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하늘령





이와이즈미 하지메의 문제가 심각해진 건 한달 전. 평생 지기라 부를 수 있는 그 오이카와 토오루와의 동거 시작부터였다. 대학 졸업 후 바쁘게 지내오다 이직문제로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거처를 옮긴 이와이즈미와 대학 때부터 대도시에서 지내 왔던 오이카와. 그 둘이 함께 살기로 결정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릴 적부터 네 집 아니면 내 집 하며 구분없이 넘나들어 살던 습관. 도시의 비싼 물가에서 월세를 나눌 수 있는 경제적 이익. 예전처럼 하루종일 붙어지내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서로를 가장 잘 안다고 자부 할 수 있는 서로였기 때문이다. 



이와이즈미가 제가 사는 도시로 온다는 말에 반짝 눈을 먼저 빛낸 건 오이카와였다. 잘됐다 나도 마침 이사할때인데 여기 어때? 맘에 들던 맨션인데 가격대가 살짝 부담되서 고민 중이었거든 방도 세개고 거실도 넓고 햇볕도 잘 들더라. 열심히 제가 알아본 집들을 설명하는 오이카와의 열정에 이와이즈미는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아무리 친한 친구여도 가족같은 사이였어도 같이 살기 시작하면 백이면 백 싸우게 된다던데라는 고민도 들었다. 



이와쨩이 이 방 쓰면 되겠다 여기가 가장 햇볕 잘 들거든, 추위 많이 타잖아. 해헤-  신이 난 태도로 웃으며 말하는 오이카와에게 그러마하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유소년기부터 징그럽게 붙어다니다 대학과 사회 생활을 시작하며 서로의 틈이 느슨해진 건 오년쯤 되었을까. 다시 시작한 둘의 관계가 다툼이나 갈등이 생길지언정 그래 오이카와 토오루 아니던가. 그와의 사이가 얼마나 달라질 일이 있겠냔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 건 정말이지 경솔한 판단이었다.


***


아침은 간단히 먹거나 패스하는 오이카와와 달리 이와이즈미는 반드시 아침은 든든하게 챙기는 타입이었다. 먼지가 조금만 쌓인다 싶으면 예민하게 기침을 하는 오이카와와 먼지가 뭉쳐 굴러다닌다 싶으면 음 청소할 때인가 싶은 이와이즈미다. 그런 주제에 외투며 가방이나 휴대폰은 아무렇게나 손길 닿는데 툭툭 걸쳐두는 오이카와와 달리 이와이즈미는 모든 물건은 제자리에 두어야만 안심하는 편이었다. 밤늦게 거실에서 티비를 보다 잠들곤 하는 오이카와와 아주 작게 방에서 라디오 음악채널만 듣는 이와이즈미는 많은 것들이 상반되는 삶이었다. 대략적인 서로의 성격은 알고 있었지만 생활을 함께 한다는건 정말이지 다른 문제였다. 거기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 이와쨔아아앙!!  

- 뭐. 뭐야

- 헤 온김에 나 방 불 좀 꺼줘 

- ... 


귀찮은 놈



- 야 여깄던 청포도젤리 어딨냐 

- 앗 그거 이와쨩거였지. 오이카와씨가 티비 보면서 하나만 먹는다는게 그만.. 헤 미안. 


망할 놈


- 이번 주 빨래 당번 너 아니었냐

 - 응 했어

- 저기 널린 거 내가 따로 빨거니까 세탁기 돌리지 말라고 부탁했던 거 내 니트 아니냐?

 - 아.. 어쩐지 난 이와쨩이 이렇게 달라붙는 옷도 입나 취향 변했네 생각했는데 



썩을 놈, 이쯤 되면 일부러 이러는 건가 싶을 정도로 이와이즈미의 신경은 박박 긁히고 있는 반면, 말로만 사과가 빠른 오이카와는 몹시 편안해보이기만 했다. 아동복 사이즈로 쪼그라든 니트를 들고 첫 월급 타고 큰 맘 먹고 산 명품이었는데..... ,이와이즈미는 애써 분노를 삼켰다. 



- 너 임마 또 치약 중간부터 눌렀어? 

- 음 맞다 끝부터 짜는 거랬지. 까먹었어 

- 너 치약 쓰지마 앞으로 소금 써 

- 엑 이와쨩 너무해 나도 생활비 내잖아



사소한 것부터 시작한 싸움에 해결책은 철저한 기싸움으로 이어졌다. 처음 이와이즈미의 잔소리에 대응하며 오이카와는 치약도 두개 휴지도 방향 바꿔서 두개, 리모컨도 두개를 쌓아두기 시작했다. 쓸데없는데 돈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이와이즈미의 신경을 대단히 거슬리게 하는 일이었다. 물론 오이카와도 알고 한 일이다. 반면 오이카와와가 설거지 청소 집안일 등을 잊거나 미루기 시작하면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방에 쓰레기 몰아넣고, 양말을 설거지통에 처박아 넣기 시작했다. 이제는 서로 어떻게 하면 더 골탕을 먹일 수 있을까를 골몰하며 집안은 말그대로 전쟁터였다. 




- 이와쨩 진짜 너무해. 나 향수 뿌려도 냄새 안지워져! 


점심시간 시작부터 불이 난 오이카와 전화를 받고 약간은 뜨끔한 이와이즈미였다. 하지만 초장에 버릇을 고쳐놓지 않으면 안될거란 강한 예감이 들어 세게 나가기로 한다.


- 그러게 내가 재활용 제 때 분리수거 하라고 몇번 말했냐

- 그렇다고 자는 사람 옆에 쓰레기 인형을 만들어놔? 

- 멍청하게 그딴 걸 껴안고 잔 네 탓이지

- 알러지 생긴거 같아! 내 고운 피부에 뾰루지 날지도 몰라!

- 깨끗한 건 얼굴이랑 몸 뿐인게! 

- 더러운 사람 취급하지마 그러는 이와쨩이야말로 방책장에 먼지 한가득이잖아! 그 방 문만 열면 내가 기침이 나서

- 너 또 내 방 들어왔냐?! 

- 흥 이와쨩이 치사하게 젤리 숨겨두니까 그렇지



점심시간이 다 지나도록 한참을 전화로 티격대다 끊은 뒤, 작게 한숨을 쉬는 이와이즈미다. 그 뒤로 언제부터 듣고 있었는지 유난히 귀가 큰 직장 선배가 툭 이와이즈미의 어깨를 건드린다.  



- 얼굴 살벌하네 이와이즈미. 

- 아..  좀 화나는 일이 있어서요 

- 같이 산지는 얼마나 됐어? 

- 네? .... 아 한달정도



푸핫, 근데 벌써 그렇게 싸워? 아직 한참 좋을 때 아닌가? 묻는 선배의 질문 어감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그저 머리만 긁적이고 마는 이와이즈미다. 원래 좀 귀찮은 면이 있긴 했는데 .. 나이 먹고 더 유치해진 거 같아요 서로. 이런 걸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 머쓱하게 머리를 긁는 이와이즈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선배가 끄덕인다. 그래 나도 동거 해 봐서 알아 그거 잘못하면 묘하게 사람 피말린다고. 그래도 어쩌겠어 지금은 싸우느라 안보여도.



- 분명 여전히 이쁜 구석이 있을 걸 

- 네? 

- 그러니까 같이 살기로 맘 먹었던 걸 거고. 미운 구석보다 원래 보던 이쁜 구석을 다시 찾아봐 동거 선배의 팁이야.



여자친구와 함께 산다고 오해했나. 함께 사는 그 녀석은 원래 얼굴 빼고 이쁜 곳이 하나도 없는 왠수같은 불알친구인데요, 돌아서는 선배에게 이와이즈미는 굳이 말하지 않는다. 그저 프로필 사진에 상큼한 미소를 짓고 있는 녀석의 얄미운 얼굴을 손가락 끝을 튕겨 밀어버린다.




***



- 이와쨩 내가 .. 움 ..또 뭐 잘못했어? 


식탁에서 열심히 젓가락질을 하다 말고 더듬 거리며 오이카와가 묻는다. 아니 그런거 없는데. 이와이즈미가 대답하지만 오이카와는 경계를 늦추지 못하며 눈알을 굴린다. 아니 그러기엔 오늘따라 이와쨩 얼굴이 너무 무서운데. .. , 중얼거리는 오이카와 말에 이와이즈미는 그제야 제가 잔뜩 눈에 힘을 주고 오이카와를 바라보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뻐근한 미간을 누르며 이와이즈미가 고개를 숙인다. 일주일 하고도 하루 반나절 세 시간째.. 직장 선배의 조언대로 노력해봤지만 아직 오이카와 토오루의 이쁜 구석은 미지수. 어릴 땐 저 녀석이랑 어떻게 하루종일 붙어다녔던 거지. 고민하는 중에 이와이즈미의 밥그릇위로 노란 계란말이가 수욱-올라온다.


- 맛있네

- 그치? 물 대신 육수를 넣었다니 간도 맞고

- 아 그러고보니 오늘 식사당번 너였구나


그러고보면 오이카와 녀석 센스가 좋아서 인지 요리는 곧 잘하고, 설거지도 깔끔하게 하는 편이지. 음 이런 것도 이쁜 구석에 들어가나. 다시 심각해진 미간으로 저를 보는 이와이즈미를 보며 오이카와가 쿡 찌른 계란말이를 이와이즈미의 벌어진 입에 가득 찔러 넣는다. 칵, 뭐야 갑자기!, 안됐지만 그렇게 봐도..,  뭐?! , 오이카와씨의 잘생김을 이와쨩이 닮을 순 없을 거야. 보다 보면 닮아간다 이런걸 노리는 거라면 빨리 마음의 정리를 하는게...., 능글거리는 오이카와의 말투에 웨엡- 밥 위로 반 잘린 계란 말이를 그대로 뱉고마는 이와이즈미다. 예쁜 구석 하나에 밥 맛떨어지는 구십구인 오이카와 녀석을 다시 노려본다.



- 이와쨩 요즘 회사는 어때? 

- 어떻긴 똑같지


달그락거리며 설거지를 하는 오이카와 뒤로 리모컨을 멍하니 돌리던 이와이즈미가 성의 없이 대답한다. 흐음.., 어느새 설거지를 마치고 온 오이카와가 순식간에 이와이즈미의 뒷덜미 티셔츠 사이로 쑤욱 방금까지 젖었던 손을 밀어넣는다. 목부터 느껴지는 차갑게 젖은 손길에 오소소 소름이 돋은 이와이즈미가 비명을 지르듯 펄쩍 뛰었다.  


