 것이다. 몇시간을 내리 울고 나서 다시 무언가를 적으려 책상 앞에 앉아 공책을 펼 때, 세우기 위해서는 먼저 부숴야 한다는 어느 오래된 옛말을 나는 무의식적으로 수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병"이란 개인의 아픔으로 혹은 그를 돌봐주는 극소수만이 공유하는 무거운 짐으로만 생각되는것이 병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이다. 일전의 쓴 글들에도 적었듯이, 이런 "시선"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다. "아픔"에 대한 다른 사유를 하려는 움직임들. 사실 인간의 몸이란 경중의 차이가 있지만 "아픈 상태"일때가 더 많기 때문이다.

아직 한국에서는 “아픈몸”에 대한 이야기와 논의가 부족한 실정이다. 최근 조한진희 선생님을 필두로 질병서사들이 조금씩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넘어야 할 산들은 매우 높고 깊다. 그런 와중에 얼마전에 “아픈몸 선언문”의 초안이 발표되었다. 시민들의 의견을 모아 정식 선언은 2월 말경에 한다고 했다. 굳이 “선언문”인 이유는 역사의 변곡점마다 “선언”이 있었왔기 때문이며, 아픈 몸의 존재를 선언하는 것이 우리의 존재를 지울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런 움직임에 맞춰 “저항적 질병서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있다. 저항. 이라는 단어를 며칠을 내리 곱씹어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변곡점이라는 단어도. 분명 내가 어릴적 혼자 겪었던 아픔과 고통보다는 SNS등을 통해 나라를 초월하여 아픈 몸들이 재정의되고 이름을 갖게되고 더 많이 화자되고 있기는 하다. 하지 이 병자의 방에 갇힌 내가, 어떻게 저항을 할 수 있을까. 단순히 질병 기록이 아닌 저항이라는 목적을 가진 질병서사를 쓰는 운동이란 것이 현실적으로 아픈 몸을 가진 사람들에게 가능할까 같은 고민도 했다.

그러다가 나는 내가 자살충동에 극심히 시달리던 시절이 떠올랐다. 바로 중환자실에서 거대한 어둠과 공허를 마주한 후였다. 몸이 회복되자 그러니까 내가 내 몸을 자살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운용할 수 있게 되자 나는 깊은 자살충동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허무란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그 허무함에서 도망치려고도 했고 잊어보려고도 했지만 결국 마주함만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작은 틈새를 열어주었다.

없음의 반대는 있음이다. 따라서 허무를 넘어서기 위해선 그 공간을 가득 채워야한다. 나의 세계가 내 몸으로 축소되고, 나는 물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헐떡이며 간신히 숨을 쉬지만 그 숨을 쉬는 행위가 창조로 바뀔 때, 그를 통해 내 세계에 물이 가득 채워질 것이다. 내가 병자의 방에 갇혀 있지만 드넓은 세상에 저항할수 있다는 역설이 여기서 성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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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여자. 선천성 심장장애인으로의 삶을 기록합니다. 트위터: @kim_meme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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