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본 작품은 동성끼리도 임신이 가능한 세계, 즉 양성구유(후타나리) 설정을 바탕으로 합니다.

해당 설정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성적인 장면들은 읽지 않고 넘겨도 지장 없는 성인글로 따로 뺄 예정이지만, 본편에서도 약간의 언급이 존재하므로 거부감이 있으신 분들의 주의를 요합니다.

* 6편: https://posty.pe/jx0ciw

* 7편: https://posty.pe/lowc0e










조각상을 옮기기 위해 6명이나 되는 남자들이 달려들었다. 저 커다란 조각상을 어디 부딪치는 일 없이 요리조리 옮기는 움직임이 전부 능숙하다. 괜히 ‘전문업체’ 딱지를 붙인 게 아니란 느낌이다. 그 경매에서 소개해준 업체이니 비슷한 일을 하는 곳 중에서도 제일 신뢰도 높은 업체겠지.


기울어진 체스판을 형상화한 대리석 조각은 정원의 삼 분의 일은 잡아먹는 크기였다. 11번째 보름달을 사러 간 경매에서 갑작스레 심술병이 도진 내가 막 질러버린 작품 중에 하나다. 다른 작품은 진작 집에 가져와서 전시해뒀는데 이건 무지막지한 크기도 그렇고 이관 절차가 어쩌고 세금이 저쩌고 하는 바람에 이제야 집에 들여놓게 됐다. 음……, 나쁘지 않은 작품이긴 한데, 솔직히 이 집 정원에 썩 어울리지는 않는다. 진짜 대저택의 정원이면 모를까 정원이라 쓰고 ‘좀 넓은 마당’ 정도인 장소에서는 혼자 너무 자리를 잡아먹으며 튄달까.


이미 산 거 어쩔 수 없고, 창고에 처박아둘 크기도 아니라서 집으로 들여놓긴 했지만……. 내게서 조각상의 크기를 처음 전해 들었을 땐 그 유상아도 난색을 다 감추지는 못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뚝딱뚝딱 정원에 공간을 만들어주긴 하더라. 어쨌든 그 덕분에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아 미친 듯이 바쁜 시기에도 이렇게 따로 시간을 내어 조각상 설치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우리가 뭘 거들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 말 그대로 지켜보기만 하고 있지만.



“당연히 한 줄이지 내가 두 줄 떴으면 아직도 말을 안 했겠냐?”



이 집 정원에는 유상아가 날씨 좋은 날 차 마시고 책 읽으려고 만들어놨다는 야외 테이블이 하나 있다. 한 번도 이용하는 걸 본 적이 없어서 그냥 분위기만 잡는 장식용으로 전락한 줄 알았는데 오늘 쓰게 됐다. 앉아서 편하게 지켜볼 수 있어서 좋긴 좋다. 유상아가 커피까지 내와서 뜻밖의 티타임이 됐달까. 대화 나누는 주제 자체는 그렇게 온화한 게 아니었지만. 아니 글쎄 나보고 임테기 다시 해봤냐고 갑자기 묻지 않는가.


내가 두 번째로 시험해보기 직전에 집을 나갔었으니 물어볼 타이밍이 애매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일주일 만에 말도 없이 애를 지우고 왔겠냐고. 기가 막혀서 그냥 커피나 한 모금 하려고 넘기는데 문득 어떤 추측이 스쳤다.



“혹시 임신 안 돼서 아쉽냐?”

“그렇지는 않아. 나 아직 준비가 안 됐으니까.”



대답은 명쾌하다. 그렇지만 내 맘은 명쾌하지 못하다. ‘아직’이라……. 그 단어가 내포한 의미를 곱씹는 나에게 유상아가 다른 질문을 한다.



“근데 너 병원 안 가봐도 돼? 몇 달째 이유도 없이 생리 안 하는 거잖아.”

“난 원래 그래. 병원 가봐도 딱히 눈에 띄는 문제 없다더라.”



병원에는 진작 가봤지. 주기 제멋대로인 게 짜증 나서. 심드렁하게 대답한 나는 곧장 맘에 걸리는 걸 물었다.



“만약 꽃잠식 때 애 생겼으면 어떻게 했을 거냐?”

“…….”



유상아가 잠시 말이 없다. 그 머뭇거림은 길진 않았으나 다음에 올 말을 충분히 짐작게 했다.



“……의도했던 게 아니라 해도, 일단 아이가 생겼다면 되도록 낳고 싶어.”

“그럴 거 같더라. 너 아이 생각 없다는 것도 평생 없다는 거 아니지.”

“…….”



이번 머뭇거림은 조금 더 길다.



“너만 괜찮다면, 내가 제대로 그룹 내에서 자리 잡은 뒤에 한두 명 정도는……. 물론 꼭 낳고 싶다는 건 아니야. 네 생각이 가장 중요하고. 난 그냥 어디까지나,”

“됐다. 그 정도면 알아들었어.”



역시. 지정맞선 때 자신만만하게 ‘나도 없어’라고 한 건 나에게 맞춘 대답이었던 거 같다. 그 말이 아예 거짓말인 것도 아니니 딱히 큰 가책도 못 느꼈을 것이다. 나도 이런 거로 화낼 마음은 안 들고.


