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안!!”

 

복도가 쩌렁쩌렁 울렸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황제가 성큼성큼 걸어와서는 황녀의 방을 벌컥 열어재꼈다.

 

“꺄악! 아바마마?”

 

놀란 황녀가 립스틱이 번진 채로 뒤돌아보았다. 한창 꽃단장 중이었던 모양인지 장신구가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율리안! 너..! 어째서 아직도 준비가 끝나지가 않은 게야?! 파티의 주인공이 늦으면 되겠느냐? 귀족들이 어찌 볼 줄 알고! 왜 이리 철이 없어!”

“아...아직, 준비 중이었습니다..”

 

크게 호통을 친 황제에 곱디 고운 황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작은 소리로 더듬더듬, 준비하는 중이었다, 고한 황녀 율리안이 아버지 눈치를 보며 시녀를 재촉했다.

 

“크, 크흠! 알아들었으면 서둘러라. 파티 시작이 30분도 안 남지 않았느냐.”

“네...죄송해요, 아바마마..”

 

하나뿐인 딸의 성년식날에 소리를 지른 게 민망했는지 헛기침을 한 황제가 시무룩한 황녀에게 직접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네가 벌써 성인이라니, 감회가 새롭구나. 짐의 무릎 정도로 작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그렇지요? 저도 기뻐요. 제가 성년이라니..”

 

율리안 황녀가 수줍게 웃었다. 시녀들은 부녀가 단둘이서 오붓하게 대화할 수 있도록 재빠르게 화장을 도와주고 물러났다.

 

“아바마마, 정말로 제가 성년식을 치르고 나면 스스로 약혼자를 정할 수 있게 해주실 건가요?”

“그렇대도. 역시 마음에 둔 자가 있는 게냐?”

 

눈을 반짝이면서 묻는 황녀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인 황제가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그 순간, 황녀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그, 그야..아시잖아요..”

“그래, 그래. 알고 말고.”

 

붉게 물든 뺨을 한 율리안 황녀가 수줍은 얼굴로 황제의 팔을 붙들었다.

 

“아바마마, 저 성년이 된 기념으로 받고 싶은 게 있어요.”

“무엇인데 그러느냐?”

“..디어노레인 헤스턴 공작.”

 

황녀의 입으로부터 헤스턴이라는 성이 나오자 황제의 얼굴이 굳었다.

 

“저, 그 분과 결혼하고 싶어요.”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는 황녀를 마주 본 황제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딸의 어깨를 붙든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자..보거라, 나의 딸아. 아름다운 은발에, 황금처럼 빛나는 금안. 이 제국에서 너보다 아름다운 여인은 없단다.”

“아바마마...”

“헤스턴 공작의 반려 자리에 너보다 어울리는 이는 없을 거다. 그는 북부의 설원을 사랑하니, 분명 너를 사랑하게 될 거다.”

 

새하얀 북부의 설원처럼 하얗게 빛나는 은발에 입을 맞춘 황제가 황금으로 만든 티아라를 황녀에게 씌워주며 확신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대하렴, 이 아비가 반드시 그를 네 부군으로 만들어줄 테니.”

 

디어노레인 헤스턴의 반려는 제국의 제1황녀, 율리안일 것이라고.

 

북부의 공작님.

 

06화. 어디에나 길은 있다(2).

 

“리리아는 잘 하고 있을까..”

 

한편 디어노레인 헤스턴 공작은 무도회장 앞에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제국의 유일한 공작인 그는, 황족 다음으로 고귀한 혈통을 가졌기 때문에 입장 순서가 뒤쪽이었다.

 

“아이고, 각하. 손 닳겠습니다. 그렇게 걱정이 되십니까?”

“으음..그야, 모낙 상단주가 어찌 나올지 모르니 걱정이 될 수밖에..”

 

아이를 물가에 내놓은 것처럼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하는 그에 곁에 서있던 호시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민망한지 뒷목을 쓸어내린 디어노레인이 순순히 수긍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비비안 영애는 소심하고 여린 듯보이지만 그리 연약하지 않습니다. 각하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

 

호시의 그 말에 디어노레인은 오라버니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펑펑 울다가도, 금세 기운을 차려 도울 일이 없냐 물어보는 당찬 모습의 리리아를 떠올렸다.

 

당차고, 사랑스럽고, 소심하고 여린 것 같지만 강한.

 

“애초에, 북부에 오자마자 도망갔던 다른 영애들과 다르게 헤스턴 성까지 온 것만 봐도 보통 대단한 게 아니라니까요?”

“.....”

“척박하기로 악명 높은 이 북부를 좋아해주고, 마물까지 사랑해주는 사람이잖아요. 분명히 잘 해낼 겁니다.”

