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11.19. 블랙자칼 vs 애들러스 배포전, [우5/M막둥이 S쇼요랑 B블자랑 Y영원히 B배구하자 J제발] 부스에서 판매  하이큐 사쿠히나 장편 소설 <나의 첫사랑 이야기> 를 유료발행합니다. (본문, 번외편, 후기 포함 전체 약 198,171자)


※ 성인 블랙자칼 시점 - 히나타 쇼요 side. / 사쿠사 키요오미 X 히나타 쇼요

 

※ 본 소설은 하이큐 사쿠히나 장편 소설 <나의 첫사랑 이야기 - 사쿠사 키요오미의 이야기> 를, 히나타 쇼요의 시점에서 전개한 소설입니다. 전자는 사쿠사의 시점에서 전개되었다면, 본 이야기는 같은 행동과 사건에 대한 히나타의 생각과 감정을 알 수 있으며, 사쿠사의 이야기에서는 알 수 없었던 추가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ex. 히나타의 감정 변화 계기, 사쿠사의 '그 발언'에 대한 히나타의 생각, 츠키시마와 아츠무의 조언, 아카아시 케이지와 히나타 쇼요의 이야기) 

사쿠사 시점의 소설과 퍼즐 조각처럼 맞아 떨어져 하나의 큰 그림을 이루는 기획 의도를 지닌 소설인 만큼, 사쿠사의 이야기와 같이 읽으시면 더욱 좋습니다!



※ 포스타입에 <나의 첫사랑 이야기 - 사쿠사 키요오미의 이야기> 내용이 업로드되어 있습니다. (12화까지의 내용 및 유료발행 완결본)  하단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포스타입 포스트 발행 글자수 제한이 10만 자까지인 관계로, 상/하로 나누어 업로드합니다! *

하편 링크 : 






[사쿠히나] 나의 첫사랑 이야기 

                          - 히나타 쇼요의 이야기 (上)












2015년 봄철대회 준결승전. 등번호 5번을 달고 출전하였던 그 경기에서 카라스노 배구부는 이타치야마 학원 배구부에 패하였고, 우리는 전국 3위라는 기록을 끝으로 3학년 마지막 배구 시합을 마무리하였다.






“…….”

“보게, 정렬하래.”

“…어.”






브라질 유학을 예정하고 있었다, 그 당시의 나는. 그래서였을까. 시합이 끝난 후의 오렌지 코트는 평소보다도 더 내 눈길을 놔주지 않았다. 당분간 보지 못 하게 될 그 풍경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고 싶었고, 손끝에 남은 뜨거운 감각을 몸에 새기고 싶었다.



인사를 위해 정렬을 했을 때도, 코트 위에 두 발을 디디고 선 한 순간 한 순간이 아쉬웠다. 조금 더 오래, 남아있고 싶었는데.






“…….”






아직 조금 더, 배구를 하고 싶었다.






“감사했습니다!”






응원해주신 분들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배구화가 들어찬 시야는 질끈 눈을 감자 어둠에 물들었다. 그 어둠 사이로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오렌지색 빛. 뜨거운 조명은 승자든 패자든 구분 없이 공평하게 빛을 내려주고 있었다.




눈물이 나진 않았다. 옛날과는 달랐다. 패배의 원인은 내가 컨디션 관리를 잘 못 해서도, 내 실력이 형편없어서도 아니었다. 우리 팀이 약해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상대팀이 우리보다 조금 더 강했을 뿐.




게다가 결과를 떠나, 시합은 무척 즐거웠다. 전국 에이스 선수가 졸업한 후에도 명맥을 이어가는 강호교, 이타치야마 학원 배구부. 그런 상대와 이런 전국적인 무대에서 시합할 수 있다니, 당연히 즐겁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 치열한 경기 도중에도 잠시 다른 상상을 하게 될 정도로.



지금도 이렇게 즐거운데… 만약 전국 세 손가락 안에 든다고 했던, 이미 졸업한 그 선수도 이 코트 위에 있었다면 얼마나 더 즐거웠을까― 하는 상상.




그렇게 생각하니 아쉬움과는 별개로, 눈물이 날 이유가 없었다. 그저,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가 또렷하게 실감되었을 뿐이었다.






“히나타, 코치님이 정리하고 이동하자셔.”

“응.”






강해지는 것. 조금 더 오래 코트에 남을 수 있도록 더욱 강한 선수가 되는 것. 이 배구 코트 위에서 필요로 되는 선수가 되어, 조금 더 오래 배구를 하는 것. 그것이 나의 목표이자, 내가 앞으로 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타치야마 학원 배구부와의 경기는 브라질 유학을 앞둔 나에게 있어 그 목표 겸 과제를 다시금 깨닫게 해 주는 중요한 계기였다.






‘강해지자. 더욱 강해지는 거야. 그리고 더 오래 배구 코트에 남겠어.’






그런 다짐을 되새기고 있었을 때, 문득 고개가 관중석을 향했다. 응원을 온 선배들이 내내 앉아 있던 카라스노 고교 측 관중석이 아닌, 반대쪽 관중석. 이타치야마 학원의 관중석 쪽이었다.






“…….”

“히나타, 뭐해? 다이치 상들은 저기 계셔. 저쪽은 이타치야마 관중석이고.”

“아… 응.”






멍하니 이타치야마의 관중석을 바라보던 나에게, 야마구치가 다가와 말했다. 가리키는 손가락의 끝에는 대견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선배들이 있었다. 경기 전에도 보았던 얼굴들이니, 선배들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야마구치의 눈에는, 우두커니 서서 이타치야마의 관중석을 바라보는 내 모습이 선배들을 찾는 모습으로 보인 모양이었다.



야마구치의 짐작은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나는 선배들을 찾아 고개를 돌린 건 아니었지만 어느 선배의 생각에 관중석을 본 것은 맞았으며, 그 선배는 카라스노 고교 배구부의 선배가 아닌 타 학교 배구부의 일원이었던 선배였다. 시합 도중에 잠시 상상 속에서 떠올렸던 선배.




일면식조차 없는, 그저 이름과 모습 정도만 알 뿐인 그 선배가 왜 떠올랐을까. 그것도 이 타이밍에서? 알 수 없었다.



이유 모를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조차 못 하고 있을 때쯤, 정리를 하고 이동하는 사람들의 틈 사이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옆에서 움직이던 카게야마를 부르는 그 사람은, 이타치야마 배구부원이었던 사람. 그러니까, 어어, 이름이….






“코모리 상.”






맞다, 코모리! 코모리… 모토야? 전국 고등학생 리베로 No.1이었던 코모리 모토야라는 선배.




노란색과 연두색이 섞인 배구부 유니폼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모자를 쓴 코모리 상이 카게야마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었다. 그 위로, 약 2년 전에 보았던 모습이 겹쳐졌다. 카게야마에게 손 인사를 보내왔던 그 때의 코모리 상의 모습. 그리고 그 옆에 함께 있던 다른 선배의 모습까지…….






“카게야마, 경기 잘 봤어.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우리와 한 살 차이일 뿐인 코모리 상에게서는 벌써 어른의 티가 나고 있었다. 이타치야마 학원 배구부를 응원하기 위해 왔다던 그는 카게야마에게 인사를 건넨 후로도 칭찬을 보내왔다.



그런 코모리 상의 시선이 카게야마 옆의 나에게 머물렀을 때, 그는 친분이 전혀 없는 나에게도 진심 어린 칭찬을 건네어왔다.






“히나타 군이지? 수고했어. 전부터 생각했지만 정말 대단하네, 히나타 군은.”

“앗,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나야말로 이런 명승부를 볼 수 있게 해줘서 고마울 지경인 걸. 히나타 군이랑도 코트 위에서 만나봤으면 재미있었을 거라고 생각이 들 정도였어.”






아. 그렇구나. 그래서였어. 시합 도중에도, 시합이 끝난 이후에도 그 선배가 떠오른 이유.



코모리 상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왜 머릿속에 어느 한 선배의 모습이 떠올랐는지 그 까닭을 깨달았다. 강한 상대와 시합하는 즐거움 속에서 더 큰 즐거움을 갈망하던 순간에도, 더 강해져서 더 오래 코트 위에 남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하는 순간에도 떠올랐던 그 사람.




사쿠사 키요오미….




뜬금없이 떠오른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맥락이 그럴싸했다. 그는 강한 선수, 그것도 전국적인 에이스였다. 그런 그가 소속되어 있던 배구부와 시합을 했으니, 그 사람도 함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 몰랐다.






‘이미 졸업을 하셨으니 당연히 시합을 해 볼 기회는 없지만…. 그래도, 역시 이타치야마랑 붙게 되니 사쿠사 선수도 계셨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드네. 그야, 그 플레이 엄청 멋있고 직접 보고 싶었으니까. 2년 전에는 카모메다이랑 시합할 때라서 직접 경기하는 모습도 못 봤었고? 아, 물론 코치님이 구해주신 영상을 통해 잔뜩 돌려보긴 했지만, 으으음, 그래도 역시 영상으로 보는 것과 직접 실제로 두 눈을 통해 보는 건 느낌부터가 다르달까…. 그치, 완전히 다르지. 게다가 그 회전 스파이크, 직접 받아보고 싶었는걸. 내가 미끼가 되어서 직접 낚아보고 싶기도 했고…. 그러니까 그 선배가 먼저 졸업해서 같이 배구를 해볼 일이 없어졌다는 건, 역시 뭔가…….’






……아쉽네.






“어이, 보게. 뭐하냐.”

“…어?”

“코모리 상이 연락처 물어보시잖아.”

“앗, 어? 네? 저요?”

“응. 괜찮으면 연락처 주고받지 않을래? 히나타 군도 앞으로 계속 배구를 할 거지?”






경기의 결과와 고교 시절 마지막 배구 코트라는 사실 외에, 나에게 또 다른 아쉬움을 안겨준 존재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더해가던 중, 카게야마의 목소리와 눈앞에 내밀어지는 휴대폰에 정신을 차렸다.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한 사람의 얼굴이 산 속 안개가 흩어지듯 사라졌다. 그리고 그 위로, 코모리 상의 마지막 질문이 덧칠해졌다.






“아, 네! 당연하죠!”

“그러면 또 볼 일이 있겠네. 나도 어쨌든 프로배구팀 쪽으로 지망하고 있으니까. 어쩌면 같은 팀에서 뛰게 될지도 모르고, 아니면 네트를 사이에 두고 만날지도 모르지.”






코모리 상의 휴대폰에 연락처를 입력하던 손가락이 멈칫했다.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힘차게 대답했다.






“그러네요! 같은 팀이든 다른 팀이든, 함께 배구를 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어요!”

“그러게~ 나도 기대하고 있을게. 카게야마도, 히나타 군도 꼭 코트에서 다시 만나자.”

“네.”

“네!”






이만 가보겠다며 손을 흔드는 코모리 상의 뒤로 꾸벅 인사를 건네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배운 게 많은 대화였다. 지금 이 순간이 절대 끝이 아니라는 확신을 받은 느낌.

 




“그러면 또 볼 일이 있겠네. 나도 어쨌든 프로배구팀 쪽으로 지망하고 있으니까. 어쩌면 같은 팀에서 뛰게 될지도 모르고, 아니면 네트를 사이에 두고 만날지도 모르지.”

 





“…맞아. 기회가 없는 게 아니지. 계속 배구를 할 거니까, 언젠가는 어떤 식으로든 코트 위에서 만나겠구나.”






이미 졸업해버린 그 선수. 소문에 의하면 대학교로 진학을 했다고 들었다. 그는 대학교 소속이 되었고, 나는 졸업 후 바로 브라질 유학을 다녀올 예정이니, 그와 내가 코트 위에서 만날 기회는 당분간은 없을 것이다. 당분간은.



하지만 그게 영영 없다는 의미는 아니니까. 그 선배도, 나도 배구를 이어간다면 분명 다시 만나겠지. 그러면 그 땐, 그 선배의 회전 스파이크도 받아칠 수 있고, 내가 직접 미끼가 되어 그 선배를 낚을 수도 있어. 그리고 그 날을 조금이라도 빨리 맞이하려면…….






“…역시, 강해지는 수밖에 없어.”

“아까부터 뭐라고 중얼거리냐. 빨리 움직여.”






멈춰선 나를 돌아보며 인상을 구긴 카게야마가 말했다. 앞서 가던 야마구치와 츠키시마도 뒤를 돌아보는 그 모습에,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카게야마. 나는 계속 배구를 할 거야.”

“어.”

“더 강한 사람들과 더 즐거운 배구를 더 오래 할 거야.”

“그래라.”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더 강해져서 돌아올 거야. 반드시―.




나의 말에 카게야마가 멈춰섰다. 그리곤 눈썹을 올리며 나를 내려다보곤 말했다.






“당연한 소리를 굳이 하는 이유가 뭔데.”

“카게야마 군은 끝까지 분위기라는 걸 못 읽습니까? 응?”

“뭔 분위기.”

“어쨌든, 브라질에서 제대로 수련하고 오면 금방 코트 위로 찾아갈 테니까 제대로 기다리고 있으라고!”

“어이, 히나타! 카게야마! 둘 다 빨리 안 와?!”






우카이 코치님의 목소리가 울리고 나서야, 나랑 카게야마는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마지막으로 뒤돌아 눈에 담았던 오렌지 코트. 그 위에서 보낸 시간들과 그 위에 서기 위해 행했던 노력들에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건네며. 그리고, 만나본 적 없는 선배로부터 자극을 받은, 변하지 않을 다짐을 다시금 되새기며.




그렇게 나, 카라스노 고교 배구부 히나타 쇼요는 고등학교 3년 동안의 배구부 시절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런 내가 브라질 수련을 마치고 돌아와 다시 코트를 밟은 것은 그로부터 2년 하고도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히나타 선수?”

“아, 넵!”

“괜찮으세요? 엄청 피곤해 보이는데….”

“아, 괜찮아요! 피곤하다기보단, 어제 잠을 잘 못 자서…!”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첫 화보 촬영 겸 잡지 인터뷰를 앞두고 긴장한 탓에 밤에 잠을 설친 게 원인이었다. 잠시 동안의 쉬는 시간 중, 입까지 벌리고 꿀잠을 자 버린 나는 스태프 분의 질문에 손사래를 치며 괜찮음을 확인시켜드렸다.






“잡지 인터뷰 앞두고선 대부분이 잠을 잘 못 자세요. 전에 미야 선수도 눈 밑에 다크서클 잔뜩인 채로 오셨거든요.”

“진짜요? 아츠무 상, 저한테는 하나도 긴장할 일 아니라며 편하게 다녀오라고 하셨는데.”