유상아는 내가 말을 가로막자 순순히 말을 멈췄다. 구구절절 더 말해봤자 분위기만 묘해지지. 그리고 내 대답이 확고하게 ‘No’로 정해져 있는 걸 본인도 알 테니, 내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주제를 이어나갈 생각이 없을 거다. 그렇게 대화가 잠시 중단됐을 때 내 핸드폰이 웅, 짧게 울렸다. 확인해보니 역시나 메시지가 와있다. 정희원이다.



[저의 존재를 잊고 계신건 아닌지요 사모님]



이게 무슨 소리야, 하고 눈을 세 번 깜빡이고 나서야 나는 정희원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헉. 진짜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는 곧장 답장을 보냈다.



[ㅈㅅ 까먹고있었음]

[사람 피말리게 해놓고 이러기 있어?]



하긴 중간에 그딴 식으로 자리 파투 내고 연락이 끊겼으니 얘는 내가 뭘 잘못 말했나 몇 날 며칠을 전전긍긍했을 거다. 그거 아니더라도 밥 한 번 더 산다고 얘기하기도 했고……. 나는 잠시 답장을 미뤄두고 앞으로의 일정을 곰곰이 되짚어보았다. 그나마 목요일쯤엔 시간이 좀 있는 거 같은데.



“야, 이번 주 목요일 저녁에 뭐 할 거 있냐?”

“응? 무슨 일?”

“그냥 뭐든.”

“결혼식 관련 일이라면, 그땐 딱히 뭐 없는 거 같아. 왜?”

“누구 좀 만나려고.”



난 이제껏 결혼식 한 달 전쯤엔 할 일이 대충 다 마무리될 줄 알았다. 근데 막상 겪어보니 어째 결혼식 날짜가 다가올수록 오히려 할 일이 더 많더라. 신부 화장이 두꺼운 이유는 어쩌면 피로함을 감추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급하게 만나야 하는 사람이야?”



유상아의 질문은 대화의 흐름상 전혀 어색할 거 없는, 그리고 본인도 별 뜻 없이 순수하게 질문했을 내용이다. 그러나 나는 왜인지 짓궂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응. 정희원 만나러 갈 거야.”



총명한 유상아답게 한 번 들은 이름을 기억하고 있던 모양이다. 티타임에 걸맞게 여유를 담고 있던 얼굴이 싹 굳는 걸 보니. 좀 더 놀려줄까 하다가 애 울겠다 싶어서 그냥 솔직하게 설명했다.



“걱정하지 마라. 진짜 밥만 먹고 얘기만 나누고 올 거야. 누구 덕분에 청첩장 주는 자리를 애매하게 박차고 나왔거든.”

“…….”

“왜, 아직도 숨기는 거 있냐?”

“아니야…….”



한껏 시무룩해진다. 저게 진짜 시무룩한 건지 내 맘을 약하게 만들기 위해 저러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맘이 약해졌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고. 나는 한 손으로 핸드폰 터치패드를 두드렸다. 목요일 저녁 어때. 답장은 바로 왔다. 그날 좋지. 나도 곧장 ‘먹고 싶은 거 생각해둬’ 같은 말을 보내며 적당히 만날 장소와 시간을 잡았다.


그사이 조각상을 정원 안으로 옮긴 인부들이 전시대 위에 조각상을 고정하기 시작했다. 크기가 크기이다 보니 고정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꽤 잡아먹을 듯하다. 저기에 추가로 조명 같은 것도 설치한댔나……. 내가, 그러니까 우리가 집주인이긴 한데 이걸 굳이 다 지켜봐야 하나? 지루해하는 기색을 눈치챘는지 유상아가 말을 걸었다.



“먼저 들어갈래?”

“넌?”

“난 좀 더 있을게. 누가 지켜는 봐야 하니까.”



체면 차리지 않고 제안을 넙죽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조금만 더 체면치레는 할까 몇 초간 고민 중에 유상아가 좀 더 덧붙인다.



“다 끝나면 내가 알려줄게. 참, 어제 유명한 제과점에서 쿠키 한 통 사뒀거든. 심심하면 그거 먹어 봐.”

“아 뭘 또 먹으래. 넌 왜 자꾸 군것질거리를 사 오냐.”

“입 심심할 때 아무것도 없으면 좀 그렇잖아.”

“네가 굳이 권하지 않으면 먹을 일 없거든? 남들은 결혼식 할 때 살 쫙 뺀다는데 너 때문에 난 오히려 더 쪘어.”

“그래? 어쩐지 더 귀여워졌더라.”



또 시작이네. 나는 팔짱을 꼈다.



“내가 그딴 말은 분위기 보고 말하랬지.”

“그럴 분위기였잖아.”



어딜 봐서 그럴 분위기였다는 건진 모르겠다. 그치만 대화 자체만 똑 떼어놓고 보면 여친이 살쪘다고 투덜댈 때 해줄 말로는 99.9% 정답이긴 하다. 음……, 나중에 작품에 써먹어야지. 물론, 나는 쟤 여친이 아닐뿐더러 귀여운 투정이나 반응 떠보는 심리로 말한 것도 아니니까 화기애애하게 맞장구쳐줄 이유는 없다.



“내가 어렸을 때 맛있는 거 못 먹어서 한 맺혔다고 말한 적 있었냐?”

“아니, 그런 적은 없어.”

“근데 왜 이렇게 못 먹여서 안달이야.”

“나 너 먹는 모습 좋아해.”



