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初

 



중학교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졸업하는 초등학생처럼 중학생 때도 당시 품을 법한 낭만을 가지고 졸업했으나,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생활에 다가오는 실망감은 여전했다. 인간은 배움의 생물이라던데, 한 번으로는 안 되나봐. 방에 있는 전신 거울 앞에 서서 괜히 어깨를 으쓱이고는 분위기를 잡으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읊어보기도 했다. 분위기 잡던 것도 잠시, 낯간지럽다고 혼자 난리도 쳐봤다. 바로 어머니가 들어오는 바람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척해야 했지만.


물론 중학교 때와는 다른 점이 있기도 했다. 첫째로 제 학교에는 미야기에서도 유명한 운동부인 배구부가 있다는 것이고, 둘째로 그 배구부에는 소문의‘오이카와 토오루’가 있다는 점이다. 운동에는 문외한인지라 자세히는 몰랐지만, 이 일대에서 배구를 하는 사람이라면 웬만해서는 오이카와군의 존재를 다 알 정도라고 했다. 그만큼 실력이 좋은가 보지? 심드렁한 제 말에, 친구는 떨떠름하게 웃었지만 깊은 관심은 없었기에 굳이 되묻지는 않았다. 잘생긴 얼굴에 성격도 좋아 주위에서 사람이 끊이지 않으면서 배구까지 잘하는 사람. 제게 오이카와 토오루는 딱 거기까지의 사람이었다. 애초에 자신은 그가 누군지도 몰랐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언제나 밝은 미소로 여학생들과 이야기하는 오이카와 군의 모습은 교실 창문 너머로 볼 수 있는 흔한 광경 중 하나였다. 저렇게 상대해주는 것도 귀찮을 텐데. 끈질기게 오이카와 군의 뒤를 따라다니는 학생들도 대단하지만, 그것을 받아주는 오이카와 군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사람들은 오이카와 군의 어디가 좋은 걸까. 그 모습을 볼 때마다 품고 있던 생각을 언젠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은 날이 있었다. 갑자기 반 분위기가 조용해지더니, 친구들은 빠른 속도로 제게 몰려와―개중에는 친하지 않은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 이유를 정말 모르냐며 아주 친절하게 하나둘씩 설명해주었다. 그날 처음으로 말로만 듣던 오이카와 군의 연예인 뺨친다는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으며, 이후로는 절대 오이카와 군의 인기를 의심하는 말을 내뱉지 않기로 결심했다.


물론 덤으로 오이카와 군을 썩 좋아하지 않게 되기도 했다. 사설이 길었지만, 결론은 오이카와 토오루는 아이돌에 가까운 인기를 갖고 있다는 거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떤 사람인가. 늦었지만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방금 말한 학교, 아오바죠사이의 3학년이 되는 학생으로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외모와 성적 보통, 교우관계 원만. 이름조차 흔해서 어느 반에나 한두 명은 있다는 성을 가진 사람이다. 뭐하나 특출 난 것 없는, 한마디로 평범한 여고생이란 뜻이다.


특별한 게 없는 자신에게서 남들과 다른 점을 뽑으라 한다면, 웬만한 세이죠 학생이라면 한 번쯤은 마음속에 품었을 오이카와 군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겠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를 좋아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잘생긴 데다 성격도 좋은 그를 좋게 봤기 때문에 자신 같은 사람은 몇 없었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뜻을 이루자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이상하게 꺼려졌다. 처음부터 오이카와 군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고, 선한 사람을 아무 이유 없이 미워하는 성격도 아닌데 이상하게 마음이 가질 않았다.


어쩌면 제 마음 속에 오이카와 군과 같은 배구부원 중 다른 사람, 심지어는 그와 가까운 사이인 친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걸 수도 있었다. 오이카와 군에 가려져서 그렇지, 그의 친구들, 그러니까 배구부 주전 선수들의 인기도 꽤 많은 편이었다. 그저 오이카와 군의 팬이 그에 배, 혹은 조금 더 많이 있을 뿐이다.


그중에서 제가 좋아하고 있는 사람을 이야기해보자면 이름은 마츠카와 잇세이. 오이카와 군이 있는 배구부의 주전 중 한 명으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가 맡고 있는 포지션은 공을 막는 역할의 미들블로커라고 했다. 배구에 대해선 아는 게 거의 없었지만 그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은 마음에, 배구부를 몇 번 기웃거리며 알아낸 정보다. 큰 체격이라던가, 평소 짓고 있는 나른한 표정이나, 친구들하고 장난칠 때면 삐죽 나오는 오리입도 제 취향이다. 조금은 나이가 들어 보이는 인상일 수 있으나 그것 역시 제 취향이다. 제 말을 들은 친구들은 이미 ‘헤어 나오지 못할 늪’에 빠졌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냥 좋은 걸 어떻게 해.


마츠카와 군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실상 거창하지는 않다. 이유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유독 힘이 들었던 날이었다. 아침부터 축 저지는 기분 때문에 집에 가서 쉬어야지 생각했으나, 하교하기 전 선생님의 눈에 띄어 심부름까지 하게 되는 바람에 짜증이 나있었다. 부탁받은 종이들을 한 아름 안아들고 복도를 걷고 있었을 때, 앞은 보지도 않고 무작정 달려오던 남학생들과 부딪쳤고 그 힘에 종이들이 쏟아지며 복도를 가득 채웠다. 달리던 것도 멈추지 않으며 미안하다는 기색 하나 없는 사과만을 내뱉고 뛰어가는 남학생들의 뒷모습만 바라보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한숨만 내쉬곤 종이들을 주웠다.


심부름을 시키신 선생님도, 저를 치고 달려간 남학생들도 짜증났지만, 별것 아닌 그 상황에 짜증을 내는 제가 한심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만 좌절하고 조금이라도 빨리 해결해 집에 가자 싶어, 종이들을 줍는데 전념했다.