- 으악 악 악! 차가워! 

- 제대로 대답해줘! 


손 빼! 이게 너 또 장갑 안끼고 설거지 한거냐 차가워 멍청아! 마구 소리 지르며 버둥거려 보지만 어느새 오이카와의 길고 찬 손가락은 이와이즈미의 꿈틀대는 말랑한 어깨죽지를 지나 단단한 등뼈를 간지럽히며 내려간다. 어디까지 가려는 거야 미친놈이. 당혹스러운 눈으로 어쩐지 즐거워보이는 오이카와를 피해 쇼파에서 바닥으로 몸을 굴려 겨우 그의 손길에서 벗어난 이와이즈미의 눈이 험악하게 치켜뜨인다.  



- 흥 내 손보다 방금 이와쨩 반응이 훨씬 차가웠어! 

- 넌 매일 가는 회사가 다를게 뭐 있어서 매번 같은 걸 묻냐

- 똑같은 게 어딨어. 오늘은 해가 뜨고 내일은 옆 팀 대리 코털이 삐져나온기 웃기고 어제는 점심매뉴가 맛있고 조금씩 다 다른거지 

- 아니 그딴 사소한 걸 누가 다 기억해? 그리고 왜 궁금하단거야 

- 우리 같이 살잖아 

- 그게 뭐 

- 내가 없는동안 이와쨩이 뭐하고 지냈을까 난 엄청 궁금한데! 

- 별..


난 하나도 안궁금한데란 이와이즈미의 대답에 오이카와가 우는 척 손으로 눈을 가리고 흑흑 소리를 낸다. 가증스러운 목소리로, 당신 너무 변했어요. 이제 나에게 질린 건가요? 같은 막장드라마 대사를 흉내내기 시작한 오이카와의 반응에 질린 듯 이와이즈미는 이를 문다. 저렇게 한번 시작하면 한시간은 펼쳐지는 오이카와의 일인극을 상대하기에 퇴근 후 이와이즈미의 저녁시간은 너무 소중하다. 적당히 맞춰주고 얼른 포기시키는게 빠를 일이다.



- 점심으로 미소국 먹었어.

- 오늘 지하철 타는데 순간 노선 헷갈려서 잘못탔다 

- 세정거장 쯤 잘못내렸는데 오는 길에 어묵가게 봤었지 

- 그러고보니 앞집 고양이가 요즘 안보이던데. 냉동실에 멸치를 좀 둬볼까. 



중얼중얼 그렇게 이와이즈미가 혼잣말 같은 아무말을 지껄이는 중에 어느새 손을 내린 오이카와는 제 얼굴을 양손으로 받치고 이와이즈미의 말을 열심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더이상 할 말이 없어 머리를 긁적이던 이와이즈미는 헤에하고 웃는 오이카와를 향해 싱겁다는 듯 웃는다. 대부분 평소라면 오이카와가 말하고 이와이즈미는 추임새를 넣는 편이었지만, 막상 이렇게 오이카와가 귀를 기울이고 이와이즈미가 말을 시작하게 되면 끊임없이 이야기가 쏟아지곤 했다. 앞 뒤 없이 맹탕같은 소리를 한 거 같아 그 끝에는 매번 머쓱해지곤 했지만 오이카와는 어릴적부터 이와이즈미가 하는 말엔 온 몸을 다해 열심히 집중하는 편이었다. 저 집중하는 얼굴을 보면 어쩐지 계속 말이 하고 싶어져서.. , 이런 것도 이쁜 구석에 넣어야하나. 이와이즈미가 문득 생각했다. 



- 이와쨩 나 어제 출근길에 앞집 고양이 봤어! 배가 이만큼 나왔던데. 그러게 남자 고양인줄 알았는데 말야 

- 짜잔 오늘은 모듬 어묵탕이야 저번에 이와쨩이 말한 가게에서 포장도 되더라구 

- 주말에 약속없지? 나랑 지하철 타고 근처 돌아볼래. 뭐 동네 도 익히고 산책겸. 어때.



그러다 잊혀질쯤 지나가던 제 말을 기억하고 돌려주는 오이카와의 반응에는 한없이 마음이 말랑거리고만다.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이카와의 주말약속을 휴대폰 스케줄에 꾹 메모한다. 예전부터 알았지만 장난기는 많아도 퍽 다정한 녀석이라 생각하며 오늘은 이쁜구석이 맞는 거 같아 날짜안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린다. 사람 마음이란 게 참 웃기다라고 이와이즈미는 생각했다. 신기하게도 오이카와의 이쁜 구석을 찾아보려 마음 먹은 그 날부터 동그라미는 자꾸 쌓여갔다. 잊고 지낸 줄 알았던 익숙함이 친근함으로 또 편안함으로 어느새 간질거리는 기분 좋음으로 변한다. 어느새 오이카와의 약속을 메모하는 동그라미 개수가 네모칸을 가득 채워서. 빈칸을 보면 어색하고 허전한 기분마저 들었다 마치 그 옛날 매일 보는 얼굴을 주말에 또 보러 서로 넘나들던 그때처럼 말이다.  




***



- 미안 이와쨩 많이 기다렸어? 

- 아냐 좀 전에 왔어




퇴근 후 정했던 약속시간보다 삼십분 늦게 역 입구에 나타난 오이카와지만, 이와이즈미는 전처럼 화가나기 보다는 그저 요즘 야근도 잦더니 피곤하겠네. 얼굴도 상한 거 같고.. 라는 오이카와에 대한 걱정이 먼저 들었다. 뛰어오느라 상기되어 붉은 뺨과 땀으로 살짝 젖은 오이카와가 찬 공기에도 더운 숨을 내쉬는 걸 보며. 이와이즈미는 저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오이카와의 달아오른 에 툭 제 손을 올렸다.  바쁘면 다음으로 미뤄도 됐는데, 이와이즈미 가보고싶다 지나간듯 말한 일식당을 모처럼 예약한 오이카와에게 또 동그라미 하나를 마음으로 그린다.



- 춥겠다 들어가자



이와이즈미가 먼저 가게의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 뒤로 이와이즈미가 매만진 볼을 스윽 손등으로 멍하니 문질러보던 오이카와가 문이 닫히히 전 뒤늦게 따라 들어갔다. 잘 정돈된 넓은 정원을 지나 둘만 앉을 수 있는 방으로 안내받았다. 야 오이카와 여기 너무 비싼 거 아냐? 그러게 꼭 맞선 보는 장소 같다 그치, 소근거리며 초밥코스와 사케까지 곁들인 늦은 저녁의 자리가 이야기 꽃을 피우며 길어진다. 이제는 아까의 오이카와처럼 이와이즈미의 볼마저 술기운에 붉다.  



- 헤 이와쨩 취했어? 아까부터 왜 밥만 먹어?


이와이즈미가 입까지 가져가다 떨어뜨린 생선살을 집어 든 오이카와가 툭, 이와이즈미의 입안에 생선살을 밀어넣는다. 이와이즈미의 붉은 혀에 놓은 하얀 생선살을 우물거리는 모습에  오이카와는 시선을 떼지 못한다. 술기운에 젖어 느린 젓가락으로 그런 오이카와의 젓가락을 제 입술 앞에서 밀어내는 이와이즈미다. 내가 먹어. 에이 제대로 못먹으면서. 시끄러워. 이와쨩 잔소리만 많고 은근 허점투성이야. 알아? 내가 뭘 항의 하듯 소리치는 이와이즈미를 향해 장난스레 오이카와 의 눈이 빛난다.  



- 길도 매일 감각으로 찾다 잊어버리구

- 앞으로 가면 모든 길은 다 통해

- 정한 자리에 둔 물건 아님 기억 못하구

- 아무데나 두고 바로 찾는 네가 더 이상하거든?

- 간식도 아직 곤약 젤리 같은 거 먹구

-  매일 우유빵 달고 살던 네가 할 소리냐?

- 길가다 고양이들 보면 꼭 앉아서 인사 하려고 하구

- 사람 보다 고양이가 더 귀엽다



허점찾는다 더니 그냥 내 관찰 일기 썰을 푸네 저게.., 주륵 입술 새로 빠져나가는 술을 닦으며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에게 눈을 흘긴다. 내가 엉겨붙으면 질색하면서 자기는 툭 아무렇지 않게 사람 설레게 하고-, 징그럽게 그건 무슨 소리야, 아까도 이와쨩의 빈틈터치에 이 오이카와씨가 얼마나 심쿵했는 줄 알아? 이와이즈미 하지메! 이 나쁜 남자!, 팔짱을 끼고 샐쭉 고개를 돌리는 오이카와의 모습은 또 어떤 드라마를 흉내내는 걸까... 쯧 혀를 차며 이와이즈미는 자꾸 미끄러지는 생선을 집으려 젓가락 끝에 집중한다.  



- 어디 가서 그렇게 사람꼬시고 다닐거에요? 당신 다른 사람한테도 그래?



아직 역할 연기 안끝났냐? 한쪽 눈썹을 치켜든 이와이즈미가 대꾸도 하지 않자. 오이카와가 푸스스 웃으며 미끄러지는 생선살을 이와이즈미의 젓가락에 걸치듯 얹어준다.  그래도 역시 같이 살기 잘했단 생각들어, 흠 뭐 그렇지. 돈도 더 절약되고. 그런 의미에서 이거 하나만 더 시키자., 엑 이와쨩 내 지갑 다 털어먹으려고..!, 네가 나보다 더 벌잖아 빨리 시켜., 네네 알겠습니다., 장난스러운 말을 주고 받다 문득 오이카와가 반짝 눈을 빛낸다. 그러보니..,

 

- 이와쨩이 요즘 잔소리 너무 안해서 이상하지만

- 뭐 잔소리 할게 없으니까.. 

- 헤에 이상하다. 2주전만 해도 눈 뜨고 문 열자마자 이와쨩 잔소리 시작이었는데. 왜 요즘 너그러워졌지? 역시 내 사랑의 힘인가 

- 그딴 말만 안하면 내 마음이 더 태평양 같을텐데. 

- 지금도 오이카와씨는 이와쨩 마음에서 헤엄 치기 딱 좋은 걸요 

- 그만 쫌! 



