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탁-탁-


프리젠테이션과 함께 한창 진행 중인 회의. 그 회의를 집중하지 못하고 펜촉을 열심히 종이에 부딪히고 있자, 그 소리가 신경쓰인다는 듯 지민이 월의 옆구리를 찔렀다. 



저.. 대표님. 상당히 초조해보이십니다만..다른 이들 눈엔 이 회의가 상당히 불만족스러워 보일 것 같습니다..



아무도 듣지 못하게 월에게만 귓속말로 속삭이는 지민의 모습조차도 마치 발표자 입장에선 역시나 자신이 실수를 하고 있나 싶겠고. 설상가상으로 딸꾹질까지 나올 듯. 아 죄송합니다. 제가 갑자기 긴장이 돼서. 발표자가 수습해보려고 했지만 듣는 이나 하는 이나 불편함의 연속인 그런 회의가 되겠지. 그런 발표자의 심정은 아는지 모르는지 월은 지민의 귓속말에 한숨을 푸욱 내쉬기 바쁘다.







[들었겠지?]


[네. 백퍼요]








물어 뭐하겠나. 정국이 쓰던 수작이란 단어를 김석진이 썼는데. 그럼 말 다 한 거지. 자신과 헤어지고 나서 전남편과 잠을 잔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 근데... 자신이 석진의 애인도 아닌데 꼭 바람을 핀 거 같은 이 기분은 볼까.. 한마디로 나는 왜 이 회의장에서 눈치를 봐야하는 거냐구요..
















“…회의 잘 들었습니다. 진행 사항에 대해선 추후 다시 연락드리도록 하죠.”





잘 듣기는 무슨. 나중에 지민을 통해 다시 들어야 할 판인데. 제이그룹과 함께 진행하는 중국쪽 큰 건인데 제 일에 집중하지 못하다니 기분이 썩 별로였다.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하는 편인데. 공적인 공간에서 사적인 대화를 나눴다는 거 자체가 제 실수였으니 할 말은 없었다. 



자신의 마무리 정리 코멘트에 발표를 하던 제이그룹 팀장은 그제서야 안심이 됐는지 숨을 고르겠고. 더는 이 공간에 있기 불편한 월이 회의장을 급하게 나서면 얼마 가지 않아 누군가가 제 손목을 잡겠지. 뭐야. 하고 고개를 돌려보면 역시나 시선의 끝에 걸리는 건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듯 놓치지 않는 석진. 보는 눈이 있다보니 존댓말을 건네며 자신에게 말을 했을 듯. 














“저희 이야기 건으로 식사 약속 있는 건 잊지 않으셨죠? 이제 점심시간이니 1층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서대표님”



“….아..네”









아니 멘트를 그렇게 던지시는데 제가 어떻게 거절하냐고요. 지나가는 사원들은 모두 아 이 회의 관련으로 이야기 나누기로 했구나 자연스럽게 생각할 터이지만, 석진이 말한 이야기의 정확한 뜻을 아는 월이 입장에서 만큼은 그 식사자리가 달갑지 만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월의 옆에서 지민이 테블릿을 품 안에서 고쳐 잡으며 월에게 인사를 건넸을 듯. 


"어 그럼 대표님! 식사 잘하고 오세요!"


명백한 도망이었다.















사무실에서 가방을 챙겨 1층 로비로 나오니 세단 옆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석진의 모습이 보였다. 점심시간이라 로비 앞이 식사를 하려는 직원들로 붐볐는데 단연코 튀는 석진의 외모에 다들 수근거렸을 듯. 그 웅성거림이 전혀 신경도 안 쓰이는 지 석진은 그저 걸어나오는 월을 보고 조수석 문을 열어주기 바빴다. 












그리고 언제 예약한 건지 레스토랑에 들어가자마자 석진을 알아보고 바로 룸으로 안내를 해주겠고. 그렇게 식당에서 단 둘이 마주보고 앉은 월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하나 눈치를 보고 있었겠지. 


