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서 로스나는 자신이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조금 기구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기구함은 그의 현재 이름이 예서 로스나가 아니라 예서 페네티안인 점으로부터 시작된다.

예서 로스나일 때의 삶은 가히 평화로웠으나 예서 페네티안의 삶에는 로스나로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행복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로스나에서 페네티안이 되는 흔치 않은 사건을 겪었을 때도 딱히 불행하지 않았다.

물론 그는 고작 성이 바뀌는 일을 가지고 기구함을 논할 사람은 아니었다. 이 세상은 넓고 성이 바뀌는 일보다 더 기구한 일은 비일비재하므로.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를 기구함의 파도에 휩쓸리게 만든 결정적인 원인은 따로 있었다.

아주 강력하게 작용하는 염원.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염원이 그를 기구함의 바다 속으로 깊이 침잠하게 만들었다. 정작 예서 페네티안은 딱히 무언가를 간절하게 염원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일상의 행복을 누리면서, 가능하면 조금 덜 핍박받는 것이 그가 바라는 염원의 전부였다.

그럼에도 그는 때때로 그와 같은 이름, 그러나 다른 성을 가진 남자의 삶을 엿보거나 느끼곤 했다. 이것이 어떤 종류의 염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에 굳이 남들에게 떠벌리고 다니지 않았다. 어디 가서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종류의 염원도 아니었다. 조금 과격하게 말하자면, 이건 엄연한 사생활 침해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이건 세간에서 일컫는 염원조차 아니었다. 그는 염동력을 쓸 수 없고, 염동력을 쓸 수 없는 사람은 염원가로 정의되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염원이 아니라면 이 불가사의한 일을 설명할 수 없기에 그는 스스로를 허울뿐인 염원가라고 정의했다.

쌍방이라면 본의 아닌 사생활침해가 조금쯤 정상참작이 되었을 텐데, 저쪽에서는 자신을 지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애초에 동명이인인 그는 염원가조차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감화자인 것도 아니었다. 알아차리지 못할 만도 했다.

예기치 못하게 타인의 인생을 엿보게 되었지만 의외로 예서 페네티안에게는 독자로서 소질이 있었다. 누군가의 삶을 지켜보는 건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다. 끝내 그 행위는 삶의 일부가 되었고, 또 다른 행복이 되었다.

예서 페네티안이 지켜보게 된 또 다른 예서는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이였다. 의붓아버지 같은 사람과 이어졌다면 스스로가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졌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 그가 영문 모를 현상에 휘말렸음에도 불행하지 않고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지켜보게 된 이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사람인 덕분이었다.

예서 페네티안은 가끔 동명이인의 감정에 동화되어 뜬금없는 감정을 느끼곤 했고, 꽤 자주 꿈속에서 그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예서 페네티안에게 그의 삶을 지켜보는 건 꽤나 위안이 되는 시간이었다.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사람이 있다는 걸, 그는 아주 일찍부터 깨달았다.

예서 페네티안은 또 다른 예서가 행복해지기를 진심으로 염원했다. 그가 가진 얼마 되지 않는 강력한 염원 중 하나였다. 그의 염원은 보통 주변 사람의 행복이었다. 저 멀리 떨어진 나라에 사는 예서의 행복, 이부형제의 행복,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 그 외에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았다. 주변 사람의 안녕을 제외하고는 딱히 집착하는 바가 없었다.

의붓아버지는 그가 밖으로 나도는 것을 싫어했다. 예서 페네티안이 페네티안이라는 이름을 대는 상황을 병적으로 막고자 했다. 결국 예서 페네티안은 페네티안 대저택에 거의 갇혀 사는 신세가 되었다. 사회활동을 전혀 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사는 데에 지장은 없었다. 페네티안은 그만큼 부유한 집안이니까.

게다가 집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이부동생이 있었다. 예서는 동생을 돌보면서 사는 것에 만족했다. 비록 의붓아버지의 등쌀 때문에 동생과 자유롭게 만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부누나 또한 그를 수시로 들여다보고 챙겨주니 이 정도면 불행한 삶은 아니었다.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사실 괜찮은 척 하려고 했을 뿐, 그의 가슴 속에 아주 강력하고도 간절한 염원이 도사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스스로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깊은 마음의 바다 속에.


 


지브릴 디오프는 딱히 간절한 것 없이 살아왔다. 재벌 명문가에서 태어나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자랐고, 회사는 일찍이 전문 경영인에게 물려주든지 동생에게 물려주든지 하라고 선언한 뒤 주식이나 야금야금 챙겨먹었다.

방탕하다고 소문난 디오프 집안 장남이 그나마 사람 구실을 하고 사는 이유는 간절함 대신 욕심이 있어서였다. 지브릴이 염원가가 되었을 때 주변 사람들 모두가 그는 높은 급이 될 수 없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가 원체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살아왔기에 일견 타당해 보이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지브릴은 염동력에 아주 큰 흥미를 느꼈고 방탕하게 잘 놀기로 소문난 그는 재미를 느끼는 일에 있어서는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지브릴은 꽤 젊은 나이에 지휘관 직위까지 올라갔으나 그것이 아무런 잡음도 동반하지 않았다거나 그의 성격이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염원가가 발휘하는 힘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모두가 아무런 제약 없이 보유한 그릇의 능력에 따라 발휘할 수 있는 힘을 염동력이라고 부르고, 각자가 가진 강한 염원에 따라 발휘할 수 있는 특기를 스킬이라고 부른다. 후자는 스킬이라는 공식 명칭보다 특기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지만 말이다.

