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혁아, 경기 시작한다.”


승유는 3인석 소파에 가부좌를 틀고서 주방 쪽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진혁은 조금 전 냉동실에 넣어둔 유리컵과 캔 맥주 그리고 최대한 깔끔하게 먹을 수 있는 아몬드를 챙겨 거실로 나왔다.


“진혁아, 너 ‘미랭시’ 봤어?”

“아니.”

“나 DVD 빌렸는데, 보고 줄까?”


진혁은 그래도 좋고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너 그렇게 무심하면 안 돼. 우리 이제 군인 아니고 민간인이야. 유행에 밀리면 안 된다고.”

“그게 이미 작년 영화인데 무슨 유행이야.”

“작년에 대. 단. 히. 핫. 했. 던. 영화지. 이 영화, 여전히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


승유는 이태리 감탄사를 연발하는 듯 만두 손을 흔들면서, 다른 민간인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가려면 우리도 노력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혁은 고작 영화 하나가 무슨 노력씩이나 되느냐고 코웃음 친 뒤, 티슈 한 장을 뽑아 이미 깨끗한 테이블을 한 차례 더 닦았다.


“우리는 미랭시 영화 보고, 최신 드라마도 봐야 해.”

“고시 보냐.”

“킁킁... 진혁아, 무슨 타는 냄새 안 나?”

“무슨 냄새.”

“내 심장이 타는 냄새.”


진혁은 테이블 닦는 걸 멈추고 미간을 좁힌 채 승유를 위아래로 훑었다. 욕을 할까 멱살을 잡을까, 고민하는 눈이었다.


“이봐, 이봐! 이래도 노력을 안 한다고?”

“뭐야.”

“요즘 민간인 사이에서 핫한 드라마 대사야. 진혁아, 너 육이오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아니.”

“하지 마라.”

“방심해서, 하하하!”


진혁은 에라이, 하면서 손에 쥔 티슈를 승유에게 던졌다.


“어때?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하지? 노력 없이는 민간인의 유머를 이해하지 못한다니까. 너 미랭시까지 안 보면 완전 원시인 된다.”

“에라이.”


진혁은 유리잔 하나와 맥주 캔 하나를 승유 쪽으로 밀어주고, 3인석 소파 옆에 놓인 1인석 소파에 앉았다.


“진혁아, 형은 학교 잘 복귀하셨대?”

“연락 안 해 봤는데.”


이국땅에 사는 한 살 터울 사촌 형을 말하는 거였다.


“동반 입대해서 전우애까지 쌓은 형인데 걱정을 좀 해 줘야 하는 거 아냐?”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 형 걱정이다.”

“하긴 형은 늘 우리 위였지. 공부 잘해, 운동 잘해, 인기 많아.”


승유는 진혁을 곁눈질로 훑었다.


“형은 완전 외향, 너는 완전 내향. 그런데 가만 보면, 또 결이 같단 말이야."


승유의 말처럼 다른 듯 비슷한 두 사람이었다. 둘 다 오이를 먹지 않았고, 회사 경영에 관심이 없었다. 다른 친인척들이 회사 지분에 혈안이 되어 상대의 치부를 들출 때도, 진혁과 형은 컴퓨터 속 우주전쟁에만 관심을 보였다.


“그나저나 해록이는 언제 온대.”


진혁이 묻자, 승유는 발신자 ‘미친 X’이라고 뜨는 휴대폰 화면을 들어 보였다.


“지금 오고 있어.”


승유는 통화 버튼을 누른 뒤 귀찮아 죽겠다는 말투로 ‘나 한남동, 한남동’하고 전활 끊었다.


“규승이는?”

“해록이가 규승이 화실 들러서 픽업해 오는 중.”


진혁은 맥주 담긴 유리잔을 들고 무심하게 물었다.


“그런데 규승이는 무슨 오디션을 본다는 거야.”


승유는 어깨를 올렸다 내린 뒤 기울인 유리잔에 맥주를 따랐다.


“무슨 독립영화래. 제목은 나도 몰라.”

“그러니까, 자기 영혼을 그림에 불태우겠다던 애가 갑자기 웬 독립영화냐고.”

“몰라, 예술엔 경계가 없다면서 이번에는 자기 영혼을 연기에 불태워 보겠대.”


진혁이 입술을 삐뚜름하게 하고 머리를 젓자, 승유가 허공에 손바람을 만들었다.


“야, 야, 규승이의 정신세계는 애써 이해하려고 하지 마. 그 자식,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미대 오빠잖아.”


승유가 말한 대로 규승의 별명은 ‘미대 오빠’였다. 그 이유가 꼭 미대를 다녀서만은 아니었다. 단발머리에 핑크색 트레이닝 또는 비녀를 꼽아 틀어 올린 머리에 은갈치 색 정장을 멋들어지게 소화한 독특한 이력 또한 그 이유가 되었다.


승유는 다 들이킨 잔을 테이블에 놓고 아몬드를 하나 집어먹었다.


“맞다. 너랑 같이 과제 하는 서희라는 친구, 지훈이랑 친한 후배라던데 너 알았어?”