하여튼 진짜 가지가지 한다. 저 인간 말하는 거 들으니까 체면 차릴 것도 없겠다 싶어서 그냥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업이 끝났다고 유상아에게 연락 온 건 그로부터 대충 1시간 반 뒤쯤이었다. 낮에 볼 땐 좀 과하게 튀는 면이 있었던 조각상은 밤이 되고 조명이 켜지자 그럭저럭 멋있어 보였다. 그걸 보며 내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고 뻐기는 말을 했던 게 그날의 사실상 마지막 일과였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하루가 끝날 때까지 유상아에겐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이 있었다.


쿠키 진짜 맛있더라.










이거 준비하랴 저거 확인하랴 바쁘게 보내다 보니 금세 목요일 저녁이 됐다.



“이거 괜찮긴 한데, 나라면 신맛은 좀 덜하게 만들었을 거야. 라임주스가 좀 과하게 들어간 느낌.”

“여기까지 와서 니 직업병 발휘할래? 그냥 편하게 즐기고 마셔라.”



어디 가고 싶냐고 물어봤을 때 칵테일로 유명한 가게 얘기할 때부터 얘 이럴 거 짐작했다. 내 비난에 정희원은 킬킬 웃으며 자기한텐 이게 즐거운 휴식이라면서 맞받아친다. 그러면서 또 한 모금을 홀짝. 나는 맛있다 맛없다 비싼 거 같다 싸구려 같다…, 뭐 이런 정도로만 평가하고 넘어가고 있는데 프로의식 충만한 바텐더 입에서는 이런저런 평가가 줄줄이 새어 나온다. 어쨌건 그런 사소한 잡담 뒤에는 당연하게도 유상아 이야기로 흘러갔다.



“나 청첩장 반납 안 해도 되는 거지?”

“다시 밥 사주러 온 거 보면 모르겠냐.”

“하긴, 유상아 씨 팔불출이라고 오만군데에 소문 다 났던데.”



그러면서 나에게 핸드폰 화면을 보여준다. 그 화면에 떠 있는 건…, 유상아네 회사 블라인드 글이다. 유상아의 회사에 견학 갔던 날 예상했던 그대로의 글이랄까. 사장님이 갑자기 들이닥쳐서 업무 중에 사모님 자랑하느라 당황했던 사람 없냐…… 대충 그런 내용. 댓글도 몇 개 달려 있었고. 유상아가 재벌 중에서도 젊은 층에 인지도가 높은 인간이라 그런지 꽤 여기저기 퍼졌다. 당연히 내 귀에도 들어왔다. 나 유상아랑 결혼하는 거 아는 사람들 몇몇이 이때다 싶어 연락을 해왔으니까.



“이미 질리도록 놀림 받았거든? 그만 치워라.”

“어떻게 된 일인데?”

“갑자기 뭐가.”

“내 앞에서 ‘뭐가’라는 말이 나와? 내가 말 잘못해서 멀쩡한 예비부부 파탄 낸 줄 알고 얼마나 벌벌 떨었는데.”



그걸 알고 있기에 눈 돌아가게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서 다시 만나러 온 거지만, 굳이 이걸 입 밖으로 낼 이유는 없겠다 싶어서 입을 다물었다. 사실 입을 다문 이유는 그 외에도 또 있다. 어디까지 말해야 해, 이걸.



“유상아 씨, 너 예전부터 좋아하던 거 맞는 거지?”



내 침묵에 정희원이 먼저 대화의 흐름을 이끈다. 무언으로 긍정하자 고개를 갸웃한다.



“그게 이상하단 말이지. 널 오래 좋아했다는데 반응이 왜 그래. 좋아해야 하는 거 아냐?”

“그걸 마냥 좋아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어.”

“흐음…, 나한테 알려주기 곤란한 이유인가 보지?”

“나중에……. 지금 바로 알려주는 건 좀 아닌 거 같다.”



정희원이 어디 가서 남의 중대한 개인사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닐 사람이 아니란 걸 안다. 하지만 아무래도 김독자랑 유중혁한테 그랬던 것처럼 넙죽 바로 말하기는 마음에 걸린다. 유상아도 같이 걸린 문제고……. 내 얼버무림에 정희원이 넘어갈 것처럼 유리잔 위를 손톱으로 톡톡 두드리다가 장난스러운 듯 진지한 듯한 목소리를 했다.



“하나만 말해주라. 좋아해, 안 좋아해?”

“…….”



눈치 빠르긴. 나는 언젠가 유상아에게도 해주었던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싫어하지는 않아.”



정희원은 그 한 문장만으로도 상당히 많은 걸 눈치챈 모양이다. 묘한 표정이 되는 걸 보니.



“어쨌든, 결혼 무르진 않은 걸 보니 잘 풀렸다고 생각할게.”

“그래라.”

“괜찮은 거 맞지?”

“나한테 손해는 없어.”



그제야 정말로 심각한 일이 아니라는 확신을 얻었는지 정희원의 태도가 완전히 이완됐다. 불안과 걱정이 잔물결 치던 자리를 장난기가 대신한다.



“근데 진짜 그것뿐이야?”

“그럼 뭐가 또 있을 거 같은데?”

“에이~ 무려 화운그룹 적통 어지버시잖아. 심지어 그 얼굴에. 인생 다시 없을 찬스 아니야?”



정희원의 어조는 순전히 장난기뿐이었고, 정말로 급을 나눠 나를 후려치고자 하는 게 아님을 나도 안다. 그냥 사석에서 몰아가듯 연애 분위기로 엮어대는, 그런 흔한 장난이겠지. 심지어 청첩장을 돌리면서 진심으로 ‘네가 그 유상아랑?’하는 기색을 지우지 못하는 사람도 만나봤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그때는 조금 거슬려도 그냥저냥 ‘그럴 만도 하지’라며 넘어갔던 일이 지금은 마음에 비죽이 가시를 솟게 했다.