“제가 지금까지 스포츠 선수들 잡지 인터뷰 진행만 4년을 했는데, 그 중에서 손에 꼽게 긴장하신 분이 미야 선수셨던 걸요. 아, 제가 이 말 한 건 비밀로 해 주세요. 미야 선수랑은 앞으로도 다른 인터뷰를 진행할 일이 많을 것 같거든요. 물론, 히나타 선수랑도요.”

“네. 당연히 비밀로 할게요!”






스태프 분에게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사진 촬영을 마친 내가 편하게 있을 수 있도록 등받이가 있는 의자로 나를 안내하였다. 여러 분들께서 단장해주신 뒷머리가 망가질까 내내 허리를 세우고 앉아 있던 등이 비로소 의자에 기댈 수 있게 되었다.






“좋은 꿈을 꾸셨나 봐요?”

“네? 저요?”

“네. 잠드신 동안 표정이 아주 즐거워 보이셨거든요. 중간 중간 웃기까지 하시던데.”

“그랬나요?”






전 그냥, 입 벌리고 잠든 줄 알았는데…. 왠지 멋쩍어 뒷머리를 긁적였다. 고등학교 시절 경기를 위해 차에 타 이동하던 때도 아니고… 입을 쩌억 벌리고 잠든 것도 민망했지만, 중간 중간 웃기까지 했다니 표정이 얼마나 웃겼을까 싶었다. 만약 블랙자칼의 다른 분들이 함께 와 계셨다면 분명 사진을 찍고 놀리셨을 게 분명한 상황이었다.



아츠무 상은 사진을 찍고 “우리 쇼요 군, 아직 애기네, 애기~”라며 놀리시겠지. 보쿠토 상도 “히나타 요즘에도 입 벌리고 자? 자면서도 팝콘 먹을 수 있겠다!” 하실 테고…. 그러면 이누나키 상이 옆에서 “막내 놀리지 마라~” 하시려나. …아니지, 아츠무 상은 사진을 찍으셨을지도 몰라. 그러면 이누나키 상은 아츠무 상을 나무라시면서도 사진 공유하라고 하시겠다. 토마스 상도 옆에서 웃고 있을 테고, 메이안 상이 오고 나서야 상황이 정리되겠지. 그리고 오미 상은 이 모든 상황을 한 발짝 뒤에서 보시면서, 아마…….

 




“좋은 꿈을 꾸셨나 봐요?”

 




문득 생각이 멈추었다. 좋은 꿈을 꿨냐는 질문. 그 속의 ‘좋은 꿈’에 대한 생각이 불현 듯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좋은 꿈이었나? 고등학교 시절 마지막 배구 시합. 이타치야마 학원 배구부에게 패했던 그 경기. 그 때 있었던 일들과 그 때의 생각들이, 마치 영화를 보듯 재생된 느낌의 꿈이었다. 그게… 좋은 꿈이었나…? 경기에서 패하긴 했지만 즐거웠으니 좋다고 표현할 수 있으려나?



“이런 말을 하면 아츠무 상이 그러시겠지. 경기에서 진 꿈인데 뭐가 즐겁다는 거가! …라고. 그러면 보쿠토 상이 옆에서 이기고 지는 게 전부냐며 이해 안 간다는 표정을 지으실 테고, 오미 상은 말없이 인상 쓰시려나.”




이제는 눈 감고도 상상할 수 있는 동료들의 반응에 절로 웃음이 났다. 동시에, 꿈속에서, 과거에서 바라고 있던 그들과의 배구가 현실이 된 지금이 새삼 감사하게 느껴졌다.



맞아. 그 날, 이타치야마랑 겨루는 도중에도 오미 상이랑 배구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었지. 코모리 상이랑 연락처를 교환한 것도 그 때였고…. 그러고 보니 그 땐 ‘오미 상’이 아니라 ‘사쿠사 선수’였구나. 오미 상이야 그 전부터도 워낙 유명한 선수니 알고 있었지만, 오미 상은 나를 아마 모르셨을 테고….

 





“그러면 또 볼 일이 있겠네. 나도 어쨌든 프로배구팀 쪽으로 지망하고 있으니까. 어쩌면 같은 팀에서 뛰게 될지도 모르고, 아니면 네트를 사이에 두고 만날지도 모르지.”

 





계속 배구를 이어오니까, 연도 이어졌구나. 지금은 이렇게, 같은 팀에서 뛰고 있다니.






“역시, 강해지면 계속 함께 배구를 할 수 있네.”






지난 몇 년 동안의 경험으로 당연시된 사실을 중얼거려보았다. 거울 속에 비친 내 표정은 배구를 하고 있지 않음에도 제법 신이 나 보였다. 배구 자체도 그렇지만, 배구를 통해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 또한, 나를 즐겁게 해 주는 소중한 보물이었으니.




잠시 후, 인터뷰 질문지를 가져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던 스태프 분이 돌아오셨다. 왠지 긴장이 밀려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면, 편하게 대답하시면 된다며 되돌아오는 사람 좋은 웃음이 있었다.



질문은 어려운 내용이 아니었다. 히나타 쇼요 본인에게 히나타 쇼요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이니 당연한 이야기려나? 아무튼, 내 예상보다 훨씬 편안한 분위기에서 질답이 오고 갔다. 역시 화보 사진 촬영보다는 이 쪽이 조금 더 맞을지도.




그런 생각을 하며 성실히 답변을 하고 있는데, 내 소속팀인 MSBY 블랙자칼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가겠다며 질문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는 배구 경험이나 브라질 유학 때의 일, 배구에 대한 가치관 등이 주를 이루었다면, 지금은 블랙자칼의 동료들과의 관계라든가 일화 등으로 그 내용이 바뀌었다. 다른 동료 분들의 잡지 인터뷰에서도 한 번쯤 보았던 질문들이 똑같이 건네어진 덕분에 평소의 생각을 술술 잘 이야기할 수 있었다.






“MSBY 블랙자칼은 역시 분위기가 좋네요.”

“네. 다들 진짜 좋은 분들이셔서! 스태프 분들도 다 좋은 분들이시고, 동료 선배들도 다 엄청 좋아요!”

“하하, 그런 것 같네요. 그러면 다음 질문은… 아, 조금 창의적인 질문이네요. 히나타 선수는 MSBY 블랙자칼에서 사랑받는 막내 포지션으로 유명하신데, 알고 계셨나요?”

“앗, 네! 종종 듣는 이야기예요. 입단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늘 모두가 많이 챙겨주시고 배려해주셔서, 사랑받는 막내로 비유되는 것 같아요. 아! 아츠무 상 말로는 키 때문에 더 그래 보이는 거 아니냐고 하던데….”

“미야 선수가 평소에 히나타 선수한테 장난을 자주 치시나 보네요. 음, 팬들 사이에서는 MSBY 블랙자칼을 한 가족으로 비유하기도 하던데요. 그렇다면, 히나타 선수 본인이 생각하는 각 선수들의 역할은 어떻게 될까요?”

“가족에 비유해서요? 음…. 그러면 엄청 대가족이 될 텐데….”






나의 혼잣말에 인터뷰를 진행하시던 스태프 분이 웃으셨다. 조금 엉뚱했나 싶어 따라 웃으니, 천천히 생각해보시라는 말이 되돌아왔다.






“음…. 가족에 비유를 한다면 역시 아빠는 메이안 상, 엄마는 이누나키 상이려나요! 토마스 상은… 삼촌…? 왠지 이누나키 상 쪽의 젊은 삼촌일 것 같아요. 나이 차이가 많이 안 나서 같이 잘 놀아주는 삼촌 있잖아요. 그런 느낌?”







내 대답을 들은 스태프 분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빠르게 움직이는 손가락은 타닥 타닥 소리를 내며 나의 답변을 받아 적고 있었다.




앗, 내가 너무 말이 많나? 받아 적으시기 힘들지 않으시려나? 일일이 타이핑을 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잠시 답변을 멈추니 이내 곧 나를 쳐다보셨다.






“아, 받아 적으시기에 힘드실까 봐요. 제가 너무 말이 많나요…? 아니면 대답이 빠르다거나.”

“아아, 아뇨. 전혀요. 오히려 답변을 세세하게 해 주시면 저희로서는 감사한 일이죠. 다듬어서 잡지에 올릴 콘텐츠 내용이 풍부해지는 거라. 그리고 말씀도 빠르시지 않고 딱 적당해요. 편하게 이야기해주셔도 됩니다.”

“다행이네요! 그러면, 이어서 이야기해도 될까요?”






끄덕. 고갯짓으로 허락을 받곤 다시 답변을 이어갔다. 토마스 상까지 이야기를 했으니까, 그 다음은….






“아. 보쿠토 상이랑 아츠무 상은 역시 형 같은 느낌! 두 분 다 전부터 알아서 그런지 편하게 잘 대해주시고 종종 같이 놀러 다니기도 하거든요! 그리고 오미 상은, 음…….”






잘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대답이 늘어졌다. 인터뷰 중 처음으로 생긴 긴 침묵이었다. 천천히 생각하고 답변하셔도 된다는 배려에 감사 인사를 표하며 웃은 겉과는 달리, 머릿속은 예상치 못 한 공백에 당혹스러움으로 차올랐다.





어라, 오미 상은…?






“어… 오미 상은…. 으음… 그게…….”

“…사쿠사 선수를 비롯해서, MSBY 블랙자칼 막내라인 네 명이 특히 더 자주 모이거나 함께 시간을 보낸다고 들었는데요. 사쿠사 선수도 역시 형이려나요?”

“아, 그건 맞는데…. 확실히 세 분이랑 보낸 시간이 더 많기는 한데, 그렇다고 오미 상이 보쿠토 상이랑 아츠무 상이랑 같은 형이냐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아, 그렇다고 오미 상이 동생 같다는 건 아닌데요! 오미 상이 빠른 년생이라 저랑 같은 1996년생이기는 해도, 일단 저보다 한 학년 위고 친구 분들도 다 저보다 한 살이 많으셔서 형이기는 하거든요. EJP 라이진의 코모리 상이랑도 두 분이 사촌이신데 코모리 상은 1995년생이시거든요? 그런데도 두 분 서로 친구처럼 지내시니까! 코모리 상이랑 저는 확실히 형 동생 하는 선후배 관계고! 물론 저랑 오미 상 생일이 딱 세 달 정도 차이밖에 안 나는 같은 1996년생이기는 한데, 그래도…….”






횡설수설. 잡지에 게재할 수준이 아닌 말들만 입 밖으로 나왔다. 두서없는 내 말들을 고스란히 받아 적던 상대방도 끝에 가서는 티가 나지 않게 고개를 갸웃거리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동료 분들에 대해서는 잘 상상해서 비유할 수 있었는데, 왜 오미 상에 관한 답변만 이렇게 어려운지 그야말로 당혹스러웠다. 그렇다고 내가 다른 분들과 달리 오미 상한테만 거리감을 느낀다거나, 가족 같은 동료애를 느끼지 않는 것도 아닌데. 왜? 왜 오미 상만 가족에 비유하려니 생각이 안 나지?




당혹스러움에 눈을 깜빡이며 앉아있자, 커피를 홀짝인 스태프 분이 꼬고 있던 다리의 방향을 바꿔 앉으며 질문을 건네 오셨다.






“사쿠사 선수는 평소 히나타 선수에게 어떤 존재의 동료인가요?”

“어… 오미 상은…. 굉장히 좋은…! 동료인데….”

“조금 더 자세히 생각해 보면요? 모두 다 좋은 동료일 텐데, 그 중에서도 사쿠사 선수는 어떤 면에서 히나타 선수에게 굉장히 좋은 동료일까요? 그런 점을 생각하다 보면, 사쿠사 선수는 어떤 느낌으로 비유가 될지 자연스레 떠오르지 않을까 싶은데.”

“아아, 그렇겠네요!”






능숙한 진행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세차게 끄덕였는지, 머리 고정을 위해 꽂아둔 헤어핀이 무릎 위로 떨어질 정도였다. 그 헤어핀을 손에 쥐고 생각에 잠겼다.





오미 상은 나에게 어떤 존재의 동료시지…?






“…….”

“…히나타 선수?”

“앗, 넵…!”

“괜찮으신 거죠? 잠시 멍하니 계신 것 같아서.”

“네? …아, 네! 괜찮아요! 그냥, 잠시 생각을 좀…!”






또 한 번 손사래를 치며 컨디션이 양호함을 보여드렸다. 그리곤 방금까지 머릿속에 가득했던 생각, 오미 상에 대한 답변이 떠올랐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오미 상은, 음…. …옆집에 사는 형…?”

“…옆집에 사는 형이요?”

“네. 가족보다는 역시, 옆집에 사는 형 같은데…. 아, 그렇다고 가족 같지 않다는 뜻은 아니고요! 굳이 비유를 하자면요! 오미 상도 저희 블랙자칼의 가족 같은 동료인 건 맞는데, 굳이 굳이 비유를 했을 때의 이야기로…!”

“옆집에 사는 형이라는 건 어떤 느낌이죠? 옆집 형의 이미지도 다양하니까요.”

“그게, 으음….”






오미 상에 대한 비유가 조금 모호했는지 추가적인 질문이 날아왔다. 나는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며 어떻게 이 비유를 잘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어… 엘리베이터 같이 타서 인사드리면 고개만 끄덕이고 아무 말 안 하지만, 내릴 때 되면 먼저 내리라는 듯 뒤에서 기다려주는, 그런 형…?”

“으음.”

“아, 그런데 제가 의도를 이해 못 하고 왜 안 내리시냐고 여쭤보면 빨리 내리기나 하라는 것처럼 눈짓 주실 것 같고!”

“아아, 그런….”






잘 전달이 되었을까? 왠지 오미 상에 대한 까칠한 이미지만 더한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전혀 아니었는데. 혹시라도 그렇게 받아들여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생각을 더 이어가자, 더 하실 말씀이 있는지 묻는 듯 눈짓을 보내오셨다.






“그, 방금 한 말이 자칫 잘못 오해를 살까 걱정되어서요.”

“음. 괜찮지 않을까요? 히나타 선수의 말은, 사쿠사 선수가 내색은 안 해도 티 안 나게 배려를 해준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게 아니었나요?”

“아, 맞아요! 그거예요, 그거! 오미 상은 겉으로는 티를 안 내시거나 매번 ‘안 돼. 싫어. 하지 마. 저리 가.’라고 하셔도 사실은 가장 세심하게 챙겨주시거든요.”

