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끝에 눈이 내려앉았다. 스나는 멀거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이 가득 낀 하늘이 유독 낮아 보였다. 첫눈이 코끝에 앉으믄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드라.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스나는 손등으로 코를 문질렀다. 그런 일 따위 일어날 리 없고, 일어날 수 없으며, 일어나서는 안 됐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에 자리 잡은 지 몇 년. 무사히 대학도 졸업하고 취업도 한 그에게 문자가 왔다. 오랜만에 옛 배구부 동창끼리 모이자는 아츠무의 메일이었다. 어느 정도 그 시기를 잊고 있던 스나는 그 내용을 보지 못한 척 휴대폰을 엎었다. 묵혀두었던 옛 감정이 스물스물 올라오려 했다. 그것을 메일 내용과 함께 잘 덮어두며 잠시 멈추었던 타자를 이어나갔다. 그는 바빴다. 동창회를 갈 시간도 없었고, 술을 마실만 한 여유도 없었다. 더구나 오늘은 수요일. 당장 다음날도 출근을 해야 했다. 홀로 단칸방에 살며 일상을 하루하루 이어가는 그에게 숙취로 인한 연차는 사치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생각을 의도적으로 멈추며 스나는 눈앞의 모니터에 집중했다. 새하얀 화면을 가득 채운 표가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그래, 이런 일을 하면 돼. 아른거리는 세 사람의 얼굴을 지우며 스나는 마우스를 움직였다.



계속 배구를 이어서 한 세 사람과 달리 스나는 대학에 들어간 뒤로 배구를 그만두었다. 니 배구 안 하나? 아츠무의 놀란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내가 재능 있는 것도 아니고, 같은 말로 얼버무렸던 기억이 있었다. 힐긋 시계를 본 스나가 기지개를 쭉 폈다. 지금까지 배구에 관한 생각을 하는 걸 보면 결국 하루종일 아츠무가 보낸 메일에 대한 생각을 한 셈이었다.

“아직 미련을 못 버렸구만.”

“뭐가요?”

가까이 다가온 향수 냄새가 코끝을 은은하게 맴돌았다. 달달한 솜사탕과도 같은 향기였다. 무심코 고개를 든 스나는 짧은 갈색머리를 눈에 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생긋 눈웃음을 지었다. 마주 웃음을 지어준 스나가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딱히 궁금하지 않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퇴근하시는 거죠. 같이 식사라도 하실래요?”

“아….”

무심코 힐긋 휴대폰으로 시선을 던진 스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지 않을 거라고 다짐에 다짐을 했는데도 동창회가 문득 생각난 탓이었다. 글렀네, 스나 린타로. 자신을 욕하며 잠깐 망설이던 스나는 모니터를 가리켰다. 죄송하지만 아직 할 일이 끝나지 않아서요. 선뜻 도움을 주겠다고 나서는 그녀에게 거절의 뜻을 밝히며 스나는 의미 없이 마우스를 딸깍였다. 거절의 뜻을 확실하게 읽은 여성이 다음을 기약하며 문 밖으로 나서고 나서야 스나는 긴장을 풀고 의자에 늘어졌다. 그 순간 나온 말이 동창회도, 선약도 아닌 야근이라는 것에 헛웃음이 나왔다. 숨겨서 뭐 어쩌려는 건지 그 스스로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책상에 엎드리듯 팔을 괴며 느리게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해서 무음으로 돌려둔 휴대폰을 뒤집어 볼 자신이 없었다. 분명 아츠무 그 놈에게서 전화나 메일이 엄청 와 있겠지. 5분 정도를 머리를 감싸고 고민하던 스나는 큰 마음을 먹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예상했던 숫자는 아니었지만 역시나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아츠무도 철이 들었나보다, 정도로 가볍게 생각한 스나는 방심한 채로 메일을 확인했다.

“…어.”

바보 같은 소리가 입 밖으로 새었다. 아츠무가 아니었다. 온나. 단 한마디만이 적혀있는 메일을 보낸 사람은 철이 든 아츠무가 아닌 오사무였다.




“여, 스나 린. 왔나?”

“너 유명인인데 이런 곳에서 막 마셔도 되냐?”

“개안타. 룸으로 잡았다이가. 아무도 모른다. 아나, 앉아라.”

