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딱 한 시간을 걸어 바다 근처의 조용한 카페에 왔어요. 버스로 20분이면 오지만 날씨도 좋고 시간도 많으니 싸목싸목 걸어보고 싶었거든요. 중간에 고개를 하나 넘어야 했는데 기억하는 것보다 경사가 가파르더라고요. 뒤에서 야곱이 어쩌고 하는 녹음테이프를 크게 틀고 걷는 사람 때문에 더 빨리 오르다 보니 마스크 뒤로 죽겠다 소리가 절로 나왔어요. 

따뜻한 플랫 화이트를 마시며 글을 쓰려고 했었는데 카페에 도착하니 등줄기에 땀이 흐르고 실례가 안 된다면 기모 후드를 훌러덩 벗고 싶었어요. 실례겠지요... 참았어요. 배낭을 내려놓고 패션프루츠 소다를 주문해서 반 컵을 벌컥벌컥 마시고 나니 좀 살겠네요. 집에 갈 땐 꼭 버스를 타야겠어요. 


영화 <걷기왕>의 만복(심은경 분)에겐 그런 선택권이 없어요. 선천적인 멀미 증후군으로 어떤 교통수단도 탈 수 없는 만복은 아침부터 꼬박 두 시간을 걸어 학교에 가요.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책상에 엎드려 곯아떨어질 수밖에 없지요. (뜻밖의 만복-체험으로 그 심정을 백번 천번 이해하게 되었네요.) 
딱히 꿈이 없는 만복의 진로를 앞장서서 고민하던 담임 선생님(김새벽 분)은 왕복 4시간을 대수롭지 않게 걷는 만복을 육상부에 데려갑니다. 그렇게 만복은 경보 선수가 되어요. 

만복이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해 보여요. 만복의 아빠는 걸으면서 단어장을 외운다든지 ‘노오력’을 하면 못할 것이 없다고 하는데, 만복이 또 그렇게까지 하는 캐릭터는 아니고요. 물렁하고 천진난만한 성격인 한편, 열여덟 살 치고는 체념하는 태도가 몸에 뱄어요. 산골짜기에 살면서 이동 수단이 도보밖에 없고, 운신의 범위가 좁으니 상상의 범위마저 좁아지게 되었지요. 만복이 바라는 건 집에서 키우는 소순이가 새끼를 배는 것 말곤 딱히 없어 보여요. 

저는 버스도 자주 다니지 않는 시골에서 고등학교에 다녔어요. 가끔 교실 창문 밖으로 느릿느릿 걸어가는 황소를 멍하니 쳐다보곤 했지요. 그때 만복처럼 대단한 꿈이 없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저는 공감하지 못했어요. 일단 이 시골을 벗어나 SBS가 나오고 2PM을 직접 볼 수 있는 서울에 가야 했거든요. 공무원을 하기엔 내 그릇이 너무 크다고 생각했지만 (건방졌죠...) 그래도 ‘칼퇴 후 맥주'를 위해 공무원이 되고 싶은 만복의 짝꿍 지현에게 더 가까웠을 거예요. 뭔가 되고 싶은 걸 찾는 게 보통이라고 생각했고, 보통에서 벗어나기는 무서웠으니까요. 

어릴 때부터 잘하는 것을 찾기는 쉽지 않다, 김연아 선수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대부분 사람들은 아주 늦게 그것을 찾으며, 못 찾고 끝나는 인생도 많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20대 초반의 저에게 꽤 효과적인 위로이자 유용한 변명거리였어요. 그렇게 어느 시점에만 유효한 위로의 말이 있잖아요. ‘아프니까 청춘’ 따위도 한때는 위로로 통했더랬죠. 그다음엔 늦더라도 완주만 하면 된다고들 했었고요. 2016년에 나온 이 영화는 ‘완주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네요. 

서점에 가면 온통 ‘뭐뭐 하지 않아도 괜찮아’로 가득했던 즈음이었어요. 2021년의 저에게 유효한 위로는 아닌데요. 게다가 캔디형 인물에겐 힘을 얻지 못하는 편이라, 착잡할 때 일수록 착한 영화는 잘 보지 않아요. 그런데도 이 영화를 다시 보는 건, 만복이 발톱이 빠지도록 노력할지, 그만할지 사이에서 충분히 고민하고 단호하게 선택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만복의 “그만할래요”는 포기가 아니라, 책임감 있는 선택인 거예요.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 좋아서 한다고 믿고 싶은 거겠지.” 수지 선배의 그 말에 저마다의 사정이 떠올라 몸을 옹송그리게 되지요. 그치만 그게 도피였든, 합리화였든 만복은 온 힘을 다해 경보를 했어요. ‘경보왕’이 되지 못했어도 그 시간은 어디 가지 않고 만복을 자라게 했고요. 이건 2021년 우리의 ‘일하는 마음’과 통해 있군요. 


 2년 넘게 해온 일을 후임자에게 인계하며 저는 내내 복잡한 마음이었어요. 조금만 더 버티면 이직 기회가 올지도 모르는데, 고지를 앞두고 흐름을 끊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불안이 커졌어요. 그런데 동시에 (이런 말을 좀처럼 안 하는 편인데도) 나 정말 아등바등 열심히 했네, 나름대로 재밌었구나, 싶기도 했어요.
막상 회사를 나오는 날에는 오직 후련함 뿐이었답니다. 여기서 이것보다 잘할 순 없었거든요. 아스팔트 바닥에 대자로 뻗은 만복도 그런 마음이지 않았을까요.

오래된 책상 서랍을 열었더니 열여덟 살 때 쓰던 스터디 플래너가 있었어요. 맨 앞 장 꿈을 적는 란에 ‘HUFS (1지망 대학교였나 봐요) -> 지구 정복 -> 우주 정복’이라고 적혀 있습디다... 음... 제법 자아가 큰 친구였더라고요.

이제 무얼 정복하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그만할래요”하고 회사를 나와서 어디로 걸어가야 할지도 아직은 모르겠고요. 그래도 지금껏 발톱이 빠지도록 경보했는걸요. 그 시간이 ‘무슨 왕’의 양분이 되겠지요? 

그렇게 믿어야 살 수 있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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