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진격(進擊)

 

66.

 

대비가 직접 사혁을 기취하도록 명하였기에 관아 중에서도 포청(捕廳:포도청)이 아닌 관부(官府:나랏일을 돌보는 곳)로 데려간 것은, 주한에게 있어서 그나마 불행 중에서도 한 가닥 다행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마저도 다 대비가 세운 계산일지도 모를 일이다.

 

궁에서 관아까지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다. 그러나 마음이 급한 주한은 대령해둔 봉가에 오르기 전 말을 내어오라 다시 명했다. 아무래도 사람의 발보다는 짐승의 발이 빠를 터이니.

 

주한은 한쪽만 걸려있는 각대를 거칠게 떼어 바닥에 던졌다. 거추장스러운 곤룡포 역시 벗어서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져버렸다.

 

곤룡포는 전날 내린 비로 인해 바닥에 고여 있던 이수에 그대로 처박혔다. 그저 의복일 뿐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 의복이 곤룡포라면 그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옆에 서 있던 장 내관이 화들짝 놀라 빠르게 허리를 숙이더니 곤룡포를 집어 들려 하고 있었다. 주한은 곤룡포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대로 두어라.”

 

 

주한의 하명에 장 내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곤룡포를 그대로 더러운 이수에 젖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그렇다고 주한의 명을 받들지 않는 것도, 모두 다 반역죄를 물을 수 있을 만한 일이었으니까.

 

장 내관이 그러한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주한의 호위무사 중 부장(部將:무관 벼슬)인 추부장이 말을 데려왔다.

 

주한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곤룡포 안에 갖춰 입고 있던 물빛 쾌자(快子:두루마기 위 겹쳐 입는 소매가 없는 긴 조끼 식 겉옷)를 펄럭이며 말 위 안장으로 올라앉았다.

 

곧이어 주한은 익선관(翼善冠:왕의 머리에 쓰는 관)을 벗어 아직 이수에 처박힌 채 젖어 들고 있는 곤룡포의 옆으로 던져버린 뒤 말의 옆구리를 차며 말머리를 돌려 빠르게 출발시켰다.

 

이른 아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기는 무겁고 잔득거렸다. 그 공기를 가르며 달려가는 주한의 머릿속은 복잡했고 마음은 심란했다.

 

감당하기 버거워 회피하고 싶었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있었다. 고작 한다는 반항은 술과 향락에 빠진 한심한 왕 노릇이었다.

 

주한의 여린 천성을 탐탁지 않아 했던 대비에 대한 항거(抗拒:순종하지 않고 맞섬)는 거기까지가 다였다.

 

눈만 마주치면 숨통을 죄어오듯 후사를 부르짖는 대비에 질려 여인들을 품어왔으나 주한은 대비의 바람을 이루어 줄 수 없는 몸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용포의 무게가 더욱 버거웠을지도 모르겠다.

 

마치 제 것이 아닌 것을 취한 것만 같은 삶이었다.

 

대비의 뜻대로 움직이는 숨만 붙어있는 괴뢰(傀儡:꼭두각시)였다. 아마 대비에게 차자(次子:둘째 아들)가 있었다면, 대비는 두고 볼 것도 없이 선왕이 승하한 뒤 주한을 세자 자리에서 물렸을 것이다.

 

강단이 없어 보이는 주한은 왕이 아닌 서생의 팔자를 타고났을 것이라 생각했을 터이니까.

 

주한이 한심한 왕처럼 항거하는 시기에는 어쩐 일인지 대비가 조용했다. 물론 그때도 후사에 관해서만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선대들에 비해 선왕은 대가 약한 편이었다. 당시 중전이었던 대비에게서 본 후사는 주한 외에 없었다. 공주조차도 없는 독자였다. 후궁에게서 본 후사는 옹주인 원영, 지산군인 원흠, 이렇게 둘이다.

 

주한은 제 아우들과 말 몇 마디 섞어본 적이 없었다. 피를 나눈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날 때부터 적으로 인식하게끔 세뇌된 것이다.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대비의 바람이었고 주한은 정을 줄 수 없었던 제 아우들을 적이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그들의 생각까지는 알 수 없지만.

 

사혁을 만나고 난 뒤 주한은 비로소 ‘왕’이 되고 싶었다. 천하를 손아귀에 쥐고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었던 욕심에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진정으로 나라를 지키고 싶어졌다.

 

나를 위한 나라가 아닌, 대비의 잇속을 채워줄 나라가 아닌 오직 백성들을 위한 나라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대비에게 대항하기 위해 우매하게 흘려보낸 시간이, 의욕이 없어 나른하게 허비한 시간이 후회스러웠다.

