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욱한 제자가 성황 신령님을 뵙습니다."

보잘것없는 돌무더기 앞에 정중히 절을 올린 현걸이 고개를 들자, 백발이 새하얀 노인이 어느새 그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꾹 다물린 입과 성난 눈썹은 현걸이 봐왔던 신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그의 비틀린 심사를 알아차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으레 노여움을 품은 신을 만나면 그에게 연유를 묻고 달래어 일을 해결하는 것이 순서였으나, 이번에는 반드시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었다.

"'그것'을 알고도 그냥 두셨습니까?"

긴 세월 동안 다스리고 보살핀 곳에서 방치당한 신이 느낀 모멸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터. 그런데 이제는 그곳을 전부 철근과 돌로 밀어버리겠다고 하니 고약하고 괘씸했을 것이다. 처음 이 마을에 당도한 현걸이 느꼈던 것처럼.

"그래."

돌아온 것은 근혁이 설마 하며 아니길 바란 답이었고, 현걸이 짐작하며 눈을 질끈 감은 진실이었다.

이 마을은 신에게 버림받았다.

객사하여 제사상도 받질 못하는 떠돌이 혼들이 먹을 거라곤 가끔 던져지는 고수레*나 성황신에게 치성을 드리고 남은 음식뿐인데, 이마저도 주민들이 서낭나무를 모시지 않으면서 끊겨버렸다. 신령도 못 먹는 밥을 한낱 잡귀들이 어디서 얻어 먹겠는가. 굶주림에 지친 그들은 어느날부터 저들끼리 뭉치더니, 뭐라도 먹겠다고 마을과 산을 헤집으며 혼을 닥치는 대로 삼키기 시작했다.

"하여 그저 두었다."

한입에 삼켜진 닭이 자빠져 죽고, 아래를 뜯어 먹힌 염소가 다리를 절어도 그저 두었다. 호통 한 번에 한데 뭉친 혼을 다 풀어놓을 힘이 있으면서, 그저 괘씸했기 때문에. 현걸은 덜덜 떨리는 손을 다소곳이 모으고 다시 한번 고개를 조아렸다.

"오늘 밤을 넘기면 사람이 죽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두시고 도와주십시오……. 일이 끝나면, 점안식도 치르겠습니다. 성대하게 굿을 열어 노닐게 해드리겠습니다. 제발, 제발……."

목소리를 쥐어짜 간청하는 사이 숲에서 큰 소리가 울렸다. 급히 뒤를 살피는 현걸의 얼굴은 죄 눈물로 젖어 들어 마른 곳이 없었건만, 그를 내려보는 신령의 눈은 더없이 차갑고 건조한 낯이었다. 다른 때라면 될 때까지 버티고 섰을 테지만 시시각각 근혁의 생사가 오가고 있었다.

결국 현걸은 결의로 얼굴을 굳힌 채 고개를 들었다.

"신명을 거스르실 참입니까."

그 한마디를 뱉은 순간 전신이 꽉 짓눌리는 압박감이 덮치는 동시에 코에서 피가 쏟아져 내렸지만 현걸은 이를 악물고 버텨내었다.

"신령님 나무 아래에서 뛰놀던 마을의 아이가 어느새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부를 탐하느라 신을 버렸다고 생각하십니까?"

개발이 없었어도 사라졌을 마을. 근혁의 말이 아니었다면 현걸 자신도 되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 마을이 지금 어떤 곳인지,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어떤 심정일지 모른 채 그저 노여워만 했겠지. 돌봐줄 자식도 없이 홀로 남은 노인들이 어찌 힘과 돈이 있는 이들과 싸워 이길 수 있으랴. 살기 위한 타협이 죄악이라고?

"가난과 굶주림이 어찌 죄가 됩니까. 이곳의 주민들은 모두 보상금 그마저도 없다면 오갈 곳이 없는 이들입니다."

평생을 살아온 고향을 등지고 떠나야 하는 이들의 마음이 어찌 몇 해 쓰지도 못할 돈 앞에 무너졌겠는가.

"없는 살림에도 음식을 차리고, 아픈 몸을 이끌고 돌을 쌓은 분이 계십니다. 그 마음을 아시기에 나무를 떠나 여기 계신 것이 아닙니까!"

