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높은 언덕에 위치한 낡은 고시텔 건물. 그 앞에서 다니엘은 재환과 계속 실랑이 중이었다. 우진은 차 안에 앉아서, 그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을 30분 째 지켜보고 있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재환과 다니엘의 관계를 종잡을 수 없었다. 다니엘은 친구라고 말했지만, 전혀 친구로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저가 아는 친구 관계는 이렇지 않았다. 2년 째 곁에서 일해왔지만, 요즘의 다니엘은 정말 처음 보는 모습 투성이였다.

그룹 라이즈의 센터이자 리더로 인기를 끌어온 다니엘은 최근 두 번째 솔로 앨범 발매를 앞두고, 선공개 곡을 발표했다. <나인틴>은 1주일째 음원 차트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며칠 뒤 쇼케이스와 함께 공개될 솔로 앨범의 타이틀곡은 물론 수록곡, 안무, 컨셉까지 다니엘이 프로듀싱한 것이었다. 그 앨범에서 유일하게 다른 사람이 작곡한 곡이 <나인틴>이었다. 작곡 blue527. 작사 강다니엘. 편곡 강다니엘.

쇼케이스를 앞 둔 다니엘의 스케줄은 살인적이었다. 각종 인터뷰, 화보 촬영, 해외 공연, 연습으로 빼곡하게 채워진 스케줄이었다. 당장 몇 시간 뒤에도 일본 출국이었다. 우진은 차창 너머로 서 있는 두 사람을 다시 보았다. 재환의 손목을 쥐고 있는 다니엘. 무어라 소리치는 듯한 재환. 그리고 그런 재환의 손을 잡는 다니엘. 몇 년 동안 연락이 안 됐다가 만나게 되면 반가워 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리고 도와준다면 고마워할 거 같은데. 혹시 원한이 있는 관계가 아닌가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분위기는 더욱 아니었다.

2주 전, 다니엘은 우진에게 재환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우진은 다니엘을 대신해 재환의 대학을 찾아갔고, 그로부터 일주일간 그의 일상을 쫓았다. 재환의 삶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고단했다. 새벽부터 고시텔을 나와 오토바이를 타고 도시락 배달. 학교 수업. 수업이 끝나자마자 뛰쳐나와 주점 아르바이트. 병원으로 가서 부모님을 보고 막차를 타고 다시 고시텔. 주말에도 새벽같이 일어나 도시락을 배달하고 이삿짐을 나르고, 저녁이면 주점에 가서 일을 한다. 그 마른 몸으로 고된 노동을 견디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우진은 다니엘에게 재환의 일상을 보고하며 ‘그 사람, 안 쓰러지는 게 신기해요’라고 말했다.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는 거 같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다니엘은 재환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무서울 정도로 굳은 얼굴이었다. 어떤 사이냐는 우진의 질문에 다니엘은 그저 ‘친구’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매니저를 보내 친구를 감시하게 하는 것. 재환의 병원비는 물론, 재환 몰래 옆 병동에 입원한 그의 아버지 앞으로 밀린 병원비까지 내준 것. 다니엘을 꽤 안다고 자부해왔던 우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다.

게다가 이틀 전에는 다니엘이 갑자기 연락이 두절돼 회사가 발칵 뒤집혔었다. 다니엘이 대표와 함께 모 방송사 예능국 PD들과 술자리가 있던 날이었다. 소속사 작업실에서 며칠째 밤을 새며 작업 중이던 다니엘이 데리러 갔는데, 없었다. 전화도 불통이었다. 우진은 저를 때릴 기세로 화를 내는 대표를 진정시키고, 하루 종일 다니엘을 찾아 다녔다. 그리고 그 날을 넘긴 새벽 2시. 다니엘에게서 전화가 왔다. 모 병원에 있으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빨리 좀 와달라는 것이었다. 우진은 급히 차를 돌려 병원을 향했다. 그리고, 다니엘이 다쳤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뛰어 들어간 응급실. 우진은 처음 보는 남자의 손을 꼭 쥔 채 고개를 숙인 다니엘을 보았다.

