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 : 22th, Feb, 17
Written by. 상커리

*후회물

모든 일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법은 없었다. 아주 조금씩, 쌓이고 쌓였던 것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을 땐, 모든 게 막을 내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징위의 경우도 그랬다.

입사하고 나서 앞만 보고 달렸다. 원하는 회사에 당당히 입사를 했고, 이제는 제 전공을 살려 회사에서의 입지를 다지고자 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능력보다는 상사에게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해주는 게 더 효율적이란 사실을 징위는 동기보다 뒤늦게 깨달았다.

처음에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능력껏 인정 받아 위로 올라가고 싶었다. 아첨으로 먼저 승진하고 승승장구하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보며, 저런 건 진정한 게 아니라며 일에 매진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는 게 현실이었다. 격차가 더 벌어지기 시작하자, 징위는 초심을 버리고야 말았다. 이제는 능력으로 인정 받는 일보다는 줄을 잘 잡아야 승진을 하고, 회사 내의 입지가 좋아진단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서 징위도 전쟁같은 줄타기에 뛰어들었다.

술을 못하던 몸은 어느새 몇 병을 너끈히 해치울 만큼 주량이 늘었고, 상사들과 바깥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 기획서를 만드는 시간보다 상사의 뒤를 따라 영업을 다니며 자연스레 접대를 하는 자리에 끼다 보니 징위는 어느새 부서가 영업부로 바뀌어 있었다. 징위는 생각보다 남의 비위를 잘 맞춰주는 편이었다. 거래처의 비위도, 상사의 비위도 잘 맞췄다. 뒤늦게 시작한 만큼, 징위는 더 올라가고 싶은 정상을 위해 제 나름대로 전쟁터에서 필사적으로 온몸을 굴렀다.

드디어 3년 만에 징위는 사원이 아닌 대리라는 직함을 뒤에 달 수 있었다. 1년 만에 승진한 동기들보다는 시작은 늦었지만, 징위의 다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 가파르게 산을 올랐다. 되려 승진한 동기들의 자리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자신을 끼워넣었다. 시기하는 시선이 많아졌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인생은 혼자 사는 것이며, 끝없는 달리기의 연속이었다.

분명 회사 내에서 징위는 잘 나가는 사원 중 한 명으로 이미지가 굳혀졌다. 그와 동시에 상사의 뒤를 겁나 핥는 머저리로 전락하긴 했지만, 남들도 모두 그렇게 한다는 믿음 하에 징위는 그런 시선조차도 잘 나가는 사람을 향한 부러움의 시선이라 생각하며 즐겼다. 그러나 항상 뜻대로 되는 건 아니라서 스트레스가 쌓일 때 징위는 표적을 제 애인인 위주로 삼았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징위는 위주를 향한 독설을 내뱉을 때마다 속이 후련해졌다. 짜증나는 일도 위주에게 감정을 담아 토해내면 눈 녹듯 싸그리 사라지곤 했다. 그러다 자신이 심한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닫곤 위주에게 사과를 건네곤 했지만, 그것도 몇 번 뿐이었다. 반복하는 행위에 징위의 양심은 무뎌졌고, 위주는 그런 징위의 폭언에 힘을 잃어갔다.

위주는 징위의 상태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징위가 잠시 스트레스를 받아 이런 것뿐이라며 애써 웃으며 징위의 행동을 묵인했다. 징위가 남긴 독설은 계속 물에 새겨 흘려 보냈고, 징위에 대한 사랑은 계속해서 가슴에 반복해서 새겼다. 그 기간이 짧았다면, 아마 위주가 징위에 대한 사랑도 독설과 함께 물에 흘려보내기 시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년 차엔, 남몰래 운 적이 많았다. 눈가가 모두 짓무를 만큼, 심하게 울었다. 한 번 위주가 울음을 토해내면 밤을 지새우고 새벽의 장막이 제 어깨를 두드릴즈음 되어서야 겨우 울음을 그쳤다. 한 번에 많이 우는 게 습관이 된 위주는 참고 참다가 더는 가슴에 짓누른 응어리를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실신한 사람처럼 소리내어 울다가 종용히 눈물을 흘리다가, 그래도 진정이 되지 않으면 술로 마음을 추스렸다.

