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쿠니프의 이야기


"쿠니프! 큰일이야!"

고함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토피온이 헐레벌떡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평소와 달리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파랗게 질린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야, 토피온?"

"로디아가...! 로디아가 죽었어!"

"뭐?!"


나는 쟁기를 냅다 집어 던지고 집을 향해 달려갔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 로디아. 그녀는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었다. 장밋빛 볼은 창백했고 가련한 심장은 더 이상 뛰지 않았다.


"로디아!"


내가 소리를 지르며 로디아의 차갑게 식은 몸을 부둥켜안자, 그녀의 유모인 세르피나가 나를 위로했다.


매일 아침 로디아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맞춰 검은 비단 같은 머리카락을 붉은 빗으로 빗어 내렸다. 아침 인사를 건넬 때면 그녀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어주었다. 그리고 세르피나가 구워준 옥수수 빵을 챙겨 밭일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선다. 그것이 내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미소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 나의 천사는 지금 눈앞에서 싸늘하게 식은 모습으로 누워있을 따름이다. 나에겐 그녀를 다시 살려낼 재주가 없었다. 무기력해진 나는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로디아를 죽게 만든 자를 그냥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반드시 내 손으로 놈의 목숨을 끊어 죗값을 치르게 하리라.


선반 위에 올려놓은 항아리가 로디아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고, 세르피나는 말했다. 

웃기는 소리. 새빨간 거짓말인 걸 내가 모를 줄 알고?


물레의 실패에 피가 묻어있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건 세르피나의 물건이다. 로디아는 물레질을 할 줄 모른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 집에는 로디아와 세르피나 두 사람밖에 없었으니 죽은 자를 제외한 나머지 하나는 죽인 자일 것이다. 이유는 알고 싶지도, 알 필요도 없었다. 중요한 건 세르피나가 나의 아내를 죽였다는 사실뿐.


그날 밤 나는 세르피나의 방으로 숨어들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그녀의 얼굴에는 잠잘 때마저 수심이 가득했다. 나는 세르피나의 늙은 목에 양손을 얹고 힘껏 눌렀다. 숨이 막힌 그녀가 눈을 번쩍 뜨고 원망스러운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세르피나, 로디아와 함께 했던 즐거운 시간이 잠깐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지만, 시시한 추억이 나의 복수를 막을 수는 없었다.


얼마나 목을 졸랐을까. 세르피나는 깨진 피리처럼 쌕쌕거리며 마지막 숨을 토하고 죽어버렸다. 

드디어 로디아의 원수를 갚았다는 성취감을 즐길 새도 없이 방안으로 매캐한 공기가 밀려들었다. 점점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연기에 질식한 나는 문에 다다르기도 전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둘. 토피온의 이야기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나의 사랑 로디아.


지난 가을 축제에서 쿠니프가 로디아에게 춤을 신청하지만 않았어도. 아니, 쿠니프가 페드로의 하얗고 멋진 수트를 빌려 입지만 않았더라도 로디아가 녀석을 선택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가난한 농부에게 과분한 여자니까.


로디아가 결혼했다 해도 사랑의 열병이 금세 식지는 않았다. 나는 틈만 나면 쿠니프의 집 앞을 어슬렁거리며 로디아의 모습을 훔쳐보곤 했다. 오늘도 평소와 같이 나무 뒤에 숨어 창문 안을 엿보는데,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로디아!”

“안 돼!”


나는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부서질 듯 요란하게 문이 열리고 로디아가 뛰쳐나왔다. 머리에 상처를 입었는지 관자놀이에서 피가 흘렀다. 그렇게 많은 피를 본 것이 처음이었던 나는 겁이 나서 다리를 덜덜 떨었다. 뒤따라 나온 세르피나가 나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토피온! 멍청하게 보고 있지만 말고 쿠니프를 불러와! 로디아가...!"


당황한 나머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무작정 쿠니프에게 달리기 시작했다.


"쿠니프! 큰일이야!"

"무슨 일이야, 토피온?"

"로디아가...! 로디아가 죽었어!"

"뭐?!"


쿠니프와 내가 돌아왔을 때 이미 로디아는 숨을 거둔 상태였다. 쿠니프는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괴로워했다.


나는 나대로 속이 썩어 문드러졌다. 품에 한 번 안아보지도 못한 그녀를 잃고 말았으니. 그녀가 나의 여인이었다면 이토록 허무하게 죽게 내버려 두진 않았을 텐데.


선반 위에 올려놓은 항아리가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진 게 원인이라 했다. 얼핏 보면 불행한 사고 같지만, 사실 이 비극의 책임은 쿠니프에게 있다. 