“왜 다들 걔가 나한테 과분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거지? 웹소설 작가 따위 아무리 성공해도 잘난 어지버시 재벌님껜 안 된다는 건가?”



내 목소리에 진심으로 짜증이 섞인 것을 느꼈는지 정희원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 나는 말을 지르자마자 후회했다. 아, 이렇게 받아칠 말이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유상아가 날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쌓여왔던 묘한 죄책감과 이유를 알 수 없는 찜찜함이 꽤 두터웠던 듯하다. 이런 사소한 일에도 울컥하다니.



“네가 못났다는 게 아니라 그냥 신기해서 그렇지.”

“그러니까 뭐가 신기하냐고.”

“객관적으로 우리나라, 아니 전 세계를 통틀어도 상위 0.001% 안에는 들 사람이잖아. 그런 사람이 오랫동안 너한테 제대로 다가가지도 못했다는 게 신기하지 않아? 날 찾아왔던 것만 봐도 최소 5, 6년 전부터 좋아했단 건데.”



하긴 그 점은 나도 여전히 신기하다. 평범한 사람들도 초등학교 때의 짝사랑을 별다른 만남도 없는데 20년씩 이어가진 않잖아. 아까 괜스레 짜증을 냈던 게 무안 쩍은 것도 있고, 이번엔 나도 분위기를 풀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만큼 내 매력이 쩐다는 거 아니겠냐.”

“그래그래, 네 말이 맞아. 적어도 유상아 씨한텐 맞겠지.”



그러더니 잔을 내민다. 매력 개쩌는 한수영 씨를 위해 건배하잔다. 여기서 부끄러워하면 지는 거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태연스럽게 그 잔에 내 잔을 부딪쳤다. 쨍 소리 뒤에 둘 다 한 모금 넘기고, 다시 대화가 재개됐다. 더 이상 이 주제를 이야기했다간 서로 껄끄러워질 거다. 그걸 정희원도 알았는지 유상아와의 일을 더 캐묻지 않았다. 나로서도 그게 편했기에 우리들의 대화는 신변잡기스럽게 흘러갔다. 내 이야기는 지난번에도 오늘도 잔뜩 했으니 이제는 정희원의 이야기도 들어보자 싶기도 했고.


그렇게 이것저것 수다 떨며 정희원이 진상 손님을 호되게 혼내준 일화를 듣고 있던 도중, 핸드폰이 울렸다. 메시지를 확인하려 핸드폰에 눈길을 주자 정희원도 잠시 입을 멈췄다. 유상아에게서 온 거다.



[아직 정희원 씨랑 있니?]

[ㅇㅇ]

[언제쯤 돌아와?]

[정희원이 11시 전까진 돌아가야 한댔으니 곧?]

[잘됐다. 나도 그때쯤 퇴근할 거 같은데 데리러 갈게. 어디야?]



흐음. 유상아가 날 데리러 오는 게 처음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얘가 정희원과 만나는 걸 신경 쓰고 있다는 감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술도 마셨겠다 시간도 늦었겠다 겉으로는 ‘ㅇㅋ’라고 간단히 대답하고 말았다.


11시는 금세 다가왔다. 자리를 마무리할 때가 되자 정희원이 헤어지기 위한 서두를 던졌다. 너 집은 어떻게 가? 나는 현성 씨가 데리러 온댔어. 나도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나도 유상아가 데리러 온대.



“…….”
“뭐냐 그 눈?”

“사이 좋은 거 같아서.”

“싫어하진 않는다니까.”



그리고 걔는 날 엄청나게 좋아하고. 결혼을 무르지 않는 대신에 뜯어먹을 건 다 뜯어먹겠다고 대놓고 선포도 했겠다 운전기사 노릇 정도는 사이가 좋지 않아도 시킬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정희원은 요상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럼 왜 안 좋아해?”

“뭔…, ‘이 세상 모두가 유상아를 좋아해!’ 뭐 그런 전개를 원해?”

“나 로맨스 소설이나 영화 잘 안 보는 거 알면서……. 근데 그 정도 사람이 시속 100km로 들이박으면 조금 흔들릴 법도 하잖아.”



음속으로 들이박아도 안 흔들릴 거라고 투덜대려던 찰나,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막연한 불안감이 또다시 입을 봉했다. 이 찜찜한 감정은 대체 언제 어디서 버튼이 눌리는 건질 모르겠네. 아무튼, 나는 투덜대는 대신 홱 시선을 돌렸다.



“……그냥 마음이 안 가는 거지.”



정희원이 무어라 더 말을 붙이려 했지만 타이밍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유상아가 도착했다. 잔도 접시도 깨끗이 비운 우리 둘 사이에 자연스럽게 끼어들더니 정희원에게 인사를 한다. 속마음이야 어쨌든 그 태도가 아주 자연스럽다. 역시 인싸 대장이라니까. 오히려 정희원이 어색해하며 인사를 받아준다.


정희원 남친 올 때까지 기다려줄까 했지만 나 빼고 유상아나 정희원은 서로 불편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서, 그리고 그 불편한 둘 사이에 껴있으면 나도 불편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관뒀다. 먼저 가보겠다고 일어서자 정희원도 오히려 반기는 기색이었다.