꽤 많은 양이었음에도 바닥에 떨어진 종이들이 금세 보이질 않아 의아하던 때, 교복이 아닌 웬 유니폼을 입은 남학생이 제 앞에 쪼그려 앉아 떨어진 종이들을 말없이 주워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와준 것은 고마웠지만 그때의 자신은 속에서 잔뜩 꼬여있어, 고운 말이 나가지 못할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고맙다는 말한마디 없이 쳐다만 보고 있는 자신은 개의치도 않은 듯, 남학생은 그저 앉아있던 저를 일으켜주며 주운 종이들을 넘겨주었다. 쪼그려 앉아있어 몰랐지만 그의 키는 상당히 큰 편이라, 고개를 꽤 들어야만 겨우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너 치고 간 녀석들, 나랑 같은 배구부원인데 연습이 일찍 끝나서 기분이 좋은가 봐. 대신 사과할게. 이해해 줘.’


거리를 두고 걸어와서 일행인 줄도 몰랐으니 그냥 넘어가도 될 일이었는데. 별다른 말은 않고 살짝 고개 숙이며 사과하고 지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만 봤다. 말은커녕 얼굴도 제대로 마주하지도 못했던 그날의 자신을 떠올리면, 그때부터 그에게 빠졌던 것 같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종이를 주워주는 것밖에 없다한들, 기분이 최악인 상태의 자신을 구해준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이전의 좋지 않던 기분은 기억나지도 않았다.


아무튼 흔하디흔한 이야기 중 하나겠지만 저에게는 잊을 수 없는 기억 중 하나로 남아 있었기에 이야기는 거의 나누지 못했음에도 계속해서 그가 떠올랐고, 그래서 그와 나눴던 대화 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배구부’ 단어를 떠올려 제 친구 중 배구부원에게 그의 정보를 알아내 보기도 했다.


오이카와 군이야 세이죠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그 남학생, 그러니까 마츠카와 군은 오이카와 군하고 친구였으니, 정보를 알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이전 일로 오이카와 군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이때까지 제게 오이카와 군은, 제가 좋아하는 사람의 정보를 엮어주는 매개체 정도쯤에 가까웠다.

 

“아직도 준비 중이니? 새 학기부터 학교 늦겠다!”

“안 그래도 지금 나가려고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마츠카와 군을 바라본 지도 벌써 1년이다. 옆에서 보는 저들이 더 답답하며 친구들은 마음이라도 전하라 했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아마 그들도 본인 일이었으면 그렇게 말하지는 못했을 거다. 새 학기인 지금 자신이 바라는 것은 딱 한 가지, 마츠카와 군과 같은 반이 되는 것뿐이었다. 마음을 전하는 것은 못할지라도 같은 반이라면 그를 바라보는 것만큼은 마음 놓고 할 수 있을 테니까. 고등학교 마지막 1년만큼은 좋아하는 사람과 같은 반이 되기만을 바랐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배정된 반을 확인했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위에서부터 천천히 내려가며 확인했지만, 아쉽게도 올해 역시 마츠카와 군하고는 다른 반이었다. 게다가 그 ‘오이카와 토오루’와는 같은 반이 되었으니 조용한 한 해는 물 건너갔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래도 덕분에 배구부, 정확히는 마츠카와 군에 대한 소식은 조금이나마 빠르게 알 수 있을 테니 다행이려나. 아쉬운 마음을 홀로 위로하며 제가 속한 반에 들어섰다.


반에서 느껴지는 익숙지 않은 분위기에 움츠러들었지만, 그 속에서 겨우 발견한 낯익은 친구에게 다가가 방학 동안의 회포를 풀며 인사를 나눴다. 간간이 다가오는 새로운 친구들에게도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좋든 싫든 앞으로의 1년을 한 반에서 보낼 친구들이라 초반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알지만, 낯을 가리는 자신에게 이 새 학기의 시작만큼 어려운 일은 없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친구들의 대화에 적당히 맞춰 답하고 있을 때였다.

 

“너희도 그거 봤지? 우리 반에 오이카와 군 있는 거!”

“그럼, 당연하지! 아침에 그거 확인하자마자 다른 애들한테 자랑했잖아.”

“아~ 오이카와 군과 함께 있다니…. 꿈만 같아!”


역시나 오이카와 군의 이야기는 끊이질 않는다. 그의 인기야 익히 알고 있었다만,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은 반에 있던 친구들까지도 소란스러워지는 걸 보니 정말이지 놀라울 따름이다. 그나저나 너무 호들갑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저 역시 마츠카와 군과 같은 반이 되었다면 저런 반응, 어쩌면 더 심한 반응을 보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빠르게 그녀들을 이해했다. 지금도 이런데, 오이카와 군이 왔을 때는 얼마나 더 난리가 날지 상상되지도 않는다.

 



 



어, 오이카와! 새 학기를 맞아 들떠 있던 분위기가 한층 수그러든 것도 잠시, 한 학생의 부름으로 단숨에 시끌벅적해졌다. 오이카와 군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조용히 들어왔지만 불린 그의 이름 하나만으로도 분위기를 바꾸는 데엔 충분했다.


그가 앉기도 전에 괜히 한번 말을 걸어본 이도 있고, 얼굴을 붉히며 멀리서만 지켜본 이도 있었다. 잡지에도 실릴 만한 그의 외모―물론 실리는 이유에 배구 실력도 빠트릴 순 없다.―덕분인지 특히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성격이 모난 편도 아닌 지라 그의 곁에는 남학생들도 더러 있었다. 영양가 없는 이야기에도 오이카와 군은 웃음을 잃지 않으며 그들을 상대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지치지도 않나.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그의 변함없는 행동이었으니 천성인 것 같기는 했다.