원래 같았으면 쫑알쫑알 두 사람 사이에서 대화가 주고 갔어야 하는게 정상인데 오늘따라 석진도 별 말이 없어 정적이 유난히 크게만 느껴졌다.












“엊그제 봉골레 먹고 싶다한 거 생각나서 여기로 온 건데. 아무래도 점심이니까 밥류를 선택할 걸 그랬나?”


“..아니? 좋은데요?”


“왜 갑자기 존댓말이지? 뭐 나한테 찔리는 거 있나봐”


“…내가 무슨..”











제 말에 즉각 반응하는 월의 모습이 석진의 눈에는 그저 귀여워 보이겠고. 솔직히 처음에 지민과 월이 주고 받은 대화를 들었을 땐 질투에 화가 나기도 했는데, 또 이렇게 제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딘가 모르게 기분이 풀리는 거 같은 기분. 



제 친구들이 여자친구가 몰래 클럽을 갔다며 엄청 화를 내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클럽을 갈 수도 있지 그게 그렇게 화낼 일인가 하고 공감을 못 하곤 했었는데. 이제서야 그 친구들의 심정이 이해가 가기 시작하는 석진이다. 



똑같이 화가 나긴 해도 금방 풀리기는 하네. 정답은 제 애인이 예쁘면 뭐든 오래 안 가는 거구나?
















“그래서. 수작엔 넘어갔어?”


“…응?”


“결론적으로 사귀냐고.”












너가 돌아간 시간이 새벽이었는데 그 시간에 네가 갑자기 정국을 보러 가진 않았을 거고. 딱 봐도 전정국이 월의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게 분명했다. 처음에 자신과 약속을 잡을 때 분명 그 자리에 정국도 함께 있었으니. 왠일로 정국이 주말에 잠자코 자신과 데이트 하는 걸 방해하지 않네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던 참이었다. 









'뭐. 양심의 가책이라도 있나. 월이 다른 사람 만나고 오는 걸 다 막지 않는 거 보면.'


이렇게 그냥 순순히 넘어갔는데. 그 밤중에 월의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은. 그냥 그날 늦었으니 어떻게서든 월을 돌려보냈으면 안됐나 뒤늦은 후회도 들었지만 어쩌겠어. 이미 잔 이상 물은 엎질러진 상황이었다.












제 물음과 동시에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주문한 파스타가 테이블 위로 세팅되고. 수저위에서 포크로 파스타를 돌돌돌 말던 월은 그제서야 석진의 물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보았다. 뭐 이건 사실인 거니. 이미 잔 것도 다 알고 있는 마당에 거짓말을 할 필요가 뭐가 있겠어.










그리고 물꼬가 터진 이상 그날의 일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을 줄 알았던 석진은 자신의 대답을 듣고 나서 그제서야 제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칼로 썰기 시작하겠지. 그런 석진의 모습에 월 역시 조금은 의아하다는 듯 석진을 쳐다봤을 거고. 멀뚱히 석진을 쳐다보고 있는 월 앞에 그가 내민 건 먹기 좋게 썰어진 스테이크 한 조각이었을 듯. 


"자 아-해"













“…왜 안 물어봐?”


“응? 뭐를?”


“어제 일에 대해서. 지민이랑 대화하는 거 다 들어서 궁금할 거 많을 거잖아. 근데 왜 하나도 안 묻냐는 말이야.”


“음.. 굳이 물을 필요가 있어?”














칼과 포크를 조심히 그릇에 내려놓고 양 손을 깍지를 낀 채 자신을 쳐다보는 석진. 그런 석진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겠는 월이다. 자신을 좋아한다면서.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랑 잤는데 이게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갈 일인가 싶은 거지.




자신도 그랬고. 분명 이 상황에서 정국이라해도 석진처럼 넘어가지는 못 할 것이다.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게 물 흐르듯 갑자기 식사에 집중할 타이밍이냐고. 자신처럼 삼켰다 하기에도 그의 표정은 아무렇지 않아보였으니까. 












“왜. 내가 너무 아무렇지 않아보여?”


“..뭐야. 나 사찰했어?”


“ㅋㅋㅋ표정이 너무 다 읽혀서. 미안.”