그 날의 생각에 잠겨있던 우진은 다니엘이 다가오자 차에서 내렸다. 다니엘은 굳은 얼굴로 우진을 지나, 뒷자리에 올라탔다. 고시텔 쪽을 보자, 잠시 서 있던 재환이 고시텔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것을 확인한 우전이 다시 운전석에 올라 다니엘을 돌아보았다.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눈을 감은 다니엘. 재환을 만나고, 다니엘은 도통 웃지 않았다.

“같이 안 가요?”

다니엘에게서 대답이 없자, 우진은 질문을 바꾸기로 한다.

“어디로 가요?”

“집.”

죽겠다, 진짜. 그렇게 말한 다니엘이 모자를 더욱 깊이 눌러 썼다. 한숨도 못 자고 무대에 섰을 때보다 훨씬 피곤해보였다. 활동 때문에 관리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다니엘은 부쩍 말라갔다. 그때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 나왔다. 나인틴. 작곡 blue527. 우진은 생각했다. 도대체 누구일까.

“우진아.”

“예, 형.”

“대표 별 말 없었나.”

“제가 형이랑 한통속인 거 아는데 뭔 말을 하겠어요.”

최근 대표는 소속사의 간판 그룹인 라이즈, 그 중에서도 리더이자 센터인 다니엘의 재계약에 혈안이 돼 있었다. 업계에서는 다니엘의 재계약에 온갖 관심이 쏠려 있었다. 벌써 꽤 많은 소속사에서 접촉을 해왔다. 우진에게 연락이 오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다니엘은 여전히 이렇다 할 대답을 내놓지 않은 상태였다. 다니엘에게 섣불리 물어볼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재계약을 하긴 하는 걸까. 라이즈는 ‘강다니엘 그룹’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다니엘의 색이 짙은 그룹이었고, 1집 이후 타이틀곡 및 수록곡은 거의 다니엘과 멤버들의 자작곡으로 이뤄져 있었다. 말하자면 K엔터테인먼트에서 ‘라이즈’는 없어서는 안 될 축이었고, 다니엘은 그 중심이었다. 대표는 다니엘이 특별히 아끼는 우진에게도 협박에 가까운 설득을 해왔다. 이 바닥 좁아. 배신하다가 뒤통수 맞기 십상이야. 묻을려면 얼마든지 가능해. 내가 강다니엘을 여기까지 키웠는데, 그 새끼 약점 하나 안 갖고 있을 거 같아?

“우진아. 부탁 하나만.”

“예, 형.”

“김재환, 우리집 가자고 설득 좀 해봐라."

내일부터 갈 데도 없는 게, 죽어도 안 간다네. 다니엘이 모자를 벗고,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헝클인다. 우진은 어이가 없다. 오라는 사람이나, 죽어도 안 간다는 사람이나.

“...형 친구, 왜 이렇게까지 자존심 세우는 건데요?”

그 말에 다니엘은 다시 묵묵부답. 우진은 골치가 아프다. 재환에게, 다니엘에게, 또 둘 사이에 뭔가 모르는 속사정이 있는 건 알겠는데.

“죽어도 안 간다는 사람을 어떻게 설득해요.”

다니엘은 원래 사적 영역까지 부탁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그가 간절하게 부탁한데에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우진의 볼멘소리에 잠시 말이 없던 다니엘이 덤덤하게 대꾸한다.

“죽진 않겠지.”

네가 못하면 갔다 와서 내가 할게. 그렇게 말한 다니엘은 재환을 생각한다. 독기와 자존심 빼면 김재환이 아니다. 그렇게 매몰차게 가버렸는데, 이렇게 쉽게 곁을 내줄 리가 없지. 다니엘의 기억은 어느덧 열여덟의 봄으로 흘러간다. 재환과 모든 것을 공유하던 그 시절로.



“야. 음악 꺼.”

