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

 


과거로 추락하는 너를 보면서, 잘 됐다는 생각을 했었어. 네가 기억이 옅어져 갈수록 나는 네 옆에서 가까이 있을 수 있었으니까. 오이카와는 뼈대가 드러난 스가와라의 하얀 손목을 매만졌다. 스가와라의 숨소리는 얇아서 오이카와는 숨소리가 닿으면 스가와라의 숨이 부서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가와라는 1년 전부터 서서히 기억이 거꾸로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원인은 알츠하이머라고 의사가 넌지시 던지긴 했었다, 앞으로 스가와라 코우시씨는 과거로 추락하다가 결국에는 자신도 모르는 무지의 암흑에 먹힐 것이라고.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와 같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함께 다닌 친구였다.스가와라는 그저 같은 동창인 개념으로 생각했고, 오이카와는 우연을 가장한 노력으로 친구관계를 유지했었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 곁에 머물기 위해 같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일부러 지원했었다. 덕분에 부단히 공부도 열심히 했었다. 스가와라는 원예조경 쪽으로 대학을 들어갔었고, 오이카와는 원예조경에는 영 취미가 없어 원예조경 대신 사회복지학부에 턱걸이로 간신히 들어갔다. 졸업 후에는 스가와라가 식물원에 취직 했고, 오이카와는 대충 학점 때려잡기 식으로 했던 사회복지공부는 지방 공무원이 되는 데는 도움이 되었으나, 스가와라와 만나지 못하는 분야라 안타까웠다. 오이카와는 가끔씩 스가와라가 있는 식물원에 간식을 들고 찾아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으나, 스가와라는 업무를 보느라 오이카와 긴 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눌만한 틈이 없었다. 간혹, 업무가 느슨해질 때에 스가와라가 전화를 주기는 했었다. 저번 주에 가져왔던 간식 카리에 상이랑 같이 잘 나누어 먹었다. 라던가,

식물원 안에 연구소에서 연구하는 야생화나 개량품종에 대한 이야기 라던가.

오이카와는 그런 시시껄렁한 주제를 떠들어 대는 스가와라의 다정한 목소리가 무척 달콤하고 보드라워서 눈꺼풀은 나른하게 반쯤 내린 채로 감상했었다.

 

스가와라 코우시의 기억이 거꾸로 걷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오이카와는 이대로 스가와라의 친구로써 지내도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스가와라가 이상해진 건 작년 여름부터였다. 스가와라가 잠깐 맥주 한 캔 더 사온다며, 넉살좋은 미소를 지으며, 후드티를 입고 나갔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를 않아서 오이카와는 휴대폰을 꺼내 스가와라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스가와라가 전화를 받지 않아 소리샘으로 연결된다는 음성이 흘러나오자 오이카와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오이카와는 서둘러 현관을 박차고 스가와라가 자주 가는 근처 마트로 향했다. 스가와라를 발견한 오이카와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스가와라는 초점없는 눈빛으로 코너 모퉁이에서 멈추어 혼란스러운 듯이 두리번거리다가, 아, 맥주를 사려고 했지 하며 다시 음료수 코너로 향했다. 스가와라 코우시가 든 장바구니에는 캔 맥주가 가득 차다 못해 넘쳐서 굴러 떨어졌다.

 

스가와라?

 

오이카와가 불렀을 때, 스가와라는 오이카와? 하고 해맑은 미소를 지을 뿐 자신이 무슨 짓을 반복하는 지 까마득히 모르는 듯 했다. 오이카와가 주변에 굴러다니는 맥주 캔을 진열대에 하나하나 다시 집어넣자, 스가와라는 다시 모퉁이를 돌아서 해매이다가 다시 오이카와가 있는 음료수 코너로 돌아왔다. 다시 어, 오이카와. 라고 반복했다. 그것도 열 번 넘게. 오이카와는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다. 스가와라는 가끔 개그랍시고, 이상한 행동을 하긴 했었다. 개그 코드는 맞지는 않았으나 스가와라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사랑스럽고 귀여워서

그 개그에 장단을 맞춰주긴 했었다. 오이카와는 그 날 스가와라가 하는 행동을 보며 장난이 아님을 알아챈 건 15분 정도 지난 뒤였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를 옆에 앉혀 놓은 채로, 자기가 계산하겠다며 말하고, 스가와라의 반복된 이상행동을 일단 말렸다. 오이카와는 급히 차를 몰고 스가와라를 대학병원으로 끌고 갔었다. 그로부터 일년이 지났다. 이제 스가와라는 자기 입으로 음식을 씹지도 못하고, 몸도 움직이지도 못한다. 2개월 전 까지만 해도 몸은 움직였다. 익숙한 얼굴 이라면서 웃으며 가끔 찾아올 때마다 책을 읽어달라고 했다. 여우와 별이라는 동화책이었는데, 오십 번은 넘게 읽어서 동화책의 대사가 머릿속에서 맴돌 정도였다. 스가와라는 날이 지나갈수록 정신적 나이가 퇴화하는 듯했다. 5개월 전인가,그 때는 침대시트에서 소변과 대변을 본 이후로는 성인용 기저귀를 차고 다닌다.가끔 기저귀를 갈 때, 오이카와의 손을 꼭 잡고 고개를 돌리며, 사탕 하고 칭얼거렸었다. 오이카와가 기저귀를 갈고 스가와라의 바지를 입히고 나서 스가와라 입 안에 사탕 하나 물려주었다. 스가와라가 고마움의 표시로 해맑게 웃으며 꽉 안을 때,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의 하얗고 가는 목선에 얼굴을 파묻고 체향을 코로 흠뻑 들이마시며 범하고 싶다는 욕망이 충동질하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2개월 전에 스가와라를 목욕시키다가 문득 억울하고 화가 나서 스가와라의 때를 밀다가 등을 세게 내리치며,

내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고, 내가 사랑해서 너와 같이 붙어 있었던 시간도 네 혼자 잊어버릴 텐데. 늘 나는 너만을 바라보다가 가슴이 멎고. 나도 차라리 너처럼 잊어버리고 속 편해지고 싶다. 씨발. 이라고 나지막하게 내뱉으며 흐느낄 때도 있었다.

 

모두가 과거형인건 이제 스가와라는 웃지도 삼키지도 못하고 온 몸이 굳은 채로 온 몸으로 안녕이라고 잔혹하게 통보하고 있기 때문이라. 스가와라 코우시는 울먹이는 눈으로 오이카와를 눈에 가득 담으며, 영원히 작별해버렸기 때문이었다.오이카와의 짝사랑은 그해 벚꽃과 함께 사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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