“아니 나는.. 좀 오빠가 신기해. 나였으면 안 그랬을 거 같거든. 설령 그게 정국이라고 해도.”


“나도 사람인데 처음엔 질투났지.”


“그런데?”


“근데 안 사귄다며 전정국이랑”


“…”


“잠까지 자 놓고 관계도 똑바로 못 잡는 새끼한테 내가 굳이 화낼 필요가 있나 싶어서.”















“내가 네 마음에 아무런 영향도 안 미치는 놈이었다면 네가 지금 이렇게까지 나를 신경쓰지는 않았겠지. 그거면 충분히 대답이 되기도 했고.”







약자에도 강하고 강자에도 강했다더니. 석진의 말을 듣고 있으니 정말 저 사람은 강한 사람이구나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지. 제 마음에 돌을 던졌는데 파도가 일렁이는 거 없이 그대로 그 돌을 삼켜 흔적도 없애버렸으니. 새삼 느껴지는 깊이에 월 역시 놀랐다는 듯 석진을 바라보겠고. 그런 월의 얼굴을 확인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제 그릇의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하는 석진.












“근데 월아. 아까 회의 제대로 듣기는 했어?”


“…아니 솔직히 말해 못 들었어. 가서 박비서한테 다시 전달 받으려고”


“장회장이 지원하겠다고 한 거라. 내 생각엔 이건 받아들이는게 더 이득일 거 같거든. 아마 네 생각도 나랑 별 차이는 없을 거야. 중국 쪽 시장에서 장회장 입김은 피해갈 순 없으니까.”


“솔직히 제안만 얼핏 봐서는 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긴 했는데. 장회장을 직접 본 적이 없어서. 어떤 스타일인지 정확히는 파악이 안돼”


“장회장 일주일 뒤에 한국 오는데. 그때 소개시켜줄까?”


“오빠는 장회장 만난 적 있어?”


“응 몇번. 아버지 통해서 인사 드린 적있어. 이번엔 내가 아버지 대신 가니까 그때 내가 너 소개시켜줄게.”











지난 번 제이그룹과 함께 진행한 건이 성공적인 매출로 결과를 보여줬고, 중국 측에서 수출건으로 러브콜이 물밀듯 쏟아졌던 것도 사실이니. 일본, 대만에서는 이미 진행하고 있긴 하나, 중국은 석진의 말대로 장회장의 입김이 센 편이라 그와 친분을 쌓는 것도 나쁘지 않는 방법인 듯 했다. 이거 점심. 아무래도 내가 사야겠는데. 
























“여기 소화제요.”


“갑자기?”


“체하셨을 줄 알았는데. 아니에요?”


“맛있게만 먹고 왔는데.”


“…오.. 여기 미국이야? 왜 이리 쿨하지 다들?”










석진과의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오니 테이블에서 대뜸 소화제를 내미는 지민. 잘만 먹고 왔다고 말하니 지민 역시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으로 월을 쳐다봤겠지. 


아니. 그 사람. 진심이긴해? 이야기 다 들었잖아.







그런 지민의 반응을 보고 있자니 아까 석진의 앞에서도 자신이 저런 표정을 지어보였을까 순간 생각이 들겠고. 소화제 대신 다시 가져온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아까의 일에 대해 털어놨겠지. 야 지민아. 자기는 아무렇지도 않다는데.











“아니.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어? 좋아하는 여자가 전남편이랑 잠을 잤는데?”


“야 방음 안된다잖아. 작게 말해.”


“오케이. 데시벨 낮춘다. 그냥 이해하는 척 아냐?”


“아니. 정확히 이렇게 말하더라. 잠까지 자 놓고 관계도 똑바로 잡지 못하는 새끼한테 자기가 뭐하러 신경을 쓰냐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미친 전정국 한 방 먹었네”














데시벨 낮춘다면서 낮추기는 무슨. 결국 빵 터지고 만 지민. 그런 지민의 반응에 월 역시 자기도 놀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겠지. 지금 생각해도 참 대단하긴 했다. 이거는 이해심이 넓다고 봐야하는 거야. 자신감이 넘치는 거라고 봐야하는 거야. 뭐가 됐든 제 마음의 무게를 덜어주는 건 확실히 했으니. 배려심이 넘치는 경우라고 판단을 내리는 것도 맞을 듯 싶었다.