 

숫기 없는 성격이기도 했고 제 마음에는 이미 들어차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큰 관심이 없어, 소란스러운 무리에서 조금 떨어져 앉아 그들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넋 놓고 보던 중, 오이카와 군과 눈이 마주쳤다. 보지 않은 척하기에도 늦은 것 같아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뒤통수가 따가운 기분이 들었다. 너무 빤히 보고 있었나. 사람 상대하기에 바쁠 그가 저처럼 평범한 사람에게 시선을 둘 리 없을 텐데, 아직도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시선의 행방을 확인하기 위하여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착각은 아니었는지 저를 바라보던 그와 또 마주쳤다.


왠지 모르게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남들에게 보여주던 것과는 달라 보였다. 제가 잘못 봤나 싶어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계속해서 쳐다보는 제 시선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오이카와 군은 아까와는 다르게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무래도 제가 착각한 모양이다.


뜬금없게 생각할 순 있지만 오해한 것이 미안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이상한 애로 생각할 것만 같아 마음이 쓰였다. 그와 잘해볼 생각은 없으나 그래도 이미지가 좋아 보이고 싶은 게 사람 심리다. 아니, 이상한 애라며 오해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마츠카와 군에게만큼은 자신의 이야기를 이상하게 하지 않아주길 바랄 뿐이었다. 새 학기부터 조짐이 좋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새 학기를 맞아 어수선한 분위기는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신 후에야 겨우 진정됐다. 수업이 시작하고는 전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이 시작된다. 오이카와 군과 같은 반이 됐다 한들, 저들의 일상에는 크게 달라질 것이 없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를 마음껏 볼 수 있다는 점 정도지만, 자신의 미래를 준비해야 할 수험생인 저들은 이마저도 수업을 포기하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물론 진학 문제를 떠나, 그와 같은 반이 됐다고 해서 그와 뭘 어떻게 해볼 생각을 하는 학생들도 없을 것이다. 당사자인 오이카와 군은 애인을 만들 생각조차 갖고 있지 않을 테니까.

 

‘오이카와 토오루는 애인을 사귀지 않는다.’

 

세이죠에선 불문율에 가까운 말이다. 인기가 많은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선배든 후배든 사람이 끊이질 않았지만, 오이카와 군과 그 이상의 관계가 있는, 배구부원 이외의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매년 초반의 오이카와 군은 하루도 빠짐없이 고백을 받으러 나가곤 했으나, 항상 혼자 돌아왔으니 거절을 했음이 틀림없었다. 그 자리에 있지 않아도 함께 나갔던 사람들이 울상이 되어 돌아오는 모습을 심심찮게 봤기에 모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고백하는 이들의 심리는 알 수 없다. 자기라면 괜찮을 거라는 자만심일 수도 있고, 그래도 혹시나 하는 호기심일 수도 있고.


오이카와 군이 애인을 사귀지 않는 것은 사람을 싫어하냐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평소 그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그들을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아 보이니까. 호감도의 문제보단 ‘오이카와 군이 흥미 있는 것은 배구뿐이다.’라는 쪽의 가설이자 사실에 가까운 말이 오히려 믿음직했다. 배구에 대한 그의 열정, 혹은 집착은 웬만한 사람이라면 모르지 않았다.


오이카와 군은 배구로만 이루어진 사람이다. 체육관을 드나들던 제가 지켜본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배구에는 관심 없었지만 ‘배구하는’ 마츠카와 군이 궁금해 체육관을 매번 방문하던 날 중 하나의 일을 근거로 들 수 있다.―방문하기로 마음먹은 첫날에는 몰래 찾아가서 엿봐야 하나 걱정했으나 배구부에서는 연습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의 관람을 허용했기에, 설레는 마음을 품고 종종 찾아가곤 한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도착한 체육관에는 언제나 저보다도 일찍 온 학생들이 존재했다. 체육관에 있는 모든 사람이 오이카와 군을 보러오는 건 아니겠지만, 체육관에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그에게 시선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고 단언한다. 시선을 끄는 외모도 외모지만, 현 내 베스트4에 속하는 강호 학교에서 주장을 맡고 있는 그의 배구 실력은 무시할 게 못됐다.


체육관 2층은 언제나 오이카와 군을 보러 온 여학생들로 가득 찼기에, 저 역시 그가 내심 궁금하기도 했었다. 소리를 질러가며 오이카와 군을 응원하는 여학생들의 시선을 따라 서브를 넣기 위해 자리에서 점프하는 그를 바라보았다.


점프를 한한 오이카와 군이 서브를 넣는 그 짧은 순간은, 마츠카와 군만 보던 자신의 시선조차 사로잡기 충분했다. 강하게 내리쳐진 공이 반대편 코트 안으로 정확히 떨어진 것을 확인한 그는 팀원들을 향해 만족스럽다는 듯 웃어 보였다. 잠시 쉬는 동안에도 공을 잡고 있었고, 그의 시선은 배구공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바로 연습을 시작한 바람에 그의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본 것은 그게 다였지만, 그가 진심으로 배구를 좋아한다는 것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만일 제가 마츠카와 군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그 열정에 빠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론 금세 흥미가 떨어져서 곧바로 옆에 있던 마츠카와 군을 향해 시선을 돌리긴 했다.


잠깐이라도 저조차 빠지게 했던 배구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가진 오이카와 군의 일상은 언제나 똑같았다. 수업 시간에는 수업에 집중하며, 친구들과 수다도 떨다가, 가끔은 저를 보러 오는 학생들을 상대하기도 하고. 모든 수업이 끝나면 체육관으로 달려가 힘이 다할 때까지 배구를 하겠지.