특기라고 불리는 스킬은 반드시 감화자의 인정을 받아, 감화력이라고 명명된 감화자의 에너지를 얻은 만큼만 쓸 수 있는 힘이다. 그릇이 큰 사람은 그만큼 많은 에너지를 받아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문제는 염원가가 감화자에게 에너지를 받는 방법에 있다. 기본적으로 에너지는 신체적 접촉이 없어도 제공할 수 있으나, 신체적 접촉이 있으면 에너지가 충전되는 속도가 몹시 빨라지고 효율이 좋아진다. 따라서 딱히 스킨십에 거부감이 강하지 않은 한 염원가와 감화자 모두 신체적 접촉을 통해 에너지를 주고받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닿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서로의 팔을 잡는 경우가 많다. 염원가가 감화자의 팔을 잡든 감화자가 염원가의 팔을 잡든. 서로 친밀한 관계면 손을 잡는 경우도 더러 있다. 관계가 더 친밀하거나 용인하는 스킨십의 범위가 몹시도 넓은 자들은 아예 키스를 하거나 성관계를 하는 경우도 있다. 어차피 몸을 맞대야 한다면 성적인 쾌락도 얻고 에너지도 얻고 일석이조를 누리겠다는 발상이었다.

지브릴 디오프는 위의 발상에 동의하는 사람이었다. 쾌락도 얻고 염원가로서의 역량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지극히 효율적인 사람이었고,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가 되어 감화자들 사이를 전전하고 다녔다.

안 그래도 지브릴은 본인의 특기를 몹시 좋아했다. 그는 특기를 아낌없이 발휘하길 원했고, 에너지를 빨리 많이 얻는 방법을 취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호사가들은 그의 뛰어난 스킬 실력에 방탕한 성격이 일조를 했으리라 주장한다. 연습을 할 때도 에너지가 필요한데 지브릴은 누구보다 쉽고 빠르게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었으니 오죽하겠는가.

그는 다행히 부모에게 꽤나 번지르르한 낯짝을 물려받았고 에너지를 주는 대신 쾌락을 얻고 싶어 하는 감화자를 꾀어내는 일에 어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할 수 있는데 굳이 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 지브릴은 스스로의 행동에 당당한 남자였다. 그의 문란함은 합법의 테두리 안에 있었으므로.

그의 실력은 날이 갈수록 빛을 발했지만 평판은 썩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능력이 뛰어나지 않았다면 진즉 부대에서 쫓겨났을 것이다.

그래도 그와 가까운 이들은 모두 지브릴을 아주 상종 못할 쓰레기로 평가하지는 않는다. 지나치게 자유로운 성정을 흠으로 보기는 하지만 말이다. 지브릴은 스스로가 적당한 선을 아는 줄다리기의 귀재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자만이 그를 치명적인 실수의 벼락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는 거의 염원가가 되자마자 군대에 적을 두었지만 이렇게 본격적인 징계를 받기는 처음이었다. 아주 추잡한 치정사건에 휘말린 결과였다. 여자 보는 눈에 있다고 자부하던 지브릴의 자존심에 아주 커다란 상처가 생기고야 말았다. 그냥 실수도 아니고 징계를 받을 만한 실수라니.

물론 그가 지휘관에서 실각되었다거나 적을 둔 부대가 아닌 다른 부대로 쫓겨나거나 할 만큼 심각한 징계를 받은 건 아니었다. 다만 이번에 받은 징계는 지브릴에게만큼은 그 무엇보다도 끔찍한 징계였다.

차라리 1년 감봉이 낫지. 아니 차라리 지휘관 자리에서 내려오는 게 낫겠어. 지휘관이 뭐 별거인가. 어차피 군대에 엉덩이 오래 비비고 있다 보면 계급은 자연스럽게 올라갈 텐데 쭉 올라가나 잠시 떨어졌다가 올라가나 무슨 차이가 있다고.

지브릴은 자유를 제한하는 것을 싫어했지만 타당한 명령에 따르는 것을 어려워하지는 않았다. 명령받기를 싫어했으면 애초에 입대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특기는 전투에 특화되어있지만 전투에 걸맞은 특기를 가진 모든 염원가가 입대를 하진 않는다. 특기와는 별개로 염동력은 원하는 방향으로 발휘할 수 있으니까. 염동력을 갈고닦으면 비전투분야에서도 충분히 활약할 수 있다.

지브릴은 그릇이 넓고 탐구심이 있어 염동력 하나만으로도 잘 벌어먹고 살았을 것이다. 특기가 워낙에 범용성이 좋은 공격형이라서 군대에 온 거지. 애초에 지브릴은 굳이 일하지 않아도 평생 먹고살 수 있을 만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의심의 여지없이 스스로의 의지로 입대했다.

군대가 특기를 발휘하는 데에 가장 좋은 곳이라고 판단해 군을 택했지만 군인의 모든 점이 마음에 든다고 하지는 않았다. 군대의 가장 안 좋은 점은 타당하지 않은 명령이 내려올 때도 있다는 점이다. 물론 지브릴이 생각하는 타당함은 남들이 생각하는 타당함과 조금 다른 구석이 있지만.

예를 들어 지금 이 상황. 징계를 받은 것은 자존심 상하지만 타당한 처사다. 하지만 강등이나 감봉이 아니라 정찰 업무 지원이라는 징계를 받은 건 그의 생각에 그다지 타당하지 않았다.

정찰 부대는 늘 인력 부족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지브릴 역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지원 요청을 수리하여 지원을 보낼 인원을 선별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그와 같은 지휘관이니까. 그런데 왜 그 지휘관 본인을 정찰 부대로 보내냐고.

지브릴은 계급이 낮을 때에는 뒷배가 있어서 정찰 임무를 아예 받지 않았고, 계급이 높아졌을 때에는 지원을 나갈 입장이 아니라 지원을 보내는 입장이 되었다. 그래서 대마수토벌부대에 입대하면 정찰 부대 소속이 아니어도 누구나 한번쯤은 간다는 정찰 임무를 한 번도 수행한 적이 없었다.

