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식사 테이블에서 마주한 매드해터는 여전히 모자 스케치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서재에서 보았을 때보다 더 두툼해진 종이뭉치에 다이나는 한 번 놀랐고,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넘기고 나서 다시 쌓여가는 스케치들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평소라면 시답잖은 말장난과 잡담은 물론이고, 매드해터의 질문이 주제를 가리지 않고 날아오는 자리였으나, 오늘 매드해터는 제 몫의 홍차에 손도 대지 않을 정도로 일에 열중했다. 다이나는 그의 작업을 지켜보는 일 외에는 별달리 할 일이 없었다. 그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그녀는 최대한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거나 포크를 들려고 노력했다. 그래서인지 연필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손이 아름답다, 그녀가 생각했다. 평소에는 장갑을 끼고 있어 드러나지 않지만, 그의 손은 하얀 석고상 같았다. 손가락이 길고 뼈마디의 비율이 좋았으며, 손톱도 잘 다듬어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불빛에 유독 도드라져 보이는, 연필을 쥐고 움직일 때 슬며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손뼈나 핏줄 선이 매우 관능적이다. 하지만 난간을 짚는 폭이나 물건을 건네주는 손을 관찰해본 바, 이런 섬세한 손도 다이나보다 훨씬 크다는 게 놀랍다.


“다이나 아가씨,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다이나는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하인이 잠시 다이나의 곁에 다가와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아가씨 앞으로 도착한 우편물입니다.”


원래대로라면 아침에 신문과 함께 배달되었어야 했으나, 우편부의 착오로 저녁에 도착했다고 하인이 일러주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친절하게도 봉투를 뜯는 칼까지 마련해주고서 하인은 자리를 떴다.


“……흠.”


매드해터가 갑자기 소리를 내서, 다이나는 조금 놀란 눈이 되었다. 홍차가 식어가는 줄도 모르고 스케치에 몰두하던 그는 가만히 연필을 든 채 그녀를 지긋이 보고 있었다.


“누가 보낸 건지 질문해도 될까요?”


잠깐의 소란이 그가 집중하는 것을 방해한 모양이었다.


“잠시만요……. 대학 친구네요.”


봉투 겉에 귀여운 필체로 발신인이 적혀있었다. 크로노 크로노플럼. 기숙사 룸메이트들을 제외하면 대학에서 거의 유일한 친구였다.

편지를 펼치자 편지지 곳곳에 번진 잉크 자국이 있었다. 크로노는 워낙 덜렁대는 녀석이어서 무슨 일을 해도 그 성격이 드러나곤 했다. 자필 레포트도 그렇게 주의를 주는데 늘 잉크자국으로 지저분해지기 일쑤라 담당 교수가 차라리 타자기를 쓰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친애하는 친구 다이나.

오랜만이에요. 절대로 다이나가 먼저 편지를 쓸 것 같지 않아서 이렇게 먼저 보내요. 분명 내가 준 우리 집 주소도 어디서 잃어버렸을 테죠! 아니면 책 사이에 끼워두고 잊어버렸을 거예요.



편지의 첫 문단부터 뜨끔한 말로 가득했다. 양심에 가책을 느끼며 다이나는 다음 단락을 읽어 내렸다.



다이나가 매드해터 선생님의 저택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요. 궁금하다고 썼지만, 사실은 걱정이에요. 알다시피 그분은 상당한 괴짜로 소문났잖아요? 실제로는 매우 신사적인 분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요. 예전에 직접 뵌 적이 있는데 그분 생각은 여러모로 굉장하면서도 따라가기 힘들더라고요.



이 부분은 쓰다 머뭇댔는지 잉크 번짐이 유독 심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기행은 아니지만, 기상천외한 생각들인 건 분명해요! 설마 다이나를 하루 내내 잠도 안 재우고 모자 수천 개쯤 돌아가며 쓰게 하는 건 아닐지 모르겠네요.