오이카와 녀석과 다시 티격대다 문득, 이와이즈미가 조심스레 묻는다. 내가 좀 .. 잔소리가 많아서 힘들었냐?, 마침 추가로 주문한 음식을 이와이즈미 앞으로 놓아주며 음, 하고 오이카와가 어깨를 으쓱한다. 솔직히 처음에 약간. 뭐 그래도 이와쨩 원래 나 챙겨주려 하는 말이잖아 내가 기침해서 더 깨끗히 청소하고 집안일 하라고 했던 거잖아. 눈가를 찡긋거리는 오이카와의 모습에 삐죽 이와이즈미의 입술이 나온다. 



- 알면 말 좀 잘 듣지

- 죄송해요 엄마

-  좀 맞자. 등짝, 아니 엉덩이 대



장난스레 두 사람이 다시 킬킬대는 소리가 테이블을 채운다. 기분이 좋아서. 그래 예전의 어느 날처럼 녀석과 함께하면 이렇게 마음안이 잔잔하고 일렁이며 넓게 퍼져서. 오늘처럼 너그러워지고 태평양처럼 녀석을 품어주고 싶어지니까. 생각하며 오이카와가 놓아주는 음식을 아기새처럼 열심히 받아먹는 이와이즈미다.



느즈막히 가게를 나선 두 사람이 길을 걷는다 보름달이 크고, 어슴푸레 초저녁- 새벽같은 푸른 빛이 도는. 어릴 적 이렇게 조용히 나란하게 앞만 보며 걷던 그때의 기억이 난다. 



- 나 고향 떠날 때 펑펑 울던 거 기억나 이와쨩?

- 어떻게 잊냐 얼마나 추했는데



너무해, 볼을 부풀린 오이카와를 곁눈질하며 다시 이와이즈미가 키득거린다. 장난스레 머리를 털던 오이카와가 둥근 달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옆모습이 술기운 탓인지 어쩐지 처연하게 느껴져 이와이즈미는 시선을 뗄 수 가 없다. 그땐 뭐가 그렇게 불안하고 두려웠는지 몰라. 난 겁나 죽겠는데 이와쨩은 정말 나 이상한 사람 보듯 했잖아. 그때 이와쨩 했던 말 나 아직도 기억한다구, 내가 .... 뭐랬는데.,  이와이즈미의 물음에 그때의 그를 흉내라도 내는 것처럼 허리에 두팔을 올린 오이카와가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고 낮은 목소리를 낸다.


- 어디 딴 별나라라도 가냐 그만 울어 똥멍청이!

- 아 기억났다

- 완전 대충격

- 너 삐져서 한달동안 내 연락 피했잖아



맞아 그랬지 키득 대고 웃으면서 오이카와가 다시 고개를 흔든다. 그리고 한 달만에 고향에 뽀르르 내려와서 이와이즈미에게 왜 요즘은 나에게 전화 안하냐며 매달리고 진상을 부리던 기억까지.  



- 그땐 이와쨩 없는 삶이 상상도 안됐거든 

- 영영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 응 그랬지. 없어도 살아지더라. 우리도. 그치

- ...그렇지 



사람은 누구나 독립할 때가 오니까 가족도 아닌 친구야 이제는 자주 연락하지 않아도, 일년에 한번 쯤 안부를 주고 받는 사이가 되더라도 무엇이 대수겠는가. 최근까지의 오이카와와 저처럼 남들도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뿐인데. 그런데 왜 그말이 오늘따라 씁쓸한지. 입술에 남은 술맛탓일까. 그래도 이와쨩 다시 보니까 역시 좋아! 가로등 빛을 받아, 달빛을 등지고 웃는 오이카와 얼굴에 마음이 취한 것처럼 일렁이며 멍해져 오는 이와이즈미다. 굳이 묻지 않았던 말도 흐릿한 정신 탓에 흘러나오고 만다. 


- 새삼, 넌 회사 연봉도 꽤 되면서 굳이 나랑 살 필요 없었잖냐



잔소리도 많은 나랑 죽어라 싸우는 거 힘들텐데 아까보다 작아진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그만 이와이즈미 그만 말해. 스스로를 다잡아보려해도 오이카와가 저런 눈으로 보면서 이야기를 들어주면 멈출 수가 없어진다. 하지만 이와쨩이니까. 당연하단 듯 대답하는 오이카의 말에 쿵 가슴아래로 무언가 떨어진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와쨩인데 망설일 이유가 있어?, 차라리 질끈- 눈을 감았어야 했는데. 아주 오래 전부터 산들거리는 바람처럼 조용히 자신을 흔들던 오이카와의 태도. 나에게 이와쨩같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그의 말에서 오는 자신만 믿고 싶었던 외면한 마음. 세상 누구보다 너에게만 내가 특별한 존재라 믿고 싶은 믿음.  마주친 오이카와의 눈동자에 다시 쿵. 



- 이와쨩은? 



수많은 마음속 동그라미들이 일순간에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삐죽하게 한구석에 모가 난듯, 후욱 깊게 상처가 움푹 안으로 나는 것처럼. 욱신거리는 가슴께 대신 입안 볼쪽을 짓씹으며 이와이즈미가 겨우 뱉는다. 


- .... 좋아해.


일그러진 동그라미가 심장을 닮았다. 





***



- 이와이즈미. 살빠졌네.



오랜만에 만나는 어릴적 녀석들의 모임날. 오이카와보다 먼저 자리에  앉아있던 마츠카와의 말에 이와이즈미가 턱을 매만진다. 그런가, 잘 모르겠는데. 뻔하지. 오이카와가 또 얼마나 귀찮게 구는거겠어. 은근 유치하잖아, 마츠카와 옆자리에 앉은 하나마키가 알겠다는 듯 남겨짚어 말한다. 아냐 오이카와 안그래.., 라는 이와이즈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불쑥 튀어나온 팔이 이와이즈미의 어깨를 끌어안는다. 


- 너무하네 네들! 우리 사이 좋거든? 엄청! 그치? 이와쨩?

- 음 뭐..


뜨뜻미지근한 이와이즈미의 반응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하나마키가 절레 고개를 흔든다. 뭐야 이와쨩 그 반응 부끄러워하는 거야? 당신 우리 사랑이 흑 부끄러운거냐구! 또 다시 시작된 오이카와의 원맨쇼에 익숙하다는 듯 하나마키가 빈정대는 웃음을 지으며 땅콩을 집어던진다. 저 저 혼자 일인극 하는 버릇 아직도 못고쳤네 배우를 하지 그랬냐 임마!, 맞아 이와이즈미 저거 받아주지마, 하나마키와 마츠카와 둘 모두 손사레를 치며 오이카와를 향해 야유를 보내지만, 상관 없단 듯 혀를 내밀어 보인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어깨를 감싸던 팔을 자연스레내려 마치 연인처럼 팔짱을 낀다. 



- 사랑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네들이 불쌍해 

- 저거.. 오랜만에 만났는데 죽여버릴까



주먹을 꽉쥐는 하나마키를 응원하며 마츠카와가 두팔을 응원하듯 들어올려 들썩인다. 하나마키 고 고! 저 마왕을 물리쳐줘!  시끄러운 세 사람 사이에서 이와이즈미는 시선을 들어올리지 못한 채 온통 오이카와와 닿고 있는 팔에 신경이 쏠려있다. 쿵 쿵 왼쪽가슴의 박동이 팔까지 흘러드는 거 같아서. 겨우 진정시키며 물잔만 비워본다. 먼저 팔을 빼지도 놓으란 말도 하지 못한채 왁자지껄 웃는 중에도 팔을 비비듯 스치는 오이카와의 체온에 어지러움을 느끼며. 이와이즈미는 허공을 헤매던 젓가락을 놓아버린다. 


- 응? 이와쨩 왜 안먹어 이거 이와쨩 좋아하는 안주잖아


당연하다는 듯 앞 접시에 볶음요리를 놓아주는 오이카와의 손짓을 그저 이와이즈미는 멍하니 바라본다. 뭐야 진짜 네들 나이 먹어도 변하는게 없냐? 그러니까 계속 사귄다고 소문이 나지., 이거 먹어봐 저것두하며 챙기는 오이카와와 내가 먹을게 이제 너 먹어하며 사양하는 이와이즈미의 모습에 혀를 차며 하나마키가 놀리듯 웃는다. 


- 그거 소문 아닌데? 진짠데?


동그랗게 오이카와가 눈을뜨고 그런 오이카와를 밀치듯 팔을 빼고 인상을 찌푸리는 이와이즈미의 반응에 다시 와하하 웃음이 터진다. 여기서 태연함을 연기하고 있는 건 아마 넷 중 이와이즈미일뿐일테지만 말이다.  


- 아 잠시만.


오이카와가 잠깐 통화를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그제야 이와이즈미가 크게 숨을 내쉰다. 좁은 복도를 빠져나가 가게 유리문 앞에서 웃으며 통화를 하는 오이카와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느라 이와이즈미는 하나마키와 마츠카와가 말없이 저를 보는 것도 뒤늦게 알아챘다. 뭐... 뭐야., 혹시나 제 시선을 들킨것일까 뜨끔해져 이와이즈미아 괜히 큰소리를 내며 둘의 시선을 피한다 



- 이와이즈미 조금 .. 스타일이 변한 거 같네.



 마츠카와의 말에 하나마키가 동조하듯 끄덕인다. 맞아 묘하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와이즈미 사복으론 후드티에 점퍼 좋아했잖아? 근데 지금은.. 두 사람의 시선을 따라 이와이즈미도 제 옷차림을 눈으로 더듬는다. 깔끔한 흰 셔츠에 베이지색 니트조끼, 남색 차이나칼라 재킷에 평소라면 질색했을 편한 운동화가 아닌 검은색 로퍼. 맞아 말 안했으면 너 오이카와 옷 입은 줄 알았을 거야라는 하나마키의 말에 괜히 가슴이 뜨끔하다.



- 같이 살다 보니까 좀.. 영향을 받았나봐.



변명하듯 더듬거리는 이와이즈미의 말에 그런가, 하긴 둘이 엄청 붙어다니지? 퇴근하고 또 집에 오이카와라니 크 이와이즈미 사리나오겠어 하나마키의 말에 피식 이와이즈미가 웃음을 흘린다. 


- 뭐야 나 빼놓고 무슨 이야기해?

- 네들 커플룩 입은 이야기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오이카와의 말에 마츠카와가 무표정하게 대답하고 푸핫 오이카와가 웃는다. 하지만 이와이즈미의 입꼬리는 미세하게 떨린다. 


- 흥. 거봐 우리 잘 어울리지?