그가 일부러 하기 싫다고 압력을 가한 건 아닌데 빼준다고 하니까 굳이 나서지 않았다. 정찰 업무는 초현실적인 능력을 가진 염원가들 사이에서도 선호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그러니까 정찰 부대가 따로 있음에도 인원이 부족해서 늘 사방팔방에 지원을 요청하지.

가끔은 자원봉사자를 뽑기도 한다고 들었다. 특히 감화자는 정찰 부대뿐만 아니라 대마수토벌부대 전체를 봐도 인력이 부족하다. 군에 입대한 감화자보다 입대하지 않은 감화자의 수가 훨씬 더 많으니, 군내에서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바깥 사회에서 인재를 끌어오는 것이다.

출동과 실전이 반드시 동반하는 대마수토벌부대는 일반 부대에 비해 특히나 험한 꼴을 많이 보는 편이지만 다들 대마수토벌부대 휘하 중에서도 정찰 부대가 제일 심각하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지브릴은 지원을 가본 적이 없으니 그냥 풍문으로 들었을 뿐이지만 듣기만 해도 하기 싫어지는 업무였다.

던전은 오만 군데에 다 생겨난다. 사람이 있든 없든 차별 없이 공평하게 무작위로. 인명피해가 우려되는 도시나 근교는 던전 대책이 잘 세워져있고 거의 마수가 나오자마자 몰살된다.

던전이 새로 생기는 일은 거의 없지만 만약 새로 생긴다고 해도 누구보다 빨리 전조증상을 탐지해내고 던전이 생길 때까지 아예 그 앞에서 죽치고 있는 것이 대마수토벌부대의 역할이다. 하지만 대마수토벌부대라고 할지라도 전국에서 발생하는 모든 전조증상을 관측할 수는 없다. 전조 증상은 던전의 등급에 따라 아주 희미하거나 짧은 경우도 더러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수로 인한 피해 최소화가 부대의 가장 큰 목표이기에 대부분의 인력은 인구를 중심으로 배치되어있다. 그러면 인구가 적은 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오지나 산지 같은 곳은? 인력이 상주하기는 힘들겠으나 방치할 수도 없었다.

등급이 높을수록 오래도록 강력한 전조증상이 발생하고 등급이 낮을수록 그 반대가 된다. 다시 말해 설령 전조증상이 사막 한가운데에서 발생한다고 해도 던전의 등급이 높다면 전조증상을 관측하기 어렵지 않다. 전조증상이 생긴 직후에 발견하지 못하더라도, 던전이 열리기 전까지만 대비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등급이 낮은 던전의 경우 미처 전조증상을 관측하기도 전에 마수들이 튀어나와 민간인을 해칠 수도 있다. 아무리 등급이 낮은 마수라도 민간인에게는 생명이 걸린 위협이 되기에 반드시 대응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대마수토벌부대에서는 정찰 임무만을 수행하는 정찰 부대를 별도로 운영 중이다. 전조증상을 관측하기 힘든 곳, 다시 말해 인구가 적은 곳, 다시 말해 사람 살기도 힘든 곳을 돌아다녀야하기 때문에 지원자가 적은 편이다. 거의 오지탐험 수준이라나. 이것이 정찰 부대가 수시로 지원을 요청하는 이유였다.

진즉에 순간이동 염원을 좀 갈고닦아둘걸 그랬나. 그러면 그냥 산이면 산 어귀, 사막이면 사막 입구에서 죽치고 있다가 이상이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왔을 때만 순식간에 이동해서 마수를 때려잡으면 될 텐데. 염원가라도 모든 일을 원하는 대로 이룰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지브릴은 그릇이 꽤 큰 편이라 마음만 먹었으면 시간이나 거리 제한 없이 순간이동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차도 있고 포털도 있다. 지브릴은 굳이 순간이동 능력을 갈고닦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이동 관련 염원을 등한시했다. 순간이동은 모든 인간이 염원하는 초능력 중 하나인데도-실제로 염원가가 되고 가장 먼저 익히는 특기 이외의 염동력 순위 상위권에는 순간이동이 반드시 들어간다-순간이동에 필적하는 부를 가진 지브릴은 배부른 소리를 하다가 낭패를 보게 된 셈이다.

물론 징계까지 받고 지원을 나가는 건데 그런 꼼수를 부렸다가는 강등이나 감봉이 아니라 제명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군대에서 쫓겨난다고 생계에 지장이 생기진 않지만 지브릴은 되도록 오랫동안 본인의 특기를 마음껏 발휘하며 살고 싶었다. 이런 욕심이 그를 염원가로 만들었기에 이번에는 순순히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실수 한 번으로 이게 웬 망신인지.

심지어 징계를 받았어도 지브릴의 계급은 그대로였기 때문에 그는 지휘관의 입장으로 정찰 부대를 지휘해야만 했다. 덕분에 본의 아니게 휴무를 얻은 정찰 부대의 지휘관은 지브릴을 거의 은인으로 여길 기세였다.

아무리 지브릴이 지휘관이어도 정찰 업무는 처음이기에 그가 동행을 하긴 하지만, 결국 현장에서 구르면서 지휘를 해야 하는 사람은 지브릴이었다. 본인의 부대를 내버려두고 남의 부하를 이끌고 처음 하는 일, 그것도 아주 힘든 일을 해야 하다니 몹시 가혹한 징계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이게 끝이 아니다. 지브릴은 이번 정찰 업무에 봉사를 하러 오는 염원가를 호위하라는 임무까지 할당되었다. 뭐? 감화자가 아니라 염원가를 호위하라고?