“오늘은 왜 이렇게 늦게 퇴근했냐?”

“내일부터 쭉 쉬고 싶어서 오늘 좀 몰아서 했어.”



유상아에 차에 타며 집에 돌아가는 길, 간만에 회사에 오래 있던 게 궁금해서 묻자 유상아가 가볍게 대꾸한다. 어차피 오너 일가에 사장님이겠다, 결혼 준비로 바쁘다고 하고 다른 사람에게 좀 미뤄도 아무도 뭐라 못 할 텐데 참 피곤하게 산다. 그게 유상아답지만……. 피곤한 와중에 잊지 않고 날 데리러 온 것도 유상아답다. 참으로 유상아다운 유상아가 핸들을 잡고 앞을 주시한 채로 대화를 잇는다.



“희원 씨랑은 어쩌다 친해지게 된 거야?”

“왜, 나 몰래 거기 들락날락하면서 그건 안 물어봤냐?”

“…….”



대화를 주도하던 입이 턱 막힌다. 말을 잃고 눈치를 보는 게 그야말로 혼나는 강아지다. 그 어지버시 유상아님께서 내 말 한 마디에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은 꽤 즐겁다. 즐겁지만, 천성이 틱틱대는 말투라 무심결에 툭 튀어 나간 말이지 진짜로 꼽주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기에 나는 순순히 ‘걔 애인이 유중혁 군대 후임이었는데’로 시작하는 짤막한 비하인드를 말해주었다.



“그렇구나……. 오늘은 무슨 얘기 했니?”



이게 본론이겠지. 부자연스러운 화제 전환은 아니었다만 유상아가 정희원과의 만남을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눈치 못 채기도 힘들다. 본인도 그걸 아는지 아까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눈치를 보는 게 느껴진다. 숨기는 게 더는 없단 말은 진실이겠지. 그래도 불안한가 보다. 뭐 특별한 일은 없었으니 나도 얘기 못 해줄 건……



‘진짜 그것뿐이야?’

‘그런 사람이 오랫동안 너한테 제대로 다가가지도 못했다는 게 신기하지 않아?’

‘조금 흔들릴 법도 하잖아.’

‘……그냥 마음이 안 가는 거지.’



“…….”

“수영아?”



유상아의 부름이 침묵을 자른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퉁명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넌 몰라도 돼.”



차창 밖에는 옆을 지나쳐가는 다른 차의 등이나 건물의 네온사인, 가로등의 빛이 긴 궤적을 남기고 있었다. 나는 그 빛의 꼬리들에 집중하는 척했다. 긴 궤적의 빛이 어둠을 어지럽히는 것처럼 나도 혼란스럽다. 나는 쟤랑 잘 지내고 싶은 걸까, 아니면 그냥 쟤를 휘두르고 싶은 것뿐일까.


유상아도 일순 말이 없었다. 겨우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 음성이 한층 딱딱해진 것은 내 착각이 아닐 테다.



“나한테 몰라도 되는 네 이야긴 없어.”

“내가 너한테 모든 걸 다 얘기해야 되냐?”

“그런 게 아니라…….”

“어차피 말해줘도 몰라 넌.”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잘 모르겠거든. 이렇게 찰나의 심술궂음에 굴복하고 나면 늘 뒷맛이 쓰다. 원인불명의 찜찜함, 묘한 후련함, 묵직한 죄책감 등이 마구 뒤섞여 진흙탕이 된달까. 유상아는 보통 그런 내 태도에 꿋꿋하게 맞서거나 유들유들 철판을 깔지만, 이번만큼은 그러기 힘든 듯했다. 보지 않아도 핸들을 쥔 유상아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알 거 같다. 저래도 쟤는 다시 나에게 다가오려 하겠지. 그래도 지금 분위기로 봐선 내일까지는 좀 어색하려나. 어쩔 수 없지. 어차피 내일은 유상아랑 잠깐 나갔다 오는 거 말곤 따로 할 건 없으니까 적당히 뭉개자.


따로 할 건…….



“헉 시발!”

“깜짝야, 왜 그래?”



내가 갑자기 발작하자 유상아도 놀라서 움찔한다. 근데 나는 지금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와, 와, 어떻게 이걸 이토록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유상아에게 나도 상황을 정리할 겸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대충 한 달 전쯤에 곧 개봉할 영화 평론을 부탁하는 제안이 왔다. 특별한 일은 아니고, 내가 유명 작가다 보니 가끔 제의가 들어와서 부업 느낌으로 하는 일이다. 신작을 일찍 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고. 이번에 제의가 들어온 영화는 해당 장르에서 상당히 수작으로 뽑히는 시리즈물의 4편이다. 문제는 내가 1편부터 3편을 안 봤다는 점이다. 그런데 제작사 측에서는 꼭 1편부터 3편을 보고 평론을 남겨달라고 부탁했다. 언젠가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 미루던 시리즈라 이참에 보면 되겠지 하고 제의를 수락했는데…, 시사회가 벌써 내일이라는 게 이제야 생각났다. 변명을 좀 해보자면, 결혼 준비나 유상아 관련 일로 정신이 없었던 탓이다.



“시사회 언젠데?”

“내일 밤 9시.”

“우리 일정까지 소화하고 가기엔 좀 빠듯하지 않아? 지금 취소하긴 힘드니?”

