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in the world without you



1

미술관을 나오자 비가 오고 있었다. 셔틀이 기다리는 입구로 가기 위해 정원을 가로질러야 했다. 비를 맞지 않겠다 결심한 스팍의 선택은 길고 넓은 로비를 비껴나 골목처럼 만들어진 가장자리의 차양 아래였다. 축축해진 공기가 물감처럼 번지는 시야에 선명한 붓질이 나타난다. 밝고 작은 우산을 든 몇이 서둘러 달려가다 아슬아슬하게 충돌을 모면했다. 탄력 있게 바닥을 구르는 웃음소리가 어리고 활기차다.


관측실의 창 너머에는 우주가 가득했다. 검은 빛이 내리쬐는 것처럼 기묘하게 침잠된 실내에는 그림자에 뒤덮인 뒷모습이 있다. 어두울 수 없는 것이 어둡다 느껴진, 짧지만 강렬한 장면이었다. 홀로 앉은 남자의 쳐진 등과 길게 뻗은 손끝이 만들어낸 조합은 그 곁의 빈 술잔과 함께 기억속의 패턴을 불러낸 뒤 벗어난다. 보는 이의 지식과 반사적인 유추가 덧씌워진 결과인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 늘어난 자료에서 더불어 얻어진 것은 이해일지 경험일지 모를 일이다. 의문을 남겨두며 빈 공간에 다가선 스팍의 첫마디는 답을 구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었다.

“무차별하게 허가된 공간에서 음주를 하는 함장의 모습은 긍정적인 반응을 일으킬 행동이 아닙니다.”

얼핏 비꼬는가 싶은 목소리에는 아무런 악의가 섞이지 않았다. 제시된 의견은 첫 번째 예외를 마주한 자의 신중한 탐색이었다. 첫 빗방울이 떨어진 것처럼 돌아본 고개가 그에게 미소 지었다. 미스터 스팍, 인사할 타이밍을 놓친 것 같아. 필요성이 없다 판단되었습니다. 찬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커크가 덧붙인다. 이런 시간에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성도 없지. 뒷짐을 진 스팍의 두 손이 못마땅하게 움직여 조명을 밝힌다. 윤곽을 알아볼 정도로 밝아진 공간에는 많은 흔적이 없었다. 짧게 둘러본 눈은 단순한 가설의 증거를 찾는 것이 아니었다. 반사적인 움직임이다. 술을 마시는 함장의 곁에 72.4%의 확률로 존재하던 의사의 부재는 상황에 대한 그의 짐작을 굳혀주었다.

개인적인 이유로 혹은 업무의 중간에라도, 스트레스가 과중될 경우 음주를 즐기는 함장의 습성은 많은 이에게 낯선 것이 아니었다. 혼자만의 행동은 아니었으며, 결과와 원인 모두 문제가 되지 못했다. 부함장은 그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숨긴 적 없었다. 개인의 호불호가 아닌 공적이고 실용적인 이유들로 만들어지는 그의 지적은 타당했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이제는 인사치레로 느껴지는 부함장의 핀잔은 함장과 의사의 좋은 술안주거리였다.

 

그러나 오늘은 그런 날이 아니었다. 적절한 공간의 여유를 만들며 자리를 정해, 테이블의 다른 한 면을 마주한 스팍이 입을 열겠다 말을 골라본다. 커크를 홀로 있게 만드는 것은 세상에 많았으나 이번의 이유는 유독 그만이 알고 있었다. 위로할 자의 부재가 의아하고도 당연하게 느껴진 것이 그 주제다. 그의 아버지, 처음부터 죽은자였던 커크의 부친.

 

먼 곳의 임무를 마친 뒤 돌아왔던 제독은 긴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소탈한 태도로 커크에게 다가왔다. 연달아 일어난 거대한 사건들을 직접 겪지 못한 그가 변화를 접하며 놀란 것은 이해가 가능한 일이었으며, 칭찬과 함께한 추억의 회상에는 아무런 악의가 없었다. 소개를 해준 파이크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지금 자넬 본다면 자랑스러울 거야. 진중한 목소리에 뒤따를 함장의 대답은 침착한 고갯짓으로 충분했다. 남들이 느끼지 못할 위화감으로 긴장한 것은 그의 일항사였다. 그 이상이 요구당할 내용이 아니었기에 이어진 연회는 물 흐르듯 흘러갔다. 참석한 이들의 만족한 헤어짐을 뒤로 하며, 여전히 굳어진 어깨와 물러선 눈동자를 보고서도 스팍은 마땅한 반응을 찾지 못했다. 연방의 제독들과 고위층의 장교가 위주인 소규모의 모임이었던 탓에 맥코이의 도움 또한 바랄 수 없었다.

 

필요하다면 이후 얻어질 것이라 생각하고 헤어진 것이 어제 저녁의 몇 시였던가. 스팍은 순간 기억해내기가 힘들었다. 굳이 시간을 따질 필요가 없는 며칠이라 생겨난 불균형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스코티의 연락을 받고 함내로 오던 이십여 분 동안 줄곧 생각해온 대화의 시작이 한없이 어려워서다.

“나는 그에게 화내고 싶던 것 같아.”

“…….”

“그러니까, 다 싸잡아서 말이지.”

혼잣말처럼 시작된 커크의 목소리는 해명도 아니었고 변명도 아니었다. 누구에게 화내고 싶은지 스팍은 묻지 않았다.

“아버지라는 작자에 대해 말하는 건 아니야. 애초부터 없었으니까 빈자리를 느낀 적도 없다고. 따지자면 없는 게 그것 뿐은 아니었으니까, 난 나름대로 괜찮았거든. 자꾸 괜찮지 않다 하는 것들이 거슬렸었지. 겉치레 같은 동정 보다는 차라리 화내는 쪽이 편하지 않아?”

“……불행이 일으키는 감정적인 대응에는 여러 단계가 존재하지. 모두가 반사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경험자로 하는 소린가?”

먹이를 노리고 뛰어드는 질문은 질문이 아니었다. 녹슬지 못하게 갈아놓은 칼날처럼 섞여있던 쇳소리가 웃음으로 흩어졌다. 말하지 않는 눈이 속삭인다. 난 그래서 네가 마음에 들었다고. 바닥에 말라붙은 핏자국처럼 메마른 쓴웃음은 낯설지 않다. 굉장히 어린 것도 같고 나이를 먹다 지쳐 숫자를 잊은 것도 같다.

이상하지 않은 동질감에 수긍하고 말 것 같아 스팍은 입을 열었다.

“어린 시절 나의 환경에는 어머니의 존재를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자가 많았지.”

“…….”

“어리석은 착각이라 생각했지만 어떤 부분에선 사실이었어. 그렇기 때문에 노력할 수 있었지. 원인이 결과를 만든 것이라면, 결과로 원인을 판단하는 논리 또한 충분히 통용될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성공했나?”

“그것이야말로 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질 이야기지, 지금 중요한 것은…….”

중요한 것은, 그가 커크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같지만 다른 것이다.

“그녀가, 나의 어머니가…… 부재하게 된 뒤로 나아진 것들이 분명 존재하지. 어딘가의 기준으로는 객관적이라고 말 할 수도 있어. 이성적이라고 하기엔 편향된 시선이지만 이해는 가능해. 하나의 사건에서 도출된 것은 아니지만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볼 수도 있네.”

“…….”

“그러나 나는 언제나 그녀를 선택할거야. 왜인지 아나?”

“음- 감정의 이유는 절대 아닐 테니 달리 뭐라고 할지 궁금해 미치겠군!”

높아진 목소리와 각을 맞추듯 의자가 기울어졌다. 꿈틀거리던 그림자가 움직이며 가늘어졌다 가라앉는다. 그늘을 벗어난 눈이 색을 보이고 사라졌다. 피곤한 것처럼 늘어진 고개가 말한 입과는 반대로 외면하고 도망친다. 어쩌면 여전히, 기다리는 것일지 모른다.

“현존하는 상실과 그로 인한 손해 때문이야. 그녀의 가치가 이미 정립된 나로서는 이쪽이 합리적이지. 감정의 유무를 제하고도 내려지는 산술적인 결론으로.”