군대에 한해서 감화자는 수가 무척 적은 편이니 감화자가 봉사 활동을 하러 오는 건 이해를 하겠다. 염원가는 특기가 전투계열이다 뭐 이런 동기라도 있지 감화자는 무조건 비전투인력이기에 굳이 입대를 할 이유가 없으니까. 봉사를 하러 오는 감화자는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감화자도 아니고 염원가가 봉사를 하러 왔다고? 그런데 싸우러 온 염원가를 내가 왜 호위해? 들어 보니 염동력을 쓸 수 없단다. 그러면 염원가가 아니지 않아? 특기는 물론이요 염동력조차 쓸 수 없는 사람이 정찰 업무에 왜 지원을 했는데?

계속 들어 보니 그쪽 집안에서 후원금을 무지막지하게 내면서 견학을 해보고 싶다고 했단다. 그래서 마수랑 쉬지 않고 싸우는 전장에 보내느니 힘은 들어도 비교적 안전한 정찰 임무에 동반시키기로 했다는 것이다. 기가 막혀서 원. 군대가 돈 많은 놈들 놀이터야? 역시나 돈이 많은 지브릴은 말을 잃었다. 안 그래도 힘든 정찰 일을 혹까지 달고 하게 생겼다. 내 팔자야. 단전에서부터 깊은 한숨이 내려앉았다.

 



정예서는 성인이 되고도 몇 년이 지날 때까지 염원가니 감화자니 던전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그는 평범하게 대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한 직장인이었다. 비록 첫 직장이 너무나 고달파 위염을 비롯한 짐들을 얻었지만 이직한 직장이 좋은 곳이어서 차근차근 회복하는 중이었다.

겨우 좋은 직장에 정착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정예서에게 커다란 시련이 들이닥쳤다. 그가 감화자의 능력을 깨우치고 만 것이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대한민국에서는 모든 염원가와 감화자가 공무원으로 직종을 변경해야만 한다. 강제 입대를 해야 한다는 소리다. 이미 군대에 다녀왔는데 재입대를 해야 한다니. 심지어 직업 군인이라니. 게다가 염원가와 감화자는 일반 부대도 아니고 대마수토벌부대라는 특수부대에 배치된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그새 정이 든 직장 동료들과 이별을 고하고 입대한 부대는 생각보다 마냥 나쁘지는 않았다. 대마수토벌부대가 특수부대 중에서도 유달리 특수한 곳이어서 다행이었다. 게다가 정예서는 전투인력도 아니기에 험한 꼴을 볼 일이 거의 없었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정예서는 감화자로서의 그릇이 꽤, 아니 아주 큰 편이었다. 때로 과한 신체 접촉을 요구하는 염원가를 제외하면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가진 그릇이 크고 에너지가 넘치다 보니 모두가 그를 귀하게 여겼다. 위에서는 부려먹기 좋은 인재로서 정예서를 반가워했고, 염원가는 그에게 에너지를 받기 위해 비위를 맞추려고 하였으며, 감화자는 그가 상당량의 업무를 소화해내 일거리가 줄어들었다는 점에서 점수를 크게 주었다. 정작 정예서는 주변인들의 업무적인 호감에 둔한 편이지만 말이다. 가족들의 걱정과는 달리 정예서는 나름 성공적으로 부대에 적응해나가고 있었다.

그래, 이제 겨우 적응을 했나 싶었는데 눈을 떠 보니 낯선 천장이었다. 예? 어떻게 이런 일이? 누군가의 염원에 휘말렸나? 그가 속한 특수부대는 염원가들이 우글우글하니까 남의 염원에 휘말리는 일이 종종 있기는 했다. 하지만 군대에서 휘말릴 만한 염원 중에 자고 일어나 보니 낯선 천장이 보일만한 일이 있던가...?

게다가 염원가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염원을 아무렇게나 휘두르지 않는다. 특히 전장이 아닌 곳에서의 염원 사용은 엄격하게 금지되어있다. 연습을 하는 장소도 까다롭게 통제되어있고. 정예서는 웬만해서는 전장에 차출되는 일이 없고 연습 장소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근무하므로 염원에 휘말릴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운데...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야.

“도련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세상에, 21세기 현대 사회에서 도련님 소리를 듣는 사람이 실존할 수 있단 말이야? 정예서는 진둥한둥 몸을 일으켰다. 그래 침대 위에만 있어서는 아무 일도 해결되지 않는다. 다행히 주변을 둘러보니 오늘 입어야 하는 것 같은 옷이 정갈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우와, 무슨 방이 우리 집 거실보다 크네. 정가네 삼 남매가 사는 집도 결코 좁은 편이 아니지만 이곳에 비하면 단칸방에 가까웠다. 당장에는 방이 넓은 것이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말이다. 정예서는 침실에 딸려 있는 모든 문을 열어 젖혀 겨우 욕실을 찾아냈고, 거울을 보고 경악했다.

이 엄청난 미남은 누구세요?! 머리는 윤기가 차르르 흐르는 금발이고 눈은 심지어 보라색이었다. 자안紫眼을 가진 사람은 진짜 드물다고 주워들은 기억이 나는데. 세상에, 천연 자안은 진짜로 아름답구나. 이렇게 잘생겼으면 연예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했는데 정예서는 연예인에는 영 관심이 없었다. 특히나 외국 연예인은 더더욱.

그러고 보니 여기 대한민국이 아닌 건가? 염원가들의 노력으로 세상에 언어 장벽이 없어진지는 오래지만 언어 장벽이 없어졌다고 국가 장벽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남의 몸에 들어오는 것도 불법 출입국으로 잡혀가나?

정예서는 너무나도 혼란스러운 나머지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일단 씻기 위해 움직였다. 어떻게든 원래 몸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눈곱도 떼지 못한 채 가만히 얼만 타고 있을 수는 없었다.