재환의 춤을 보던 트레이너 창수의 말에 연습실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음악이 꺼졌고, 재환의 동작도 멎었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재환의 춤을 보고 있던 다니엘의 얼굴도 굳었다.

“야. 지금 이 부분 너 빼고 다 돼. 너 하나만 빼고."

“죄송합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 하는 거 말고. 잘하라고, 새끼야.”

너 노래만 잘 한다고 아이돌 될 수 있을 거 같아? 노래할 거면 그냥 춤추지 말고 발라드 가수를 해. 폭격에 가까운 비난에 재환이 고개를 숙였다. 요즘 재환은 부쩍 살이 빠지고 안색이 나빠졌다. 다니엘은 그런 재환을 보며 남들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어젯밤에도 재환은 새벽까지 남아서 연습을 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했지만, 실력은 노력만큼 늘지 않았다. 소속사에서는 빠르면 하반기, 늦으면 내년 상반기 데뷔를 목표로 한 5인조 남자 그룹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니엘은 데뷔가 확정된 연습생이었고, 재환은 메인보컬 자리를 채우기 위해 급히 뽑은 연습생이었다. 고작 3개월 된 재환이 몇 년씩 연습해 온 연습생들 만큼 실력이 되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소속사에서는 재환이 그렇게 되길 바라는 상황이었다.

3개월 전, 성우와 함께 재환의 오디션 영상을 봤던 다니엘은 놀라고 말았다. 흰 티셔츠를 입고, 기타를 안고 노래를 부르던 재환.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홍대 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던 밴드의 보컬. 그 공연을 본 날은 다니엘에게 최악의 하루였다. 월말 평가에서 처참하게 깨지고, 동시에 팀을 이뤄서 연습하던 절친한 형이 소속사에서 방출됐다. 고작 스물 두 살인 형은 세상이 끝난 것처럼 울고, 숙소에서 짐을 사서 나갔다. 다니엘은 문득 두려웠다. 그게 저의 미래가 될까봐. 좋아서 시작한 일이 싫어지고, 스스로를 옭아매고, 결국에는 포기하고 무너지게 될까봐. 소속사에서 다니엘은 각별한 대우를 받는 연습생이었다. 대표와 메인 프로듀서가 나서서 다니엘이 만든 자작곡과 안무를 매주 체크했다. 스태프들은 ‘다니엘이니까’라는 말을 달고 살았고, 다니엘은 하루하루 부담감에 짓눌려갔다. 담배를 배운 것도 그쯤이었다.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끝이다. 열여덟의 나이에 알게 된 사회는 불구덩이 위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위태위태하던 나날 속, 홍대 거리에서 듣게 된.

안녕하세요. 김재환입니다! 쾌활하게 외치던 목소리. 농담 섞인 유쾌한 멘트. 그리고 이어진 재환의 노래. Won't Go Home Without You. 매일 밤 넌 울다 지쳐 잠들지. 왜 모든 순간이 그렇게 힘들어야 하지? 믿기 어렵겠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내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바로잡을 수 있도록. 그리 길진 않을 거야. 너 없이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홍대 거리를 순식간에 조용하게 만든 재환의 노래. 그 날, 다니엘은 재환에게 순식간에 압도 당했다. 그리고 재환의 오디션 동영상을 보던 그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말간 얼굴로 아델의 스카이폴을 부르는 재환. 동영상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앞에서 노래를 듣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다니엘의 가슴이 아주 오랜만에 뛰었다. 쿵, 쿵, 쿵.