“그러니까, 나의 무감각 역시 무례하거나 냉정하지 않다는 거야?”

커크의 외면은 사회적인 반항심의 표출일 수도 있었으나 스팍은 그렇다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여러 해석의 하나였다. 예절의 범위는 확실히 아니란 생각이 들었지만 기반이 빈약했다.

지식과 경험이 적은 것은 스팍 역시 마찬가지였다. 해야 할 말은 유추조차 막막했다. 할 수 있는 말을 할 뿐이다.

“현실적이며 동시에 실용적인 대응일 지도 모르지. 결과로만 평가하지 않더라도…… 나 또한 마찬가지야. 실질적으로 사라진 불편과 장애물들을 인지하고 있어. 같은 값은 아니라 해도 그 부재를 부정하지 못하지. 이것은 그저, 사실의 파악에 불과하네.”

“흠. 결여된 자의 현실은 획득한 자의 상실과 다르단 말이지?”

“근본적으로 그렇다 생각하는데.”

“먹어본 놈이 맛을 알고, 놀아본 놈이 노는 것처럼?”

“…….”

불명확한 비유에 동의하고 말 것 같아 스팍은 입을 다물었다. 가벼워진 커크의 웃음이 바닥에 닿지 않는 곳을 향했다.

 


2

어머니의 죽음은 스팍의 인생에 찾아온 최초의 죽음이 아니었다. 식물과 동물로 깨쳐진 아이의 머리는 역사책의 숫자가 무엇을 뜻하는지 배우며 굳어갔다. 혈연의 죽음 역시 처음 겪는 일이 아니었다. 마음속의 흔적이 멈춰버리는 것은 낯설지 않다. 사랑하는 것의 소멸이라는 평에는 어울리지 않아도 좋은 경험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지식은 되었을 것이고 육체에 기억된 일이었다. 유별난 것은 그 요소일 뿐, 일반적인 과정으로 부모를 가지고 함께 성장한 그가 그녀의 죽음에서 배운 것은 다른 것이었다. 사라지지 않는 기억과 함께 새롭게 자라나는 마음은 추측만으로 불가능했을 이해를 줬다.

 

기억하는 것들은 모두 계속된다. 이야기에 생명을 주고 버려진 증명을 되살려내는 남은 이들의 되새김이, 이론과 추구로도 충분하던 논리가 자신의 현실로 일어났다. 그리고 그 되풀이는 멈춰지지 못하는 박동으로 그의 생활을 물들였다. 떠오르는 것은 추억뿐이 아니었다. 확대되는 생각이 답을 알지 못해도 묻어두기 힘든 질문을 끄집어낸다. 알기 때문에 되돌아보지 않던 것들이 규칙 없는 갑작스러움으로 그의 의식에 돋아났다. 그녀의 취미. 그녀의 의견. 그녀의 인생. 그녀가 없는 그의 인생은 그가 없던 그녀의 인생을 궁금케 했다. 더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감상적이고 어리석다 평하는 의식의 곁에는 고스란히 진심인 것을 부인하지 못하는 영혼이 숨 쉬며 꿈을 꿨다.

자각이 찾아온 것은 갑작스러웠다. 무의미한 원망의 해소가 아주 조금씩, 살기 위한 본능처럼 시작된 뒤의 어느 날 그는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스스로에게 처음으로 감사할 수 있었다. 따라붙는 감각은 아픔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지속적으로 주입되는 마취제의 묵직함에 가까웠다. 자책과 절망은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 체념이 불가능한 그는 슬픔으로 통용되는 질척한 감정의 덩어리를 고스란히 한 구석에 품었다. 생산적인 행보라 오해할법한 다음의 흐름은 정리가 가능했으나 시도할 필요가 없었다. 스팍은 아만다를 추억했고 전에는 묻지 못한 질문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어린 시절, 그녀의 꿈, 그녀의 희망. 그녀의 사소한 습관과 드러내 말할 것 없는 작은 취미들.

 

자신의 경우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은 수없이 많다. 죽음은 생명의 시간에 언제나 존재할 일부였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누구를 향할지 모를 적의가 불쑥불쑥 치솟곤 했으나 대체적으로 자신을 향하는 그것들은 점차 다스림이 수월해졌다. 진득한 슬픔을 어찌 할 수 없어 공존을 선택한 스팍의 결정은 객관적으로도 권유되는 태도였다. 많은 전문가와 저서들이 그렇게 주장했다. 굳이 공부하지 않는 그였으나 짐작이 가능했다. 그가 착수한 작업은 다른 것이었다. 어느 이른 아침 사람이 없는 연구실의 벌거벗은 하얀 불빛 아래에서 스팍은 어린 자신에게 토마토를 잘라주던 어머니를 떠올렸다. 한참이나 젊고 아름다웠던 그녀는 그림속의 여인처럼 흐릿한 모습이었고 그것은 아마도 부엌 창문을 가득 채운 거대한 햇빛 때문이었다. 기억속의 그녀와, 기억하기조차 불가능 할 그녀의 모든 다른 것들.

 

그날부터 스팍은 아만다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과학자의 접근법에는 맞지 않는 주제였지만 그의 계획은 평소의 것과 달랐다. 인내를 요하지 않는 무제한의 기한에서 잃기 쉬운 집중력을 그는 유지했다.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꾸준한 관찰과 식지 않는 열정으로 그는 그녀의 추억을 분석했다. 이러는 자신이 병리학자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지만 병리학의 중요성을 잘 아는 그에게는 불쾌하지 않은 연상이었다.

 

그는 그녀의 대학 시절을 찾아보았고, 대학원을 간 먼 도시를 찾아보았고, 그녀가 좋아했다는 음악과 좋아했다는 그림을 찾아보았다. 많지 않은 외가의 친인척들을 찾아 볼 생각도 해보았으나 아직은 그럴만한 이유가 부족했다.

약간의 관심만 있다면 손쉽게 알 수 있는 것들로도 여가시간은 충분히 채워졌고 그는 부러 속도를 내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그럴 이유가 없는 일이다.

 

어머니에 대한 그의 탐구는 자연스레 아버지에 대한 견해를 다르게 만들었다. 표면적인 이유들로 덮어두었던 오래된 장면을 끄집어내 먼지를 털어내며 깨닫는 것은 적지 않았다. 자신의 키가 커진 동안, 볼 수 있는 것들의 모습 또한 달라져서일까. 부모님과 관련되어 떠오르는 상념은 여전했다. 무력감, 죄의식, 사랑을 알기에 가질 수 있는 어리광 같은 질책들. 크게 달라진 마음은 없었다. 지식이 느는 정도로 달라질 만큼의 문제는 없는 관계였다. 자신의 경우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모르던 것은 자신의 행복이었다. 흉한 비극이나 절박한 위기 없이 성립된 가정이 행복이란 것을 그는 몰랐었다. 그렇게도 괴로웠던 것들이 다 불편의 범위라 깨달은 지는 실상 오래 전이었다. 알면서도 간과했던 귀한 것들은 깨진 뒤에야 그림자로 빈속을 보였다.

 


3

그래서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커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결여된 자의 현실에 몸부림치고 획득한 자의 현실에 분노하는 그들의 함장을. 이론만의 예상은 언제나 시간과 함께 현실에서 비껴난다. 불명확한 것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투자와 시간의 소모가 요구되었다. 아는 것이 늘어갈수록 모르는 것도 늘어갔다. 그는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것들은 어떤 이들에게 영원히 낯설 수밖에 없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을 납득하는 것은 최선이 아닐지라도 최소한의 성과가 분명했다.

 

우후라는 그것을 마음의 평화라고 불렀다. 스팍도 익히 아는 표현이었다. 무용한 부정을 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직시하는 것. 성숙하지 않은 마음으로 쉽게 습득하기 힘든 막연한 진리가 어느새 조금씩 그에게도 스며들었다.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는 발전할 수 없는 것처럼, 빈 구석을 깨우쳐야 채울 수 있는 것처럼.

 

불편은 있어도 불만은 없었다. 당연한 차이라 치부하며 넘어간 근본적인 다름은 시간이 지날수록 넓이를 드러냈다. 갈라진 틈새로는 가끔씩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가 소란했다. 그럴 때 느끼는 초조함은 자신을 향한 의심일지도 모른다.