잠깐만, 빙의는 보통 웹툰이나 웹소설 클리셰 아니야? 염원으로 빙의에 성공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 애초에 자신의 빙의를 염원할 만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고. 설마 나 지구도 아닌 다른 별세계에 떨어진 건 아니겠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눈앞의 미남은 정예서에게 초면인 남자였다. 적어도 그가 읽은 웹툰이나 웹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 비주얼이면 무협은 아닐 테고-애당초 그는 무협 장르를 즐겨 읽는 독자가 아니었다-일단 건물의 양식은 현대에 가까워 보이는데... 하지만 현대판타지라는 장르도 있으니 방심할 수는 없었다. 현대인의 필수품이자 소울 메이트라는 핸드폰이 보이지 않아서 더 불안했다.

아무튼 샤워부스에 들어간 정예서는 비치되어있는 비품을 전부 한 번씩 덜어 제형을 관찰하고 냄새를 맡아보고 손으로 비벼보고 나서야 원하는 제품을 찾아낼 수가 있었다. 어째서 병에 샴푸 린스라고 적혀있지 않은 거지? 부자들의 세상은 참으로 어려웠다.

어영부영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왔으나 제 시간에 맞췄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재촉이 두 번 이어지지는 않았으니 괜찮은 거 아닐까? 몇 시에 맞춰서 나가야하는지도 모르겠고 방 안에 시계가 보이지도 않아서 급한 마음에 문을 벌컥 열고 나가니 기다란 복도가 이어졌다. 

완전 궁전이네 여기... 양 옆을 두리번거리던 정예서는 다행히 복도 바깥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찾아냈고 그쪽으로 방향을 정해 걸어 나갔다. 통로가 끝나니 과장 보태 운동장만한 거실이 등장했다. 방이 우리 집 거실보다 넓더니 거실은 우리 집만 하네...

“식사는 하고 출발하셔야죠.”

“예, 네...!”

저쪽에서 아까 들었던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리나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가보니 주방으로 추정되는 곳이 나왔다. 그런데 이제 조리를 하는 공간과 다이닝 룸이 별도로 있는, 우와, 진수성찬이다!

정가네 집안도 아침밥을 든든히 먹는 편이긴 하지만 이곳도 그에 못지않았다. 오히려 반찬의 가짓수가 더 많은 것 같기도 했다. 다행히 일정에 늦지 않은 모양이니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속담을 실천해도 될 듯싶었다.

정현서가 봤으면 얘는 이상한 데서 깡이 세다니까, 라고 혀를 끌끌 찼을 법한 상황이었다. 빙의를 당했는데 밥이 넘어가냐 넘어가? 당연히 넘어가지! 밥을 먹고 힘을 내야 빙의를 풀든지 말든지 할 수 있었다. 적어도 정예서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잘 먹겠습니다!”

정예서의 발랄한 인사에 식사를 준비해준 중년인이 조금 놀란 기색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주 찰나였고 시선은 금방 떨어졌지만 정예서는 아차 싶어졌다. 이 몸의 주인은 음식에 환장하는 성격이 아니었나? 밥을 이렇게 많이 차려놓고 먹는데도? 시무룩해진 정예서는 조심스럽게 식사를 이어갔다.

그래, 이만한 부잣집 도련님이 음식에 환장하는 것도 이상하긴 하겠다. 언제든지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었을 텐데. 정예서는 반성하며 아주 얌전하고 조신하게 아침 식사를 이어나갔다. 물론 행동거지만 조심했을 뿐이지 먹는 양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상 가득 차린 걸 깨끗하게 비웠다는 뜻이다.

“잘 먹었습니다.”

아까의 실수를 떠올리며 이번에는 조용하게 인사를 했다. 그러나 주방에서 일을 하다 돌아온 듯한 중년인은 깨끗하게 비워진 식탁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나 또 뭐 잘못한 거야? 원인을 알 수가 없어 슬그머니 도망치는 걸 선택했다. 중년인도 금세 표정을 갈무리하고 별다른 첨언 없이 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럼... 그럼 난 이제 어디로 가지? 아마 외출을 해야 하는 거 같은데... 저쪽이 현관문이겠지? 상식적으로 그렇잖아. 그럼 양치하고 바로 나가면 되나? 정예서는 일단 원래 왔던 길로 돌아가... 아니 반대편 복도로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과정을 거쳐 원래 있던 방으로 돌아가 양치를 하고 나왔다.

“도련님, 차 준비되었답니다.”

“네, 갈게요.”

다행히 중년인이 외출 시간까지 고지해주셨다. 정예서는 현관문 쪽으로 추정되는 방향을 향해 걸었고, 다행히 복도에서처럼 헤매는 일 없이 출입구에 다다랐다.

“혹시 제 핸드폰이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마지막으로 문을 나서기 전, 핸드폰의 위치를 물어보기로 했다. 양치를 하면서 핸드폰이 있을 만한 곳을 온통 뒤져보았음에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곳의 배경이 현대인 건 분명하니 핸드폰이 없지는 않을 것 같은데...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부자들은 핸드폰 안 쓰나? 드라마 보면 본부장님 같은 분들도 핸드폰은 가지고 있던데.

“...주인 어르신께 언질은 드려 보겠습니다.”

그런데 중년인의 낌새가 심상치 않았다. 이번에는 안쓰럽다는 듯한 표정을 잠깐 짓더니 갑자기 주인 어르신을 소환했다. 아마 이 몸의 아버지 되는 분을 말씀하시는 거겠지?

아무튼 이 사람에게 당장 쓰는 핸드폰이 없다는 건 알겠다. 그것도 스스로 필요 없다고 판단해서 안 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타의-높은 확률로 저 주인 어르신-에 의해서 못 들고 다니는 거라는 것도.