트레이너는 재환에게 쓴 소리 몇 마디를 더 하고 연습실을 나갔다. 연습생들이 재환에게 다가가 한 마디씩 위로를 건넸다. 재환의 친화력은 놀라울 정도였고, 3개월 만에 연습생들과 친해졌다. 텃세를 심하게 부리는 장기 연습생조차 재환을 예뻐했다. 싹싹하고, 성실하고, 유쾌한 성격의 재환은 성우와도 금세 친해졌다. 다니엘은 성우로부터 재환이 연습생으로 있던 소속사가 망했으며, 그때 같이 있던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해 1년 동안 버스킹을 했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성우는 ‘너랑 동갑인데, 친하게 지내’라고 말했지만 다니엘은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재환을 보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재환 쪽에서 친해지기 위해 말을 걸 때도 번번이 분위기가 어색하게 흘러갔다. 초반에 친해지려고 노력하던 재환도 어느 순간 말을 걸지 않았다. 그쯤 성우가 ‘너 재환이 싫어해?’라고 물었고, 그에 다니엘은 재환이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여전히 다가갈 수 없었다. 왜, 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었지만 그랬다.

재환은 연습생들이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구석에서 혼자 연습을 했다. 이어폰을 낀 채, 거울을 보고 같은 동작을 수백 번 반복하던 재환. 그 모습을 몰래 지켜보던 다니엘은 자작곡을 검사 받기 위해 먼저 연습실을 나왔다. 다니엘은 저를 전담으로 봐주는 프로듀서와 저녁을 먹고, 곡의 베이스 라인을 수정 했다. 그러다 보니 12시가 훌쩍 넘었다. 자꾸만 재환이 신경 쓰였다. 아직도 거기에 있으려나. 다니엘은 소속사 앞에 있는 편의점에서 샌드위치와 우유를 샀다. 재환이 우울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초콜릿도 샀다. 이걸 어떻게 전해주나. 난감한 얼굴로 내려간 지하의 연습실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막차도 끊길 시간인데, 아직까지 있는 게 말이 안 되지.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서는데 연습실에서 우는 소리가 들렸다. 다니엘은 숨을 죽이고 다가가, 연습실 문을 열었다. 컴퓨터 화면에서 나오는 불빛 밖에 없는 연습실.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재환이 보였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다니엘은 재환에게로 걸어갔다. 울던 재환이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 퉁퉁 부은 얼굴. 땀에 젖은 목덜미. 얼마나 춤을 췄는지 고스란히 느껴지는 모양새였다. 다니엘을 보더니 놀라서 어안이 벙벙해진 재환의 얼굴.

“배 안 고프나.”

툭, 말을 뱉은 다니엘이 편의점 비닐 봉투를 내밀었다.

“밥부터 먹자.”

그래야 힘이 나지. 다니엘은 비닐 봉투에서 사온 것들을 하나씩 꺼낸다. 치킨 샌드위치, 흰 우유, ABC 초콜릿, 하리보 젤리. 그리고는 샌드위치 포장을 뜯어 재환에게 내밀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든 재환의 퉁퉁 부은 눈. 멍하니 샌드위치를 씹는 입. 그걸 보는데, 다니엘은 자꾸만 웃음이 난다. 그러자 우유를 마시던 재환이 눈을 들어 다니엘을 본다. 그 얼굴에 ‘어색해 죽을 거 같다’고 써있다. 그 속내를 고스란히 읽은 다니엘은 또 웃었다. 그리고 헛기침을 했다. 한 번 말을 걸고나니, 또 말을 거는 게 어렵지가 않다.

“막차는 이미 놓쳤을 거고.”

“....”

“아침까지 같이 해보자.”

내일 일요일이니까. 밤 좀 새도 되지, 뭐. 다니엘이 초콜릿을 하나 까서 먹고, 또 하나를 까서 재환의 손에 올려준다. 초콜릿을 잠시 내려다보던 재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 혼자 할게. 동영상 보고 하면 돼.”

“...”

“지금도 민폐인데.”

“재환아.”

재환은 다니엘이 저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우리 팀에 니가 꼭 있었으면 좋겠다.”

두 사람의 숨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연습실.

“그래서 도와주는 거고.”

먹고 있어라. 내 화장실 좀. 그렇게 말한 다니엘이 연습실을 빠져 나왔다. 화장실 거울 안, 새빨개진 제 얼굴이 보였다. 다니엘은 열을 식히기 위해 세수를 했다. 그리고는 부끄러워서 차마 할 수 없었던 그 말을 초콜릿과 함께 녹여 삼켰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던 그 날 밤. 네 노래는 나에게 구원이었다고. 네가 나를 구한 거라고.



