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아침입니다."


민석은 방을 나서자마자 식탁 앞에 앉아있는 대건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 잘 잤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죽을상이던 대건의 얼굴이 환해진 상태였다. 영상통화를 생전 처음 하기라도 하는 커플들처럼 밤이 깊도록 속닥대더니 그 이후로는 대건의 얼굴이 밝아졌다. 


"넵. 잘 주무셨습니까?"

"응."


민석은 냉장고를 열어 우유를 꺼냈다. 아침을 바로 먹으러 가면 되는데 괜스레 배가 고팠다. 아직도 성장기 고등학생처럼 허기를 참기 어려웠다.


"저, 형수님은 잘 지내십니까?"


대건이 물잔을 들려다가 민석을 돌아보았다. 갑작스럽게 민석의 입에서 연수의 이름이 나올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흠흠, 민석이 목을 가다듬으며 우유를 부어 꿀꺽댔다.


"잘 지내."


대건의 얼굴을 살피며 빈우유잔을 싱크대에서 헹궈 건조대에 올려두었다.


"깁스는 언제 푸십니까?"

"다음 주에는 풀 수 있다더라고."


다행이었다. 한주만 더 연수를 못 만나면 만날 수 있을 듯했다. 밤마다 속닥이며 전화를 하는 것도 점점 힘들어졌다. 시간이 갈수록 힐긋힐긋 보이는 연수의 새하얀 목덜미와 집안에서 입는 듯한 티셔츠 실루엣 사이로 보이는 가녀린 여체를 볼 때면 아래가 지끈거려 미칠 것만 같았다. 


"다행입니다."


민석은 진심으로 말을 뱉었다. 그러면 이 스파이 혹은 사랑의 큐피드 생활을 그만둘 수 있을 듯했다. 적절한 시간에 맞춰 대건에게 전화를 걸 수 있도록 연락을 하는 일은 은근히 속이 탔고, 눈치가 빠른 대건이 금방 알아차릴 것만 같아 걱정스러웠다.


"참, 민석아."

"예!?"


민석이 놀라 대답을 하는 모습을 보며 대건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아무 것도 아닙니다. 참, 오늘 이대위님 오시는 겁니까?"


민석이 어색하게 말을 돌렸다. 훈련이 이어지고 행사날이 다가올수록 몇 명의 부상인원이 생겨 인원이 충원되어야했고 결국 윤호가 차출되어 진해까지 끌려오게 되었다. 


"응. 점심 때쯤 도착할 거 같다던데."

"이 대위님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그러게."


봄 합동 훈련에 만나고 오랜만이었다. 차출이 된 날 밤 전화가 와서는 어찌나 가기 싫다고 난리를 치는지. 그리고 오늘 아침 다시 연락이 왔다. 여자친구와 함께 내려가니 시간이 괜찮을 때 저녁이나 같이 하자는 이야기였다. 


"준비하고 나가자."

"예."


아무래도 민석의 움직임이 조금 이상했다. 저녁만 먹고 들어오면 거실에서 꾸물대던 녀석이 굳이 방에 들어가서 무언가를 하고 나왔다. 지난번에 나간 날 소개팅이라도 하고 온 것일까. 그렇게 한번 생각하고는 말았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고 있었다. 봄에 연수를 만났고, 여름을 함께 보냈으니 이제 가을, 겨울이 오면 그쯤에는 결혼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잡히고 함께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를 보면 볼수록 얼른 결혼이 하고 싶었다. 다치지만 않았어도 벌써 계획을 잡고도 몇 번은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속이 다 갑갑했다. 


연수 역시 가뿐한 마음으로 출근길에 올랐다. 처음으로 출근길에 대건의 차에 올랐다. 낮게 라디오를 켜고 연수는 콧노래를 흥얼대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매일 밤 일 분만 더, 오분만 더 하며 새벽이 되어야 전화를 끊고 잠을 자도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대건은 진짜로 바빠서 연락을 하지 못한 것이었고, 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애정이 담겨 있었다. 얼마 전부터는 인천맛집에 대하여 찾아보기도 했다. 숙소는 어디를 하면 좋을까 찾아보는 것도 재밌었다. 


"결혼은 천천히 하자고 하는 게 좋겠지..."