그와 맞지 않는 건가 생각이 들었지만, 그러기엔 이전까지 보낸 수많은 시간이 위주의 가슴을 붙잡았다. 단순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거라며 다시 마음을 다 잡고 징위를 보필했다. 직장을 다니고 있는 와중에도 징위가 먹고 싶지 않다는 날을 제외하면 꼬박꼬박 그의 아침을 챙겼다. 뭐라도 먹고 가라며, 토스트라도 입에 물리고, 따뜻한 커피가 담긴 보온병을 건네곤 했다. 그 와중에도 징위의 입에선 고맙단 말이 나온 적이 없었다. 섭섭해하면서도 위주는 그 때마다 뭐라도 먹고 가라며 자신이 입에 물린 음식 때문에 말을 못한 거라며 애써 부정했다.

그러나 그를 향한 사랑도 머나먼 끝을 향해 숨이 차오르도록 내달렸다. 그 '끝'은 더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 '종착점'이었다. 그 끝을 향해 달리니 이제는 새벽에 술냄새를 풍기며 들어오는 징위가 걱정되지 않았다. 옆에 아무렇게나 누워서 자도 더는 이불을 끌어줘야 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더는 의무적으로 아침을 꼭 먹여서 보내야겠단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가끔씩 징위가 식사를 찾긴 했지만, 찾을 때만 그리 해줄뿐. 딱히 무언가를 해줘야겠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 감정으로 보낸 지가 어언 5년이 되자, 위주는 왜 이 집에 살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진심으로 왜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지 않았을까,라는 고민을 하루도 채 하기 이전에 집 근처 부동산을 뒤졌다. 수중에 있는 돈으로 마련할 수 있는 집을 얻었다. 계약도, 이사 준비도 일사천리로 끝났다. 집엔 이사를 위해 쌓은 박스가 늘어났지만, 징위는 여전히 늦게 들어오거나 아예 들어오지 않는 일이 잦았다.

어느새 이삿날이 다가왔다. 이틀 연차를 내 위주는 이삿짐을 센터에서 온 사람들에게 맡겼다. 박스가 하나둘씩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새 집에 도착한 짐을 모두 내려놓은 뒤 위주는 박스를 정리하기 이전에 다시 새 집에서 나서 원래의 집으로 향했다. 박스가 쌓여있느라 며칠 청소를 하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청소만 끝내고 다시 새로운 집으로 들어가 정리하기로 일정을 잡았다. 이틀 연차를 낸 걸 다행으로 여기며 위주가 익숙하게 전자 잠금 장치를 풀곤 집에 들어갔다. 들어올 땐 아직 해도 떨어지지 않은 오후였건만, 대충 청소를 끝내고 나니 날이 어둑해진 상태였다. 흐르는 땀을 입고 있던 상의 소매에 아무렇게나 문질러 닦곤 간만에 고생한 허리를 시원스레 폈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토해낸 나른한 한숨이 정적으로 가득한 집을 가득 메웠다.

"이젠 이 집이랑도 끝이네."

이 감정을 섭섭하다고 해야 하는 것인지, 위주는 구분이 어려웠다. 그저 몇 년씩이나 살았던 집이라 정이 들었다는 생각 외에는 달리 떠오르는 게 없었다. 썼던 걸레도 깨끗하게 빨아 베란다 난간에 걸어두곤 위주는 다시 한 번 놓고 간 게 없는지 주변을 살피곤 현관으로 다가갔다. 신발만 신고, 저 현관을 나선다면 다시는 이곳과 볼일이 없으리라. 그리 생각하던 찰나였다.

띠리릭.

아직 전자 잠금 장치 근처에 가지도 않았는데, 소리를 내며 문이 조금씩 열렸다. 현관에 설치한 등이 자동으로 사람을 감지하곤 불을 키자 방문한 이의 정체는 이 집 주인이었다. 흘끔 눈이 마주쳤다. 평소라면 위주가 다녀왔냐고 물었을 테지만, 별 말을 하지 않은 채 눈만 껌뻑였다. 되려 징위가 유난히 다정한 편이었다. 평소엔 위주의 물음에 대충 대꾸하던 징위가 눈웃음을 흘리며 손에 쥐고 있던 봉지를 흔들어댔다. 위주는 코를 애써 막았다. 징위의 몸에서 거하게도 풍기는 술냄새가 코를 고역하게 찔렀다.

"위주야아~ 우리 예쁜이 위주~"

답지 않게 애교까지 부려가며 징위가 위주를 향해 몸을 내던졌다. 헤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징위가 다가오자 위주가 그대로 피해버렸다. 덕분에 바닥에 처박힌 징위가 아픔에 얕은 신음을 내질렀다.