잠잠해진 마른 땅 위로 비가 오거나 해가 비출 때야말로 그가 귀를 기울이는 때였다. 예상이 불가능한 커크의 반응을 함부로 추측하는 습관 또한 줄어갔다. 친분으로 생겨난 배려로 보이는 행동이었으나 진실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모르는 것이 늘어가고 그것이 아쉬워질 때 그 빈곳을 채우는 것이야말로 알고 싶다는 욕구였다. 좁은 벽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돋아나는 새싹처럼, 후벼 파인 상처를 메워놓은 새살처럼.

 

무엇이 먼저인 지는 영원히 모를 일이다. 인식은 기억을 만들고 기억은 감정을 일으켰다. 무의미하게 축적된 시간 속에서 물가에 가라앉은 침전물을 건져낸 것은 그가 아니었다. 눈물을 보인 그의 눈과 피를 묻힌 그의 손을 붙들고 그녀가 말했다. 난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니에요. 바보는 누구일까? 침묵은 답을 모를 때만 선택하는 것이 아니었다. 멀어진 등으로 솟아나는 감정을 흘려보내는 삶 안주하는 삶 체념한 자신을 받아들이며 얻어진 부산물처럼 조용하게 관조하며……. 그런 인생을 모르진 않지만.

새롭게 얻어진 이해는 반갑지 않았다. 그 감정이 그는 놀라웠다.

반기지 않는 마음은 균형을 뺏긴 자의 공격일까, 불시에 습격당한 무방비의 반박일까? 늘어가는 질문이 불러온 것은 답을 향한 욕구가 아니었다. 의미모를 두려움은 신중하다 하기 힘든 불안으로 증폭되며 그를 초초하게 만들곤 했다. 제어가 되지 않고 조절이 되지 않는 마음과 육체에 그는 다른 이름을 붙이기 힘들었다. 초조함, 불안, 걱정, 두근거림. 빨라지는 심장박동과 이유 없이 당혹스러운 기분들. 명쾌하지 못한 상태에 대한 불만은 늘지도 줄지도 않은 채 짙어졌다. 누군가 소리쳐 말할 것만 같았다. 그것이 자신 일까봐 그는 공포에 휩싸였다. 그가 알 수 없어 막막한 것은 그 뒤에 뒤따를 누군가의 시선이나 목소리였다. 혹은 뒤따르지 않을, 변동 없는 시간들이. 상상과 유추로 얻어지는 상실의 존재는 작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결코 전부를 가늠하지 못했다. 감정은 언제나, 직면하지 않고서 알 지 못할 미지의 숫자였다.

 


4

그들의 대화는 순탄했고 흥미로웠다. 본질을 피하며 실체가 없는 농담도 늘어갔다. 관련 없는 문장들은 시간과 함께 형태를 만들며 주제를 만들었다. 이것이 막혀 있는 흐름인지, 안정된 박자인지 가끔은 헷갈리곤 했다.

불면의 밤이 이어질 때가 있었다. 어쩐지 답답한 기분에 다그쳐 묻고 싶은 때도 있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도 이야기는 진행되었다. 무의미한 확산일지 다음 장인지 알 수 없는 것은, 결론이 한참 먼 과정이라 그럴지 모른다. 술에 취한 목소리. 숨소리. 속삭임. 피에 절은 기침을 막으며 맥박을 재고 의식을 다그치는 순간들로. 굳이 끝을 알아야 할 필요는 생기지 못했다. 두려움 때문이라 질책하는 목소리에 스팍은 고개를 흔들었었다. 굳이 말한다면 위선에 가까울 일이었다. 원하지 않는다는 명제가 상대의 것인 이상 그에겐 책임이 덜했다. 신중하게 비켜난 발걸음은 단순한 외면이라 칭할 수 없었다. 사실은 정말로, 많은 것이 처음이었으니까.

 

 

5

유난히 복잡하고 특히나 혐오스러운 어느 행성에서 며칠 밤이 지난 뒤였다. 피로와 허기에 더해진 타인의 생명이 무거운 날들이었다. 탁 하고 풀려버린 안도의 한숨에 둘 다, 정상은 아닌 상태였으니 그 탓을 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기뻐야할 날이 아무렇지 않게 정리되며 마침내 쉴 수 있는 순간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 적이 없어.”

“…….”

커크의 중얼거림은 갑작스러웠다. 방금 전까지 나누던 주제인 행성 폭발의 여파와 어떻게 연관된 흐름인지 생각하던 스팍은 곧 주변을 기억해냈다. 술이 아닌 것에 취해있는 몸과 마음, 어두운 우주를 보이며 그림자가 가득한 관측실의 유리창. 꼭 이런 밤은 아니었으나 비슷할지 모를 어느 날의 대화가 이어지는 것일까. 스팍은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피로만이 이유는 아니었으나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더러워진 금빛셔츠를 갈아입지도 못한 채 앉아있는 함장의 어깨는 핏줄선 눈동자처럼 졸려보였다.

“그런 말 알아? 인간이 상상하는 것은 모두 가능하다는 말.”

“구체적인 표현은 모르지만 이해되는 개념이군. 가능성은 어디에나 존재하니까.”

“난 그 반대가 아닐까 생각했었어. 가능한 것만 상상할 수 있다는, 그런 식으로.”

“그것 역시 흥미로운 시각이야. 제한을 두면서도 폭넓은 논리지.”

“그래서- 그랬다고. 아버지가 있는 인생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겠어.”

정말 이상하게도, 스팍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살아있는 인생을 그는 상상한 적 없었다. 아쉬움이라는 소리가 어울리지 않을 깊숙한 상처에도 불구하고 그가 떠올린 것은 언제나 경험한 과거와 그 경계의 너머였다. 자신이 모르는 그녀의 인생을 생각하는 시간이 아무리 길어져도, 막막한 선은 분명했다.

혹시라도 그녀의 죽음을 부정할까 싶어 피하는 조심스러움 또한 아니었다. 잠깐의 망상조차 막아선 것은 언제나 현실의 벽이었다. 불변하는 사실로 존재하는 과거와 그렇게 쌓아 올린 현실의 벽. 그것이 곧 발밑의 바닥이었다. 마음속의 버팀목이나 마찬가지인 것을 흔들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는 가끔 그런 자신이 서글펐다.

 

“지난 며칠간 우리가 겪은 일들은, 인간의 상상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어.”

말을 하자마자 따라붙는 후회에 스팍은 눈을 감고 말았다. 조용한 그의 목소리는 한 순간의 떨림도 만들지 않았지만 그 태연함이야말로 징그러운 것이었다. 눈가에 짙어진 그림자 위로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 눈을 마주보기가 두려워 스팍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합리적인 이상론에 심취해 아이와 노인을 버리는 행위란, 누구의 상상력으로 가능한 걸까? 재활용되는 시체들에겐 썩어갈 시간조차 없었다. 소멸을 알리는 사그라짐마저 허락되지 못한 인생은 기묘한 부활로 인해 겹겹이 모욕당했다. 슬픔을 허락받지 못한 그들은 우는 방법을 몰랐다. 자식을 버리는 부모와 부모를 버리는 자식이 공유된 죄의식으로 묶여서는, 건강하고 완벽한 사회를 만들어냈다. 불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거리에서 그들은 웃었다. 처음 마주한 누구라도 함께 웃고 마는 밝은 웃음이었다.

커크의 웃음은 그렇지 않았다. 흘러나온 웃음소리는 한입 배어 물은 사과처럼 다급했다.

“맞아. 그런 꼴을 참 많이 봤지. 안 그래? 전에는 함장들이 왜 자서전을 안 내는지 궁금했었어. 이젠 알겠다니까.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거든, 신기하고 이상한 일이 하도 많아서!”

메마른 목에서 이어진 웃음은 억지가 아니었다. 남의 일인 것처럼 자조하는 말버릇은 스팍에게도 익숙해진 함장의 습관이었다. 뜨거운 눈으로 비난하는 것은 의사의 특기였지만, 그러지도 못할 것들을 비웃는 자는 언제나 커크였다. 책임의 위치가 달라서일지 단순한 성격의 차이일지 스팍은 알지 못했다. 늘어진 침묵에도 아랑곳 않고 이어지는 커크의 목소리에는 과장된 굴곡이 선명했다. 위로가 필요한 자는 그가 아니라 내세운다.