연수가 혼잣말을 중얼댔다. 그때는 마음이 급해서 결혼을 하자고 했으나 그는 이렇게 바쁜 사람이었다. 망설이는 이유가 충분하기에 제가 조금 더 기다려주는 게 옳았다. 차를 타고 출근을 하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그의 배려에 감사하며 연수는 학교 안에 주차를 하고서 천천히 메시지를 써 내렸다.


- 대건씨. 저는 출근 잘 했어요. 대건씨 덕분에 편안하게 출근했네요. 좋은 하루 보내요. 늘 몸조심하고요. 


연수가 메시지를 보내면 대건은 늘 삼십 분 안에는 답을 보내주곤했다.


- 연수씨도 좋은 하루 보내요. 


짧은 메시지를 몇 번이고 곱씹으며 연수가 배시시 웃었다. 그가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 


대건은 점심시간 마주한 윤호를 보며 얼굴을 굳혔다. 능글대며 웃는 모습은 그대로였으나 얼굴이 뺀질대다못해 번들거리는 느낌이었다. 식판을 들고 맞은 편에 앉은 윤호는 팀원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서 대건의 식판을 땡땡 쳤다.


"뭐꼬. 동기고 뭐고 없나, 하 대위는."


곁에 앉아있던 민석이 눈짓으로 대건의 어깨를 가리켰다. 그를 바라보던 윤호가 비식 입꼬리를 올렸다.


"다칬다는 소리는 옛날에 들었고, 아직 깁스하고 있으믄 쓰나. 유디티 아이가."


어이고, 맙소사. 대건을 놀리려는 윤호의 말에 반은 웃고 있었고, 반은 심각하게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대건이 다쳐서 손해 본 게 지금 얼마인데 저렇게 장난처럼 넘어가도 되는 걸까. 민석이 심각하게 눈치를 살폈다.


"이제 개안나. 숟가락질은 잘 하네."

"왼쪽 다치셨습니다."


불똥이 커지기 전에 민석이 윤호의 말을 막았다.


"그래가꼬 뭐 하겠나. 지금 아무것도 몬하고 있는 거 아이가."


민석에게 장난스레 눈을 찡긋대는 윤호의 모습에 입을 꾹 다물었다. 


"이 대위. 밥 먹자."


낮은 대건의 말에 윤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얼굴에 그늘이 진 것을 보니 저번에 본 그 아가씨랑도 그른 모양이지. 언제 연애를 좀 할라고 그라노. 윤호가 장난스레 광대를 올리며 밥을 입에 밀어 넣었다. 식판을 전부 비우면서도 윤호는 대건을 힐긋댔다. 배수대에 정리를 하고 식당을 나서는 대건의 오른쪽 어깨를 감싸 안은 윤호가 빙글댔다.


"니 시간 언제 되노."

"훈련 안 빡빡하냐."

"빡빡한데 여자친구랑 같이 왔다이까. 같이 밥이나 묵자. 어차피 내 진해 내려오믄 니랑도 자주 봐야된다 아이가."


늘 차이는 연애만 하던 윤호의 여자친구를 직접 만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실 연애를 하는 모습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적극적으로 보여주겠다는 윤호의 얼굴을 힐긋 보았다.


"진해 내려온다는 이야기 있어?"

"없는데 있을 거 같다. 그러니까 이 훈련에 나를 보냈겠지."


어깨를 털어내며 윤호를 떨어내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귀찮은듯 윤호를 바라보던 대건이 눈썹을 삐죽 올렸다. 그런 뜻이었을까. 


"하여튼 올라가기 전에 함 묵자."


곧 헤어질 것 같다면 만나자고 하지 않을 윤호였다.


"그래."


보여주고 싶을 이유가 있겠지. 대건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근데 니는 뭐 없나."

 

윤호는 장난스레 대건을 보고 있었다.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까. 


"그때 아가씨랑은 쫑이가?"


속삭이는 윤호의 목소리가 장난스러웠다. 갑자기 떠오른 연수의 생각에 더욱 속이 갑갑했다.


"어? 쫑이가."

"나중에 이야기해줄게."

"뭔데. 뭐 있나. 뭔데. 이야기 해봐라."


