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

김수영 시인의 ‘눈’(1956년作) 중 일부입니다. 두 명의 준희 씨를 지면 너머로 만나는 동안, 저는 이 대목이 떠올라 숨이 막혔습니다. 작품이 전개되는 동안 눈은 끊임없이 내립니다. 모든 인물들의 감정을 새하얗게 덮어버릴 듯이 눈발이 휘날립니다. 참으로 추운 날입니다. 손이 곱고 입김이 하얗게 번져가는 그런 날. 어딘가 깨질 것처럼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데에는 이 날씨가 크게 기여하지 않았을까 문득 생각합니다.

‘당신은 보고 있나요?’

‘보고 있습니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둘은 끊임없이 서로를 매개로 오윤을 찾고 오윤을 매개로 서로를 바라봅니다. 자꾸만 오윤에게 너는 우리를 보고 있느냐 묻습니다. 저는 윤이 준희씨들을 바라보고 있다면, 하염없이 내리는 눈발이야말로 그녀가 아닌가 합니다.

눈은 세차게 내리다가도 고요하게 만물을 파묻어갑니다. 엄마의 존재를 삼십 년 만에 마주친 딸 준희에게도, 십 년을 그냥 같이 산 여자 준희에게도. 윤은 그렇게 어떤 마음들을 뒤덮어 품어주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너를 지켜보지만 지켜보지 않고 있어. 아주 가끔 격하게 몰아쉬는 숨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아무 약속도 하지 않았다. 위로도, 동정도, 연민도, 오윤에겐 없었다.’

제가 사랑하는 겨울은 그렇습니다. 일견 사람의 마음을 허하게 만들고 외롭도록 서늘하지만, 눈이 고루고루 내려앉을 때면 그런 생각들이 모두 머리에서 비워져 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 위로도 동정도 그런 감정의 파편들도 필요 없이, 그냥 나는 존재하는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선명한 것은 오직 살을 엘 듯이 피부에 닿아오는 추위와 입가에서 번지는 새하얀 입김. 노란 불빛의 가로등 밑으로 펑펑 내리는 흰 눈송이들. 그 모습만 품기에 바빠 외롭게 흘리던 감정들은 모두 눈 밑으로 파묻히고야 마는 풍경을, 저는 죽을 만큼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데려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데리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같이 사는 거라던 사람. 준희 씨에게 밥을 먹이러 나가면서도 화분에 물을 주는 사람. 오 윤. 당신은 꼭 눈과 같은 사람이 아닙니까. 당신이 죽은 계절이 겨울이기에 나는 당신을 떠나보내지 못한 채 준희씨들을 바라보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준희씨들의 만남과 대화, 교류. 저는 개인적으로 이름이라는 주제를 꽤 좋아합니다. 이름을 밝히지 못하는, 이름이 두 개인, 오로지 한 명에게만 불리는 이름 따위의 것들요.

아마도 어릴 적 읽었던 시의 영향이 크겠지요. 누구나 알고 있는 김춘수 시인의 ‘꽃’과, 오규원 시인의 ‘꽃의 패러디’입니다. 그중에서 좀 더 직설적이고 한 걸음 뒤집힌 ‘꽃의 패러디’의 일부가 와닿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명명하고 싶어 했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그리고 그는

그대로 의미의 틀이 완성되면

다시 다른 모습이 될 그 순간

그리고 기다림 그것이 되었다

이름에는 무언가를 정의하는 힘이 있습니다. 어떤 대상을 하나의 존재로 명명하는 순간, 그것은 자신에게 이름 붙은 것을 닮아갑니다. 놀랍지만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이름이 불리는 순간은 아름답고 반짝입니다.

‘‘준희 씨.’

‘네, 준희 씨.’

이름이 겹치는 순간마다 조용히 미소지었다.’

그래서 저는 이 부분이 너무 가슴 저렸습니다.

‘준희’로 세상을 살았습니다. 제 인생에 얼굴이 있다면 아주 못생긴, 얽어버린 얼굴일 거로 생각하던 준희. 의심과 경멸, 폭력적인 시선과 날선 절규를 벗 삼아 살아가던 열일곱, 열여덟, 그리고 성인이 된 준희.

‘준희’를 만났습니다. 오윤의 딸, 엄마의 여자. 한 명의 존재를 사이에 두고서 얽힌 사람을 만났습니다.

‘준희’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추우니까 따뜻한 뭐라도 주셨으면 좋겠어요. 오타모반이라고 해요.

그리고 둘은 서로를 바라봅니다. ‘준희’를 바라봅니다. 아끼지 않았던, 무심했던, 어려워 했던 자신을 넘어 다른 준희를 바라보게 됩니다.

같은 이름을 가진, 같은 사람으로부터 빚어진 사람들. 그리고 자신들을 연결해 주었던 오윤을 뒤로하고 온전한 서로를 마주 보고자 하는 사람들.

이 둘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남들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엄마의 연인과 그녀의 딸.

그러나 그들은 단언컨대 이상하지 않습니다.

“이상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들이야말로 보통입니다.

‘미쳤다 생각하면 미친 대로 그냥 둬요. 한 공간에 우리 둘이 있는데 둘 다 미쳤다면 이곳에선 우리가 기준인 거야. 보통인 거예요. 아무렇지도 않은 거예요.’

둘은 그렇게 함께 사흘을 보냅니다. ‘함께 삼일장을 치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처럼’. 마무리에 다 와서야 저는 한 번 더 탄식을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3일의 그림자라는 제목이 너무 사무치도록 다가와서요. 이 사흘은 여러 가지 의미로 저를 헤집습니다.

단순히 둘이서 보낸 시간의 영향이 현실에 드리운 것을 표현한 걸까요? 모르고 있던 존재(엄마의 여자ㅡ 오윤의 딸)를 알게 된 지 사흘이 지난 것에 대해서 표현한 걸까요. 어쩌면 제가 이 글을 읽고서 곱씹었던 사흘을 가리키는 제목 일지도요.

죽으려고 하는지도 모를 준희 씨를 붙잡기 위해 훌쩍이며 틀었던 차이콥스키가 시간이 흘러 그의 발목을 다시 붙잡았지요.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내내 제 귓가에는 저도 모르게 차이콥스키가 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을 다 읽고서도 앞으로 되돌아가 준희씨들을 다시 만나고 또 만나는 것을 보면, 저야말로 그 노래에 붙잡히지 않았겠습니까.

차이콥스키에 붙잡혀, 사흘이라는 굴레에 붙잡혀 한겨울의 세상을 다시 찾아가는 여정은 언제고 새롭습니다. 사랑스럽습니다. 깊게 침잠하는가 싶다가도 숨을 고르게 됩니다. 그들을 다시금 찾아간 저는 숨을 삼킵니다. 조용히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참으로 그러니, 저는 이 붙잡힘이 몹시 달갑고 기쁘기만 합니다. 그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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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달] - 발레리온 작가님

@nynypu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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