 

작고 연약한 것에 약하고, 정도 사랑도 많아 늘 따뜻하게 웃어주는 사람.

 

디어노레인은 잊을 수가 없었다. 리리아가 온 뒤부터 달라진 북부를.

 

“공작님. 저, 역시 북부가 좋아요. 너무 좋아요.”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북부가 너무 좋다는 사랑스런 목소리가.

 

그렇기에 디어노레인은 리리아와 계속 함께하고 싶었다.

 

리리아 비비안은 디어노레인 헤스턴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 나야..리리아를 믿지.”

 

디어노레인은 싱글벙글, 걱정 없이 웃는 호시를 마주본 다음, 걸음을 옮겼다.

 

“디어노레인 헤스턴 공작님 드십니다!”

 

전쟁에 참전할 시간이었다.

 

**

 

“그쪽, 아니 영애가 정말 헤스턴 공작의 약혼녀입니까?”

 

전쟁이라면 이쪽도 마찬가지. 떨떠름한 표정의 모낙 상단주는 응접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기 무섭게 그 질문부터 했다.

진짜 약혼녀인 것이 맞느냐, 하는 것 말이다.

 

“글쎄요..믿지 못하실 이유라도 있나요?”

 

차를 한모금 마시며 느릿하게 대답한 리리아에 다급해진 모낙 상단주는 허겁지겁 말을 붙였다.

 

“그거야 디어노레인 헤스턴 공작님께선 결혼에 관심이 없으셨고, 황실에서 황녀님과 맺어주려 애를 쓰고 있는데..갑자기 나타난 영애가 약혼녀라는 것을 어찌 믿겠습니까.”

“..그런가요. 그 마음 이해합니다, 모낙 상단주. 당연히 믿기 어렵겠죠.”

“.....”

“하지만, 저와 공작님은 정식으로 약혼한 사이이고, 여기 서약서도 있어요.”

 

리리아가 손짓하자 할스가 들고 있던 서약서를 그녀에게로 가져다주었다. 디어노레인 헤스턴과 리리아 비비안의 서명이 있는 정식 서약서였다.

 

“허..이것 참, 황실 측에서 이걸 알면 무척 곤란해지겠군요.”

 

서약서를 받아 본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기가 막힌 듯 한숨을 뱉은 것이다.

 

“황실 측에서 1황녀저하의 부군으로 공작님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건 압니다. 황녀저하께서 이제 성년이 되셨으니 약혼을 제안하겠죠.”

“그걸 알고 계셨군요. 헌데 왜..”

“사람의 마음이 가지 말라 한다고 정말로 가지 않던가요?”

 

모낙 상단주의 눈이 커졌다. 할스와 눈을 한번 맞춘 리리아는 곧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물을 보였다.

 

“흑..사실은, 저희가 모낙 상단주께 이런 실례를 범한 이유가 있답니다.”

“예? 아니, 왜 울고 그러십니까..!”

 

연극의 시작이었다.

 

칼라일 모낙. 그는 틀림없이 오만하고,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하기 힘든 사람인 것도 맞았다.

하지만 공략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바로..그가 거센 반대 끝에 결혼한, 로맨티스트라는 것.


그는 사랑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이었다.

 

“아시다시피..디어노레인 헤스턴 공작각하께선 황녀저하의 약혼자가 될 예정이었고, 헤스턴의 일원은 황실의 명을 거부하지 못합니다.”

“아, 예예..그야 그렇지만..”

“하지만 저는..각하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전 그 사람을 사랑하니까요..”

 

그런 그에게 황실이라는 거대한 걸림돌을 이겨내면서까지 이루어내려는 사랑은 아주 감동적일 것이다.

 

“저..두 분은 어떻게 사랑에 빠지셨습니까?”

“.....”

“허허, 이것 참..궁금해서 말입니다.”

 

예상대로 칼라일 모낙은 눈을 반짝이며 애절한 러브 스토리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것이..북부의 설원을 보러 왔다가, 몬스터가 저에게 달려들었는데, 헤스턴 공작님께서 저를 구해주셨답니다. 그때, 하얀 눈 속의 반짝거리는 금발이 눈에 띄었지요.”

 

리리아는 촉촉해진 눈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공작님은 블리자드 시즌이 시작되어 돌아갈 수 없는 제게 방을 내주시고 친절히 대해주셨어요. 그 따뜻한 마음에 반해 공작님을 좋아하게 되었답니다.”

“세상에나..”

“그리고 얼마 뒤에, 어미를 잃은 새끼 몬스터를 기르게 되었는데..공작님께선 몬스터를 무서워하지 않고, 다정하게 돌봐주는 저를 다시 보게 되었다고 하시더군요.”