정예서는 핸드폰으로 하는 일이 많은 편이 아님에도 갑자기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현대인에게 핸드폰을 빼앗는 건 자유를 빼앗는 처사 아니야?

그는 불편한 마음으로 쭈뼛쭈뼛 집을 나서 현관 바로 앞에 준비된 차에 올라탔다. 차도 엄청나게 비쌀 것 같은 고급 외제차였다. 정확히 얼만한 가치를 가진 차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브랜드의 차였다.

“짐은 최대한 가볍게 꾸렸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네, 다녀오겠습니다.”

중년인의 말을 듣고 보니 옆 좌석에 커다란 배낭이 하나 있었다. 나 어디 여행 가는 건가? 부자들도 배낭여행을 가나? 정예서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리고 차가 출발하자마자 운전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 저희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요?”

“포털로 이동합니다.”

“...포털이요? 차로 가지 않고요?”

“예, 부대는 차로는 진입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포털이요? 부대요? 정예서는 계속 말꼬리를 잡으며 되묻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 포털을 사용해야지만 갈 수 있는 부대라면... 완전 특수부대 아니야? 예비군 소집 때도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했는데 포털로 이동이라니...

애초에 이런 부잣집 도련님이 왜 군대에 가는 거야? 여기가 어느 나라에 속하는지, 지구이기는 한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일반적인 의무입대나 자원입대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러면 짐을 배낭 한가득 싸서 갈 리가 없으니까.

“대마수토벌부대로 가나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부대에서 염원을 통해 이동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는 알아냈다. 이곳이 별세계가 아니라 정예서가 살던 세계라는 것. 연락할 수단이 있으면 얼마든지 정가네 집안에 연락을 할 수 있을 듯싶었다. 헉, 갑자기 회귀와 빙의가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설정은 아니겠지? 형이나 은서가 태어나지도 않았다든가 하는 거 아니겠지?

정예서는 불안한 마음으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괜찮아, 그래도 최악의 상황은 아니잖아. 여기가 어디든지 대마수토벌부대에는 전문 염원가들이 즐비하니까 조언을 얻을 수 있을 거야. 이런 비현실적인 상황은 염원을 통한 결과일 수밖에 없으니까. 분명히 순조롭게 해결될 거야.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염원가와 만날 일도 없는 평범한 일반인한테 빙의했으면 훨씬 갈피를 잡기 힘들었을 테니까.

정예서는 부지런히 자기암시를 걸었다. 패닉에 빠져있어 봤자 집으로 돌아갈 가능성만 낮아질 뿐이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어떻게든 집으로 돌아갈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터였다.

차는 열심히 달려 도심 외곽의 한 포털에 멈춰 섰다. 부대 전용 포털인지 주변에 군인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군인의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하긴, 군인들이 군대 안팎을 오갈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대마수토벌부대는 출동이 잦은 부대이긴 하지만 그나마도 염원을 통해 이동하는 때가 많지 포털을 쓰는 일은 적었다.

“예서 페네티안 씨 맞으십니까?”

“네, 네? 예...”

정예서는 자신의 이름이 들려오자 반사적으로 아는 척을 했다가 곧 혼란에 빠졌다. 어깨에 걸친 배낭이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이 몸의 주인이 나랑 이름이 똑같다고? 이것도 빙의랑 연관이 있겠지? 적어도 이름 때문에 빙의자 티가 날 일은 없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빙의 사실은 되도록 들키지 않는 편이 좋을 테니까... 좋은 거 맞겠지?

“곧 지휘관님께서 마중을 나오실...”

“당신이 예서 페네티안이야?”

병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껄렁거리는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뭐야? 정예서는 살포시 구겨지는 미간을 차마 단속하지 못했다. 말투부터 설렁설렁 걸어오는 자세까지 무엇 하나 무례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전투복을 차려 입은 남자는 무척이나 근사한 외양을 지녔다. 딸기빛 금발에서는 윤기가 났고 붉은 눈은 루비 같았다. 딱 벌어진 어깨와 두툼한 덩치는 타이트한 전투복 밑에서 더 빛을 발했다. 키도 정예서, 아니 이 몸보다 커서 시선이 저절로 위로 올라갔고 자수정으로 추정되는 귀걸이가 과하지 않게 어우러졌다. 군인인데 장신구를 해도 되나 싶긴 하지만.

그러나 어깨까지 닿는 머리카락은 정돈하지 않아 아무렇게나 뻗쳐 산발에 가까웠고 전투복의 매무새는 잔뜩 흐트러져있었다. 정예서는 군복이라는 것이 저렇게까지 흐트러질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보통 군복은 일부러 망가뜨리지 않는 이상 알아서 각이 잡히던데. 아무리 근사한 미모를 지녔어도 사람 꼴이 이러니 무례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습니다만.”

“어지간히 철없는 도련님같이 생기긴 했네. 따라와. 짐은 그게 다인가?”

“뭐라고요?”

“짐은 그게 다냐고.”

“...예, 그렇습니다.”

사람 면전에 대고 뭐라고? 뻔뻔해도 이렇게 뻔뻔할 수가 없었다. 정예서는 당장에 반박을 하고 싶었으나 저쪽에서 말을 돌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얌전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 이런 것에 일일이 반응하지 말자.

은서도 그랬잖아. 병머끔? 아무튼 상대방이 먹을 수 있는 관심을 주지 말라고 했어. 관심을 주식 삼는 사람 중에 제대로 된 인간 없다면서. 정예서도 동의하는 바였다. 관심을 좋아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으나 관심에만 매달리는 사람은 비틀어진 구석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한테서 떨어지지 마. 나는 경고했어.”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데요?”

“난 경고했으니까 그 이후 일은 내 책임이 아니지.”

