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풀었던 썰의 분위기를 너무 사랑해서 길게 써보려고 합니다. (불안한 드랍맨)

  나만 좋아하는 글 쓰는 건 오랜만이라 재미 없으실 수도 있어요... 미리 죄송합니다.

  원 트윗은 여기 ▶ https://twitter.com/1__106/status/991591825818320897



향수


송현우 X 강우빈



  우빈은 한 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덜덜 떨리는 손아귀 안에는 문자 메시지 한 통만이 떠 있는 휴대폰 화면만이 떠 있었다. 그는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 마냥 두 손에 꼭 붙들고 버스 시간을 살피다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냅다 택시마저 잡아버렸다. 마침표로 가주세요. 네, 네, 그 벽돌 건물이요. 최대한 빠르게 부탁드려요. 네, 중요한 일이에요. 반짝, 휴대폰이 얕게 진동하며 새 메시지가 왔음을 알렸다.

  [ 언제쯤 도착할 것 같아요? ] 16 : 32

  우빈은 그 메시지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정신을 차린 듯 황급히 십 분 안에 도착하겠다는 메시지를 남기곤 조금 전에 왔었던, 위의 메시지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몇 번을 보아도 벅찰 내용이었다.

  [ 강우빈 씨 맞나요? ○○대학교 4학년. ]  16 : 13

16 : 17 [ 맞습니다. 누구신가요? ]

  [ 마침표 직원 구인 했었잖아요. ] 16 : 19

  [ 그거 합격 하셨거든요. 혼자. ] 16:20

  [ 미안해요. 전화로 알리는 게 예의인데,

    대학생이라고 해서 수업 중일까봐. ] 16 : 21

16 : 21 [ 아닙니다 아니요 시간 많습니다 ]

16 : 21 [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

  도서관에서 졸업 과제 중이었던 그는 뒤로 넘어갈 뻔 했었다. 덜그럭대는 손으로 문장 부호도 생략한 채 뛰어나오며 답장했던 그 때의 기분은 지금까지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무려 '마침표'의 직원이 된 것이었다. 알바도, 임시도 아닌, 진짜 직원. 제 나이대에서 받을 수 있는 정도보다 훨씬 더 높은 수당도 기뻤지만, 우빈은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자체에 감격했다. 엄청난 경쟁률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지원한 것은, 자신이 있었던 게 아니라 너무도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열 아홉 끝물, 가장 불안정한 시기에 가장 투박한 꿈을 안겨준 눈부신 디자인들은 그의 힘겨웠던 나날을 이겨내게 해준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 꿈을 눈앞에서 만나고 제일 처음으로 어루만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그것도 고작 3년 반 만에. 기적같은 일이었다.

본래 이름은 '.'이지만, 공공연하게 '마침표'라고 불리고 있는 이 브랜드는 전적이 깨끗한, 실력 좋은 신인 가구 장인이 손수 제작하고 마찬가지로 마케팅에 아주 뛰어난 젊은 사장이 판매하는 애매한 1인 창업 브랜드 형태로써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래, 입시 때문에 한창 폐인처럼 살던 때였지. 우빈은 자신이 사랑하게 된 그 때를 다시금 떠올려냈다.

  늦가을, 폭발적으로 늘어난 인기에 가구 계열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특히 자신과 같은 가구디자인 쪽의 사람들에게는 워너비 케이스가 된 '마침표' 가 시작과 동시에 큰 성공을 이뤄낼 수 있었던 건 사실 두 가지 덕분이었다. 실용적이고 독보적인 디자인과, 하나 하나 손수 다른 원목으로 제작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가구'라고 내걸린 광고. 장인의 실력과 사장의 마케팅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셈이었다. 매입한 것이 아닌, 직접 땅을 사 위의 것을 치우고 오직 가구에 초점을 맞춰 지어졌다고 하는 건물은 온통 벽돌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옆면 끄트머리에 좁고 길게 나 있는 창마저 블라인드가 쳐져있어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습도와 햇빛에 예민하다보니, 철저하게 신경쓴 것 같았다. 확실히 쾌적한 환경을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문제는 그런 축소적인 마케팅 형태에 도박을 걸었다는 것이었다. 시각적인 부분은 사람들에게 큰 몫을 한다. 그리고 웬만한 사람들은 무엇을 파는지도 모르는 건물에 섣불리 귀찮음을 감당하고 들어가지 않는다.

