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ilty



띠링.

문자를 마침과 동시에 날아든 새로운 알림에 핸드폰을 열자 익숙한 이름이 자리한다. 예민한 직감이 발동해 뻔히 문자가 어떤 내용인지 알 것 같지만, 이번은 틀리기 바라며 천천히 문자를 확인해본다.

 

 

“….”

 

 

문자가 전해주는 단어는 오롯이 하나, 한 건물의 이름뿐이었으나 문자를 받게 된 두 사람은 욕을 짓씹었다.

 

 

“박도현 이 새끼가….”

 

“형 네가 미쳤구나.”

 

 

각자 호텔 로비를 서성이던 걸음은 어느새 추운 겨울 거리로 나와 서로가 잠시나마 머문 호텔로 향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제 연인에게로.

 

*

 

뿌옇게 칠해진 거울을 슥 대충 손으로 닦자 한껏 세웠던 머리가 다시 축 늘어져 원래 자신, 최준호로 돌아와 있다. 이 정도면 분명 그 사람도 알게 되겠지. 그러면 단호하게 말하자. 제 형을 당신에게 줄 수 없다고. 앞으로 절대 만나지 말고, 괴롭히지 말라고.

샤워는 진즉 끝냈지만 이후 상황을 생각하느라 물줄기도 끄지 못하고 고스란히 맞고만 있다. 이렇게 무거워질지 몰랐던 작전이었지만 어쩌면 훨씬 잘된 이야기다. 자신은 박도현이 제 형을 갖고 놀았다는 걸 알게 되었고 한치원은….

 

 

“…….”

 

 

피하고만 있던 현실이 눈앞에 닥침에 겨우 다잡은 마음이 풀어진다.

제가 자신이 아닌 형을 가지고 놀았다는 사실에도 꼭 자기 일처럼 분노를 느끼고 서러웠던 이유. 김 신부님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커다래 마음을 뿌리째로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히 제 형제이자 스승이며 사랑하는 연인을 의심한다는 건 커다란 죄가 되겠지만 준호는 불안했다. 언제 훌쩍 떠나도 이상치 않은 신부님이 어느 날 정말로 자신이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영영 가버릴까. 이제 자신이 아닌 새로운 구마 사제를 찾으라며 등 보일까. 악몽은 늘 그런 내용이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하루 지은 죄가 크다. 과연 이 문을 열고 나가 도현씨를 마주하면 어떤 표정일까. 김 신부님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뭐 하나 행복함 따위 없는 결말에 자조적인 웃음만 짓고 대충 수건으로 물기를 닦는다. 이 길로 고해성사하러 가야겠다. 당신의 어린 양이 잘못된 욕심에 홀려 당신께 일평생을 바친 신부에게 죄를 짓게 하였노라고. 부디 그를 사하여주고 자신을 벌해주시라, 몇 번이고 기도할 것이다.

 

 

“…이 상황에서도 철저하시네.”

 

 

미리 챙겨둔 여벌의 속옷 따위 없기에 걸려둔 샤워 가운만 입고 나오니 욕실 유리문 밖, 뜯지 않은 새 속옷이 놓여있다. 그는 언제나 이렇게 친절했을까. 들은 이야기로는 차가워 보이지만 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끝까지 뒤에서 지켜본다 하였다. 그래서 자기도 무심한 척하면서도 전부 챙겨주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좋아했던 형이었는데.

 

 

“…이제 와서 무슨 생각이야.”

 

 

괜히 미련을 남기려는 머리를 툭툭 흔든다. 속옷을 꿰어 입고 가벼운 겉옷만 다시 입고 가벼운 심호흡을 내쉰다.

 

 

“해야 한다. 해야 해. 최준호.”

 

 

문밖에 그가 어떤 말을 하든, 어떤 표정을 짓든,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던 놀라지 말자.

 

 

“도현,…….”

 

“…잘도 내뱉는다, 그 이름?”

 

 

평정심을 유지하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굳게 다문 입매가 속절없이 허물어져 내린다.

늘 검은 옷만 입던 신부님이 갈색 계열 목폴라와 캐주얼한 정장 차림인 채 버젓이 방안에 들어와 있다. 혹시 도현씨가 그새 옷이라도 갈아입은 건가 싶다가, 곧장 날아드는 대답과 많이 길었지만 도현씨보다는 조금 짧은 머리카락이 그가 김 신부님이라는 걸 말하고 있었다.