“그렇군요. 그런 의미가 왜곡되지 않고 잘 전달되도록 적어볼게요.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건, 그런 이미지라면 그냥 형이라고 해도 되었을 텐데, 굳이 옆집 형이라고 비유를 하신 까닭이 있나요?”






우와. 역시 잡지 인터뷰를 작성하시는 분은 다르시다. 엄청 예리하셔…!




미처 설명하지 못 한 부분에 대해서 훅 들어오는 질문에 새삼스러운 감탄을 삼켰다. 그리곤 손 안의 헤어핀을 만지작거리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답변은, 방금 전 꾸었던 꿈속의 과거에서 했던 생각과 맞물려 있었다.






“고등학교 마지막 배구 경기는 오미 상이 졸업한 이타치야마 학원 배구부와의 시합이었어요. 준결승에서 맞붙었는데 패해서, 저희는 전국 3위로 마무리를 했었거든요. 아쉽기도 했지만 무척이나 즐거운 시합이기도 했는데, 그 때 경기의 결과나 고등학교 배구부 활동이 이렇게 끝난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 말고 또 다른 아쉬움이 있었어요.”

“어떤 아쉬움이었을까요?”

“그건….”

 





“…….”

“히나타, 뭐해? 다이치 상들은 저기 계셔. 저쪽은 이타치야마 관중석이고.”

“아… 응.”

 





“오미 상… 당시에는 사쿠사 선수였던 그 사람과 함께 배구를 해보지 못 했다는 아쉬움… 이었던 것 같아요. 배구부 초기 때부터 워낙 유명해서 알고 있었는데, 정작 단 한 번도 코트에 같이 서 본 적은 없었거든요. 이타치야마랑 시합을 하다 보니 문득 ‘사쿠사 선수가 졸업하지 않고 저 네트 너머에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경기가 끝난 후에도 저도 모르게 이타치야마 관중석을 보면서 사쿠사 선수는 안 오셨나 살피고 있더라고요.”

“그 때는 친분이 전혀 없었나요?”

“네. 저는 오미 상을 알고 있었지만, 오미 상은 아마도 저를 모르셨을 걸요? 맞나…? 카게야마는 같이 합숙을 하셨으니 확실히 알고 계셨을 테고, 그러면 저에 대해서도 알고 계셨으려나? 으으음, 이건 한 번도 여쭤보질 않아서 모르겠네요.”






그러게. 오미 상은 고등학생 때 나를 알고 계셨을까? 한 번도 여쭤본 적이 없네. 궁금하다.






“음. 그러면 히나타 선수에게 있어 사쿠사 선수는 그 때까지 한 번도 함께 배구를 한 적이 없다는 이미지가 남아 있어서, 가족보다는 옆집의 형 같은 느낌인 걸까요?”

“아, 그것보다는…! 음…. 그러니까…….”

 





“응. 괜찮으면 연락처 주고받지 않을래? 히나타 군도 앞으로 계속 배구를 할 거지?”

“아, 네! 당연하죠!”

“그러면 또 볼 일이 있겠네. 나도 어쨌든 프로배구팀 쪽으로 지망하고 있으니까. 어쩌면 같은 팀에서 뛰게 될지도 모르고, 아니면 네트를 사이에 두고 만날지도 모르지.”

 





“언젠가는 꼭 만나보고 싶었거든요. 같이 배구를 하고 싶었어요, 오미 상이랑.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도 오미 상은 정말 강하고 멋있는 선수였거든요. 고등학생인데도 이미 고등학생 수준을 넘어선 레벨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었고, 실제가 아닌 영상으로만 보아도 여러 가지 기술이나 경기력이 대단했어요.”

“‘관동의 사쿠사’였죠.”

“맞아요! 저도 처음 오미 상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그 수식어로 알게 되었어요. 음, 다른 분들은 원래 알고 있었거나 혹은 프로팀에 들어와서 알게 된 분들인데, 오미 상은 그 전에 알고 있었지만 아는 사이가 아니었잖아요. 알고 지내곤 싶었는데 그렇지 못 했고! 그래서 그런가? 자연스레 인연이 되어 만났다는 느낌보다는, 저희 둘 다 배구를 계속 해 왔기에 만날 수 있었던… 기회가 되어서? 허락해줘서? 만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어… 제 말, 무슨 뜻인지 확 안 와 닿으시죠…?”

“가족은 자연스레 함께 있지만, 옆집 형은… 둘이 옆집에 살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관계다, 이런 건가요?”

“그으으으게 맞긴 한데,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어어…….”






다시 미궁에 빠진 답변에 양쪽 관자놀이를 쥔 채 눈을 감았다. 생각에 집중했다. 이 답변을 어떻게 해야 잘 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오미 상에 대한 생각을 잘 전할 수 있지?







“그…!! 가족은 따로 ‘친해지고 싶다! 만나고 싶다!’ 이런 생각을 안 하잖아요? 원래도 가족이니까! 그런데 옆집 형은 그게 아니니까,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만나러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옆집에 놀러가서 같이 놀고도 싶고, 어쩌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기쁜? 그런 의미예요! 저는 오미 상이랑 언젠가 코트에서 만나고 싶다고 쭉 생각해왔었고, 실제로 만나서 같은 팀이 된 이후에도 오미 상과 더 친해지고 가까워지고 계속 함께 배구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앗, 물론 이건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요! 모두랑 더 친해지고 가까워지고 계속 함께 배구를 하고 싶죠…!




동료들과 함께 하는 배구의 즐거움을 곱씹으며 첨언했다. 나의 답변이 충분했을지 걱정을 담은 시선으로 응시하자, “아.” 하고 작게 소리낸 스태프 분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아아, 알겠네요, 어떤 의미인지.”

“다행이에요! 답변이 너무 횡설수설이었죠.”

“그래도 의미는 잘 전해졌으니까 괜찮습니다. 이 정도 답변이면 충분해요. 일단, 왜 옆집 형인지에 대한 답변은 확실하게 되었으니까요.”






몇 번 더 키보드를 두드리던 스태프 분께서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바라보셨다. 그리고는 재차 웃으며 이어지는 말씀.






“히나타 선수는 사쿠사 선수를 굉장히 좋아하시나 보네요.”






……네?






“…어어, 네! 좋아하죠! 워낙 멋진 선수인데다가, 좋은 분이시고!”

“아, 그런 의미도 맞지만요. 음, 뭐랄까. 옆집 형이라는 답변에 담긴 마음이 무척이나 깊고 각별해보여서요. 들어보면 사쿠사 선수가 히나타 선수에게 일종의 동기 부여가 되었던 것도 같고…. 지금도 꽤 많은 영향을 주고받고 계신 듯한데, 그래서인지 동료를 향한 동경의 감정 외에도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호감? 애정? 그런 것도 느껴지네요.”






그렇지 않고서야, 한 사람에 대한 설명을 위해 이렇게 진심으로 고민하고 오랜 시간 동안 정성 들여 설명하기란 쉽지 않죠. 그렇지 않나요?




커피를 홀짝이곤 웃는 그 모습에 멍하니 앉아 “아….” 소리를 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씀은 아니었으니.




맞아. 오미 상은 정말 멋진 선수고 좋은 동료이자, 어쨌든 좋은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좋아할 수밖에 없잖아? 오미 상이라는 사람에 대한 호감이나 애정,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고…. 애초에 다른 분들도 그렇지! 보쿠토 상이나 아츠무 상도 그렇고! 메이안 상이랑 이누나키 상이랑 토마스 상도! 모두 애정을 가질 수밖에 없지! 응!



이유는 모르겠지만, 스스로에게 되뇌는 부연 설명이 길어졌다. 사쿠사 선수를 굉장히 좋아하시는 것 같다는 말씀을 들은 이후부터 붙은 생각이었다.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괜히 그랬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치 내가 오미 상만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것처럼 들릴까 봐. 그래, 그래서 계속 변명하듯 스스로에게 이유를 갖다 붙였다.




나는 오미 상만 각별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다른 분들도 모두 좋아하는데? 그야, 모두 좋은 분들이시니까!







“…그, 혹시 방금 한 말도 잡지에 올라가나요?”

“어떤…?”

“제가 왜 오미 상을 옆집 형에 비유했는지에 대한 설명이요. 가능하다면 그건 안 적혔으면 해서….”






볼을 긁적이며 여쭤보았다. 굳이 비밀로 할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왠지 다른 사람들이 그런 생각들을 전부 읽는다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이상했다.



왜일까? 오미 상이 이런 내용을 보면 “왜 네 인터뷰에서 나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많은 건데?”라고 하실까 봐? 정말 그러시려나? 아니면 부담스러워하실까 봐 그런가? 그건… 가능성이 없진 않겠다. 오미 상이 이미 졸업한 후의 팀과 시합을 하면서 오미 상도 있었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을 했다니, 자만한 거냐고 생각하실 수도….



뿐만 아니라, 오미 상이 아닌 다른 분들이 이 내용을 보는 것도 조금 그랬다. 혹시라도 잘못 오해해서 내가 오미 상만 각별하게 생각하는 걸로 이해하시면 어떡해. 물론 진심으로 그러진 않으시겠지만, 아츠무 상이라면 조금 서운해하실 수도 있지. “쇼요 군, 내는! 내는 니한테 토스를 올리겠다고 선언까지 했는데! 내 생각은 안 했나! 내랑은 안 뛰어보고 싶었나!!” ……와, 진짜 이러실 것 같아. 그러니까 역시 이 내용은 적히지 않는 게 좋겠지.






“걱정 마세요. 히나타 선수가 원하지 않는 내용은 게재하지 않을 테니까.”

“아, 감사합니다!”

“당연한 건데요, 뭘. 그러면 어느 내용까지가 괜찮으신가요?”

“어… 으음… 그러니까…….”






오미 상은 옆집에 사는 형 같다는 내용까지…?






“아! 제가 이해 못 하고 왜 안 내리시냐고 여쭤보면 빨리 내리라고 눈짓 주실 것 같다는 그 부분까지요!”

 

 

 

 

 


 

 




“블랙자칼? MSBY 블랙자칼 말하는 거지? 그 팀으로 가게?”






2018년 3월. 공항까지 마중을 나온 야마구치와 함께 밥을 먹던 중 받은 질문이었다. 제법 오랜만에 먹는 조리법의 고기 요리를 입에 잔뜩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이다가 저었다. 그렇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야마구치가 재차 질문을 던졌다. 꿀꺽, 고기를 삼킨 후 물을 마시고 나서야 입을 열어 대답을 정정했다.






“맞아. MSBY 블랙자칼! 블랙자칼의 입단 테스트를 볼 거야. 하지만 붙어야 갈 수 있어. 내가 가고 싶다고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거야 그렇지…. 그런데 왜 하필 블랙자칼이야? 다른 팀들도 많지 않아?”

“그야, 지금 입단 테스트를 진행하는 팀들 중 가장 강한 팀이니까?”






당연하다는 듯 밝힌 이유에 “히나타답네.”라는 말이 되돌아왔다. 휴대폰을 집어 뭔가를 확인하던 야마구치는 “아, 여기 그 선배도 있네. 후쿠로다니의 보쿠토 상….”이라며 중얼거렸다. 블랙자칼 홈페이지에서 선수 명단을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에, 미야 아츠무 선수도 있어! 이나리자키의 그 선배!”

“응. 그렇더라고.”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입단했나 보네. 보쿠토 상은 졸업하고 들어가지 않았나?”

“보쿠토 상은 대학교로 진학하셨으니까? 그랬겠지?”

“미야 아츠무 선수는 바로 프로로 갔구나. 다들 대단하네. 이런 사람들이랑 몇 년 전에 같이 배구를 했다니….”

“야마구치는 우리 주장이었잖아! 우리도 대단했어! 너 면접 볼 때 다들 알아보시기까지 했다며!”

“으응, 그렇지. 그렇기는 한데…. 뭐랄까, 프로팀에 들어간 사람들은 역시 분위기부터가 다르니까.”






야마구치가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는 배구를 하지 않아서인지, 야마구치는 때때로 지나치게 자신의 배구를 과거시하는 말을 하곤 했다. 야마구치도 우리의 든든한 주장이었는데.



눈앞의 고기를 다시 입에 넣고 우물우물거리기 시작했다. 아직도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못 하고 있던 야마구치가 잠시 후 멈칫 하더니 또 다른 놀라운 정보를 본 것처럼 소리를 냈다.







“어! 이 사람, 그 선수다.”

“우움, 누구?”

“왜, 우리가 1학년 때부터 전국 세 손가락 안에 든다고 계속 들어왔던 사람.”






관동의 사쿠사―.




멈칫. 오랜만에 듣는 수식어에 고기를 집으려던 손이 멈췄다. 고기를 씹고 있던 턱 근육도 일순간 움직임을 정지했다. 그런 나의 모습을 눈치 채지 못 했는지, 야마구치는 계속해서 한 선수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 이 사람도 입단한 지 얼마 안 되었나 봐. 이번 시즌이 블랙자칼에서의 첫 데뷔래. …아, 이 사람도 대학교로 진학했구나. 대학리그에서 MVP를 수상했대. 대단하다, 대학 MVP….”






이미 홈페이지에서 몇 차례 읽어 알고 있던 정보였는데도, 마음이 왠지 모르게 요동쳤다. 그리고 그 두근거림은 곧바로 이어지는 다음 말에 더욱 세기를 더하였다.






“그럼, 히나타가 입단 테스트를 통과하면 이 선수랑 같은 팀이 되겠네! 고등학교 때는 얘기만 듣고 한 번도 같이 배구를 못 해봤잖아.”

“…으응, 그렇겠지?”






젓가락을 내려놓고 물을 마시며 대답했다. 혼자 생각만 하고 있던 내용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직접 듣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입단 테스트를 통과하면 같은 팀이 되어 같이 배구를 할 수 있을 거라는 말.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는데도 그 말을 들으니 다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래서 갑자기 세차게 뛰는 심장을 잠재워보고자 차분하게 숨을 들이마시고 물을 들이켰다. 돌연 차분해진 나의 텐션을 보고 뭔가 오해했는지, 야마구치는 “히, 히나타라면 입단 테스트에 통과할 수 있을 거야! 꼭 원하는 팀에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라며 나를 다독여주었다.



그런 야마구치를 앞에 두고 고개를 끄덕인 나는,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과거의 일을 회상했다. 지금의 야마구치와 마찬가지로, 내가 MSBY 블랙자칼의 홈페이지를 보고 있던 때였다.




귀국하기 전, 브라질에서부터 향후 목표에 대한 계획을 세웠었다. 아니지, 이는 브라질 유학을 결정하기 이전부터 어렴풋이 그려왔던 계획이었다. 브라질에서 비치발리볼 수련을 한 후, 귀국하여 프로팀에 입단해 배구를 이어가는 것. 그 목표가 있었기에 브라질 유학을 결정한 것이었으니까.