“힘들지. 당일 펑크는 너무 개매너잖아. 그리고 아무리 본업이 아니라지만 내 필명 걸고 펑크 내는 거 진짜 싫단 말이야.”



유상아 말대로 좀 빡센 일정이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1편부터 3편을 쉬지 않고 시청한다고 해도 밤을 새우는 건 확정이다. 그냥 그 전작들을 보지 말까 싶기도 했지만, 이 시리즈는 전작들과 연계성이 높아서 유입에 장벽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한 시리즈다. 그런 작품을 4편만 덩그러니 보고서 제대로 된 평론이 나올 리가 없지. 한수영으로서 보는 거라면 상관없겠으나 유상아에게도 말했듯 이건 내 필명을 걸고 하는 일이다. 한수영은 나태해도 작가 숑싱은 누구보다도 프로인 법이다.


밤새야겠네. 집 들어가기 전에 에너지 드링크나 좀 사 들고 가자. 내 말에도 유상아는 ‘음…….’하며 애매하게 말을 흐린다. 카페인 과다 섭취하면 몸에 안 좋다고 잔소리하려나? 그런 추측을 하던 때, 유상아가 어느새 평소와 같은 상냥한 목소리로 돌아와서는 물었다.



“같이 볼까?”

“뭐?”

“혼자보단 둘이 보는 게 덜 졸릴 거 아냐. 카페인보단 그게 나을 거 같은데.”



나는 유상아의 옆얼굴을 훑어보았다. 아무래도 유상아는 나와의 어색한 시간을 내일까지 늘릴 생각이 없는 듯하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이걸 기회 삼아 밤을 같이 지새울 요량인 거 같다. 그야 에로틱한 의미는 아니니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지만…….



“너 안 피곤하냐.”

“어차피 내일 늦게 일어나도 되는걸.”



그거야 그렇다. 내일 예정된 결혼식 관련 일정은 세 시부터 시작이니까. 그래도 피곤하면 최대한 많이 자고 싶지 않나. 야근까지 하고 왔는데. 뭐 체력 좋은 녀석이니 잘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진짜로 걸리는 건 따로 있었다.



“너는 그런 영화 안 좋아할 텐데.”



봐야 할 영화의 장르를 떠올리자 그것부터 생각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상아가 그런 장르를 좋아할 거 같지 않다. 물론 이것도 내 오랜 편견일지도 모른다. 유상아도 그렇게 여겼는지, 상냥하던 옆얼굴에 희미하게 오기가 피어올랐다. 어쩌면 ‘넌 말해줘도 몰라’ 같은 소리를 들은 직후라 더욱 물러서기 싫은 것일지도 모른다.



“넌 내가 어떤 영화 좋아하는지 모르잖아.”

“아, 그래. 근데 내가 보기엔 너 후회할 거 같은데.”

“후회 안 해.”

“그러냐? 그럼 같이 보든가.”



답지 않게 호언장담까지 하며 고집부리는 게 좀 우스워서 나는 오케이 사인을 내렸다. 나에게서 승낙을 얻어낸 유상아의 얼굴에 가벼운 승리감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분하지 않았다. 내 편견이 틀리지 않았으리란 근거 없는 확신이 있었으므로.










참 이상하게도 근거 없는 확신은 대체로 맞아떨어진다. 다르게 말하자면, 유상아의 승리감은 내가 영화 제목을 밝히자마자 사라졌다는 뜻이다.


베드 테이블 너머 TV에서는 또다시 피와 육편이 한가득 화면을 메웠다. 으, 제법 옛날 영화라 CG 티가 좀 나는데도 징그럽다. 그 어색한 피와 육편이 징그럽다기보단 영화의 연출이 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괴로울지 생생하게 몰입하게 만들어서 그게 징그럽고 괴롭다. 영화 때문에 긴장한 탓인지 목이 말랐다. 미리 꺼내다 놓은 커피나 마실까 해서 잠시 눈을 돌렸을 때 누가 불쑥 내 손을 잡았다. 놀라서 어깨가 튀었다.



“시발 놀랬잖아!”

“……미안.”



내가 손을 잡은 당사자 - 그러니까 유상아를 아니꼽게 곁눈질하자 유상아가 딱딱한 어조로 사과한 뒤 손을 뗀다. 그 얼굴이 수작질하려는 의도나 설렘으로 발그레하거나, 뭐 그딴 기미 전혀 없이 그저 새하얗게 질려있다. 나는 펄쩍 뛰었던 사실이 민망했던 것도 잊고 혀를 찼다.



“무서우면 억지로 버티지 말고 들어가서 자.”

“…너도 무서워하면서 계속 보잖아.”

“아니 나는……, 어휴, 됐다.”



이 와중에도 고집은. 나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마시려던 커피에 입을 댔다.


유상아의 승리감은 영화의 제목을 보자마자 사라졌다. 그렇지만 유상아는 1편이 끝나고도, 2편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도 꿋꿋이 내 옆에 앉아 있었다. 나에게 평론 제의가 들어온 영화는 호러, 그것도 아주아주 잔인한 영화 시리즈였다. 단순히 잔인한 걸 넘어 사람 심리 쫄리게 하는 연출로도 유명해서 공포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필수 코스로 꼽히는.