 

 

“…신, 부님….”

 

“오냐.”

 

“어떻게 여기를…? 제, 제 형은…?”

 

 

흔들리는 음색에 여전히 와인이 차려진 테이블 근처 의자에 앉아 있던 신부님이 피식 웃어버린다. 마치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던 사람처럼 무척이나 여유로운 표정과 행동에 잘근 입술을 물자, 커다란 유리창을 손가락으로 한 번 퉁긴 신부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선다.

 

 

“최준호 아가토.”

 

“ㅇ,예, 여기… 있, 습…, 니다….”

 

“하이고, 이 핏덩이. 이제 좀 걸어 다니다 싶었더니 아직도 멀었네 멀었어.”

 

“저 두 발로 잘 걷고 다닙니다. 뛰기도 신부님보다 잘 뜁니다.”

 

“네가 지금 한 마디도 안 지려고 할 때가 아닌데?”

 

“…죄송합니다. cum linguae sanctae(거룩한 혀).”

 

 

입술 위로 작은 성호를 그린 후 공손히 두 손을 모은다. 어쩐지 지금은 연인이 아닌 옛날 사제지간으로 돌아가 훈육 받는 기분이다.

 

 

“이게 아주 간덩이가 배 밖으로 나왔어?”

 

“….”

 

“얌마, 구마 하면서 아주 겁대가리를 상실했지?”

 

“아닙니다.”

 

 

삐쭉삐쭉. 억울할 때나 혼날 때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는 입술이 이번에도 진가를 발한다. 다만 입술 주인은 눈치채지 못한 듯해, 일부러 지적하지 않은 범신이 시선을 입술과 날카로운 코끝 어중간한 사이에 둔다.

 

 

“너는 어떻게 박도현 그 놈팡이 놈한테…, 하이고, 주여.”

 

“…도현씨도, 전부…?”

 

“그놈이 어떤 놈인데 몰랐겠냐? 아주 쌍둥이가 쌍으로 난리구나, 난리야.”

 

 

그는 처음부터 눈치챘었고, 몇 번 눈짓으로 도망갈 기회를 주었다. 도리어 눈치를 못 챘던 건 자신이었다는 생각에 후끈 얼굴이 달아오른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혼자서 얼마나 오해하고 화를 내며 이를 갈았던가.

 

 

“이게. 야. 너는 지금도 박도현 그 자식 생각만 하냐? 이거 아주 골 때리는 놈이네?”

 

“그런 거 아닙니다. 그냥….”

 

“그냥 뭐. 왜? 뭔 말을 하다 말아?”

 

“신부님 지금 질투하시는 겁니까?”

 

“질투는 무슨 얼어죽,….”

 

 

어차피 뻔히 무심하게 말할 걸 알아 눈만 꿈뻑이고 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제 표정을 살피는 신부님이 낯설다.

 

 

“…신부님…?”

 

“그래. 했다, 했어. 이 핏덩이가 또 그새 어디 정신 놓고 다니다 잡귀라도 들어가서 눈 돌아가는 거 아닌가, 걱정했다.”

 

“잡귀라니…, 저를 그렇게 못 믿으십니까?”

 

“너라면 믿겠냐.”

 

 

지은 죄가 있어 반박도 못 하고 그냥 우물거리고 있는데 내심 기분은 좋아 자꾸만 입꼬리 끝이 점점 올라간다. 그걸 또 용케 본 신부님은 쯧쯧 혀를 차더니 다시 자리에 가서 앉는다.

 

 

“언제까지 거기에 서 있을 거냐? 안 그래도 커다란 놈이 서 있으니까 정신없다. 와서 앉아라.”

 

“옙.”

 

“…박도현 이 새끼 돈지랄 했고만.”

 

“그래도, 감동이지 않,…네요. 예. 도현씨가, 예, 아무래도 그, 돈 버는 방법이…, 네.”

 

 

옹호 한 번 하려다 날카롭게 내리꽂는 눈빛에 그대로 꼬리를 내린다.

 

 

“그래서. 몇 시간 동안 나 아닌 다른 놈 만나 보니까 어떻더냐?”

 

“…신부님이 최고십니다.”

