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이별의 계절에 나를 만났다. 붉고 노란 것들 사이로 발갛게 익은 도톰한 양 귓불이 의미 없이 내 눈에 들어왔다.

너를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인연은 낡고 오래된 것이었다. 네가 날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원망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아직 명랑하던 스물의 청년으로 되돌아간다면 너를 조금이라도 아는 체 했겠지만 나는 시간을 받아들였고 입가 주름이 깊어질수록 웃음 또한 줄였다.

십 대처럼 보얗고 앳되었던 너의 얼굴은 세월을 아는지 나처럼 늙어버렸지만, 여전히 너는 어려 보였다. 시간만으로는 숨길 수 없는 맑음이 있나 보다, 너는. 그 설명할 수 없는 힘이 너를 내 눈에 담아버리게끔 하겠지. 넌 시선을 끄는 능력이 있다. 그건 태생적인 것 같았다.

너의 까만 머리카락이 완전히 뒤로 넘어가 나를 눈에 담기 전에 나는 발길을 돌렸다. 넌 나를 발견해선 아니 된다. 네 손에 쥔 담뱃갑은 마치 이계의 물건처럼 낯설었다. 새삼스레 다가온 지나온 세월이 와닿았다. 지금의 나는 완성되었지만 그때만큼 미친 듯이 달려가진 못할 것이다. 그땐 숨이 벅찰 만큼 힘든 줄도 몰랐다. 더 천천히 걸어가도 좋았는데, 지금껏 쌓아온 기반을 통해 착실히 나아가는 지금의 나에게 어린 난 엉망진창으로 넘어지며 달려가는 어리고 작은 청년일 뿐이다. 하지만 그때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지금 딛고 서 있는 환경이 단단할 수 있었을까?

"수정아?"

너는 나를 과거로 되돌린다. 26년 전, 정열과 의욕으로 넘쳐 주위를 둘러보지 않았던 나로.

"유학 간다고 한 뒤로 몇 년 만에 보는 거야? 이수정 맞지?"

"윤지야."

성대는 여전히 젊었던 목소리를 회상한다. 천천히 시간을 먹으며 가슴에 불을 지핀다. 그만큼의 열정은 이제 필요가 없는데.

"한국은 언제 돌아왔어?"

"어제."

"어떻게 지냈어?"

"그냥……."

길에서 대화하긴 너무 긴 내용이다. 나는 따라오라 손짓하고는 앞장서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너는 손에 쥐고 있던 담뱃갑을 숨기듯 주머니에 욱여넣고는 나를 따라왔다. 뒷덜미가 유독 서늘했다. 긴 머리를 처음 잘랐던 때가 슬그머니 떠올랐다.

너는 미술치료사 은퇴를 곧 앞두고 있다고 말했다. 미술치료사라는 직업이 너를 당연히 수식하는 말처럼 입에 달라붙었다. 늙은 사람이 너무 오래 자리를 잡아선 어린 친구들이 들어서기 힘들어진다며 너는 소탈하게 웃었다. 반백이 다가온다 해도 아직 수전증조차 오지 않은 너를 보며 약간의 아쉬움이 밀려왔다.

너는 그 누구보다 전문적이고, 감성적인 치료사였을 테지. 쌓아왔던 경력이 아깝지 않은지 너는 그저 웃으며 턱 언저리에서 사륵거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희끗희끗 보이는 새치가 너도 나와 같이 늙었구나, 새삼 느끼게 했다.

나는 휴가를 얻어 귀국했다고 알려주며 너의 깊은 눈동자를 피해 눈을 굴렸다. 한국으로 돌아온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젠 돌아가셨지만 아버지는 여자 혼자 해외에 나가면 험한 꼴을 본다며 기어코 비행기를 타고 따라와 나를 데리고 돌아왔다. 가출하려던 나를 붙잡은 엄마는 아버지 몰래 내 손에 돈을 쥐여주셨다. 내 열정에 맘이 흔들렸다고 했다. 그렇게 낡은 것들을 싫어하던 당신의 딸은 속칭, 꼰대가 되었다.

너는 내 직업을 자세히 묻지 않았다. 다행이라 여겼다. 나는 너에게 내 직업에 대해 자랑하고 싶지 않았다. 너에 대한 일종의 예의이자 호의였다.

"얼굴이 많이 여위었네. 괜찮아?"

"뭐, 살만해. 이 나이에도 일할 수 있으니 다행이지."

너는 아직도 어릴 적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나에게 무언가를 물어볼 때 너는 미간의 점이 씰룩거릴 정도로 살살 눈웃음을 짓곤 했다. 어릴 땐 그게 참 싫었는데, 이제는 그저 곱다. 어린 학생들을 보아도 참 그렇다. 어린 것들이 그 나름대로 풋풋한 것처럼 네 시간도 풋풋하게 멈췄나 보다.

"그때 기억난다. 어릴 때 말이야. 수정이 너 하나도 안 변했구나?"

"내가?"

너의 말은 낯설었다. 나조차 찾지 못한 어렸던 나와 지금의 공통점은 너는 어떤 시야에서 찾아낸 것일까. 오히려 변하지 않은 것은 너뿐일 텐데.

"그때도 비밀이 많았잖아. 유학 가는 이유도 말 안 해줬고……."

"한국에서는 내 꿈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았어. 그래서 떠난 거야."

"그래? 나는…좀 외로웠는데……."

대학을 다니는 여학생 수가 아직 적던 때였다. 당시 너와 나는 유일한 여학생이었고 수시로 작업이 걸려오곤 했다. 그때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며 절대 애인을 사귀지 말자고 약속하고는 활짝 미소지었다. 우리는 서로 친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연애하기에 우리는 너무 숨 가쁘고 힘들었다. 주변 친구들은 대학에 올라간 나를 부러워하며 남자들 물은 어떻냐고 묻기만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몸과 의식을 먹어 치워가는 그것이 못 견딜 만큼 싫었다. 그래서 도망쳤고, 너를 그곳에 혼자 남겨버렸다. 생각보다 네가 잘 지내고 있던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두 번째 비행기가 올라가던 그 날은 오늘처럼 단풍이 짙었다. 너에게 인사라도 하고 헤어질걸, 뒤늦은 생각에 후회가 뒤따랐다. 오늘에라도 보았으니 좋은 일 아닐까? 나는 너에게 큰 미련을 두기 전 자리에서 일어나 너 몰래 갖고 나가겠다고 주문한 커피를 받아 상표가 쓰인 겉 종이에 내 번호를 적어 건네주었다.

"내 번호야. 이제 폰도 있으니까 연락해. 국제전화로 가서 좀 비싸겠지만."

"잠깐, 수정아."

분명 말로만 나를 부른 것인데 왜 네가 내 옷자락을 잡은 것 마냥 발길이 멈출까. 두툼한 패딩 모자 뒤로 네 모습이 보였다. 네 눈은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내 마음이 일부러 가린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마중 나가도 될까?"

"맘대로 해."

몇 년 전 끊은 것 같은 담배를 피우고 싶어졌다.




창작 GL

단풍-가을, 이별, 변화, 시간

이래서 현대를 못 쓴다. 고증은 날려 먹고 하지만 중년 GL은 보고 싶고……. 왜 수정이 직업이나 지금 있는 곳을 얼버무렸냐고요? 글쎄요. 작가가 어리석어서..? 하지만 현대…쓰고 싶었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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