나는 공포 영화 마니아까지는 아니다. 그래도 심장 쫄깃해지는 기분을 나름 즐길 줄은 안다. 테마파크에서 어트랙션 즐기는 감정이랑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그치만 아무리 봐도 유상아는 이런 종류의 사람 괴롭히는 영화를 좋아할 스타일이 아니었고, 이건 내 예측이 정확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이래도 같이 보자고 할 거냐, 하는 마음을 듬뿍 담아 봐야 하는 영화의 제목을 알려줬다. 나랑 밤새 영화 볼 생각으로 신나 있던 유상아의 얼굴이 싹 굳는 건 꽤 재미있었지. 그러나 유상아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자기 굳은 얼굴을 나에게 다 들켰단 걸 알았을 텐데도 꿋꿋하게 공용침실에서 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해오더라.



“너는 원래……, 이런 영화 좋아해?”



화면 속에서 비명이 조금 잦아들 무렵, 유상아의 목소리가 조심스레 귀에 닿았다. 내 집중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거의 말을 안 붙이던 애가 입을 연 게 좀 의외여서 잠시 유상아에게로 시선을 줬다. 슬며시 떨리는 음성에 기대 추측을 해보자면, 아마 무서움을 참기 위해서 입을 연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서는 ‘저런 게 대체 뭐가 좋냐’라는 기색이 완전히 지워지지 못한 채 묻어나왔다. 그 유상아도 존중하기 힘든 취향이란 게 있는 거겠지.



“특별히 선호하는 장르는 아닌데, 그래도 그럭저럭 무서운 걸 즐길 줄은 알아.”



내 대답을 들어도 유상아는 여전히 ‘그걸 왜 즐겨’라는 기색이다. 티를 안 내려고 노력은 하는 듯하다만, 처참히 실패했다는 평가밖엔 못 내리겠다.



“야, 안 놀릴 테니까 그냥 들어가서 자. 뭐 얻을 게 있다고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 걸 참고 있어.”

“싫어…….”



힘없이, 그렇지만 아직도 꺾이지 않은 고집을 담아 내 제안을 거절한다. 유상아의 손은 내 손 대신 끌어안은 베개를 쥐어뜯을 듯 움켜쥐고 있다. 아니 영화 같이 안 보면 내가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뭐에 꽂혀서 저렇게 오기를 부리는지 모르겠네. 저리 나오는데 나도 더는 배려해줄 필요 없겠다 싶어 유상아는 없는 셈 치기로 했다.


같이 영화 볼 장소로 공용침실을 제안했다는 것부터가 얘가 같이 영화 보는 일을 일종의 유사 데이트로 여겼다는 건 알겠다. 공용침실에 그럴듯한 TV도 있고 밤늦은 시간까지 영화를 보기에 편한 장소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유상아에게 그건 나를 설득할 핑계지 주된 이유는 아니었을 테니까.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버틸 일인가?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다.


2편이 끝났다. 내 감상으론 2편에서 더 추가할 이야기가 있나 싶은데, 3편도 평이 나쁘지 않았던 거로 기억한다. 볼 가치는 있겠지.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며 OTT 알고리즘이 알아서 추천 영상에 3편을 띄운다.



“3편 튼다.”

“으응.”



기가 죽어 대답하는 유상아는 평소보다 좀 어려 보였다. 아직도 베개를 꼭 끌어안고 있어서 더 그렇게 보이는 걸지도 모른다.


3편은 1, 2편보다 플레이타임이 20분은 더 길었다. 보다 보니 그 이유도 알 거 같았다. 세계관이 확장되는 내용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토리의 메인 줄기 자체는 확실히 뇌절 소리는 안 들어도 될 내용이었는데, 문제는 갑자기 훅 올라간 고어도였다.


윽,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1, 2편도 잔인하긴 했지만 스토리와 연출에 잘 버무려졌단 느낌이었다. 근데 3편은 좀 불필요하게, 가끔은 뜬금없단 느낌마저 들 정도로 과했다. 1, 2편이 무섭다고 유명하니 3편은 그 이상을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낀 건가 싶다. 그래도 4편에 대한 의무감과 결말에 대한 호기심으로 어떻게든 참았다.



- 끼긱! 끼기기기긱!

- 끄아아아아!

“으.”



참고 보려 했는데…… 영화가 결말부에 접어들면서 점점 참기 힘들어졌다. 와, 이건 진짜 뇌절이라고밖엔 할 말이 없다. 쫄리고 무섭고를 넘어 역겹기까지 하다. 내가 봤던 평은 분명 3편에 호의적이었는데 그 이름도 모르는 사람에게 배신감이 들 정도다. 3편까지 오고도 스토리 라인 유지를 잘해서 줬던 가점을 여기서 다 깎아 먹는군.


당장 영상을 중단시키고 싶은 걸 오직 프로 의식 하나만으로 버티고 있는데, 갑자기 유상아가 내 어깻죽지에 얼굴을 푹 묻었다. 꽃잠식 때를 제외한다면 여태까지 중 가장 찐한 접촉이라 할 수 있겠다. 당황해서 밀어내봐도 안 밀려난다. 오히려 내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진다.



“뭐야?”

“다 끝나면…, 저거 다 끝나면 말해줘.”



가만 보니 눈을 질끈 감고 있다. 내 옷을 붙든 손도, 베갯잇을 움켜쥔 손도 희미하게 떨리고 있고. 바싹 달라붙은 체온이 낯설고 어색한데 얘를 매몰차게 밀어냈다간 마음에 온기 하나 없는 냉혈한이 된 기분을 느낄 듯하여 그냥 놔두기로 했다. 음흉한 마음으로 만지작대는 것도 아니니 영화 끝날 때까지만 봐주자.


