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은 충동적으로 에이몬을 죽여버린 이후로 재무실에서 좀처럼 나오지 못했다. 참담한 심정에 펜 조차 쥘 수 없던 상태에서, 조금 나아졌다가 다시금 나락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을 반복했다. 근육조직과 같이, 감정은 팽창했다 이완되었다를 반복하면 주체를 괴롭게 한다. 자라드는 그를 가만히 놔둘 정도로 틈 많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폴은 국왕의 명령으로 잔뜩 쌓인 서류를 하루종일 넘기고 있어야 했다. 

그가 쥔 서류 위로 끈적한 피가 몇방울 떨어졌다.

"아,"

폴은 서둘러 고개를 뒤로 젖혔지만 몇방울이 더 옷깃을 적시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검붉은 코피는 한참이나 더 흐르고서야 멎었다. 그는 제 몸상태를 알고 있었지만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형이 저가 죽지 않은 대가로 받은 고통 이상을 자신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이치에 맞다고, 물론 이정도로 몸를 혹사시키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다 생각하면서 말이다. 마지막 식사가 언제였는지 잠시 생각해 보던 폴이 테이블 위에 떨어진 핏방울을 대강 닦아내던 참이었다.


달칵-


재무실로 자연스레 흘러 들어오는 남색 머리칼을 목격한 폴이 밝게 미소지었다.

"경! 이제 보고싶어서 찾아 올 만큼 제가 좋아졌나봐요. 결혼식 준비할까요?"

짜증을 내려 하던 실버의 눈이 폴의 셔츠와 조끼로 옮겨갔다. 채 마르지 않은 핏자국이 거슬렸다.

그녀가 성큼성큼 폴에게 다가갔다.

"결혼식은 넘겨두고,"

"음, 그러면…"

실버가 폴의 옷깃을 살짝 그러쥐었다.

"…장례식이나 치르게 생겼군 아이작."

폴이 흠칫 놀랐다. 흔적을 지우기에 촉박했던 시간을 원망했다.

"별거 아닙니다."

"이 얼굴로?"

이번에는 실버가 폴의 고개를 잡아당겼다. 그 새벽 무슨 일이 있었는지 평소보다 아주 말라 보였다. 실버는 또 한번 로브 안쪽의 흉터를 떠올렸다. 진녹색 폴 아이작은 생글생글 웃는 얼굴 하나면 다 속일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는지.

"제 얼굴이 상했나요?"

"많이."

"…이상하네요. 다를게 없을텐데."

실버의 미간이 좁혀졌다.

"조력자가 되고 싶으면 몸이나 좀 챙겨."

실버의 말에 초록색 눈이 잘게 울렸다가, 이내 요사스러운 모양새로 휘어졌다.

"절 걱정하는 건가요?"

"그래."

담담한 대답에 폴은 조금 놀랐다. 

그리고,

"기쁘네요."

진심으로 기뻐했다.

"많이 기뻐요."

폴이 다정하게 웃었다. 실버는 왜인지 밉지 않다 여겼다. 그녀가 천천히 폴을 놓아주었다.

"오늘 밤, 전하가 가실 곳이 있다 해. 궁이 빌거야. 물론 아무도 모르겠지만. 일이 생기면 알아서 처리 해줘."

"그러지요."

실버는 몸을 돌려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녀가 잠시 멈추었다.

"무슨 일 있나?"

"아니요."

"무슨 일 있으면 이야기하기로 약속해."

"…"

"대답."

"하하, 알겠습니다."

멀어지려 하는 등을 폴이 급하게 붙잡았다.

"술 한잔 하기로 한거 잊지 말아요. 우리 약속했잖아요."

"했지. 일이 끝나면 마시기로."

그녀가 그와 눈을 맞추었다.

"잊으면 안돼요."

실버가 픽 하고 웃었다.

"안 잊어."

폴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한참이나 그녀가 떠난 자리를 응시했다. 그녀와 대화했던 그 순간에는 그 어떤것도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하!"

'무슨 일 있으면 이야기하기로 약속해'

그는 쓰게 웃었다.


-


그날 밤 자라드와 실버는 후문을 통해 빠져나왔다. 실버가 자라드의 부상을 고려해 마차를 이용하는게 낫지 않겠냐 제안했지만 그는 말에 올라 탔다.

'그대와 나 말고는 이 외출을 아무도 몰랐으면 해. 물론… 그 초록 머리는 빼고. 지네가 믿는다니.'

실버는 검은 로브로 가려진 그의 상처가 신경 쓰였지만 넘어가야 했다.

두 흑마가 빠르게 바람을 갈랐다.

"그 노인을 만나러 가는 겁니까?"

"그래."

귓가를 스치는 드센 바람소리로 서로의 목소리가 또렷하지 않았다.

"왕이 간밤에 여기사와 도망쳤다는 추문은 원하지 않으니 조심해."

"알겠습니다."

"곁눈질도 그만하고."

실버는 흠칫 하다 말에서 굴러 떨어질 뻔 하였다. 저가 자꾸 그의 다친 팔 쪽을 힐끔거리는게 티가 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전력질주하는 말의 등이 조금은 위태롭게 느껴졌던 지라 실버는 줄을 좀 더 꼭 쥐었다. 달이 그들을 따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전하."

"왜?"

"브렉과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휘이-

그때 바람이 격렬하게 휘몰아 쳤다. 두 사람의 로브가 지나치게 펄럭이며 큰 소리를 냈다.





소설 [죽은 장작에게] 연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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