태평한 아츠무의 말에 스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안으로 들어서 문을 닫고 목도리를 풀었다. 문 옆의 옷걸이에 목도리를 걸고 그대로 외투를 벗어 위에 덮듯이 걸어두며 아츠무의 곁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모르기는. 가게 문 밖까지 목소리 들리던데.”

“맞나?”

옆자리에 털썩 앉으며 한마디 내뱉자 그저 웃기만 하며 대수롭지도 않게 넘기는 그를 보고 스나는 한숨을 뱉었다. 잘생기고 인기도 많은 국가대표에게 경계심이라곤 쥐뿔도 없었다. 매니저로 그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긴지마의 괴로움이 느껴져 스나는 짧게 애도를 표했다. 아츠무가 미리 주문시켜둔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그는 들어올 적부터 끊임없이 닿는 시선을 마주했다.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보다 다소 근육이 붙은 모습의 미야 오사무였다. 오사무는 시선이 닿지 느리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오랜마이네.”

“응. 잘 지냈냐. 시합 봤어.”

“그랬나.”

“여전히 잘하더라.”

더는 배구를 하지 않는 그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것이 다였다. 마찬가지로, 오사무가 해줄 수 있는 대답도 고맙다. 그 한 마디뿐이었다. 미묘하게 가라앉은 둘 사이의 어색함을 풀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츠무는 이미 한바탕 거하게 마신 뒤였고, 그런 그의 페이스에 맞추느라 긴지마도 마찬가지의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쪽의 눈치는 영 꽝인 긴지마와 술에 절은 아츠무가 도움이 될 리 없었다. 그저 맥주만 몇 번 홀짝이고 안주를 집어먹으며 스나는 기묘한 감정이 일어나지 않게 무던히도 노력했다. 정작 오사무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여 괜히 신경이 쓰였다.

“니는.”

“어?”

“요즘 뭐하고 지내노?”

끝날 때 까지 말 한마디 안 섞을 줄 알았는데 먼저 운을 뗀 것은 오사무 쪽이었다. 의외여서 잠깐 눈을 끔뻑이던 스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회사원이지 뭐. 그렇게 내뱉고서야 스나는 배구를 이어하지 않는 것은 이 자리에서 저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츠무는 국가대표였고, 오사무는 그가 자주 쓰는 스파이커였으며, 긴지마는 직접적으로 배구를 하지는 않지만 간접적으로나마 그 모습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는 매니저였다. 저 혼자만 그 시절에서 동떨어져 있는 것 같아 마음이 가라앉았다. 배구는 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오사무는 그것을 묻지 않고 그저 힘들지 않느냐고만 덧붙였다. 그 말에 대답하며 스나는 웃었다. 이 상황이 그저 우스웠다.

“뭐고, 니. 취했나.”

“맥주 몇 모금으로 취할 사람 아니거든, 나.”

“콜라나 마셔라.”

음료를 앞으로 끌어다주는 오사무를 보고 웃으며 스나는 턱을 괴었다. 넷이 함께 있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가, 자꾸만 배구를 했던 그 시절로 돌아갈 것만 같아 스나는 주먹을 꼭 말아쥐었다. 안 될 말이지. 내가 어떻게 멀어졌는데.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맥주를 입 안으로 밀어넣었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오사무의 목소리가 들렸다.


스나 린타로의 첫사랑은 고등학교 시절, 같은 배구부에 속해있던 미야 오사무였다. 물론 첫눈에 반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취향도 아니었거니와, 그의 쌍둥이와의 트러블에 얽히고 싶지도 않았으므로 처음엔 오히려 달갑지 않은 상대였다. 어쩌다 반하게 됐더라. 생각해보면 반할만한 구석도 없었다. 귀여운 외모도 아니고, 몸 선이 얇지도 않았고, 키가 작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재밌는 동급생. 재밌는 부원. 그 정도의 이미지였을 뿐이다. 어쩌다보니 같은 반이 되고, 같이 있는 것이 즐거워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그리고. 어떻게 됐지? 멍하게 술을 홀짝이는 스나의 귀에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시끄러운 와중에도 이렇게나 잘 들리는 것을 보면 나도 참 여전한가보지. 생각하며 오사무를 본 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니 지금 표정 억수 웃긴 거 아나.”