오이카와의 장난에도 어쩐지 아까같은 웃음이 터지질 않는다. 어 뭐야 이 반응? 머쓱한 듯 앞자리의 하나마키와 마츠카와를 보던 오이카와가 둘의 시선을 따라 제가 머리를 기댔던 이와이즈미를 올려본다. 형편없이 구겨진 이와이즈미의 평소 까무잡잡한 편인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있다. 야 임마 사과해. 오이카와. 이와이즈미 진짜 싫은가봐- 하나마키의 말에 급하게 먹은 안주가 체한 거 같다는 핑계를 둘러 대며 이와이즈미가 뒤늦게 웃었지만, 분위기는 어색하게 가라앉았다. 조금씩 눈치를 보며 네 사람은 익숙한 학창시절, 과거 이야기를 나눈다. 추억을 되새기며 마치 그 때로 돌아간듯 조금씩 편해진 이와이즈미가 하하 크게 웃고나서야 묘하게 이와이즈미를 살피던 오이카와의 시선에도 안도의 빛이 돌았다.


- 이와이즈미

- 응?


 2차 모임을 여기로 가자, 아니다 저기로 가자하며 실랑이 하는 하나마키와 오이카와의 뒤 에서 조금 떨어져 걷던 이와이즈미가 마츠카와의 부름에 고개를 돌린다. 짙은 눈썹을 평소보다 더 내리고 저를 찬찬히 살피는 마츠카와의 얼굴에 의아한 듯 이와이즈미가 눈썹을 올린다. 필요하면 연락해, 무슨 ..? 뒤의 말을 줄이고 이와이즈미는 마츠카와와 빤히 시선을 맞춘다.   


- 그냥 어디든 하고싶은 말이 있으면. 뭐.. 오이카와에게는 못할 말이라던가.

- ... 혹시 티 났어?


약간 잠긴 목소리로 묻는 이와이즈미의 말에 마츠카와가 슬쩍 앞서가는 오이카와의 등을 바라본다. 아까 오이카와가 여자 전화 받으러 나갈 때.. 너 얼굴에 다 드러나더라, 꾹- 입을 다물고 걸음이 한참이나 느려진 이와이즈미의 쳐진 팔을 마츠카와가 슬쩍 붙잡는다. 왜 지금이냐..? 마츠카와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인상을 찌푸린 이와이즈미의 얼굴이 어둡다. 그 얼굴을 보며 마츠카와는 그저 절레 다시 고개를 흔든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여튼.. 


- 혼자 너무 앓지 마라, 이와이즈미.




***



- 저.. 이와이즈미씨 여기요 

- 아.. 감사합니다.


옆팀의 유리상이었던가. 상큼한 표정의 일자 앞머리를 한 그녀는 불쑥 모니터와 이이와지미 얼굴 사이로 손을 뻗어 포장된 작은 상자를 내민다. 얼결에 상자를 받아 꾸벅 고개를 숙인 이와이즈미를 놀리려 근처의 선배가 쭈욱 고개를 빼든다 유미씨 뭐지 왜 내 거랑 이와이즈미거랑 포장이 이렇게 다른거야? 난 대충 한 비닐포장인데 .. 이와이즈미건 고급 리본에.. , 선배의 짖궃은 농에 유미씨는 후다닥 사무실문을 밀고 자기팀쪽으로 쏙 사라진다. 책상에 가만히 상자를 두는 이와이즈미를 보며 툭 선배가 옆구리를 찌른다 


- 귀엽지 저 애?

- 네?


잘해봐. 뭣하면 내가 연결해줄수도 있어.하며 자기일처럼 들떠하는 직장선배를 보며 이와이즈미는 손사레를 친다. 요즘 얼굴도 까칠하고.. 역시 헤어진 거?, 무슨.. 그런거 아닙니다.이와이즈미가 동거하는 여자친구가 있다고 오해하던 선배는 티가 나게 울적해보이는 이와이즈미를 제 멋대로 실연당했다 생각한 모양이다.  


- 그래도 여자친구는 다정하고 사근하고, 이런 귀여운 이벤트도 하는 그런 사이가 좋은 거잖아?


톡. 이와이즈미가 책상끝에 둔 초코상자를 안으로 밀어넣은 뒤 선배가 사라진다. 후우.., 긴 한숨 뒤에 이와이즈미는 사무실 왼쪽 서랍을 열고 상자를 넣는다. 그리고 멈칫. 제가 사둔 10개의 초코렛이 든 유리 상자를 본다. 오이카와가 좋아하는 제과점에서 산, 오이카와가 좋아할 거 같아 문득 집어들고 말았지. 보통의 귀여운 여자 아이처럼 무엇으로 포장해도 덮을 수 없고 감출 수 없는 제 마음이 드러날 거 같아서. 달각- 뚜껑을 열고 우물, 입안에 밀어넣어본다. 


- 너무 달... 다


겨우 하나를 먹은 뒤에 혀끝까지 아릿해져서 다시 뚜껑을 덮어두고만다.  




***


도착한 집에는 오이카와가 받아온 고급 초코릿 상자들이 여러 개 놓여있었다.  학교 다닐때와 다를게 없네. 잠시 쌓인 상자들을 보다 제가 들고온 쇼핑백을 한쪽에 두고, 이와이즈미가 회색 자켓을 벗는다. 막 씻고 나온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를 발견하고 반가워하며 달려온다. 그런 그가 대형강아지 같다고 이와이즈미는 문득 생각했다. 허리를 껴안으며 덜 마른 머리칼을 등에 부비려는 오이카와를 제지하고 이와이즈미가 발길질로 그를 떨어뜨린다. 뾰로퉁하게 볼을 부풀린 오이카와는 밖에서 주인이 가져온 사냥감을 점검하는 강아지처럼 기웃거리며 이와이즈미 주위를 멤돈다. 야.. 오이카와- 부르지만 그는 성의 없이 응응 대답할 뿐이다. 



- 너 토요일에 뭐하는데? 

- 토요일? 흠 아직 계획없는데

- 그럼 영화보러 갈래? 너 저번에 광고 나올때 보고싶다던 거.

 - 헤에 이와쨩 그거... 데이트 신청? 



공짜표 생겨서 그런거거든, 반짝 눈을 빛내는 꼴이 보기 싫어 일부러 눈을 피한 채 등을 돌린다. 뭐가 재밌는지,  흐응 부끄러워하는 거봐- 하는 오이카와의 웃는 말을 애써 무시한 채 삐죽 입술을 내민 이와이즈미다. 그쪽으로 다가온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가 가져온 쇼핑백 안에서 쑤욱 초코릿 상자를 꺼내든다.  엇 나 여기 초코 좋아하는데! 하필이면 오이카와가 집어든 상자가 이와이즈미가 샀던 투명한 유리 박스의 10개에서 9개 남은 초코릿이었다. 이와쨩 나 이거 먹어도 돼? 대답도 듣기전에 달각- 유리상자를 열어젖힌 오이카와다. 

 

- 음 음 역시 여기거 딱 내취향 

- 안그래도 많이 받았을 놈이 지겹지도 않냐 


흐응 포장만 요란하고 내용물은 싸구려녹여서 만든거거나, 그냥 비싼 향료만 들어간거더라구-  취향이 아니면 아무리 비싸고 고급스러워도 전형 즐기지 않는 오이카와의 취향은 변함이 없다. 은근 외곩수라니까.. , 즐거운 듯 한쪽 불을 볼록하게 초코를 녹여먹는 오이카와를 보니, 피식 웃음이 새어나온다. 그래 너 다 먹어라.. , 중얼거리며 이와이즈미가 타이를 풀며 욕실로 걷는다. 다행이네 주인 찾아가서.. 중얼거리는데 오이카와 응 뭐라구? 하며 되묻는다. 


- 그거 다 먹고 이닦아! 

- 아웅 엄마는 잔소리쟁이



씻고 나오자 마자 보이는 빈 상자만 굴러다니는 풍경에 허, 이와이즈미가 혀를 찬다. 임마 이걸 다 먹었어? 이 썩는다구! 하기싫어도 잔소리를 하게 만드는 오이카와를 향해 눈을 흘기자 합, 하고 막 마지막 초코릿을 입술에 문 오이카와가 주루룩 다가온다. 미안미안 나 혼자 먹어서 자. 여기. 제게 다가오는 오이카와를 향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주춤 이와이즈미가 뒤로 물러선다. 뭐하냐..? 묻는 말에 오이카와는 그저 고개만 갸웃한다.


- 나눠 먹기?


입에 반쯤 초코릿을 문채 쭈욱 오이카와가 입술을 내민 꼴에 장난이란 걸 알면서도 순간 눈빛이 떨리진 않았을까 걱정이 들어 재빨리 꾹 그의 이마를 눌러 얼굴을 밀쳐낸다.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말리던 수건으로 파리 쫓듯 탁 오이카와의 엉덩이를 내리친다. 제발 이런 짓 좀 하지마 그리고 우..?, 엉덩이를 찰싹 맞고도 위잉 소리를 내며 한바취 돌아온 오이카와가 꾸욱 잔소리를 쏟아내는 이와이즈미의 볼을 눌렀다. 앙 소리와 함께 반은 오이카와의 입으로 사라지고, 남은 반이 똑 하고 이와이즈미의 입으로 초코릿이 넘어온다.  



- 미... 친....! 

- 헤헤 간접키스?



퍽퍽 수건을 채찍처럼 후려치는 이와이즈미를 피해 후다닥 오이카와가 제 방으로 사라져 문을 잠근다. 죽어..! 하고 퍽 젖은 수건이 오이카와의 얼굴대신 방문을 때리고 주르륵 떨어진다.  씩-씨익- 숨을 몰아쉬던 이와이즈미가 쿵쾅거리는 가슴을 쥐며 주르륵 주저 앉는다. 저 녀석이 계속 저러니 .. 심장이 남아나겠냔 말이다. 전에는 그저 짜증나고 불쾌한 성을 돋구는 질낮은 장난으로 치부하던 것들이. 이제는 가슴을 간지럽게 하고 이불을 뒤척이게 할 만큼 마음을 어지럽힌다. 덤덤하게 굴어야지. 티내지 말아야지. 반응하지도 않아야지. 밤새워 가며 했던 다짐은 저 녀석의 장난스런 미소 하나에 모두 녹아나버린다. 헛되게도...  지나치게 입안이 달다. 