 

“거짓말하고 있네. 너는 임마, 새벽 내내 고해성사해야 해.”

 

“그러는 신부님이야 말로 설마 제 형제한테 잠깐이라도 흔들리고 그러신 거 아닙니까?”

 

 

어쭈. 또 짧은 틈에 기가 살아 기어코 제가 할 말을 내뱉는다. 이전까지는 귀엽게만 보이고 가끔은 영특하게 느껴진 모습이, 치원에게 간접적으로 준호가 느끼는 감정을 전해 듣고 나니 특별하게 보인다.

만일 이런 발칙한 일이 없었다면 여전히 자신은 제 어린 연인이 뭐가 불만인지 몰랐을 거다. 톡톡 쏘는 말은 있지만 근본적인 두려움은 여간해서 말하지 않는 아이기에. 관계가 극으로 치달아 어그러지기 전 알 수 있었다는 사실에 범신은 신에게 감사드렸다.

 

 

“흔들린 적 없다. 속으로 기도나 올렸지.”

 

“…제 형이 무슨 실수라도….”

 

“네 형 연기 잘하더라. 아주 그러고 구마 하면 약한 사령들은 넘어가겠어.”

 

“그러면…?”

 

“내가 문제였지, 내가. 말로만 핏덩이, 핏덩이 거리고 속은 아주 어른으로 대했더라고 내가 너를.”

 

 

치원이 범신에게 무언가를 말했다는 게 직감적으로 느껴진 준호가 눈매를 날카롭게 흘기며 생각에 잠긴다. 워낙 입이 자유로운 사람이라 무슨 말을 했을지 감도 오지 않는다. 다만 신부님이 저 정도로 말씀하시는 걸 보면 가볍게 이야기한 것 같지는 않은데.

 

 

“아가토.”

 

“예, 여기 있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그분 앞에서 맹세한 이상 네가 꾸는 악몽 같은 일들은 안 일어날 거다.”

 

 

정말로 어디까지 아는 걸까.

매번 악몽에 놀라 헉헉대며 일어나도 신부님은 기척 없이 곧잘 주무시고 계셨다. 그러면 언제나 그런 그를 한참 눈에 담다가 조금 더 가까이 파고드는 건 제 몫이었다.

 

 

“참지 말고 말해라고, 내 말은. 나는 너한테 대책 없이 고백까지 했었어. 고작 나 하나 편하라고. 너도 좀 이기적 이어봐.”

 

“…무서웠, 습니다…. 혹시, 제가 신부님을 어지럽혀 들게 한다고 신부님 마음을 돌릴까 봐. 그러면,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그걸 몰라서….”

 

 

어렵게 털어놓는 진실한 속내에 묵묵히 듣고만 있던 범신이 잘게 떨리는 어깨를 본다.

혹시 그가 저에게 깊은 정이라도 들까. 언제나 준호 몰래 하는 게 범신은 습관이 되어 버렸다. 새벽 내내 악몽에 괴로워하는 연인을 위해 매일 새벽 기도를 올렸고, 준호와 부쩍 친해진 영신에게서 알음알음 좋아하는 음식 등을 알아내 먹으러 가는 게 범신으로서는 최선이었다. 저는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기에. 혹여 그렇게 되면 혼자 남겨진 연인이 깊은 비탄에 빠질까. 노력 한 행동이 도리어 제 연인을 불안하게 하고 있었다.

 

 

“준호야.”

 

“예….”

 

“네가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감추는 욕심도, 가끔 보여주는 모습도 전부 내가 알고 사랑하고 있는 최준호다. 그건 변하지 않아. 그분을 만날지라도.”

 

 

처음 구마 때 조용히 읊조리던 위로만큼이나 느리게 굴러가는 말이 도리어 심장을 죄어온다. 그러나 고통도, 슬픔도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알 수 없는 흐느낌만 넘쳐 나와 준호는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더 보여줘도 돼. 욕심내고 어리광부려도 된다.”

 

 

네 존재는 이제 내게 하늘에 계시는 분과 같은 무게가 되었으니.

우는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쓰는 손을 잡고 얼굴을 올리자 잔뜩 충혈된 눈이 보인다. 온종일 괴롭혀 약간 부어오른 입술을 슬쩍 손으로 스쳐 간 후 고개를 가까이하자 올망졸망한 눈이 천천히 감긴다. 마치 칭찬을 바라는 어린 호랑이 같은 모습에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고 입술을 맞댄다.