불쑥 진혁의 눈앞에 서희의 보조개가 떠올랐다. 진혁은 유리잔 안의 맥주 거품을 보면서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김규택 교수님이랑 면담할 때 들었어.”

“서희랑 같이 다니는 ‘이윤’도 지훈이랑 친한 거 알았어?”

“어.”

“그럼 너 이것도 알아? 김해록이가 윤한테 고백하려고 준비 중인 거.”


진혁은 풉-하고 헛웃음을 뱉고는 몰랐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호텔경영학과를 다니는 애가 어떻게 우리보다 윤을 먼저 알아냈지?”

“그게 해록이 특기잖아. 취미는 고백하기고.”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군대 있을 때부터 윤을 알았느냐는 거지. 이 정도면 취미가 아니라 직업이야.”


해록은 윤과 사귀게 되면 매일 맛있는 요리를 해줄 거라며, 제대하자마자 요리학원에 등록했다. 고백을 거절 당하는 경우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결정이었다. 승유는 못 말리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고백도 하기 전에 요리학원부터 다닌 애는 내 주변에 김해록 뿐이야.”

“직업의식이 확실한 미친놈이네.”

“김해록이는 그냥 미친놈이야. 예쁜 여자만 보면 눈이 도는.”


승유는 검지 두 개를 자기 눈두덩이 위에다 대고 빙빙 돌리더니, 갑자기 바른 자세를 하고 앉았다.


“야야, 근데... 또 실제로 보니까 눈이 돌 만큼 예쁘긴 예쁘더라.”

“누구.”

“누구긴, 윤이지.”


진혁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 늦게 와서 못 봤지? 출석 부를 때 남자애들이 다 윤만 봤어.”


승유는 아몬드를 두어 개 쥐어서 입안에 넣었다. 그리곤 뭐가 재밌는지 배시시 웃었다.


“아니, 아니, 지훈이한테 그런 후배가 있을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지훈이랑 더 친하게 지낼걸. 학교 다닐 때 너무 내외했어. 내가 왜 그랬을까? 야, 우리 언제 날 잡아서 지훈이 면회 갈까? 네 파랑이 타고?”

“승유야.”

“어, 언제 갈까.”

“너 방금 김해록 같았어.”

“에라이.”


승유는 차라리 욕을 하라며 빠드득 이를 갈았다. 진혁은 너털웃음을 치고는 티슈를 한 장 뽑아서 테이블 위에 남은 맥주 캔 모양의 물기를 닦았다.


“근데 있잖아, 윤한테 모든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보니 서희 그 친구는 그냥 공부 잘하는 이미지가 강했거든. 그런데 너랑 과제같이 한다고 하니까 서희가 자꾸 눈에 띄는 거야. 그래서 유심히 보니까 서희도 다른 느낌으로 예쁘더라. 단아하다고 해야 하나?”


진혁은 테이블을 닦은 티슈를 스테인리스 소형 휴지통에 넣은 뒤 다시 소파에 등을 기댔다.


“금융공학 시간에 보니까, 서희 걔 쌍꺼풀 없는데 눈이 크더라. 그리고 속눈썹 긴 거 봤냐?”

“......”

“지금의 커트 머리도 잘 어울리긴 한데 머리 길면 더 예쁠 거 같지 않든?”


진혁은 승유 이야기를 듣기만 할 뿐 동조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때 도어록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승유와 진혁은 누가 왔는지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얘들아, 나 왔다! 오는 길에 규승이도 주워 왔다!”


해록은 아우터를 벗어 승유 머리 위에 휙 던지고는 제집 마냥 주방으로 가 이거저거 먹을거리를 찾았다.


“하앙... 얘들아.”


해록이가 주워 왔다는 규승은 잠이 덜 깬 얼굴로 칭얼거리며 소파에 드러누웠다.


“어제 새벽까지 연기 연습하고 화실에서 자고 있었는데 저 미친 바다 사슴이 날 납치했어...! 누가 저 자식 좀 죽여줘...!”

“규승아, 그런 희망은 포기해. 저 자식은 좀비야, 안 죽어.”


승유는 규승의 얼굴 위에 해록의 아우터를 덮어주고 소파 아래 자리로 내려왔다. 그 사이 해록은 언제나처럼 자기 흉은 들은 체 않고 냉장고에 고개를 파묻었다.


“진혁아으! 진혁아으! 이거 까망베르 치즈 먹어도 되냐?”

“응, 안 돼, 우리 와인 아니고 맥주야.”

“진혁아! 여기 샤퀴테리 패키지 먹어도 되냐?”

“응, 안 돼, 우리 와인 아니고 맥주라고, 미친놈아.”

“원래 재벌들은 맥주에도 와인 안주 먹는 거야!”


해록은 열린 냉장고 앞에서 엉덩이를 씰룩였다. 진혁은 맥주를 마시려다 말고 어금니를 깨문 채 소리를 높였다.


“우리 집은 재벌 아니라고. 진짜 재벌들이 들으면 비웃는다고... 미친놈아.”

“몰라용! 나는 그런 거 몰라용! 나는 상속세 내면 다 재벌로 쳐용!”