거친숨을 씨근덕대며 벌떡 몸을 일으킨 현걸은 입술을 깨물었다. 환심을 사기 위해 빌고 애원해도 모자라건만, 이상하게도 치미는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 이번에는 지켜내고 싶었는데, 그랬는데…….

미안, 근혁아.

그 사과의 말을 듣지 못할 근혁이 몸 곳곳에 다정과 염려를 담아 둘러준 비방을 꽉 움켜쥔 현걸은 쏟아낸 피를 닦아내며 두려움 한 점 없는 눈으로 제 앞에 선 신을 마주한 채 입을 열었다.

"원하신다면 그저 여기 계십시오. 하늘의 뜻을 등지고, 구할 수 있는 인간들을 다 외면하시고서요. 대신 저와 제 친구가 지킬 겁니다. 죽어서 이 혼백이 다 찢기는 한이 있어도 대신 막아낼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현걸은 날뛰는 숲을 향해 다시금 내달렸다.


* * *


거대한 몸체의 다리를 노리던 근혁은 제 머리를 잡아채려 뻗어오는 손을 피해 잽싸게 몸을 돌렸다. 몇 차례 땅을 구르느라 반쯤 만신창이가 되었건만, 다리 하나도 제대로 썰지 못했으니 큰소리친 게 머쓱할 지경이었다.

'생긴 것과 다르게 더럽게 빠르네.'

하지만 그런 불만을 내뱉을 틈도 아쉬웠기에 근혁은 투덜거리는 대신 자신의 눈앞에 알랑거리는 그것의 손가락을 이로 잡아채며 마구 칼을 내리꽂았다. 정확하게 그리고 빠르게. 평소 늘 피에 담가 놓은 칼날로 날카롭게 혼을 가르고 베어내며 근혁은 기어이 자신이 물고 있던 놈의 손을 뜯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아아아악……!!"

그리고 그렇게 뜯어낸 손, 정확히는 실체가 생생한 혼을 으적으적 씹어대는 근혁의 입가에는 피가 흥건했다. 저게 무업을 하는 놈이 맞긴 한가? 오죽하면 이성이 거의 없는 존재가 당황할 정도로, 식귀(食鬼)를 하는 근혁의 모습은 실로 기이하고 살벌했다. 뼈가 바스러지고, 가죽을 질겅거리며 근육을 끊어놓는 기이한 소리가 사람의 입에서 들리며 근혁은 기어이 그 혼을 꿀꺽 삼켜내었다. 쉬이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한 하룻강아지가 이토록 사납게 목숨을 걸고 달려드니 아까처럼 달려들지 못하고 혼이 주춤거리는 찰나였다.

"근혁아!"

"너, 너 왜……."

턱 끝까지 숨이 차도록 달려온 현걸은 근혁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그의 손을 낚아채며 거침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저녁때보다 더욱 그림자가 짙어진 샛길을 따라서, 계곡의 물소리를 향해서.

"안전하게 차에 있으라니까, 여길 왜 왔어!"

"혼자보다는 둘이 나으니까!"

그렇게 외치며 검은 숲을 내달리는 둘의 꼴은 가관이었다. 한 놈은 인중과 하얀 소매에 피범벅, 다른 놈은 입가와 목을 따라 검은 셔츠에 피범벅.

이게 다 무슨 꼴이람!

뒤에서는 어떻게든 자기들을 잡아 죽이려 쫓아오는 괴이한 것의 울음이 들리는데 이상하게도 처음의 두려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근혁은 다시금 꽉 맞잡은 현걸의 손을 타고 오는 온기를 원동력 삼아 거친 숨을 토해냈다. 홀로 쓸쓸한 개죽음 맞을 각오로 오른 산이었는데…….

"현걸이 네가 위험하면 내가 편하게 못 죽잖아!"

근혁이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어느새 바로 뒤까지 따라잡은 '그것'이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그건 내가 할 말이야, 근혁아."

아직 겨울의 냉기가 다 가시지 않은 차가운 계곡물에 느닷없이 처박힌 근혁이 고개를 드니, 물에 발을 담그고 제 앞을 막아서서 삿된 것을 마주한 현걸이 있었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망자의 거친 손이 부르르 떨리는데도 부릅뜬 눈을 깜짝하지 않은 현걸은 지난밤의 꿈을 되새겼다.

모든 물에서 뻗치는 악의는 무용하리라.