결정을 내린 나는 다시 TV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영화는 여전히 붉은색과 비명의 향연이다. 하지만 겁에 질린 유상아의 떨림이 전해져서인지 어째 무섭고 역겨운 마음이 싹 가셨다. 덕분에 나는 피비린내 나는 결말을 상당히 밍밍한 기분으로 넘길 수 있었다.



“야, 끝났어.”



마침내 3편이 끝났고, 시간은 오전 6시를 훌쩍 넘었다. TV를 끄고 귀를 기울이니 어둑한 새벽빛 사이로 새 지저귀는 소리까지 들린다. 시간을 제대로 자각하자 급속도로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유상아는 끝났다는 내 말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뭐지, 그새 잠들었나? 순간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했지만 곧 유상아의 팔이 내 허리에 감겨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쭈. 나는 이번에야말로 진심으로 힘을 줘서 유상아의 팔을 떼어냈다.



“이 자식 봐라. 사심 그만 채우고 저리 가.”

“진짜 무서운데…….”

“끝났다고.”



유상아는 뭐라 중얼대면서도 순순히 떨어져 나갔다. 꿀밤이라도 한 대 먹일까 하다가 관뒀다.


지금부터 자도 그리 오래는 못 잔다. 얼른 정리하고 자야지. 기지개를 켠 다음 베드 테이블 위의 커피잔을 집어 들었다. 그걸 신호로 유상아도 베드 테이블을 다시 원위치시키며 자리를 정리했다. 볼 일 다 봤으니 내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유상아의 장난기 서린 질문이 치고 들어왔다.



“무서워서 혼자 못 잘 거 같은데 같이 자면 안 될까?”

“어, 안되니까 꺼져. 기어오르지 또.”



장난치는 거 보니 무서워서 벌벌 떨던 거에서 완전히 회복했나 보군. 너 무서워하던 것도 연기였냐? 아닌 걸 알면서도 묻자 유상아가 붕붕 고개를 젓는다.



“나 공포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거 오늘이 처음이야.”

“끝까지 보긴 뭘 봐. 중간에 눈 감고 벌벌 떨었으면서.”

“1편이랑 2편은 다 봤잖아.”

“그것도 제대로 보긴 했냐?”



그러자 조금 머쓱해 하며 웃는다. 아니, 사실은 그때도 반쯤 눈 감고 보냈어. 솔직하게 시인하면서 무해하게 웃으니까 더 비아냥댈 맘도 안 들었다.


오늘 같이 있어서 좋았어. 대여섯 시간을 새하얗게 굳어있었으면서 저런 말이 잘도 나오는군 싶을 때 유상아가 또다시 멋쩍게 웃었다.



“음……. 그래도 다음에는 좀 더 무난한 걸 보자.”



이게 멋대로 다음을 기약하네. 대답 없이 하품을 하자 피곤한데 얼른 들어가서 쉬라고, 붙잡아서 미안하단다. 딱히 붙잡았단 느낌은 아니지만 피곤한 건 사실이라 너도 얼른 자라고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며 내 방으로 이어진 문을 열었다. 잘 자. 이따 봐. 등 뒤로 온화한 목소리가 나를 배웅했다.


문을 닫은 나는 곧장 침대에 눕는 대신 노트북 전원을 켰다. 오늘 본 영화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이나 그때 느꼈던 내 감상 등을 기억에서 사라지기 전에 가볍게 메모해둘 생각이었다. 무릇 좋은 작가란 메모하는 습관을 들여야 하는 법이지.


피곤한 몸을 붙잡고 긴 에세이를 쓰고 싶었던 건 아니기에 내 메모는 각 편마다 4~5줄로 간단히 요약됐다. 1, 2편 감상을 다 쓴 나는 순조롭게 3편도 써 내려갔다. 3편 주인공이 1편 주인공을 살짝 비튼 듯한 느낌이라 그건 흥미로웠지. 가문의 저주가 도시로 퍼져나가는 것도 꽤 자연스러웠고. 그치만 1, 2편보다 더 자극적이어야 한단 부담감에 도가 지나친 건 감점 요인이다. 특히 마지막에 어린아이까지 건드린 건 정말 심했고……, 그리고 그쯤에서 유상아가 나한테 매달렸지. 음, 생각해보니 그것도 좀 심했던 거 같다.



“…….”



하 씨, 돌이켜보니 걔랑 거의 이삼십 분을 끌어안고 있었던 거잖아. 그걸 떠올리자 어쩐지 더는 호평도 혹평도 적을 마음이 안 난다. 의미 없이 아무 자판이나 톡톡 두드리던 나는 유상아가 얼굴을 묻었던 어깨나 목덜미를 괜스레 긁적이다 결국 노트북을 껐다. 에이, 모르겠다. 쓸만한 건 거의 다 썼으니 얼른 자자.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들어가며 알람 시간을 맞췄다. 오늘만큼은 아침 점심 다 패스하고 잠에 취해 있어도 유상아가 뭐라 하진 않을 거다. 유상아도 자고 있을 테니. 핸드폰을 충전기에 연결하자 잠금화면이 뜨며 시간과 날짜가 눈에 들어왔다. 나열된 숫자는 특별할 건 없다. 그러나 나는 정말 새삼스러운 사실을 자각했다.


결혼식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다음편부터는 둘다 법적 유부녀가 되겠군요 그러니까 이번편은 조금 쉬어가는 편으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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