맹해가지고. 하고 미소를 머금은 것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제서야 스나는 기억해냈다. 그는 이 얼굴에 반한 것이다. 답지 않게 어린아이처럼 웃는 얼굴. 그 미소에 반해 덜컥 발을 들여놓고 만 것이었다. 그러고서 차근차근 빠져서…. 하하, 마른 웃음을 흘리며 스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역시 오는 게 아니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자신의 생각은 서로에게 독이었다. 아츠무의 메일을 모르는 척 하거나, 사정이 생겨 가지 못한다고 전달을 했어야만 했다. 스나는 눈을 느리게 내려감았다. 분위기를 읽지 못한 심장이 자신의 존재를 강하게 주장했다. 전부 술 때문이야. 술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그는 느리게 한숨을 내쉬었다.



“쫌, 제대로 걸어라, 아츠무!”

휘청거리는 아츠무를 부축한 긴지마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늘어지는 그의 허리를 바투 잡고 먼저 가겠노라고 사과한 긴지마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스나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넣었다. 나직히 아츠무의 욕을 하던 오사무도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술집 특유의 왁자지껄함 속으로 오사무가 파고 들어갔다. 그 모습을 눈여겨보던 스나는 느리게, 하지만 확실히 입술을 열었다.

“오사무.”

코끝을 발갛게 물들인 그가 그의 부름에 뒤를 돌아보았다. 고등학생 시절의 잿빛은 이제 끄트머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새까만 머리카락이 밤하늘과 어우러져 푸르게만 보였다. 겨울 하늘이 이렇게나 맑았던가. 푸르름이 마치 그를 집어삼키는 것만 같았다. 술기울이 찬 바람에 천천히 가라앉았다. 오사무는 뒷말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스나는 오사무의 그런 부분을 참 사랑했다. 스나는 비교적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옛날 옛적의 그 시절과 비교되어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나는 단 한 순간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

문장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케케묵었던 감정에서부터 우러나온 진심이었다. 덮어둔 것을 몇 년 만에 들춰내며 스나는 미소를 지었다. 썩어서 악취가 날 것만 같은 감정은 어여쁜 색으로 빛나며 그리운 냄새를 품고 있었다. 그것은 스프레이형 파스와도 같은 냄새였고, 체육관의 왁스와도 같은 냄새였으며, 새 배구공과도 같은 냄새였다. 추억이 한가득 담긴 결정은 그 감정마저도 추억의 빛으로 물들였다. 일렁이던 감정이 빛을 받고 천천히 사그라들고 있었다.

“오사무. 나는.”

“응.”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너를 좋아할 거야. 그렇지만….”

이제 사랑은 하지 않을래. 맑은 웃음을 지으며 그가 감정에 끝을 고했다. 사랑을 하기에는 그가 그에게 너무나도 먼 사람이었다. 감히 제가 감정을 가질 수 없을 정도로 멀고,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 오사무였다. 그는 그 연심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처참히 짓밟고 형태조차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짓이겨 추억이라는 짐승의 먹이로 줄 생각이었다. 추억의 일부가 되는 과정이 그러했다. 짐승에게서부터 지키려 오랫동안 덮어두었던 감정은 결국 먹이로 던져졌다. 안녕, 내 첫사랑. 홀가분한 것처럼 지어낸 웃음을 보이며 스나는 그 이상의 말이 나오기 전에 자리를 떴다. 먹이가 살려달라고 울부짖고 있었다.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고, 사실은 아직 더 곁에 있고 싶었노라고 외치고 있었다. 울컥 차오르는 비명을 씹어삼키며 스나는 눈을 감았다. 이제 그는 단순한 동창으로 돌아갔다. 한때 배구를 같이 했던, 특이한 스파이크를 남기던 동창으로. 서글프구나. 뱃속 깊이 차오른 공기가 차가워서 눈물이 났다. 먹이의 마지막 울부짖음이 잦아들었다.



오사무는 스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와 같은. 어쩌면 자신보다도 짙은 흑발이 눈앞에서 하늘하늘 멀어져갔다. 밤하늘의 일부로 돌아가려는 것 같았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고, 목소리를 내어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가 벌어지고 나서야 오사무는 입을 열 수 있었다.

“…내도.”

나도. 단 한 순간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 목구멍까지 차오른 목소리를 억누르며 오사무는 그저 눈을 감았다. 스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던 그에게 눈물이란 허용되지 않는 것이었다. 감정을 죽이고, 죽이고, 또다시 죽이며 오사무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입 밖으로 나온 새하얀 길은 자신이 수도 없이 죽인 감정의 흔적이었다.

작가지망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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