같은 맥락에서 오이카와 군이 혼자인 이유가 설명된다. 그는 배구에만 신경 쓰기에도 벅찬 사람이다. 오이카와 군도 다른 곳으로 신경을 돌릴 수 없을 테고, 상대도 저보다 배구를 신경 쓰는 그의 옆을 지키고 있기 힘들 테니까. 과연 누가 그런 그의 옆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남들과는 다른 감정이라 해도 배구가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는 그에 대해서는 궁금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2. line (선, 경계)

 

 

 

유명한 오이카와 군과 같은 반이 된 사실은 제겐 큰 흥미를 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로부터 수반되는 소문에 짜증만 늘 뿐이다. 만일 소음의 근원지가 마츠카와 군이었다면―그런 상황에는 제가 중심이겠지만.― 저도 기꺼이 반겼을 거란 생각에, 조용히 속으로만 삭였다.


그들의 환호를 이해할 수는 있으나 가만히 듣고만 있기에는 힘들어서, 쉬는 시간에는 반에서 나와 있는 쪽을 택했다. 마츠카와 군이나 보러 가볼까. 저보다 앞의 반이기도 했지만 그의 반은 제 반을 확인하기도 전에 찾아봤다. 친구들은 항상 지겹다곤 했지만 제 반보다 좋아하는 사람의 반이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합리화했다.


제 친구 중 마츠카와 군과 같은 반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큰 위안이 되었다. 낯을 가리는 자신이 그와 안면을 텄을 리도 없고, 보러 갈 이유 없이는 막무가내로 반에 들어가지도 못했을 텐데. 마츠카와 군과 같은 반이 된 친구는 제게 그를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 셈이다. 그녀가 원해서 그와 같은 반이 된 것은 아니었어도,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제게는 힘이 되었다.


물론 이 행동도 자주 하면 들킬 것 같아 아주 가끔 그녀를 본다는 핑계로 마츠카와 군을 보러 가곤 하며, 그녀도 이미 제가 자신이 아닌, 그를 보러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보기만 하는 것도 지치겠다. 온 김에 말이라도 해 봐~.”

“어우야 어떻게! 그, 그래…….”


그녀의 당황스러운 권유에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시선이 집중되는 것만 같아 달아오르는 얼굴을 숨기며 목소리를 줄였다. 그는 자신을 기억하지조차 못할 텐데 이제 와서 무슨 이야기를 하라는 걸까.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얼굴도장이라도 확실히 찍어두는 건데! 이미 늦었다는 것은 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는 후회감이다.


말을 걸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마츠카와 군은 보고 싶어서―교실에 있는 그는 배구부에서와는 또 다른 면모를 가졌다―, 언제나 그녀의 책상 옆에 쪼그려 앉아, 그를 지켜보는 건 학기가 시작한 후 제 소소한 일상이 되었다. 그는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는지 친구들과 대화하는 가끔 빼고는 책상에 엎드려 있거나 노래를 듣곤 했다. 오래 지켜본 결과, 주변에 관심을 많이 두지 않는 편이라고 보는 게 옳았다.


아무튼,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노래를 듣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도 좋았다. 별다를 것 없는 모습이지만 그냥 설렜다. 언제나처럼 책상에 붙어만 있는 제 모습을 놀리러 오는 친구들은 질린다는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오이카와 군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여학생들처럼 제게 용기가 있지도, 그렇다고 뜬금없이 건넬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저 멀리서만 지켜보는 것이 최선이었다. 어쩌다 한번 눈이 마주치는 것도 떨려 죽겠는데 이 이상 무얼 하라고.

 

‘졸업 전에 한 번이라도 말은 섞어봐야 하지 않겠어?’


용기를 내어 남자친구를 쟁취한 친구가 한 말이었다. 그녀의 말도 일리는 있었지만, 그에겐 다가가기 힘든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핑계라고 말하면 반박할 말은 없지만, 제게는 그랬다. 그러니까 말을 섞어보라는 친구의 조언은 제겐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복에 겨운 소리라는 뜻이다.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리기 직전쯤 돼서야 마지못해 자리서 일어났다. 그렇게 쪼그려 앉아있는 거, 안 힘들어? 당연한 소릴 왜 물어보나 싶지만 걱정하는 마음으로 물어보는 걸 잘 알기에 친구의 질문에는 머쓱하게 웃어 보이기만 했다. 마츠카와 군만 볼 수 있다면 견딜 수 있다고 하기엔 바보 같다고 한소리 들을 것이 뻔했고, 힘들지 않다고 하기엔 부들 떨리는 다리를 숨길 수 없었다. 별달리 할 말이 없을 땐 피하는 게 상책이다.

 

종이 치기 전, 반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했음에도 오이카와군 옆을 떠나지 않은 학생들이 아직까지도 있었다. 곧이어 울리는 종소리에 아쉬운 기색을 띠며 빠져나간다. 한두 번도 아니고 매시간 찾아오면 안 힘드나? 찾아오는 그들이야 잠깐이겠지만, 오이카와군은 자리에 없는 시간 빼고는 줄기차게 찾아오는 사람들을 상대한다. 학기 초반이라 더 심할 수는 있으나, 시간이 지나도 올 사람은 오기 마련이다. 오이카와 군은 큰 의미도 없이 달에 한 번씩은 차지하고 있는 기념일마다 항상 붙잡히곤 했다. 시간이 지나도 결국 그가 붙잡히는 건 변함없다는 뜻인데,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담당 과목 선생님이 들어오시면 어수선했던 분위기는 금세 정리된다. 자습하라는 말과 함께 선생님도 가져오신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한다. 입시 시험을 앞둔 3학년에게는 대게 자습 시간이 주어졌다. 특별하게 잘하는 게 없는 자신은 공부라도 집중해야 하는데, 오늘은 자꾸만 오이카와 군 쪽으로 정신이 쏠린다. 그를 좋아하지는 않는 저한테도 그가 신기한 존재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연필을 돌리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오이카와 군을 떠올렸다. 그는 과연 귀찮게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항상 웃고 있기는 했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서는 그가 곤란해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조금만 집중해서 본다면 그 표정을 알 수 있을 텐데도 사람들은 잘 모르는 듯했다.