다이나는 지난 여름방학 때 내내 기숙사에서 있었으니까, 올해는 그곳에서 푹 쉬었으면 좋겠어요. 다이나의 룸메이트들은 모두 좋은 애들이지만, 방학 때는 다들 집으로 가잖아요. 선생님의 저택에서는 다이나도 좀 더 재미있는 방학을 보낼 거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학교보다 재미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아침마다 늑장을 부린다거나 산책하러 나간다거나… 그 저택에서는 완전히 새로울 거 아니에요. 물론 나도 오랜만에 집에서 아침을 만끽하고 있어요. 할아버지께서 만드신 시계가 매일 6시에 칼같이 울려서 괴로운 걸 빼면 다 좋아요…….

참, 나도 조만간 그쪽에 갈지도 몰라요. 아는 사람이 해마다 파티를 열곤 해서 들를 것 같네요. 시간 괜찮으면 만나서 카페테리아라도 갈까요? 이런 거 대학 친구랑 꼭 한번 해보고 싶었거든요! 그 지역에 아는 가게가 있는데 아마 다이나도 좋아할 거예요.

그럼 나중에 봐요. 꼭 답장 보내줘요!

크로노.



편지를 읽고 나서 다이나는 두어 차례 헛기침했다. 양심이 찔리고 웃음을 참아야 했던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녀는 편지를 곱게 접어 봉투 안에 다시 넣었다. 당장이라도 답장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오늘 밤부터 써볼까, 그녀는 무슨 말을 써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안부 편지인가요?”


해터의 목소리가 편지 첫머리로 고민 중인 그녀의 정신을 두드렸다. 다이나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매드해터가 그 특유의 아리송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해터의 손은 그녀가 편지를 읽는 내내 멈춰있었던 것 같다.


“예. 그렇죠. 제가 먼저 편지 보내는 걸 깜빡해서 달래줘야겠어요.”


그제야 그가 미소 지었다.


“다행이군요. 요즘 이상한 편지가 많이 나돌고 있거든요.”

“이상한 편지라 하심은……?”

“다섯 통 똑같은 글을 보내면 행운이 찾아온다면서 실제로는 아무런 효능도 없는 편지라거나, 사기나 협박을 목적으로 하는 지저분한 글들이죠.”


저희 가게에도 가끔 오더군요, 그가 덧붙였다.


“정말 할 일도 없나 보네요.”


무심코 건조한 답이 튀어나왔다. 좀 더 정중한 어투를 써야 하는데! 다이나는 금세 입을 다물었다.


“맞는 말입니다. 읽는 것도, 쓰는 것도, 전혀 유익하지 않죠.”


해터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아가씨께 편지를 쓴 친구 분 이름은 뭔가요? 아가씨를 후원하는 사람으로서 알아뒀으면 좋겠군요.”

“……크로노 크로노플럼입니다.”


조금 뜸을 들인 후에 다이나가 답하자, 매드해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아는 이름이라 조금 놀랍군요. 크로노플럼이면… 가문 대대로 유능한 시계공이지요.”

“저도 얘기는 조금 들었어요. 크로노의 할아버님이 만드신 시계에 대해서요.”

“그분이 만드신 시계 중 하나가 저희 가게에도 있답니다! 1초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아서 다들 아주 좋아해요.”


다이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 저택에는 없나요?”

“오, 아가씨. 집에서도 시간에 맞춰 쉬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아, 그녀는 무언가 깨달은 눈치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한 번 크로노플럼의 도련님을 집에 초대하는 것도 좋겠군요.”


이 말은 다이나에게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진심이신가요?”

“물론이죠. 그러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 모두 안면 있는 사이이고.”


매드해터가 되묻자, 다이나는 말문이 막혔다. 자칫 실례인 발언을 할까 봐 그녀는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누군가를 집에 자주 초대하는 타입은 아니신 것 같아서요.”


다이나의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매드해터는 이미 식어버린 홍차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모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으나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어린 것 같았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꺼내본 말이었다. 그러나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다이나는 괜히 무안해졌다. 평소대로 표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매드해터가 이미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답을 기다리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다이나는 그를 따라 자기 몫의 홍차를 홀짝였다.

식어버렸군, 그녀의 미간에 미미하게 주름이 잡혔다.