그리고 제 이야기를 듣고 팔짱을 낀 채 곰곰이 생각에 잠긴 지민. 그러다가 정리가 끝났는지 제 이야기를 털어놓겠지.












“솔직히 말해서. 너 잘못한 거 나는 없다고 본다. 바람이란 단어는 네가 애인이 있는데 다른 이성을 만날 때 쓰는 말이니까 해당 사항 아니고.”


“응”


“어장관리라고 하기엔, 지네들이 알아서 기어들어왔잖아.”


“어?”


“전남편이랑 무슨 관계인지 뻔히 다 알면서 그 마음 확실히 알고 싶다면 자기랑 자보자고 하는 김석진이나, 김석진이랑 무슨 관계인지 뻔히 다 알 건데 그거 알고 덤비는 전정국이나.”


“..”


“심지어 김석진은 너한테 죄책감도 가지지 말라했고. 전정국은 뭐 죄책감 가져야하는 놈이고. 결론적으로는 이 관계에서 속고 있는 사람 있어?”


“…없지?”


“네가 이러는 거 다 아는데도 성내는 사람없고. 지네도 동의하는데 이게 무슨 어장이야. 그니까 너도 그냥 다 자”


“푸흡. 뭐라고?”











다 자라고 말하는 지민의 말에 당황해서 커피를 뿜고 마는 월. 그런 월의 행동에 지민도 자연스럽게 제 앞에 놓인 티슈를 내밀겠고. 이럴 때 바로 챙기는 거 보면 비서가 확실히 맞기는 한데. 지금 대표한테 두 남자랑 다 자보라고 충고하는 것도 비서의 일이 맞나 싶은 월이지.











그리고 티슈로 제 입을 닦고 있는 지민은 여전히 제 생각은 틀린게 없다는 듯 말한다. 아니. 어차피 김석진이랑 자나 안자나 네가 전정국 선택하면 남남되는 건 같은 결과고. 전정국은 네가 김석진이랑 잤다해서 말 못할 거고. 걍 쌤쌤치고 없던 일로 하면 되지 않아? 










“지민아.”


“응?”


“미국은 지금 네가 간 거 같은데. 그게 말처럼 쉬워? 쿨하게 막 돼?”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나 좀 쿨한 거 같아. 서대표님. 미국 계약건은 없어요? 나 미국가면 인기 많을 거 같은데. 제 2의 인생이 시작될지도 몰라.”


“….말을 말자.”











사실 지민의 충고가 틀린 건 하나도 없긴한데,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어서. 아니 근데 또 다 큰 성인인데 내가 누구와 잠자리를 하는 걸 허락받고 해야하는 나이도 아니고. 


결국은 심란해진 마음을 다스리려고 지민이 그 사이 정리해놓은 회의 자료를 검토하는 월. 아 지민아. 금요일에 드레스랑 샵 좀 예약해줄래? 










드레스를 입어야 하는 스케줄이 있었나? 자신이 모르는 스케줄은 없었기에 지민이 고개를 갸우뚱하면 월은 시간과 날짜를 다시 한 번 체크한 후 말하겠지. 나 금요일 밤 8시에 장회장 만나러 가기로 했어. 
















수작 제대로 부린 정국..


일요일. 결국 꾹이는 앓아 누웠고. 오후가 되도록 월을 품에서 놓치 않고 그렇게 몸을 회복했다는 이야기..

오늘 편에 꾹이가 나오지 않은 건. 우리 꾹이도 열심히 일 중…월요일 오전에 석진과 월이 미팅이 잡혀 있는 거 까진 꾹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나저나 지난화 댓글에서 지민이도 남주에 넣자라는 말잌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저 대화에서 느껴지지 않나요. 울 삐약이 찐친 모먼트… 미국삐약이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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