제가 눈치가 빠르다기보다는 남들보다 그를 좀 더 객관적으로 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시간이 조금 흘러서는 그의 소꿉친구인 이와이즈미 군이 그를 불러내면서 무리 속에서 빼내는 모습을 종종 본 이후론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강호교의 주장이라거나, 고등학교 3학년이라거나 등의 그가 가진 위치에서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을 텐데도 매번 그들에게 할애해야 하니 그 마음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세이죠에서는 몇 없을, 오이카와 군과 그의 팬들을 먼발치서 바라보는 사람으로 말하자면 그 표정은 곤란하다기보다 신경에 거슬린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몰랐다. 오이카와 군을 나쁘게 생각하고 있는 걸 수도 있겠지만, 그가 마냥 착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딱히 그에게 좋지 못한 일을 당한 것은 아니었으나 제가 본 그의 모습은 그랬다. 성격이 나쁘다기보다는 선을 정확히 긋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누구에게나 보여주는 그 미소가 한없이 다정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모두에게 ‘다정한’ 사람이 아니라 ‘공평한’ 사람일 뿐이다.


오이카와 군이 허락하는 선 안에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진정으로 그가 마음 편히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있을까? 물론 학교에서도 유명한 두 사람의 신뢰 관계를 건드리고 싶은 마음은 결코 없으니 이와이즈미군은 제외하도록 하자. (참고로 이 가설은 저 혼자만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남들 앞에서 이야기해 불화를 만들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런 그가 매시간 사람들에게 시달림에도 꾸준히 웃는 얼굴로 대하는 것을 볼 때면, 그의 인내심에 존경하고 있다.


생각이 끊이지 않던 중, 제가 신경 안 쓰는 척해도 그에 관해 꽤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불호(不好)의 감정도 관심의 한 축이라던데, 생각했던 것보다 오이카와 군에게 관심이 많은 듯했다. 오이카와 군을 알고 있는 것만큼 마츠카와 군을 알면 좋으련만. 사실일지도 모르는 사항들을 안다고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틀린 사실이라도 이왕 알 거였다면 마츠카와 군에 관련된 사항을 더 환영했을 거다. 죄 오이카와 군에 대한 것뿐이잖아? 제 쓸모없는 정보력에 한숨만 내쉬었다.


어느새 자습은 끝나고 천국 같은 시간이 찾아왔다. 배구부의 마츠카와 군을 볼 수 있는 시간.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전력으로 뛰었다. 이 시간만큼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마음이 없었다. 언제나 저보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존재했지만, 아래를 볼 수 있기만 하면 충분했다. 빠르게 뛰어온 보람이 있는지 다행히 체육관에 사람은 몇 없었다. 오죽하면 체육관에 붙어사는 주장, 부주장도 없었으니 말 다한 셈이다.


저기…. 숨을 고르기 위하여 멈춰 서있던 게 문 앞이었는지 본의 아니게 길을 막고 서있던 모양이다. 헉, 죄송합니다! 숙이고 있던 고개 그대로 사과를 한 뒤 들어 올리자 마주한 것은 얼굴에 잔뜩 난처한 기색을 띤 오이카와 군이다.

 

“어…, 우리 반 야마다상! 맞지? 괜찮아. 사과 안 해도 돼~. 다만 부원들이 길 다니다 다칠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고. 매번 배구부에 오니까 구경은 위쪽에서 하는 거, 알지?”


제 손보다도 곧아 보이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곤 윙크를 하며 재잘 떠든다. 아무래도 말간 얼굴보다는 쭉 뻗은 손가락에 눈길이 갔다. 운동하는 사람의 손이 저렇게 희고 곧을 수 있구나. 그와 대비되게 손 곳곳에 보이는 굳은살은 배구를 해온 그의 세월과 열정을 보여준다. 간접적으로 보이는 그 열정에, 애인이 없는 만도 하구나 내심 납득하기도 했다.


그나저나 이름은 둘째고 배구부에 오는 것까지 알고 있어? 딱히 숨기고 있던 건 아니지만 괜스레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보고도 놀린다거나, 혹은 아는 체를 하지 않는 것은 오이카와 군이 인기 있는 이유 중 하나일까. 놀리기 바쁠 제 또래의 학생들과는 확실히 다르기는 했다.


“오이카와! 감독님이 빨리 와서 준비하래!”

“앗, 그럼 오이카와 씨는 이만 갈게.”


저를 찾는 부원에게 눈인사하곤 언제나의 해사한 미소로 또 한 번 인사를 건넨 뒤 사라진다. 아 잠깐만, 방금 그 목소리는 마츠카와 군 아니야?! 분명 조금만 일찍 들어갔다면 그와 마주쳤을 텐데. 어쩌면 이야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지 뭐. 좋은 기회를 놓쳐 아깝다는 생각과 함께 저와 비슷한 목적을 가진 무리 사이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 오이카와 군과 눈이 마주쳤다. 


또다. 교실에서 마주했던 서늘한 눈빛. 금세 거둬졌지만 틀림없었다. 고개를 돌려 아무렇지 않게 웃는 그의 모습은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왜?’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비록 제가 그에 대해 무례한 생각을 했다지만 그가 알 리는 없는 데다가, 그와 불화가 있는 것도 아니다. 표정을 숨기는 데에는 누구보다 뒤지지 않을 오이카와 군이 그런 노골적인 시선을 보내다니. 


어째서? 길을 막고 있던 것 때문에? 아니면 손을 바라본 게 기분 나빴나? 그렇다기에는 너무나도 밝은 웃음으로 저를 보내주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역시나 그 본심을 알 수 없었다. 자유롭게 개방했다고는 하나, 연습을 볼 수 있는 날은 정해져 있었기에 오랜만에 보는 것임에도 아까 전 오이카와 군의 시선이 떨치질 않아 마츠카와 군에게 집중하지를 못했다.