당시 입단 테스트 사전 공고를 게시한 프로팀은 여러 군데가 있었다. 그 중, 내가 목표로 한 팀은 MSBY 블랙자칼. 이유는 단 하나. 그 팀이 입단 테스트를 진행하는 팀 중 가장 강한 팀이기 때문이었다.



목표를 확정한 후, 해당 팀의 홈페이지를 통해 정보를 살폈다. 그 때 알게 되었다. 이 팀에 어떤 선수들이 소속되어있는지. 보쿠토 상이 MSBY 블랙자칼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것은 원래부터 알고 있었다. 종종 연락을 주고받아 온 아카아시 상을 통해 여러 번 들었으니까. 이나리자키 출신의 미야 아츠무 선수가 이 팀 소속원이라는 것 또한 시간이 흘러 어쩌다가 알게 되었다.




다만…….

 





[ MSBY 블랙자칼 / 사쿠사 키요오미 1996.03.20. (OH) ]

 





‘……이 팀에, 입단하셨구나.’






2018년, 새롭게 입단한 선수가 그 선배임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대학교 졸업을 한 그가 막 입단을 한 후에야 홈페이지 내 선수 명단에 이름이 올라왔으니, 새로운 그 얼굴을 보고 내가 놀란 것은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혹시 같은 이름의 다른 사람이 아닐까 싶어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으나, 분명히 그 선배가 맞았다. 고등학교 때와는 조금 달라진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었지만, 언젠가 카게야마와 인사를 나누던 코모리 상의 뒤로 보였던 그 얼굴이 확실했다.

 





“그러면 또 볼 일이 있겠네. 나도 어쨌든 프로배구팀 쪽으로 지망하고 있으니까. 어쩌면 같은 팀에서 뛰게 될지도 모르고, 아니면 네트를 사이에 두고 만날지도 모르지.”

 






‘어쩌면 같은 팀에서 뛰게 될지도…. 그럴 수도 있겠구나….’






두근거렸다. 사람들과 함께하는 배구에 늘 목말라있는 내가, 그 중에서도 꼭 한 번 함께 배구를 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사람. 그 사람이, 내가 목표로 하고 있는 팀에 입단했다. 소속 선수가 되었다. 그곳에서 배구를 하고 있다! 이만큼 두근거리는 일이 또 있을까. MSBY 블랙자칼이 강한 팀이라는 이유 외에도, 나를 그 팀으로 부르는 또 다른 동기가 생긴 순간이었다.




그리고…….




 

“사쿠사 상! 히나타 쇼요예요. 잘 부탁드립니다!!”

 





MSBY 블랙자칼에 입단하여 처음 그 선배를 본 날. 몇 년의 시간을 넘어 드디어 첫 인사를 건넨 날. 내게는 또 다른 목표의 싹이 자랐다.

 





“…….”

“…….”

“……발열 퇴장.”

“무슨 별명처럼 얘기하지 마세요!! 그리고 6년 전 일이거든요?!”

“컨디션 관리도 못 하는 녀석과는 같이 안 해.”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아니, 모를 리가 없나? 아마 6년 전의 그 일을 가리키는 듯한 묘한 별명을 붙여오는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 때와는 다르다고. 지난 2년의 시간을 거쳐 이곳에 들어온 나는…….

 





“걱정 마세요.”

“…….”

“그 동안, 많이 배웠으니까.”

 





같이 배구를 할 거라고. 이곳의 사람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과 더 오래, 더 즐겁게.




그리고 그 사람들 중에는 당신도 포함되어 있어요, 사쿠사 상. 드디어 함께 배구를 하는 날이 왔다고요. 그러니까…….






“…오늘도 즐겁게, 같이 배구를 해야지.”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렸다. 오는 내내 떠올렸던 과거의 회상은 다시 접어 넣고, 웅장한 훈련장을 올려다보다가 꾸벅 인사를 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눈부시게 느껴지는 햇살. 그 따스함이 기분 좋아 기지개를 쭈욱 켜고 있자면,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가 있었다.






“여, 쇼요 군~”

“아! 아츠무 상! 좋은 아침이에요!”

“어엉, 좋은 아침. 본가는 잘 다녀왔나.”

“네! 아침에 막 도착해서 곧바로 왔어요!”






저지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은 채 걸어오던 아츠무 상이었다. 오늘도 멋있게 세워 올린 머리 스타일이 눈에 띄었다. 터벅터벅 다가온 아츠무 상은 자연스레 내 어깨에 손을 올리시곤 말을 이어갔다.






“맞나. 내 주말 동안 쇼요 군이 숙소에 없어가 너무 외로웠다.”

“에이, 아츠무 상도 주말에 신나게 고기 구워 드셨잖아요.”

“누가 그런 고급 정보를 흘렸는데? 봇군이가.”

“이누나키 상이요!”

“아…. 이누 상은 왜 숙소에 없던 애한테 그런 말을. 쇼요 군, 쇼요 군도 다음에 꼭 같이 먹자.”

“괜찮아요~ 고기 유통기한이 얼마 안 남아서 어쩔 수 없었다면서요. 그리고 저도 본가에서 맛있는 거 잔뜩 먹고 왔어요!”

“맞나. 그러면 다행이고. 그런데 쇼요 군은 안 들어가고 여 서서 뭐하고 있었는데.”

“어… 오늘도 모두랑 같이 즐겁게 배구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인사하고 있었어요.”

“누구한테?”

“……훈련장의 요정한테?”






아츠무 상의 손을 어깨에 얹은 채로 앞으로 걸어갔다. 나보다 보폭이 넓어 빠르게 걸어가는 아츠무 상에게 속도를 맞춰 조금 빠르게 걸었다. 내 말을 들은 아츠무 상은 “그런 것도 있나. 뭐, 미야기 전설이가.”라며 웃었다.






“그런 느낌 들지 않아요? 저는 웅장한 훈련장을 올려다 볼 때마다 매일 이렇게 인사하게 되던데.”

“웅장? 요게 뭐 웅장까지야…. 아아~ 우리 쇼요 군한테는 그래 보일 수도 있겠네. 그치, 쇼요 군한테는 그래 보이겠다. 웅장.”

“아츠무 상. 뒤에 이누나키 상 계셔요.”

“뭐?! 어, 언제부터! 아, 이누 상! 내 그게 아니라…!”

“농담이에요.”






키득거리며 웃었다. 키 이야기로 장난을 치실 때마다 이누나키 상이 나타나면 곧바로 당황하는 아츠무 상을 알고 있기에 가능한 작은 복수였다.



내 말에 화들짝 놀라 뒤를 바라봤던 아츠무 상이, 조금 더 세게 어깨를 다시 감아오며 내 이름을 불렀다.






“쇼요 군~ 내 진짜 놀랐다. 하여간, 쇼요 군은 장난이 안 먹힌다니까.”

“장난이 안 먹힌다고 하는 것치곤, 매일 장난치시지 않아요?”

“그거야, 쇼요 군이 좋으니까.”

“좋아하는 사람한테 장난치는 건 초등학생이나 하는 짓이라던데….”

“그럼 내 초딩 하지 뭐.”






훈련장 내로 들어선 후, 각자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증을 꺼내어 게이트를 통과했다. 잠시 떨어졌던 아츠무 상의 손이 다시 어깨 위로 붙고,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는 동안 우리는 잡담을 나누었다.






“쇼요 군은 보면 사람을 너무 잘 파악하고 있다니까? 내가 누구한테 약하다든지, 그런 거 다 알고 있고. 가끔 보면 무섭다 무서워.”

“제가요?”

“엉. 우리들이랑 함께 보낸 시간이 가장 짧은 건 쇼요 군이지만, 아마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것도 쇼요 군일 걸. 입맛이라든가 취향 같은 것도 잘 알고…. 내는 생일도 다 못 외워가 니 들어오기 전에는 주장 생일도 당일에 기억했다. 지금은 쇼요 군이 미리 준비하는 거 옆에서 보고 ‘맞다.’ 하고 떠올리는 거제.”

“그런가요…? 음, 그냥 같이 지내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되지 않나요? 뭘 좋아하시고 뭘 싫어하시는지 알면 함께 지내면서 배려하는 데에 더 도움이 되기도 하고.”

“타고난 센스인 거다, 센스. 내는 그런 거 신경 쓰려고 해도 안 되거든. 물론 신경 쓸 생각이 많은 것도 아니고. 그냥 트러블 없을 정도로만 살면 되지 않나 싶은데, 또 트러블이 생긴다고 해도 굳이? 피할 생각은 없고?”

“아하….”

“쇼요 군, 방금 내 성격 나쁘다고 생각했제.”

“어? 어떻게 아셨어요? 아츠무 상도 다른 사람 잘 파악하고 계시네요!”






장난으로 대답하자 너무하다며 짐짓 우는 소리를 내는 아츠무 상이 있었다. 그 모습에 정말 농담이라는 말을 반복하고 나서야, 어깨 위에 올려진 아츠무 상의 손에서 힘이 풀어졌다.







“그래서? 쇼요 군이 보기엔 우리 중에 누가 가장 알기 쉽나.”

“알기 쉬운 사람이요? 팀원들 중에?”

“엉. 내는 처음엔 봇군이라 생각했거든? 그런데 지금은 봇군이 가장 알기 어렵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통 맥락을 알 수가 없다. 아, 오미 군도. 금마는 그냥 늘 텐션이 낮고 까칠한데다가 말도 많지 않아가 뭐 알 수가 있어야제. 둘 다 극과 극이라 쇼요 군 오기 전에는 그 둘 사이에서 내 혼자 힘들었다….”

“어… 그래요…? 보쿠토 상은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오미 상은 비교적 훨씬 잘 알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미 군이? 매번 무표정 아니면 인상 쓰는 것뿐인데? 게다가 거의 늘 혼자 떨어져 있으려 하고.”

“오미 상이요? 오미 상 표정 꽤 풍부하신데? 종종 웃기도 하시고.”

“뭐?”






우뚝, 아츠무 상이 갑자기 멈춰 섰다. 따라서 그의 발걸음에 맞춰 총총총 빠르게 걷고 있던 나 또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오미 군이, 뭐? 표정이 풍부해? 종종 웃어? 쇼요 군, 농담도.”

“네? 진짜인데요? 농담 아닌데….”

“금마가 무슨 표정이 풍부한데. 아니면 뭐, 쇼요 군은 룸메라 여러 표정을 볼 수 있다, 뭐 그런 거가. 내는 아직도 오미 군이 웃은 걸 본 기억이 없다.”

“에이, 그럴 리가요. 오미 상이 웃는 순간이랑 안 웃는 순간의 경계가 커서 그렇지, 나름 잘 웃으시는데?”

“왐마야…. 쇼요 군, 세상을 너무 긍정적으로 보는 것 같은데.”






금마가 잘 웃는 거면, 내나 봇군은 웃음가스에 절여진 인간이겠네―. 아츠무 상의 표현에 두 눈을 깜빡였다. 서로가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 한다는 표정이었다. 내 말을 농담, 혹은 오미 상을 포장해주는 말 정도로 받아들인 듯한 아츠무 상은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 그를 따라 나 또한 빠른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그런가? 오미 상이 그렇게 잘 안 웃는 편인가? 물론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잘 웃는 건 맞지만, 그래도 요즘에는 나름 자주 웃으시던데…?






“그러고 보니 예전에 사무가 훈련장 왔다가 오미 군 본 적 있었거든. 그 때 사무가 내 있는 곳 몰라가 물어보려고 했었다는데, 오미 군이 누가 다가와서 말 걸면 인상 팍 쓰고 경계한다이가. 그래서 그 때 자기를 싫어하나 싶었다고 하데. 금마는 그게 기본인데.”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다가와서 놀라신 건 아니고요?”

“아이다. 모를 리가 없제. 전에 몇 번 얼굴은 봤을 걸.”






어느새 라커룸의 문이 보였다. 아츠무 상은 여전히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이어가고 계셨다. 오미 상, 라커룸에 계시지 않으려나? 이런 이야기 들으면…… 아니, 들어도 신경 안 쓰시려나?



당사자 없는 곳에서 당사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니 왠지 조심스러웠다. 물론, 아츠무 상이 어떤 악의를 담아 한 말은 아닐 테고, 오미 상도 크게 신경 쓸 내용의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괜히 조심스러운 마음이었다.




어느새 도착한 라커룸의 문 앞. 안에서 보쿠토 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옆에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는 아츠무 상 대신,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힘을 주어 문을 열었다. 문의 반대편에서 누군가가 나와 마찬가지로 문고리를 잡고 있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 때 사무가…… 어, 오미 군. 어디 가나.”






문을 열자마자 마주친 것은 오미 상이었다. 문고리를 쥐고 문을 열려고 하셨던 모양인지, 나와 똑같은 자세로 손잡이를 잡고 있던 모습이었다. 주말 동안 본가에 내려갔다 와서 오랜만에 보는 오미 상. 평소보다 더 반가운 느낌에 잽싸게 말을 붙였다.





“어? 오미 상, 벌써 스트레칭 가세요? 옷 빨리 갈아입으셨네요?”





하지만 오미 상은 대답이 없었다. 시선이 나에게 머물러있는 것으로 보아 내 말을 못 들으신 것 같진 않은데, 뭔가 다른 생각이라도 하고 계신 듯한 느낌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거지? 지금 스트레칭 나가시는 건 맞겠지? 아무런 반응 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 오미 상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처음 블랙자칼에 입단했을 때 한 스태프 분께서 대화를 걸어오셨던 일이 떠올랐다.

 





“히나타 선수는 사쿠사 선수랑 같은 방을 쓰고 있죠?”

“네? 아, 네! 사쿠사 상이랑 룸메이트예요!”

“그렇구나. …사쿠사 선수랑 소통은 괜찮죠?”

“소통이요? 어… 어떤 소통이요? 잘 지내고 있는데….”

“그게, 사쿠사 선수는 가끔 대답을 안 하거나 반응이 없을 때가 있거든요. 그렇다고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그저 그런 성격인 것 같더라고요. 저희들도 사쿠사 선수가 가끔 대답이 없으면 ‘대답하기 싫은가 보네.’라거나 ‘피곤한가 보다.’ 하고 넘기고 있어서…. 히나타 선수는 사쿠사 선수랑 룸메이트라고 하길래요. 혹시나 상처받는 일이 생길까 봐 미리 알려주려고요.” 