반동으로 튀어 오르는 냉소적인 목소리는 표면에 드러난 회복의 징조였다. 어두운 것들을 발밑으로 굴려 보내는 그의 활기는 때때로 놀라웠고 가끔은 고마운 것이었다.

“그렇게 경험이 잔뜩 쌓였는데도- 여전히 못해먹겠더라고. 이상하지?”

“……이상한 것은 아니야. 특별한 원인이 없는 이상, 성공을 바라지 않아 생겨나는 차단일 뿐이지.”

정신의학적인 인과관계를 따져 본다면 좀 더 정확한 설명이 가능했으나 스팍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차분하게 나오는 그의 대답에 커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체가 흔들릴 만큼 크게 몇 번이나 끄덕이던 그가 되묻는다.

“상실이 없어 욕망도 없는 걸까?”

“그 대신 희망이 있겠지. 상상으로 가능한 제약 없는 결과들의, 수많은 가능성으로.”

“예상 못한 낙관론이군, 미스터 스팍.”

“가능성과 희망이란 단어는 절대적으로 같지 않아. 긍정적인 추론이 우선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특성이기도 하지.”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장점 중 한가지였고.

 

흔들거리며 기울어졌던 커크의 등이 의자로 돌아갔다. 끊어진 줄처럼 위를 바라보던 그가 뻐근하다는 듯 어깨를 돌려본다. 그리고서 웃는다. 조금 전의 소리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길게 늘어지는 입술이 비밀을 알려주는 것 같은 그런 미소였다.

“그래, 내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거란 상상은, 해본 적 없는 게 맞아.”

“우주에 나오는 정도는 그렇게까지 특별한 미래가 아닐 텐데?”

“우주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야 스팍. 지금 나의 현실에서 놀라운 부분은, 이러고 있는 내 앞에 마주앉은 게 자네라는 거야.”

단순하고 직접적인 지적에 스팍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신기하지. 안 그래?”

“서로간의 과거를 자료삼자면 흥미로운 현상인 것을 부정하지 못하겠군.”

“그렇다니까.”

“…….”

“꿈에도 생각 못할 일이야.”

정말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함장의 금발머리가 창밖의 빛을 반사했다.

 

 

6

그러니 어느 날의 고백은 누구의 의도로 만들어질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의 책임이었고 어쩌면 휩쓸린 것에 불과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판단이 불가능했다. 시간이 지나며 일상이 된 후에도 스팍은 잦은 빈도로 자신의 현실에 당황했다.

커크는 그에게 자주 화를 냈으며, 대부분 먼저 용서를 구했다. 사과를 하지 못하는 성격일거라 짐작했던 과거의 예측은 모조리 빗나갔다. 솔직하지 못한 질투는 예상 그대로였고, 이상하게도 그런 일에 대해선 절대 먼저 굽히질 않았다. 오해나 고집을 마음껏 주장하는 것이 커크의 애정표현임을 깨닫는 데 그는 적지 않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해야했다.

 

“남성의 천형이죠. 그치들은 대부분 스스로를 착각한 채 인생을 끝내거든요. 잘난척하는 인간일수록 세상을 자기 눈에서 보니까, 커크가 오해를 즐기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에요.”

어느 해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우후라가 한 말이었다. 마티니의 올리브에서 딸기 맛이 난다며 리플리케이터를 비난하는 그녀의 곁에서 술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우린 오해받는데 재주가 있죠. 대부분 그쪽이 나으니까, 불행은 아닐 겁니다. 그렇다고 축복도 아니지만.”

술기운에 본질이 흐릿해진 대화였으나 스팍은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뜻 없는 이야기였다. 이제는 그 역시, 목적이 없어도 괜찮은 시간의 효용을 알았다. 몇 분의 대화와 몇 초의 웃음이 고통을 직시하게 도와주고 장애를 거스르게 등을 민다. 변화한 삶이 어느새 태연해졌다.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는 양 자리한 것은 놀랍고도 아늑한 세상이었다. 당연해진 것들은 말 할 필요가 없어 더 경이로웠다.

 

그들은 가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이 필요 없었다. 때로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번잡한 업무의 피로와 가치관의 대립은 제일 관련 없는 주제에서 점화되곤 했다. 평화라 부르기 힘들고 신뢰라 하기엔 넘쳐나는 기묘한 관계에서, 경계를 놓고 주저앉은 커크의 곁에서 그는 생각했다. 우리는 마치 무지한 아이가 된 것 같다고. 부모의 사랑을 의심할 줄 모르는 행복한 아이가.

 


7

그렇기에 오늘은 그의 선택이었다. 남은 하루는 하루가 아니겠지만 어느 날 보다도 중요한 날이 되어 버렸다. 그의 죽음이 고스란히 읽혀서는 아니었다. 내일을 모르는 것이 너무나 확실해서였다. 그 선명함에 취한 것처럼 대답 없는 그를 누군가 막는다. 어깨를 붙드는 맥코이의 단호한 눈을 마주본다. 소음을 밀어내며 뚫고 들어온 분노를 잊고 싶지 않다고도 생각한다. 눈앞의 친구 역시 잊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오해받기 쉬운 남자, 그것은 꼭 인간 남성만의 특성은 아니었지만.

 

이론을 뛰어 넘는 가능성을 찾기 시작한다. 그런 자신을 그는 말리지 않는다. 그러고 싶지 않아서였다. 투자는 성공에 직결되지 못한다 해도, 하지 않은 것보다는 나은 인생이었다. 논리와 필요와 확률만으로 자신의 선택은 같을 테지만 분명 무언가 달라져 있다. 스팍은 그녀의 눈을 기억해낸다. 마지막의 아무것도 놓치지 않을 것처럼 크게 떠진 어머니의 두 눈과, 그 눈에 담겨있던 자기 자신을.

 

늙고 추한 이와 밝고 강한 이들을 차별한 과거가 욕심을 빌미로 부활하고, 거친 바위산에 비옥한 황야를 주겠다며 날뛰었다. 공평히 사랑하는 자연만이 그들의 욕심을 탓할 수 있다. 그도 이제는 알 것 같다.

 

붕괴하는 행성의 표면에서 진동이 확산되고 공포가 전염된다. 두렵지 않다거나 후회가 없다는 소리는 비논리적인 위선이었다. 오만을 버린 스팍의 두 손이 자리를 지켰다. 상실을 막으며 현실을 획득한다. 기지에 갇힌 열 두 명의 탈출을 성공시킨 그에게 함장의 명령이 달려든다. 화를 내며 열이 오른 두 뺨과 창백하게 힘을 잃은 절망이 눈에 선하다. 저항이 불가능한 몸의 기억은 사실상 뇌의 그것보다 정확할 때가 많았다. 오해가 두렵지 않아 대답은 제외되었다. 지친 입술이 달싹이다 다물어지고, 하고 싶은 말을 고르지 못해 망설이던 때 장난치듯 다가오던 온기가 불현듯 떠오른다.

 

발밑의 땅이 꿈틀대며 일어서는 파괴의 한가운데서 그는 부서진 문 너머로 사라진다. 그는 미래를 희망한다. 속도를 잃지 않는 두 다리가 달려간다.

달려갔다.












in our bedroom after the war



 

1

파티가 열린다. 장소는 어딘가의 술집일수도 있고 낯선 행성의 위엄 있는 궁전일수도 있다. 수백 번은 아닐지라도 수십 번은 될 것처럼 익숙해진 분위기다. 수십 가지 언어가 하나로 얼버무려진 가운데 가끔씩 희미한 웃음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교묘하게 위를 향하는 눈썹이 섬세한 각도를 만들며 말이 아닌 것으로 뜻을 전한다. 화려하거나 시끄러운 합창에 묻히지 않는 혼자만의 연주다. 사방에서 말이 건네지고 나는 눈 둘 곳을 찾기 힘들다.