“그러고 보니 미리 말씀드리는 걸 잊었군요.”


한참 뒤에 매드해터가 입을 열었다.


“사흘 뒤에 손님이 오시기로 했습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바로 옆집’에 사는 분이십니다만, 매번 방문하실 때마다 편지를 보내시지요.”


그가 말하다 말고 뭐가 재밌는지 키득거렸다.


“아침에 온 편지에는 반나절 정도 시간을 내달라고 하더군요.”

“그런 가요…….”


이 저택에서 모르는 사람과 얼굴을 맞대는 날이 올 줄이야. 그녀의 얼굴에서 어색함을 눈치 챘는지 매드해터가 사람 좋게 웃었다.


“제가 아가씨 곁에 온종일 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또, 그분이 편지에 아가씨를 꼭 보고 싶다고 쓰셨답니다. 이 기회에 안면을 터 두는 것도 나쁘지 않죠. 평판이 나쁜 분도 아니고, 아가씨의 견문을 넓히는 데도 도움이 될 겁니다.”

“친절하시네요. 말씀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매드해터가 스케치를 테이블 한쪽에 가지런히 정리하더니, 벨을 흔들어 하인을 불렀다.


“여기, 홍차 한 포트 더 부탁합니다. 뜨거운 거로요.”


그리고 다이나를 돌아보았다.


“아가씨도 더 드시겠지요?”


실크 모자에 달린 태그가 살랑 흔들렸다.


“물론이죠.”


다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나는 며칠간 크로노에게 보낼 답장을 썼다. 여태껏 써본 편지라고는 학교 교수들에게 보낸 형식적인 감사편지와 가족 장례식 때 얼굴도 비추지 않은 먼 친척들이나 한때 머물렀던 고아원에서 요구한 사무적인 근황 보고 뿐이었기에, 그녀는 꽤 고전했다.

편지를 쓰다 말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어보았다. 다이나의 글은 조금만 주의를 소홀히 해도 딱딱한 내용이 되기 일쑤였다. 편지를 받은 크로노가 울먹거릴 모습이 눈에 선했다.


“미치겠네…….”


룸메이트들에게 조언을 얻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려면 또 편지를 쓰거나 방학이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전자의 경우 편지 쓰는 방법을 편지로 묻는다니 굉장히 우스운 일이었고, 후자의 경우 학기 시작까지 편지를 미룰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이런 일에 전보를 칠 순 없잖아? 머리가 아팠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것이.


“책을 참고하면 되잖아?”


편지글이 실린 책은 얼마든지 있었다.

조금 뒤, 다이나의 책상에 책이 서너 권 쌓였다. 매드해터의 서재를 뒤져 찾아낸, 편지를 엮어 만든 수기와 편지 형식의 소설이었다.

친애하는 크로노, 로 운을 떼는 건 나쁘지 않았다. 많은 편지가 ‘친애하는’을 무난하게 쓰고 있었다. 그 뒤에는 보통 안부인사가 들어갔는데, 안부를 생략하고 본론부터 들어가거나 자신이 기거하는 곳에 대한 미사여구가 쓰이기도 했다. 친근한 표현으로 가득한 편지나 그림이 곁들여진 편지도 있었다.

문학과 별로 친하지 않던 다이나도 금세 책에 열중했다. 이렇게 물 흐르듯 편지를 써낼 수 있다니, 새삼 작문도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다이나의 방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불빛을 보고, 복도를 걷던 매드해터가 걸음을 멈췄다. 이런, 슬슬 잠자리에 들 시간인데요. 우리 아가씨는 밤샘이 일상이지요. 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펜이 사각거리며 글자로 종이를 채우는 소리, 펄럭펄럭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 흔들리는 등잔 빛에 지는 다이나의 그림자……. 멀리서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음, 다음 테마는 편지로 해볼까요? 봉투 모양인 모자도 재미있을 것 같군요. 밀랍 인장처럼 녹진한 장식도 좋지요.

그는 머릿속에 새 모자 디자인을 그려보며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원더메어와 보탈리아에 상시거주 중

룽크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