 




그 때의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는 머지않아 알 수 있었다. 당시에는 ‘오미 상’도 아니고 ‘사쿠사 상’이라 불렀던 관계. 지금보다 훨씬 상대방을 모르고 있던 내가 이런 저런 말을 걸면, 그 열 번 중 한 번은 느린 반응이 돌아오곤 했다. 그 때마다 차츰 ‘이게 그 때 말씀하신 ‘그런 성격’이라는 건가…?’ 하며 오미 상과의 대화에 적응하려 했다.




그 뒤로도 줄곧 오미 상에 대해 조금씩 조금씩 알기 위해 노력했다. 눈으로 살피고 말에 귀 기울이고 반응을 느끼며. 그러다 보니, 스태프 분의 말이 사실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어렵지가 않았다.



오미 상은 대답을 안 하거나 반응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간이 걸리더라도 착실하게 대답을 해 주고, 아주 작게나마 진실된 반응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사쿠사 상. 오늘 날씨가 무척 좋아요! 햇살이 제법 뜨겁더라고요!”

“…….”

“이따 훈련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더 뜨거워지겠어요.”

“…….”

“그러고 보니 브라질에 있을 때는 이것보다 훨씬 더워서 꽤 힘들더라고요. 비치발리볼은 모래사장 위에서 하니까 더 덥고…. 지금처럼 실내에서 훈련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 있는 건, 진짜 감사한 일인 것 같아요.”

“…….”

“…….”

“……야. 너 그냥 나가게?”

“네, 네? 저요? 왜요?”

“햇살 뜨겁다며.”

 





같은 방을 쓰던 초반. 아침 러닝을 마치고 돌아와 재잘재잘 떠드는 나에게 별다른 대꾸 없던 오미 상이 건넨 것은 선크림이었다. 오미 상이 자주 사용하던.

 




“더 타기 전에 바르고 나가.”

“아…. 감사합니다!”

 





브라질에서 사 온 선크림이 잔뜩 남아있다는 얘긴 굳이 꺼내지 않았다. 처음으로 오미 상이 먼저 보여준 반응이 감사하고 기뻐서, 그런 이야기는 삼킨 채 꾸벅 인사를 하며 웃었었다. 그리곤 선크림을 바르며 신이 난 채로 이런 저런 질문을 던졌었지.

 




“이거, 사쿠사 상이 평소에 바르는 선크림이죠? 사쿠사 상은 엄청 하얀 편이신데 옛날부터 선크림을 잘 바르신 거예요? 저는요, 브라질 가서 처음에는 선크림 안 바르고 다녔다가 잔뜩 타고 나서야 정신 차리고 발랐거든요. 그 때 탄 자국이 아직도 남아서 어깨에 민소매 라인이 그대로 있어요! 와, 이거 발림성 되게 좋네요! 맞다, 사쿠사 상은 이미 바르셨어요? 목 뒤 같은 데 바르기 어려우시면 제가 발라드릴까요?”

“야.”

“넵?”

“너, 말이 너무 많아.”

 





아침부터 지나치게 떠들었나 싶은 생각에 아차, 하며 급히 입을 닫았었다.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오미 상이 했던 말은 예상 밖의 것이었지.

 





“앗…. 죄송해요! 아침부터 너무 시끄러웠나요?”

“시끄럽단 뜻은 아니고.”

“자중할게요!”

“…….”

“…….”

“…그렇게 한꺼번에 많은 말을 하면 듣고 대답하기 어려우니까. 하나씩 차근차근 말해. 유치원 다녀오고 신나서 하루 일과 떠드는 유치원생도 아니고 뭐야, 그게.”

 






시끄럽다거나 말을 줄이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씩 차근차근 하라는 말. 비록 그 뒤에 붙은 말투는 부드럽다거나 상냥하다고 표현하기엔 어려웠지만, 그 속에 담긴 마음은 결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까칠하고 네거티브한’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금세 오미 상의 진짜 모습을 알아갈 수 있었다.

 





“히나타. 혹시 아까 청소하면서 내 쓰레기통도 비웠… ……뭐하는 거야.”

“앗, 사쿠사 상. 씻고 오셨어요?”

“어. 넌 뭐하고 있는 거야. 선크림은 왜 이렇게 많고.”

“아, 그게…. 사실 제가 브라질에서 귀국할 때 선크림을 잔뜩 사 왔거든요. 거기에서 쓰던 것들이 국내에선 안 파는 것 같길래요. 그런데 지금 보니까 유통 기한이 어느 정도 남았는지 모르겠어서 일단 꺼내서 하나씩 확인하고 있었어요. …아, 그리고 사쿠사 상 쓰레기통은 아까 제가 제 쓰레기통 비우면서 같이 비웠는데…. 혹시 뭐 중요한 거라도 들어 있었나요? 멋대로 비워서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해요. 드물게 꽉 차 있길래 비우는 거 깜빡하셨나 보다 해서 고민하다가 비웠거든요. 다음부터는 그냥 두는 편이 나으실…까요…?”

 





선크림이 이렇게나 많은데도 지금까지 오미 상이 건네는 선크림을 넙죽 넙죽 받아서 사용한 게 조금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좋은 의도였다곤 하지만, 자신의 쓰레기통을 멋대로 비운 것에 대하여 오미 상이 불쾌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실수를 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바닥에 늘어놓은 선크림을 내 쪽으로 더 끌어오며 슬쩍 눈치를 살폈지만, 오미 상의 무표정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았다. ‘요즘 조금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이 일로 불편해하시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한 번 사과를 건네려던 찰나, 살짝 인상을 찌푸린 오미 상이 내 앞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이거, 이거, 이거. …그리고 이거랑 이것도, 전부 버려.”

“어… 얘네 전부 다요?”

“어. 다 개봉한 거잖아. 한 번 개봉한 제품은 표기된 것보다 유통기한이 짧다고 생각하고 그냥 버려. 너 어차피 개봉 날짜도 기억 못 할 거 아냐.”

“기억… 못 하죠.”

“여기 이것들처럼 기한이 애매하게 남은 것도 싹 다 버리고. 괜히 아깝다고 썼다가 피부만 버려. 그리고 다음부터는 개봉한 날짜를 표시해 놔. 지금처럼 고민하지 말고.”

 





선크림 몇 개를 손으로 가리키며 골라낸 오미 상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꾸욱 누르며 일어섰다. 그리곤 자신의 침대 쪽으로 걸어가 앉는 그 모습에, 나는 감사 인사를 건넸다.

 





“아… 넵!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지금까지 선크림 빌려주셨던 것도 감사하고요. 기껏 마음 써서 빌려주시는데 제 것도 많다며 거절하기가 조금 그래서 쓴 거라…. 사쿠사 상 선크림 다 떨어지시면 제 선크림 잔뜩 쓰셔도 돼요!”

“굳이. 나도 내 거 있는데.”

“그래도 지금까지 제가 사쿠사 상 선크림 자주 빌렸으니까요!”

“딱히 신경 안 써. 선크림 닳는 게 아까웠으면 애초에 내가 너한테 먼저 건네지도 않았겠지. 그런 거 아까워하는 사람은 아니라.”

“아아…. 그럼! 나중에 혹시라도 사쿠사 상이 놓고 오시면 제 거 막 편하게 쓰세요! 사쿠사 상 물건인 것처럼 쓰셔도 되고, 말 안 하고 쓰셔도 괜찮아요!”

“그건 좀.”

“아…. 역시 그건 조금 그런가요…?”

 




조금 부담스러우셨나 싶은 생각에 머쓱하게 웃었다. 아직 조금 어려운 거리감을 조정하는 데에 도움이 될까 싶어 ‘오미 상은 이런 행동은 괜찮아 하시지만, 요런 행동은 부담스러우신가 보다.’ 하며 나름의 정보를 쌓던 그 때, 오미 상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 아무리 그래도 네 건데, 내가 말도 안 하고 쓰는 건 조금 그런데. 선크림이야 기본적으로 매일 쓰는 거라 그럴 가능성은 없지만, 혹시라도 놓고 오거나 다 닳았을 때는 빌릴게.”

“앗, 넵! 좋아요! 완전 좋아요!”

“완전 좋을 것까지는…. ……아, 맞다. 그리고―.”

 




쓰레기통 비워준 건 고마워―.

 




“안 그래도 오늘 아침에 비우려다가 피곤해서 저녁에 돌아온 후에 비우려 했던 거라.”

“어… 기분 상하셨던 게 아닌 건가요…?”

“딱히? 비워져 있길래 조금 놀라긴 했는데, 기분 상한 건 아니니 신경 안 써도 돼.”

“다행이네요…! 저는 또, 뭔가 중요한 게 들어있진 않았을까 했거든요.”

“…쓰레기통에? 내가 그런 데에 중요한 걸 넣을 사람으로 보이나 봐?”

“아,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실수로 메모지를 떨어뜨렸다거나, 그런 상황이요…!”

“실수로 메모지를 왜 쓰레기통에 떨어뜨려. 그럴 일 없어. 다만, 네 쓰레기통 청소하는데 굳이 내 것까지 신경 써줄 필요는 없으니까 다음부터는 그냥 둬도 돼.”

“어차피 비우는 김에 같이 비우는 것뿐인데도요?”

“계속 그러면 네가 쓰레기통을 비우는 게 당연한 일인 것처럼 굳어질 거 아냐. 그건 썩 유쾌하진 않아서. 정 그러고 싶다면 너랑 나랑 번갈아가며 비우든가. 아니면 내가 담당할 일을 따로 주든가 해.”

 




히나타 너랑은, 아마 꽤 오래 같은 방을 쓰게 될 것 같으니까―.

 





그 이후로, 나는 정말 오미 상과 쭉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시간만큼, 나는 오미 상에 대하여 더 잘 알 수 있었고.



오미 상은, 내가 혼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마다 아무런 반응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내 이야기를 다 귀담아 듣고 머릿속으로 생각해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물론 종종 보쿠토 상이나 아츠무 상의 장난에는 “대답할 가치가 없는 말이네.”라며 신랄한 반응을 내보이곤 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상대방의 말을 무시하고 넘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대답할 가치가 없는 말이라고 느끼면서도 “대답할 가치가 없어.”라고 반응은 해주시는걸.



뿐만 아니라, 내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면 자신의 솔직한 의견을 들려주거나 조언을 해 주고, 나의 작은 호의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고 고마움을 표현하며 다른 호의로 돌려주었다. 그런 면을 지닌 사람이, 바로 오미 상이었다.




그러니 그런 오미 상이 지금처럼 대답이 없을 때는 나를 무시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생각을 하느라 반응이 느린 것이라 생각했다. 오미 상은 신중하시니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적어도 나는 늘 그렇게 믿어왔다. 그리고 그런 내 믿음을 한 번도 배신하지 않는 오미 상은, 나의 두 번째 물음에는 반응을 해주시곤 하였다. 지금처럼.






“오미 상?”

“……어.”

“좋아! 저도 얼른 갈아입고 따라갈게요! 오늘도 같이 허리 꾹꾹 해요!”

“…상황 봐서.”

“네!”






이것 봐. 늦더라도, 짧게라도 늘 대답을 해주시는걸!




예상대로의 반응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오미 상에게 말했던 것처럼 얼른 옷을 갈아입기 위하여 아츠무 상과 함께 라커룸 안으로 들어섰다.



스쳐 지나간 오미 상으로부터는 특유의 향이 났다. 운동 전에 향수를 뿌리시는 것도 아닐 텐데, 오미 상에게는 늘 기분 좋은 향이 묻어났다. 아마도 유니폼 세탁 때마다 넣는 섬유유연제의 향이겠지. 나는 그 향을 제법 좋아해서, 오미 상과 스쳐 지나갈 때면 조금 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곤 했다.






“쇼요 군은 참 성격도 좋아.”






옆에 서 있던 아츠무 상이 말했다. 그 말 속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아, 눈을 깜빡이며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저요? 저 그렇게 좋지만은 않은데? 오미 상이랑 스트레칭하면 몸 구석구석이 시원하게 풀려서 좋거든요. 제가 오미 상 이용하는 거예요!”

“맞나. 그럼 내랑은? 내랑 하는 스트레칭은 덜 시원하나.”

“아츠무 상이랑 하는 스트레칭도 좋죠!”

“히나타, 나는!?”

“보쿠토 상도 당연히 좋아요!”

“그냥 다 좋은 것 같은데.”

“그건 아니에요! 저도 좋은 것만 좋다고 말하고 빈말은 잘 안 한다고요!”

“맞나.”






뭔가를 손에 쥔 채 읽고 있던 보쿠토 상까지 합세하자 라커룸 안이 금방 활기를 띄었다. 그 목소리들 사이로, 문을 쾅 닫고 나가는 소리가 섞여 들었다. 문을 등지고 서 있던 아츠무 상이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았다. 문을 닫고 나서는 오미 상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 또한, 예상치 못 한 큰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깜빡였다.



오미 상, 뭔가 기분이 안 좋으신가…. 확실히, 평소보다 좋아보이진 않으셨지….






“그나저나 봇군은 뭐 읽고 있는데.”

“나? 이거!”

“그러니까 그게 뭔데. …어, 그거 벌써 나왔나. 쇼요 군 잡지.”

“어? 제 잡지예요?”

“응! 히나타 인터뷰 잘 했네! 사진도 멋있다!”

“내도 볼란다, 내도. 우리 쇼요 군의 첫 잡지 인터뷰. 내만큼 안 떨고 잘 했나 봐야제.”






아츠무 상의 말에 스태프 분이 해주셨던 말씀이 떠올라 웃음을 참았다. 지금까지 본 스포츠 선수 분들 중 손에 꼽게 긴장한 사람이 아츠무 상이었다는 말씀.



그렇게 웃음을 참으며 옷을 갈아입는 동안, 보쿠토 상과 아츠무 상은 내 인터뷰가 실린 잡지를 읽고 계셨다. 나는 훈련이 끝나면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환복을 마무리하고 있을 때쯤, 아츠무 상이 흡족스럽다는 미소를 띤 채 나를 바라보았다.






“쇼요 군~ 내가 그리도 형 같나! 내도 쇼요 군 같은 동생 있으면 지인짜 좋겠네~”

“응? 츠무츠무한테는 미야사무가 있잖아?”

“아, 금마는 쇼요 군처럼 귀염성이 있는 것도 아이고 성깔만 있다이가.”

“성깔은 츠무츠무가 더한 것 같은데.”

“봇군!?”