샤워하고 눈물에 젖어 촉촉하고 부은 입술이 부드럽게 감긴다.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켜 침대로 향하는 동안 떨어지면 죽다시피 매달리는 준호를 기꺼이 받아낸 범신이 그를 조심스레 침대에 눕힌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말해주면 안 돼요…?”

 

“뭘?”

 

“…그거, 그거요…. 사, 사, 사….”

 

“사랑한다.”

 

“저도요. 저도요.”

 

 

빈틈없이 나오는 고백에 눈을 한 번 꼭 감았단 뜬 준호가 이번에 먼저 입을 맞춘다. 침대에서 이루어지는 짙은 입맞춤인 만큼 바닥 곳곳에 옷이 떨어진다. 그리고 완벽히 둘이 이어졌을 때, 범신은 준호에게 끝없는 사랑을 속삭였다.

서로가 서로의 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

 

“하씨, 미치겠네. 어쩌냐 이거?”

 

 

대뜸 호텔로 들어서더니 곧장 날아오는 말은 천하의 한치원을 당황하게 하기 충분했다. 무려 누구부터 씻을래 라니. 입만 쩍 벌리고 어버버하자 피식 웃은 신부님은 친히 자신을 욕실로 밀어 넣기까지 했다. 너부터 씻고 정신 차리라면서 말이다.

 

 

“최준호 이 자식. 신부님이랑 벌써 진도를 여기까지 뺐으면 말을…!”

 

 

하긴 뭘 하니. 너도 말 안 했잖아.

갑자기 훅 들어오는 처지에 입술을 꾹 앙다문 치원이 물에 푹 젖은 머리칼을 훌훌 털어버린다.

 

 

“그래, 한치원. 가서 무릎 꿇든 뭘 하든 말하자. 그래도 신부님인데 자애롭게 봐 주시겠지.”

 

 

어차피 아저씨는 진짜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잘 있을텐데.

그렇게 눈치가 빠르고 영리한 사람이 지금까지 소식 하나 없는 게 씁쓸하기도, 또 웃기기도 하다. 어차피 알고 있었던 사실인데 왜 마음은 비에 흠뻑 젖은 것처럼 무거운 걸까. 오늘이 지나고 다시 제 동생을 만났을 때 근엄한 표정으로 헤어지라 말하는 모습이 눈에 선해, 치원은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 그나저나 속옷….”

 

 

대책 없이 욕실까지 끌려간 터라 뭐 하나 준비된 게 없다. 커다란 수건으로 일단 급하게 아래를 가리는데 별안간 똑똑 문소리가 들린다.

 

 

“예, 예…! 이제 곧 나갑니다!”

 

“한치원.”

 

 

심장이 발치까지 떨어진다는 건 이런 기분일까. 정말로 눈을 굴려 바닥을 보면 나가떨어진 제 심장이 보일 것 같은 기분에 치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셋 준다. 네가 안 나오면 내가 들어가.”

 

“아저…, 씨…?”

 

“셋. 둘. 하나.”

 

 

어서 문고리를 잡고 열리지 않게 해야 하는데. 굳어버린 뇌와 몸은 멍하니 서서 부드럽게 열리는 문틈 사이로 보이는 사람이 진짜 자신이 알고 있는 아저씨인지 확인하려고만 한다.

 

 

“…완벽하네. 좋은 밤 보내기에.”

 

“아, 아저씨가 여기를 어떻게….”

 

“왜,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나 봐?”

 

 

혹시 이것도 신부님과 아저씨가 연기하는 건 아닐까. 서로가 서로 흉내를 내며 우리를 속이는 건 아닐까. 그러나 욕실을 의미 없이 훑어보고 제게로 느릿하게 걸어오는 몸짓이 제가 알고 있는 박도현이라, 치원은 제 앞에 다가서는 그를 보고만 있었다.

 

 

“줄타기를 못 배웠더니 이제는 연기를 배우려고 그랬나.”

 

“언제부터…,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글쎄. 네 동생이 너처럼 팔랑거리게 눈썹을 깜빡이지 못했을 때부터?”

 

“….”