계곡은 흘러 강으로 뻗어 나가고, 강은 다시 바다로 향하니. 용신의 가호를 받는 현걸은 하나로 뭉쳐 괴로움에 울부짖는 혼백의 거대한 어깨 너머에서 자신들을 지켜보는 이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정말 이들을 이대로 두실 겁니까?"

이미 많은 업을 진 영혼들이다. 저대로 방치했다가 정말 사람을 해하게 된다면, 넋을 달래지 못하고 죄인이 되어 영원히 구천을 떠돌 테지. 지금이야 하나 되어 괴물과 다름 없게 되었지만, 본질은 그저 외롭고 배고픈 이들이 아닌가.

"여기까지만 하시게."

등 뒤에서 들리는 중후한 목소리에 현걸이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신의 목소리를 내는 근혁이 있었다.


* * *


차에 올라탄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를 한껏 뒤로 젖힌 뒤 벌러덩 좌석에 누운 채 서로를 마주했다. 간밤 살 떨리는 공포, 그 개고생은 정말 허무할 정도로 쉬이 해결됐다. 오래된 신령의 큰 소리에 뭉쳤던 혼들이 와르르 무너져서는…….

"현걸이 네 고집 정말 대단하다."

"근혁이 너도 만만치 않았어."

동시에 말을 끝낸 둘은 키득키득 힘 빠진 웃음을 터뜨리다 긴 숨을 내뱉었다. 서낭신의 마음을 돌린 것은 현걸의 설득이 반이오, 나머지 회유는 근혁의 몸주신의 몫이었으니 공사 전에 마지막 치성굿과 점안식을 약속받은 신령은 순순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졸지에 근혁에게 오른손을 뜯어먹힌 혼백을 잘 달래주고서야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서로의 어깨에 기대 산을 내려오니, 어느 사이에 동이 튼 건지 해가 산꼭대기에 가까울 정도로 떠올라 있었다.

"흐흐……. 나 배 선생님께 호되게 혼나겠다. 쉬운 일이라고 데려왔는데 이게 뭐냐."

"근혁아. 있지, 지난밤의 일은 어머니께 말씀드리지 말자."

"어?"

휘둥그레 눈을 뜬 근혁을 향해 손을 뻗은 현걸은 잔뜩 핏자국이 번진 그의 입가와 뺨을 어루만졌다. 물론 처음부터 과한 일을 겪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품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었을 것들이고, 무엇보다-

"난 너랑 더 다녀보고 싶어. 그러니까 비밀로 하자."

"내가 싫어지지 않았어?"

느닷없는 근혁의 물음에 고개를 기울이던 현걸은 곧 급히 입가를 닦아내는 그를 보며 뒤늦게 알아차렸다. 왜 그토록 격 높은 신과 무당들이 근혁을 구박하고 심하게는 경멸하는지, 매번 과하다 싶게 담배를 태워 그 연기를 덮어쓰고 다녔는지.

"네가 식귀를 즐기는 것도 아닌데, 뭘. 피비린내도 거의 없는데 그것 때문에 흡연을 하면 어떡해? 건강 생각해야지."

"으응……."

늘 여유를 부리던 근혁이 처음으로 쭈뼛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얼굴에 약한 건지 현걸에게 약한 건지 구분이 안 되니, 나 원. 어쨌거나 현걸의 원대로 완벽범죄를 꿈꾸며 돌아가려면 당장은 피투성이가 된 몸을 씻고 옷을 세탁해야겠지만…….

"우리 일단 한숨 잘까?"

이번에는 근혁의 물음에 현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꿈에서 예지를 보는 게 두려웠고 여긴 강제로 잠들게 만들어줄 술도 없지만, 이상하게도 근혁이 손을 잡아주니 걱정 없이 잠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두어 마디나 더 나눴을까? 어느 순간 조용해진 차에서는 두 사람의 숨소리만 새근새근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을의 신령과 귀한 신들의 보살핌 아래에 불안한 그림자가 얼씬도 못 하고 멀어지니, 전날에는 느낄 수 없던 평화로운 고요가 번진 오후였다. 서로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꼭 맞잡은 손에서 흐르는 온기처럼 그렇게 하루의 날이 또 흘러가고 있었다.


*고수레 : 들에서 음식을 먹기 전 조금 떼어 '고수레'라고 말하면서 허공에 던지는 민간신앙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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