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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저녁 냉장고에 그나마 남아있던 식자재들이 모두 떨어져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집을 나올 때는 하늘이 붉은색이더니 이제는 남색 빛만을 띄었다. 겨울이라 금방 어두워지니 곧 검은색으로 까맣게 변할 거다.

깜빡-

빨간색에서 초록색으로 변한 신호등의 불빛을 보면서도 시즈쿠는 선뜻 횡단보도를 건널 수가 없었다. 옆에 서 있던 아이가 시즈쿠를 의문 어린 눈으로 쳐다보다 엄마의 손을 잡고 횡단보도를 폴짝이며 건넌다.

“이제 스즈요가 없잖아.”

유일하게 의지가 되었던 어른이 이제는 없다. 토우지는 솔직히 의지가 되기보다는 그냥 동지나 이 시궁창 바닥의 전우 같은 느낌이라 어른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본인도 자신이 몸만 큰 덜된 어른임을 알 거다. 검은 아스팔트 도로 위 규칙적으로 그어진 흰색 선들을 밟으며 나아가는 사람들을 여전히 멀뚱히 보며 서 있었다.

깜빡깜빡-

깜빡거리던 초록불이 다시 빨간불이 되고 뭐가 그리 급한지 차들이 급하게도 달려간다. 속도를 높인 차들이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밟으며 지나간다. 사람들은 여전히 멈춤 없이 움직이고 그것은 차 또한 마찬가지. 오직 시즈쿠만이 한 자리에 서서 무료한 낯으로 신호등을 응시한다. 신호등의 새빨간 불빛이 유독 시선을 잡아끌었다.

“집에 가기 싫을 때는 어쩌지.”

손에 들린 스즈요가 마음에 들어 하던 노란색 장바구니를 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스즈요는 병아리 색 같다며 노란색을 좋아했었지. 스즈요랑 어울려, 따뜻하고 귀여운 색이야. 점점 어두워져 감에도 여전히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가만히 서 있는 게 꼭 혼자 덩그러니 버려져 고립된 것 같았다. 모두 도착할 목적지가 있는데 나 혼자 방향을 몰라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 같아.

손에 들린 장바구니를 내팽개치고 주저앉아 온몸을 웅크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모든 걸 외면하며 주저앉아 다 회피하고 싶었다. 내가 왜 버텨야 해? 아- 그래. 메구미가… 있지. 메구미를 떠올리며 애써 충동을 억눌렀다. 모든 걸 버리고 그냥 떠나버리고 싶다는 생각과 메구미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충돌했다. 두 생각이 부딪힐 때면 언제나 승리하는 것은 후자였다. 메구미는 스즈요의 아이니까. 스즈요가 남겨두고 간 보물이니까.

깜빡- 깜빡-

신호등이 바뀌며 다시 초록불을 띠었다. 손에 들린 장바구니를 다시 고쳐 쥐고 다른 사람들을 따라 신호등 저편으로 걸었다. 시즈쿠는 막연하게 밀려오는 공허함이나 어딘가 텅 빈 감정들을 곱씹고, 느끼며 천천히 걸어갔다. 반대 측에 도착해 뒤돌아보니 어쩐지 길게 느껴졌던 길이 짧아 보였다. 차가운 바람이 날카롭게 볼을 스쳐 지나갔다.

아, 집 들어가기 싫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정하게 웃으면서 맞아주는 스즈요도 없고, 토우지는 폐인이 돼서 가끔 술 마시고 도박하러 나가는 거 아니면 그냥 멍하게 누워만 있고. 메구미를 생각하면 지금 당장 들어가야 하지만 집에 토우지가 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집으로 향하기 싫어 괜히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무작정 걸었다. 발길이 가는 대로 걷다 보니 나오는 익숙한 공원의 모습에 시즈쿠는 결국 울상을 지었다.

“여기도 스즈요랑 왔던 곳이잖아.”

산책을 좋아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시원한 밤공기를 좋아해서 토우지와 스즈요, 셋이서 자주 산책을 하고 했었다. 이 공원은 그 산책을 자주 했던 곳이었다. 근처의 벤치에 털썩 앉아 무의식적으로 꽉 쥐고 있던 장바구니를 옆에 내려두었다. 주먹을 하도 꽉 쥐고 있어서 손을 피려 하니 손가락의 관절이 뻑뻑했다.

조금 추운가. 술식과 체질 탓에 춥지는 않지만 왜인지 추운 것 같았다. 하루가 시작되면 밥을 먹고 학교에 가고, 식신을 써서 주령을 제령하고, 메구미를 돌보고, 먹거리가 떨어지면 장을 본다. 그것들을 해나가며 언제나처럼 쓰던 웃는 가면이 오늘따라 답답했다. 가면을 쓰는 것 따위 익숙하다 못해 숨 쉬듯이 하던 일인데도 말이다.

“스즈요 앞에선 진심으로 웃었는데…. 이런 가면 따위 필요 없이, 진심이었는데.”

아무런 의미 없는 일상의 반복은 소리가 안 나는 피아노를 두고 삐걱거리는 나무 건반을 멋대로 두드리며 엉터리 소음을 내는 것 같았다. 몇 분이 흘렀을까. 아니, 몇 시간이 흘렀을지도 모른다. 온통 깜깜해진 하늘에 벤치 옆 가로등이 깜빡깜빡 불을 밝혔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벌레들이 반짝이는 가로등의 불빛에 달려들었다가 몸이 타올라 그대로 죽어버린다.

“시간이 늦었는데 여기서 뭐 하는 거지.”