오이카와와 약속한 토요일 영화를 떠올리며 보송하게 마른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는 이와이즈미다. 검색한 영화 예고편과 소개글을 읽어본다. 평소 액션이나 SF효과가 화려한 시리즈를 좋아하는 저와 다르게 오이카와는 서정적이고 색감이 아름다운 로맨스나 고전영화를 꽤 즐겨보곤 했었다. 이번에 보고싶다던 영화도 꽤 예전에 나왔던 고전영화를 새로 리메이크한 버전이라고 했다. 클래식하고 풍성한 드래스를 입은 여자와 중후한 콧수염을 매단 남자의 대충 봐도.. 사랑 이야기겠거니싶다. 이런 건 정말 제 취향이 아니었는데. 예전같으면 오이카와에게 끌려가서 두세시간쯤 푹 자고 나와버렸겠지. .. 익숙하게 어플을 누르자 음악 재생목록이 주르륵 올라온다. 그러고보니. 언제부터인가 제가 듣던 익숙한 음악 대신. 평소 유치하다고 비웃던 오이카와가 듣던 발라드들이 가득하다. 녀석은 멜로디보다 가사가 좋은 음악을 좋아한다고 했었지. 찬찬히 가사를 들여다보며 음악을 듣다가 몇번은 찔끔 눈물이 나기도 했다. 뭐가 이렇게 슬퍼 .. , 몰랐다. 세상에 이렇게 짝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을 줄.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 사랑에 빠졌다가. 다시 그를 위해 놓아주는. 수많은 사랑 노래 가사들이. 자연스럽게 오이카와와 저로 대입되어서 어느 날은 이불을 입에 말아넣고 울었다. 서러워. 혼자하는 사랑은 이렇게 궁상이다. 




***


- 와... 이와쨩 눈 붕어예요? 

- 건드리지마라..


마구 눈을 비비며 울고나면 이렇게나 눈두덩이가 부어버리는 걸 직접 경험으로 체득했다. 아침에 방문을 열고 나온 이와이즈미를 발견하고 물을 마시다 그 몰골에 놀라 켈럭대던 오이카와가 이리저리 얼굴을 살피는게 느껴진다. 지금은 눈만 마주쳐도 이게 다 너때문이다 이자식아! 같은 말이 튀어나올지도 몰라서. 끅끅대며 이와이즈미는 울컥한 마음에 맨 밥만 밀어 삼킨다. 이와쨩 그러다 체해.. 하며, 식어버린 국 대신 데운 국을 다시 가져다주는 오이카와의 쓸데없는 다정함에 또 밤새 얼려둔 마음이 녹는다.  



- 국이랑 같이 먹어 응? 그리고 오늘 빨래는 그냥 내가 했어. 마침 눈이 일찍 떠져서. 나 잘했어?



애교라도 떠는 건가.  오이카와가 종알 거리는 소리에도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이와이즈미는 겨우 국을 한술 떠 스읍.. 하고 마실뿐이다. 따뜻한 국에 속이 조금 풀린다. 그럼 나 먼저 나갈게. 저녁에 집에서 봐. 점심도 거르지말구 이와쨩. 알겠지? 참.. 오후에 소나기 온대. 신발장 앞에 우산 놔둘게 꼭 챙겨가. 출근 준비를 하며 이리저리 움직이던 오이카와의 말에도 대꾸 한번 하지 않은 이와이즈미다 빨리 가버려 망할 녀석, 혼잣말을 중얼거리는데 현관앞에 서 있던 오이카와가 갸웃 중얼거린다. . .. 요즘 우리 이와쨩 사춘기인가. 등 뒤에서 중얼걸리는 오이카와의 말에도 이와이즈미는 돌아보지 않은 채 삐죽 입술만 내민다. 


- 다녀올게 이와쨩-


어느 새 다가온 커다랗고 따뜻한, 끝이 단단하고 다정한 손이 삐죽한 이와이즈미의 정수리 머리칼을 부비대며 지난다. 탁. 다시 문소리가 날때까지 가만히 굳어있던 이와이즈미가 크게 숨을 삼키고 내쉰다. 혼자 키운 마음은 손짓 한번에도 이렇게 철렁거리는가보다.  




***



- 미..밀지마! 



멍하니 앞니로 잘근대며 종이컵을 씹던 이와이즈미가 소란에 고개를 돌린다. 귀 끝까지 발그레한 얼굴을 한 .., 아 유미상이었던가. 안녕하세요., 꺅! 아니 네!, 이와이즈미가 먼저 인사를 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는지. 유미는 화드득 놀란 얼굴로 뻣뻣하게 굳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다. 저.. 저... 번에 드린 초코릿은 입에.. 맞으셨... , 아. 네 잘먹었어요. 감사인사도 따로 못드리고, 아뇨! 그런걸 바란 거 아닌데요!, 양손을 마주잡고 시선도 채 마주치지 못하는 유미의 모습이 어쩐지 제 모습과도 겹쳐보여 이와이즈미는 씁쓸히 웃고 만다. 


- 이와이즈미씨 그.. 스포츠 경기 좋아하세요? 


마침 농구 경기 티켓이 2장 생겨서, 이쯤되면 이와이즈미도 모른척하기 어렵다. 저 실은..., 이와이즈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괜찮아요! 씩씩하게 고개를 든 유미의 앞머리칼이 펄럭인다. 네? 되묻는 이와이즈미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그.. 여자친구분과 둘이 보세요 그럼!, 대답하며 그녀가 가슴팍에 확하고 떠민 농구표를 쥐고 이와이즈미의 자세가 어정쩡하게 굽어진다. 거절하려던건 맞지만 어쩐지 선수쳐진 거같은 이기분은 뭐지. 사실 전 혼자 좋아하려던 거라서요! 커다랗게 눈을 뜬 유미의 앞머리칼이 다시 펄럭인다. 

 

- 네?

- 죄송해요. 여자친구 있다는 소문도 들었는데. 사람 마음이 마음대로 안되니까요. 

- 네..?


바보처럼 이와이즈미가 얼머부리는 동안 유미는 씩씩하게 다시 고개를 숙이고 사라진다. 참 용기있는 사람이네. 받아든 티켓을 안주머니에 꽃고 이와이즈미가 컵을 쓰레기통에 넣는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려다 멈춘다.  


엉엉엉. 어떡해 나 엄청 바보같았던 거 같아요. 여자친구 있는거래 역시? 아니요오오. 그런데 좋아하는 ... 엉엉 사람 있대요. .. 유미 포기하지마 그럼 아직 기회가 있는 거잖아! .. 엉엉 몰라요. 그래도 마음이 너무 아파요. 엉엉.. 고백하지 말걸. .. 


유미의 울음이 잦아들어 사라질때까지 벽에 기대어있던 이와이즈미의 콧잔등도 시큰거린다. 마치 제가 고백을 하고 차인 것처럼. 차라리 몰랐다면 모를까. 고백을 받고 나니 알게 된다. 생각지도 않은 마음이 주는 이도, 받는 이도 똑같이 당혹스럽고 무겁다는 걸. 고백하지말걸 그랬다는 울음 섞인 그녀의 말이 제 목소리로 자꾸만 오버랩된다. 



***



- 이와쨩.. 문..열어줘..!!  



쾅...! 문에 머리가 세게 박히는 소리에 티비를 보다 어설프게 잠이들어 거실에서 꾸벅 졸던 이와이즈미가 번쩍 눈을 뜬다. 시간은 밤 12시를 지난 지가 한참. 서둘러 문을 열자 마자 제게 쏟아지듯 안기는 사람의 무게를 버티며 이와이즈미가 인상을 구긴다. 


- 떡이 됐네 

- 헤헤 이와쨔앙 나 기다렸어?

- 기다리긴 뭘 기다려 조용히 들어와 이웃에 민폐다 


사실 기다린거 맞다. 오이카와 회사는 실적 위주에 연봉도 높지만, 가끔 이렇게 사람 잡을 만큼 빡센 회식문화를 가지고 있으니까. 술을 꽤 하는 편인 오이카와가 이정도로 인사 불성으로 들어오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내일 머리아플텐데.. 다행히 토요일이니까. 내일 푹 자게 영화는 그냥 취소할까.., 생각하며 낑낑 오이카와를 들쳐매듯 끌고 침대 위로 눕힌 이와이즈미다. 이와쨔아앙. 나 답답해.. 이와쨔아앙 나 무울.. ,  



- 으 진짜 귀찮은 놈! 



면박을 주면서도 오이카와의 셔츠 단추룰 플어주고, 꽉 매어진 허리 버클도 열어준다. 따뜻한 물수건으로 박박 얼굴을 닦는데 따갑다고 낑낑거린다. 힘이 너무 셌나 볼 건 얼굴뿐인 놈인데.., 손가락 끝에 수건을 감아 톡톡 닦아주자 간지러운지 또 푸스스 웃는다. 좋냐. 이 왠수야. 살짝 이마를 꾹 눌렀다 젖은 앞머리칼을 떼어 옆으로 살살 넘겨주는 이와이즈미다. 잠든 오이카와의 하얀 얼굴에 긴 속눈썹 그림자가 진 얼굴을 가만히 바라본다. 몽글몽글하게 가슴안이 따뜻하게 뭉쳐오고 뻐근하다. 언제 이렇게.. 커져버렸냐 오이카와. 내 마음에서 뭐든 다 밀어내고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한거야. 이 욕심많은 놈아.  왜 이제 와서.., 이십년 가까운 친구였는데. 난 너와 더 뭘 하고싶어진 걸까. 손을 잡거나, 어깨를 감싸거나 이따금 포옹을 하는건 다정한 네 성격탓에 넘치게 하고 있지.  길을 같이 걷고 커피를 마시고,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고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잠드는 것조차 운이 좋아서 이렇게 함께 하고 있는데. 자꾸 입가가 머뭇거리고 눈가에 고여온다. 더. 조금만 더. 욕심이 난다. 더이상 내어줄 것도 없는 내 마음에서 이 마음 계속 가지고 있어도 될까 오이카와. 나도 조용히 혼자만 품을게. 돌이켜보니 오랜 기억속에서. 네가 내 오랜 기쁨이고 위로였어서, 사랑이 된 것도 놀랍지가 않은데. 다만 내 마음이 널 무겁게 할까봐 그건 조금 겁나니까.  



- 이와... 쨩

- 응? 왜 물 더 줄까?


오이카와를 물끄러미 바라보느라 녀석이 무거운 눈꺼풀을 올리고 있는 것도 뒤늦게 알아챘다. 내민 물잔을 조금 고개를 들어올린 녀석의 입술에 대어주고 꿀꺽이며 한잔을 다 비운걸 본 뒤에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는데 오이카와가 기다란 팔을 뻗어온다. 헤헤 웃는 얼굴이 환하고 달빛을 등 져 하얗게 보인다.  뭐야... , 오이카와에게 꽉 잡힌 팔에 삐죽 입술을 내밀고 눈을 흘기면서도 못이긴척 이와이즈미는 다시 침대로 걸터앉는다. 