 

“그것도 아니면 너처럼 한쪽 눈 끝을 내리지 못했다던가.”

 

 

눈꼬리를 힘주어 손가락으로 꾹 누르는 행동에 주춤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난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구나, 아저씨는. 분명 김 신부님도 눈치챘을 게 뻔해 나오는 건 허하는 헛웃음뿐이다. 어떻게 하든 저는 아저씨의 손아귀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걸 또 보였다.

 

 

“춥겠네. 밖에 가운 있더라. 입고 나와.”

 

 

먼저 욕실을 나서는 아저씨를 따라나가니 바로 문 앞 복도에 가지런히 걸려있는 샤워가운이 보인다. 말없이 꼼꼼히 가운을 여미고 또 걸음을 옮기자 누가 시켰는지 모르는 와인이 세팅 되어있다.

 

 

“덕분에 기념일도 아닌데 형제끼리 서로 선물하게 됐네.”

 

“김 신부님은….”

 

“우리랑 별반 다를 거 없겠지. 더 빨리 진행 중이거나.”

 

 

와인을 음미하며 삼키는 모습이 무척이나 여유로워 저절로 마른 침이 목구멍을 아프게 지나간다. 이어서 자연스레 눈짓함에 쭈뼛쭈뼛 맞은편 자리에 앉자 동시에 아저씨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무슨 행동을 할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기에 눈으로만 그를 따라가 도착한 곳은 바로 제 앞.

 

 

“줄은 단번에 잡히는 게 아니야. 줄을 잡은 순간부터 네 몸은 발목밖에 의지할 곳이 없게 되지. 이런 발목은 부러지기에 십상이야.”

 

“아, 아저씨.”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제 발목을 한 손에 쥠에 슬쩍 다리를 물리려 하지만 단단한 손이 붙잡는 통에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발목을 쥐고 있는 손이 뜨거워 화상이라도 입을 것 같다. 평소 줄타기라면 돌아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말하던 도현이 갑자기 보이는 호의적인 태도에 치원은 불안감만 더 증가하고 있었다.

혹시 줄타기만 알려주고 끝내려는 건가. 더 자신에게 미련 갖지 않도록 그렇게 이별을 준비하는 건 아닐까.

 

 

“나…, 줄타기 안 배워. 이제 싫어.”

 

“왜. 몇 달 동안 졸랐잖니.”

 

“……싫어. 안 배울래. 무서워.”

 

“내 애인이 무서워하는 게 있었나?”

 

“그거 가르쳐,… 뭐…? 이저씨 지금 뭐라고…?”

 

“어떤 걸 못 들었지? 내 애인? 무서워하는 게 있었냐는?”

 

 

잘못들은 게 아니야…?

함께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호칭에 저절로 숨이 막힌다. 나 아저씨한테 그런 존재 아니잖아. 아저씨가 그렇게 당당하게 애인이라고 부를 사람. 그 사람 나 아니잖아.

 

 

“그래도 잘 됐네. 나도 위험한 건 알려주기 싫었는데.”

 

“이거, 이거 이별 선물이야? 오늘 남은 하루로 나 미련 안 남기게 하려고, 그러려고 지금 나 놀리는 거지?”

 

“내가 그렇게 배려심 넘치는 사람으로 보였나 봐.”

 

“아니면 아저씨가 나한테 이럴 이유가 없잖아. 나는, 그냥…, 그냥 아저씨한테 하룻밤 상대. 그 이상은 아니었잖아.”

 

 

겨우겨우 아프게 마음을 죽이며 아저씨 옆에 남기 위해 스스로 바닥을 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만약 이 말을 조금 더 일찍 들었더라면, 아마 멍청한 자신은 거짓말인 걸 알면서도 믿으려 했을 거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아니까. 여기서 믿어버리면 진짜 파멸이라는 걸 알아서, 고개를 젓는다. 인정하지 못한다.

 

 

“그러게. 그랬어야 하는 건데. 널 처음부터 저울에 올리면 안 됐었는데 말이야.”

 

“그냥, 그냥 우리 어제 관계로 돌아가자. 오늘 내 동생이 했던 말 전부 거짓말인 거 알잖아. 설마 박도현이 그런 어쭙잖은 거짓말에 넘어갔을 리가. 그렇지?”