때로는 싸움이 한창이다. 상대는 거창할수록 보잘것없다. 가슴을 후벼 파는 것은 언제나 가장 작은이들의 눈물이다. 나는 분노한다. 그리고 시끄럽게 웃어 버린다. 제일 먼저 비웃는 것은 내 이름이다. 만만한 만큼 지겨운 대화는 반복되며 말을 잃은 지 오래다. 수다스러워봤자 시간낭비다. 메아리처럼 끊이지 않는 목소리를 나는 짓밟는다. 치 떨린다는 듯 침을 뱉고 욕을 한다. 그러다 불현듯 정신을 차린다. 서늘한 목소리가 나를 혼내고 다그친다.

가끔은 손이 닿는다. 뭐라 말하기 힘든 체온의 전이에 나는 수줍어한다. 기억과 원망이 뒤섞여 번잡한 마음이 한심하다.

소원을 빌어본 적 없다 말하는 내게 본즈가 고개를 흔든다. 그리고 술잔을 채워준다. 병을 뺏어가는 얼굴은 잔뜩 찡그린 채 웃는 것도 같다.

“거짓말이 아니야.”

“짐, 나도 알아.”

“거짓말이 아니라고.”

되풀이되는 목소리가 술주정 같아 나는 고개를 흔든다. 대충 넘어가지 말라고 나는 지금 심각하니까. 테이블에 놓인 내 두 손에 본즈가 혀를 찬다. 언제까지나 대충 넘어가는 건 그쪽이겠지. 무슨 말인지 모를 소리가 어쩐지 옳게 들려 나는 화가 난다.

 

그리고 갑자기 그날이 온다. 그날이 왔다. 두근거림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능숙한 태도로 나는 만사를 웃어넘긴다. 그러다 갑자기 그러지 못한다. 도망치는 손을 붙들리지 않고도 나는 꼼짝할 수 없게 된다. 머리가 어질 거리고 속이 울렁거린다. 토할 것만 같아 숨을 멈춘다. 피 냄새가 옅어진 바람이 한 가득 불어와 젖은 얼굴을 식혀준다. 아무도 모르게 훔쳐놓은 살 냄새가 무방비하게 쏟아진다. 나는 울고 있던 것도 같고, 울음을 참으려 입안의 살을 깨문 것도 같다. 깊은 곳에서 건져 올린 고백이 나를 달랜다. 어쩌면 반대일지도 모른다. 서툴게 말하는 작은 목소리가 우습고도 믿기 힘들어 나는 입을 막는다. 내 것 같지 않은 목소리가 애처롭고 무방비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숨쉬기가 힘들어진다.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맺혀 얼굴이 새빨개진다.

나는 중력을 벗어난다. 발에 닿지 않는 바닥이 까마득하게 멀어진다. 별이 가득한 밤하늘보다 새까만 머리카락에 두 손을 묻자 다시는 놓고 싶지 않아진다.

 

놓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발목을 붙들고 매달려 울부짖었다면 뭐라 했을까. 옳고 그름을 뛰어넘은 확신으로 붙든 손을 떼어내는 손가락이 차갑다. 그 싸늘한 체온에 속이 상한다. 화를 내고 발버둥 친다. 움직이는 리프트의 외벽에서 전선이 파직거리고 함장의 명령을 무산시킨다. 들렸을 지도 모르는 비명이 때를 놓쳐 울고 있다.

 

쓸데없는 기억이 천번만번 반복된다. 벽을 긁은 손톱자국처럼 가득 채운 상처가 의식을 점령한다. 침을 뱉듯이 갑작스러운 외침 위로 작은 신음과 피맺힌 눈물과 찢어진 살점이 끝없이 쌓여간다. 누더기 같은 흉터가 하나도 남지 않은 손등위로 소름이 돋는다. 뼛속 깊은 한기에 구역질이 치솟는다. 느리지 않고 신중하지 않은 발자국이 아무렇게나 사방을 무너뜨린다. 금세 포화상태인 머릿속으로 가느다란 고백조차 자리를 찾지 못하고 사그라진다. 촛불이 일렁이듯 세상이 흔들리고 눈앞이 밝아진다. 놀랄 것 없는 현실에 온몸이 끌려들어간다. 솟구친다. 물에 빠진 아이의 헐떡이는 숨이 터진다.

[상실이 없어 욕망도 없는 걸까?]

[그 대신 희망이 있겠지. 상상으로 가능한 제약 없는 결과들의, 수많은 가능성으로.]

[예상 못한 낙관론이군, 미스터 스팍.]

[가능성과 희망이란 단어는 절대적이지 않네. 긍정적인 추론이 우선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특성이기도 하지.]

어느새 비어있는 술병이 버둥거린 손끝에 부딪혀 굴러갔다. 핏줄선 흰자위로 시간을 확인하는 커크의 눈동자가 새파랗다. 아무렇게나 눈가를 비빈 손등이 거칠다. 뻑뻑한 목으로 없는 침을 모아 삼킨 그가 잠깐의 절망을 허락한다. 아침에 눈을 뜨고 내뱉는 처음의 한숨을.


 

2

스팍이 죽은 것은 오늘로부터 십구일 전의 일이었다. 커크가 날짜를 아는 것은 또 읽고 또 읽은 답변 덕이다. 그는 자신의 보고서를 다시는 읽지 못했다. 그가 읽을 수 있던 것은, 그의 보고에 되돌아온 연방의 확인이었다. 그의 죽음을 선고한 것이 자신이 아닌 것처럼, 남이 쓴 글자를 몇 번이나 읽었을까. 그는 매번 분노하는 것에 멈춰있었다. 기이하게도 부정의 단계는 찾아오지 못했다. 그가 부정하고 의심하게 될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다. 그래서 말이 나오지 않는 걸까? 그는 죽었어 짐! 누가 모르는 것처럼 악을 쓰던 본즈가 떠오른다. 나는 아는 것이 너무 많아 할 말을 찾지 못한다. 그렇다고 말 못하는 병신이 되진 않았다. 커크는 명령을 했고 고개를 끄덕였으며 순식간에 늙어버린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며 자신도 그럴 것이라 추측했다.

그러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손안의 온기를 즐기며 바깥의 추위를 욕하겠지.

눈에 훤한 미래는 당연하고 끔찍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눈물샘이 뜯겨나간 사람처럼 바짝 마른 눈동자가 이해되지 않았다. 돌아오라 외치며 흘린 지저분한 훌쩍임이 고작이었나? 그렇지 않은 걸 알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아마도 그래서였다. 이해하지 못할 것은 그 밖에도 많았다. 웃기는 일도 끝이 없었다.

 

 

3

스팍의 손이 글씨를 쓰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패드에 그어지는 재빠른 싸인 역시 하나의 철자도 빼먹지 않았다. 홀로 있는 방에서 혹은 프로젝트가 겹쳐진 연구실의 한 구석에서. 혼자만의 방법으로 문제를 고심할 때 움직이는 벌칸의 손이 마치 기계 같다고 수근 거리는 목소리가 제법 있었다. 관절의 움직임은 인간의 것과 별 차이가 없었지만, 일정하게 유지되는 속도는 그런 평을 부르곤 했다.

커크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다. 몰두한 호흡과 함께 배분된 에너지는 숨 쉬듯 발동하는 마라토너의 치밀한 본능 같았다. 어깨 너머로 훔쳐본 것들은 글이라 하기 힘든 기호와 숫자의 향연일 때가 많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커크는 스팍과 같은 학교를 졸업한 남자였다. 화학은 취미가 없었지만 물리학은 꽤 좋아했다. 작용과 반작용의 잡다한 덩어리가 시작과 끝을 관통하며 하나의 행동으로 귀결되는 거기엔 시원한 맛이 있었다. 구태여 설명하지 않을 때는 네 말대로 단순하겠지. 남을 가르치는 데 재주가 없는 네놈은 아무짝에도 도움이 안 되는 친구라고, 고개를 흔드는 본즈 역시 그의 실력을 인정했었다. 지나치게 절대적인 단면이, 비슷한 본능을 가졌을법한 커크의 입맛에 맞았을 수도 있다. 찢어진 종이의 세 단어가 어울리는 것에 휘파람을 불 줄 알던 커크는 스팍의 수식을 읽을 수 있었다.

스팍은 그와 달랐다. 수집되는 사소한 것들을 버리지 않으며 속으로 파고드는 그의 방식은 꼭 숫자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다스리는 자의 습관이었다.