제발 고집 부리지 말고, 같이 가자. 그렇게 말하던 다니엘의 간절한 얼굴. 재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운드 클라우드. blue527. 팔로워 수가 제법 많긴 했으나, 그 안에 다니엘이 있는 줄은 몰랐다. 거기에 업로드 된 노래를 떠올리던 재환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치부가 들킨 기분이었다. 그 노래의 주인공은 모두 한 사람이다. 어젯밤, 밥은 꼭 챙겨 먹으라고 거듭 당부하고 나서야 돌아서던 강다니엘을 향한 노래들.

“뭐 마실래?”

재환은 민현의 질문에 현실로 다시 돌아온다. 인문대 1층의 카페 주문대 앞. 검정색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민현이 재환을 돌아본다.

“아니, 전 괜찮아요.”

“선배가 사주면 그냥 먹는 거야. 너 저번에 자몽에이드 먹었지? 그거 시킬게.”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랑 자몽에이드 한 잔 주세요. 둘은 주문한 음료를 들고,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민현은 여기저기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다. 민현이 세 번째 통화를 마무리 짓고나서야, 재환은 어젯밤부터 내도록 고민했던 말을 꺼냈다.

“선배님. 그때 부탁 드렸던 아르바이트 자리.”

“응. 추천해놨어.”

“죄송하지만, 못 할 것 같아요.”

민현이 의아하다는 듯 재환을 보았다. 갑자기 왜?

“저, 학교 그만 두려구요.”

창밖으로 비가 내렸다. 오전부터 내리던 폭우였다. 집주인은 오늘 안에 집을 비워 달라고 말했다. 어차피 짐이라고는 옷가지와 책, 기타, 오래된 노트북이 전부였다. 재환은 조그만 캐리어와 기타 가방을 메고 학교로 왔다. 과 사무실에 캐리어를 두고, 민현에게 잠시 시간을 내달라고 말해서 이곳에 온 게 10분 전이었다.

“무슨 일 있어?”

“사정이 생겼어요. 죄송합니다.”

민현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재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짧은 정적 후,

“다니엘 만났어?”

하고 물었다. 그에 재환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쓰인 재환의 눈을 보며 민현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 이종 사촌이야. 이모 아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뭐 그렇게 자주 보는 사이는 아니야. 알다시피 걔가 좀 바빠야지. 

“인스타에 사진 올린 게 있는데. 그 뒤에 우연히 네가 걸려서 나왔어. 진짜 작게 딱 반만 나왔는데. 그거 보고 알아봤더라고. 다니엘이 너한테는 말하지 말래서 일단 가만히 있었어. 근데, 네가 연습생까지 한 줄 진짜 몰랐어. 노래 엄청 잘 한다며?”

재환은 딱히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그 당시에 알고 지냈던 누구와도 연락을 하지 않았는데, 다니엘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건지 궁금했었다. 재환은 이제야 퍼즐이 맞춰졌다. 아마 다니엘은 민현에게 대충 저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더 도와주려고 혈안이 되었을 테다. 하긴 병원비에 월세까지 밀린 형편까지 알게 됐는데, 다니엘이 더 알게 될 밑바닥도 없다.

“아무리 사촌이라도 남의 사생활까진 이야기 안 해.”

마치 재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민현이 말했다.

“네 이야기 안 했어. 그냥 맞다고 확인만 해줬고. 다니엘이 너 오랫동안 찾고 있었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야. 다니엘 말로는 엄청 친했었다 그러더라고. 근데, 재환아.”

이거 오지랖인 거 아는데. 민현의 시계를 들어 시간을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혹시 지낼 곳이 필요하면.”

“....”

“우리 집에서 잠시 지내도 돼.”