금발의 남자는 포털 위에 서서 정예서에게 으르렁거리듯 경고했다. 이걸 경고라고 할 수 있나? 거의 협박 아니야? 정예서도 지지 않고 대거리를 했다. 당신이 내 상관도 아닌데 순순히 말을 따를 거 같아?

심지어 정예서는 원래 있던 부대에서도 계급이 꽤 높은 편이었다. 대마수토벌부대에서 능력 좋은 감화자는 귀한 취급을 받기 마련이었다. 그는 이례적인 초고속 승진 가도를 밟은 엘리트였다. 이런 무뢰한은 정말이지 생전 처음 조우하는 것이었다.

지금 내가 어디서 구르든 말든 방치하겠다는 소리지, 저거? 들은 바에 따르면 지휘관인 거 같은데 사령관이 자기 부대에 속한 사람한테 이렇게까지 무책임해도 돼? 이쪽 군대는 질서라는 것이 없나? 이 몸의 주인이 입대한 건 아닌 듯하지만 아무튼 저 사람이 이끄는 부대와 같이 행동하는 모양인데... 아니, 부대 소속 군인도 아닌 민간인이라면 오히려 더 잘 챙겨줘야 하는 거 아닌가?

남자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염동력을 흩뿌렸다. 이내 포털이 작동하고 정예서는 순식간에 낯선 군대 한복판에 떨어졌다. 군은 어딘가 어수선했다. 분명히 어딘가로 출정을 나가는 낌새였다. 자신의 등에 매달린 배낭으로 추측컨대 던전 때문에 출동하는 건 아닌 듯했다. 마수를 토벌하기 위함이었다면 이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었을 리가 없다. 이미 현장에 도착했겠지.

대마수토벌부대에서 마수 토벌 말고 하는 일이 또 뭐가 있었더라? 대마수토벌부대는 특수성 때문에 어느 나라를 가나 하는 일이 비슷하기 마련이었다. 국가 간 협동을 하는 경우도 많고 말이다. 전투인력한테 연구를 시킬 일은 없고... 상주하는 부대는 출동이 아니라 파견을 나가니까 굳이 본대에서부터 무장을 하고 갈 필요는 없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남자의 뒤를 따라 가보니 군장을 하고 있는 부대원들이 보였다. 등에 거의 자기 몸만 한 배낭을 멘 모습들을 보니 그제야 감이 왔다. 외박을 상정하고, 외부인까지 데리고 가는 임무라고 하면 정찰 임무밖에 없었다.

정예서도 종종 정찰 임무에 따라간 적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정찰 임무를 기피하지만 그렇기에 정예서는 정찰 임무에 자원했다. 정예서가 가면 세 명 가야 하는 일도 한 명 가고 끝낼 수 있는 상황이 된다. 동료 감화자들의 상태가 좋지 않으면 먼저 나서서 정찰 임무를 나가고는 했다.

게다가 똑같은 험지에 간다고 해도 다른 감화자들보다는 자신이 더 좋은 대우를 받았다. 정예서는 대부분 안전한 숙소에 머물렀고 정찰은 염원가들이 알아서 하고 돌아왔다.

가끔 던전을 발견하면 현장까지 출동하기도 하는데 그때도 염원가들이 알아서 모셔가서 고이고이 되돌려놓았기에 정작 정예서는 정찰 임무를 크게 힘들어한 적이 없었다. 기껏 좋은 능력을 타고 났으니 충분히 감수할 만한 정도였다. 오히려 위에서 정예서의 쓰임새 범위가 좁아진다고 탐탁지 않아 했으나 현장에서는 정예서를 반겼으니 막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어떨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외국에서는 종종 내부에서 동원할 수 있는 감화자가 부족하면 외부에서 초빙을 하기도 한다고 들었는데 그건가? 한국에서는 모든 감화자가 강제로 군에 소속되니 외부인을 들일 필요가 없었지만 말이다.

“염동력도 못 쓰는 짐덩이 데리고 다녀주는 걸 고맙게 알아.”

“저기요, 그거 지금 감화자 차별 발언입니다.”

남자가 눈을 뾰족하게 뜨고 불만스레 내뱉은 발언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이 세상에 감화자 귀한 줄 모르는 군대도 있단 말이야? 감화자는 전 세계적으로 수가 부족한 인재였다. 모든 감화자를 의무적으로 군대에 집어넣는 대한민국에서도 감화자의 수가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정예서가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부족한 일손을 확연하게 덜어주는 존재니까.

“뭐? 염동력 못 쓰는 염원가라며.”

“염동력을 못 쓰는 염원가도 있습니까?”

“...이 망할 윗대가리 놈들은 인생에 도움이 안 돼. 전달하다가 중간에 말이 꼬였나 본데.”

어, 설마 예서 페네티안은 감화자가 아니라 염원가였나? 급하게 감화력을 일으켜보았는데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정예서가 들어와 있는 예서 페네티안은 제대로 된 감화자였다.

남자는 뒷머리를 벅벅 긁더니 상부를 욕했다. 어딜 가나 군의 상부에는 제대로 된 사람이 없는 모양이다. 무능한 상부 덕분에 얼버무릴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었다.

자신의 힘을 모르거나 숨기고 사는 감화자도 많다. 예서 페네티안 씨가 그런 경우였다고 하면 본의 아니게 폭로해버린 것이 미안해서 고개를 못 들었을 텐데. 만만다행히 저쪽에서는 행정상의 기록과 자신의 이력이 달라도 크게 개의치 않는 낌새였다. 휴, 살았다.

“뭐 아무튼 변변찮은 능력이니까 여기로 보냈겠지.”

“아니거든요.”