두 분의 대화를 듣자 하니, 어떤 질문과 답변을 읽고 계셨던 건지 파팟 느낌이 왔다. 그 질문도 역시 실렸구나…. 나 그 때 엄청 횡설수설했었는데 답변 괜찮게 나왔을까? 문득 궁금해져 결국에는 나도 잡지를 읽고 계신 두 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페이지만 빠르게 보고 얼른 나가야지. 오미 상 벌써 도착하셨겠다.






“저도 잠시만 봐도 되나요?”

“그럼! 히나타 잡지인데! 아, 이거 말고 저기 한 권 더 있어! 아까 오미오미가 읽다가 내려놓은 거!”

“어? 오미 상도 읽으셨어요?”

“나 오니까 이미 먼저 읽고 있던데?”

“금마 이런 거 안 읽을 것 같이 굴면서 이번에는 가장 먼저 봤나 보네. 전에 내랑 봇군 잡지는 끝까지 안 읽었다 하지 않았나.”

“그랬나? 기억 안 나!”

“그렇겠제…. 봇군이 기억할 리가 있나….”

“내 잡지는 내가 많이 읽고 있으니 괜찮아! 어젯밤에도 세 번 읽고 잤어!”

“그거 1년 전 잡지 아이가. 언제까지 읽는 건데.”






보쿠토 상이 가리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동일한 잡지 한 권이 더 놓여 있었다. 구단 스태프 분께서 두 권을 가져오신 모양이었다. 걸음을 옮겨 오미 상이 읽고 있었다던 그 잡지를 들었다. 오미 상의 성격답게 읽은 티 하나 남지 않은, 새 것 같은 잡지였다.



오미 상이 이 잡지를 먼저 읽고 계셨다니. 내가 알기로도 오미 상은 딱히 이런 잡지를 읽는 편이 아니신데? 어느 페이지를 보신 거지?



호기심을 안고 잡지를 펼쳤다. 어렵지 않게 내 인터뷰가 게재된 페이지를 찾았다. 그리곤 궁금함의 대상인 그 질답이 있는 페이지로 장을 넘겼다.






“아, 여기 있다.”

 




Q. MSBY 블랙자칼에서 사랑받는 막내 포지션으로 유명하다. 팬들 사이에서는 MSBY 블랙자칼을 한 가족으로 비유하기도 하던데, 본인이 생각하는 각 선수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A. 입단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늘 모두가 많이 챙겨주시고 배려해주셔서, 사랑받는 막내로 비유되는 것 같아요. 아츠무 상 말로는 키 때문에 더 그래 보이는 거 아니냐고 하던데…. (웃음) 가족에 비유를 한다면 역시 아빠는 메이안 상, 엄마는 이누나키 상이려나요! 토마스 상은… 삼촌…? 왠지 이누나키 상 쪽의 젊은 삼촌일 것 같아요. 나이 차이가 많이 안 나서 같이 잘 놀아주는 삼촌 있잖아요. 그런 느낌? (웃음) 보쿠토 상이랑 아츠무 상은 역시 형 같은 느낌! 두 분 다 전부터 알아서 그런지 편하게 잘 대해주시고 종종 같이 놀러 다니기도 하거든요! 그리고 오미 상은, 음……

 





“아…….”

 




A. 그리고 오미 상은, 음…… (침묵) …옆집에 사는 형……? 엘리베이터 같이 타서 인사드리면 고개만 끄덕이고 아무 말 안 하지만, 내릴 때 되면 먼저 내리라는 듯 뒤에서 기다려주는, 그런 형…? 그런데 제가 의도를 이해 못 하고 왜 안 내리시냐고 여쭤보면 빨리 내리기나 하라는 것처럼 눈짓 주실 것 같고!

 





“…진짜 잘 정리해서 올려주셨네. 게재하지 말아달라고 부탁드렸던 부분도 딱 빼주셨고….”






친절한 스태프 분의 얼굴이 떠오르며 감사함이 느껴졌다. 인터뷰 당시에 기나긴 답변을 해 놓고 막상 오미 상이나 다른 분들이 읽는다 생각하니 마음이 이상했던 부분. 오미 상을 옆집 형에 비유한 이유에 대한 설명이 전부 말끔하게 제외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그런 이야기는 주고받은 적 없다는 듯이.






“이따 숙소 가서 마저 읽고 꼭 감사 메일 보내야겠다.”






당장 확인하고 싶었던 부분을 읽고 나자, 곧바로 라커룸에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오미 상이 나가신 지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오미 상은 원래 혼자 걸을 땐 걸음이 빠른 편이시니 이미 훈련장에 도착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저 먼저 가 있을게요!”

“어야. 우리도 금방 갈게~”

“넵!”





그렇게 인사를 남기고 라커룸을 빠르게 빠져 나왔다. 고요한 복도에 평소보다 빠른 나의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미 상 벌써 스트레칭 시작하셨으려나….”





사실 꼭 오미 상과 시간을 맞춰 스트레칭을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개인 스트레칭은 각자 진행하는 것이었고, 두 명이서 함께 진행하는 파트너 스트레칭 또한 정해진 파트너가 자리에 없을 경우에는 다른 상대와 진행해도 크게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나의 파트너, 그러니까 즉 오미 상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에, 늘 다른 분들보다 먼저 스트레칭을 하러 가곤 했다. 그러나 딱 한 번, 오늘처럼 본가에서 잤다가 바로 훈련장으로 왔던 날, 교통편 지연 문제로 스트레칭 시간에 늦은 적이 있었다. 그 때의 나는 빠른 걸음으로 내달리면서도, 당연히 오미 상이 다른 분과 파트너 스트레칭을 하고 있을 줄 알았었다.

 




“헉… 허억… 느,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 왔어? 방금 막 전해 들었어. 기차가 지연되었다면서.”

“네, 갑자기 지연되는 바람에…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아.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무사히 왔으니 다행인 거지. 아, 다음부터는 스태프께만 말씀드리지 말고 우리 단체방에도 연락 하나 남겨줘. 스태프께서 방금 막 말씀해주셔서 그 전까지 모두 걱정하고 있었거든.”

“앗, 네! 그럴게요!”

“히나타~ 우리는 스트레칭 마쳤으니까, 히나타도 저기 가서 스트레칭 하고 합류해.”

“쇼요 군, 빨리 마치고 들어온나!”

“네!!”

 





하지만 그 날, 나와 이웃한 포지션의 오미 상은 평소보다 조금 덜 유연한 움직임을 내보이셨다. 혹시 몸이 안 좋으신 건가 싶어 물었을 때, 오미 상이 아닌 이누나키 상으로부터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오미 상, 혹시… 오늘 허리가 안 좋으신가요?”

“아니. 왜.”

“아아, 뭔가… 평소보다 허리가 조금 덜… 자유로운?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덜 풀린 것처럼 보여서요. 제 착각이었나 봐요! 죄송해요!”

“…….”

“것 봐, 사쿠사. 내가 아까 나하고라도 스트레칭 하자고 했지? 지금이라도 가서 몸 좀 더 풀고 와. 히나타, 네가 가서 도와주고.”

“괜찮은데요.”

“괜찮기는. 스스로도 느끼고 있지 않아? 지금 평소보다 몸이 덜 풀렸다는 거.”

“…….”

“어? 오미 상 오늘 스트레칭 못 하셨나요? …혹시 제가 늦은 것 때문에?”

“아냐, 그런 거.”

“맞아, 히나타가 늦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렇다기보단… 사쿠사가 고집 좀 부렸지. 히나타 네가 늦을 리 없다고 금방 올 것 같다면서 기다리겠다 하더라고. 그래서 우리들끼리 먼저 파트너 스트레칭 마쳤는데, 그제야 뒤늦게 스태프께서 히나타가 많이 늦을 것 같다고 알려주시더라고. 내가 같이 해주겠다는데도, 다른 사람들은 이미 스트레칭 다 마쳤으니까 먼저들 시작하라고 자기는 따로 하겠다고 하던 찰나에, 히나타가 딱 온 거고.”

“아아…. 결국 제가 늦은 바람에 이렇게 된 거네요. 죄송해요, 진짜….”

“됐어. 네가 잘못해서 늦은 것도 아니고. 나도 개인 스트레칭을 오래 하느라 파트너 스트레칭을 할 시간이 부족했던 거야.”

“무슨? 사쿠사 너 나랑 같이 시작해서 같은 시간에 개인 스트레칭 끝냈으면서?”

“어… 그러셨군요….”

“…애초에 내가 다른 사람이랑 스트레칭하면 평소 패턴이나 높낮이랑 달라서 불편할까 봐 안 한 거였어.”

“그래도….”

“됐다니까. 정 미안하면, 지금이라도 스트레칭 도와.”

 



그래야 다음 세트에 제대로 반격하지―.

 







“확실히, 파트너 스트레칭은 매일 같이 하는 상대방과의 호흡이 중요하지…. 나도 오미 상의 높이나 세기에 맞춰 스트레칭 했을 때가 가장 몸이 잘 풀린 느낌이고.”





그러니 얼른 가자. 오미 상을 기다리게 하지 말아야지.



조금 더 속도를 올려 복도를 걸어갔다. 거의 가볍게 뛰는 수준이 되었다 싶을 때쯤, 저 멀리서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복도 중간에 멈춰 선 오미 상이었다.




어? 왜 저기에 서 계시지?






“오미 상! 아직 여기 계셨네요?”

“…….”

“다행이다. 벌써 스트레칭 시작하셨을 줄 알았는데.”






반가운 마음에 힘껏 오미 상을 불렀다. 옆에 나란히 서서 올려다보자, 어떻게 벌써 왔냐는 듯이 의아함을 품은 표정의 오미 상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다른 녀석들은.”

“보쿠토 상이랑 아츠무 상이요? 두 분 다 아직 옷 갈아입는 중이에요. 오미 상 혼자 스트레칭 끝내실까봐 저 먼저 빨리 옷 갈아입고 따라왔어요!”

“…개인 스트레칭은 원래 각자 하는 거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같이 시작하면 파트너 스트레칭 타이밍이 딱 맞아서 좋잖아요. 저번에는 제가 늦는 바람에 기다리시다가 결국 파트너 스트레칭은 대충 하셔서 허리 덜 풀리셨고.”

“…너 기다린 거 아니었어. 그 날만 개인 스트레칭을 오래 한 것뿐이야.”

“그래요? 아무튼! 오늘은 제가 확실하게 꾹꾹 눌러드리겠습니다! 자, 가시죠!”





저만 믿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런 의미를 담은 웃음을 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오미 상이 왜 여기에 서 계셨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렇게 따라 잡아서 같이 스트레칭을 시작할 수 있단 사실에는 내심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일까. 평소보다 조금 더 가벼운 발걸음으로 복도를 걸어 나가면, 한두 걸음 뒤에서 따라 오는 오미 상의 기척이 느껴지는 것도 왠지 모르게 좋게 느껴졌다.



원래는 오미 상 걸음이 훨씬 빠른데 지금은 내가 더 앞에서 걷고 있네. 그래서 더 기분이 좋은 건가? 처음으로 오미 상보다 앞서 걸어서? 하지만 평소에 둘이 걸을 때는 오미 상이 보폭을 맞춰주셔서 나란히 걸으니까, 오미 상보다 내가 뒤에서 걸은 적이 많지도 않았잖아? …그것보다, 오미 상은 왜 오늘따라 뒤에서 걸으시는 거지? 아까도 복도에 멈춰 계셨고. ……혹시 어디 아프신가? 허리가 불편하시다거나? 그래서 걷다가 멈춰 서 계셨던 건가?!




문득 생겨난 가능성에 갑자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라커룸에서 나갈 때도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았었지. 그런 생각까지 들자, 더욱 크기를 키운 걱정이 질문의 형태로 바뀌어 입 밖으로 나가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질문을 던지진 못 했다. 그러지 않았다. 운동선수들끼리는 서로의 컨디션이나 몸 상태에 대하여 함부로 말을 얹거나 걱정을 하지 않는 게 좋다는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몸 상태가 괜찮은 사람이 어딘가 아프냐는 말을 듣고 나면, 실제로 아프지가 않더라도 그 부위가 계속 신경이 쓰여 경기에 집중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나의 걱정이 괜한 오지랖이 될까 봐, 그래서 오미 상이 오늘 하루 동안 배구를 하는 데에 지장을 줄까 봐 섣부르게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걱정을 거둔다고 거둬지는 것도 아니니 참으로 난감했다.



결국 걸어가는 내내 오미 상에 대한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뒤에서 걸어오는 오미 상의 기척도 느끼지 못 할 정도로 생각에 몰두하고 있던 그 때, 오미 상이 갑작스레 나를 불렀다.






“야.”

“네?”

“…너….”





그리곤 내 뒷목에 닿는 커다란 손. 순간 온몸에 찌릿 소름이 돋았다. 살짝 뒤를 향해 돌렸던 고개는 물론이고, 두 어깨까지 흠칫 놀라는 것이 스스로도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 있는 상태였다. 말 그대로 정말, 정말 정말, 정말로 놀랐다, 나는. 그래서 제대로 말도 잇지 못 한 채 오미 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뭐, 뭐, 왜…….”

“…….”

“…….”

“…태그.”

“네?”

“옷 태그, 삐져나와 있었어.”

“…아…….”





이유를 듣자마자 뒷목으로 손이 향했다. 민망했다. 태그가 삐져나와 있었다는 사실도 그랬지만… 사실은 다른 이유로 더 민망함을 느끼고 있었다. 오미 상은 그저 태그를 집어 넣어주시려고 한 것뿐인데, 이렇게까지 크게 놀라버린 내 반응이 너무… 너무 너무 민망하고 창피하고 쑥스러웠다. 조금씩 구겨지는 오미 상의 모습을 보니 더욱 그러했다.






“그, 급하게 갈아입느라 제대로 확인 못 하고 나왔나 봐요!”

“나오기 전에 거울로 매무새 정도는 보고 나와.”

“네, 다음부터는 한 번 더 확인할게요!”

“…….”

“그… 감사해요, 오미 상! 신경 써주셔서!”

“…별로. 신경 쓴 건 아닌데. 그냥 눈에 보였던 거고.”






민망함을 몰아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웃었다. 이렇게까지 놀란 후에 웃는 건 조금 이상하려나 싶었지만, 그래도 오미 상이 신경 써주신 것이 기쁘고 감사했기는 했으니까.




나의 감사 인사에, 오미 상은 평소와 비슷한 대답으로 반응하였다. 이제는 앞뒤가 아닌 옆으로 나란히 걷게 된 상황에서, 나는 아직도 신경이 쏠린 뒷목을 매만지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도, 태그 계속 삐져나왔던 걸 다른 분들이 보셨으면 다들 또 애기 취급했을 걸요. 먼저 발견해준 게 오미 상이라 다행이에요!”