 

처음 그들이 함께, 그러니까- 특별한 마음으로 단 둘만의 식사를 계획해 성공하던 날, 커크는 이제껏 품어온 자신의 가설이 부족했음을 깨달았다. 절제된 식생활로 유명하던 벌칸은 단순히 먹는 양을 조절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의 조절은 음식의 섭취 순서와 각각의 행동에 걸리는 시간마저 포함했다. 한 가지 음식만을 먹고 다음 것으로 넘어가는 뻔한 전개란 없었다. 곁들여진 네 가지와 세 개의 메인 코스를 그만 아는 절차에 따라 정갈하게 끝낸 스팍의 접시에는 아무 것도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몸에 배인 것이라 의식 없이 일어나는 행동은 혼자만의 예식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시계가 없이도 초 단위 인식이 가능한 자라면 있을 법한 취미겠지. 넋을 잃고 구경하던 커크는 슬며시 웃음을 흘렸었다. 열네 살의 그에게 상담사가 권유했던 방법 중 하나였다. 부루퉁한 얼굴의 문제아가 충동조절장애를 앓고 있다 판단한 청년의 웃음은 친절했다. 재미있는 놀이를 가르쳐 주듯 첨가된 설명 또한 그럴듯했다. 생활 속의 작은 통제로 쉬운 것부터 하나씩, 제어의 한계를 넓히는 연습이었다. 애초에 규칙적인 식사부터가 힘든 상태라 도전해볼 기회는 적었지만 마냥 헛소리로 들리진 않았었다. 그래서 커크는 그의 친절을 기억했다. 청년은 정부의 무모함과 세금의 남용으로 일어나는 미성년자 약물중독의 시발을 막아낸 좋은 복지원이었다. 적어도 한 명에게는 그랬다.

주절대고 늘어놓던 장면이 과장 없는 묘사로도 충분히 격해졌을 때 커크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무심코 나온 자신의 과거는, 지나치게 현실적이라 멀게 느껴지는 어긋난 영화 같았다.

그런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었는데. 입안에 남아있는 풍족한 음식의 뒷맛이 어쩐지 비릿하게 느껴졌다. 무심하게 방황하던 그의 눈은 곧 눈앞의 것에 집중했다. 반쯤 녹은 아이스크림의 작은 그릇 위에서 가느다란 숟가락을 든 스팍의 손가락에는, 미약한 윤기의 차이를 보이는 굳은살이 배겨있었다. 커크의 손에 더해진 둔탁함과는 다른 위치에서 다른 이유들로, 덜하지 못할 열정과 어쩌면 훨씬 나은 목적을 위해서.

“우열을 가릴 수 있는 분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자네의 표현대로라면, 나 역시 취미로 인해 얻은 흉이지.”

“흉한 수준은 아니지 않아? 내 손톱 하나는 두 번이나 깨져서 이 꼴이지만.”

“나 역시 적절한 관리를 통해 막을 수 있던 흔적인 만큼 흉터라는 표현이 과하진 않아.”

“에이 그런 건 아니지. 그건 사건사고의 증거가 아니야. 그보다는, 주름 같은 거지.”

“그래, 그쪽이 더 적합한 분류야.”

로맨틱한 것과는 거리가 먼 대화였으나 들뜨는 기분은 막을 수 없었다. 쉽게 나온 동의는 개인적인 화제일 때 특히 더 귀했다. 중요한 사람에게 칭찬을 들은 것처럼 흥분이 커크의 뺨을 달궜다. 동경하던 여선생에게 불려온 열 살짜리 같군. 통속적이고 지루한 비유를 떠올린 그가 진실을 깨닫고 자조했다. 그의 인생엔 동경하던 여선생이 없었지만, 중요한 사람은 더 없었으며, 정말로 그렇게 따져보자면 눈앞의 상대야말로 그쪽에 적합한 분류였으니까.

혼잣말 같은 웃음 뒤로 편안한 정적이 그들을 감쌌다. 피곤이 남아있는 어두운 눈동자가 밝은 조명을 반사하며 자신을 바라봤다. 평범하고 무덤덤한 표정 너머로 겹쳐지는 그림은 곤란한 것 같기도 하고 화내는 것 같기도 한 이상한 얼굴이었다. 이상하고 이상한데 눈을 떼지 못하겠는 그런 것. 언제까지고 기억 할 것만 같은 무서운 확신으로 그의 영혼을 점령한 그런 것.

 

커크는 아직도, 며칠 전의 밤과 그 뒤의 아침을 믿을 수 없었다. 스팍의 손에 입 맞추기 위해 그에게는 반년의 준비가 필요했다.

 

무슨 의미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뒷일을 생각 못하고 저지른 짓은 이미 충분했다. 마주치는 시선이 어딘가 불편해진 어느 날 부터 그는 스팍의 손을 훔쳐보고 있었다. 겹쳐진 입술이 자연스러워진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버릇이었다. 그의 손은 평균적인 벌칸의 손과는 확실히 달랐다. 하여간에 반해버린 손이었다. 섣부른 찬양은 무의미했다. 그냥 마음이 끌렸었다. 벌칸의 손이 어쩌고 정신감응의 민감함이 저쩌고 등은 크게 신경 쓰인 적이 없었다. 벌칸의 키스라던가 그런 것도 모르진 않았다. 이미 해봤으니까. 그냥 그 손이 좋아졌을 뿐이다. 좋아진 다음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결론은 같은 소리였다.


그렇게 바라보던 손은 자신과 많이 다르지 않았다. 패드를 두드리고, 난간을 붙들고, 혼란의 한가운데에서 중심을 잡는 그의 손. 고대의 무기를 잡을 때와 똑같은 집중력으로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올리는 스팍의 손. 자신의 맨살에 닿을 때마다 가만히 놀라는 조용한 손.

“손잡아도 괜찮아?”

수없이 잡아본 손을 잡기위해 그날 그는 허락을 구했다. 서두르는 것처럼 살짝 빠르던 목소리가 긴장으로 인해서였는지 어색함을 숨기는 뻣뻣함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말을 한 뒤의 아주 짧은 공백에 머리가 멍멍했던 탓이다. 진공에 떠오르다 중력에 끌려가 무게를 얻을 때의 공황상태였다. 레몬을 생각하며 침을 내는 혀처럼 손바닥엔 어느새 땀이 축축했다. 손을 잡는 정도로 긴장할 사이는 아니었는데, 왜 그랬던 걸까? 이제와 생각해보면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설명할 새 없이 달려가는 순간 찾아오는 직감이었다. 아무렇지 않을 리 없으니 단단히 준비하라는 본능의 다짐이 목에 깃을 세우고 허벅지를 조여 왔다.

침묵의 무게가 부담스러웠을까. 그늘이 짙어진 스팍의 눈이 가늘어졌었다. 들썩인 눈썹과 함께 적나라한 의심을 숨기지 않는 그의 얼굴은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커크의 귀에도 방금 전 자신의 목소리는 의심할만한 목소리였다.

 

바닥에 누워있던 벗은 어깨가 움직여 상체를 곧추세우자 추워 보인다. 침대 머리에 기대앉는다는 행위가 벌칸의 역사에 없지는 않을 텐데. 불가능하다는 듯 반듯하게 펴진 허리가 아무것도 입지 않은 몸을 드러냈다. 아직 젖어있는 방안 공기는 여운을 가득 품고도 금세 식어 있었다. 한기를 느끼는 것처럼 시트를 끌어당기던 그의 두 손이 그대로 가라앉아 고스란히 드러났다. 단정하게 놓인 긴 팔이 굽혀지며 팔꿈치 안쪽의 연한 살에 잔주름을 만들었다.

분명한 허락을 눈으로 보면서도 커크는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 그를 알아본 고개가 틀린 음을 잡아내는 조율사의 끄덕임처럼 기울어졌다. 보이지 않는 미소로 그에게 다가온 스팍의 손은 여전히, 특별난 것이 없었다. 손가락 끝을 스치며 손등을 감싸자 침묵의 무게로 그 손이 잡혔다. 도망치지 않고 앉아있는 새를 붙드는 기분이었다. 단단한 팔목을 더듬어 올라간 그의 오른손이 뾰족하게 튀어나온 팔꿈치를 조심스레 움직였다. 떨어지면 깨질 것같이 스팍의 왼손을 끌어온 그의 손은 떨리지 않았다. 그러지 않으려 숨을 참아야 했다.