끝내 이유를 밝히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가 아닌 이상, 그 시선의 이유를 평생 알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답답했지만 제가 보아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을 누구에게 터놓을 수도 없었다.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물어보는 수밖에 없겠지만 어느 누가 ‘너 어제 왜 그렇게 봤어?’라며 물어볼 수 있을까. 하다못해 좋아하는 사람에게 말 한마디조차 건네지 못하는 자신이 그럴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답은 하나다. 오이카와 군을 주시하자. 뒤를 캐는 기분이라 조금 꺼려지긴 했지만, 그 방법밖에 없었다. 후에 이 결정이 제게 큰 상처로 돌아온다 하더라도 지금은 궁금증을 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는 표정을 숨기는 데에 발군의 실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노골적인 시선을 보냈으니 제게 숨기지 못할 만큼의 감정이 있거나, 혹은 의도적이거나 둘 중 하나라 생각했다. 전자든 후자든 그 이유가 궁금했다. 당사자가 다름 아닌 오이카와 군이라 더 궁금하기도 했다. 마츠카와 군에게 고백하는 거에 대해서 이만큼 진취적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잠시 회의적이었다는 것은 넘어가도록 하자.

 



 



주시하자 마음먹었지만 무얼 해야 좋을지 감이 오질 않았다. 언제나 주위에 사람이 넘치는 그를 졸졸 따라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그 무리 속에 끼어서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애초에 그럴 용기가 있다면 차라리 마츠카와 군에게 번호를 물어보는 쪽을 택하겠다. 그나마 그 뒤로 예의 눈빛을 받은 적이 없어 다행이다. 


잘못 봤다고 생각하는 쪽이 마음은 편하겠지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겪어 떨쳐내기가 힘들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정말 잘못 봤다거나 혹은 제가 무슨 잘못을 했겠다고 생각하며 넘길 수 있겠다마는, 누구에게나 호의적인 오이카와 군인지라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다.

 

“요새는 왜 이렇게 뜸해? 벌써 식은 거야~?”


쓸데없는 곳에 생각이 쏠린 덕분에 마츠카와 군의 반을 가는 횟수도 줄었다. 만일 일련의 눈빛이 이런 결과를 노리고 한 일이라면 오이카와 군의 작전은 성공이라 말하겠다. 물론 그가 그럴 이유도 없고, 말도 안 되는 소리겠지만.


언제까지 바라보고만 있을 거냐고 물어보면서도 내심 걱정이 됐는지 만나는 친구마다 저 소리다. 한동안 찾아가지 않은 것은 사실인지라 설마 자신이 그러겠냐며 대꾸할 수도 없었다. 오이카와 군에게 다가가지는 못해도, 그 눈빛을 또 보일 때가 있을까 싶어 반에만 박혀 있었기에 그들이 그러는 것도 이해는 갔다.

 

“있잖아. 너희는 오이카와 군을 어떻게 생각해?”

“엥 뭐야, 그동안 안 오더니 상대가 바뀐 거였어?!”

“같은 반 되더니 무슨 일 있었어? 어머 웬일이야!”


왜 하필 그런 쪽으로 결론이 나는 건지…. 언제나 입을 열면 마츠카와 군에 관한 이야기였으니 그들이 놀란 것도 당연했고, 오이카와 군의 이야기만 나오면 무반응에 가까운 호응을 가진 자신이 궁금증을 내비쳤으니 그들의 기대하는 반응도 이해는 됐다. 그래도 어이가 없는 건 없는 거다.

 

“그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그런데 그렇게 말해도 어떻게냐니…….”

“솔직히 오이카와 군이 인기가 많은 건 사실이잖아. 나야 그렇다 치고,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


음, 글쎄. 우선 잘생겼지? 맞아! 그리고 착한 것 같아서 놀랐었어. 옛날에 남자애들이 좀 시기해서 귀찮게 굴던 거 같은데 잘 넘긴 것 같더라. 게다가 배구도 잘하잖아. 전에 한번 보러 갔는데 진짜 멋있었다니까? 물론 다른 사람들도 멋있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던 건 언제고, 이제는 저들만의 세상에 빠져있다. 생각만 해도 행복한지 얼굴에는 홍조를 띠며 열심히 설명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를 안 좋게 생각하며 물어보는 이 상황이 미안하기만 했다.

 

“그런데 진짜 무슨 일이야? 네가 오이카와 군에 관해 물어본 건 진짜 처음이잖아.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뭐, 그건 아니고……. 진짜 그냥 물어본 거야. 뭐가 있었겠어~.”

“하긴 그렇게 따라다니던 마츠카와 군하고도 별다른 진전이 없으니 말 다 했나.”


그녀는 말하는 게 거침없어서 친구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은 편이었지만,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저로서는 그녀의 성격이 부럽기만 했는데 오늘은 원망스럽기만 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했어도, 제가 생각했을 때와 남이 말한 걸 들을 때 느끼는 점은 차원이 다른 법이다. 사실이라 부정하지 못하는 게 서럽기만 했다. 다행히 옆에 있던 친구들이 얼른 다른 주제로 말을 돌리기는 했지만 기분이 풀리지는 않았다.

 

학교가 끝나고 오늘도 어김없이 체육관으로 향했다. 1반에 가는 횟수는 줄었어도 체육관에 가는 것을 포기할 순 없었다. 다만 이전부터 걸리는 문제에 마음은 편치 않아서 다른 날처럼 달리지는 않았다. 가지 않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라도 봐야 피곤한 정신이 그나마 진정될 것 같았다. 종종, 힘든데 늦게까지 체육관에 있을 거냐고 물어보는데 제 힘들다는 말은 마츠카와 군을 봐서 기분이라도 좋아지고 싶다는 뜻이다.