어깨를 흔들대는 윤호의 힘에 어깨를 빠질 듯 아팠다. 대건이 미간을 찌푸리며 윤호를 작게 밀어냈다.


"뭔데."

"나중에 이야기하자. 훈련 안 가냐."


딱딱하게 굳은 대건의 얼굴을 보며 윤호가 어깨를 안았던 손을 놨다. 그래서 잘됐다는 건지 잘 안 됐다는 건지 알 수가 없는 동기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따 보자."


언제 어디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윤호는 반갑게 인사를 하고는 훈련장으로 떠났다. 차라리 윤호처럼 훈련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몸이 다 굳어버리는 느낌에 찌뿌둥하고 찝찝했다. 그리고 연수가 보고 싶었다. 그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핸드폰을 내려다보던 대건은 다시금 연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저녁 식사를 하자는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 약속이 이루어졌다. 알고 보니 윤호가 훈련을 할 때만 해도 밤마다 힘들어하던 첫사랑의 그녀와 지금 잘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에 식사약속을 거절할 수 없었다. 깁스를 풀고 나서 연수와 함께 할까 생각도 들었으나 얼른 해치우는 게 마음이 편할 듯했다. 그 덕에 민석까지 함께 따라나선 자리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이 대위님 여자친구분은 인천에 계십니까?"

"그러게. 오늘 물어봐."


첫사랑이라는 것 빼고는 전혀 궁금하지도 않았다. 얼굴이 뺀질대는 걸 보니 얼마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안 봐도 뻔했다.


"어! 저기 오십니다."


구불대는 머리를 한 여자와 함께 걸어오는 윤호는 벙글대며 웃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민석이 고개를 숙여 인사 했을 때 윤호의 여자친구는 수줍게 웃어 보였다. 윤호의 말처럼 꼭 잡히지 않을 것마냥 햇살같아 보이기는 했다. 물론 연수가 더욱 보고 싶어진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이지혜라고 해요. 제가 백수라서 윤호 따라왔어요."


또렷한 목소리에 대건은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두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보니 잘 어울려 보였다. 맨질하게 생긴 윤호와 꼭 연예인처럼 화려하게 보이는 여자친구와 잘 어울려 보였다.


"괜한 시간을 뺏은 게 아닌가 죄송스럽네요."

"뭐, 할일 없다, 둘다. 혼자 아이가. 맞재."


떠보는 듯한 윤호의 말을 깡그리 무시한 대건은 예의상 얼굴을 굳혔다. 민석이 눈치를 살피는 모습을 보니 뭔가 있기는 한듯 보이는데 뭐가 그렇게 입이 무거운지. 윤호가 쯧 혀를 찼다. 그 순간 굳은 듯한 민석이 어버버대며 대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연수는 오래간만에 부대 근처에 있는 시내로 향했다. 감자탕이라도 포장을 해서 먹을까 고민을 하던 차였다. 주차장에 주차를 해놓고서 걸어가던 중에 저 멀리서 익숙해 보이는 뒤통수를 보고는 눈을 의심하며 다가서고 있었다. 더 다가갔을 때는 제일 먼저 눈이 마주친 것은 민석이었다. 그리고 맞은편에 선 누가 봐도 눈에 띄는 여자를 보며 연수는 걸음을 뚝 멈췄다. 결국 다른 여자였어.


"혀, 혀, 혀, 형수님."


떨리는 민석의 목소리에 대건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눈을 동그랗게 뜬 연수가 서 있었다.


"형수님...?"


윤호의 목소리에 그제야 대건이 정신을 차렸다. 


"연수씨!"

"다른 여자가 있었어요?"


울먹이는 연수의 목소리에 대건이 답지않게 긴장을 하며 조심스레 다가섰다. 으응? 윤호가 어깨 너머에 선 연수의 얼굴을 보며 먼저 미소를 떠올렸다.


"그때 연수씨네! 맞죠?"


눈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까. 어떻게 지금 이렇게 밝게 인사를 할 수 있을까. 연수가 북받치는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네, 안녕하셨어요."

"아, 연수씨 맞네요."

"아, 예."


연수가 대건을 노려보았다. 큰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었다. 왜 눈물이 맺히나 멍한 머리로 온몸을 굳히고 서 있던 대건이 한 발짝 다가섰다.


"아닙니다."