  상당히 큰 리스크를 감당해야만 했을 것이었음에도 사장은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다. 자기는 질 도박은 하지 않는다나. 그러면 이 모든 것을 확신하고 일을 크게 벌려 놓았다는 것인데, 그것이 얼마나 사람들의 노력을 무색하게 한 무심한 마케팅이었냐면, 간판이라고는 들어오는 문 옆에 작게 점 하나만이 찍혀있을 뿐이어서, 오죽하면 사람들이 무슨 건물인지도 몰랐다느니, 심지어는 돈 벌기 싫어 보인다는 말마저 할 지경이었다. 당연하게도 말만 그랬지, 매장 안은 항상 사람들로 가득했다. 초기에 재고가 매니아층들에게 불티나게 팔려나간 탓에 한동안 전시장처럼 여태까지 공개된 가구들의 디자인과 활용 방법 등이 쓰여진 책자들만이 비치되어 있었는데도 발길은 끊길 줄을 몰랐다. 제대로 된 홈페이지도 없고, 직원이 없으니 입고 상황도 알 수가 없고, 그나마 정보를 뽑아낼 수 있는 출처는 작업 중에 있는 장인 본인과 사장 뿐인데, 이 가구 장인은 개인 SNS도 없을 뿐더러 어느 추가적인 정보마저 공개하지 않겠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얼굴도, 나이도, 출신도 전부 다. 가장 최근에 사람들이 매장 내에서 전화 중이던 사장, 케빈으로부터 뜯어내다시피 한 정보는 이름이 '현우'라는 것 뿐이었다. 고작 흔한 이름 두 글자로 무언가를 더 찾아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사람들은 쉬지 않고 이 돈 벌기 싫어보이는 판매에 억울함을 쏟아내면서도 항상 매장에 들려 재고 상황을 확인하고 나갔다. 그만큼 그들을 사로잡은 매력이 너무도 확고했다는 뜻이었다. 가구의 그 어느 부분에서도 본질의 까끌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오랫동안 다듬은 흔적, 곱던 투박하던 무늬만큼은 건드리지 않고 작업해 더욱 그 섬세한 손길이 묻어나는 둥근 모서리 하나 하나가, 감정에 메말라있는 지금의 세상 사람들에게 어떠한 울분을 심어 열매 맺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리도 별 것 아닌 것 같은 가구 하나에 매달리게 만들었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던 젊은 사장 역시 신비주의 가구 장인만큼이나 여러 군데에서 동업 제의를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고 알려졌다.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 안 가는 것들 투성이였다.

  "학생, 도착했는데?"

  "아, 아, 감사합니다."

  회상을 황급히 끝내고 택시에서 내린 우빈은 건물 앞에서 갈팡질팡했다. 아까 잠깐 했던 전화에서는 그냥 오라고만 했었는데. 들어가는 건가? 앞에서 기다릴까? 같은 고민을 열 번쯤 했을까, 굳게 닫힌 문이 열리고 정장을 차려입은 검은 머리의 남자가 살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강우빈 씨 맞죠? 들어와요. 우빈은 고개를 푹 숙여 인사하고는 조금 긴장한 발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항상 사람으로 가득해 들어가지는 못하고 밖에서 슬쩍 훔쳐보던 게 다였는데, 내부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따뜻하고 옅은 조명으로 가득해서 순식간에 편안함을 가져다주었다. 좋게 말하면 깔끔하고, 나쁘게 말하면 단촐한 안은 가지고 갈 수 있는 팜플렛과 디자인 설계도 일부, 아주 작은 디테일까지도 명시어 있는 설명문이 다였다. 오늘도 다 팔렸나 봐요. 우빈의 중얼거림에 케빈은 웃으며 답했다. 항상 그랬듯이요.

  "오늘은 미리 영업 일찍 끝냈으니까 둘러봐도 괜찮아요."

  "...혹시 저 때문에 일찍 마치신 건가요?"

  "내일부터 우리 식구가 될 사람인데, 이 정도 배려는 해 줘야죠."