내가 로디아의 남편이었다면 그녀가 매일 앉는 화장대 위 선반에 항아리 따위를 올려두지 않았을 거다. 그러나 우둔하고 게으른 쿠니프는 그러한 작은 위험 요소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쿠니프가 로디아를 죽인 거나 다름없다. 

살인은 비난받아야 마땅한 죄다. 놈을 향한 분노는 하나의 계시처럼 나를 이끌었다.


그날 밤 나는 쿠니프의 집에 기름을 뿌렸다. 이제 불만 붙이면 쿠니프 녀석은 그대로 사라지는 것이다. 죄 없이 죽을 세르피나가 좀 불쌍하긴 하지만, 악마를 처단하려면 그 정도 희생은 각오해야 하는 것이 아니던가.


거센 불길이 눈 깜짝할 사이에 쿠니프의 집을 집어삼켰다.

악마의 불아. 타올라라. 쿠니프의 죄도 로디아의 아픔도 내 사랑도 삼켜버려라.





셋. 세르피나의 이야기


로디아는 아침마다 화장대에 앉아 칠흑같이 검은 머리를 빗곤 했다. 쿠니프가 아침인사를 하면 그녀도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어주었다. 그러면 그는 바보처럼 헤벌쭉 입을 벌리고 집을 나섰다.


사실 쿠니프는 좀 멍청한 구석이 있다. 뭐든 잘 잃어버리고 전날 있었던 일도 곧잘 까먹는다. 매사에 덤벙대고 사고를 일으키기 일쑤다. 그런 모자란 놈은 로디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그녀는 왜 하필 쿠니프를 선택했을까. 그녀의 미소에 황홀해 마지않을 사내들은 널리고 널렸는데.

가끔 내가 로디아에게 쿠니프와 결혼한 이유를 물으면 그녀는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내가 알기론 - 쿠니프가 잘난 거라곤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것 밖에 없다. 나와 로디아는 글을 모르지만, 요즘엔 글을 아는 사내가 적지 않으니 큰 자랑거리도 못 된다.


그 날도 로디아는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쿠니프가 나가는 길을 배웅했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로디아는 선반 위의 항아리를 꺼냈다. 그 안에는 마을 청년들에게 선물 받은 장신구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쿠니프가 준 건 고작 새끼손가락만한 머리핀 하나였다.

로디아는 항아리 안에 손을 넣고 두어 번 휘저었다.


"세르피나, 마음에 드는 게 없어."

"파란 벨벳 리본은 어떤가요?"

"아냐, 아냐. 그건 너무 촌스러워요."

"그럼 붉은 꽃잎 모양의 귀걸이는 어떤가요?"

"귀걸이는 달고 싶지 않은 걸."


로디아는 따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항아리를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나는 그녀가 가엾어 혼자 중얼거렸다.


“쿠니프 녀석. 예쁜 팔찌라도 좀 사 오지, 늘 꽃만 꺾어온단 말이야.”


그때였다. 로디아가 손을 떼자마자 항아리가 덜컹거리더니 물레 위로 떨어졌다.


“로디아!”


순식간에 물레에서 튕겨 나온 실패가 로디아의 머리에 꽂혔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관자놀이에 박힌 실패를 뽑아냈다. 그녀의 머리에서는 입술보다 더 붉은 피가 흘렀다.


“안 돼!"


피를 보고 놀란 로디아가 비명을 지르며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녀의 뒤를 쫓아갔더니 마침 토피온이 근처를 지나가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토피온! 멍청하게 보고 있지만 말고 쿠니프를 불러와! 로디아가...!"


토피온이 쿠니프를 찾으러 간 후에도 로디아는 계속 괴로워했다. 나는 그녀의 시린 손을 잡고 볼을 어루만지며 죽으면 안 된다고 애원했지만, 차츰 약해지던 호흡은 끝내 멎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피온과 쿠니프가 집으로 돌아왔으나, 두 사람을 기다린 건 잔인한 비보였다. 절망한 우리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쿠니프가 로디아의 시신을 안고 통곡하는 장면을 차마 쳐다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고, 그 울음소리를 듣고 모여든 이들도 로디아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 날 밤 나는 로디아와 다시 만나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그녀는 몹시 슬픈 얼굴을 하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반가움에 손을 내밀면 잡기도 전에 스르르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로디아!”


내가 있는 힘껏 이름을 부르자 로디아가 다가왔다. 나는 양팔을 벌려 그녀를 끌어안으려 했지만, 그녀는 나를 안는 대신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이건 꿈이야!'