“…”

얼굴을 덮고 있던 손을 살짝 내려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의 주인을 보았다. 고전의 선생이라던 야가 마사미치였다. 저번에 계약서를 작성할 때 만난 후로는 처음이었다. 시즈쿠가 대답 없이 손으로 다시 얼굴을 덮었다. 묵묵부답인 모습에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간 건가… 어차피 지금은 피곤하게 당신 상대할 기분이 아니었어.

“받아라.”

“아.”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자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아온 건지 야가가 음료를 건네고 있었다. 멀뚱멀뚱 그걸 올려다보다 재차 건네는 모습에 얼떨결에 음료를 받았다.

칙- 달칵.

건네받은 음료를 손에 쥐고 멍하니 보다 캔 뚜껑을 따고 한 모금 입을 축였다. 팥이네, 완전 아저씨 입맛. 텁텁하던 입안에 고소한 팥의 끝맛이 맴돌았다. 이 사람 지금 나 신경 써 주는 건가…? 왜?

“…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만 털어놓을 곳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라.”

야가에게서 그의 명함을 건네받고 그가 가로등 빛이 들지 않는 곳으로 사라지는 걸 멀뚱히 보았다. 다소 느릿하게 시선을 굴려 손에 쥐어진 캔 음료와 명함을 번갈아 보았다. 손에 쥐어진 명함은 그의 성격을 대변하듯 어떤 꾸밈도 없이 그저 정보만이 적혀있었다. 멋없어.

팥 음료를 몇 모금 더 마시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함을 품에 쥐고 벤치에 올려두었던 노란색 장바구니를 다시 들었다. 집이나 갈까…


야가는 처음 만났을 때의 시즈쿠를 단어로 정의하자면 ‘오만’이라 칭할 터다. 그만큼 본인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오만할 정도로 엄청났다. 그만큼의 실력은 확실하지만….

그래서 우연히 지나가던 길 공원의 벤치에 혼자 앉아있는 모습이 마음에 걸린 것도 있었다. 그렇게 자신감 넘치던 아이가 상처받은 표정으로 웅크리고 있는데 그냥 지나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직 입학하지는 않았지만, 저 아이도 자신의 제자가 될 아이였다. 야가는 말재주가 뛰어나지도 않았고 누군가를 위로하는 걸 잘하지도 못했다. 그러니까 명함을 건넨 건 그의 서툰 위로 중 하나였다. 이야기를 들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면 자신에게 연락하라는.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옆에 있어 주자니 그 아이는 자존심이 강해서 그걸 싫어할 거고 어쭙잖은 위로를 건네는 건 안 하느니만 못하다. 아이에게 왜 그러고 있는지 물어보는 것도 불가능. 야가는 자신의 손에 들린 아이에게 건네준 음료와 똑같은 캔 음료를 보며 단팥은 너무 고리타분한가 머쓱함을 느꼈다. 그래도 마시던 모습을 보면 그렇게 나쁘지도 않았을 거라 애써 생각했다. 나름 미래가 유망한 아이들을 가르치고 교육을 시키기 위해 선생이 되었다. 몇 년간 선생 일을 하다 보니 여러 아이도 만났다. 자존감이 낮아서 일부러 허세를 부리는 아이, 언제나 밝고 활기찬 아이, 현실을 냉정하게 보며 비관하는 아이, 주술사답게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아이 등등. 꽤 많이 만나보았다.

뭐, 주술계에서 지내면서 상처 없는 이가 어디 있을까. 아마도 그 아이도 나름의 사연이 있을 것이고 자신은 모를 어떠한 일 때문에 그렇게 있던 걸지도 모른다. 주술계에 발을 들인 이들은 대다수 각자의 슬픔과 사연을 가졌으니까.


+)

“내 명함은 멋없다 뭐라 하더니.”

야가가 눈을 가늘게 뜨며 시즈쿠의 명함을 노려봤다. 야가의 모습에 시즈쿠가 능청스레 웃었다. 아이, 참. 선생님 그거 아직도 꽁해 있었어요?

“심플한 게 베스트죠. 게다가 전 글씨가 간지 나잖아요? 선생님의 딱딱해서 고지식해 보이는 명함보다는 낫죠.”

좋게 말해서 심플이지 선생님 건 구리다고요. 꼭 뒷말을 붙여 야가를 약 올린 시즈쿠는 결국 야가에게 꿀밤 한 대를 맡고서야 입을 삐죽이며 끝냈다. 검은 바탕의 명함에 시즈쿠의 이름이 푸른색의 멋스러운 필기체로 적어져 있었다.

清川 雫 (세가와 시즈쿠)

아무리 멋스럽게 적어졌다지만 야가의 명함처럼 상당히 단순한 모양새였다. 야가의 것은 하얀 바탕에 딱딱한 검은 글씨로 그의 이름이 적어지고 뒷면엔 그의 직업과 메일 번호가 적어져 있었다. 시즈쿠의 것은 앞면에는 이름이 뒷면에는 메일 번호만 달랑 적어져 있어 야가의 것보다 더 단순하다 못해 심심해 보였다.

‘뭐… 선생님 영향이 없는 건 아니지.’

상당히 그녀에게 영향을 줬던 야가와의 두 번째 만남을 떠올린 시즈쿠가 목덜미를 멋쩍게 쓸었다. 야가는 모를테지만, 그때 그의 서툰 위로는 그녀에게 꽤 의미 있었다. 엄청 큰 위로까지는 아니어도 그녀가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게 했으니. 뭐, 평생 말할 생각은 없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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