“그랬군요! 참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사실에 살짝 과장을 더한 이야기에 감동을 받은 그는 어느새 눈물을 글썽이면서 이야기에 몰입하고 있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공작님께선 황녀저하와의 마음도 없는 혼인을 하고 싶어 하지 않으세요. 대대로 황실을 섬겨온 헤스턴이지만..이것만은 포기할 수 없다며..”

“아아..!”

“그만큼, 저를 사랑하시기 때문에..모낙 상단을 맞이하는 중요한 일도 제쳐두고서, 황성에 가신 것이랍니다..저와의 약혼을 발표하기 위해서.”

 

리리아 비비안이 써내린 헤스턴 공작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가 끝났다.

 

“.....”

“.....”

 

리리아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러나 더 없이 평온한 얼굴로 칼라일의 반응을 살피며 마지막 필살기를 썼다.

 

“모낙 상단주..저희는 상단주와 부인과 똑같은 처지입니다. 부디..이해해줄 수 없을까요?”

 

잠시 동안의 정적 후, 칼라일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렇게 감동적일 수가!”

“모, 모낙 상단주..”

“사정은 잘 알겠습니다, 영애! 이 칼라일 모낙, 모낙 상단주의 이름을 걸고 두 분의 사랑을 응원하지요!”

 

리리아의 이야기에 넘어간 그는 아주 기분 좋게 협조를 표했다.

 

“자..! 받으시지요! 앞으로도 저희 모낙 상단은 헤스턴을 비롯한 북부와 함께할 것을 약속하는 바입니다. 이건 계약서고요!”

 

칼라일 모낙은 앞으로도 지금처럼 북부에 물건들을 공급하겠다는 계약서를 작성한 뒤, 리리아에게 들려주었다.

 

“고맙습니다, 모낙 상단주..”

“이 정도 가지고 뭘요! 덕분에 옛날 생각 나고 좋았습니다.”

“.....”

“요즘 영식, 영애들은 전부 정략결혼을 하는 줄 알았는데, 이리 애달픈 사랑을 하기도 하는구나 싶어서 신기하더군요.”

 

애달픈 사랑, 이라..과거를 회상하는 듯 애틋한 얼굴의 그를 본 리리아는 연기가 아니라 진심을 담은 미소로 화답했다.

 

“..즐거우셨나요? 저희의 이야기가.”

“물론이지요..! 아주 즐거웠습니다. 약혼하신 것 축하드리고, 결혼식 때 꼭 초대해주십시오.”

“네. 꼭 초대할게요.”

 

칼라일 모낙은 고맙다며 호탕하게 웃곤,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응접실을 나갔다. 물건은 하나도 빠짐없이 내려다주고 가겠다는 말은 덤이었다.

 

리리아는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웃는 그를 보며 잠시 부모님을 떠올렸다.

그리고 디어노레인의 말도.

 

“하지만..사람에겐 여러 가지 면이 있으니, 그를 마냥 싫어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를 오래 본 제가 압니다.”

 

칼라일 모낙이란 자는 자존심 강하고 오만하고, 상대하기 까다로운 아저씨였다. 하지만 동시에 남의 행복에 진심으로 기뻐하고, 가족에게는 한 없이 다정한 로맨티스트이기도 했다.

 

리리아는 사람에겐 여러 가지 면이 있다는 그의 말이 맞다는 것을 실감했다.

 

“결혼....”

 

그리고, 결혼이라는 말에 괜히 들떠 욱신거리는 마음도.

 

**

 

뿌우우- , 나팔 소리가 무도회장을 가득 채웠다.

 

유일한 공작인 디어노레인과 가신인 레스트랭의 호시가 입장하고 난 뒤 입장할 사람은 황족밖에 없었다.

 

“황제폐하와 제1황녀, 율리안 데 필로스 저하 드십니다!”

 

필로스 제국의 둘뿐인 황족. 11대 황제, 카일란 데 필로스와 1황녀, 율리안 데 필로스가 나란히 무도회장에 들어왔다.

 

삼삼오오 모여 떠들던 귀족들이 일제히 가슴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제국의 태양과 별을 뵙습니다.”

 

귀족들의 인사를 받으며 레드카펫 위를 걸어온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황제의 축사와 황녀의 성년식이 이어질 시간이었다.

 

“짐의 하나뿐인 딸, 율리안이 오늘부로 성년이 되었노라. 그 귀한 자리를 빛내주기 위해 기꺼이 파티에 참석한 그대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모두 마음껏 즐기다 돌아가기를.”