눈을 떴을 때 나는 실제로 목이 졸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쿠니프가 지옥 불에 타오르는 눈동자로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만하라고, 누가 좀 도와달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낼 수 있는 건 쇳소리 정도였다. 결국 쿠니프의 비열한 웃음을 마지막으로 나는 정신이 아득히 멀어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넷. 로디아의 이야기


이 마을에서 나에게 눈독들이던 사내는 많았다. 그중에서 하필 쿠니프를 선택한 이유는 오직 하나. 그의 돈 때문이었다. 

지난 가을 축제에서 처음 쿠니프와 춤추던 날 나는 우연히 그의 토지 문서를 보았다. 뭐라고 적혀 있는지 정확히 읽지는 못했지만, 그림만 봐도 소유한 토지가 어마어마하단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쿠니프는 바보 같다. 하지만 부자라면 그런 것쯤 견뎌줄 수 있다. 마을의 다른 남자들처럼 쿠니프도 나를 원했으므로 우리는 오래지 않아 부부가 되었다.


문제는 결혼한 이후에 발생했다. 쿠니프는 생각보다 무척 구두쇠였다. 자기 땅을 구경시켜주기는커녕 작은 금붙이 하나 선물하는 것도 인색하기 짝이 없다. 부자임이 틀림없는데 왜 부자가 아닌 척하는지 모르겠다. 설마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


쿠니프가 나를 더 사랑하도록 만들기 위해 나는 매일 아침 머리를 빗었다. 그는 나의 검은 머릿결에 사족을 못 쓰니까. 그 빗질에 매혹된 그가 드레스를, 장신구를, 보석을 사 오길 바랐다. 

그러나 쿠니프는 눈치가 없는지 들판의 꽃을 몇 송이 꺾어오기나 했다. 멍청한 남자 같으니라고.


그 날도 나는 어김없이 검은 머리를 빗질하며 쿠니프에게 미소를 보냈고, 그는 여전히 바보처럼 헤벌쭉 입을 벌리고 집을 나섰다.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니 내 자신이 참으로 한심하게 느껴졌다. 

도대체 쿠니프는 언제 그 땅을 보여줄까. 언제 보석을 사다 줄까. 하루하루 지날수록 나의 인내심은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괜히 장신구 항아리 안을 손으로 휘젓다가 세르피나에게 말을 걸었다.


"세르피나, 마음에 드는 게 없어."

"파란 벨벳 리본은 어떤가요?"

"아냐, 아냐. 그건 너무 촌스러워요."

"그럼 붉은 꽃잎 모양의 귀걸이는 어떤가요?"

"귀걸이는 달고 싶지 않은 걸."


작게 한숨을 쉬고 장신구 단지를 원래 위치로 돌려놓는 순간 덜컹대는 소리가 났다. 위를 올려다보니 항아리가 기우뚱거리며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로디아!”


세르피나가 소리침과 동시에 머리가 찢어질 듯 아파왔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릴 틈도 없이 문자 그대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끈적끈적한 피가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촉감보다 눈이 멀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안 돼!"


세르피나가 부축하려 해도 내 몸은 바람에 춤추는 민들레 씨앗처럼 나풀거렸다. 옷이 가슴을 죄어와 숨을 쉴 수 없었다. 밝은 곳으로 가면 앞이 보이지 않을까 싶어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세르피나가 뭔가 말했지만 그 소리조차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더는 버티기 힘들었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진 나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다섯. 페드로의 이야기


어느 날 쿠니프가 나에게 찾아와 가을 축제 때 입을 옷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있어 잘 보이고 싶다나. 

이제 곧 쿠니프도 노총각 대열에 끼게 될 테니 그전에 신붓감을 구할 기회는 이번 가을 축제밖에 없을 것이었다. 나는 쿠니프에게 원하는 옷을 골라가라고 말했다. 그는 비교적 최근에 맞춘 하얀 수트를 빌려 가며 고맙다고, 조심해서 입겠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전혀 몰랐다. 

쿠니프가 로디아의 마음을 얻을 줄이야. 마을에서 제일가는 미녀를 마누라로 삼은 그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하얀 수트를 돌려주러 왔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쿠니프가 돌아간 후, 수트를 다시 옷장에 걸어놓으려는데 주머니에서 뭔가 비어져 나온 것을 발견했다.


“이게 뭐지?”


주머니에 들어있던 것은 오래전 사촌의 토지 매매에서 대리인으로 참석했을 때 받은 문서였다. 그마저도 이미 진즉에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린 땅이다. 나는 실소를 흘리며 쓸모없는 토지 문서를 찢어버렸다.


그로부터 약 반년이 지나고 로디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깊은 시름에 잠겨있을 쿠니프를 위로할 요량으로 다음 날 아침 일찍 그의 집을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내가 도착했을 때 그곳에 쿠니프의 집은 남아 있지 않았다. 다 타버린 검은 잿더미들만 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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