 

 

간신히 느려진 호흡을 놓치지 않으려 깨물렸던 커크의 입술이 어느 순간 적셔졌다. 마비에서 풀려난 분홍색 혀가 아랫입술을 핥고서 목표에 다가갔다.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등을 문지르는 커크의 엄지가 핏줄을 세고 굴곡을 핥았다. 희게 펼쳐진 손바닥의 도톰한 살결은 새파란 여름날의 새벽 같았다. 해가 긴 들판에서 자라난 옥수수 잎사귀처럼, 보이는 것보다 열배는 부드러운 피부였다. 푸릇함을 잃은 뒤에도 곱게 찢겨지는, 질기고 너그러운 생명이 침착하게 그를 반겼다. 손가락 하나하나를 맛보던 커크의 입술은 느리다 느껴질 만큼 시간을 들였다. 생명선을 거슬러 올라간 그의 입술이 마른 손목에 머무르며 자국을 남겼다. 부풀어 오른 피부를 적시며 헤매던 혀가 달래는 것처럼 이빨 자국을 어루만지자, 움찔거리는 손가락 끝이 까칠해진 턱밑의 연한 살을 몇 번이나 스친다. 스쳤다. 사라지지 않으며 그 자리에 그대로다.

 

짐, 그 아래는 소매에 가려지지 않는 부위야.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웃음이 섞여 있다. 얄팍한 숨소리와 침대 시트의 소음과 저 구석의 전자음까지, 세상의 모든 소리가 귀에 들리며 동시에 남지 못한다. 살아 있다는 증명이 온몸을 채우며 수십 배 강렬해진다. 꿈을 꾸는 것 같아 깊은 숨을 들이쉬자 익숙한 냄새들이 한데 섞여 전혀 다른 조화를 만들어낸다.

황홀한, 황홀한 기억이다.

 

 

4

그리고 커크는 눈을 뜬다.

창밖에는 세상이 있고 사람이 있고 어두운 하늘이 있다. 끔찍한 현실이 지루하게 계속된다. 그의 방은 혼자의 것이 되지 못했다. 그의 인생 역시 그럴지 모른다. 다가올 죽음을 상상하는 것은 이상한 취미가 아니었다. 남다른 인생과 상관없는 일상의 습관이었다. 식어가는 정액의 냄새가 생명이 남아도는 육신을 알려온다.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아는 것을 바라보기가 지긋지긋해 눈앞이 새까맣다. 나는 모른다 소리치고 싶어 손발이 덜덜 떨려온다.

그래서 모르는 일이 된다면, 목이 쉴 때까지 소리칠 수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의 미신에 사로잡힐 수 있다면, 그렇다면.

 

스팍은 많은 것을 허용할거란 확신이 들었다. 술을 마시는 것도, 그를 잊는 것도,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그가 죽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술에 취한 고백과 적나라한 투정과 끈질긴 독점욕을 받아줬던 것처럼, 원래 그럴 일이었다. 아는 길을 안보고 걷는 것처럼 막연하던 그의 머리가 불현듯 멈춰 섰다. 사랑이라는 말은 생각만으로도 어색한 것이지만, 누구라도 붙잡고 확인 받고 싶어진다. 혼자만의 힘으로 해소되지 않는 불안이 숨을 거칠게 만들며 심장 박동을 엉클어놓았다. 답답한 속을 어쩌지 못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다시 주저앉는다. 타인의 증명은 의미가 없었다. 그따위는 발에 걸리고 눈을 찌르는 쓰레기다. 동정하거나 동조하는 눈빛이야말로 태어날 때부터 남아돌게 던져진 것이었다.

그의 사랑을 증명할 자는 자신뿐이다. 정신을 차리자 정말로 혼자라는 믿음이 절절하다. 작게 차오르는 만족은 건방진 웃음 덕에 서럽지 않았다.

화를 내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할 수 있겠다.

상패와 낡은 신발이 뒤섞인 옷장의 맨 밑에서는 먼지하나 없이 그를 기다린 사치가 여러 개다. 시간이 나거든 어딘가에 가져다 팔아야지 생각했던 것 같다. 누군가의 선물로 도착했던 술병은 고상하지만 가식이 없다. 옛날 사람들은 술을 마실 줄 알았다니까. 분명 하나는 확실히 집어갔던 본즈의 기쁜 한숨이 기억난다. 그리고 기억이 이어진다. 그래서 그는 술을 따랐다. 벨벳으로 대어진 상자의 구석에는 작게 반짝이는 두개의 술잔이 세트로 놓여 있었다.

 

 

5

좁은 침대 위의 구겨진 시트에서, 젖은 숨을 토해놓은 공기 안에서는 아직 그의 냄새를 찾을 수 있었다. 아주 작은 것으로 모든 것이 떠올랐다. 지금은 그랬다. 깊이 배어 든 향기와 체취가 인공의 세제 냄새를 치워준다. 식어가는 손바닥에서 맡아지는 질척한 사향이 오히려 낯설다. 갑작스레 쓴물이 올라와 헛구역질을 하던 커크가 뒷골을 울리는 약물의 여운에 주저앉는다. 상담을 권유하지조차 못하던 그의 친구는 수면제를 달라는 말에 고개를 흔들었었다. 나는 널 믿지만, 넌 너를 잘 몰라.

정답이었다. 커크는 아직도, 도시의 경계에 숨어 들어가 사온 것들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몇 개는 알 것도 같다.

 

 

6

부분과 부분이 산발적으로 붙었다 떨어져 나간다. 저 속의 맹장이니 췌장이니 하는 것들 같기도 하고 칼로 배를 그어도 보이지 않는 주제에 쉴 새 없이 꿈틀거리는 무언가 같기도 하다. 서툴고 아픈 손으로 기워 만들어낸 형태는 볼품없고 쓸모없다. 설사 전부를 모아도 부족할 조각들로, 영원히 불완전할 지식과 기억이 그를 괴롭힌다. 이 기분은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더럽고 진득한 덩어리는 오래 입은 옷처럼 편안했다. 알고 싶으면서도 알기 싫은 것들이 지겹고 징그럽다. 알고 있는 것만으로 그는 충분히 버거웠다.

커크는 스팍에게 화를 내고 싶어진다. 그러면 안 된다 입을 막는 손이 잔인하다. 그래도 괜찮다 속삭이는 눈빛은 아마도 기억속의 누군가다. 가위에 눌린 것처럼 식은땀에 젖은 그의 손이 허공을 휘젓는다. 잠을 깬 그는 이곳이 어디고 자신이 누구인지가, 뼈저린 현실이 증오스러워 비명을 지르다 웃어버린다. 모르는 것을 향한 분노는 오래가지 못했다. 알고 있기에 태어난 미움이 그의 영혼을 좀먹었다.

모조리 당연했다. 그의 인생과 그의 책임과 그의 성격이 딱 맞는 길을 골라냈다. 죽음을 비극이라 부르는 것은 주제가 있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불행한 사건의 구원자로 마무리된 스팍의 인생은 영웅의 끝을 그렸고 거짓 없는 진실로 뒤덮였다. 억울함이 적은 장교의 죽음은 숭고한 희생으로 기록되었다. 사실의 명시만으로 찬양이 필요 없는 묘비가 눈앞에 떠오르자 그는 신음을 참지 못한다.

커크는 아는 것을 잃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른다 말하기가 너무 힘들어 그는 울고만 싶다.

 

비논리적으로 행동하지 말게! 싸움이 멈춘 술집은 오래된 코미디의 한 장면이다. 본즈의 목소리에는 기이한 엄격함이 있었다. 판을 벌리던 주정뱅이가 넋을 잃은 것은 잠시 잠깐이었다. 멱살을 잡은 손을 떨쳐낸 커크가 열기를 더해가며 친구를 향했다. 배신당한 것처럼 몸을 떨던 그림자는 금세 방향을 잃는다.