 

사실 아직도 왕좌를 지키고 싶으냐, 누군가 묻는다면 그에 대한 대답은 부정에 가깝다. 허나 지키고 싶은 게 무엇인지만큼은 분명해졌다.

 

이윽고 주한의 말이 멈추었다. 주한은 빠르게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주한의 뒤를 따르던 말도 멈춰 서더니 곧 그 위에서 추부장 역시 바닥으로 뛰어 내려왔다.

 

주한은 타고 왔던 말을 그대로 방치하고 관아의 열린 문호 너머로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문호를 지키고 있던 말단 군졸들이 엎드려 예를 갖추었을 때 주한은 이미 관부 안으로 모습을 감춘 뒤였다.

 

이른 시각부터 대비가 제 호위무사를 통해 웬 사내 하나를 기취해 오더니, 이제 왕까지 들었으니 분명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은 천치가 아니고서야 눈치를 챌 수 있었다.

 

주한은 곧장 관부의 뒤쪽에 위치한 너른 호정(戶庭:마당)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육인(戮人:죄인)들의 문책이 이루어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하늘은 어제 비를 뿌려댔다는 사실을 모조리 지워버린 듯 푸르고 맑았으며 볕은 뜨거웠다. 그러나 바닥에는 여전히 어제의 잔재를 남기고 있었다. 얕게 파인 흙 웅덩이들에 마르지 않은 빗물이 채워져 있었기에 땅은 대체로 질펀하고 척척했다.

 

그런 척척한 땅 위에 양손을 허리 뒤로 한 채로 몸에 오라를 감고 있는 사혁이 무릎을 꿇은 채 앉아있었다.

 

그 모습을 본 주한의 걸음이 느려졌고 인상은 일그러져가고 있었다. 많은 감정이 한꺼번에 와동 쳤다. 그 감정들은 고스란히 주한의 만면에 드러났다.

 

분노와 회한, 경멸과 비창.

 

지은 죄라고는 아둔한 왕의 응석을 들어주고 그런 왕을 진심을 다해 위로해준 것밖에 없는데. 사혁은 대역이라도 지은 육인이라도 된 듯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주한은 양손을 세게 말아 쥐었다. 용포를 몸에 두르고 익선관을 머리 위로 덮어썼다고 해서 그것이 왕이던가.

 

대비가 조종하는 대로 빚어지는 정권들을 대신들이 주한에게 안건을 올리면 주한은 마치 정해진 수순을 밟듯 윤허하겠다는 말을 되풀이 해 왔다.

 

그렇게 눈 벌리고 어비야한다(눈 가리고 아웅)는 식의 한심한 정책을 하고 있는데 과연 그것을 왕이라 칭할 수 있는 것인가.

 

주한은 그저 대비의 대리인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대비는 주한이 언제까지고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주는 대리인이길 원했다.

 

모든 것에 염증을 느껴버린 주한 역시 될 대로 흘러가란 마음으로 자신을 놔버린 채 그렇게 살아가리라 생각했다. 아니 주한이 어떻게 마음을 먹든 그것은 이미 대비에게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이제 더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대비가 그러도록 두고만 보지 않을 것이다.

 

제 삶은 여태 그러했듯 대비의 손에 아무렇게나 주물러져도 상관없었지만, 그것이 다른 이의 삶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면 말은 달라진다. 게다가 그 다른 이가 다름 아닌 사혁이라면...

 

어마마마의 바람대로 반드시 왕좌를 지킬 것입니다. 허나 어마마마의 뜻인 왕가 순수혈통의 대를 잇기 위함은 아닙니다. 어마마마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아있기 위함입니다.

 

나라를 위협하는 침략국으로부터 나라를 지킬 것이며, 가빈(家貧:가난)과 기아에 시달리는 백성이 없도록 할 것이며, 오명으로 억울한 이가 없게 할 것이며... 내 사람들을 보호할 것입니다.

 

내 앞에 서 있는 적이 어마마마라고 하여도 말입니다.

 

사혁을 바라보고 있던 주한이 고개를 스윽 돌려 그 앞 층계 위 단상 중앙에 놓인 교의에 앉아있는 대비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주한의 만면을 어지럽혔던 복잡한 감정들은 어느새 가라앉아있었다. 대비를 바라보는 주한의 무거운 눈동자는 차갑게 빛이 꺼졌다.

 

주한은 멈췄던 걸음을 다시금 옮겨 사혁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뻗어 사혁의 팔을 쥐었다. 그러자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있던 사혁이 고개를 들어 올린다. 사혁은 제 팔을 끌어당기고 있는 주한을 보며 눈이 잠시 커다래졌다.

 

 

“전하... 이곳에는 어인 일로...”