"아이~ 우리 마누라님 왜 절 피해요~ 아파요~"
"...주사 부리지 말고 들어가서 자."
"아잇. 주사 아니라니까. 나 오늘 너무 기분 좋은 일이 있어서 이렇게 치킨이랑 맥주도 사왔잖아~"
"...어서 들어가서 자라니까."
"어? 우리 마누라님 왜 이러지? 오늘따라 너무 박하잖아..."

풀린 다리에 겨우 힘을 주어 징위가 일어났다. 이미 봉지에 담긴 치킨과 맥주는 슬쩍 봉지 바깥으로 나온 상태였다. 그대로 두면 기름기가 장판에 영향을 주리란 생각에 위주가 봉지에서 나온 치킨을 주워담아 식탁에 올렸다. 어느새 흐느적거리면서도 주방까지 온 징위가 식탁에 앉아 봉지를 풀며 위주에게 애교를 부렸다.

"주주야~ 너랑 먹으려고 사온 거야. 얼른 먹자."
"... 너 혼자 먹어. 나는 생각 없어."
"나 오늘 엄청 기분 좋은 일 있어서 그래.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응?"
"...뭔데?"
"응. 나 내일 모레부터 과장이다!?"
"...그래서?"

징위는 대리 직함을 달았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무심히 대리가 되었다고 말했어도 위주는 오히려 저보다 더 기뻐해주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오늘은 좀 달랐다. 위주는 어떠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무심히 되물을 뿐이었다. 이런 반응을 기대했던 게 아니었던 징위는 취한 와중에도 관자놀이를 긁었다. 오늘은 기분이 안 좋은 건가. 무슨 일이라도 있던 건가.

내심 위주의 주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징위가 의자에서 일어나 위주의 팔을 잡아 조심스레 이끌었다.

"무슨 일 있어?"
"...웬일이야. 그런 걸 다 궁금해하고."

위주의 목소리에서 고저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단 걸 깨달은 징위가 술기운에 흐려진 눈가를 바짝 떴다. 어느새 정신을 좀먹던 취기가 날아가고 제정신이 자리잡자, 징위는 유난히 잡은 위주의 손끝이 차갑다는 게 느껴졌다. 제 손으로 냉기를 없애주려고 하자 위주가 어느새 잡힌 손을 빼내곤 손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세게 잡아서 아프잖아. 힘자랑이라도 하고 싶어?"
"...어? 아니... 미안. 아팠어...?"
"후. 됐고, 가서 자. 내일도 출근해야 될텐데, 쉬어."
"위주야. 어디 가?"
"갈 데가 있어."
"어디?"
"아 좀!"

위주는 좀처럼 내지 않던 짜증을 가득 담아 던졌다. 어디를 가냔 집요한 물음에 짜증이 섞인 한숨이 입에서 계속 튀어나왔다. 거의 징위에겐 드러낸 적 없는 모습이니 당연히 징위는 처음 보는 그의 모습이 낯설어 표정이 굳었다. 왜 이러지. 위주가 보인 적 없는 모습에 징위는 조바심만 났다. 어떻게 하면 좋지. 그러다 생각난 게 항상 미안함을 전하던 위주의 모습이었다. 자신이 화내고, 토라지면 위로해주던 위주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삐치면 그가 위로해줄 거라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징위를 현혹했다.

"왜? 다른 남자라도 만나기라도 하냐?"

징위는 위주가 아니라며, 그런 게 아니라며 제게 매달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언제나처럼 그리 해줄 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위주는 팔짱을 끼고 짝다리를 짚은 자세 그대로였다. 시간이 지나자 초조함에 징위가 입술을 달싹였다. 오늘따라 자신이 알던 모습과 많이 다른 위주가 낯설었다. 입만 뻐끔거리던 찰나 위주가 지겹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징위를 지나쳤다. 징위가 아무리 불러세우려 해도 위주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신고 온 신발도 슬리퍼라 딱히 신발을 신는데 시간이 걸리지 않은 위주는 현관 문을 빠르게 열고 나갔다. 징위가 뒤에서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위주는 집업 후드 주머니에 넣은 이어폰을 휴대폰에 꽂은 이후에 제 귀에도 꽂았다.

신나는 음악 소리가 귀를 즐겁게 하기 시작하자 콧노래도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그는 뒤에서 오고 있을 징위를 신경쓰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이미 위주를 부르는 외침은 그의 귀에서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후기


그냥 생각나서 가볍게 쓰고자 가져온 단편입니다.

이건 분명히 제가 상중하로 끝낼 겁니다.

불끈!


1/7,8 디페와 로망스 나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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