해록은 깐죽깐죽 용용 거리면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아일랜드식 식탁 위로 까망베르 치즈와 샤퀴테리 패키지를 옮겼다. 저 미친, 하고 진혁의 입술이 씰룩거리자 바닥에 앉은 승유가 그의 손등을 두드렸다.


“진혁아, 포기해. 저 자식은 좀비야, 안 죽어.”


해록은 트레이에 까망베르 치즈와 샤퀴테리 패키지를 담더니, 갑자기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다며 트레이를 들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승유 맞은편 바닥에 앉았다.


“야야! 진혁아, 너 그거 알아? 너랑 같이 과제 하는 서희라는 친구, 지훈이 후배래.”


휙- 승유가 손바닥을 펴서 해록의 눈앞에 바람을 만들었다.


“네놈이 윤한테 고백도 하기 전에 요리학원부터 다닌다는 이야기까지 내가 했어.”

“아 그래? 그럼 이야기 나온 김에...!”


진혁은 나지막이 해록을 불렀다.


“김해록.”


그리곤 자기 입술에 맞닿은 엄지와 검지로 지퍼 닫는 시늉을 했다.


“너, 행여나 승유나 나 팔아서 윤한테 들이대면... 그땐 바로 그 입에 오버로크 친다.”

“아니, 무슨 오버로크까지 쳐! 남녀 사이에 그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

“친구 사이에도 그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오버로크 칠 수도 있어.”

“아이, 거참.”


해록은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테이블 위에 맥주 하나를 끌어안고는 한 손으로 맥주 표면을 어루만졌다.


“내가 윤이랑 친해지려는 게 절대 사심 때문만은 아냐. 나는 윤의 친구가 되어서, 윤과 서희의 방어벽이 되어주려고 하는 거라고.”


이 미친놈은 또 뭐라는 거야, 하고 진혁과 승유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지훈이가 우리한테 어떤 후배야? 어? 01학번 후배들 중에 가장 예의 바르고, 어? 붙임성 좋고, 어?”


해록은 어? 할 때마다 연속으로 맥주 캔을 높였다.


“야, 김해록, 말은 바로 해야지. 엄밀히 말하면 우리 과 후배지. 지훈이도 윤도 서희도.”


승유는 엄지로 자신과 진혁을 번갈아 가리켰다. 해록은 그렇게 따지면 안되는 거라며 엄지로 자신과 앞에 앉은 승유, 뒤에서 자는 규승, 1인석 소파에 앉은 진혁을 차례로 가리켰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 학교 후배지. 지훈이도 윤도 서희도. 그리고 나는 지금 우리 학교 후배인 서희에게 닥친, 엄청난 위기를 이야기하려는 거고.”


진혁과 승유는 해록을 빤히 보았다. 규승도 얼굴 위의 아우터를 들고 그 틈으로 해록을 보았다. 가끔은 오늘처럼 해록의 맥락 없는 말에도 집중하게 되는 이상한 날이 있었다.


“서희 그 친구가 너희 학과 98, 99학번 하이에나 무리한테 찍혔단 말이야. 너희도 그 무리가 얼마나 저질인지 잘 알잖아.”


무리는 학교 내에서 평판이 좋지 않기로 유명한 사내들이었다. 언급하는 것조차 불쾌한 종, 자신의 나약함을 감추기 위해 비슷한 이들끼리 무리 지어 다니는 주제에 마치 자신들이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착각하며 만행을 일삼는 그런 류.

후배들 사이에선 저들을 조심하란 말이 시험 족보보다 빨리 돌았다. 자칭 타칭 미친놈인 해록 조차도 그들을 만나면 다른 길로 돌아가곤 했다. 그 이유가 무서움은 아니었다.


“알지? 그 자식들 남자애들은 안 건들잖아. 혹시라도 처맞을까 봐."


건드렸다가 처맞았다는 의견도 있었다.


“듣자 하니 저번 학기에도 여학생 세 명이 휴학했대.”


해록은 손가락 세 개를 펴서 승유 눈앞에다 한번, 진혁 눈앞에다 한번 흔들었다.


“그런데 지훈이가 군대 가는 바람에 지금 서희는 방어벽이 없는 상황이야. 자, 얼마나 위급한 상황인지 느낌이 오지? 그러니! 여기서 지훈이 선배인 우리가 이 상황을 모른 척하면 돼, 안 돼?”


해록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승유를 보자, 승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보니 또 그렇다 했다.


“이진혁, 네 생각은?”


진혁은 손에 쥔 잔을 가만가만 돌리며 말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나설 일도 아니지.”


해록의 말대로 후배인 건 맞다. 하지만 친분은 없다. 지훈에게 직접 부탁받은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굳이 상관할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진혁은 하던 생각을 멈추고 컵 안의 맥주를 한 번에 들이켰다.


“만약에 내가 김서희 그 친구라면.”


진혁은 빈 잔을 움켜쥐고 담담하게 말했다.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걱정한다는 사실이... 더 부담스러울 거 같은데.”


평범한 습작생. 더디고 어설픕니다. 빠른 전개를 원하는 분께는 권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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