 

 

사혁의 마른 입술이 움직였다. 주한이 여기에 올 것이라곤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인간의 존엄이 신분으로 값이 매겨지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게 자행된다는 건 참으로 가슴 아플 일이다. 허나 그것을 바꿀 힘이 주한에게 아직은 없다. 그렇다면 제게 씌워진 높은 신분의 값을 이용하기로 했다.

 

대비가 기를 쓰고 씌워주었던 겉만 번지르르한 이 감투를 이렇게 이용하게 될 줄은 대비도 예상하지 못했을 테지.

 

 

“일어나거라.”

 

 

주한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사혁은 움직이지 않은 채 옅은 미소를 짓는다. 무겁게 가라앉았던 주한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눈썹이 작게 일그러졌다.

 

어찌하여 너는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웃을 수가 있는 것이냐. 네 잘못이 아니라고, 왕명을 거스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모든 탓을 내게 돌리며 나를 원망이라도 해야지... 그런데 너는 왜... 다 괜찮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더냐...

 

 

“당장 이자에게 감겨있는 오라를 풀라!”

 

 

사혁의 옆에 서 있던 군졸을 향해 주한이 소리치자 군졸은 어깨를 움찔하더니 이내 몸을 낮추고는 사혁에게 감겨있는 오라를 풀어내려 했다.

 

그때였다.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대비가 교의에서 일어난다. 천천히 층계를 밟고 내려온 대비는 주한의 가까이 걸음을 옮겨왔다.

 

 

“멈추어라.”

 

 

대비가 군졸에게 하명하자 군졸은 누구의 명을 받들어야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운 듯 보였다.

 

 

“주상, 지금 뭐 하시는 겝니까? 채신없는 복장인 것으로도 모자라 육인의 오라를 풀라, 명하다니. 이 자는 중죄를 저지른 육인입니다. 당장 목을 쳐버려도 마땅한.”

 

 

대비는 주한이 이곳으로 오리라는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야 당연하겠지. 보란 듯 주한의 눈앞에서 사혁을 처형하고 싶었을 테니까.

 

그것이 대비의 방식이었다.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네게 중한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없애버리겠다는, 일종의 경고와도 같았다. 그렇다면 해문과 유담에게도 이미 손을 써놓았을 것이다.

 

 

“이자는 육인이 아닙니다.”

 

 

주한의 말에 대비가 작게 코웃음을 쳤다.

 

 

“궁을 조롱하고 왕을 능멸하였는데도 육인이 아니다? 이자가 어떠한 주작부언으로 주상을 현혹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틀림없이 궁을 조롱하고 왕을 능멸한 대역죄인입니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이자의 모든 죄를 사할 것입니다.”

 

 

주한의 올곧고 차가운 눈동자를 바라보던 대비는 오묘한 미소를 짓는다.

 

 

“지금 주상을 보니 저자의 죄가 더 확연해지고 있습니다.”

 

 

주한은 쥐고 있던 사혁의 팔을 놓으며 걸음을 옮겨 대비에게 한 걸음 다가가 섰다.

 

 

“저자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필시 나로 비롯된 것일지니 내 목부터 치시지요.”

 

 

대비의 한쪽 눈썹이 크게 휘어졌다. 주한이 사혁을 지키려고 할 것이라 예상하긴 했었으나 이리 강경한 태도를 보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금 당황스러웠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제아무리 신분을 무시하고 막역한 친우를 맺은 사이라 해도, 그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으니 그 깊이 또한 얕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주한이 취하는 과잉태도는 그저 일개 백성을 지키고자 하는 왕의 품행이라고 보기에는 괴이할 정도였다. 주한의 이런 모습을 대비는 전에 없이 처음 접해본다.

 

만사에 욕심이 없었던 그였다. 특히 사람에게 집착을 보인 적은 더더욱 없었다. 그 또한 대비의 영향이었다.

 

소중한 이를 만들면 그 사람 또한 대비의 손에 의해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혁은 본능적으로 욕심이 났다.

 

아슬아슬한 선만 넘지 않는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 자신도 했었다. 허나 마음이라는 것은 자신한다고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성과 본능이 같았다면 좋았을 터이지만 그러하지 못했다.

 

이러한 사태를 우려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 시기가 이렇게 이르리라는 것은 예상 밖이었다.

 

중전과의 합방 중 여태 할 수 없었던 사정까지 했었으니 현재 추진하고 있는 일들이 끝날 때까지는 적어도 시간을 벌어두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모든 일이 원만한 결과를 이루어낸 뒤 끝나면 사혁을 잡고 있던 손을 놓으려 했었다. 그러니 그때까지 잠깐씩이라도 만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욕심을 내었던 것이 결국 이리 화근이 되어버렸다. 안일하게도 대비를 너무 얕본 것이다.




몽상가 夢想家 꿈을 꾸는 낭만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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