“…….”






너무 뒷목을 만지고 있으면 이상할 것 같아서 손을 내림과 동시에 나도 모르게 오미 상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웃고 있는 오미 상.




응? 갑자기 왜 웃으시지? 내가 뭔가 웃긴 말을 했었나…?






“어? 왜 웃으세요?”

“…안 웃었어.”

“방금 웃었는데?”

“안 웃었다고.”

“이상하다. 분명 웃은 것 같았는데….”

“너 투시해? 마스크 쓰고 있는데 웃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그야 오미 상은 웃을 때 눈도 같이 움직이니까요…?”






분명히 웃으셨는데 자꾸 아니라고 부정하시는 오미 상을 향해 내 나름대로의 근거를 제시했다. 그러자 잠시 멈칫하던 오미 상이 눈썹을 찌푸리며 다시 부정의 말을 내뱉었다.






“뭐래. 난 눈웃음친 적 없어.”

아잇, 억울하네!

“진짜인데! 눈웃음이 아니라요! 오미 상 웃을 때 눈동자가 그, 막, 어… 뭐라고 해야 하지? 막, 평소에는 땡그란 검은자가 고요하게 서 있다면, 웃을 때는 그 검은자가 더 부드럽고 상냥해진다고 해야 하나?”

“…뭐야, 그게. 전혀 모르겠어.”

“다음에 거울 보면서 혼자 웃어보세요! 진짜 눈이 다르다니까요?”

“몰라. 관심 없어.”






관심 없다니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다른 것도 아니고 본인 웃는 얼굴에 대한 이야기인데 너무 매정하시다…. 겉으로는 내뱉지 못 한 말을 속으로 삼켰다. 동시에, 왠지 모를 아쉬움도 함께 삼켜내야 했다.



오미 상은 오미 상 본인이 웃으시는 걸 진짜 모르시는 건가? 왜 모르시지? 아시면 좋을 텐데. 오미 상 평소에는 짙고 깊은 검은색 눈동자가 땡그랗게 커서 잔잔하고 고요한 느낌이지만, 웃을 때는 부드럽고 상냥한 느낌인데. 아쉽네. 그걸 왜 모르신담. 그 웃는 모습이 얼마나―.





……어? 얼마나…?






“그래서, 왜 웃으셨는데요?”

“안 웃었다고. 너 한 마디만 더 하면 스트레칭 같이 안 할 거야.”

“아아, 조용히 갈게요! 조용히!”

“…….”

“…진짜 안 웃었어요?”

“너 오늘 혼자 해.”

“아! 그만 말할게요!!”






두 손으로 내 입을 봉하듯 막았다. 그리곤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마지막 말을 거둬달라는 듯 오미 상을 바라보았다. 나를 내려다보던 오미 상의 눈이 살짝 움직이더니 다시금 고요함을 되찾고 앞을 향하였다. 그 모습에 나는 속으로 작게 안도하며, 그를 따라 앞을 바라보고 걸었다.




그러나 입을 막고 있는 두 손은 그 이후로도 조금의 시간이 더 흐른 후에야 떼어낼 수 있었다. 오미 상이 그만 말하라고 해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 머릿속에 떠올랐던 어떤 말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막기 위함이었다. 왜 웃으신 거냐고 재차 질문을 던졌던 것 또한, 갑자기 떠오른 그 ‘어떤 말’에 당황하여 급히 내뱉은 말이었다.




그래, 그 어떤 말. 어떤 생각.






‘오미 상이 웃는 모습이 얼마나… 멋있고, 계속 보고 싶은 모습인데….’






얼굴이 헛헛했다. 오미 상의 손이 닿았다 떨어진 뒷목에 이어서, 이제는 얼굴 전면이 뜨거운 느낌이었다. 한 번도 떠올려 본 적 없던 생각이 일으킨 반응이었다.




아닌가? 한 번도 떠올려 본 적 없던 게… 맞나…? 어쩌면 제대로 된 문장으로 떠올려 본 적이 없었던 것뿐이지, 사실은 오미 상이 웃는 모습을 늘 멋있고…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던 걸지도.



그래. 웃는 모습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도 있지 않나? 없나? 예전에 공부했던 것 같은데? 아무튼 그런 속담도 아마 있을 정도라면, 내가 오미 상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며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당연한 반응 아닐까? 그치?




나름대로 논리적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문득 오미 상의 표정이 궁금해져 슬쩍 시선을 대각선 위로 옮겼다. 그러자 딱 마주치는 두 눈.


한순간 직감이 들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대로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을 거라는 직감이. 그래서 때마침 보이는 코트를 향해 다시금 고개를 돌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내 안의 피어난 생각을 누를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






“오미 상! 오늘도 잘 부탁드려요!”

“……응.”






역시 그렇다. 오미 상은 조금 늦더라도, 그리고 조금 작더라도 꼭 반응을 해 주는 사람이다. 늘 내 이야기를 다 귀담아 듣고 머릿속으로 생각해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고, 나의 고민에 자신의 솔직한 의견을 들려주거나 조언을 해 주는 사람이다. 나의 작은 호의에도 고마움을 표현하며 다른 호의로 돌려주는 사람이, 바로 오미 상이다. 그리고…….






‘…오미 상은 멋있고 자꾸 보고 싶은 웃음을 짓는 사람.’






맞아. 오미 상은 그런 사람이야.




언젠가 소문으로만 들었던 이름의 전국적인 에이스 선배는, 어느새 같은 유니폼을 입고 함께 코트 위에 서는 동료가 되었다. 엇갈린 타이밍에 한 번도 네트를 사이에 두고 서지 못 했던 관계는, 좌석 팔걸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팀 차량에 앉는 사이로 변하였다. 함께 배구를 해 봤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은, 내일도 함께 배구를 하고 싶다는 기대감으로 바뀌었다. 몇 년이라는 시간이, 배구를 향한 각자의 노력이 맞닿게 한 인연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인연의 실이라는 게 있다던데. 우리에게도 그런 인연의 실이 있다면, 나는 그 인연은 실이 아니라 공의 형태를 띠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사이를 오고 가는 배구공.



내가 그 공을 손에 길들이고 공과 친구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나는 또 다른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나의 감정을 깨닫기까지의 시간을.

 




이 이야기는 나, 히나타 쇼요의 어느 감정에 대한 이야기.

 



함께 배구를 해 볼 기회가 없어 아쉽다는 마음과 언젠가는 같이 코트에 서 보고 싶다는 목표 의식에서 시작한 감정. 처음 인사를 나눈 날부터 쭉 눈을 마주하고 귀를 기울이고 함께 지내며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커져가는 호의와 애정 속에서 나도 모르게 느릿 싹을 틔운,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의 이 감정.

 





이것은 나의 첫사랑 이야기이다.

 

 

 

 

 

 


 

 



 

 

단순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심지어 같은 학년의 친구로부터는 ‘단순한 단세포 바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하지만 단순한 게 뭐 어때서? 단순하다는 건 나쁜 건가? 복잡한 것보다는 단순한 게 좋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며 살고 있던 어느 날, 누군가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히나타는 단순해 보이지만, 사실은 뭐랄까… 눈치가 없거나 분위기를 못 맞추지는 않지. 오히려 사람을 살피고 각자에게 맞춰서 행동하는 데에 능하지 않나? 그런 건 단순하게 살면서 가능한 건 아니니까.”

 





그 이야기를 듣고 생각했다. 단순하다는 건 눈치 없거나 분위기를 못 맞춘다는 뜻과 같은 걸까?



으으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사람을 살피고 각자에게 맞춘다는 건 달리 말하면, 어… ……배려? 맞아, 배려라고 생각한단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면, 단순하다고 해서 배려를 못 하는 건 아니지 않나…?



배려를 한다는 건 상대방의 기분을 신경 쓴다는 거니까. 누군가와 지내면서 그 사람이 기분 좋기를 바라는 것만큼 단순한 바람이 또 있을까? 말 그대로 단순하잖아! 나랑 있는 동안 기분이 좋았으면 하니까, 기분 나쁜 일이 없었으면 하니까, 같이 잘 지내면 좋으니까, 그 사람을 살펴보고 그 사람에게 맞춰서 행동하게 되는 건데.



어쩌다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나는 그렇게 생각해왔다. 사람은 모두 다양하고 다르다. 이는 코트 위에서의 플레이만 봐도 알 수 있다. 코트 위 여섯 명만 봐도 그런데, 코트 밖은 어떻겠는가. 이 세상은 모두 제각각인 사람들로 이루어져있다. 브라질에 처음 갔을 때 쉽게 적응하지 못 했던 것도, 내가 그곳의 사람들 틈에 녹아들 수 있는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이겠지.




열 명의 사람에게는 열 가지의 모습이, 백 명의 사람에게는 백 가지의 모습이 있다. 그러니 모두에게 동일한 배려를 하는 것은 진짜 배려가 아니라 생각한다. 누군가에게는 내가 먼저 다가가 말을 많이 거는 것이 배려가 되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시끄러운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반대로, 옆에서 조용히 지내며 필요할 때 적절한 도움을 주는 게 최선의 배려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관심이 없고 친해질 의욕이 없어 보인다는 느낌이겠지.



언뜻 보면 복잡해 보이지만, 실은 아주 간단한 것이다. 줏대 없이 다중인격처럼 산다는 게 아니라, 그 사람과 있을 때는 그 사람과 함께하는 그 순간에 집중하고 세심하게 살피며 진심으로 소통하면 된다. 진심으로 마음을 쏟고 정성을 들이면 그 사람에게, 그 상황에 필요한 게 무엇인지, 내가 무얼 할 수 있는지가 보인다. 단순히 내 몫이 될 토스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코트 전체를 넓게 바라볼 때 비로소 보이는 풍경이 있듯이 말이다. 이는 배구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아마, 지금도.






“다음은… 아이스크림만 사면 되겠네요!”

“어.”

“가져가는 길에 녹진 않겠죠? 스푼은 몇 개 부탁드릴까요? 인원수대로 하면 되나?”

“그래.”






선크림을 평소보다 더 덕지덕지 발라야 하는 시기가 오기 전, 어느 날의 오후. 아쉽게도 오전 일정만 있던 날이라 오후부터는 훈련을 하지 못 하고 숙소에서 쭉 쉬어야만 하는 날이었다. 왠지 다른 날보다 더 가볍게 뛸 수 있던 날이라 더 움직이고 싶었는데 “여기까지.”를 외치는 코치님의 말을 거스르고 무리를 할 수는 없어 조용히 흥분을 가라앉히고 숙소로 돌아왔었다.



가벼운 산책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러닝은 새벽에 했으니까 아주 가볍게 걷는 것 정도는 괜찮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컨디션을 체크할 때쯤, 마트에 다녀올 사람이 있냐며 메이안 상이 방에서 나와 사람들을 모았다. 푹푹 찌는 바깥의 더위 때문인지 모두가 달가워하시진 않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곧바로 손을 들어 심부름을 다녀오겠다고 자원했다.

 




“히나타가 간다고? 괜찮겠어? 가위바위보로 정해도 되는데.”

“맞아. 막내라고 굳이 네가 갔다 올 거 없어.”

“아니에요! 저 제가 가고 싶어서 가는 거라!”

“음…. 히나타 혼자서는 무리일 텐데. 다른 한 명은 가위바위보로 뽑아서 둘이 다녀오는 건?”

“저 혼자 다녀와도 괜찮은데요!”

“우리 살 거 엄청 많아. 그리고 어떻게 막내만 보내. 한 명 더 다녀오자.”

 





그런 맥락을 거쳐 가위바위보를 진행했을 때 선정된 것은, 막 씻고 나온 오미 상이었다.

 





“…….”

“오미오미, 씻고 나오자마자 걸렸네…!”

“사쿠사. Smile, Smile~”

“어떻게 막내만 보내냐고 하더니 결국 제일 막내 둘을 보내시네예.”

“그러면? 아츠무 네가 다녀올래?”

“막내들, 파이팅~ 내는 낮잠 좀 자겠습니더~”

“…막내들?”

“아, 저도 같이 가는 거라서요! 원래 저 혼자 다녀오겠다고 한 건데 다들 무리일 거라 하셔서 한 명 더 뽑으신 거라…. 오미 상 방금 막 씻고 나오신 거죠? 나가면 또 땀나서 끈적끈적해질 거라 싫으실 텐데, 저 진짜 혼자 다녀와도 괜찮아요!”

“…됐어. 가위바위보에서 진 사람이 다녀오기로 한 거니까. 기다려. 옷만 갈아입고 나올게.”

 





분명 내키지 않으셨을 게 분명한데도 오미 상은 금세 옷을 갈아입고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렇게 오미 상과 둘이 함께 마트에서 장을 보고, 마지막 미션인 아이스크림 심부름을 위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오미 상은 더위에 약하다. 물론 그렇다고 추위에 강하신 것도 아니지만, 땀이 나는 여름에는 평소보다 파팟 인상을 쓸 때가 많다. 게다가 외출복과 숙소 내에서 입는 평상복, 잘 때 입는 취침용 잠옷의 구분이 확실한 편이시라, 씻고 나오자마자 다시 외출을 해야 하는 상황이 분명 달갑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래서 함께 걷는 내내 오미 상의 모습을 슬쩍 슬쩍 살폈는데, 내 예상과는 달리 오미 상은 기분이 제법 좋아 보였다. 사실은 오미 상도 나처럼 더 움직이고 싶으셨던 걸까?




아무튼, 우려했던 것보다 괜찮아 보이는 오미 상의 모습을 확인하고 나니, 나의 신경은 심부름의 내용으로 쏠리게 되었다. 숙소 인원이 적지는 않다 보니 아이스크림 심부름을 갈 때마다 잔뜩 받아 온 스푼이 찬장에 그대로 남아있던 게 생각이 난 것이었다.



거기 아직 안 뜯은 스푼이 네 개는 남아있을 텐데…. 또 새로 잔뜩 받아 가면 너무 낭비 아닌가? 이누나키 상이 싱크대에 있는 스푼 볼 때마다 “이 스푼은 자기들끼리 복제하는 거야? 왜 계속 늘어나는 것 같지?” 하시기도 했었고…. 수저통에 똑같은 스푼만 여섯 개는 될 텐데. 그럼 안 받아가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의 끝에, 오미 상을 향해 제안을 건넸다.






“아, 그런데 저번에 찬장 보니까 뜯지도 않은 스푼이 잔뜩 있던데, 그냥 받지 말까요?”

“…굳이?”

“그치만 저희 적은 인원도 아닌데 매번 가게 스푼 다 쓸어가는 것 같고….”