보통 성인이 되기 전에 자질을 발현하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별안간 벼락이라도 맞은 듯 감화자가 되었지만 정예서는 스스로 하는 일에 자부심이 있었다. 은서는 자의식과잉 예방하고 광명을 찾자고 했지만 정예서가 꽤 뛰어난 감화자라는 데에는 아무도 이견을 붙이지 않았다. 이건 지표로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이었다. 누가 자신을 깎아내리는데 가만히 있을 만큼 형편없는 실력은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의 에너지를 받아 특기를 발휘하는 염원가들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구하는데. 저런 발언은 자신에게 에너지를 받는 염원가까지 싸잡아서 욕하는 행위였다. 그래서 더 기분이 나빴다.

정예서는 신묘한 힘으로 사람들을 위해 싸우는 염원가를 마음 깊은 곳에서 존경했다. 그리하여 그는 감화능력이 좋은 편이었고 더 많은 염원가들에게 감화력을 나누어줄 수 있었다.

물론 모든 염원가가 사명을 가지고 싸우지는 않는다. 특히나 염원가라면 무조건 군대에 넣고 보는 대한민국에서는 더더욱. 그런데 그런 대한민국도 아니고 어딘지도 모르는 타향에서 자신이 감화자로서 염원가에게 품은 존경심을 싸그리 싹싹 밟아버리는 이를 만날 줄이야.

“하아, 이걸 그냥 숙소에 처박아둘 수도 없고.”

“보통 정찰 가면 감화자는 숙소에 있지 않습니까?”

“그러다 눈먼 마수한테 습격당하면 어쩌려고? 내 곁이 제일 안전해. 고생은 하겠지만.”

정예서가 아는 척을 하자 남자가 눈썹을 들썩였다. 그런 것도 알다니 의외라는 표정인데. 확실히 군 외부자는 그다지 알 일이 없는 정보긴 했다. 저 남자는 지켜주겠다는 말도 정말 삐딱하게 하는구나. 이 몸의 주인이 염원가라는 사실을 안 이상 되도록 감화자로서의 능력은 쓰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이 부대에 자신 말고도 감화자가 충분히 있어야 할 텐데...

“저 말고 다른 감화자도 갑니까?”

“당연한 거 아니야? 부대 측에선 당신이 염원가인 줄 알았다고.”

그건 맞는 말이었다. 자신이 감화자인 줄 몰랐다면, 아니 감화자가 될 줄 몰랐다면 당연히 최소 한 명 이상의 감화자를 정찰 부대에 편성했을 것이다. 위급 상황이 닥치면 당연히 정예서도 떨쳐 일어나 활약하겠지만 그때도 저 남자에게는 에너지를 주고 싶은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지휘관이니까 어지간히 능력이 좋겠지. 자신의 도움 따위는 저 치도 필요 없을 것이다. 저런 지휘관 밑에서 일해야 하는 가엾은 염원가들에게나 감화력을 제공할 테다. 정예서가 소심하게 뒤끝 발휘를 다짐하는 동안 슬슬 부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예서의 합류가 마지막 절차였던 모양이다.

“출발한다. 내가 앞장설 테니 자리를 이탈하지 말도록. 특히 당신.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옆에 붙어있어.”

“알겠다니까요.”

사실 정예서는 알겠다고 대답한 적이 없지만 일단 불퉁하게 대꾸했다. 저쪽에서 자신의 체면을 생각해주지 않는데 이쪽에서 존중을 해줄 이유가 없었다. 상관의 태도가 삐죽거려서인지 정예서를 보는 부대원의 시선도 그다지 곱지 않았다. 안 그래도 험지로 나가야 하는데 시작부터 삐걱거려서 어떻게 될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정예서는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했다. 아무튼 이번 정찰 임무에서 살아 돌아와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리고 틈을 봐서 염원가 부대원을 붙잡고 빙의에 대해 운을 띄워봐야겠다.

정찰 부대는 대마수토벌부대 중에서도 어지간한 실력이 아니면 살아남지 못하는 곳이다.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 염원가 부대 중에서도 엘리트 부대에 떨어진 셈이니까 운을 띄울 수만 있으면 큰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예서는 남자의 곁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서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는 이름이 뭐지? 정예서의 의문과 함께 붉은 빛의 염원이 출동 준비를 마친 부대원 전체를 감쌌다. 정예서는 반사적으로 염원의 근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지팡이를 든 남자가 팔을 휘두르고 있었다.

어? 부대의 이동 전문 염원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이 사람 혼자서 이 많은 인원을 이동시킨다고? 눈을 깜빡이자마자 또 다시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부대는 목적지와 가장 가까운 주둔지에 짐을 내려놓은 뒤 재차 남자의 염원에 힘입어 이동했다. 이번 임무는 울창한 산지부터 시작되었다.





지브예서인데 로스나 왕자님이 트럭 몰고 끼어드는 원고입니다.

추후 보시는 분들 캐해에 따라 로스예서로 보일 수도 있는 장면이 나오니 구매에 참고해주세요.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저 너무 스포하고 있나요?

원고 시작부터 이름이 나와서 그냥 로스예서라고 표기했는데...ㅠㅠ)


지금 퇴고 중이라서 문장이나 문단 구성이 조금 바뀔 수 있는데...

사실 그럴 시간이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에 안들긴하는데ㅠㅠㅋㅋ


직장인분들은 대체 어떻게 원고를 하시는 거예요?!

이 단말마는 모든 휴일을 원고에 쏟아붓고 있는 왕복 3시간 출근러 사회초년생의 비명이며...


1화에 그먼씹같은 세계관 설명만 있는 거 같은데 이게 저의 최선이었습니다....ㅠㅠ

뭔가 시간이나 이런 것이 괜찮으면 뒤에 조금 더 올릴수도 있고...

그런데 이 시간에 퇴고를 더 해야하는 게 아닌가 싶고...


제발 이런 저를 견뎌주시고 저와 함께 지브예서해주세요(우뚝 서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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