그제야 대답을 했으나 이미 답은 늦은 듯했다. 이 당황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눈치를 챈 사람은 지혜 하나였다.


"아, 아니에요! 저는 이쪽 여자친구에요."


손사래를 치는 지혜의 말에 연수는 아랫입술을 꾹 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고개를 숙이고 들어올린 순간 깨달았다. 뭔가 엄청 부끄러운 순간이 될뻔했는데 이 아름다운 여성분께서 막아주신 셈이었다. 그러고 보니 맞은 편에 선 여자는 윤호의 곁에 딱 붙어 서 있었다. 그제야 대건의 쇄골 쪽에 있는 흰색의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다쳤어요?"


누가 봐도 눈에 띌 만큼 왼쪽어깨가 부풀어 있었다. 정신이 다 하나도 없었다. 지금 여기서 우연히 마주친 모습은 바쁘다던 모습과 달랐고, 거기다가 다친 모습에 연수가 빠르게 대건에게 다가섰다. 이 상황이 재밌는 듯 지혜는 눈을 끔뻑이고 있었고, 당황한 것은 세 남자뿐이었다.


"이게 뭐예요, 도대체?!"


지혜보다도 작아 보이는 연수가 덩치 큰 대건 앞에 서서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대건은 어찌할 바를 몰라 민석을 힐긋댔고, 연수 역시 민석을 향해 몸을 돌렸다.


"민석씨.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결국 중간에 선 민석만이 발을 동동 구르는 당황스러운 상황이 됐다. 덩치 큰 두 남자가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동동대는 모습이 재밌었으나 여기서 정리를 좀 해줘야했다. 


"저는 이지혜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혹시 여기 하대위님과 만나는 분이시면 같이 식사하러 가요. 지금 식사하러 가는 길이었거든요."


연수는 입을 동그랗게 벌리며 민석과 대건을 번갈아보았다. 


"아, 네. 저는 정연수라고 합니다."


그 와중에도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는 연수를 보며 대건은 안고 싶은 감정은 억지로 눌렀다. 눈물이 그렁대는 모습에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저는 그러니까, 다음에 꼭 한번 봬요. 오늘은 제가 함께 식사는 어려울 것 같아요."


연수는 고개를 꾸벅대며 인사를 건넸다. 지혜가 눈치를 살피며 연수와 대건을 바라보았다. 연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인사를 건네고 뒤를 돌아 걸었다. 


"죄송합니다. 다음에 뵐게요."


대건이 인사를 건네고서 연수의 뒤를 따랐다.


"뭔데. 둘이 아직도 사귀는기가."

"네."

"그러는데 와."

"부상당하신 것을 숨기셨습니다."


아... 윤호와 지혜에게서 동시에 한탄이 흘러나왔다. 그러면 안되지. 그러면 저런 반응이 나올 만 하지. 윤호가 지혜의 어깨를 가볍게 껴안았다.


"그라믄 우리끼리 하대건 놔두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저, 저도 갑니까."

"니는 가야지. 가자."


아쉽지만 두 사람의 시간이 먼저 필요할 저녁이었다. 부상을 숨긴 것은 대건의 성격다웠으나 그를 이해해줄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얼마나 될까. 당연히 섭섭하고 놀랄만했다. 대건은 빠르게 연수의 손을 붙잡았다.


"연수씨."

"놔요."


입을 삐죽대는 연수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있었다. 세상에나. 아무리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해도 다친 것을 비밀로 할 만큼 먼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그의 얼굴이 수척해 보이는 것이 걱정스러웠다. 훈련이 힘들어서 그러려니 티를 내지도 못했는데...


"이야기 좀 해요."

"할 이야기 없어요."


연수는 고집스럽게 걸음을 이었다. 당장은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서러움이 더욱 북받쳤다.


"나는 있어요."

"대건씨가 무슨 할 말이 있어요? 나보다 더 없을 거 같은데요."


냉랭하게 내뱉는 연수가 화가 나서 그렇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손을 뿌리치려는 연수를 더 세게 잡지도 못했다. 그랬다가는 분명 연수에게 상처가 남을 것만 같았다.


"연수씨. 이야기 좀 들어줘요."