뒷정리가 빠른 제 반을 제외한 다른 반들은 이제야 끝이 난 모양인지 한산했던 복도가 금세 활기찬 학생들로 가득 찼다. 체육관의 좋은 자리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도, 뛰고 싶지는 않았다. 잠깐만 봐도 되니까 오늘은 느긋하게 가자.


마츠카와 군의 얼굴을 보고 빠진 것은 맞지만 친구들과 노는 모습이라던가, 배구하는 모습이라던가, 하나둘씩 새롭게 발견한 그의 모습은 더 깊이 빠지기에 충분했다. 그의 얼굴이 잘 안 보여도 배구하는 모습만 보아도 된다는 말이다. 배구할 때만큼 열정적인 모습은 몇 없으니 더 좋기도 했다.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하교하는 학생들 사이에 섞여 천천히 걸어가고 있을 때, 반에서 나오는 마츠카와 군을 발견했다. 하교 시간이라 문 쪽에 사람이 많기는 했지만, 그는 또래들보다 키가 큰 편인지라 눈에 쉽게 띄었다. 


네 눈에만 잘 보이겠지~. 친구들이 놀리는 소리가 귀에서 맴돌았지만 애써 모른 체하며 그를 주시했다. 체육관을 가기 위해서는 1반쪽의 계단을 이용해야 했고 다른 반보다 일찍 끝나는 편이어서 그와 마주칠 기회가 많았지만, 먼저 하교하는 운동부와는 달리 자신은 뒷정리하는 귀가부였기에 마주치기 힘들었다. 잠깐만, 이거 기회 아니야? 말이라도 걸어볼까? 기억하지 못하면 어쩌지.

 

‘졸업 전에 한 번이라도 말은 섞어봐야 하지 않겠어?’

‘마츠카와 군하고도 별다른 진전이 없으니….’


언제나처럼 소심한 생각을 하며 계단 쪽으로 멀어지는 마츠카와 군의 뒷모습을 보다, 이전에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를 무시하는 말을 들어선지 없던 오늘은 용기도 나오는 기분이었다. 평소라면 그런 용기도 나지 않았을 텐데. 그래, 이런 기회는 흔치 않겠지. 또 언제 올지 모르는 기회니까 한 번 말 걸어보자. 친구들과 대화하는 것과는 달리, 간드러진 목소리를 내뱉기 위해 목을 가다듬었다.

 

“어, 야마다상? 왜 아직도 안 가고 여기 있어?”


헉, 켁! 어깨를 살짝 건드리며 제 이름을 부르는 활기찬 목소리에 놀라, 가다듬기 위하여 들이켠 숨이 제 목을 막았다. 앗, 미안해. 많이 놀랐어? 괜찮아? 누군지 확인해볼 것도 없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오이카와 군이었다. 아니, 왜 하필 이럴 때만 나타나는 거야? 등을 토닥이는 오이카와 군의 손길은 상당히 조심스러웠으나 썩 반갑진 않았다. 


끊임없이 두드리기에 이제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으니, 오이카와 군은 그제야 손을 거둬갔다. 그의 얼굴을 쳐다보던 중에 그제야 마츠카와 군이 생각나 급하게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계단을 내려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하, 안 될 놈은 안 되나 봐. 나름의 큰 결심을 한 데에 비해 결과는 좋지 못해서 한숨이 멈추질 않았다.

 

“많이 안 좋아? 이렇게 놀랄 줄은 몰랐어. 조심할 걸 그랬다. 미안해 진짜.”

“아, 아니야. 잠깐 다른 생각 하다 그런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럼 다행이고! 맞다. 야마다상 배구부 가는 길이지? 같이 가자. 오이카와 씨도 지금 가는 중이거든!”


지각할 것 같지만 야마다상이랑 같이 가볼까? 윙크하며 밝게 말하는 그를 향해, 굳이 그럴 필요 없다는 말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바라던 사람도 아니고, 하물며 여러모로 불편하기만 한 오이카와 군과 함께 라니…. 제 처지를 한탄하며 오이카와 군의 옆에 붙어 걸었다. 


무리 지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의 옆에 여자 혼자 있는 건 드문 일이라, 그 정체가 궁금한지 제게 따라붙은 시선들이 여럿 있었다. 제가 그를 의심하고 있는 지금도 그의 인기는 여전했다. 괜찮다 했음에도 사과를 덧붙이는 모습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했다. 역시 일련의 일들은 제 기우일 뿐일까.


옆에 있기를 꺼렸으면서도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함께 걷고 있자니, 조금은 신기하기도 했다. 종종 오이카와 군의 곁에 있는 사람들이 그에게 휘둘리는 모습을 목격하곤 했는데, 천생 그의 성격인 모양이었다. 어딘가 그의 말에는 거절하기 힘든 묘한 위화감도 있었다.

 

“그나저나 야마다상은 참 대단한 것 같아. 솔직히 그렇게 열심히 찾아오는 것도 힘들잖아? 배구에 관심이 많은 건가?”

“뭐, 그것도 있고…….”

“아니면 누구 보러 오는 거야?”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랑 아무렇지 않게 대화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겠지. 뭐가 그리 기분 좋은지 웃음을 멈추지 않고 이야기하는 통에 무시할 수도 없어서 대충 답하다, 정곡을 찌르는 말에 걸음을 멈췄다. 알고 물어보는 건가? 순수하게 물어봤을 테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질문의 의도가 궁금했다. 마츠카와 군을 좋아하는 걸 알았나? 알아도 문제 될 건 없으나, 왠지 모르게 그는 조심해야 할 것만 같았다.