  우빈은 눈을 반짝이며 그 작은 체구로 매장 전체를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온통 나무 냄새로 가득한 큰 매장 안이, 사방이 제 롤모델의 작품으로 채워질 것이라는 게, 하나같이 너무 좋았던 탓이었다. 그 어떤 힘듦도 다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다시금 행복해 눈물이 나려는 것을 꾹 참았다. 사장님이 식구랬어. 그제서야 저를 따라오는 시선을 느낀 우빈은 머쓱하게 웃으며 케빈을 바라보았다. 죄송해요. 너무 좋아서 그만.

  "아니요, 괜찮아요. 그냥. 보물 보듯이 하는 게 귀여워서."

  "사실, 아직도 잘 안 믿겨요. 여기서 일한다는 거요."

  "그렇게나 이 기회가 우빈 씨에게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거죠."

  뿌듯하네~ 우빈은 그 사람 좋은 미소를 따라 작게 웃었다. 네, 많이요. 그리고 얼마 동안은 의례적인 대화가 오갔다. 가구에 대해ㅡ애초에 그의 전공이기도 하니까ㅡ 잘 파악하고 있는 그였기에 관리는 그닥 문제 없을 거라 여겼고, 판매될 가구들에 대한 설명이나 손님맞이 등은 차차 배워나가기로 합의를 보던 중에, 케빈이 엇, 하더니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직 졸업 안 하지 않았어요?

  "아, 네."

  "지금 시험기간 아니에요?"

  "네, 한 주 남았어요."

  "졸작도 준비해야 할 거고."

  "그... 그렇죠."

  "전시회도 있을 텐데?"

  "...맞아요."

  안되겠다. 졸업 전시회까지 끝나면 제대로 일 시작하는 걸로 하죠. 케빈은 장난스레 웃으며 미간을 짚는 시늉을 하곤 당장이라도 일을 위해 학교를 때려치울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는 우빈을 붙잡고 설득해 한 달쯤 후부터 계약하는 것으로, 그 전까지는 정기적으로 찾아와 준비 단계를 거치는 걸로 합의를 봤다. 일 때문에 직원의 커리어를 망칠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사실 직원을 구한 건 사장 치고는 어렸던 그에게 맞는 말동무가 필요했기 때문도 있었다. 프로페셔널한 것보다는 아직 어린 티를 다 못 벗은, 하지만 자질구레한 일을 차질 없이 센스 있게 해낼 수 있는 젊은 말동무.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때 묻지 않은 성격이면 현우도 불편해하지 않을 거고.'

  그래, 일은 천천히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것이었다. 우빈을 매장 밖으로 이끈 케빈은 얼른 시험 공부나 하라며 그의 등을 떠밀고는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그를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우빈의 입에서 나온 말에 조금 곤란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저, 그, 이 가구들을 만드시는 분도 곧 만나볼 수 있나요?"

  "...음, 미안해요. 아직은 조금 힘들겠는데."

  "아, 아뇨. 죄송해요. 당연히 안 되겠죠. 무례한 질문을 했네요."

  "걱정 말아요. 같이 일하는 이상, 꼭 보게 될 테니까요. 분명 우빈 씨를 마음에 들어할 거예요."

  하는 짓만 보면 삶에 아무 미련도 없어 보이겠지만, 외로움을 많이 타거든요. 우빈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감사하다고 고개를 꾸벅인 후 버스정류장 쪽으로 뛰어갔다. 케빈은 미묘한 웃음을 띄며 그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휴대폰을 들어 문자를 남겼다.

  [ 괜찮은 것 같아? ] 17 : 31

  답신은 간단하게 도착했다.

17 : 32 [ 아직 잘 모르겠는데. ]

  "나쁘지는 않았다는 거네."

  케빈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웃으며 말했다. 그제서야 그 알 수 없는 문자의 발신인은 모자를 푹 눌러쓴 채로 건물 옆에서 조용히 나타나는 것이었다. 성격은 되게 차분한 것 같더라. 자기 할 일에 열정도 있고. 그는 케빈의 말을 들으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기억은 별로 나지 않았다. 거리를 두고 지켜본 탓도 있었고, 애초에 흥미도 없는데 끌려나오다시피 했던 거였으니까. 그의 머릿속에 기억된 우빈의 모습이라곤 작은 체구와 동그란 뒤통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제 친구가 사람 고르는 눈이 좋다는 건 알고 있었다.