이와쨩 내가 좋아해... , 중얼거리는 그의 말에 가슴안이 다시 빠듯해져온다. 숨이 가빠지는 걸 애써 가다듬고 퉁명스러움을 가장한다. 뭐래 징그럽게 , 진짜 진짜 좋아한다구우.. 응? , 그래그래 알았다. 취해서 횡설수설 하는 주제에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듯 이와이즈미의 팔을 가슴팍에 꼭 끌어안는 오이카와다.  


- 이와쨩 

- 왜 불러


껴안은 팔위로 스치듯 제 팔을 올리더니 오이카와가 깍지를 끼고 제 입으로 이와이즈미의 손끝을 가져다댄다. 긴장 되는 마음에 꿀꺽 이와이즈미가 침을 아프게 삼킨다. 술에 취해 풀린건지 평소보다 짙은 오이카와의 헤이즐넛 눈동자가 저를 올려보는 것도 어지럽다. 뿌리쳐야 싶은데,  


- 난 진짜 이와쨩이 소중해 

- .. 

- 정말이야 

- .. 너 무슨 말이 하고싶은 거야. 


경고음이 울리듯 머리가 지끈대고 숨이 막힌다. 난 이와쨩 아프고 속상한 거 싫어. 우리 이렇게 계속 이렇게 지내자. 응. 조르듯 웃는 오이카와 얼굴이 저처럼 불안정해보인다. 녀석이 꼭.. 무언가를 아는 것처럼. 굴고있다.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만.  더이상 오늘은 아무 말도 하지말고. 오이카와. 속으로 애원하며 녀석의 중얼대는 입술을 손바닥으로 꾹 누른다. 닿은 안쪽이 타들어가는 기분이다. 반짝해보이던 녀석의 눈꺼풀이 다시 무거운 듯 스르륵 감긴다. 다행이라 생각하며 이와이즈미가 느리게 숨을 쉬는데 잠결인 중에 오이카와가 숨을 쉰다.  


- 이와쨩이 친구라서 정말 다행이야 ..  


콱, 

오이카와의 말이 이와이즈미의 숨통을 틀어쥔다.




***



토요일 오전, 사람이 많은 것은 것은 오이카와도 저도 좋아하지 않아 이른 시간에 예매해둔 영화다. 넓은 좌석에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앞좌석의 중년 아저씨는 시작한지 오분만에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말인 즉슨, 이 영화를 집중해보는 건 이와이즈미 혼자란 소리기도 하다. 영화가 한참 진행되고 풍경이 바뀌는 걸 멍하니 보던 이와이즈미는 어쩔 수 없이 오이카와를 떠올리고 만다. 


- 영화가 .... 오이카와 같네 


색감이 반짝거리고, 다정한 공기처럼 느리게 전개된다. 속을 알 수 없는 겉핥기 대사만 주고 받던 주인공들이 사랑에 빠져 있다. 다정하게 여자의 손을 잡고 산책하듯 공원을 걷는 남자의 눈빛은 연기겠지만 사랑에 빠진 듯한 그대로다. 사랑은 감출수가 없는 거니까. 어쩌면 나도.. 저런 눈빛이었을까. 그러니까 오이카와가 안다. 알아버렸다. 그리고 아마도 어제 그 말은 진심을 담은 거절이었겠지. 혼자 담으려했는데 욕심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영화에서 죽을만큼 사랑하던 연인이 헤어지고 있다. 운명이라는 둥, 서로를 위해서라는 둥, 마음이 찢기는 것처럼 눈시울을 붉히더니 서로 등을 보이고 멀어진다.  흐..으..., 가만히 고개만 겨우 떨구고 무릎이 새까맣게 물들도록 이와이즈미가 가쁜 숨을 토한다. 그러니까 이건 저 주인공들 대신이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 




***




이와이즈미의 첫사랑을 목격한 적이 있다. 그저 무심해보이던 소꿉친구 녀석이 어느날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웃고있는 모습은 참 생경했다. 이와쨩 여자친구 생겼어? 오이카와의 질문에 당황스러운 눈을 데굴 굴리던 모습까지. 티났냐? 머쓱하게 머리를 긁는 그를 향해 응 나 눈치빠르잖아. 오이카와가 대답한다. 쑥쓰러운 듯 웃던 이와이즈미는 좋은 애야라고 짧게 말했다. 그렇겠지 일반적으로 사내녀석이라면 친구의 연애를 알게되면 으레 묻게 되는 질문들이 있다. 이쁘냐거나 얼만큼 진도가 나갔냐거나. 뭐 그런것들. 다른 녀석들이었다면 오이카와도 그렇게 물었을 거다. 하지만 그때 쑥쓰러운 듯 웃는 이와이즈미에게는 그런 궁금증이 들지 않았다.  네가 좋아하는 아이는 어떤 사람일까. 그게 궁금했다. 뭐.. 평범한데. 하고 말을 아끼는 이와이즈미를 자꾸만 조르듯 묻고 또 물었다. 겨우 더듬거리며 그가 했던 말이 오래도록 생각났다.  



- 그냥 자꾸 생각나고 보고 싶은 .. 애야.


그 날 이와쨩 없이 오이카와 혼자 집에 돌아오는 그 길이 왜 그리 길었었던지. 



이와이즈미의 연애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와쨩 차인거야? 가엾어라 흑.. 내가 위로해줄까? 장난스레 허리를 껴안으며 하는 말에도 이와이즈미는 기운 없이 창밖만 바라보곤 했다.  자기- 나로도 위로가 안돼? , 그만해라. 걷어 차 줄 힘도 없다 , 매력 없어. , 이게 진짜.., 사실 이와이즈미가 헤어지길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그날 오이카와는 알았다.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는 이와이즈미를 보는 것보다, 다른 누군가에 의해 상처받는 이와이즈미를 보는 게 더 힘들다는 걸.  



***


- 거의 본능 같아. 

- 표현 특이하네 


그렇게밖에 설명이 안돼., 고향을 떠날쯤 이와이즈미와 공연히 다투고 난 뒤 하나마키와 마츠카와에게 불려나온 자리에서 오이카와는 제 마음을 실토해버리고 말았다. 마츠카와와 하나마키는 생각보다 놀라지 않았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어쩌면. 하는 그들의 말에 헛웃음이 터졌다. 모두들 한번쯤 의심하는 이와이즈미에 대한 오이카와의 마음의 정도를. 유일하게 믿어 의심치 않는 건 딱 한사람. 당사자인 이와이즈미 뿐이었으니까말이다. 서운해. 이와쨩이 그러더라 먼 곳 가는 것도 아니고 보고싶으면 만나면 될 걸. 뭐그리 유난을 떠드냐고. 그게 어떻게 되겠냔 말야.  


- 난 거의 매순간 걔가 보고싶은데.. 생각나는데.

- ... 이 순간 말하긴 그렇지만 좀 소름돋는다. 



내 입 터지게 한건 네들이니까 좀 감당해줄래? 너 온몸을 술로 채우고 말겠다는 듯 잔을 채우는 오이카와의 어깨를 잡으며 하나마키가 고개를 저었다. 언제부터였냐는 하나마키의 질문에 .. 나도 몰라. 대답한다. 그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온 본능이 그를 좇고 있었을 뿐이다. 그정도면 고백이라도 해보지. 하나마키의 안타까운 말에 오이카와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 마츠카와가 쯧, 혀를 찬다.  ..저 오이카와가?, 그게 무슨 뜻이죠 맛층?,  너 겁나서 못할거잖아. 


- .. 정답이네 

- 오이카와 네가 무서워하는 것도 있냐

- 있지. .. 이와쨩이 제일 무서워 


툭, 턱을 괴는 오이카와의 웃음에 하나마키가 인상을 구긴다. 


- 무서워하면서 좋아한다니. 변태인가. 

- 마키는 정말 아직 사랑을 모르는 구나. 

- 이거 진짜 오늘 한대 치고 같이 경찰서 갈까 


참아 참아, 마키의 어깨를 주무르는 마츠카와를 보며 소리내서 웃었던 거 같다. 그래 좀 떨어져보면 .. 괜찮아 질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친구들의 위로에 고개도 끄덕였던 거 같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골목을 걷다 불꺼진 이와이즈미 방문을 올려다 보기도 하고. 웅웅 울리는 이와이즈미의 연락을 일부러도 피하면서. 혼자 연습을 했었다. 이와이즈미 하지메를 보지 않는 / 이와이즈미 하지메를 생각하지 않는 / 이와이즈미 하지메를 그리워하지 않는 / 이와이즈미 하지메를 사랑하지 않는 연습. 



척하다 보면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당사자에게 한번도 들켜본적 없을만큼 연기는 잘하는 편이니까 말이다. 시간은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 해준다. 이와이즈미 곁에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거 같던 질긴 마음까지 길고 얇아지듯 어느새 흔적도 사라진 것같은 추억이 되버린 거 같다. 이와이즈미도, 그리고 오이카와도. 서로 다른 사람과 몇번쯤 연애를 하고. 그 소식을 직접듣거나. 전해듣기도했다. 

그때 이와이즈미에게 고백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만약 어색하게 그와 사이가 벌어지고 안부도 주고받지 못할 사이가 되어버렸더라면 얼마나 후회했을지. 오이카와는 모든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와이즈미와 함께 살기로 했다는 말에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던 하나마키와 마츠카와에게 그래서 숨김 없이 웃을 수 있었다. 이젠 괜찮다니까. 무슨 걱정을 하는 거냐는 듯 오이카와가 손사레를 치며 쾌활하게 웃어보였다. 나 요즘 잘 되가는 사람도 있구 말야. 그런 오이카와를 걱정스레 보며 그래도 뭐.. 본능이라더니- 하나마키가 중얼거린다. 

 

- 맛키? 무슨 나를 짐승으로 봐? 

- 그 땐 거의 눈이 돌아있었지. 


거드는 마츠카와의 말에 다시 오이카와가 웃음을 터트린다. 맞다. 한때는 그랬었다. 


- 푸핫. 우리가 무슨 아직도 사춘기 소년 나이들이야? 이젠 이와쨩 봐도 정말 아무렇지 않아




***


그랬었는데..., 



***



- 뭐라.. 고? 

- 말그대로야. 이달 말에 이사 나간다고. 

- 갑자기 왜? 이와쨩... 무슨 

- 월세는.. 내가 약속 어긴거니까. 계약기간동안은 계속 낼게 

-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갑자기 왜 나가겠다는 거야?! 나한테 불만이라도 있어? 