“먹다가 부러뜨려서 두세 개씩 필요한 사람도 있잖아. 그냥 받아가.”

“아아, 그렇네요! 그럼 인원수대로 받아가서 조심히 먹자고 하죠!”

“어.”






오미 상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보쿠토 상이 매번 힘 조절을 잘못하여 스푼을 부러뜨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네. 이번에도 두세 개는 부러질 수도 있으니까 가져가는 게 낫나.




……아니, 그렇지만 만약 우리가 잔뜩 가져가서 가게에 스푼이 모자라면? 늦은 밤 퇴근길에 아이스크림이 너무 먹고 싶어서 사 가려고 들른 분이 스푼 없이 돌아가는 일이 생기면? 아니면 여행 가서 먹으려고 아이스크림 포장을 하러 왔는데 스푼이 없어서 일회용 스푼을 또 따로 사야 하는 분이 생기면? 일회용 스푼을 사려고 편의점에 들렀다가 예상 시간보다 늦게 출발하게 되어 일행들이랑 차에서 싸우게 되면? 그러면 어떡해!






“…오미 상.”

“왜.”

“그냥 밥 숟가락으로 먹자고 할까요?”






결국 다시 오미 상을 불렀다. 상상했던 것 같은 일이 진짜로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고! 우리는 숙소에서 밥 숟가락으로 먹을 수도 있는데! 우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스푼을 못 가져가서 난처한 상황을 겪으면 어떡해.



그런 생각으로 건넨 나의 질문에, 오미 상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내 옆에서 나란히 걷다가 멈춘 그 모습을 따라 나도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곧바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






“…야.”

“넹?”

“스푼 개수가 그렇게 중요해? 그냥 인원수대로 받아가.”

“그래도….”

“그래도, 뭐.”

“아무리 생각해도 저희가 그 가게 스푼 다 가져가는 것 같아요. 저희 때문에 오늘 늦게 방문한 손님들이 스푼 모자라면 어떡해요? 그것도 저희처럼 거주지에서 먹을 게 아니라 놀러가서 먹을 거여서 스푼이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면? 그래서 불만을 제기했다가 저희한테 스푼을 준 알바생 분까지 혼이 난다면?”






오미 상이 들으면 “도대체 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는 건데.”라고 할 법한 말을 늘어놓았다. 이미 퇴짜를 맞은 제안을 계속해서 건넨 것에, 어쩌면 오미 상의 기준에서는 인내심을 자극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하지만 저희는 숙소에 숟가락이 있잖아요!






“야.”

“네?”






물론 그런 말을 덧붙이진 못 했다. 다만, 오미 상의 낮은 음성에 눈을 깜빡이며 “네?” 하고 되물을 수밖에.






“잘 들어. 우리가 스푼 1개를 가져가든 10개를 가져가든 그것 때문에 이후 고객 응대에 차질을 빚을 곳이었다면, 우리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라도 문제가 생겼을 곳이야.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하루 동안 나가는 주문이 얼마나 되는데 스푼을 제대로 안 구비해두겠냐고.”

“음…. 확실히, 그것도 그렇네요.”

“그리고 이런 동네에서 사 가는 아이스크림은 대체로 집에서 먹겠지. 주택가로 누가 여행을 와.”

“가서 먹으려고 미리 사는 거면?”

“그럼 그 동네에 위치한 매장에서 사라고 해. 여기에서 사 가면 녹을 텐데 뭣 하러 여기에서 사 가냐고.”

“오, 진짜 그렇네요! 오미 상, 똑똑하다.”






오미 상의 말에 완전히 설득되었다. 납득할 수밖에 없는 논리다. 그래, 이런 걸 논리라고 하는구나. 역시 오미 상은 멋있…….




말로 감탄을 내뱉은 이후에도 연신 속으로 감탄하다가 ‘역시 오미 상은….’ 하는 생각에 멈칫 했다. 그 뒤에 붙을 예정이었던 단어로 인해, 얼마 전의 생각이 떠오른 탓이었다.

 




‘…오미 상은 멋있고 자꾸 보고 싶은 웃음을 짓는 사람.’

 




갑작스레 떠오른 그 생각에 입술을 안으로 말아 삼켰다. 날씨가 갑자기 더 뜨거워진 것 같다. 눈을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느라, 옆에서 오미 상이 뭐라 말씀하신 것조차 제대로 듣지 못 하였다.






“……ㅇ 가.”

“네? 뭐라고 하셨어요?”

“…아냐. 혼잣말.”

“그래요?”

“어.”






혼잣말이라는 건, 꼬치꼬치 캐묻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과 비슷했다. 그래서 나는 작게 “그렇구나.”라고 되뇌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오미 상도 더워서 힘드신 건가? 짐도 잔뜩 들고 계시니 힘드시긴 하겠다. 그러면… 으음, 제일 빠르게 갈 수 있는 경로가 어디더라….






“아, 여기 말고 저기 신호등에서 건널까요? 여기에서 건너면 한 번 더 건너야 해서!”

“그러든가.”

“좋아요! 그러면 저기로 가요!”

“어.”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도착하기 위해 조금 멀리 떨어진 신호등을 가리키며 말했다. 더워서 짜증이 날 법도 한데, 오미 상은 간결하지만 확실하게 동의를 표하며 옆에서 걷고 있었다. 문득 오미 상의 표정이 궁금해 슬쩍 위를 쳐다보았다. 모자를 쓰고 나오지 않은 탓에 오미 상의 얼굴 너머의 태양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눈부시다.




오미 상의 너머에 있는 태양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오미 상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곤 고개를 홱 돌렸다. 하품을 하는 사람을 보면 하품이 옮는다더니. 오미 상이 땀 흘리는 모습을 보니까 나까지 더 더워진 느낌이었다. 가슴 속 숨이 뜨겁게 달궈진 것마냥 차오르길래, 입을 살짝 벌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 때였다. 오미 상이 갑작스레 손을 뻗어 내 왼손에 있던 짐을 가져간 것은.





“어? 오미 상, 그거 제가 들어도 되는데!”

“됐어.”

“아니, 오미 상도 이미 양손에 짐 한 가득이잖아요? 저 주세요!”

“됐다니까.”

“그치만…!”





깜짝 놀라 왼손을 휘저으며 다시 짐을 돌려받으려 하였으나, 오미 상은 거절을 표했다. 내가 계속 미련을 버리지 못 하고 짐을 뺏으려 하자, 아예 인상까지 구기며 단호함을 드러내는 오미 상.






“너 땀 흘리는 거 보기만 해도 덥거든. 삐질삐질 땀이나 흘리지 말고 가서 아이스크림 가게 문이나 열지 그래.”

“으… 그치만….”






말투에는 날이 서 있었다. 하지만 이는 오미 상 특유의 말투일 뿐, 사실은 나를 배려하느라 그런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오미 상도 이미 양손에 짐이 잔뜩 있으면서. 오미 상도 더워서 땀을 흘리고 있으면서. 그러면서 내가 더워 보이니 짐 하나를 대신 들어주는 배려를 행하면서도, 괜히 저렇게 말씀을 하시는 거였다.



애초에 오미 상은 나보다 보폭도 크고 걸음도 빠른 편이라, 내가 아니었으면 이미 숙소에 도착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나와 걸을 때는 늘 걸음을 맞춰주면서도 티를 내지 않는 사람이 오미 상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더욱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이 이상의 사양을 할 수 없다는 걸 직감했다.






“그럼! 아이스크림 가게에 나와서는 제가 다시 들게요!”

“그러든가.”

“좋아요!”






나름대로의 절충안에 합의를 마친 후에는, 아이스크림 가게에 빨리 도착하는 일만 생각하려 했다. 다행히 횡단보도 앞 신호등은 금세 초록불로 바뀌었고, 나는 곧바로 가게를 향해 뛰어가 문을 열었다.






“오미 상! 먼저 들어가세요!”

“…알았으니까, 목소리 좀 낮춰.”

“앗, 넵!”






그렇게 큰 목소리는 아니었는데, 오미 상이 있는 곳까지는 크게 들렸나? 일부러 직원 분들한테 안 들리도록 작게 이야기했는데…? 고개를 갸웃하며 내내 가게 문을 붙잡고 있다가 오미 상이 들어가자마자 따라 들어간 후 문을 닫았다.



기본적으로, 오미 상은 밖에 오래 있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고, 밖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보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최대한 빠르게 주문을 마치고 돌아가기 위하여 곧바로 아이스크림 진열대 앞에 섰다.






“가장 큰 사이즈로 세 개였죠?”

“어.”

“음…. 민트초코 드실 수 있는 분들이랑 아닌 분들 거 구분해서 담죠! 일단 여기에는 레인보우샤베트랑 애플망고요거트랑, 또…….”

“저, 저기… 혹시 블랙자칼 히나타 선수랑 사쿠사 선수 아니신가요…?”




어?





“앗, 어, 네, 아뇨?!”

“…대답, 이상하잖아.”

“아, 아니, 그러니까, 네! 맞아요!”






아이스크림을 사고 곧바로 돌아가려 했는데, 직원 분께서 우리를 알아보시곤 말을 건네었다. 이, 이건 예상 밖의 일인데…! 내가 모자를 안 쓰고 와서 그런가?! 하지만 나는 오미 상만큼 유명한 것도 아니고 눈에 띄는 체격도 아닐 텐데…?!






“역시…! 저 완전 팬이에요! 저번에 응원하러 갔다가 데뷔전 보고 팬 됐거든요!”






앗. 팬 분이셨구나…! 헉, 그러면 진짜 나 때문에 오미 상까지 들키신 건가…! 내게 눈을 마주치며 기쁜 표정을 짓는 직원 분의 모습에 감사하면서도, 생각하지 못 한 상황에 당황스러워 말이 꼬였다. 팬 분을 만난 건 너무 좋지만, 아마 이 흐름대로라면 분명히 사진을 찍자고 하실 것 같은데…. 나야 괜찮지만, 오미 상은 밖에서 사진 찍는 걸 안 좋아하시는 것 같았지….






“아, 어떡해! 진짜 너무 좋아해요, 히나타 선수!”

“네?! 저, 아, 어어…! 가, 감샤합니댜!”

“혹시 사진 한 번만 같이 찍을 수 있을까요? 저 진짜 너무 팬이라….”

“앗, 넵! 물론! 당연하죠!”

“감사합니다! 그러면 아이스크림 계산이랑 포장부터 도와드리고 나가시기 전에 한 번만 부탁드릴게요!”

“넵…!”






오미 상의 일을 신경 쓰느라 어떻게 주문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옆을 슬쩍 보니 오미 상은 아까보다 굳은 표정이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눈과 눈썹만 보였지만, 딱 봐도 유쾌하지 않은 듯한 모습.



아예 구석에 가 있는 오미 상 대신 심부름용으로 받아온 카드를 꺼내어 결제를 마쳤다. 뒤를 돌아 오미 상을 보니 아예 팔짱까지 끼고 있었다. 역시 달갑지 않으신 거겠지….






“…어, 저기. 혹시 괜찮으시다면 사진은 저랑만 찍어도 될까요?”

“어? 히나타 선수랑만요?”

“네. 오미 상… 아니, 사쿠사 선수가 지금 컨디션이 조금 안 좋으셔서 같이 사진을 찍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요. 평소라면 사쿠사 선수도 같이 느긋하게 사진 찍어 주실 텐데, 지금은 빠르게 숙소로 돌아가서 쉬셔야 할 것 같고. 대신 제가 더 많이 찍어 드릴게요!”

“아아, 그러시군요…! 제가 붙잡은 것 같아서 어떡하죠. 죄송해요.”

“아뇨, 아뇨! 괜찮아요! 오히려 팬이라고 해 주셔서 기뻐요!”






짧은 대화를 마치고 오미 상에게 다가갔다. 오미 상은 여전히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으셨는데, 그걸 신경 쓰다 보니 처음 오미 상을 만나고 조심스러워 했던 때처럼 약간의 긴장이 도는 기분이었다.






“오미 상, 어떡해요. 저 경기장 밖에서 팬이랑 사진 찍는 거 처음이에요….”

“그래서.”

“네?”






오미 상의 말에 나도 모르게 “네?” 하고 반문했다. 평소와 같은 말투였지만, 역시 기분이 안 좋아서 그런지 약간의 퉁명스러움이 묻어나 있었다. 오미 상이 상처주려는 의도로 막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나조차 살짝 놀랄 정도로.



혹시 내가 다른 실수를 했나 싶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아!” 소리와 함께 떠올린 이야기를 꺼내었다.






“오미 상, 걱정 마세요! 오미 상은 밖에서 사진 찍는 거 안 좋아하시죠? 그럴 줄 알고 제가 저하고만 사진 찍으시게끔 잘 말해놨어요!”

“…….”

“아, 물론 오미 상이 사진 찍는 거 싫어해서 그러는 것처럼 말 안 하고 잘 둘러댔어요…! 진짜로!”






잘 둘러댔다는 내 말에도 오미 상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눈빛이 조금은 달라진 것으로 보아, 속으로는 고마움을 느끼시고 계신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괜찮아지신 거면 좋겠는데.




어느새 아이스크림 포장이 완료되었다는 말이 들려오고, 나는 후다닥 걸음을 옮겨 쇼핑백을 먼저 받았다. 이것까지 오미 상이 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곧이어 사진 촬영을 위해 직원 분께서 다가와 옆에 섰다.






“둘이 조금 더 붙어 서 봐요~”

“앗, 넵…!”






조금 더 붙어 서라는 요청에 살짝 옆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나의 왼팔에 팔짱을 껴 오는 직원 분의 몸짓에 순간적으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가고 의식은 어느 한 곳을 향해 쏠려 있었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오미 상에게로.






“자, 찍을게요? 하나, 두울… 어…?”





응?





“어? 오미 상?”





그렇게 사진을 찍으려던 찰나, 누군가가 나의 어깨를 밀어내었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면 나의 어깨를 잡고 밀어낸 후 직원 분과 내 사이에 선 오미 상이 있었다. 영문 모를 그 행동에 놀란 것도 잠시. 내가 더 놀란 까닭은 그 뒤에 들려오는 오미 상의 말 때문이었다.





“야. 너….”





너무 붙지 말지―.





“…네?”






너무 붙지 말라니, 갑자기 왜…. 왜 그런 말씀을……. 묻고 싶었지만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 상황도, 오미 상의 말도 당황스러웠다. 오미 상이 이러시는 이유가 짐작도 되지 않아서 더욱.



놀라서 눈을 깜빡이고 있는 나를 대신하여, 오미 상은 곧바로 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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