  "되게 예민하게 굴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네."

  "알아서 잘 골랐겠지. 그런 것까지 일일히 신경 쓰면 지쳐."

  "그래서 아예 신경을 끄시겠다? 그건 그거대로 아닌 것 같아 보이던데요~"

  장난칠 거면 들어간다. 그의 귀찮은 말투에 케빈은 혀를 찼다. 정 없기는.

  "그 애 졸업 작품, 안 볼 거야?"

  "안 봐."

  "가까운 곳이잖아. 진짜 안 봐?"

  "할 일이 산더미야."

  "그럼 이거 가지고만이라도 있어. 한 달 후더라."

  탁. 얼떨결에 날아온 책자를 잡아챈 그는 마지못해 주머니에 그것을 찔러 넣더니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케빈은 소리 없이 웃었다. 분명히 갈 거다. 작품 하나 하나를 마음에 담고 오겠지. 뻔한 시나리오였다. 뻔한 만큼 그가 가장 원했던 전개이기도 했고.

  다니는 곳에 흔적 하나 남기지 않는 놈.

  세상 어디에도 마음 둘 곳 하나 없는 놈.

  그는 자유를 위해 스스로를 속박해버린 그의 친구를 정의 내리는 법도, 자극하는 법도 잘 알고 있었다.

  유능하고 뛰어난 인재들이 참 많이 지원했다. 그 많은 이력서들을 하나 하나 훑어내리면서 감탄이 나온 것만 수십 개는 되었다. 그 계열에 오래 정착해 있었던 사람들을 비롯해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업 수완이나 아이디어가 필요한 젊은 천재들과, 마케팅 분야에서 한 입김 하는 이들까지. 쟁쟁한 경쟁이 될 것을 예상했지만, 케빈의 선택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조금 억지스러울 정도로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그리 유명하지 않은 미대의 가구디자인과 졸업을 앞둔, 전공 관련 스펙 하나 없는 애 한 명. 미쳤다고 하겠지. 자존심 상해하거나 억울해할 이들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근데 그래서 뭐? 케빈은 이 일을 시작한 이래로 여태껏 한 번도 실패해본 적이 없다. 그러니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이것은 흘러가는 삶에 무기력해진 제 친구를 위해 일부러 감수한 일이기도 했다.

  "일부러 네 후배로 뽑아줬는데 이렇게 시큰둥하게 나오기냐, 진짜."

  그는 뒷머리를 긁적였지만 한 순간 미소를 띄웠다. 자그마치 십 년 전 일이다. 그리고 그 중 첫 삼 년. 네가 행복에 가득 차있었던 찰나. 오직 꿈을 위해 살아갔던 시간. 처음 만난 그 날부터, 케빈은 이미 그의 속에서 어떤 인재성을 보았던 것 같다. 그래서 어쩌면 지금 그가 이리도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그 시절의 그를 다시 보고 싶은 이유에서일지도 모른다. 그가 지금 이루려는 것들은 무기력과 암울을 뒤집어쓴 지금의 현우에게도 반짝거리던 때가 있었다는 걸 누구에게라도 증명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결정이었다.

  무슨, 육아 계획이냐? 케빈은 실소를 내뱉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먼 곳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곳에서 지냈던 일 년 반 동안, 네가 얼마나 빛을 발했는지 아니까.

  그래서 그 추억에 다시금 잠겨 보라고. 네 후배를 통해 다시 이뤄 보라고.

  네가 가질 수 없었던 것을, 그 애는 투박하더라도 품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숨 막히는 다정이 얼마나 눈물겨운지, 동경한다는 것이 얼마나 빛나는 일인지,

  네가 다시 느껴보고 더 많은 감정을 네 작품에 쏟아 보았으면 하니까.

  네가 정적을 담는다면, 그 애는 음악을 담게 될 거야.

  기대해, 송현우.

  내 말은 틀린 적이 없어.

  세상이 그 애를 사랑하게 될 거야.

  바로 너처럼.


@1__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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