 

“어라, 맞췄어? 누굴까~. 배구부에서 일부러 찾아올 만한 사람이면…, 음 설마 오이카와 씨?!”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으면 말이 안 나온다는 사실을 이런 식으로 경험할 줄은 몰랐는데. 저도 모르게 혀를 찰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아무리 그래도 웃는 낯에다가 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면 저런 자신감이 나올 수 있을까. 잘생기면 되는 건가. 제 개인적 감정을 배제하고 말하자면, 확실히 그는 잘생겼으며 자신감이 있을 법도 했다. 오히려 인기를 실감하지 못하는 쪽이 말이 안 될 것이다. 체육관의 반 이상은 그를 보러 오니까 말이다. 물론 자신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얼굴로 반박할 수도 없게끔 만드니, 다른 사람이 할 때보다 더 재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농담이야, 농담. 야마다상 그렇게 굳을 정도로 싫었어?!”

“아 미안해……”

“오히려 사과하면 오이카와 씨 더 상처라구! 그보다 자꾸 야마다상을 곤란하게 하는 것 같네. 아, 미안하니까 오이카와 씨의 비밀을 알려줄까? 이걸 아는 사람은 몇 없는데, 오이카와 씨는 욕심이 엄~청 많아서 누가 내 걸 건드는 걸 못 본다? 안 믿기지?!”


믿고 자시고 어쩌라는 걸까. 미안한 말이지만 진심으로 든 생각이었으며, 참고로 비밀이란 것도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저런 걸 왜 비밀이랍시고 말하는 거지?


본인이 한 말 때문에 온갖 생각이 쌓여 멈춰 선 것을 모르는지, 오이카와 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간다. 어라, 거기 서서 뭐 해. 빨리 와~. 그제야 뒤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 모양이다. 오이카와 군의 부름으로 연이은 궁금증에 멈춰버린 사고를 겨우 차려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모르겠다. 그냥 지금은 빨리 마츠카와 군이 보고 싶었다.

 

이후에는 다행히 별다른 문제 없이, 오이카와 군과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체육관에 도착했다. 연습이 시작하기 바로 직전에 도착한 바람에, 오늘도 마츠카와 군과 마주치지는 못했다. 느긋하게 걸어가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아까 전 좋은 기회를 놓친 후라 더 아쉬운 기분이었다.


그럼 오이카와 씨는 가볼게. 구경 잘 해~. 마지막까지 철저한 에스코트 후 오이카와 군은 코트 위로 달려간다. 만일, 제 개인적인 감정만 없었다면 그에게 빠졌을 수도 있겠다고 저도 모르게 인정했다.


난간 쪽 좋은 자리는 벌써 사람들이 다 차 있었기에, 뒤에서나마 배구하는 모습이라도 지켜보자 싶어 벽에 몸을 기댔다. 본격적인 연습 전에 하는 스트레칭 시간이었다. 앞에는 언제나 주장인 오이카와 군과 부주장인 이와이즈미 군이 서 있었고 뒤로는 학년순으로 정렬되어 있기에, 이제 마츠카와 군이 있는 곳쯤은 눈 감고도 찾을 수 있었다. 오늘도 변함없는 시간이다.


벽에 기대어 가만히 감상하고 있을 때 오이카와 군의 시선이 잠시 제게로 왔다가 앞으로 향했다. 제가 오이카와 군을 싫어하는, 정확히 말한다면 그를 경계했던 이유에 그 시선의 끝이 있었다는 사실이 그 순간 떠올랐다. 오이카와 군의 성격이 어떻다던가, 그가 제게 무슨 행동을 했던 간에, 자신은 이미 전부터 오이카와 군을 거북해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아무리 정신없다지만 그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주장인 오이카와 군이 모든 부원을 살펴보는 행동이야 당연한 거지만 가끔 정도가 지나치다 느낄 때가 있었다. 다름 아닌 마츠카와 군을 향할 때였다. 처음에는 기분 탓이라 생각했으나 오랜 관찰 결과, 기분 탓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유독 그를 볼 때면 오이카와 군의 시선은 진득해졌고, 머물러 있는 시간은 남들의 배는 되는 듯했다. 그리고 아마 이 사실은 오이카와 군이 아닌 마츠카와 군을 보는 저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이 본인에게가 아니라면 어디로 향하든 중요하지 않을 테니까.


훈련이 부족한 후배도 아니고, 당당히 주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마츠카와 군에게 보통 이상의 신경을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에는, 그의 시선에 담긴 감정이 저와 비슷하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무슨 감정인지 섣불리 이름 붙일 수는 없었지만, 우정의 이름보다는 조금 무거운 감정을 가진 게 분명했다.

 

‘오이카와 씨는 욕심이 엄~청 많아서 누가 내 걸 건드는 걸 못 본다?’


설마 아까 전 이야기한‘내 거’라는 게 마츠카와 군을 의미하는 건가? 제가 마츠카와 군에게 다가갈 것을 눈치채고 불러 세웠던 걸까. 그렇다면 맥락 없이 뱉었던 비밀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왜 이제야 이야기한 걸까. 또,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을까? 어차피 자신은 다가가지도 못하는데. 제가 그를 경계하고 있던 것처럼, 그도 자신을 보고 있었다면 저를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 텐데 말이다.


오늘도 결국, 쏟아지는 생각에 어느 것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이럴 거면 체육관에 왜 왔나 싶었다. 피곤한 정신이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오이카와 군과 같은 반이 되면서 조용한 한 해는 물 건너갔다고 생각했는데, 조용한 것을 넘어서 복잡한 일들만 가득한 기분이다.


학기 초만 해도 오이카와 군과 척을 지게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겉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겠지만, 그가 대놓고 눈치 줬다는 것은 저를 눈여겨본다는 사실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마츠카와 군에게 고백할 생각도 없었고 그저 그를 지켜보기만 했을 뿐인데, 아무것도 없는 자신을 경계하는 데다가 그것을 드러낸 이유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3. 端 (끝,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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