- .. 그런거 아냐. 



그럼 대체..! 큰 소리가 나가려다 멈칫 맘을 멈춘다. 골이 울린다. 전날 필름이 끊길정도로 술을 마신 탓인지, 아니면 갑작스러운 이와이즈미의 말에 충격을 받아선지. 관자놀이쪽의 맥이 뛰는게 느껴질정도로 열이 오른다. 이와이즈미가 건네 주는 물잔을 뿌리치듯 밀어내며. 뚫어져라 그를 바라보지만. 더이상 할말이 없다는 듯 그의 얼굴을 덤덤하다.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다. 그러보니 언제부턴가 그와 문득 시선을 마주치면 피하던 건 항상 오이카와쪽이었었는데 말이다.  


-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해서 그래 

- 나랑 사는 거 좋다고 했었잖아 

- 그러니까. 네가 문..제가 아니라고. 

- 그럼 그냥 여기 있어  



대체 왜 그런 눈을 하는 지 모르겠다. 지친 듯 외면하던 눈을 들어 이와이즈미가 이제 오이카와를 바라본다. 충혈된 듯 혈관이 붉고 물기가 올라와 노려보는 시선에 심장이 덜컹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허락할 수 없다. 네가 .. 어떻게 그런말을 하냐, 무슨 뜻이야, 다 알면서. 너., 알긴 뭘 알아. 나 몰라그러니까 제대로 말해. 왜 이러는 건지. 그의 양팔을 붙잡고 어느새 다그치고 있는 오이카와는 스스로가 지나치게 반응하고 있다는 게 문득 느껴졌지만. 제어할 수 없었다. 정말로 눈이 돌아버릴 거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이와이즈미. 대체 왜 이러는거야. 몇년만에야 겨우 편하게 네 곁에서 숨쉬는 기분인데 갑자기 반칙이야 울컥. 입술을 깨문 이와이즈미가 더욱 노려보지만 놓아주지않는다. 그냥 그러면 안될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 너를 놓으면 안될 거 같은 느낌.



- .. 놓으라고.  

- .. 싫어 



이와쨩이 그런 표정하니까 더 못놓겠어.. 왜 나한테 말을 못해. 우리 사이에 못할 말이 뭐가 있어. 화났으면 힘든게 있었으면 뭐라도 맘에 들지 않는게 있으면 말하고. 싸우더라도 우리 맞춰가면 되잖아. 그게 친군거잖아. 거기다 너랑 나,우리잖아.., 한참을 말하던 순간 턱- 숨이 막힌다. 멱살이 틀어쥐어진다. 저렇게 화가 난 이와이즈미의 표정은 본 기억이 없다. 둔탁하게 얼굴에 무언가 부딫히는 기분이 들어 오이카와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게 잔뜩 화가난 표정으로 이제는 울고 있는 이와이즈미의 얼굴이라는 걸 알았다. 



윽. 하는 둔통이 느껴지는 입술이, 잔뜩 물어뜯어 부르튼 입술에 짓이겨진다. 입맞춤이라기보다 폭력적인 부딫힘이다. 힘으로 밀고 당기는 듯 몸이 흔들린다 찝찌름한 맛이 입술새로 스민다. 이게 짓이겨 부르튼 입술에서 난 피인건지, 아니면 주륵주륵 쉴 틈도 없이 계속 흐르고 있는 이와이즈미의 감은 눈에서 흐른 눈물맛인지 모르겠다. 감았던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오이카와와 달리 멱살을 쥔채 고개를 틀고 있는 이와이즈미의 속눈썹이 가엾게 떨리고있다. 물기에 젖어 흔들리고 있는 이와쨩의 짧은 속눈썹을 손끝으로 쓸어보고 싶다고 문득 생각한다. 잡은 그의 두팔대신 구부정하게 내쪽으로 기울어진 등을 감싸 안아주고 싶다고 느낀다. 


그저 입술만 마주대고 누른채로 차마 사이를 벌리지도 못하고, 흐느끼는 그의 입술새로 나오는 숨을 나누고 싶은데. 무엇하나 행동으로 옮기기도 전에. 툭. 밀쳐진 채 풀린 다리는 바닥으로 내려앉아 멍청하게도 오이카와는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화끈 거리는 입술을 더듬으며 이와이즈미의 얼굴을 올려본 뒤 멍하니 말을 잊은채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한다. 


- 이제.. 됐냐. 

- 이.. 이와..

- 짐은 나중에 가지러 .. 올게 





***



- 정말.. 이러기야? 


그대로 집을 나간 이와이즈미는 단단히 마음을 먹은 듯 아무런 연락도 받지 않은 채다. 일주일쯤 지난 뒤, 지친 몸을 끌고 집에 들어왔을때 오이카와가 볼 수 있었던 건 텅 빈 이와이즈미의 방뿐이었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치워진 이와이즈미의 텅빈 방구석에서 오이카와는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묻었다. 너는 뭐가 다 이렇게 쉬운 건데.. 원망이 들었다. 아직도 일주일전 까칠하던 그 입술의 감촉이 순간순간 되살아난다. 같이 살기 시작하고 의아하게 느껴지던 이와이즈미의 슬픈 눈빛이 떠올라 마음이 빠듯하게 조인다. 두 팔을 잡고 마구 흔들때 문득 마주치던 시선에서 왜 미리 읽어내리지 못했을까. 



뚝- 손톱끝을 물어뜯으며 오이카와가 햇볕이 가득 들어와 좋다던 이와이즈미의 방 창으로 시선을 둔다. 차라리 그 맘속에 한번 들어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이렇게 그를 생각하며 밤을 지새운 적도 있었다. 전하지 못한 마음을 쌓았다가 와르르 무너뜨리고 말았던 때. 그렇게 홀로 지쳐만 가던 때. 그리고 ..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하아.., 길게 한 숨을 쉬며 오이카와는 제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이와이즈미에 대한 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꼬박 걸린 몇년간의 시간들을 되짚어봤다. 아마도 다시 이와이즈미를 만난다면... 제대로 된 답을 주어야겠지. 하지만 스스로 그 답을 나는 알고 있는 건가. 우습게도 시간이 흐를스록 더 모르겠다. 몇년전이었다면 그저 기쁘게 받아들였을 이 상황이 더 어렵다. 


이와이즈미가, 그러니까 그 이와쨩이 저를 좋아한다, 아주 예전의 자신과 어쩌면같이. 


아니 어쩌면 자신과 같지는 않을거라 오이카와는 고개를 젓는다. 저였다면 이렇게 쉽게 털어내진 못했을거다. 그래 몇년이나 걸리지 않았던가. 이와이즈미에 밤늦게 공연히 전화를 걸었다 그냥 끊은 적도. 몇시간이 걸리던 고향에 가서 그저 이와이즈미의 방, 불빛이 꺼지는 걸 보고 돌아온적도. 이와이즈미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때마다 쿵쿵 떨어지는 마음을 감추려 공연히 실없이 굴었던 적도. 그 긴시간동안 얼마나 제가 이와이즈미 곁을 떠나지 못하고 맴도았던 가를 생각한다. 정말이지 미련스러웠다. 아마도 혼자 앓은 시간이 길어 더 포기가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이와이즈미는 다르지. 그래 그는 비록 입맞춤이라고도 뭐한 박치기를 남기고 떠났지만. 이렇게 깔끔하게 제 곁을 떠나버리지 않았냔 말이다.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이. 지금도 이렇게.. 그를 잃을까봐 영영 두려운 건 자신 뿐인거같다. 생각하며 오이카와는  쓴웃음을 터트렸다. 


만약 친구로 남자고 하면 이와쨩은.., 



***



- 밥은 먹었냐 


마치 어제 만난 사이처럼 이와이즈미가 묻는다. 그 태도가 허무해서 한시간이나 일찍 나와 공연히 빨대만 잡아뜯고 있던 오이카와가 또 피식, 헛웃음을 터트린다. 응 뭐 이와쨩은.. , 거짓말하지마. 아침 원래 안먹는 놈이 , 알면서 왜 묻는데!, 얼굴 꼴을 봐라 안묻게생겼나. 반쪽이 된 오이카와의 얼굴을 보며 핀잔을 주는 이와이즈미의 말에 발끈해져, 이게 누구때문인데..! 답하다 아차 싶어 오이카와가 입을 다문다. 


- 그래 뭐.. 미안하게 됐네 


조금 쓸쓸한 눈빛이 스치지만, 이와이즈미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런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구깃해진 빨대 끝을 다시 만지작거린다. 이와쨩은.. 어떻게 지냈어. 세달동안 지낼만 했어? 쪼륵, 주스빨대를 빨며 이와이즈미가 시선을 깐다. 아니. 단호한 그의 대답에 또 헛웃음이 난다. 왜 못지냈는데.  



- 누가 좀 많이 보고싶어서. 

- 풉, 켁 



아 드러워..., 휴지를 내밀며 이와이즈미가 인상을 구긴다. 와 뻔뻔하게 그런 말을. 급하게 입가 주변을 닦으며 오이카와가 붉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본다. 심드렁한 얼굴로 쿡 코를 찌르며, 너 콧물도 닦아하는 그가 방금 한말을 제대로 들은건가 싶다. 그러면서.. 왜 연락도 피했는데,  쪽팔려서, 뭐가,  질투하는 내꼴이.., 이와쨩.. .. 질투했어? 되묻는 오이카와의 입꼬리가 어쩐지 비죽 올라간다. 삐죽, 입술을 내민 뾰로통한 이와이즈미의 얼굴을 보는데 왜 이리 웃음이 날 거 같은지. 숱하게 긴장하고 정리해서 하려던 말은 다 잊은채 오이카와는 빤히 그를 바라보고만 있다. 다시 보니 태연해보이던 그의 얼굴에 귀끝이나 목 아래는 새빨갛게 달아올라있어서. 이와이즈미 역시 많이 긴장했단 것이 보인다. 그래 너도 어쩌면 쉽지만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드니 조금 안심도 된다. 이와쨩.., 부르자 멈칫하던 시선이 제게로 꽃힌다. 그러니까 우리...말야. 다시.. 같이 살자. 오이카와의 말에 이와이즈미의 인상이 또 험악하게 구겨진다. 하? 뭐?, 이와쨩 없는집 너무 허전해. 이와이이즈미가 욕을 시작하기 전에 얼른 오이카와가 대답한다. 



-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잊었냐? 