 

와아아아아-! 여기저기서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수줍게 미소 짓던 율리안 황녀는 황제의 손짓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 앞에 무릎을 꿇어 앉았다.

 

“1황녀, 율리안 데 필로스는 지금 이 순간부터 성년임을 선포한다. 부모에게서 자립하고, 어른으로서 배우자를 맞을 준비 또한 되었다. 성숙한 어른으로서 그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길 바라노라.”

 

황제가 황금 티아라를 들어서 그녀의 머리 위에 씌워주었다.

 

음악이 연주되고, 파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헤스턴 공작.”

“황녀저하.”

 

율리안 황녀가 디어노레인에게 다가왔다. 아주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자 디어노레인이 그 손을 붙잡았다.

 

파티의 주인공인 그녀는 황족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신분의 남자와 첫 춤을 추어야 했다.

 

“황녀저하. 제게 저하의 첫 춤을 함께할 영광을 허락하시겠습니까?”

“물론이죠, 공작님.”

 

한손으론 황녀의 손을, 다른 한손으론 가슴께를 짚은 디어노레인이 허리를 숙여 춤을 신청했다. 방긋, 기쁜 듯이 웃은 율리안이 춤 신청을 받아들였다.

 

경쾌한 왈츠가 흘러나오고, 두 사람은 파티의 첫 춤을 장식하기 위해 중앙으로 향했다. 저 멀리서 와인을 마시던 호시가 작게 탄식했다.

 

“이제 나도 성년이에요. 21살이라고요. 알죠?”

“예. 알고 있습니다.”

 

손은 물론이오, 온 몸을 밀착한 채로 추는 사교댄스는 수많은 남녀들을 사랑에 빠지게 했지만 디어노레인에겐 엄청나게 불편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럼 이젠 나를 받아줄 수 있지 않나요?”

 

턴을 돌 때, 일부러 몸을 더 밀착하는 율리안에 애써 표정을 숨긴 디어노레인이 딱 잘라 말했다.

 

“안 됩니다.”

 

딱 자른 대답에 율리안은 충격을 받은 듯 잠시 말이 없었다.

 

“..어째서죠? 황실을 보필하는 건 헤스턴 가의 일원에겐 더 없는 영광 아닌가요?”

 

율리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애써 울음을 참는 듯한 얼굴이라 디어노레인은 그런 황녀를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았다.

 

황녀로서 곱게 자라, 어쩌다 한번 마주친 제게 반해, 결혼이란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른 채 조르는 모습이라니..

 

“예. 그럴지도 모릅니다.

“.....”

“선조께선, 필로스 황실을 섬기는 것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예로 생각하셨죠.”

“그런데 당신은 왜..!”

 

안쓰럽다.

 

“저와 선조님의 삶은 다르기 때문이지요.”

 

단호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체통도, 기품도 다 집어던지고, 오직 사랑만을 바라보고 덤비는 용기 있는 사람에게 건네는 참 경외였다.

 

“공작..당신은 그렇게 내가 싫은 건가? 그렇다면 이유라도 알려줘. 내가 당신에 비해 부족해서? 너무 어리기 때문인가?”

“.....”

“아니면 혹, 따로 마음에 둔 정인이라도..”

 

아직 곡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디어노레인은 성년을 맞은 기쁜 날, 체면을 구길 황녀를 염려하여 자리에 멈춰 서 있는 황녀를 붙잡아 제게로 끌어당겼다.

 

“황녀저하께서 부족해서라던가, 너무 어려서와 같은 이유가 아닙니다. 그저, 제가 저하와 혼인할 마음이 없을 뿐입니다.”

“.....”

“황녀저하께선 좋은 분이시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분입니다. 저에게는 아까울 정도로요.”

 

율리안 황녀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디어노레인은 알까.


그 세심함이, 상처 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다정한 그 말투가 더 상처라는 걸.


차라리 매정하면 좋았을 것을.

 

그 다정함과 세심함 때문에 더욱 사랑하게 되고,

 

“그리고..황녀저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응?”

“제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저하의 그 마음은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상처 받게 된다.

 

“뭐..?”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음악이 바뀌었다. 디어노레인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의 황녀의 손등에 입맞춘 뒤에 그녀를 비껴지나갔다.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 도착한 곳은 황금 의자에 앉아있는 황제의 앞.

 

“존경하는 황제폐하. 디어노레인 헤스턴 공작이 제국의 태양께 한가지 청을 올립니다.”

 

제국의 정점에 군림한 선조 때부터의 주군에게 올리는 청이 있었다.

 

“지금 이 순간부로 디어노레인 헤스턴과 리리아 비비안의 약혼 승인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헤스턴이 처음으로 황실에 반기를 든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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