 

스팍이 죽은 것은 오늘로부터 십구일 전의 일이었다. 부러 넘치게 하지 않아도 이미 한계는 지나 있었다. 기다리던 것처럼 달려들던 커크의 손이 끊어진 줄처럼 늘어졌다. 소리친 입을 붙들고 떨궈진 본즈의 고개는 그보다도 힘이 없다. 주춤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그에게 커크는 아무 말도 못한다. 그가 화내고 싶은 것은 사실 꼭 한명 뿐이었고 그것은 눈앞의 친구가 아니었다. 뒤늦게 들리는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커크는 자신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어쩔 줄 모르게 깜짝 놀란 큰 눈이 쏘아보는 것은 그 앞의 허공이다. 채워지지 않을 빈자리가 거슬려 온몸이 떨려왔다. 끌어안고 울고 싶은 마음이 비척거리고 반걸음을 내딛자 고래고래 악쓰는 분노가 등줄기를 잡아챈다. 어깨를 부딪치며 달려 나온 그가 거리를 벗어난다. 거친 손으로 비밀번호를 누른다. 온도를 올리고 불을 키겠냐고 묻는 숙소의 컴퓨터에게 대꾸한다. 필요 없다고.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누구의 것과 꼭 같아 소름이 끼친다. 그래서 그는 술을 따랐다. 뒤집어진 소파에 아무렇게나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아 술을 마셨다.

 

침대에서 잠들면 꼭 악몽을 꿨다. 어떤 꿈이 악몽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다. 어차피 다음날 아침은 마찬가지다. 버석거리는 뺨을 손으로 몇 번 쓸어 넘기면 하루가 시작됐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그런 아침엔 술이 일렀다. 차라리 깨져 버리면 좋겠어서다. 지구로 돌아온 엔터프라이즈는 보이지 않는 하늘의 끄트머리에서 침묵했다. 다듬은 손을 무시하며 끝낸 며칠간의 회의를 떠올릴 때마다 역한 단내가 맡아졌다.

여기 어딘가에 그의 시체가 있다면 난 아마 다시는 발을 들이지 못했겠지. 관이 비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가, 곧 지워진다. 그리고 해야 할 일들이 떠오른다.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은 없었다. 자신은 미치지도 않았고 다치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남들의 말을 구태여 반박하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그는 술을 마셨다. 어떤 것도 그러자고 하는 짓은 아니었다. 담배를 폈다면 담배를 피웠을지도 모른다. 가구를 부수거나 울부짖는 것은 어째서인지 불가능했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들락날락 거리는 머리로 그는 안을 보고 밖을 봤다. 나달거리는 반소매 아래 팔뚝이 움직이고, 계속해서, 하염없이. 술병을 찾아 드는 모습이야말로 아는데도 모르겠는 것이었다.

 

 

7

나도 아직 죽지 않았군. 문득 시야에 들어온 빈병을 바라보며 그는 쿡쿡거렸다. 인간 남성이 섭취할 수 있는 알콜의 양은 누구 말처럼 정신적인 문제였다. 화학 작용과 물리적인 용량은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

어느새 해가 떠올라 환한 방에서도 그는 눈 뜨기가 편안했다. 그늘에 숨어들어 기울어진 시야에는 먼지가 떠다녔다. 아무런 꿈도 기억나지 않는 한낮의 고독 속에서 커크는 스팍을 떠올렸다. 그는 많은 것을 허용할거란 확신이 들었다. 술을 마시는 것도, 그를 잊는 것도,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그러나 이런 꼴을 본다면 고개를 저을 것 같다. 스팍은 지저분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는 과장된 허풍과, 헛된 약속과, 합리적이지 못한 도덕을 싫어했다. 스팍은 아침마다 손톱을 다듬었고 면도를 하는데 하나의 칼날만을 사용했으며 남몰래 투명한 와인을 좋아했다. 손안에 잡힌 술병의 색은 흐릿한 갈색이었다. 짙은 눈동자가 천정의 빛에 깜박이며 투명하게 번지던 순간이 떠올라 커크는 숨이 막힌다. 나는 과연 그를 사랑했나? 눈물은 모두 가식이 아닐까? 그것조차 부족한 나의 위선이 시간을 헤집으며 위악을 떨어대나? 눈을 한번 깜박이자 어느새 해가 져있다. 비어있는 술병이 저 멀리 굴러가 마지막 석양을 구걸한다. 텅 빈 공기가 가슴을 짓눌러 숨이 터진다. 사랑한다는 말은 기억의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원인을 아는 결핍에 그는 악을 쓰고 싶어진다. 거울이란 거울은 다 깨진 게 당연하다.

독한 새끼야, 어떻게 그 한번을 안 할 수 있니.


없는 과거를 꿈꾸는 것을 누군가는 미래라고 부르곤 했다. 커크는 미래를 바라지 않았다. 그는 바랄 수 없었다. 이것은 그저, 현재의 순간이다. 멀어진 등으로 솟아나는 감정을 흘려보내는 삶 안주하는 삶 체념한 자신을 받아들이며 얻어진 부산물처럼 조용하게 관조하며…….

그런 인생을 모르진 않았다. 커크는 위노나를 떠올린다. 바람이 거센 고향의 벌판에서 그녀의 머리카락이 휘날린다. 햇볕에 탄 그녀의 두 팔이 그늘을 만든다. 창문에 갇히지 않는 두 눈이 하늘을 향해 웃는다. 낮에도 보이는 초승달이 꼭 어울리는 뒷모습이다. 시큰거리는 두 눈을 짓누르며 억지로 숨을 골라본다. 뜨거운 손바닥 아래에는 물기가 없다.

나는 아직, 울 권리조차 얻지 못했어.

 

 

8

커크는 술을 끊기로 결심했다. 성공은 요원한 일이었으나 그에겐 남은 날이 많았다.

 

무거운 몸이 억지로 일어서 벽을 짚는다. 기다렸다는 듯 울리는 벨소리에 고개가 들린다. 인생의 하루가 계속된다. 작게 떠오른 화면 너머로 머리가 엉망인 본즈가 보인다. 옆에 선 남자의 엄격한 얼굴에 그는 정신을 차린다. 사렉의 뾰족한 눈썹이 계산된 무심함으로 그를 향한다. 수척해진 스팍의 아버지는 만나고 싶은 상대가 아니었으나 만나기 싫은 사람 또한 아니었다. 시간을 확인하고 목을 가다듬는 그에게 기다리다 지친 성급한 목소리가 벌컥대고 화를 낸다. 친구의 불평을 무시하며 문을 열어준 그가 침실의 그늘을 지나치며 욕실로 숨어든다.


발밑에 걸리는 잡동사니를 아무렇게나 차내자 이리 저리 쟁강거리는 소리에 헛웃음이 터졌다. 반쪽이 된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자 웃음은 더욱 커졌다. 속이 텅 빈 웃음이 삭막한 욕실을 어지럽히다 흩어졌다. 몇 개의 문과 벽 너머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그 뒤를 따라온다. 세면대의 물소리를 대답처럼 틀어놓은 채, 망설이며 시작한 면도가 금세 끝나버린다. 별달리 할 일이 떠오르지 않아 바닥과 벽을 방황하던 커크의 눈이 다시금 거울을 향했다. 해쓱해진 뺨에는 원인 모를 흉터가 늘어 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선 그는 기어코 밖으로 나가고 만다. 그리고 현재를 마주한다. 찾아온 자들의 이야기를 기다리면서.

 

 




이 이야기는 2014년에 규영&몽블랑&100's가 냈던 이상한...앵스트 트리플/트윈지에 실렸었습니다.

http://kshere.ivyro.net/zbxe/books/3007

다크니스의 기반이던 TOS극장판 2편과 3편을 제 마음대로 남용해서 한정된 페이지에 맞춰 (그리고 가느다란 희망이 필수인 앵스트?라는 주제에 맞춰) 썼던 글인데 부족하지만 나름 즐겁게 썼습니다 재미있었어요! 아마 책으로 다시 나오지 않을 것 같아 공개해놓습니다.

(사실 이 글은 인쇄시의 최종 파일이 분실된 상태라서 오래전 초고를 열어놓고 절판된 책을 보며 다듬었는데요 소장하신 분 중 다른 부분을 찾으신 분이 계시다면 제발 알려주십시오... )



100's @mcback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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