- 혼자 쓰기엔 집이 너무 큰 거 같아 

- 내 말 안들리냐 

- 이와쨩이 없으니까... 내가 너무 허전해. 



구깃, 미간을 좁힌채 딱딱해졌던 이와이즈미의 얼굴이 멍해진다. 오이카와의 말에 잠시 놀란 듯하다 크게 숨을 들이마쉰채 고개를 젓는다. 난 못해 오이카와. 그런 식으로 네 곁에 있을 수는 없을 거 같아. 무언가 꾹 눌러 참은 말투로 이와이즈미가 대답한다. 왜! , 우기는 오이카와의 태도에는 질린 다는 듯 혀를 차고 만다. 몇 번을 말해야 하는거야 너 그거 정말 무리한 부탁인거 아냐? 넌 널 좋아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 차갑게 말을 이어가던 이와이즈미가 뚝 말을 멈춘다.  


- 왜 네가 우는데.. 


황당하다는 듯 입을 벌린 이와이즈미의 눈 앞에서 오이카와는 쏟아진 눈물을 멈추지 못한다. 


- 난 그렇게라도 네 옆에 있고 싶은데.. 

-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너. 

- 평생 같이 있고 싶어. 이와쨩. 별 일 없이 네 곁에.. 

- ..... 

- 널 잃을까봐 나 너무 두려워



훌쩍..., 이와쨩 나 미워하지마...하며 웅얼거리는 말을 뱉고 다시 나온 콧물에 이와이즈미가 내민 휴지를 받아들고 오이카와는 슥슥 문질러본다. 준비했던 말들은 하나도 하지 못하고 결론부터 내밀고 말았다. 이와이즈미는 차갑게 얼굴을 굳었던 얼굴을 풀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다시 오이카와가 엉엉 울기 시작하자 침착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 언제부터.. 그런 생각했었는데 

- 킁! 흑, 응?

- 네가 나를 잃을까봐 두렵고, 그저 별일 없이 내 곁에 있고 싶었던 게 언제부터였냐고 물었어. 



빨개진 코 끝을 닦아내고 음.. 시간을 헤아려보다 더듬거리던 오이카와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게 지금 이와이즈미에게 왜 중요한 건진 모르겠지만 대략적으로 헤아려보자면..., ...고등학교 1학년? 대답해본다.


- 그랬었냐 


희미하게 웃는 이와이즈미가 고개를 끄덕인다. 뻗은 이와이즈미의 다정한 손이 스윽 오이카와의 머리칼을 부빈다. 울먹.. 다시 멈췄던 눈물이 왈칵 쏟아질거 같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이와이즈미의 마음이 어쩐지 풀린 모양이다.안심이 되자 더 눈물이 쏟아지고 마는 오이카와다. 야 아무리 내가 너좋다고 코흘리는 얼굴 좀 어떻게 해라. 깬다.. , 질색하는 이와이즈미의 말에 컹- 하고 코를 들이마쉬자 더 정색하는 얼굴로 등을 팡팡 내리친다. 



- 아, 아파 이와쨩 

- 진짜 너 내가 봐주는 줄 알아




***


- 꾸물거리지 좀 마 

- 아, 아 잠깐 이와쨩 기다려! 



베낭 가득 쑤셔넣은 것을 겨우 잠그고 문 앞에서 있는 이와이즈미를 따라 허겁지겁 신발을 신는다. 한심하단 듯 작게 한숨을 쉰 이와이즈미가 툭. 오이카와가 맨 가방을 민다. 야 무슨 소풍가냐. 이 가방 뭔데. 이거?, 이와쨩이랑 나눠먹을 물이랑, 커피랑.. 요 앞에서 이와쨩이 저번에 맛있다고 한 오니기리랑 초코렛이랑.., 오이카와가 손을 꼽아가며 하는 말에 절레 고개를 흔든 이와이즈미다. 등산가쟀지. 무슨 조난 대비를 하랬냐,  아 조난위험있을수도 있는데 텐트를 챙길 걸 그랬나, 그만하고 가자.. 해 중천에 뜬다. 다시 집안에 들어가려는 오이카와의 뒷목을 낚아채며 이와이즈미가 먼저 앞으로 걸어나선다. 



오랫만의 주말에 찌뿌둥하기도 하고, 새해의 기분이 완전히 지나기전에 함께 산에 오르기로 했다. 


해가 뜨는 시간에 맞춰 정상에 오르기로 했기때문에 꽤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선 두 사람이다. 흐암.., 하품하는 오이카와를 보며 이와이즈미가 내가 운전할까 묻지만 절레 고개를 흔든다. 아니이, 어제 이와쨩 늦게까지 야근했잖아. 산 밑에 도착하려면 시간있으니까 한숨 자. 오이카와의 배려하는 말에 이와이즈미는 빵빵한 오이카와의 가방에서 캔커피를 꺼낸다. 찰칵- 소리와 함께 마개를 딴 캔커피를 이와이즈미가 입에 대주자 꼴깍거리며 오이카와가 받아마신다. 슬쩍 오이카와의 턱밑으로 흐른 커피 줄기를 제 손가락 끝으로 문지르며 훔친 이와이즈미가 남은 캔커피를 제 입술에 가져다 댄다. 혼자 또 공연히 얼굴이 발그레해진 오이카와가 히죽 웃으며 말한다. 


- 우리 방금 되게 자연스러웠다 이와쨩 

- 뭐가? 

- 뭔가 오래된 부부 같아 

- 웃기고 있네. 누가 네 놈이랑 결혼해준댔냐 

- 아 진짜 너무해 이와쨩.. 

- 시끄럽고 앞에 보고 똑바로 운전해. 새벽이어도 갑자기 차 나타날수 있다고 

- 잔소리쟁이 

- 나 보지 말고 앞에 보랬지. 



티격태격거리며, 산 아래 주차장에 도착한 두 사람외에도 몇몇 사람들이 등산코스 앞에 서있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완만한 길을 걷다가, 잠시  계곡물이 흐르는 바위에서 목을 축이며 초코릿도 하나 나눠먹다가 걷다보니. 빵빵했던 오이카와의 가방이 어느새 홀쭉해져있었다. 무거운 가방을 매서인지 이와이즈미보다 조금 뒤쳐진 오이카와가 다시 같이가 이와쨩.. 하고 부르자. 바위위에서 아래 풍경을 내려보고 있던 이와이즈미가 척척 다가와 손을 내민다. 그 손을 잡으며 헤에.. 이와쨩 다정해. 오이카와가 이야기하자 손을 잡아끌며 이와이즈미가 혀를 찬다. 



- 좋아하는 사람한테만 다정한 거거든. 



이렇게 문득, 문득 다시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이와이즈미는 더이상 제맘을 숨기지 않는다. 붉어진 제 뺨처럼, 귀끝이 발그레한 이와이즈미의 뒷모습을 보며 오이카와는 문득 그를 품에 꼭 끌어안고 싶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렇게 지치지 않았고 조금 투정부린 거였지만, 먼저 손을 내미는 이와쨩의 다정함을 놓치고 싶지 않으니까. 그에게 매달리듯 잡은 손에 더 힘을주며 따라 오른다. 




시간을 잘 맞춘 거 같다. 둘 모두 조금 호흡이 거칠어질때쯤 정상에 도착했고, 아직 해는 떠오르지 않아 주변은 연한 코발트빛 하늘이었다. 산 아래 사이 붉게 변할때를 기다리며 오이카와는 제 가방에서 보온병을 꺼내고, 바닥에 깐 돗자리로 이와이즈미를 부른다.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던 그는 아직도 먹을 것이 나오는 오이카와의 가방이 신기하다는 듯 뒤적거렸다. 꼭 고양이가 가방안을 뒤지는 거 같아 귀엽다고 생각하며 오이카와가 차가 든 잔을 내밀었다. 저보다 추위를 더 타는 이와이즈미의 볼과 코끝이 얼어있는게 보인다. 



- 이와쨩 이쪽으로 가까이 앉아 

- 괜찮아 

- 빨리 여기 담요도 덮구


엉덩이를 가까이 붙이고 나란히 앉은 이와이즈미에게 담요를 두른다. 아니 먹을건 잔뜩 챙겨왔으면서 왜 담요는 한 장밖에 안가져온거야.., 조금 투덜거린 이와이즈미가 제가 덮은 담요 한쪽을 열며 오이카와에게 손짓을 한다. 사실 이걸 노린거야.. 라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기로 했다. 호륵, 차를 마시며 몸이 녹는지. 으으.. , 소리를 내는 이와이즈미의 옆얼굴을 바라보다 슬쩍 오이카와가 담요 아래로 그의 어깨를 감싸 당긴다. 간지럽게 닿은 부분이 따스하다. 뿌리칠 줄 알았던 이와이즈미는 그저 곁눈질 하듯 오이카와를 슬쩍 바라보고는 그 힘에 자연스레 당겨 기댈 뿐이다. 정상에 있는 사람들은 각자 해를 기다릴 뿐이다. 


- 그러고 보니.. 너랑 같이 산지 일년째네 

- 응.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다. 이와쨩 신기해 

- 그러게. 정말 징그러운 시간이었다 

- 행복하기도 했잖아! 

- 음.. 뭐.



놀리는 말투지만 긍정하듯 이와이즈미가 큭큭 웃는다.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해의 붉은 빛이 주욱 그어진다.  봐, 오이카와 해뜬다, 응..- 손 끝으로 산 사이를 가르키며 이와이즈미가 떠오르는 해를 본다. 오이카와는 그의 손끝 대신 이와이즈미의 얼굴과 눈동자에 반사되어 떠오르는 해를 가만히 바라본다. 오이카와의 시선을 느낀 이와이즈미가 정면을 보던 얼굴을 비켜 돌려 시선을 마주한다. 말없이 얼마쯤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을까. 

온세상이 붉고, 곁에 있는 그의 얼굴도 붉다. 

그리고.. 부풀어오른 마음에서도 붉어진 무언가가 툭. 튀어나오려 한다. 오이카와가 숨결처럼 뱉은 말에 이와이즈미의 눈동자가 커다래진다. 너.. 방금 라고...,



- 사랑해..  .. 이와쨩.



너무 느린 답장이었을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처음 보내는 마음이기도 하다. 오이카와의 고백에 이와이즈미는 미소를 짓다 조금 담요를 당겨왔다. 좀전까지 차를 머금은 서로의 입술은 따뜻하고, 나눠 먹은 초코릿향처럼 달콤했으며, 언 손과 발 끝까지 간지러웠다. 


붉은 해는 이제 완전히 세상 위로 떠올랐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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