"나는 대건씨가 훈련으로 단순히 바쁘다고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렇게 다쳤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등을 돌리고 선 연수가 다시금 울먹이고 있었다. 얼마나 믿음직스럽지 않은 여자친구이기에 다쳤다는 이야기도 꺼내지 못한 걸까.


"미안해요. 걱정할까 봐 말 못했어요."


대건의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얼굴이라서 자꾸만 돌아보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으나 겨우 참아냈다. 마음이 서글펐다.


"연수씨가 많이 걱정할까 봐 말하지 못했어요.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사람들이 많이 지나친다고 해도 연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고 싶었다. 지나치는 이들이 훤칠한 남자의 사과를 들으며 입을 막고 지나쳤다.


"내가 잘못했어요. 얼굴 좀 보여줘요."


그의 목소리마저 들으니 좋았다. 그런데도 이 서글픈 배신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길거리에서 그를 부끄럽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일단 차에 가서 이야기해요."


웅얼대는 연수의 목소리에 그제야 대건의 일그러져있던 얼굴이 조금은 풀렸다. 그래도 차를 잘 타고 다녔구나.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요."


대건은 천천히 연수의 뒤를 따랐다. 늘 장난스럽게 손을 마주 잡아 오거나 안아주던 그녀였는데 얼마나 마음이 상했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걷는 것일까. 걱정스러웠다. 자연스럽게 운전석에 올라탄 연수의 뒤를 이어 조수석에 올라탄 대건이 연수의 얼굴을 보려 애썼다.


"연수씨."

"언제 다친 거에요."


냉랭한 목소리에 여전히 울음기가 묻어났다. 대건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삼주정도 됐어요."


삼주라니... 그러면 어쩐지 눈에 띄게 그가 만남을 피하던 그때였던 모양이었다. 연수가 약하게 대건을 노려보았다.


"삼주요."

"네..."

"왜 말을 하지 않았어요?"

"걱정할까 봐 그랬어요. 정말이에요."


그가 말하는 것을 믿지 않아본 적은 없었다. 분명 대건은 진실만을 말할 사람이니까. 


"당연히 다치는 순간부터 내가 제일 먼저 알았어야한다고 생각하는 게 틀렸어요?"

"아닙니다."

"내가 다쳤는데 대건씨한테 이야기 안 해도 괜찮아요?"

"당연히 안됩니다."


다시금 연수가 눈을 치켜뜨며 대건을 노려보았다. 그건 당연히 안된다는 사람이 삼주나 숨기다니.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어울리지 않게 눈썹을 아래로 내려뜨며 잘못을 비는 대건의 얼굴은 이런 순간에도 잘생긴 게 제일 큰 문제였다. 자세히 본 그의 티셔츠 안에는 깁스가 되어있는 듯 보였다.


"어쩌다 다친 거에요."

"그... 그러니까... 다 같이 모여서 축구를 하다가..."


축구를 하다가 다치셨다고... 연수가 후,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왼쪽 어깨가 불편하게도 보였다. 


"그래서 지금은 좀 어때요."

"한주만 더 있으면 깁스는 풀 수 있어요."


한숨을 다시금 내쉬는 연수를 보며 대건이 눈치를 살폈다. 오래간만에 보는 연수를 여기서 안을 수만 있다면 이곳에서라도 안고 싶었다. 저 얼굴을 붙잡고 입술을 묻고 숨결을 삼키고 싶었다. 하얀 목덜미를 이를 세워 물고 싶었다. 


"그러면 나한테는 언제 이야기하려고 했죠?"


냉랭한 질문에 대건은 다시금 얼굴을 굳혔다.


"다 풀고서..."

"다 풀고 말 안 하려고 했군요."


대건이 난처한듯 얼굴을 굳혔다. 하아... 이 남자를 어떡하면 좋을까. 그런데도 얼굴을 보니 스르르 풀리는 이 마음과 들어차는 그에 대한 걱정은 또 어쩌면 좋을까. 


"그러면 다 괜찮대요?"


냉랭하던 목소리가 조금은 풀려있었다. 대건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주만 지나면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대요."


물론 대건의 바람이기도 했다. 작게 한숨을 내쉬는 연수를 보며 대건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연수와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살 것만 같았다. 물론 약간은 동정심을 사기도 했으니 그것 역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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