 

“…지금이 훨씬 낫네. 뭣도 아닌 표정 연기하는 것보다 대놓고 말이랑 표정이랑 다른 거.”

 

“아저씨.”

 

“좋아, 그만 하자.”

 

 

자리에서 일어난 도현이 내려놓았던 와인 잔을 들고 야경이 보이는 창 밖을 본다.

혼자 있는 모습이 근사하게 어울려 더 좆 같은 제 짝사랑. 혼자라는 이유로 더 초라해 보이는 자신과 다르다. 그는 품격 있는 거래자이지만 자신은 한낱 사기꾼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겠지.

 

 

“내가 무게를 잘못 잡았더라고. 우아한 인격 만들어주는 돈하고 외롭고 좆같지 않게 만들어주는 사랑하고.”

 

“….”

 

“너는 돈도 사랑도 아니지. 그냥 한치원일 뿐, 그리고 그게 내 큰 오차였고 나랑 어울리지 않은 이런 놀음에 어울리게까지 만들었네.”

 

“나는, 한치원은, 사랑과 돈도 아니면 아저씨한테 무슨 의미인데? 무슨 존재여서 아저씨를 여기까지 오게 한 거야…?”

 

“…잠들게 하는 수면제, 잠들지 못하게 하는 악몽, 일 못하게 하는 쓸데없는 잡념,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 걱정. 그리고 이 모든 걸 기꺼이 감당케 하는 존재.”

 

“…진짜, 멋없다, 박도현. 이거, 이거 고백이잖아. 근데 왜, 말을 그렇게, 못,나게, 해?”

 

“우리 사이는 어떤 가식도 필요 없으니까.”

 

 

큰일이다. 이렇게 분위기 없는 사람을, 자신에게 입에 발린 달콤한 소리 하나 해주지 못하는 사람에게 고백 아닌 고백을 받고 좋아하다니.

억지로 웃으려 하지만 자꾸만 울컥 차오르는 감정에 입가가 파르르 떨린다. 뚜렷한 표정 하나 짓지 못한 채 있자 아저씨는 묵묵히 내 손을 잡고 일으켜 침대 위에 앉힌다. 정말 뻔한 전개인데도 왜 지금은 색다른 걸까.

 

 

“줄은 안 가르쳐 줄 거야. 다리 병신은 하나면 충분해.”

 

“이제 안 배워도 돼. 그거 아니어도 우리 이어진 거잖아. 박도현이랑 한치원. 협력자보다 더 대단한 사이 된 거잖아.”

 

 

싱긋 웃는 눈꺼풀에 작은 물방울이 맺혀있다. 날갯짓에 지친 나비가 아침 이슬을 맞으며 쉬고 있는 모습과 같음에, 도현은 한쪽 무릎을 바닥에 굽혀 천천히 눈 위에 입을 맞췄다.

온갖 더러운 오물 속에 묻힌 꽃을 피워낸 나비이다. 희망은 없다고. 더는 살아날 수 없다 믿은 감정을 만들고 제 것으로 만든 아이가 사랑스럽지 않을리가 없다.

 

 

“네가 피워낸 꽃이니 너에게 쥐어진 사이지.”

 

“거짓말. 떠나가는 건 아저씨일거잖아.”

 

 

짧은 의심에서 피어난 불신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물며 오래된 애증 속에서 피어난 불신은 더욱 쉽지 않다. 알고 있기에, 자신이 차차 거둬가야 할 의심이라는 걸 알아서 도현은 대답 대신 발등부터 입을 맞춰간다.

 

 

“만족할 때까지 괴롭히고 어리광부리렴. 새끼 오리는 어미를 절대 잊지도 버리지도 못하니까.”

 

 

기어코 굳은살 박힌 손이 가운 속 허벅지를 어루만질 때, 두 눈이 질끈 감기며 상체를 가리고 있는 옷자락도 흘러내린다.

 

 

“한치원. 나를 더는 외롭고 좆같게 만들지 마.”

 

“아, 흐으…, 아저씨야 말로, 하지 마. 나를, 오해하게, 흐읏- 아!”

 

“나를 버리지 않는다면 기꺼이.”

 

 

서로 구속하는 불신이 하나 더 지폈지만 행복했다.

혼자가 아닌 둘을 묶는 넝쿨에 하나둘 꽃봉오리가 피어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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