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세건에게.


내가 말 없이 떠나서 당신은 지금쯤 엄청 화를 내고 있겠지. 아니면 울고 있으려나. 

어느쪽이든 오래 화내거나 울진 말았으면 해. 

 이런식으로 작별 인사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당신이 기억하는 내 마지막 모습이 너무 초라하지 않기를 바랐거든. 


(중략)


더 오래 당신 옆에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 이럴줄 알았으면 진작 당신이 좋다고 할걸. 

난 신을 믿진 않지만 네가 나와 함께 한 5년이 상처보단 추억이 되길 매일 진심으로 기도하고 있어.

한세건, 당신을 정말 사랑했어. 


p.s. 지하실로 가 봐. 



"…그 녀석을 깨우는 방법은…"


세건은 편지의 내용을 읊조렸다.


서현이 떠난지 반년, 그가 남긴 유품을 세건은 이제야 지하실에서 꺼냈다.


눈만 마주치면 싸우던 녀석과 서로 좋아한다는 것을 겨우 인정하고 연인이 된지 5년째, 서현은 불치병에 걸렸다. 나이가 젊은 만큼 진행속도가 빨라서, 병원에서는 더 손쓸 도리가 없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늘 그렇듯 이번에도 세건을 달래는 것은 서현이었다. 왜 네가 아픈거냐고, 이렇게 멀쩡한 자식이 길어봤자 1년 더 산다니 말이 되냐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며 소리지르는 자신을 서현이 말 없이 꽉 끌어안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부터 서현은 마지막 순간을 보여주지 않기로 결심했는지도 모르겠다.


사라지기 전날 서현은 흰 수건에 검붉은 피를 왈칵 토해냈다. 그러고도 한동안 기침이 그치지 않아 괴로워하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괜찮아. 라고 말했다. 전혀 괜찮지 않았던 주제에.


서현의 장례식날, 세건은 일부러 관에 누워있는 서현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서현이 보여주고 싶지 않아했으니까. 서린은 말 없이 형이 남긴 편지라며 세건에게 이 종이를 건네주었더랬다.


그리고 반년간 세건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게 살았다. 모든 일들이 현실같지 않았다. 아무도 누워있지 않은 침대가 허전해 잠을 잘 수 없었고 두 사람분의 식기를 보기 괴로워 밥을 먹지 않았다. 가끔 서린이와서 식사를 차려주고 집을 청소 해 주었다. 재미있는 영화가 개봉했다며 억지로 밖으로 끌고갔다. 시내를 걷다 서현과 같이 갔던 레스토랑이 보여 세건은 그대로 하얗게 질린채 헛구역질을 했다. 


그런 시간이었다.


***


그 녀석을 깨우는 방법은 키스해주는거야.

나한테 했던 것 처럼 난폭하게는 하지 말고.

천천히, 부드럽게, 살아있는 사람의 호흡으로 깨어날테니.


세건은 의자에 앉아있는 인형에게 다가갔다. 인형이라기보단 정교한 로봇이었지만 지나치게 사람을 닮아 사람의 형태, 즉 人形이라는 말에 걸맞았다.


부드러워 보이는 회색머리, 머리와 같은 색의 속눈썹, 흰 피부와 또렷한 이목구비까지. 세건이 기억하는 서현의 얼굴과 꼭 닮은 인형이었다. 다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인형은 서현보다 어렸다. 18살? 아니 16살 정도일까. 세건은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인형에게 고개를 숙였다.


인형과 입술을 맞댄 세건은 놀랐다. 입술이 미미한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거기다 호흡을 하는 것인지 작게 그 틈으로 바람이 새었다. 


서현은 이따금 일과 전혀 상관없이 동물이나 곤충과 꼭 닮은 로봇을 만들어오곤 했다. 천재, 괴짜. 모두 서현에게 붙는 말이었다. 서현이 만든 벌새가 죽었을 때, 아니, 작동을 멈추었을 때 서현은 복잡한 표정으로 손바닥에 그것을 올리고 침묵했다. 추모라도 하는 것이냐며 혀를 차자 서현이 빙그레 웃었다.


턱을 살짝 잡아올려 세건은 인형에게 숨을 불어넣었다. 손가락에 닿는 살갗의 감촉 또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살아있는 사람같았다. 서현이 사람 비슷한 것을 만드는 광경은 본 적도 없는데 어디서 이런게 완성되었는지, 무서울 정도였다.


"…후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숨이 가빠진 세건은 입맞춤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인형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역시 반년이나 방치해 둔 탓에 이 섬세한 물건은 고장나버린 모양이었다.


헛수고였군. 

세건이 약을 찾기 위해 뒤로 돈 찰나, 바스락 하고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하는 생각에 뒤를 돌아보자 인형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다가, 반짝 눈을 떴다. 마치 방금 잠에서 깬 아이처럼 인형은 손등으로 눈을 부비적거리더니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발그레한 입술이 벙긋거렸다.


안, 녕.

한세건, 맞지?

나는 이사카 베르게네프야.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점점 매끄러워지고 조금씩 마모되어가는 연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될 쯤, 세건은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서는 그것과 마주섰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쯤 큰 서현과 다르게 인형은, 이사카는 머리 하나 정도 작았다.


세건이 아무 행동도 하지 않자 이사카는 약간 고개를 갸웃 하더니 알겠다는 듯 세건의 허리를 안고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세건은 아득해지는 의식을 바로 잡기 위해 애썼다. 서현은 죽기전에 결국 신의 영역을 침범한 것일까. 세건은 떨리는 손으로 이사카를 끌어 안았다. 인형의 몸이 소름끼치게 따뜻했다. 마치 인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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