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 선택에 도움을 주신 구름양님, 채서님, 장아연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A는 늘 B를 싫어했다, 창자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혐오감에 몸서리쳤고 늘 복수하고 싶어 안달난 듯한 얼굴로 주위를 배회했다. B는 타고난 여유로움-아마도 그의 집안 부에서 올-으로 응대했다. A가 배알이 꼴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 

 

 그러던 종강 전의 시험 기간, A는 자존심 상한다는 표정으로-약간 눈물이 글썽였다- B에게 족보를 요구했다. A는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리고는 휴대전화에서 저장을 수없이 해 화질이 깨진 사진 파일을 B에게 전송했다. B는 체념한 표정으로 알림을 확인하더니 입에서 고맙다는 말을 씹어내듯 뱉고는 가방을 들쳐메고 뒤로 뛰어갔다.


 이후에도 B의 뻔뻔하지만 창피한 게 눈에 보이는 요구는 계속되었고 A는 자신이 우위에 서 있다는 것을 즐기면서 그의 요구를 다 받아주었다. 새장 안의 고슴도치를 이리저리 굴리는 듯. 그 높다란 막대에서 몸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간신히 균형을 잡는 그 고슴도치에게 이 쪽에서 굳이 나쁜 감정을 품을 이유가 없었다.


 A는 B를 동정했고 그 얄팍한 감정은 관심이 되었다가 이내 그 착각하기 좋은 사랑으로 번져갔다. 이제 그는 먼저 핑계를 만들어 그가 자신에게 의존하게끔 했고 B 역시 전의 혐오감 가득한 표정이 사라진 듯 굴었다.


 종강이 찾아왔다, 대학생들의 눈물이자 꽃. 본가에 내려가야한다는 A의 이야기에 B는 그를 다급히 붙잡으면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A는 자신의 '길들이기'가 성공했다는 자부심에 기차 시간을 늦추고 그의 자취방에서 B의 고민을 마지못해 들어주는 척 했다.


 B는 그 다급함은 어디갔는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A는 저번에 빌려간 학비를 또 빌려달라는 구차한 요청이라 그가 입을 떼지 못한다 생각했다.


 B는 너를 믿을 수 없으니 구닥다리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A의 의아한 표정에 B는 중세 시대에나 쓰던 의 맹세를 하자고 했고, A는 비웃듯이 침대에 엎드려 한참을 웃다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이번에도 그의 요구에 응했다. 비밀을 약속한다고, 그 어이없는 소꿉장난에 순순히.


 옷장을 뒤져 찾아낸 바늘을 물에 대충 적신 뒤 B가 비장한 표정으로 자신의 검지 손가락을 찔렀다. A가 오른손을 내밀자 거들떠보지도 않고 왼손을 낚아챈 B가 A의 검지를 찔렀다.


 핏방울이 톡, 토독, 소리와 함께 방바닥으로 떨어졌고 B는 그 피를 아깝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왼손 검지를 서로 맞댔다. 둘의 피가 섞여 소매를 걷은 팔을 타고 흘렀다.


 한 이 삼분 지났을까. B가 손을 떼고 지혈하기 시작했다. A가 이제 말하라며 독촉을 했고, B는 조커의 웃음소리처럼 기괴하게 성대를 긁었다.


 A의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그의 웃음소리가 아니라, 뒤에 온 말 때문에.


"나, 에이즈야."


  

단어와 문장과 어쩌면 그 사이 틈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 글을 쓰고 올리는 곳입니다! 사담 및 문의는 트위터 @dearest_sp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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