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천관사복 4부- 정발기준, 11권 이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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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종일 비가 왔다.

백의 청년은 쏟아내라는 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연신 차가운 비를 맞으며 홀로 땅 위에 우뚝 서 있었다.

"전하"

그러는 그에게로 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백의 청년의  차가운 목소리는 그의 몸을 따라 흐르는 빗물보다도 더 차갑게 들렸다.

하지만 이내 곧 그의 몸 위로는 단 한 방울의 빗물도 떨어지지 않게 되었다.

검은 옷의 소년이 어디서 났을지 모르는 조그만 우산을 가져와 그의 머리 위로 씌워주었기 때문이었다.

백의 청년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빗물에 온통 젖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그의 몸에 한 방울의 빗물이 더 튀지는 않을까 걱정을 하며 더욱 우산을 청년에게로 바짝 들이 밀며 입을 열었다.

"비가 내립니다. 전하, 안으로 들어가시죠."

그 말을 들은 백의 청년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그야말로 지금 그가 쓰고 있는 희비면과 다를 바 없는 표정이 되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흘러내린 비는 소년의 가면위로 하염없이 떨어져 그가 웃고 있음에도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그것은 얼굴에 덮어진 가식적인 가면이니까 이 표현은 옳지 못할 수도 

하지만 왠지 백의 청년은 그가 실제로 가면, 그 속에서도 울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울어? 왜? 대체 왜? 겨우 비를 맞는 것에? 

이미 수많은 검을 가슴에 박아본 적도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어 본 적도 있다.

고향을 잃었다. 친구를 잃었다. 

....그리고 부모 마저 잃었다.

숱한 지옥 길을 걸어왔다. 그런데 겨우 비를 맞는 것 따위가 뭔 대수라고

백의 청년은 가면 밑에서 자조적으로 웃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밑에는 작고 초라한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밟혀 엉망이 된 하얀꽃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것 따위가 뭔 대수라고

그런 것 따위가 뭔 대수라고 

그런 것 따위가 뭔 대수라고 

백의 청년은 사정없이 그 꽃들을 밟아 짓뭉갰다.

그러며 백의 청년은 한 걸음 한 걸음 떼며 우산 밑을 벗어나왔다.

빗물이 다시금 그의 몸을 세차게 때려댔다.

가느다란 빗물인데도 지금 이 순간, 빗물 하나하나는 다 날카로운 검이라도 된 양 그에게 부딪쳤고 그런 빗속을 걸으며 우습게도 그는 아픔을 느꼈다.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그 순간, 소년이 그를 향해 소리쳤다.

"전하!"

그제야 끝없는 고통 속에서 벗어난 청년은 아니, 사련은 소년을 향해 노기 어린듯 혹은 증오인 듯 소리쳤다.

"다시는! 이런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라."

외로운 땅 위에 홀로 서 있던 영혼이 하나가 사라지자 그 자리에 남은 망혼은 떠난 영혼의 자취를 쫓아 하염없이 그 자리를 지켰다.

그러다 문득 그런 망혼은 그가 짓밟고간 꽃들 사이에서 연약하지만 강한 그리고 순박하면서도 아름답게 피어있는 하나의 꽃을 발견했더랬다.


이제는 더이상 그자리에 살아있는 영혼도, 망혼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떨어지는 빗속에서 한 허름한 우산만이 자리를 지킬뿐.

.

.

.

태자전으로 돌아온 사련은 목욕통에 따뜻한 물을 가득 채우고는 하나씩 옷가지를 벗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라도 차가운 빗속에서 장시간 서 있었더니 몸이 부들부들 떨려오는 것에는 어쩔 수 없었기때문에.

긴 상복을 벗고 옷가지를 하나씩 하나씩 끌어내렸다.

빛이 날 듯 뽀얀 어깨가 드러나고 서서히 옷은 흘러내려 탄탄한 허리 그리고 골반을 따라 이윽고 길고 매끈한 다리를 지나 바닥으로 스르륵 떨어졌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한사코 반은 울고 반은 웃는 희비면은 벗지 않았다.

청년은 나른한 발걸음을 옮겼고 그러면서 그는 천천히 욕조를 붙잡고는 그 길고 매끄러운 다리부터 차분히 욕조에 집어넣었다.

촥아악.

욕조의 물이 흘러넘쳐 바닥을 가득 메우는 소리가 고요한 방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이때 갑자기 문이 열렸고.....

 때마침, 이 문을 열고 들어온 갑작스러운 방문자와 집주인은 참 난감한 상황에 눈을 마주치게 되었다.

"....."

"....."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전... 전하..! 전..." 

소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얼굴을 돌렸고 그제야 사련도 정신을 차렸다.

사련은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부끄러움과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지만 그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것도 잠시, 사련은 도대체 이제 와서 수치심이나 부끄러움이 무슨 소용일까 생각하며 한순간 제가 느꼈던 감정을 떠올리자 다시금 짜증과 화가 나기 시작했다.

사련은 몸을 따라 흘러 내리는 물기조차 닦지 않은 채 소년에게 다가갔다.

소년 무인은 분명 그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컸지만 아직 자라나는 대나무처럼 그는 무척이나 젊었고 혈기도 왕성했다.

그러면서도 불긋하게 솟아오는 그의 것만큼은 전혀 '소년'답지 않았다.

그 모습에 사련은 잠시 멈칫했지만 그것도 잠시, 사련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나를 보고 욕정했나?"

사련은 지금 이말을 하며 머리에서 열이 날 정도로 얼굴이 붉어졌지만 어차피 그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렇다면 상대는 제 이런상태를 전혀 모를 터.

그렇게 사련은 화풀이라도 하듯이 그에게 부러 더 날을 세워 말했다.

"저... 저는..."

분명, 소년 무인은 평소와 달리 눈에 띌 만큼 크게 당황했었다.

그래서였을까? 사련은 그런 소년을 보며 무슨 생각인지 빠르게 가면을 살짝 들어 올려 소년을 얼굴위로 입을 맞추었다.

비록 직접 얼굴에 입을 맞춘 것이 아닌, 가면위에 한 것이었지만 소년은 마취라도 된 양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져버렸다.

그러자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련은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

'됐어. 그만하자.'

그렇게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를 챙겨입고 밖으로 나가려는 그때, 사련의 뒤로 길고 늘씬한 손이 뻗어져 나와 그를 끌어당겨 안았다.

갑작스러우면서도 당황스러운 접촉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아주 조금만 힘으로도 풀려버릴 듯한 그 손을 보며 사련은 입을 열었다.

"놔라."

"...." 소년은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사련에게는 닿지 못하였다.

"놔!"

소년이 자신의 말을 무시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소년의 손을 내치고는 싸늘하게 방을 걸어 나갔더랬다.

소년이 홀로 남은 방안은 소름이 끼칠정도로 무척이나 고요했다.

하나, 그 어둠이 내려앉은 곳에서도 소년은 무엇하나 근심걱정이 없는 태도로...

마치 신이 내린 한줄기의 빛을 잡은 것처럼 그가 내친 손을 다른 한손으로 조심스럽게 끌어안고는 경건하게... 그리고 숭고하게도 다시금 '그 말'을 중얼 거렸다.

빗속, 하얀 꽃에 우산을 씌워주며 하염없이 그에게 전하고 싶었음에도 닿지 못했던 그 말을...

"전하, 저를 믿으세요."

"전하, 저를 믿으세요."


"전하... 저를 믿으세요."


판타지와 동양풍을 좋아하고 중벨을 좋아하는 독자 1호. 읽을만한 책이 없어서 내 취향대로 글을 적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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