캐리어 끌고 왔길래. 여행 가는 분위기는 아닌 거 같아서. 원래 같았으면 단칼에 거절했을 재환은 망설인다. 갈 곳이 없다. 보증금을 다 까먹고 나온 터라 당장 단기임대로 집을 구할 돈도 없었다. 대식구가 사는 고모 집에 신세를 질 수도 없었고, 아버지의 병원에서 지내는 건 더더욱 말이 되지 않았다. 찜질방을 생각하고 있던 차였는데, 그 비용마저 재환에겐 무리인 상황이었다.

“학교 후문 쪽이야. 주소랑 비밀번호 문자로 보낼게.” 

교수님 호출 때문에 가봐야겠다. 집에 가보면 서재처럼 쓰는 방 하나 있어. 거기에 일단 짐 풀어놔. 아, 그리고 나중에 갚아. 월세 받을 거야. 네가 우리 집에서 지내면서 쓰는 것도 청구할 거고. 재환은 그 호의에 고맙다는 말조차 못하고 벙 쪄 있었다.

“아, 그리고 학교 관두는 건 좀 더 생각해봐. 열심히 해왔는데, 아깝잖아.”

문득 재환은 어젯밤 저를 찾아온 다니엘을 떠올린다. 우리 집 가자. 싫으면 딴 데 구해줄게. 네 노래, 천 번도 넘게 들었어. 다시 노래하자, 재환아. 간절하게 제 손을 잡아오던 다니엘. 그런 것을 생각하자 재환은 가슴이 저렸다. 민현의 집에 신세를 지게 된다면, 다니엘도 알게 될 것이다. 아마 서운할 것이고, 화가 날지도 모른다. 재환은 다니엘에게 더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아, 그리고.”

재환이 거절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 휴대전화기와 커피를 들고 일어서던 민현이 말했다.

“다니엘한테는 말 안 할게.”

걔 알면 나 완전 귀찮아져. 말하고 싶으면 네가 직접 말해. 민현은 이번에도 재환의 속을 읽은 사람처럼 말한 뒤, 급히 카페를 나갔다. 그와 동시에 문자가 도착했다. H 팰리스 1303호. 입구 비번 xxxx. 현관 xxxx.



카페를 나서던 재환의 앞을 가로 막은 것은 우진이었다. 잠깐만 시간 좀 내주세요. 거절을 하려던 재환은 어제 다니엘에게 주지 못한 돈을 우진에게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업까지는 시간이 10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혹시나 학교를 관두게 되더라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 하고 싶었다. 

“수업 때문에 시간 많이 못 내요.”

“아. 그럼 잠깐 저기 앉아서 이야기 하시죠.”

둘은 인문대 1층 휴게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재환은 앉자마자, 우진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이거 다니엘한테 전해주세요.”

“뭔데요?”

“병원비요. 나머지도 최대한 빨리 드릴게요.”

아, 진짜 신세 지는 거 엄청 싫어하네. 우진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형한테 직접 주세요. 저는 용건만 말씀 드릴게요.”

1시간 전, 우진은 일본에 있는 다니엘에게 전화를 한 통 받았다. 그리고 네 가지 사항을 전달 받았다. 이번 솔로 앨범을 끝으로 K엔터테인먼트와 결별. 라이즈의 멤버인 성우와 공동 대표로 소속사 설립. 소속사가 꾸려지는 대로 다음 솔로 앨범 발매. 그리고 그 앨범의 전곡을 'blue527'에게 의뢰. 마지막으로.

“저희랑 계약하시죠."

새 소속사의 첫 번째 신인 아티스트로 재환을 캐스팅하겠다는 것. 마지막 사항만 전달한 우진이 재환을 바라봤다. 가수로 계약하시는 겁니다. 대답은 다니엘 형한테 하시면 됩니다. 우진은 재환의 휴대전화기로 다니엘의 번호를 전송하고 일어섰다. 재환은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럼 다음에 뵐게요. 그렇게 말하고 인문대를 나선 우진은 굵은 빗줄기를 고스란히 맞으며 차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쉽게 그칠 비가 아니겠구나,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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